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공현 대축일(1월 2일 – 8일 사이의 주일)


주의 공현 대축일(1월 2일 – 8일 사이의 주일)


일어나 비추어라. 너희 빛이 왔다


제 1 독서 : 이사 60,1-6


제 2 독서 : 에페 3,2-3a. 5-6




해 설      


주의 공현 대축일은 온통 오색찬란한 빛으로 빛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동방 박사들을 머나 먼 그들의 고향으로부터 베들레헴의 초라한 오두막집으로 인도한 그 별을 통해 보다 웅변적, 상징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또한 아직까지도 알 수 없는 그 신비스러운 인물들이 예루살렘에서 헤로데의 왕궁에나 백성들 가운데 불러일으킨 그 호기심은 우리들에게도 무의식중에 전달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과 함께 태어나신 ‘유다인의 왕’을 찾아 길을 떠나고 싶은 충동을 갖게 한다.


그렇지만, 오늘 축일은 매력은 온전히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찬란한 빛’에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매일매일의 연대기적 사실을 대중화시키는 사람들의 관심사는 2천여년 전, 팔레스티나의 한 무명의 촌락에서 한 갓난아기가 태어난 것이 사실인지,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그 어떤 갈망에 의해 생겨난 이야기인지 하는 데 있다. 바로 이것이 오늘의 장엄한 전례가 우리에게 제시해주고 있는 묵상 자료들을 통해 찾고자 하는


내용이다. 




“민족들과 너의 빛을 보고 모여들리라”


먼저 이사야서에 의한 제 1 독서의 내용을  살펴 보자. 거기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한 제자가 유배지에서 돌아오는 이스라엘 공동체에-“너의 아들들이 먼데서 오고 너의 딸들도 품에 안겨온다”(4절)-그들 자신의 손으로 재건하게 될 미래의 예루살렘의 찬란한 빛에 대해 예고하고 있다. 두려워할 것이 없다. 새 예루살렘은 옛것보다 더 큰 영광을 입게 될 것이다! 성도가 입게 될 이 새롭고 보다 큰 영광이 ‘빛’의 타오르는 영상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야훼의 영광이 너를 비춘다. 온 땅이 아직 어둠에 덮여, 민족들은 암흑에 싸여 있는데 야훼께서 너만은 비추신다. 네 위에서만은 그 영광을 나타내신다”(1-2절).


하지만 예루살렘이 장차 입게 될 영광은 새롭게 지어질 건축물의 아름다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야훼께서 비추신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즉 그분이 곧 예루살렘의 영광이 되실 것이다(2절). 그러므로 이사야 예언자가 성도의 ‘물질적’ 현실을 뛰어넘어서 이야기하는 것은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비롯되는 ‘영광’으로써만 풍요롭게 될 하느님 백성의 새로운 영신적 차원을 표현하기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장차 이룩될 그 도시를 감쌀 ‘빛’도 하늘 즉 하느님 자신으로부터 오는 ‘빛’이다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이사야 예언자가 빛으로 가득찬 예루살렘과 암흑에 싸여 있는 민족들(2절) 사이의 대립적 양상을 강조하는 것은 어떤 점에서 볼 때 흥미로운 일이다. 즉 다른 민족들은 암흑에 싸여 있기 때문에 멀리서도 느낄 수 있는 ‘빛’을 찾아 모여든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찬란한 빛’은 그 민족들을 한 곳으로 모아들이는 역할을 한다:“민족들이 너의 빛을 보고 모여들며 제왕들이 솟아오르는 너의 광채에 끌려오는구나”(3절).


그들은 마침내 빛의 길을 발견하고 크나큰 기쁨에 넘쳐 그들에게도 새로운 영신적 ‘조국’을 허락해주신 야훼께 감사의 표시를 하기 위해 풍성한 선물을 가져올 것이다:“바다의 보물이 너에게로 흘러오고 뭇 민족의 재물이 너에게로 밀려오리라. 큰 낙타 떼가 너의 땅을 뒤덮고 미디안과 에바의 낙타들이 우글거리리라. 사람들이 스바에서 찾아오리라. 금과 향로를 싣고 야훼를 높이 찬양하며 찾아오리라”(5-6절). 바다의 보물들은 서방에서 페니키아나 그리스 배편으로 오고, 반면에 동방의 보물들은 대상들에 의해 시리아-아라비아 사막을 거쳐온다. 미디안, 에바, 스바는 정확히 말해 아라비아 반도의 민족들이다(이사 45,14; 창세 25,1-4참조).


