연중 제 21 주일
19. 김창석 신부(다)/ 31 20. 임언기 신부(다)/ 32
21. 백명기 신부(다)/ 34 22. 함세웅 신부(다)/ 36
23. 김신호 신부(다)/ 37 24. 강길웅 신부(다)/ 39
25. 강영구 신부(다)/ 41 26. 하늘나라에서(다)/ 44
19. 연중 제21주일 루가 13,22-30 (다) 또 다른 공해(公害)
김창석 신부
오래 전에 들은 이야기이다. 어느 노인 신부가 죽게 되어 동료 신부를 불러다가 마지막 병자 성사를 받게 되었다. 모든 예식 절차가 끝난 후에 그 노인 신부는 초조하게 “내가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하고 말했다.
그 노인 신부는 일생 동안 아무런 큰 사고 없이 무난히 신부 생활을 해왔는데도 불구하고 임종시에 자기 구원에 대하여 번민을 하는 것을 보고, 지켜보던 많은 이들이 안타깝게 생각했다.
왜 그 노인 신부는 자기 구원에 대해서 그다지도 고민하였을까? 그 이유는 그 노인 신부뿐 아니라 많은 신자들이 받은 그릇된 교육 때문이다. 엄격한 종교 교육은 신앙을 즐거운 것이 아니라 심각한 것으로 만들었고, 즐거움이나 희망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게 했다.
우리나라에 처음 왔던 프랑스 선교사들은 엄격주의자들이어서, 여자는 사탄으로 보아야 하고 소매를 걷어 올려 팔을 드러내는 것조차 음란한 죄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걸핏하면 지옥에 간다고 엄포를 놓았다 지옥에 가는 사람들은 폭포수처럼 많고 천국에 가는 사람들은 가랑비처럼 드물다고 가르쳤다. 만일 그들이 가르친 것이 사실이라면 하느님이 무한히 자비로우시다는 교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루가 복음> 13장 22절에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에게 “선생님,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안 되겠지요?” 라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예수는 “사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라” 하고 대답했다. 이 ‘좁은 문’이 문제인데, 요즈음 대학 입시의 좁은 문을 말하는 것인가? 또는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과 같은 것인가? 여기서 말하는 ‘좁다’라는 뜻은 드물다는 뜻이 아닐 것이다.
나는 누가 뭐래도 지옥에 가는 이들보다 천국에 가는 이들이 훨씬 더 많다고 굳게 믿는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근거는 <성경>이다. <루가 복음> 15장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에게 세리들과 죄인들과 창녀들하고만 사귄다고 비난했을 때, 예수는 양 1백 마리 중 한 마리를 잃었다면 아흔 아홉 마리는 들판에 그대로 둔 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겠다고 단언했다.
그 외에 은전 열 닢 중 한 닢을 잃고 찾아 나서는 여자의 비유와, 방탕한 생활로 가산을 탕진하고 거지꼴이 되어 돌아온 둘째아들 탕자를 얼싸안고 반기는 아버지의 이야기 등은 죄인들이 쉽게 지옥에 떨어지는 게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암시해 준다. 그리고 <요한 복음> 8장에 간음하다가 들켜서 유대인들에게 돌로 맞아죽을 뻔한 여자를 예수가 용서해 주고 구해 준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프랑스의 성인 비안네 신부의 에피소드 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방탕 생활을 하다가 철교에서 투신 자살한 남편을 둔 한 여인이 실의에 빠져 있다가 성 비안네 신부를 찾아와서 상담을 청한 일이 있었다. 성 비안네 신부는 그의 남편이 철교에서 물로 떨어지는 순간에 참회를 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말해 주었다.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죽음을 앞두고 회개를 하지 않는 이들은 매우 드물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지는 이들은 매우 드물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반대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지게 된 것은 종교인들의 공해가 얼마나 큰가를 시사해 주는 것이다.
