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가해 연중 15주일 강론

 

연중제15주일




씨 뿌리는 자가 씨 뿌리러 나갔다




제1독서: 이사 55,10-11


제2독서: 로마 8,18-23


복음: 마태 13,1-13




이 주일과 다음 두 주일의 전례는 우리에게 소위 ‘비유의 담화’로 온통 가득 차 있는 마태오 복음 13장에 의한 주님의 비유 말씀들을 전해주고 있다. 다른 두공관 복음사가들은 같은 사료를 다룬 모양으로 배치하고 있으며 그것도 일부만 선택해서 전해준다(마르4,1-34 ; 루가 8,4-18 참조).



“저 사람들에게는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그 비유들은 생각과는 달리 이해하기가 그리 쉽지 않고 또 예수께서는 그것들을 하늘 나라의 신비를 ‘열어 보여주기’ 위해서보다는 오히려 ‘감추려고’ 사용하신다(마태 13,11). 그래서 사도들도 어째서 예수께서 정확한 의미가 결여된 듯한 즉, 모든 것을 말해주는 듯하면서도 또한 “낯선 구절들 속에 숨겨진 의미”(단테)를 파고들려는 의지와 관심을 지니고 있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듯한 그런 묘한 암시적 방법을 통해 말씀하고 계신지를 몰라 어리둥절해 한다. 이런 까닭에 사도들은 첫 번째 비유 말씀이 끝나자 곧 예수께 묻는다 :“저 사람들(군중들)에게는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10절).


그러자 예수께서는 당신의 비유 말씀 속에는 사랑과 자비의 행위가 담겨 있지만 또한 심판과 단죄도 들어있다고 말씀하시면서, 그 말씀이 단죄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듣는 이들 자신에게 달린 문제라고 하신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시는 비유들의 단순하고도 일상적인 외적 형태를 뛰어넘어 파고들어가서 그 속에 내포되어 있는 깊은 메시지를 파악하는 것은 듣는 이들에게 맡겨진 일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하늘 나라 밖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 속에 잠재해 있던 약간의 ‘빛’마저도 그들에게는 ‘어두움’으로 바뀌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의 말씀이 이를 입증해주고 있다 :“가진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하게 되겠지만 목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12절).


항상, 우리가 얼른 감지 할 수 있는 내용보다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당신의 말씀들-비유 문학의 장르를 초월해 있는-을 정신차려서 열심히 들으라고 하시는 예수의 경고 말씀은, 무심코 이 대목을 읽고 있는 우리에게도 당혹스러운 하나의 현실로 와닿는 말씀일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이사야가 일찍이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이 백성이 마음의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고 말하지 않았더냐?”(13-15절).


만약에 그 ‘신비’에 대해 듣기만 하고 그것을 깊이 통찰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충분치가 못하다. 이러한 노력이야말로 “믿고 있는 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참으로 믿는 사람이다”(Homil. in Evang., 26,9 : PL 1202)고 하신 성 대 그레고리오의 가르침대로, 활동을 통해서 맺어지게 되는 다른 모든 결실의 근거가 될, 우리 마음속에 행해지는 말씀의 ‘씨 뿌리기’의 첫 번째 결실이다.


사도들은 군중들과는 반대로 통찰하려는 노력의 자세를 갖추고 있다 :“너희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특권을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받지 못하였다”(11절). 이것은 결코 차별대우가 아니다. 다만 마음과 정신의 개방, 항상 우리 자신보다도 더 위대한 진리에 대한 원의와 추구, ‘신비’의 매력에 대한 인식 등에 대한 보상의 ‘선물’일 뿐이다.


어쩌면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은 매일매일 세속적인 표현으로 복음을 반복해서 되뇌이는 까닭에 복음이 지니고 있는 ‘새로운 맛’을 잃어버렸고 또한 그 추진력마저 빼앗겨버렸는지 모른다. 우리는 복음에 다가와 경이와 놀람과 ‘신비’의 맛 즉, 게으르고 방심하는 사람들에게는 냉정하지만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빛을 점점 더 깊이 파고들고자 정성과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부추겨주는, 그러한 모든 신비스러운 맛을 되돌려 받도록 그리스도께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이 경우에 ‘비유로 말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시는 문학 장르를 다시 취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복음 앞에서 기대와 놀라움을 가질 수 있는 분위기를 다시 야기시킨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 하느님의 말씀이 도전장이나 자극제가 되는 사람은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로써 풍성히 땅에 떨어진 ‘씨앗’이 완전히 죽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이제 우리는 마태오 복음사가가 한데 모아놓은 일곱 개의 비유 가운데 첫 번째 비유 즉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직접 대해 보고자 한다 : 예수께서는 먼저 비유로 말씀하신 다음(13,3-9) 다른 군중들과 마찬가지로 그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한 사도들이 분명한 설명을 요구하자 모두가 이해하기 쉬운 개념으로 그 내용을 설명해 주신다(18-23절).


