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1. 말씀읽기: 루카5,33-39
단식 논쟁-새것과 헌것 (마태 9,14-17 ; 마르 2,18-22)
2. 말씀연구
나는 이것을 하는데 왜 당신은 그것을 하지 않습니까?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하여 “왜 단식을 하지 않는지”에 대해 항의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예수님 일행은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예수님과 제자들. 세리도 제자로 거두시는 예수님. 그들은 그런 예수님이 못마땅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누가 미우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 사람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밉게 느껴집니다.
33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의 회개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잔치를 즐기면서 어떻게 회개하라고 말할 수 있는가? 회개나 고행을 말하려면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그렇게 단식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예수님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그들은 먼저 세례자 요한을 말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낙타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예수님께로 돌려놓기 위해서 고행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이 그의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또한 바리사이들도 단식을 열심히 했습니다. 하지만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열심히 단식을 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당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단식은 애도의 뜻을 가지고서 슬퍼해야 할 때 해야 합니다. 단식과 기도는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단식하는 날은 기도하는 날이었습니다. 단식은 사람을 약하게 하며, 하느님께서는 약하고 궁핍한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이곳저곳을 방문하시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초대하는 이들의 청을 물리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일행의 생활은 풍요로운 생활은 아니었습니다. 빵이 없을 때도 있었고, 안식일에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비벼 먹을 때도 있었습니다. 고행의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신 백성과 함께 하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백성들은 기뻐했습니다. 그러니 “혼인 잔치 손님들이(예수님의 제자들, 백성들) 신랑(예수님)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35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당신이 피를 흘려 구할 제자들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로 비유를 하십니다. 성경에서도 하느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많이 비유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롭게 구원을 받는 인류의 신랑이라고 불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 지금 완전히 새로운 것, 새로운 법의 다스림을 받는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 어떤 결혼식이 거행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이 기간은 슬퍼하거나 단식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도래한 구원의 때를 기쁨의 때인 혼인식에 비기셨습니다. 주님의 은총의 해가 도래하였기에 지금은 단식의 때가 아니라 잔치의 때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여 단식했습니다. 신랑을 강제로 빼앗긴 슬픔의 표시로 단식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폭력에 의한 당신의 죽음을 암시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떠나가시는 것은 폭력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폭력자들은 스스로 옳다고, 하느님을 공경한다고 자부하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 입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속으로 예수님을 배척하였고, 이어서 말로써, 그리고 마침내는 행동으로 예수님을 배척하였습니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또 비유를 말씀하셨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만 아니라,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당시에는 물에 담근 일이 없는 새 천이 한 번 물에 들어가면 줄어들어서 낡은 천을 잡아 등겨 찢어지거나 구멍을 크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시도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어리석은 사람임이 증명 되는 것입니다.
쇄신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새 옷에서 조각을 내어 헌옷을 깁지는 않는 다는 말씀. 그렇게 되면 둘 다 못쓰게 된다는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복음의 정신 한 부분을 가져다 그것을 유다교 정신에 맞추려 하는 노력은 당치 않은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복음의 정신도 그 핵심을 잃고, 유다이즘도 그것을 견디어 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는 것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바리사이적 유다이즘입니다. 그들이 율법에 덧붙여 놓은 번잡스럽고 다루기 어려운 규정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때는 새로운 탄생을 포함하고 있으며, 인간의 회개와 완전한 마음의 변화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단지 옛것에 새로운 규정이나 의식을 덧붙이는 것만으로는 어림도 없는 것입니다.
37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가죽부대는 나귀나 낙타 등을 이용하여 실어 날랐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마찰로 인하여 표피가 엷어지고 약해졌습니다. 더구나 새 포도주는 발효하여 그 부대를 터뜨리고 포도주가 쓸모없게 됩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담았던 것입니다.
율법의 노예가 되고 그릇된 전통을 고집하고 있는 바리사이파 사람은 헌 가죽부대입니다. 그 헌 부대에는 새 술인 복음을 넣을 수가 없습니다. 새 술은 편견을 버린 마음, 그것을 이해하고 맛볼 수 있는 순진한 새 마음이 마실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복음은 유다이즘에 없는 이 새로운 정신을 인생에 가져다주었던 것입니다.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은 새 포도주입니다. 구원의 기쁜 소식을 가져오신 분이고, 구원을 주시는 분이시니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새로운 마음(부대)을 가져야 합니다. 기존의 생각들을 버리지 않으면 결코 예수님을 믿고 따를 수가 없습니다. 형식만 남은 신앙을 가지고, 사랑과 열정이 담긴 신앙을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그런데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셔 본 사람은 아무도 즉시 새 포도주를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편견과 습관을 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참된 회개, 내적인 마음의 변화보다 더 힘든 일은 없습니다. 오래 된 것에 더 애착이 가게 마련입니다. 오로지 모세의 율법에 만족하고 종교적 불만을 느끼지 않는 그들은 복음의 새롭고 숭고한 아름다움을 그리워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무딘 그들의 마음을 질책하십니다.
이 두 가지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쇄신을 요구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해 주십니다. 더 나아가 나 자신을 버려야 한다고 예수님께서는 요구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참된 제자라는 표시입니다. 모든 틀을 벗어 던지고 예수님의 뜻에 따르는 것.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으로 채우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변화를 싫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변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3. 나눔 및 묵상
① 내 것을 고집하고, 내 틀에 상대방을 맞추려 하는 것이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장애물이요 걸림돌일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그렇게 했던 것처럼, 나는 또 어떤 바리사이가 되어 내 곁에 계신 예수님을 박해하고 있습니까?
② 예수님께서는 쇄신을 말씀하시면서도 그것이 어렵다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셔 본 사람이 즉시 새 포도주를 마시려 하지 않는 것을 예를 들면서 말입니다. 알면서도 안 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 것들 함께 나눠 보면서 한걸음씩 예수님께로 가기 위해 노력해 봅시다.

ㅎㅎ 생각해 보니 늘 바리사이의 모습으로 고백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도할 때의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아침에 눈을 부비며 아무런 생각없이 앚아서 무릎을 꿇는 모습이 사랑이 없는 그냥 형식적인 고백의 자세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버지께서 얼마나 서운하셨을까요.
사랑의 소리가 아니라 누구에게 하는지도 모르는 고백을 하는 자식을 바라보는 심정은 어땠을까요?
갑자기 너무 죄송하네요.
단식도 사랑에서 나오는 절제의 힘인데 ….그치요?
하물며 누구를 향한 기도인지도 모르게 그냥 소리만 냈던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니 정신이 번쩍 듭니다.
하루를 마감하고 수다떠는 기도처럼 하루일과중에 하는 기도에도 사람의 숨결을 넣어야 겠습니다.
맞습니다. 내것을 버리고 상대의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가 틀리고 내가 옳다고 고집을 부리지요.
그리고 틀린 그의 의견을 중시한다고 말을 만듭니다.
“신앙인의 자존감” 이라는 말이 순간 생각납니다.
전 그 말씀의 중요함을 몰랐는데 이젠 깨달았습니다.
신앙인의 자존감을 높이는 것은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배움도 아니고 돈과 명예도 아닙니다.
신앙인은 일반인들과 다른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으로 자존감을 세우는 것임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그 나머지는 다 부수적인 것음을…..
그 기본이 될 때 많은 열매가 달림을 알았습니다.
만약 그리된다면 모두가 새 포도주로 거듭난 의로운 이들이 뭉쳐있는 공동체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