하이네는 “하느님은 물로 사람들은 쉽게 용서하신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20. 연중 제21주일 루가 13,22-30 (다)
임언기 신부
“농부가 밭에서 열심히 땀을 흘리며 일한다 하더라도 하늘에서 햇빛과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한 하늘에서 아무리 햇빛과 비가 내려도 인간이 자기가 심은 것을 잘 관리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멸면 지하수도 파고 관개용수도 대고 농작물이 병충해를 입지 않도록 적당히 약도 뿌려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육신 생명을 위해 곡식을 얻으려면 자연의 섭리에 잘 순응하면서 열매를 맺도록 인간 편에서 협력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상의 비유를 우리 영신 생활에 적용해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하늘에서 내리는 햇빛과 비는 하느님의 은총을 뜻하고, 밭에 가서 노동해야 하는 인간의 피땀은 그 은총에 협력하는 인간의 마음 자세를 의미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의 매 순간에 항상 여러 가지 모습으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듣는 당신 생명의 말씀과 사랑의 성사를 통하여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과 역사의 사건을 통해서 끊임없이 우리의 양심에 구원의 길을 속삭여 주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가 있기 때문에 그분의 사랑에 기쁘게 응답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를 막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스스로 자유를 남용하고서는 일의 결과가 좋지 않을 때 하느님을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게다가 왜 하느님이 인간에게 자유를 주셔서 이토록 고통을 겪게 하는가? 하고 하느님의 공의를 의심스러워합니다. 인간이 자유가 없다면 죄는 짓지 않겠지만 하느님의 로봇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유는 당신을 위하여 창조된 인간이 당신께 자유로운 인격적 응답으로 당신 사랑과 영광, 즉 천주 생명에 참여키를 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가 이렇게 긴요하고 소중하다면, 하느님의 자유는 더 말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인간이 하느님의 자유를 간섭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개인적 차원이든 공동체적 차원이든 인간 편에서 잘못이 있는데도 좋으신 하느님을 자기의 노리개로 삼든지 인간의 아쉬움이나 해결해 주는 도깨비 방망이를 든 채무자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조작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지 성서에 계시된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성서에 계시된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영혼들이 정신적이든 물리적이든 고통과 시련을 통해 좁은 문으로 당신께 가까이 오기를 원하십니다. 다시 말해 세상의 가치와 하느님 나라의 가치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이 시대의 구원을 위해 인류 구원을 가져다 주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흡수하는 삶을 사는 것이 보이지 않는 주님 앞에 인정을 받는 가치로운 삶이 됩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이 무상으로 주신 사랑의 선물인 자유에 대해 못 마땅해 하는 인간의 처사는 마치 옹기그릇이 옹기장이에게 나를 왜 이따위로 만들었는가? 하고 대드는 것과 같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주께, 종이 주인에게, 허무로부터 존재와 생명을 부여받는 자녀가 참 부모에게 그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인간이 가진 자유는 하느님의 자유처럼 절대 무한의 자유가 아니라 제한된 자유입니다. 불완전하고 나약한 인간 조건과 피조성을 지닌 인간의 자유는 하느님 혹은 그분의 뜻인 목적을 변경시킬 수 있는 자유가 가니라 그 목적을 달성하는데 필요한 여러 수단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제한된 자유입니다. 따라서 우리를 부르신 하느님의 목적을 알아 하느님의 절대무한의 자유에 인간의 자유를 종속시킬 때 참된 자유의 가치를 실현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수난 받으실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도중에 구원에 이르는 좁은 문에 대해 역설하십니다. 그 당신 유다인들이나 오늘날 개신교나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의 관심사인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에 대한 관심은 주님의 심판대전에 영생을 보증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당신과의 인간적 친분 관계나 돈이나 지식, 권력, 지위, 신분도 주님 잎에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합니다. 주님의 심판 기준과 구원의 가능성은 입술이나 머리만의 형식적 신앙을 청산하고 얼마나 진실되게 사랑이신 주님의 마음과 인격을 닮으려고 노력했는가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한번 밖에 없는 소중한 삶, 멸망과 죽음의 넓은 문을 택하지 말고, 구원과 생명의 좁은 문을 택하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된 자유인이 되도록 합시다.
21. 연중 제21주일 루가 13,22-30 (다) 더하기 인생
백명기 신부
“신부님 입에서는 언제나 하느님 사랑이나, 인간 사랑이니 말씀만 하시니 한 마디 말씀으로 ‘인간의 사랑’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 말은 어느 소녀의 사랑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당돌하고도 진지한 물음이었습니다. 유행가 가사처럼 사랑이란 멀고도 가까운 것이며, 넓고도 길고 높은 것이라고 그렇게 간단히 노래부를 수만도 없는 것입니다.