복음사가가 첫머리에 그리스도 주위로 몰려드는 군중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그 필치는 다분히 시적이라 하겠다 :“예수께서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 군중은 그대로 모두 호숫가에 서 있었다”(2절).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 때문인가 아니면 참으로 그분의 가르침에 대한 관심 때문인가? 예수의 비유 말씀은 두 번째 가정을 거부하는 것 같다 : 그리고 예수께서 군중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시는 모습도, 사람들이 그분의 가르침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그분에 대한 호기심을 더 가짐으로써 그분에게서 멀리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주고자 하는 듯하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배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기 시작하신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 먹었다.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싹은 곧 나왔지만 흙이 깊지 않아서 해가 뜨자 타버려 뿌리도 붙이지 못한 채 말라버렸다.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다. 가시나무들이 자라자 숨이 막혔다.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맺은 열매가 백 배가 된 것도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삼십배가 된 것도 있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3-9절).


이렇듯 ‘풍경화’와도 같은 비유의 내용은 순전히 상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팔레스티나 지방의 환경이 그렇다 : 조그만 땅덩어리, 돌투성이인 밭들, 농사를 짓기 위해 여기저기 가시덤불을 헤치고 만들어 놓은 좁은 길들이 고작이다. 사람들은 이렇듯 놀라울 만큼 거친 땅에다 전부 다 죽지는 않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씨를 뿌렸던 것이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그러면 이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지난 주일 복음을 해석하면서(마태 11,25-30) 예수께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불신의 위기를 맞고 계심을 이미 언급하였다 : 오직 하느님께서 당신의 ‘신비’를 ‘나타내 보여주고자’ 하신 몇몇 ‘철부지 어린아이들’ 같은 사람들만이 그분을 믿는다. 대부분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 있어서 그분의 메시지는 실패하고 말았으며 또는 무관심 속에 버려지고 만다.


이런 시점에서 예수께서는 사람들, 그중에서도 특히 제자들의 믿음을 회복시키고자 당신 주위에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설명해주려 하신다. 예수께서는 그러한 뜻을 바로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로써 행하신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믿음에 대한 비유’라고 정의할 수 있다. 반복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풍성한 결실을 맺는 씨앗도 있다. 씨를 뿌리는 자는 예수 자신이시다. 예수께서는 많은 씨앗이 실패를 하더라도 결실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당신 제자들에게 확신 시키고자 하신다. 그분의 사명은 씨 뿌리기에 비교될 수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역사속에 이미 시작되었다. 그 나라의 구원적 힘은 증대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씨 뿌리기와 거둬들이기 사이에는 상호 밀접하고도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구원 사명과 하늘 나라의 도래 사이에도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그 비유는 그리스도 안에 들어 있는 뚜렷한 메시아적 의식을 드러내 보여준다. 만일 그분이 만나게 되는 장애물들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나라가 그분의 인격이나 활동 안에 임하고있다면 그것은 그분이 인간들의 구원을 위한 결정적 실체들의 영역에 속하는 분이시며 단순한 일반 예언자의 차원을 추월해 계시는 분이심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분의 메시아 사상은 영광스럽고 권세있고 승리주의적인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며 오히려 나약함과 좌절과 실패를 어렵게 헤쳐나간다”(G. Barbaglio, in I Vangeli, Cittadella Editrice, Assisi 1975, p.307).


사실이 이러하다면, 그 비유는 ‘윤리적’ 의미보다는 ‘그리스도론적’ 의미를 더 강하게 지니고 있다. 그분의 말씀이 인간들의 마음속에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한다는 사실보다는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다고 하는 사실을 더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두 관점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고 오히려 다음에 계속되는 비유에 대한 설명이 입증해주듯이 서로 일치하고 있다 : 사도들의 몰이해는 비유에 대한 설명을 야기시켰고 그 설명에서는 ‘윤리적’ 관점이 더 강조되고 있다. 말하자면 이때에 강조점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내적인 자세로 옮겨지고 있다. 


아마도 이처럼 의미를 전이시킨 당사자는 그 당시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의 어떤 구체적인 상황에 접한 복음사가일 것이다. 그의 독자들은 틀림없이 그리스도께 밀착해 있었던 그리스도 신자들이었지만 밀착돼 있는 그만큼 자신들이 기쁘게 ‘들은’ 복음의 내용을 생활 속에서 일치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여기서 마태오 복음사가가 볼 때 모든 문제의 핵심은 명백하다 : 즉 복음의 말씀이 가능한 한 최대의 ‘결실’을 낼 수 있는 ‘땅’이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내포한 뜻을 들어 보아라”




“이제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내포한 뜻을 들어 보아라. 누구든지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할 때에는 악한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간다. 길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은 바로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또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곧 기꺼이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 마음속에 뿌리가 내리지 않아 오래가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사람은 그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닥쳐오면 곧 넘어지고 만다. 또 가시덤불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억눌러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잘 깨닫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 사람은 백배 혹은 육십배 혹은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다”(18-23절).


