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성탄 대축일 (밤미사)
오늘밤 너희의 구세주께서 다윗의 고을에 나셨다.
제 1 독서 : 이사 9,1-3. 5-6
제 2 독서 : 디도 2,11-14
복 음 : 루가 2,1-14
해설
성탄 대축일에 서로 다른 독서의 내용으로 구성된 세 대의 미사를 봉헌하는 이유는 각기 나름대로의 역사적 근거가 있기 때문이겠지만, 생각컨대 거행하고자 하는 성탄 신비의 ‘위대성’과 그 내용의 ‘형언키 어려움’을 강조하고자 하는 데도 그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사실, 성서의 여러 대목들은 나름대로 무한하고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육화의 신비를 어떤 때는 이런 관점에서, 또 어떤 때는 저런 관점에서 초점을 맞추어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 모든 대목들을 종합적으로 볼 때 더욱 명백히 드러나는 사실은 육화의 신비란 아무리 해도 여전히 신비 그 자체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물론 모든 독서의 내용을 다 밝혀낸다는 것이 실제적으로 불가능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세대의 미사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암시적인 내용으로써 우리 마음을 자극하는 성탄 첫미사 즉 밤미사의 독서들에다 우리의 관심을 돌리고자 한다.
보라, 우리에게 주시는 아드님이시다
예를 들어, 이사야서에 의한 독서를 보자. 그것은 학자들이 ‘임마누엘의 책’(이사 6-12장)이라고도 일컫는 예언집의 일부이다. 학자들이 그와 같이 부르는 이유는 이사야 예언자가 아하즈에게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징조’로써 예언했고(이사 7,14 참조)또한 명칭 자체의 의미(“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로써도 하느님께서 유다를 보호해주시고 축복해주시리라는 사실을 보증하는 그 다윗 후손의 신비스러운 형상이 지배적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아시리아 왕 다글랏 빌레셋 3세(B.C.734-732)의 침공으로 인한 시리아와 에브라임간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다른 민족들보다도 더 고통을 당했던 팔레스티나 북쪽의 즈불룬과 납달리의 종족들에게 앞서 언급한 ‘임마누엘’(이사 7,14)과 명백한 유사성을 갖고 있는 다윗 가문의 한 ‘어린아이’에 의해 이루어진 놀라운 해방과 또한 평화와 정의의 왕국이 건설되리라는 사실을 예고한다. 그것은 마치 죽음의 어두움이 깔려 있는 감방 속에서 오랫동안 애타게 기다려온 사람에게 쏟아지는 ‘큰빛’과 같은 것이 아닐까?(제 1 독서 참조)이방인의 압제 밑에 억눌려 있는 그 지방 사람들이 큰 즐거움을 갖게 되는 동기는 두 가지다:압박하는 자들의 멍에로부터 놀랍게도 해방된다는 사실과(3절) 다윗 왕국을 확장시키고 견고케 할 왕가의 대를 이을 한 어린아이가 탄생한다는 사실이다.
그 ‘해방’은 미디안에 대한 기드온의 요란스러운 승리를 상기시키는 말로써 표현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만이 구원과 승리를 주신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여주시기 위해 기드온의 군대가 300명에 지나지 않게 될 때를 기다리셨다. 하지만 결국 그만한 숫자로도 훨씬 강한 적을 충분히 무찌를 수 있었다. 항상 그렇듯이 오늘날도 참된 해방은 인간들 자신의 방법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오직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 다음, 왕가의 대를 이을 그 ‘어린아이’의 출생은 그가 곧 정의와 평화의 왕국을 건설함으로써 해방을 실현시킬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볼 때 그 ‘해방’과 밀접히 연관되어 잇다. 만일 그 ‘어린아이’를 통해 메시아를 예고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면 예언자가 말하는 ‘해방’이란 국가적 차원에서의 해방만이 아니라 인간을 정신적 차원에서부터 온전히 포용하는 보다 더 근본적인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늘로부터 내려지는 선물처럼 우리에게 주어지는(5절)이 어린아이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 특별히 인상적인 사실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위대하게 꼽히는 인물들 가운데 어떤 때는 이 사람에게, 어떤 때는 저 사람에게 산발적으로 주어졌던 수많은 명칭들이 집약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어깨에는 주권이 메어지겠고 그 이름은 탁월한 경륜가, 용사이신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 불릴 것이다”(5절).