또한 사랑이란 네모가 났는지, 세모가 났는지 둥근지도 모르지만 끝이 없고 한이 없다던 옛 사람들의 말처럼 참된 사랑을 인간의 한정된 한 마디 말로써 나타낼 수가 있겠습니까? 한 참 망설이던 나는 묻고 있는 소녀 뒷벽에 걸린 십자가를 바라보며 사랑이 저 십자가가 표하는 끊임없는 “더하기 표”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부부애는 홀로 있던 한 인간이 혼인성사로 둘이 합하여 한 몸을 이루고 여기서 또 모성애가 나오고, 한정되고 제한되어 테두리져 있는 인간들끼리 서로 더하기가 되어 우정이니 이웃이니, 인간애니 조국애니, 형제애니 하는 모든 애정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랑이란 저 십자가상 “더하기”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과 독 같은 표(=), 완전한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완전한 자 되라”(마태오 5,48)
“네 마음을 다하고 정을 다하고 지력을 다하여 네 주 하느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중대하고 첫째가는 계명입니다. 둘째도 이와 비슷하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사랑의 새 계명도 사실 따지고 계산해 보면 부족하고 한정된 나란 인간을 계속 더해 가서 하느님과 같이 완전한 인간이 되라는 사랑의 가르침과, 재촉이라 생각됩니다.
사랑과 고통은 우리 인간 앞에 더하기(+)표로, 십자가 형태로 나타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꼭 한 가지를 가르치시고 싶어하십니다. 하느님은 부족한 우리 인간을 그 더해가는 방법과 수단도 사랑의 외길, 십자가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고통은 우리 인간 앞에 사랑하는 십자가 형태인 “더하기 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만을 잡으려 할 때 그 인간은 주님이신 하느님을 만나 뵙지 못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 무수한 인간들이 너와 나, 그대들과 우리들인 간간 관계로만 끝날 때, 횡적인 관계만으로 끝날 때, ‘빼기표’(-)로 나타나는 피해 의식과 손해만 본다고 사랑의 원망과 한탄만을 되씹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적자 인생이란 말인 것입니다.
끊임없이 달이 가고, 날이 가도 수많은 대인 관계에서 다시 받을 길 없는 사랑과 배반과 배신! 이전 사랑할 기력마저 핍진한 듯 더 이상 뼈와 살을 빼앗긴 사랑에 냉담하고 무관심한 것, 인간의 무리! 낙오 대열! 잉여인간들! 확실히 그들의 인생 계산법에 착오와 잘못됨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이 세상의 탓도, 그런 인생의 계산으로 이 세상에서 성공한 것같이 보이는 인간들의 탓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 인생은 내가 주인공이며 “엑스트라”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한 내 인생은 내가 계산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 것은 남들이 대신 살아주는 것이 아니며, 최후에 내가 하느님 앞에 셈바칠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인간의 일생을 의심하는 마음으로 돌아다보면 이웃 사람들과 대인 관계에서 무수히 빼앗기기만 하고 손해만 당한다고 생각하는 느낌은 “깨닫지 못하는 사랑의 어두운 그림자”임을 능동적으로 시인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너와 나의 인간관계만을 보고 그 위에 하느님과 우리를 연결하는 신앙생활을 보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무엇을 할 때마다 머리와 가슴과 양 어깨에 성호경을 그으며 기도를 시작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이것은 더하기를 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 인생에 내 이웃과 당신을 더해 가렵니다”라고 사랑의 약속과 더하기를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인간은 언제나 일상 생활에서는 빼기만 하는 생활 속에 지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적자 인생은 하느님의 계명 실천에 게으르며 진보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호경을 그을 때마다 더하기(+) 인생 계산법으로 살아나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인생은 적자가 아니라 흑자 인생인 것입니다. 흑자 인생을 이룩해 나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참된 신앙 생활인 것입니다.