‘길바닥에 떨어진’ 씨앗으로부터 시작해서 처음부터 자연적으로 감추어져 드러나지 않는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에 이르기까지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모든 선이 파괴되면 될 수록 그만큼 더 실망이 큰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섬세하면서도 까다롭다. 각별한 정성으로 온전히 보호되지 않는다면 시들어 죽어버리고 만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말씀은 피상적이고 편리한 생활, 세상 이익에 대한 애착, 자기 자신의 이익에 대한 집착, 맞부딪치게 되는 어려움들에 대한 두려움 등과는 공존할 수 없다.


또한, 복음사가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을 어째서 두 개의 큰범주로-이미 말한 대로 여러 계층이 있긴 하지만-즉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19절) 사람들과 “그 말씀을 듣고 깨닫는”(23절) 사람들로 구분하고 있는지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백 배 혹은 육십배 혹은 삼십 배”(23절)의 풍성한 결실을 맺는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깨달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깨닫는다’는 말을 지적인 의미로 즉 순수 신학적 통찰의 노력으로써 알아들을 것이 아니라 활동적 실천적 의미로 알아들어야 함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마치 씨앗을 받아들여야 하는 밭의 경우처럼 복음의 말씀을 생활화하고 또 그 말씀에 의해 자신을 변화시킨다면 그것이 곧 복음의 말씀을 ‘깨닫는 것’이다. 만약에 밭을 쟁기로 갈고 고르지 않는다면 또 항상 뿌리를 내릴 차비를 하고 있는 모든 잡초들을 불태워 없애지 않는다면 결코 풍성한 수확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비유의 개념 전체가 결실이 풍성해지기 위한 첫째 조건으로서 ‘수고’를 말하고 있다. 힘들여 수고하지 않는다면 수확이 실패할 것은 거의 확실하다. 하지만 여기서 수확이 실패하는 원인은 씨 뿌리는 이가 준비를 하지 않은데 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우리의 생활을 뒤바꾸어놓을 수 있는 그 ‘말씀’을 지체없이 받아들여야 할 ‘땅’(우리 각자의 마음)이 준비되지 않은 데 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 내리는 눈처럼 내 말도 그러하리라”



우리는 지금까지 한 고찰로써 제2이사야가,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 말씀의 능력을 찬양하고 있는 오늘 제1독서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 내리는 눈이 하늘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흠뻑 적시어 싹이 돋아 자라게 하며 씨 뿌린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내 주듯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그 받은 사명을 이루어 나의 뜻을 성취하지 아니하고는 그냥 나에게로 돌아오지는 않는다”(이사55,10-11).


여기서 야훼의 ‘말씀’은 다른 곳의 지혜나(잠언 8,22 ; 지혜 7,22) 성령(이사 11,2)처럼 인격화되고 있으며 또한 오직 자신의 사명을 완수한 후에야 돌아오는 사자(使者)에 비교되고 있다. 비와 눈에 대한 비교는 그 ‘말씀’의 풍후한 생산력과 강하면서도 부드럽게 변화시키는 힘을 말해준다.


이사야의 이 대목을 복음에 비교해 보면 과장되고 낙관적인 듯한 느낌이 든다 : 사실 예수께서는 그토록 당신이 너그럽게 뿌리는 ‘씨앗’이  번번이 아무 결실도 맺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예수의 말씀이 야훼의 말씀보다 능력이 부족하다는 말인가? 실제로 구약성서를 읽어보면 알 수 있다 : 거기서도 야훼의 말씀은 수 없이 실패를 거듭한다.


말할 것도 없이 여기서 이사야 예언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말씀’이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변화와 쇄신의 ‘능력’이다 : 하느님의 입장에서 ‘말씀’의 능력은 ‘그분이 원하시는 바를’ 인간들이 할 수 있거나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차원을 넘어서, 또는 그 반대의 전혀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이룰 것이다. 사실 지금 우리가 대하고 있는 이 예언서의 대목은 하느님과 계약이 이루어지는 부분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계약’을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 새롭게 하실 것이다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로 오너라. 나의 말을 들어라. 너희에게 생기가 솟으리라. 내가 너희와 영원한 계약을 맺으리라. 다윗에게 약속한 호의를 지키리라. 나는 그를 ant 백성들앞에 증인으로 세웠고 부족들의 수령과 군주로 삼았다”(이사 55,3-4). 비록 모든 사람이 ‘계약’에 불충실하거나 참여하기를 거부한다할지라도 이러한 하느님의 계획을 결코 부숴버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하느님의 말씀을 실패로 돌아가게 하고 또 우리의 마음에 맡겨진 생명의 ‘씨앗’으로 하여금 결실을 맺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바로 그 가능성에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모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모든 피조물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하느님의 계획이 우리 안에서 아니 우리 안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이 생겨 나온(창세1장 참조) 태초의 그 ‘말씀’의 찬란한 영광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모든 ‘피조물’안에서도 실현되기 위해서는 모든 어려움과 고통을 무릅써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 보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하느님의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 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로마 8,18.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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