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과: 예수님은 누구시죠?

 

제4과: 예수님은 누구시죠?

1. 시작성가:

2. 말씀읽기:마태16,13-19 :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다

13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15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18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3.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 가지를 물어보십니다. 하나는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하냐는 것과 다른 하나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를 물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이렇게 물으실 수 있습니다. ①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와 ②사람들이 너를 통해서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입으로는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삶은 어떻게 고백하고 있는지 자신이 없습니다. 내 입이 아니라 내 삶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3.1.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를 묻고 계십니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그러자 제자들은 그동안에 자신들이 들었던 이야기들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이라는 신앙고백을 통하여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믿는 이들에게나 믿지 않는 이들에게나 공통된 생각은 ‘특별하신 분“임에는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① 예수님은 특별하신 분

 헤로데 안티파스는 예수님을 자신이 죽인 세례자 요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더러는 엘리야라고 생각했는데 엘리야는 사람들의 지대한 존경을 받았으며 하느님에 의하여 기적적으로 들어 높여졌기 때문에 메시아의 선구자로서 다시 오리라고 기대되고 있었습니다(말라4,5-6). 그리고 예레미야 예언자 역시 대단한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예언자들 가운데 하나라는 추측은 예수님께서 얼마나 높이 평가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언자보다 더 높은 명예를 거의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한 가지 더 높은 명예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메시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분명 대단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데 그분이 바로 메시아인줄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메시아가 오기 전에 먼저 엘리야가 오기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인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마귀 두목의 힘을 빌어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이라고 비하하기도 했습니다.



내 주변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고백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저 역사의 인물 중에서 위대한 성현으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듣고 있습니까?



② 베드로 사도의 고백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 말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베드로 사도는 제자들을 대표해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고백합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통해서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있었는지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을 예수님께서 나에게 하셨다고 생각해 봅시다. 내 삶이 멋지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뭔가 다르구나!”하는 소리를 들을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그리스도로 고백할 것입니다. 하지만 내 삶이 그저 그렇다면 “예수쟁이들이 또 떠드네!”하면서 외면할 것입니다. 입만 살아서 움직이고, 일치보다는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모욕을 당하시게 될 것입니다. 내가 생각한 것이 내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나는 주님을 누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는 사람이고,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이며,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사람입니다.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고, 너그러운 사람입니다. 용서해줄 줄 알고, 용서 받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며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③ 계시

 계시란 하느님께서 초자연적인 신비를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시고,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셨기에 예수님을 알 수 있는 것이고, 초자연적인 비추임이 있었기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산삼이나 다이아몬드를 아무나 감별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도 “볼 눈”과 “들을 귀”가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것과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 사도가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계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너는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심오한 신비를 아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복된 사람이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본다면 내가 복된 사람인지, 아닌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을 머리로만 파악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이 생겨나지 않고, 영적 성장도 없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④ 복을 받는 베드로 사도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한 베드로 사도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십니다.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실현되는 순간입니다. 알고 있는 사람에게, 능력이 되는 사람에게 맡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성문에 의해 보호되는 도시나 현관문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집에 비유되고 있는데 문을 열고 닫기 위해서는 열쇠가 필요합니다. 열쇠는 권한을 부여받은 수위나 청지기가 갖고 있는데 베드로는 바로 이런 청지기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엄청 큰 권한을 갖게 되는 청지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풀다와 매다”는 것은 “옳다, 그르다”를 판정할 수 있는 권한입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공동체에서 제외시키거나(파문)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이는 권한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무엇이 올바른 교리인가?” 하는 결정과 “누가 그리스도의 교회에 받아들여짐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구원에 참여하게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권한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이 선언은 하느님 앞에서 유효합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몸소 선언하신 것처럼 선언되는 그 순간에 유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엄밀히 말한다면 신적인 사명을 수여 받은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의 판정은 이러한 힘과 신적인 유효성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이 교회에 부여되어 내려오고 있습니다.



3.2.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35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36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37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1,35-37)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강생구속(降生救贖)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15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쳤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말한 분이시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요한1,14-15)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에 의해 쫓겨나면서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하고 외쳤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백인대장의 입에서 고백됩니다.

37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 38 그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 39 그리고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 그분께서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하고 말하였다. ”(마르15,37-39)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고, 크신 사랑과 은총을 베풀어 주셨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②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말로서 메시아 또는 구세주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그리스도, 즉 구세주이십니다.

35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그곳에 다시 서 있다가, 36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38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3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41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42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요한1,35-42)


③ 다윗의 자손

 다윗의 자손은 메시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가장 훌륭한 왕은 다윗이었고, 유다인들은 다윗의 자손 중에 한 사람이 일어나 자신들의 비참한 상황을 위로하고, 다시금 자유와 평화를 주시는 메시아가 오실 것임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1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6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마태1,1-16)

 또 자비를 청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를 씁니다. 즉 예수님을 메시아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29 그들이 예리코를 떠날 때에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랐다. 30 그런데 눈먼 사람 둘이 길가에 앉아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31 군중이 그들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들은 더욱 큰 소리로 “주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32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들을 부르신 다음,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셨다. 33 그들이 “주님, 저희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34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자, 그들이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따랐다.”(마태20,29-33)



④ 사랑 지극하신 분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 무식하고 단순한 사람들, 병들고 탄식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28-30)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자비를 청하는 이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리 힘드셔도, 음식 드실 시간, 주무실 시간조차 없어도 군중과 함께 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오려고 하는 사람들이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몰려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져 보려고 항상 그분 주위로 몰려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그들을 찾아 나서셨으며, 냉대 받는 사람들과 식사를 함께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들 모두를 당신께로 부르시며, 그들을 편히 쉬게 해주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그들은 마치 목자 없는 양들처럼 흩어져 있고 지쳐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 있으며 멍에를 메고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이 짐과 멍에는 무엇입니까?

