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1. 가톨릭 교리에서 내세(來世)는 어떤 의미입니까?
천주교에서 가르치는 모든 교리들은 결국 영원한 생명, 즉 인간의 구원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굳이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해야 인생을 의미있게 영위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어떻게 살아야 후회없이 보람된 삶을 살 수 있나’ 등 삶에 대한 궁극적인 고민은 그 시작에서부터 영원한 생명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한한 인간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에 비해 덧없이 흘러가 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특히 죽음을 앞둔 사람이나 그 주변의 사람들에게 더욱더 절실한 문제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사후세계에 관한 것입니다.
내일, 모레, 글피, 그리고 몇 년 후, 또 수십 년 후 그리고 아주 더 먼 미래에 내게 무슨 일이 생길 것인가? 내 가정에, 나의 일과 계획과 동경에, 또한 나와 유대를 맺고 있는 이웃에게, 국가와 사회 그리고 이 지구상의 정치와 경제의 미래에는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인가? 이러게 묻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종교인이든 무신론자이든 반종교인이든 간에 인간은 세상에서 단 한 번 주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으므로 무한한 삶, 영원한 삶을 동경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욕심은 생명의 장단에 상관없이 무한합니다. 우리가 흔히 듣는 바와 같이 “그렇게 돈벌어서 무덤까지 싸가지고 갈래?”라는 말은 적어도 생명에 관해서는 인간이 나약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말입니다. 또한 인간은 잠시 지나갈 현세적인 삶의 짧은 영화를 위해 온갖 부정한 일까지도 서슴지 않고 행동으로 나타냅니다. 오늘날의 환경오염 문제나 살인, 강도 등의 사건들은 바로 인간의 욕심으로 비롯된 일들입니다. 그런 반면에 학생들이나 노동자들이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우고 군인이 국가를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면서 싸우는 것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지켜야 할 더 높은 가치가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자신의 생명과 미래를 국가와 정의를 위해 송두리채 내맡긴 사람들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믿는 바를 숭고하게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유한한 생명은 그 자체로 유일회적인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높다고 여겨지는 가치를 위해서는 목숨을 바쳐서까지도 그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이중적인 면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인간 삶에 종교는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불교가 해탈이라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현 세상을 고통의 바다(고해)로 보는 입장은 그 자체로 훌륭한 것인가?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서 볼 수 있듯이 세상의 일들은 모두 덧없는 것이기 때문에 별로 중요시되지 않거나 오히려 증오해야 할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 과연 그렇다면 사람이 어떤 종교를 택하여 거기에서 가르치는 교리들을 배우고 믿으며 살아가는 근본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현세란 사후에 펼쳐질 세계로 가는 여정 속에서 그저 ‘거쳐가는 장소’ 이외에는 다른 의미가 없다는 것일까요? 또한 영원한 삶이란 어떤 모습인지, 사람이 죽은 뒤에는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는지…. 인간의 죽음에 관해서 이야기하자면 정말 밤을 새워 이야기해도 모자랄 정도로 누구에게나 할 말도 많고 걱정되는 것도 많을 것입니다.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 하다보니 본의 아니게 무거운 분위기가 되었군요. 그러나 이 문제는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결코 도외시될 수 없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기 때문에 좀더 깊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긴장을 조금 푸시고 특별한 작업 한 가지를 함으로써 우리의 문제에 좀더 접근해 보았으며 합니다.
2. 개인의 본질적인 문제로 관심을 모으기 위한 작업
(약 15-20분 소요)
<1> 먼저 책상을 깨끗이 정리하시고 볼펜과 메모지 다섯 장만 준비하십시오.
<2> 준비하신 메모지에 “나는 누구입니까?”에 대한 답을 하나씩 다섯 장의 종이에 적으십시오. (교육자는 다음과 같이 적을 수 있도록 인도한다. 예를 들면 ; 1. 나는 인간입니다 / 2. 나는 우리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 3. 나는 00회사에 다니는 사람입니다 / 4. 나는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 5. 나는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등등)
<3> 이제 나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에 우선순위를 정하는 순간입니다. 즉 내가 바라본 나의 모습 중에서 덜 중요한 것부터 차례로 구겨서 책상 모퉁이에 놓고, 더 이상은 구겨 놓을 수 없는 나의 모습 한 장만 손에 들고 계십시오.
