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는 특별히 인간 성숙을 위해 마련되어 있습니다.
광야를 거부하려는 것은 존재의
수직적 차원, 즉 하느님과의 관계,
지속적인 기도의 필요성, 초월자와의
직접적인 대면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과거의 그리스도교 사상으로부터
일궈 낸 오늘날의 엄청난 진보,
곧 쇄신된 전례를 통해 함께 기도하는
기쁨이 존재의 고독한 면을 손상시키는
인상을 주는 것으로 여기고 싶지는 않습니다.
또 나는 오늘날 젊은이들과
급진적 사상을 지닌 많은 사제들 사이에서
이루어 지고 있는 극단적 현실주의,
곧 하느님께서는 오로지 우리가 공동체를
실현시키고 생활하고 건설해 나가는
근거가 되는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만
우리 안에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인식이
하느님과의 일치를 충만히 성숙시켜 줄 수 있는
힘겨운 개인 기도의 길을 포기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여기고 싶지 않습니다.
끝으로 나는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
(마태 18,20 참조)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 자신의 또 다른 말씀 곧
"너는 기도할 때에 문을 닫고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히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마태 6,6)라는
그 말씀을 망각하게 하는 것으로 여기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개인적 행위로 축소시킨
사람들은 분명 잘못을 범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오직 수평적 관점에서만
고찰하려는 사람들도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복음이 사회학 교과서로
전락하여 소금의 역활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진리는 정확히 두 차원의 십자로에 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상징은 십자가입니다.
또 그 십자가는 실질적으로 순교에 이르도록
생활을 통해 이루어지는 두 사랑, 곧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사랑과 형제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