22. 연중 제21주일 루가 13,22-30 (다) 새 시대 새 사람
함세웅 신부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가 12,49)는 지난주의 복음과 함께 오늘의 복음 “있는 힘을 다하여라”(루가 13,25)는 말씀은, 지금의 우리에게 중도적인 삶보다는 선택의 결단을 ‘예’ 아니면 ‘아니오’ 중에서 택하라고 강력히 요구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스스로 자청하여 폭력에 협력자가 되었다는 생각에 미칠 때 엄청난 전율이 온 몸에 가득 차 옴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름을 외면한 내가 진정 느껴야 할 것은, 나의 비참하고도 처절한 모습을 보기 시작할 때에만이 참다운 회개, 즉 ‘전폭적인 돌아섬’을 갖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는 진정 사랑해야 할 수많은 순간들을 망설이며 놓치고 살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 시대를 사는 신앙인이, 불의가 날뛰고 하느님의 법을 내동댕이치는 계획에 공범자가 될 때, 우리는 남비 속에 있는 맛난 고기만이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몇 순간이나 그분의 길을 따라 의지적이고도 구체적으로 악에 저항하였을까? 미지근한 삶 속에 파묻혀 그럴 듯한 부적이나 신봉하는 나약한 인간일 뿐이 아닌가?란 질문을 우리에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이 무엇이고, 죽음이 무엇인지 밝히 알아야 할 때도 지금인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공으로 주시겠다고 않으시고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고 하시는지, 조금이라도 깨닫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얄팍한 사고, 그리고 안일함과 자족이라는 스스로의 평화를 버리고 사랑의 불이 되어야겠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발돋움으로 민족이나 국가에 대한 한정된 사고 관념을 떨쳐 버리고,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불을 심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 전 ‘새 마음’이라는 멋진 말을 들어왔고 이제 우리는 ‘새 시대’라는 훌륭한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물론 외길로 나아가는 생존의 말들이지만 말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이러한 전시적 언어는 소멸되어야겠지만 무엇보다 먼저 진정 우리들의 마음에서 우러나오고 누
가 외치기 전에 스스로 외칠 줄 아는 생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시련의 00년대는 사라졌고 ‘새 시대’가 왔다고 외쳐대는 서글픈 이 현실 속에서, 우리는 과연 00년대에 무엇을 하였으며 새 시대를 위해 무엇을 또 해야 할까 깊이 자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으로 얼룩진 00년대가 다시는 헌 시대가 되지 않도록 있는 힘을 다해 나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요즈음 사회악의 일소, 사회정화 운동이 한창입니다. 이제 다시는 불결 작업이 되지 않도록, 진실이 왜곡되는 삶을 거스려 다시 싸워야합니다. 또한 교회는 이러한 말들이 진정 소화되었는가 보아야 합니다. 헛된 언어들이 교회 내에 떠돌아다닐 수 없도록 냉철하게 투쟁해야 합니다.
어차피 엎지러진 물이란 생각도 듭니다. 이제 우리 두 손 모아 하느님께 여쭤 봅시다!
그분은 ‘사랑의 불’과 ‘있는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멋진 답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이제 우리는 주변에 버려져 디디고 설 땅조차 없는 이들에게 온 마음과 있는 힘을 다해 온 몸으로 그들을 껴안도록 합시다. 그 길은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에게 당연한 길입니다.
이제 우리는 흘러가는 조류를 방관하기보다는 하느님의 길이며 진리, 자유, 하느님의 정의가 강물처럼 도도히 흘러 넘치는 시대를 갖기 위해 조류를 거슬러 역행하더라도, 그 걸음을 멈추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23. 연중 제21주일 루가 13,22-30 (다) 성형외과가 필요 없는 세상
김신호 신부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서로가 다르므로, 그야말로 모두가 서로 다르게 살고 있는 것과 같은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사람은 좋은 조건에 태어나서, 좋은 조건과 더불어 인생을 별로 큰 어려움 없이 지내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악조건 속에 태어나선 끝내 자기가 타고난 악조건을 극복하지 못하고, 악조건의 희생물로 끝나는 생을 살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하는 일마다 자신의 뜻대로 되어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리고, 별로 걱정할 것이 없는 상태에서 평화스러운 생을 살다가 가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고, 시도하는 일마다 실패로 끝나는 어찌 보면 실패의 연속이 그 사람의 일생으로 보여지는 삶을 살다가 가기도 한다.