<4> 구겨진 자신의 모습과 손에 들고 있는 구기지 않은 나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주의깊게 살펴보면서 자신의 모습에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우선순위에 따라 번호를 매겨 봅시다. (교육자는 피교육자로 하여금 충분한 시간을 갖고 자신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도록 여유를 준다)
<5> 이제 우선 순위를 그렇게 정한 이유와 그 내용을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교육자는 대답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를 말할 수 있도록 인도한다. 설명이 끝나면 교육자는 이 작업이 갖는 의의에 대해 이야기한다)
<6> 수고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주변의 크고 작은 일들로 인하여 정작 중요한 나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스쳐 지나가기 일쑤입니다. 세상에서 둘도 없는 ‘나’는 누구의 아버지 혹은 누구의 어머니이기 이전에, 직업과 신분에 관계없이 중요한 존재이며 과거와 현재를 통하여 가꾸어지고 미래를 통하여 발전할 희망을 갖고 있는 독립적인 인간입니다. 우리들이 지냈고 또 지내고 있는 과거와 현재는 직접 우리의 오관으로 체험하는 세계이므로 우리 스스로 책임성을 거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반성도 하고 결심도 하는 것이지요. 그러지만 우리의 미래는 어떻습니까? 오로지 독립적인 우리들 자신은 미래에 대해서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우리가 죽고 난 뒤의 세계에 대해서는 어떤 계획이 있습니까? 잘 아시다시피 죽음에 직면했을 때 우리 인간은 우리의 힘만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를 구성하는 독립체로서 “함께”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인 동시에 보다 더 밝고 명확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공유함으로써 이 세상에서의 삶을 의미있게 가꾸고자 노력하는 인격체입니다. 이제 나에 대한 문제에 깊은 관심을 쏟아 보는 시간이 되도록 합시다. 나 자신의 절박한 문제이면서도 고금을 통하여 모든 인류가 공통적인 관심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죽음의 문제, 사후 세계에 관한 문제, 상선벌악 사상과 관련된 내세에 관한 문제에 좀더 깊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3.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사후의 세계’에 관해서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아니면 설명해 주지 못할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사실 몇몇 사람이 사후세계를 다녀왔다고 말하고 책도 써낸 적도 있었습니다만 어느 것 하나 합리적인 설명이 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노력과 희망에 맞갖는 것이 아닐 뿐더러 이미 상상 가능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가르치는 사후의 세계는 일단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설명됩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것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어떤 것도 확실하게 설명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바다 밑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우리들은 단지 노를 젓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태양이 바다 위로 떠올라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는 태양에 대한 상상만이 가능할 것입니다. 단지 우리에게는 태양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노를 젓는 일이 중요합니다. 우리들의 항해는 언젠가 태양을 볼 수 있다는 희망으로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10월에 전라도 해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스란히 물에 잠기게 된 사건을 경험한 바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의 좁은 예지력으로 이렇게 엄청난 사건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 밖에도 인간 삶에는 특히 죽음과 관련하여 엄청난 부조리 현상이 매우 많습니다. 한 편의 부조리극을 살아가는 인간들은 그 어느 누구도 한 치 앞의 미래를 예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언제나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마냥 두려워만 할 것입니까? 잘 아는 친지들을 여의고 언제까지나 무덤 옆에서 통곡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언제나 또 다시 태양을 향해 노를 젓되 기쁨과 희망을 안고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태양에 대해 우리에게 미리 알려준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는 약 2000여 년 전에 반대자들로부터 죽임당하셨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분입니다. 그분이 살아계실 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걱정하지 말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리고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만일 거기에 있을 곳이 없다면 내가 이렇게 말하겠느냐?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같이 있게 하겠다.” (요한복음 14장 1-3절)
이 말씀을 통하여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인간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구원의지’입니다. 곧 신(神)인 예수가 인간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인간구원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의 구원은 아버지의 집에 인간들을 초대하는, 곧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의미와 같은 것입니다. 또한 마지막 절에서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영원한 생명은 ‘당신과 함께 있는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인간이 죽고 나서 하느님 앞에서 받는 사심판 후에, 혹은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공심판 후에 당신과 함께 있게 된다는 것을 일컫습니다. 이처럼 희망적인 말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따라서 예수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4. 부활한 육신의 모습은?