그러므로 예루살렘은 모든 민족들이 모여드는 중심지가 된다. 여기에 구원의 ‘보편사상’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이런 까닭에 예루살렘은 구원된 사람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공동체의 ‘상징’이다. 그것은 사도 바울로의 표현대로 지상의 예루살렘에 대해 ‘하늘로부터 오는’ 예루살렘이며 또한 ‘우리 어머니’(갈라 4,26)이다.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문헌에서는 모든 민족들이 모여 하나로 일치되는 중심지로서의 ‘새’ 예루살렘을 교회라고 하는 것이 분명하다.


사실 바울로 사도가  제 2 독서에서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고 또한 그가 세계에 전파하도록 특별한 모양으로 위탁을 받고 있는 그 ‘심오한 계획’이 바로 교회를 통해 실현되고 있다:“그 심오한 계획이란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면서 유다인들과 함께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한몸의 지체가 되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함께 받는 사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6절). 이 구원에 대한 ‘심오한 계획’은 “지금은 하느님께서 성령의 힘을 빌어 당신의거룩한 사도들과 예언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셨지만 전에는 지금처럼 인간에게 알려주시지 않았었습니다.”(5절). 즉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계획을 실현시키실 올바른 때를 알고 계신다.




교회를 통한 그리스도의 공현




이제까지의 고찰해온 내용에 비추어, 오늘 축제는 전례상으로 교회를 모든 민족의 구원의 장소로서, 또한 그리스도 현존의 ‘표지’로서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추론해낼 수 있다. 더 나은 표현을 빈다면 오늘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구원을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어주시고 모든 이를 하나로 모아들이시기 위해 교회를 통해 이 세상에 현현하신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도 이 점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사와 비슷하다. 즉 교회는 하느님과 깊은 일치와 전인류의 깊은 일치를 표시하고 이루어주는 표지요 도구인 것이다”(교회 1항).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공현’은 교회를 통해 계속되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오늘날 우리 교회와 그 안에 몸담고 잇는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공현’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어떻게 처신하고 있는지를 자문해 보아야 할것이다. 이것은 나아가 많든 적든간에 모든 신자들이 해야 할 반성이다.


사람들이 점점 더 그리고 특히 오늘날 최고도로 교회에 요구하는 바는 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현존하여계시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여주고 또한 입증해 보이라는 것이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떼야르 드 샤르댕의 좋은 글을 하나 소개하겠다:“예루살렘아, 머리를 들어라. 작업자에서, 연구실에서, 광야에서, 사무실에서, 사회라는 거대한 도가니 속에서 피곤에 지쳐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느냐? 그런데 그들이 기술과 학문과 사고로써 일하고 잇는 그 모든 것은 너를 위한 것이다. 용기를 내라! 네 팔을 벌리고 네 마음을 열어 너의 주님이 하신 대로 활기에 넘치는 인간의 생명력을 받아들여라. 그것 없이는 너는 마치 물이 없는 꽃과 같이 쇠약해져버린다. 그러니 그 생명력을 구제하여라. 왜냐하면 너의 빛이 없이는 그것은 아무 결실도 맺지 못하는 줄기 그대로 어리석게도 스러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 마음의 상태에 따라 자신을 ‘드러내시거나’ ‘감추신다’




우리가 오늘 ‘구원의 성사’로서의 교회의 공현을 거행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항상 그 원천에는 보편적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의 계시가 자리잡고 있다고 하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도구가 ‘제작자’를 잊어버릴 수 있겠는가! 그래서 마태오 복음(2,1-12)에서만 전해지고 있는 동방 박사의 방문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리는 이 대목에 관한 모든 문제, 특히 역사적, 문학적 특성에 관한 문제같은 것은 길게 다루지 않겠다. 이 대목이 위에서 언급한 이사야서-예루살렘에 모여드는 백성들이 바치는 ‘금과 향료’의 선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마태 2,11 참조)-와 ‘야곱에게서 솟는 별’(민수24,17)에 대한 발람의 네 번째 예언 외에도 구약성서에 들어 있는 신비스러운 출생들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의 영향을 받은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관심은 이 대목의 신학적 의미에 근거를 제공하는 대목 자체에 포함되어 있는 어떤 역사적 요소에 있지 않고 이 이야기의 종교적 의미에 있다.


