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4주일 – 그리스도왕 대축일

 

연중 제34주일(그리스도왕 대축일)




제 1 독서 : 에제 34, 11-12. 15-17


제 2 독서 : 1고린 15, 20-26. 28


복     음 : 마태 25, 31-46




제 1 독서 : 에제키엘서 33-39장은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 멸망 후의 예언으로서 복구와 희망의 내용을 담고 있다. 오늘 제1독서는 주 하느님께서 직접 이스라엘의 목자로 나서겠다는 희망을 말하고 있다.


고대 근동의 표현법으로 볼 때 여기에 언급된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이스라엘의 임금과 지도자들을 뜻한다. 양을 돌볼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살진 놈을 잡아먹고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다는 비판(에제 34, 2-10)은 백성에 대한 봉사를 하는 대신에 잘못된 정치로 백성을 멸망으로 이끌었던 이스라엘의 왕들과 지도자들의 실정을 암시한다.


이제 주 하느님께서는 그릇된 목자들을 물리치고 몸소 당신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목자 구실을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은 주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에제키엘은 이미 바빌론 유배의 끝을 내다보고 있다(34, 13 참조). 또한 이스라엘의 목자로서 주님은 양과 염소 사이를 갈라놓을 것이다. 여기서 양은 주님의 백성을 뜻하고 염소는 백성의 지도자들을 뜻한다.




제 2 독서 : 사도 바오로는 마지막 날과 죽은 사람들의 부활에 대한 고린토 신자들의 물음에 대답한다. 아직도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각시키며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 모두의 부활의 보증이 되는 이유를 논증한다. 즉 아담 한 사람이 온 인류를 죽음으로 이끌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온 인류를 생명과 부활로 이끄신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 부활의 가능성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증명되었다.




복     음 : 인류의 마지막을 묘사하기 위해 예수께서는 묵시 문학적 이미지를 활용하신다. 예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로부터 영감을 받아 최후의 심판 비유를 말씀하시며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갈라놓는 임금의 모습을 우리에게 제시하신다. 심판의 기준은 애덕의 법이다. 주님의 모범을 따라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봉사한 사람들을 당신의 사람으로 인정하시겠다는 것이다.


복음서 중에서 주님과 고통받는 사람이 완전히 동일시되는 유일한 대목은 이 비유뿐이다. 그분께서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받아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셨기 때문이다(마태 8, 17). 그러나 구원을 받는 데 필요한 행동의 목록을 이 비유에서 뽑아내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랬다가는 육체에 필요한 선행만 꼽게 되는 것이다. 비유의 결론은 서로 대칭되는 두 구절이다.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40절). “——해 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45절).


애덕은 믿음의 내용이다.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다는 것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그리스도로 알아보고 애덕을 실천하는 것을 뜻한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왕 대축일의 전례를 지냄으로써 전례 주년이 끝나게 되는 날입니다. 왕 중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왕권을 엄숙히 선포하는 축일인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야말로 가장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분임을 길이 깨닫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스라엘이라는 양떼를 먹여 기르는 대신 그들의 젖으로 자신들의 배만 불리고 있는 유다의 왕들과 백성들의 지도자를 신랄하게 비난한 뒤 하느님께서 당신 양떼를 그들 손에서 빼내시어 당신 친히 참 목자의 열정으로 되돌려 보내주시리라고 예언합니다. “내가 몸소 내 양떼를 기를 것이요, 내가 몸소 양떼를 쉬게 하리라. 헤매는 것은 찾아내고 길 잃은 것은 도로 데려오리라. 상처 입은 것은 싸매주고 아픈 것은 힘나도록 잘 먹여주고 기름지고 튼튼한 것은 지켜주겠다.”


자기들의 양떼의 괴로움을 사랑으로 어루만져 줄 착한 목자야말로 참된 왕임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제키엘서는 “내가 한 목자를 세워주겠다. 그는 나의 종 다윗이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구약에 예언된 이 메시아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 즉 길 잃은 양을 찾으러 가는 착한 목자이신 그분을 뜻합니다. 백성들을 다스리고 지배하기 위해 군림하는 세상의 왕들과는 엄연히 다른 것입니다. 법이나 제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모든 이들을 포용하고 감싸는 분이 바로 사랑의 왕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이 착한 목자도 최후에는 심판을 하신다는 것을 에제키엘서는 언급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제 양과 양 사이, 숫양과 숫염소 사이의 시비를 가려주리라.”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심판 기준은 오늘의 마태오 복음을 통해 명백히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분은 스스로 착한 목자로서 상처입은 이들을 싸매주고 길 잃은 이들을 찾아주고 괴로움에 처해 있는 이들을 위로해 주었기에 당신처럼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었느냐,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가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즉 형제애를 얼마나 실천하였느냐가 삶을 저울질하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 그들은 배고픈 이들, 목마른 이들, 낯선 외국인들, 감옥에 갇힌 이들 그리고 병든 이들입니다. 이들 안에 계신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분을 따르는 것이기에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이런 사랑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미국 펜실베니아 주 알리키퍼라는 시골에 케니 이스터니라는 열 살짜리 소년이 살고 있습니다. 케니는 태어날 때 다리에 이상이 있어 부득이하게 절단 수술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 달리 상반신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케니는 결코 자신의 보기 흉한 몸을 비관하는 법이 없습니다. 언제나 티없는 밝은 표정으로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신나게 거리를 누비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먼저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넵니다. 케니가 다니는 뉴호라이존이라는 학교에는 신체나 정신에 장애가 있는 학생들이 매일 스쿨버스로 통학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케니는 활기찬 모습으로 착실하게 수업을 받고 있습니다.


학교에 있을 때 케니는 언제나 부담스러운 고무 다리를 부착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케니가 사회생활을 하게 될 때를 생각해서 선생님들이 케니에게 억지로 고무 다리를 붙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무 다리는 여간 불편한 게 아닙니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 벗었다가 다시 붙이는 일은 몹시 힘들기 때문입니다. 케니가 불편한 고무 다리를 하고 화장실에 갈 때면 언제나 친구 폴이 뒤따라옵니다. 케니보다 훨씬 증세가 심한 폴은 목과 손이 심하게 흔들일 뿐 아니라 혀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지만 언제나 화장실 밖에서 케니를 기다렸다가 ‘케니, 괜찮니?’ 하고 간신히 한마디 묻고는 뒤에서 매달리듯 휠체어를 밀어줍니다. ‘나에게는 다리가 있지만 케니에겐 다리가 없으니까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안돼!’ 폴은 언제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조심스레 친구 케니를 돕는 것입니다. 케니 역시 자신이 휠체어를 움직이는 것이 훨씬 빠르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만약 도움을 거절한다면 폴이 실망할 거라는 생각 때문에 비틀거리며 휠체어를 밀어주는 폴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언제나 폴의 도움을 받으면서 천천히 교실로 되돌아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입니까? 장애인이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 이 마음이야말로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베푸는 진정한 사랑이요 형제애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왕권은 인간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아낌없는 사랑일 것이며 이 사랑의 베품, 즉 자비는 죽음과 권세의 악신을 물리치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부활 사건을 통해서 입증되기에 죽음을 넘어서서 만물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우리도 이런 권능 아래 부활의 영광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사랑의 다스림을 통해 드러나지만 마침내는 사랑의 척도로 우리 자신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이 심판은 결국 우리 모든 인간을 영원히 살도록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들의 왕임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고 사랑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우리들도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그분의 왕권에 참여하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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