돈을 버는 데 있어서도 어떤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하여 벌이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어, 정말로 힘들이지 않고 성공하고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정말로 옆에서 보는 사람이 안타까울 정도로 열심히 노력하고 최선을 다함에도 불구하고, 돈을 벌기는커녕 실패의 연속으로 자기와 가까운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주는 경우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에 사람들은 사람이 돈을 쫓아가서는 안되고 돈이 사람을 따라와야 한다는 운명에 맡기는 체념적인 말로 위로를 삼기도 한다. 이러한 외적인 현상이, 반드시 사람의 삶을 모두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은 외적인 삶의 조건이 좀더 좋은 상태에서 살기를 원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한편 사람에게 있어서, 외적인 삶의 조건과 환경도 물론 중요하지만 사람은 또한 자신 스스로에 대해서 여러가지 복합적인 판단도 하게된다.
상상 속에서 사는 인생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아마 자신의 실체를 잘 아는 상태에서 열등의식을 가지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자신의 실체를 모르는 사람은, 허영에 가득 찬 상태에서 자신의 잘난 점만 생각하고, 자신의 상상 속에서 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실체를 잘 알고 또한 자신의 실체를 잘 아는 사람들은,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파악하게 되어있고, 이러한 자신의 실체에 대한 파악은 사람으로 하여금 부족한 부분에 대한 열등의식을 갖게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남에게 잘 보이고 남보다 잘생긴 신체적 조건을 가지려는 욕구는 변하지 않고 지속되고 있고, 또한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요즈음에 성형외과를 지망하는 의대생들이 많이 나오고 있고, 또한 성형외과 의사들이 성업을 누리는 것은 이와 같은 미에 대한 잠재적 욕구와 경제의 발달로 인한 부의 축적이 합쳐짐으로써 나타난 현상이라고 진단될 수 있다.
물론 이에 대한 추구나, 또는 자신이 남보다 아름답게 보이려는 욕구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아름다움이 한시적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이러한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듯한 삶의 태도가 위험스럽게 보이고 연민의 정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삶의 참 의미 깨달아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이제 구원 사업의 절정인 죽음을 맞이하시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구원이 얼마나 어렵고, 또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밝히고 계신다. 사람들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하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데 이것은 앞에서 지적한대로, 일생의 모든 가치는 하느님을 의식하지 않는 상태에서 삶을 설계하고 삶을 마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성서적인 의미에서는 고집스러운 유다인을 암시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들도 현세의 상태, 즉 자신들이 선민이라는 상태만은 고집하였으므로 이러한 어리석은 사람들로 평가되고 있다. 우리들도 주어진 삶 안에서 삶의 참된 의미를 망각하고, 삶의 껍데기에 해당하는 지나가는 우리의 일생만을 붙들고 고집한다면, 우리들의 미래도 역시 같은 것으로 끝나고 말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강조될 수 있다. 하느님께 향하는 삶의 의미가 중요시되는 시기에 우리는 살고 있다.
24. 연중 제21주일 루가 13,22-30 (다) 구원, 그리고 문과 시간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이사 66,18~21 (그들은 민족들 가운데서 너희 모든 겨레를 데려오리라)
제2독서 히브12,5~7.11~13(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를 견책하신다)
복 음 루가 13,22~30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할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구원계획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준비하셨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셨습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자신들만이 구원받는다는 선민 사상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서의 말씀은, 이스라엘의 독선적이면서도 자기 중심적인 사고 방식을 뛰어넘어 구원은 모든 인류에게 개방되어 있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혈연이나 지연, 민족이나 국가의 경계가 없고 세상 끝에서부터 찾아 온 모든 이들이 그들의 수고와 행실에 따라서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오늘 1독서는, 바빌론에서의 유배생활을 끝내고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온 이스라엘이 숱한 고난을 체험하면서 하느님의 구원이 이스라엘의 울타리를 넘어 지구상의 모든 인류에게 개방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몇 가지 민족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다르싯은 스페인으로서 당시 세계의 서쪽 끝이며, 풋트와 룻은 아프리카로서 남쪽 끝이고, 모섹과 로스와 두발은 흑해 주변으로서 북쪽 끝이며, 야반은 동쪽 끝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사방 세계의 모든 민족들을 망라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에서도 같은 내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 중에 많은 이들이 구원을 받지 못해서 가슴을 치며 통곡을 하는 동안 세상 끝에서 온 다른 많은 이방인들이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서는 구원을 얻기 위한 네 가지 문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문은 대단히 좁기 때문입니다. 성서에 보면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또 넓어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많지만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그리로 찾아드는 사람이 적다.”(마태7,13.14) 고 했습니다. 문이 좁을수록 사실 내용이 훌륭하며 가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훌륭한 대학일수록 문이 좁으며 좋은 자리일수록 취직의 문도 좁습니다. 명망있는 학자가 되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하며 운동의 스타가 되기 위해서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먹고 싶은 대로 먹거나 마실 수도 없으며 자기 자신과의 끊임없는 투쟁과 눈물겨운 전쟁을 치를 수 있는 자만이 성공의 좁은 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둘째는, 시간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문 닫은 뒤에 아무리 두드려 봤자 그때는 이미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에겐 시간이 무한정으로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러나 ‘그 날’은 분명히 시간이 없어서 당황하게 됩니다. 끝 날에 당황하지 않는 자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축복받은 자입니다.