 율법학자들은 농부가 가축들에게 짐을 지우듯이 율법의 규정이라는 힘들고 괴로운 멍에를 백성들에게 지워주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구원과 생명을 위해 주어졌던 율법을 수백 가지의 특수한 규정으로 만들어 견딜 수 없는 짐이 되게 한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러한 규정들을 다 지킬 수는 없었으며 율법학자들 자신들도 그것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쉬게 한다.”란 말은 노동을 쉬게 하고 힘을 다시 돌이켜 준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수고와 무거운 짐을 벗게 해 주실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보다도 더 철저하게 율법을 가르치셨고, 그것을 지키도록 요구하셨지만 예수님의 이러한 멍에는 인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을 괴롭히거나 피곤하게 하기 위해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 안에 모든 계명의 핵심을 넣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백성들을 너무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 모두 구원되기를 바라셨고, 축복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지극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기쁘게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합니다. 그것은 일이 아니라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내 시간과 열정을 내 놓고도 기뻐합니다. 자신의 것을 계산하지 않고, 주고도 아까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더 주려고 합니다. 그리고 기뻐합니다. 해야 할 것을 기쁘게 하고, 신앙생활을 부담스러워하지 않습니다. 겨우 주일 한번 간신히 지키는 것이 아니라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기쁨입니다.



⑤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단죄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청한다면 “누구나” 용서를 받습니다.

3 그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4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5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6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7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8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9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10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11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8,3-11)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살피신다면 우리 중에 감당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께는 용서가 넘치십니다. 자비가 넘치십니다. 나 또한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자비를 베풀고, 늘 용서받고 살아가고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⑥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39“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40 그러고 나서 제자들에게 돌아와 보시니 그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너희는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 41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 하시고, 42 다시 두 번째로 가서 기도하셨다. “아버지, 이 잔이 비켜 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마태26,39-42)

십자가의 죽음은 인간이 되신 예수님께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하러 오셨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죽음을 기꺼이 맞이한 소크라테스와 비교를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시고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 죽음은 예수님의 수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어 고통을 당하시기에 그 고통은 더 클 수밖에 없고, 예수님께 가해진 고통은 상상할 수가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결코 쉬운 죽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함부로 비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상황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이 일을 하러 오셨지만 그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기에 괴로워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유약한 모습을 보여주시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영웅적인 모습으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메시아가 아니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신앙생활 하면서 힘들고 지쳐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친다 할지라도 힘을 내라고 모범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고통은 고통입니다. 하지만 그 고통을 이겨나가는 사람들이 바로 신앙인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여주십니다.



 또한 기도는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하느님께 협박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 그것이 기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도 안에서 “기도의 효과”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기도하셨지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렇다면 기도하지 말아야 될까요? 해도 소용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기도 할까요? 우리 눈에는 기도의 효과가 없는 것 같지만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효과를 보십니다. 즉 고통스럽지만 당당하게 십자가를 지실 수 있는 힘을 얻으신 것입니다.  내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 이것은 기도가 아니라 협박이요 하느님께 드리는 불경함의 폭력입니다.



⑦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

5 그때에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찾는 줄을 나는 안다. 6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와서 그분께서 누워 계셨던 곳을 보아라. 7 그러니 서둘러 그분의 제자들에게 가서 이렇게 일러라.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알리는 말이다.” (마태28,5-7)



⑧ 자비로우신 심판관

 예수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는 구원을 베푸십니다. 당신의 제자라 하여 물 한잔 주는 이에게는 제자가 받게 될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이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마태10,42)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결코 엄청난 것들이 아닙니다.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라는 것입니다. 또 사랑받고 있다면 그 사랑을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9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루카12,8-9)



 하느님께서는 나를 너무도 사랑하시는데 나는 내가 원할 때만 하느님께 사랑을 드립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내 필요에 의해서 사랑을 고백하는 것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성당에 빠지고, 어쩔 수 없었다고 당당하게 성사보고, 또 성체를 모시고 성사를 보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 행동과 하지 말아야 하는 행동이 있습니다. 내가 뿌린 대로 거둘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안다고 하면, 내 삶 안에서 하느님을 증거 하면서 살아간다면 하느님께서도 나를 안다고 하실 것입니다.

 신자가 뭐 그러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비신자들의 입에서 신앙인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저렇게 나옵니다. 주일에 성당에는 안가도 운동이나 예식장에는 목숨 걸고 가고, 봉사하라고 하면 바빠서 못한다고 하지만 사회단체에서는 열심히 일을 합니다. 그리고 핑계를 댑니다. 잠시 쉬고 싶습니다. 신부님이랑 안 맞아서 활동 못하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성당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행사 때만 얼굴 비칩니다. 그런 사람은 하느님을 안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명심합시다.

 내가 예수님을 자비로우신 심판관으로 만나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안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모든 이에게 구원을 주시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안다면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고백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4. 나눔









5. 마침기도 및 마침성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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