그 어린아이는 출새에 따르는 왕권과 어깨 위에 메어질 주권 외에도 솔로몬의 지혜, 다윗의 힘과 신앙심, 모세를 비롯한 모든 성조들의 훌륭한 덕성을 갖추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과거의 모든 것의 종합이며 또한 그 모든 것을 능가할 것이다. 그러므로 독서의 마지막 구절에서 밝혀주고 있듯이 우리는 인간적 영역에 보다는 신적 영역에 속해 있는 한 초월적 인물을 대하고 있는 것이다:“이 모든 일은 만군의 야훼께서 정열을 쏟으시어 이루실 일이 옵니다”(6절). 즉, 당신 백성에 대한 야훼의 정열적 사랑만이 이와 같은 기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탄의 전례가 그 모든 명칭들을 그리스도께 돌려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자신도 예수께서 갈릴래아에서 하신 설교의 첫머리 즉 이사야서의 내용을 상기시키는 자리에서 바로 이 대목의 내용이 실현되었음을 확신함으로써 구세사적 해석을 하고 있다:“죽음의 그늘진 땅에 사는 사람들 위에”(마태 4,12-16 참조)떠오르는 그 ‘큰 빛’은 구원에 대한 복음의 선포다.
이사야 예언자가 이 대목의 예언을 통해 보다 더 깊은 인상을 주고 있는 듯 여겨지는 내용은 ‘우리를 위해 태어날 그 아기’의 외적으로 드러나는 무력함과 하느님께서 당신의 구원계획을 실현시키는 것은 이와 같이 소위 인간들의 ‘지혜’에 대한 계속적인 도전을 통해 이루어진다 :“참으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1고린 1,25).
“그 무렵에 로마 황제 아우구스토가 온 천하에 호구 조사령을 내렸다”
루가에 의한 오늘의 복음도(2,1-14)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역설과 대립을 다루고 있다. 즉 사물들이나 사건들의 아주 얕은 면밖에는 알 수 없는 인간들의 조잡하고도 이기주의적인 계산과 항상 이를 뒤집어엎는 하느님의 계획 사이의 역설적 대립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예를 들어, 루가복음사가는 “온 천하에 호구 조사령을 내리는”(2,1) 황제 아우구스토의 권력과 권위와 정치적 경제적 명성을 드러내는 행동과 인간의 역사를 지배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역사의 지배를 받고 또한 그 역사에 몰입하기 위해 기입하시는 하느님 아들의 겸손과 순명과 가난의 행동을 대립적 관계에 놓고자 하는 것이 분명하다. 또한 마찬가지로,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이 알려지지도 않은 채 무관심 속에서 태어난다는 사실과, 반면에 그와 같은 사실을 하느님의 천사들이 비천한 목동들에게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알린다는 점을 대립적 관계에 놓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때에 갑자기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그 천사와 함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14절)
여기서, 온 세상을 한마디 지시로 움직이고 전율케 하는 로마의 절대 군주의 ‘영광’은 퇴색하여 사라지게 된다. 즉 이 세상의 참된 ‘구세주’요 주인은(11절)“포대기에 쌓여 구유에 누워 있는 그 보잘것없는 갓난아이다”(12절). 그의 모친 마리아는 9개월 전쯤 바로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 노래하였던 것이다:“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루가 1,52)
이제 무엇보다도 먼저 루가복음사가가 역사적 배경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그 무렵에 로마 황제 아우구스토가 온 천하에 호구 조사령을 내렸다. 이 첫번째 호구 조사를 하던 때 시리아에는 퀴리노라는 사람이 총독으로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등록을 하러 저마다 본 고장을 찾아 길을 떠나게 되었다. 요셉도 갈릴래아 지방의 나자렛 동네를 떠나 유다 지방에 있는 베들레헴이라는 곳으로 갔다. 베들레헴은 다윗왕이 난 고을이며 요셉은 다윗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요셉은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등록하러 갔는데 그때 마리아는 임신중이었다”(루가 2,1-5).