어렸을 때 방학을 맞게 되면 시간이 많이 있는 듯이 여겨 마음을 느긋하게 갖고 노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새 방학이 절반이 넘어 일주일 앞으로 개학이 다가오게 되면 밀린 일기와 숙제 때문에 초조하고 당황하게 되며 끝내는 개학이 두려워 우는 얼굴로 학교에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준비가 없으면 꼭 그렇습니다.
셋째는, 구원에는 특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분명히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뽑힘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이라 해서 하느님 나라에 거저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라 해서 거저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들어간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태 21,31참조).
마찬가지로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았다 해서 거저 구원받는 것이 아니며 주교나 신부라 해서 하느님 나라에 공짜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에게 특권이란 없으며 단지 있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땀흘리고 수고하며 노력했던 자들만이 정당한 특권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넷째는, 구원은 우리의 판단이나 생각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오직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에 우리의 뜻을 굽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유도 모르면서 매를 맞을 때가 있으며 영문도 모르면서 십자가를 짊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하느님의 뜻을 바라볼 때 하느님 나라는 가까이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선한 이에게는 자비로우나 악한 이에게는 엄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에선 멸망의 길은 넓고 시간이 느긋하며 핑계가 끝이 없습니다. 따라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주님 뜻대로 매일의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신앙인답게 선하고 거룩하게 살도록 합시다.
25. 연중 제21주일 루가 13,22-30 (다) 첫째와 꼴찌
강영구 신부
오늘은 연중 제21 주일입니다.
“선생님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안 되겠지요?” 어떤 사람이 예수께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모든 종교와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을 받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들은 나름대로 여러 가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하면서, 그 길을 걷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천주교는 천주교 나름대로, 개신교는 개신교 나름대로, 불교는 불교 나름대로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요즘같이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고 있는 몇몇 종파들은 자기 교회에서 인침(印針)을 받지 아니하면 10월 28일에 휴거되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종교들이 마치 자기들만이 구원을 보장하는 양 선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구원이란 이런저런 종교나 종파들이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란 하느님만이 우리 인간들에게 주실 수 있는 선물입니다. 구원의 주도권을 전적으로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지, 인간들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톨릭을 포함해서 이런저런 종교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구원을 주장하고 있지만, 하느님은 결코 어떤 종교나 교회의 테두리 안에 머무시는 분이 아닙니다. 교회나 종파가 하느님의 활동을 제한할 수도 없고, 교회나 종파들이 하느님의 대리인이나 되는 것처럼 자기들 마음대로 구원을 주거나 말거나 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오늘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잘 묵상해 보면 이 사실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너희가 밖에 서서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아무리 졸라도 주인은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너희가 ‘저희가 먹고 마실 때 주인님도 같이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우리 동네에서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해도 주인은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악을 일삼는 자들아 모두 물러가라.’ 하고 대답할 것이다.”