그 의미는 다음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1)마태오 복음사가는 제 1 장에서 그리스도를 선민의 영역에 가두어 둔듯한 인상을 주고 있으나-그리스도의 족보에 대해 생각해 보라-지금은 그 폭을 넓히고 있다. 예수께서 ‘조로부터 구원하러’(1,21)오시는 ‘그 백성’은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온 인류이다. ‘동방에서’오는 박사들의 고국이 어디이든지간에 -페르시아, 아라비아, 메소포타미아 등등-그리고 그들이 직업이 무엇이든지간에 -사제, 점성가 등등-그들은 그리스도를 찾아 모여드는 이방인들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대표하고 잇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 모두를 대표한다. 마태오 복음을 끝맺는 ‘선교사명’에 관한 내용이 이미 동방 박사들의 이야기 속에 예고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라”(28,19).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그 ‘선물’은 무한히 큰 선물이기 때문에 항상 새롭다. 그러므로 신앙을 갖고 잇는 우리에게 있어서도 주 예수의 ‘공현’은 우리 삶의 매순간에 새롭게 이루어져야 한다. 즉 우리의 신앙의 보다 더 깊은 의무에 비추어볼 때 오직 마지막 ‘공현’만을 바라고 기다려서는 안된다. 오늘의 본기도는 이와 같은 지향을 담고 있다. :“오늘별의 인도로 독생성자를 이방인들에게 드러내 보이신 천주여, 비오니, 신앙으로 이미 주를 알게 된 우리도 자비로이 인도하시어, 당신의 지존하신 모습을 직접 뵈옵게 하소서.”


2)그리스도께서는 인간들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주실 때 당신을 발견할 수 있는 방법과 수단도 함께 주신다. 즉 박사들에게는 별을 그리고  헤로데가 “그리스도께서 나실 곳이 어디인지”(4절)를 알아내려고 일부러 물었던 예루살렘의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는 성서상의 증거를 주신다. 그 별이 진짜 별인지 또는 순전히 하느님께서 인간의 마음속에 밝혀주시는 신앙의 빛을 상징하는 것인지 하는 별의 본질 자체에 대한 토론은 우리가 확신하고 있는 사실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중요한 사실은 신앙의 ‘빛’이나 ‘촉구’는 겸손하고 준비된 마음에 의해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점이다. 구세주께서 탄생하실 장소가 베들레헴이라고 예고한 성서의 가장 중요하고도 힘있는 증거도 헤로데의 대사제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메시아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동방 박사들에게는 애매하고도 불확실한 ‘증표’가 도움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은총의 작용에 순종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찾던 ‘왕’을 베들레헴의 보잘 것 없는 한 어린아이에게서 발견하고 경배를 드리기가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엎드려 경배하였다”(11절).


3)이러한 내용과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도 한가지 사실은, 전 장면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서로 다른 여러 가지 태도가 메시아가 장차 당하게 될 운명을 어렴풋이 그려주고 있다는 점이다. 메시아가 탄생할 것이라는 뜻밖의 소식에 “헤로데왕이 당황한 것은 물론 예루살렘이 온통 술렁거렸고”(3절), 그리하여 헤로데는 이미 그를 죽일 생각을 품는다(7-8절). 반면에 박사들은 순순히 별을 따라 미지의 사건들을 헤쳐 나가면서 오랜 여행을 한 끝에 예루살렘에서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던 그 별을 다시 보고서 “대단히 기뻐하였다”(10절).


여기서 복음을 열심히 읽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제자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 참혹한 죽음을 맞게 되는 그 비극적 사건이 상당히 뚜렷이 암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동방 박사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의 신앙을 촉구하며 신앙적 차원에서 우리를 가늠한다. 그리하여 주의 공현은 우리의 매일매일의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이 드러나느냐 아니면 헤로데의 경우에서처럼 감추어져 있느냐 하는 하나의 신비가 된다.




이 글은 카테고리: 복음 나눔 8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