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에게 죽음이야말로
가장 가난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가난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이 여정의 그 어떤 순간도 예수님의
죽음의 순간만큼 가난으로
충만한 순간은 없었습니다.
돌아가신 하느님이 절대적 가난이셨기에
더 이상 진전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어둡고
고통스러운 심연에 이르심으로써
아버지께서 자녀들이 되도록
운명지워 주셨지만 그들의 불순명으로
잃어버리신 모든 사랑을 얻으셨습니다.
그 사랑의 불은
'사랑이 아닌 것'을 품어 안아
녹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랑이 승리함으로써 인간이 구원되었습니다.
이 땅의 유산인 자유가 회복되었습니다.
죽음을 사랑의 행위로써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분의
사랑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한없이 나약한 우리지만
우리가 그분을 본받을 차례입니다.
그러나 진짜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이 아닙니다.
아무리 뭐라해도 육체적인 죽음은
진짜 죽음의 표징일 뿐이며
그 진짜 죽음의 가시적이고도
감각적인 무서운 표상에 불과합니다.
진짜 죽음은 하느님과의
결별이기에 견딜 수 없습니다.
진짜 죽음은 무신앙, 무희망, 무사랑입니다.
진짜 죽음은 인간이 하느님께
불순명할 때 최후로 맞게 되는 혼돈이고,
인간이 고통으로 오그라들게
되는 얽혀 풀리지 않는 무질서이며,
그의 중요한 모든 꿈의 가장 근원적 패배이고,
인간의 전체적 몰락입니다.
진짜 죽음은 공허, 어둠,
고뇌, 절망, 미움, 파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이미 결별 상태에 있던 모든 사람들과
유대관계를 맺으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죽음.
이 결별에 기꺼이 참여하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의 절망 깊은 곳에 계셨을 때,
당신의 부활로 희망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의 무력한 사랑의 심연에 계셨을 때,
당신의 부활로 무한한 사랑의 기쁨을 전해 주셨습니다.
‘진짜 죽음은 공허, 어둠,
고뇌, 절망, 미움, 파멸입니다.’
나는 이 진짜 죽음을 압니다.
감히 말씀드린다면 나는 이 진짜 죽음을 맛보았습니다.
그것은 고통이었습니다.
둘도 없을 친구들도, 피를 나눈 형제들도 도와줄 수 없었던 고통.
만일 주변의 누군가, 주변의 무언가 그때의 날 도울 수 있었다면
그것은 내게 고통도 아니었겠지요, 죽음도 아니었겠지요.
친구가 도와줄 수 있는 선을 넘어, 형제가 도와줄 수 있는 한계를 지나
바닥으로 바닥으로 내려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어디인지도 모를 어느 곳에서
나는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것은 고통의, 바닥의 끝에서의 만남이었습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그 가장 바닥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내가 하느님을 만났다는것은
하느님을 보았다거나, 하느님의 소리를 들었다거나
그런것이 아닙니다.
고통의 끝에서, 죽음 앞에서 하느님을 만났다는 것은
‘하느님!’ 그 자체입니다.
고통에서, 죽음에서 ‘하느님’을 생각하고 ‘하느님’을 선택하게 되었다는 것.
그것이 내가 만난 하느님입니다.
나는 내가 맛본 진짜 죽음, 그 죽음 앞에서 만난 하느님으로 인하여
이제 한가지 알게 되었습니다.
공허, 어둠, 고뇌, 절망, 미움, 파멸..
그 진짜 죽음도,
그 고통도,
모두 다 하느님의 영역이라는 것을.
그 안에 하느님 계시다는 것을.
그 안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내가 그 안에 있다면 그 안에서 날 만나고자 하시는 것이
그분의 사랑이라는 것을.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