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문화적 과거,
이를테면 인류의 여명기에는
하느님의 존재를 의인론적으로
생각하여 흰구름 위에 있는
노인으로 상상하거나 정삼각형 안에 있는
눈으로 상상하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나는 이 문제에 관해 신명기가 주는
다음과 같은 권고의 중요성을
요즘처럼 깊이 깨달은 적이 없습니다.
"너희는 깊이 명심하여라.
하느님의 모습을 남자의 모습이나
여자의 모습 또는 땅 위에 있는
어떤 짐승의 모습이나
공중에서 날개치는 어떤 새의 모습
또는 땅 위를 기어다니는
어떤 동물의 모습...등 어떤 모습을
본따 새긴 우상으로 모시어
죄를 짓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신명 4,15-18 참조)
"주님께서 호렙의 불길 속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 너희는
아무 모습도 보지 못하지 않았느냐?"
(신명 4,15)
하느님의 초월성은 항상 그 초월성을
왜곡시키는 어떤 모습을 통해
내게 이르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
집과 연회, 하늘과 땅과 같이
그 초월성을 의미적으로 드러내는
어떤 상징적 표징으로 알려집니다.
그 표징은 결코 그분의 현존을
통달하지도, 도구화하지도 못하며
제한시킬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투명한 표징일지라도
표징은 표징일 뿐입니다.
그분의 현존은 표징의
한계를 넘어섭니다.
나의 생명이 육신의
한계를 넘어서고 나의 욕망이
모든 능력을 넘어서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은 우주의 실체,
인간의 실체, 역사의 실체 속에 있습니다.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습니다.
안에 있다 하더라도 안에 있다는
그 사실이 그 현존을 제한시킬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초월적이어서
그 현존을 수용하는 것과
결코 동일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내 인격이 신비로서
그 거처가 되는 육신의 한계를
넘어 무한히 초월함으로써 결코 육신의
한계에 제한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신비는 위격의 신비입니다.
따라서 결국 '그분의 모상으로'
(창세 1,27)
창조된 우리는 그분의
모범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