루가복음사가가 여기에 제시하고 있는 역사적 상황은 우리의 입장에서 볼때 그렇게 명확한 것은 못된다. 예를 들어, 역사가 요셉 프라비우스가 기원후 6년쯤으로 보는 시리아 총독 술피시오 퀴리노의 호구 조사령의 시기는 정확하지가 않다. 퀴리노는 그 이전부터 그 지방에 대한 책임을 맡아 왔다(B.C. 12-10). 그러므로 호구 조사는 그 당시에 시작되어 예수의 탄생 때까지도 계속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쨋든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갖고자 하는 중요한 문제들은 이런 문제들이 아니라 루가복음사가가 예수의 탄생을 역사적 사실로-예수의 공생활 시작에 관한 서술 때에도 그러하듯이(루가 3,1-2참조)-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이와 같은 서술로써 예수께 관한 이야기가 신화나 공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고자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역사는 다른 의미를 갖게 되고 또한 다른 운명 즉 인간이 다른 인간들로부터 억압당하지 않으며 모든 탐욕과 권세와 명예와 부귀영화에 대한 유혹으로부터 ‘해방’되는 그러한 운명을 향해 가게 된다는 점을 말해주고자 한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너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왔다. 모든 백성들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이다. 오늘밤 너희의 구세주께서 다윗의 고을에 나셨다. 그분은 바로 주님이신 그리스도이시다”(11절)라고 천사가 목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한다. 주님이신 그리스도라는 분이 잠시 후에 목자들이 기쁨과 놀라움에 차서 경배하게 될 ‘구유에 누워 있는’ 그 보잘것없는 ‘갓난아이’라고 한다면(16절), ‘구원’은 바로 비천함과 무능력함으로부터 오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예수께서는 인간의 역사 안에 들어오시지만 그 역사에 말려들거나 역사에 의해 품위가 손상되시기는커녕, 오히려 역사에 당신 자신의 영적인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고 다른 의미를 부여하시어 새롭게 변모되도록 하시기 위해 그 역사를 폭발시켜 분쇄하신다. 이렇게 해서 참된 구원의 역사 즉 인간들로 하여금 사랑 안 에서 이루어지는 ‘참 행복’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진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시는 ‘새로운’ 역사는 과거의 역사와도 다시 결합된다. 예를 들어 다윗의 역사와 연결되고 있음을 들 수 있다. 요셉이 하느님께서 섭리하시는 신비스러운 계획에 따라 걸음을 재촉해 갔던 그 고을은 바로 다윗이 태어난 베들레헴이었다. 여기서 구약성서의 내용이 그리스도-천사들이 목자에게 이 세상의 구세주로 알려주는-안에서 합치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출애굽, 귀양살이에서 돌아옴, 승리, 개인적 정치적 해방 등 과거의 중대한 모든 사건들이 마침내 유다의 한 무명의 마을에서 태어난 그 보잘것없는 ‘갓난아이’를 통해 결정적 확증을 얻게 된다.
하느님의 침묵 속에서 이루어진 감동적인 신비
이 모든 사실로써 베들레헴 동굴 위에서 외쳐대는 천사들의 노랫소리에 담긴 깊은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14절) 이 마지막 표현은 보편적 구원 사상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넓게 열어준다. 즉 평화를 얻게 될 사람들은 마음이 착한 사람들, 다시 말해 정신상태가 훌륭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베풀어주시는 선성과 사랑을 받아들여 평화가 이룩되도록 하는 모든 사람을 말한다. 이처럼 하느님의 주도권을 강조함은 평화를 건설함에 있어서 인간들 편에서의 응답과 책임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촉구하고 있다. 여기서 ‘영광’과 ‘평화’라는 두 개념은 서로 밀접히 결합되어 있으며 또한 서로들 더욱 밝게 비추어 준다. ‘영광’은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계획이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되기 때문에 마침내 지상으로부터 하느님께 올라간다. ‘평화’는 메시아적 선성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그 메시아적 선성 가운데는 만일 우리 모두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계시하신 인류에 대한 새로운 계획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분께서 우리 모두에게 베풀어주시는 인간 상호간의 실제적인 화해도 포함되어있다. 이와 같이 그 결실이 엄청남으로 성탄의 신비는 참으로 위대하다. 교황 바오로 6세는 한 담화 중에서(1977. 12. 7.일자)우리가 지금 거행하고 있는 그 위대한 사건들을 안티오키아의 성이냐시오의 아름다운 표현을 빌어 “하느님의 침묵 속에서 이루어진 감동적인 신비”라고 정의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생활과 모든 역사를 쇄신시키고 변화시켜줄 힘을 감지할 수 있는 아주 세련된 귀와 무엇보다도 특히 잘 준비된 마음을 갖추어야 한다.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 성 바울로는 제 2 독서를 통해 짧지만 효과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다 :“하느님의 구원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습니다. 그 은총은 우리를 훈련해서 우리로 하여금 불경건한 생활과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게 하고 이 세상에서 정신을 차리고 바르고 경건하게 살게 해줍니다. 그리고 위대하신 하느님과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실 그 복된 희망의 날을 기다리게 해줍니다”(디도 2,1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