이미 말씀드린 영원한 생명이란 인간이 죽은 뒤에 다시 살아나게 된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인간이 죽은 뒤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희망은 곧 예수의 부활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즉 예수가 부활의 과정을 몸소 경험하신 이유는 바로 우리 인간들을 죽음에서 다시 삶에로 이끌어 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뒤 다시 살아나는 인간은 현재의 “나”를 형성하고 있는 그 모든 것의 전체적인 면에서 부활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육체는 없고 영혼만이 떠도는 상태로의 부활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현재의 나”는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지상생활 전체를 통하여 형성된 “나”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한 측정기준은 바로 현세적인 삶의 내용에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가르침이 제시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법 없이도 살 사람”, 혹은 “죄 짓고는 못사는 사람”이란 표현은 그런 측정기준을 통과하고도 남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5. 영원한 생명의 내용과 현세에서의 삶과의 관계
위에서 말한 인간의 부활은 개인적으로 그저 천당과 지옥에 향하게 된다는 측면에서만 언급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죽은 뒤의 세계는 현재의 이 세계가 아닌 제2의, 제3의 장소로 이해되어서도 안될 것입니다. 사실 이런한 관점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의 삶을 전혀 무가치한 삶으로 여기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가 개인의 독립적인 구원만을 바랬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예수가 만일 개인의 독립적인 구원만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한다면 무엇하러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쏟았겠습니까? 그저 이러 이러한 원칙들을 제시하기만 하면 될 것을…. 그러나 예수는 그렇게 행동하시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버림받고 괄시받고 가난하고 소외받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인 것은 바로 세상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에 대한 관심에 동참하도록 이끌기 위한 것이며, 동시에 가진 것을 나누며 함께 살아가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의 가르침은 결국 나 하나만 잘 살면 된다는 식의 이기적인 사고 방식으로는 결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즉 지겨운 시련의 연속이었던 이 세계를 버리고 홀연히 부활하는 인간의 모습은 영원한 생명을 받을 인명부에서 제외될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6.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해야 할 구체적인 일들은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을 담고 있는 복음서에 아주 자세히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부당하게 돈을 모았던 사람에게는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 교만과 시기와 탐욕을 버리고 어린이와 같이 되는 것 등등은 모두 영원한 생명과 관련된 행위들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 능력은 당신을 믿는 신자들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발휘됩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이의 선행과 예수를 믿는 이의 선행에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게 보이지만, 사실 전자의 경우에는 선행을 하는 근본 목적과 방향이 부족하게 표현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앞으로 다가올 재림의 시기에 완성될 세상을 향한다는 목적과 그 방향성이 명백히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행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은 어두운 현실에서나 그 보다 좀 나은 상황에서나 그 어디에서든지 변함없는 복음 즉 기쁜 소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언제나 그랬듯이 “나를 따르라!”는 인류를 향한 손짓을 보내고 계십니다. 우리 인간이 모든 생활을 예수님을 향한 활동으로 여기고 기쁘게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예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 이 말을 듣고 의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또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으며, 언제 주님께서 병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저희가 찾아가 뵈었습니까?” 그러면 임금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하고 말할 것이다. (마태오 복음 25,35-40)
이 말씀은 예수께서 인간의 선행과 그 결과에 대해서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들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계속 이어지는 말씀에는 반대로 악한 사람들에 대한 비유가 설명되고 있습니다 (41- 46절). 결국 이러한 예수의 비유는 인간이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느냐 아니면 반대로 영원히 벌받는 곳으로 쫓겨나느냐에 대한 결정은 그들 주변의 이웃들에 대한 선행의 여부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현장에서 보잘것없는 형제들 안에 구체적으로 현존하고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서” 우리들의 삶이 변화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따라서 신앙의 시작이란 곧 생활 태도의 변화를 의미하며, 동시에 이러한 삶을 살아가기로 약속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 있는 한 경험하지 않을 수 없는 고통, 건강의 쇠퇴, 피로, 늙음과 질병, 매일의 고민, 좌절, 다른 사람과의 충돌과 오해, 언쟁, 고독과 실망, 그밖의 모든 고통과 고뇌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의 신앙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