예수의 이 말씀은 상당히 충격적입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듣기도하고, 그분과 더불어서 먹고 마시기까지 한 사람들도, 하늘 나라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좀더 쉽게 말하자면 우리가 성서를 읽고 강론을 듣고, 주님의 성찬인 이 미사에서 성체를 받아 모신다고 해서, 구원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즉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 구원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라.” 예수께서 강조하시는 바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뿐 아니라 어떤 종파 어떤 신앙이 구원을 보장해 주는가 하는 점에 있어서도 예수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이 좁다는 것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좁은 문이 하나밖에 없는가, 아니면 수없이 많은가 하는 점은 확실히 밝히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예수의 말씀을 가만히 묵상해 보면,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은 대단히 좁은 반면에, 그런 문들은 수없이 많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들은 다 하느님 나라에 있는데, 너희만 밖에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그러나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사방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할 것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구원의 문은 좁지만, 수없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예수의 말씀에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가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작은 사람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좁은 문이기에 목덜미가 뻣뻣하거나, 고개를 숙일 줄 모른다거나 하면, 그 문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덩치가 큰 사람도 그 문을 통과하기가 어렵습니다.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 것도 지닌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 작은 사람, 땅바닥에 몸을 굽히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 고개를 숙일 줄 아는 사람, 거추장스러운 장식으로 자신을 꾸미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루가 복음 6장20절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또 마태오 복음 18장 3-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하늘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 결국 하느님 나라의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작은 사람, 낮은 사람,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저는 천주교 신부입니다. 오늘 예수의 말씀에 의하면, 천주교 신부라는 직책이 저에게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입니다. 제가 주님 앞에 서서 “주님, 제가 주님의 이름으로 신자들을 가르치고 미사를 집전하고 성사를 집행하지 않았습니까? 문 좀 열어 주십시오!”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제가 신부로서 성실히 살아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느님 앞에 제 자신이 참으로 아무 것도 아닌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스스로 구원을 쟁취할 수도 없고, 제가 스스로 구원을 만들어 낼 수도 없고, 오직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아서, 어린 아이와 같이 작은 자가 되었을 때, 비로소 하느님 나라의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 저는 두려운 마음으로 늘 저 자신을 돌아봅니다.
저 자신이 신부라는 직책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사랑과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사랑이 필요한 어린 아이처럼,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필요로 하는 죄인이며, 작은 자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게 되리라 믿습니다. 즉 저 자신이 하느님의 손길이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는 무한히 가난한 자임을 자인하게 될 때, 하느님의 손길이 저에게 닿게 되고, 구원의 좁은 문을 통과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점은 여러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천주교 신자라는 이름 하나로 구원의 좁은 문을 통과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더구나 천주교 신자라는 이름이 여러분에게 구원을 보장해 주지도 않습니다. 하느님의 가르치심을 따라서 성실하게 살아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여러분 스스로 군살 빼기에 온 힘을 기울이지 아니하면 안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는 그 온갖 겉껍데기들을 벗어 던지는 작업을 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는 온갖 겉껍데기들 때문에 여러분의 눈이 가려져서 여러분 자신의 본래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지 못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 발가벗고 서게 되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지극히 왜소(矮小)한 자, 온갖 허물과 죄로 부끄러운 곳이 많은 존재일 뿐입니다. 다만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필요한 가난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온갖 장식물과 겉껍질 때문에 우리의 발가벗은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돈과 재물로 치장한 나의 모습, 사회적인 지위와 명예로 치장한 나의 모습, 학식과 재능으로 치장한 나의 모습, 천주교 신자라는 이름과 얼마간의 선행과 자선으로 치장한 나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모습이 내 본래의 모습인 양 착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 이런 군더더기로 나를 잔뜩 꾸미고 있을 때, 나의 덩치는 너무나 커서 하느님나라의 그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없게 됩니다.
더구나 이런 온갖 군더더기로 치장한 나의 모습을 내 본래의 모습으로 착각하게 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손길이 아니라도 우리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 구원의 문을 열 수 있다고 자만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의 목덜미는 무한히 뻣뻣해져서 고개를 숙일 줄 모르는 인간이 되고 맙니다. ‘내가 신부인데, 내가 천주교 신자인데, 내가 그래도 이 사회에서는 명사인데, 나는 재산도 왜 있고 그 재산으로 자선을 베풀기도 했는데‥‥‥ ’하는 생각으로 고개를 쳐들고 구원의 좁은 문을 통과하려 할 때, 그 뻣뻣한 목덜미가 걸려서 통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신부라면 신부답게 살아야 하고, 신자라면 신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 앞에 발가벗고 서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 본래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구해야 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신 예수의 말씀을 늘 가슴속에 담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독선과 선민 의식(意識)과 선민의식에서 벗어나서 겸허한 자세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지 않는다면 “꼴지가 되는 첫째”의 신세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라.”
26. 연중 제21주일 루가 13,22-30 (다) 하늘나라에서 기득권이 인정 안돼
묵상 :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이 선택된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다가 참 구세주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많은 이방인들이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되었다. 하늘나라에서는 어떤 기득권도 인정되지 않는다.
연옥에서 만난 주교님
본당에서 가난하고 배운 것이 없는 한 아주머니는, 본당신부를 항상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본당 신부도 죽고 그 아주머니도 죽었다. 어느 날 연옥에서 그 신자가 본당신부를 만났다. 그런데 가까이하기엔 너무나 높은 곳에 계셨던 본당신부를 연옥에서 만나다니, 한동안 정신이 멍하였다.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본당신부에게 달려가서 “신부님, 저는 신부님 본당의 신자였는데, 신부님이 이곳에 어쩐 일이십니까? 혹시 잘 아는 신자 방문이라도 오셨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신부는 “쉿! 조용히 하세요, 저기 우리 주교님도 계세요.” 하였다. 돌아가신 지 오래된 주교님도 아직 연옥에 계셨다,
이 이야기는 물론 우스갯소리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인간 세상에서는 신분과 직책의 고하나 빈부귀천에 따라 사람대접도 다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어떤 기득권도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꼴찌가 첫 째 되는 이변
이 세상에도 예상을 뒤엎는 사태들이 많다. 선거 때마다 모든 언론과 여론조사 기관의 투표소 출구조사에서조차 당선이 확실시된다는 후보가 의외로 고전하고 낙선하는가하면, 가망이 없어 보이던 후보가 의외로 민심의 지지를 얻어 당당히 당선되는 예를 많이 본다.
불교의 역사를 보면, 불교의 여러 종파 중에서, 선종(禪宗)은 깨달음을 얻은 큰스님이 조사(祖師)로 추대되고 방장(方丈))이 되어 대대로 전수되어 왔다. 그래서 ‘달마’ 대선사(大禪師)로부터 시작하여, ’혜가’, ‘승찬’, ’도신’, ‘흥인’, ’혜능’, ‘마도조일’ 등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과연 누가 다음 대를 잇는 방장이 될 것인가?’하는 것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조사는 수행자들을 불러모으고 깨달음의 정도를 알아보기 위해 공안(公案)을 내걸고, 선문답(禪問答)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평소에 전혀 드러나지 않았던 부엌에서 불이나, 지피던 화부(火夫)나 주방장들이 높은 깨달음의 경지를 인정받아 조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깨달음을 통해 무욕(無慾), 무념(無念)의 경지를 얻고, 진정한 혜안(慧眼)을 갖는 득도(得道)의 길은, 세상의 출세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안되겠지요?’라는 질문에,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쉽고 편하여 많은 사람이 택하는 길보다는, 어렵고 힘들어 사람들이 외면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신다,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선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될 사람이 있을 것이다’고 말씀하신다,
인간 사회에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학벌, 재산, 사회적 지위, 가문, 미모 등등이 그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고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사람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비굴하리 만치 굽실대면서도, 어떤 사람은 발톱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사람마다 자신에게 남보다 나은 것이 손톱 끝만큼이라도 있으면 ‘나는 너와 다르다’를 강조하며 ’네가 감히 나와 맞먹으려고?’ 하는 자세로, 얼마나 으스대고 잘난 체 하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하느님께 선택받은 민족임을 내세우며 비뚤어진 선민(選民)의식으로 꽉 차 있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나자렛 촌놈’으로 여겨 배척하였다. 결국 첫째는 꼴찌가 되고, 이방인들이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던 것이다. 하늘나라에서는 인간 세상의 어떤 기득권도 인정받지 못한다. 오래된 구교우 집안이라고, 집안에 신부 수녀 된 사람이 많다? 재산이 많다? 본당 간부나 직책을 오래 역임했다고 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가지는 못한다.
주님께서는 ’동녁이 서녁에서 사이가 먼 것처럼,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참으로 구원될 사람들 중에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하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철저히 하느님의 뜻을 받들며 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스스로 죽는 십자가의 길, ‘좁은 문’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쉽고 편한 것이=좋은 것’이라는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