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과 은총과 구원

 

제 13과: 은총과 구원

1. 시작성가:

2. 말씀읽기: 마태19,16-26

16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18 그가 “어떤 것들입니까?” 하고 또 묻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19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20 그 젊은이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21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23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24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5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하였다. 26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3. 은총과 구원

“구원은 하느님의 은총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그리스인이 된 것은 하느님의 은총의 결과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 편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에 대한 공로는 전적으로 하느님께로  돌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있어서는 하느님이 (선수)를 취하셨고 인간은 오로지 회개와 믿음의 반응만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의 결과입니다. 구원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은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졌고 이 은총의 영향은 한정된 소수에게만 주어지기로 예정된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아무리 율법적으로 행위가 완전하여도 그리스도가 없는 한 절망”이라는 것입니다.



3.1. 구원은 하느님의 은총

① 부자청년과의 대화

 영원한 생명에 관심을 가진 청년. 그 청년은 참으로 대단한 젊은이였던 것 같습니다. 그는 계명을 충실히 지키면서 하느님 나라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갈증이 있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더 해야 하는가? 그는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계명들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속하기 위해서 주신 것들이 아닙니다. 인간을 잘 살게 하시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잘 살려거든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 계명을 지키는 일들이 바로 선한 일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 사랑에 관련된 계명들, 즉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을 가르쳐 주십니다.

 비록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언어의 폭력으로 상대방을 죽일 수도 있을 것이고, 육체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마음으로 죄를 범할 수도 있을 것이며, 나를 합리화시키면서 다른 사람의 것을 내 것처럼 사용하고, 탐내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도 있을 것이며, 자신의 이익과 어려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적당히 거짓말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쉬운 것 같지만 참으로 어려운 계명들입니다. 하지만 어렵게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내가 나 자신을 합리화 시키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아니라고 말하고,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계명을 잘 지키며 살아가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뜻밖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청년의 대답은 자신에 대한 자랑은 아닌 듯 합니다. 그의 성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답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부자청년에게 이상과 현실이 부딪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이라는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계명을 실행하는 것에만 머물지 않고 그 이상,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지켜야 할 세상으로부터의 이탈뿐만 아니라 완덕을 지향하며 청빈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재산을 버린다는 것은 새로운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 곧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일, 가난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베푸는 일, 모든 자연적인 청빈보다도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청년은 이 말씀을 듣고 당황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가 모든 것을 버리면 자유롭게 예수님을 따를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결정을 할까요?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② 부자와 하느님 나라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고 말씀을 하십니다.

가진 것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준다는 것. 분명 어느 누구에게도 쉬운 것은 아닙니다. 재물에 집착이 없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운 이유는 부자가 섬기는 대상이 하느님이 아니라 돈이기 때문입니다. 재물과 하느님을 함께 섬길 수는 없습니다. 재물을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1) 모든 것을 움켜쥐고서는 하느님 나라의 문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움켜쥔 것을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문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움켜쥐고는 통과할 수가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재물들은 무엇이 있을까요? 내가 포기하지 못하는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요? 이 재물들은 하느님보다 더 크게 생각하고, 집착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 재물은 물질을 넘어서 자신의 고집일 수도 있고, 취미일 수도 있고, 직장일 일수도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신앙 모임에 못나가요”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것이 모두 핑계일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③ 구원

 제자들은 깜짝 놀랍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제자들은 당혹감과 절망감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런데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말 안에는 자신들의 힘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있는 듯 합니다. 하지만 구원을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정당하게 구원을 요구할 권리가 없으며 혼자 힘으로는 구원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게다가 아무런 노력도 없이, 오직 물질에만 집착한다면 그가 구원받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무자비한 분이 아니십니다. 처음에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께서는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지켜왔다고 말씀을 드리니 예수님께서 한 단계 위의 것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나름대로 다 단계가 있습니다. 유아기에는 이유식을 먹어야 하고, 어른이 된다면 이유식에서는 벗어나야 합니다. 신앙의 단계를 유아기, 청소년기, 성인기, 중년기, 장년기, 노년기로 구분해 본다면 각 시기별로 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성당에 처음 나온 사람들에게 묵상기도나 성체조배, 매일미사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매일 미사에 참례하는 분께 아침저녁 기도만을 가르친다는 것도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참된 신앙인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지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아서 행동하고, 하느님을 뜻을 실현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노력하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은총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엄한 감독관이나 폭군이 아니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구원으로 이끌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을 알고 있기에 하느님을 종이 주인을 두려워하듯 그렇게 대하지는 않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깁니다. 그래서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들을 하게 만들고,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기뻐하게 만듭니다. 세리였던 자캐오가 어떻게 변했는지 생각해 봅시다. 그의 마음은 자발적으로 하느님을 향하여 열렸습니다. 엘리사벳이 성모님의 문안을 받고 얼마나 기뻐합니까?



 구원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내가 어떤 선한 일을 해서 당연하게 구원을 요구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안주실 리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 될 도리를 다하고 마지막에 “저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의 비결 아니겠습니까? 그저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의 은총에 의지합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그렇게 최선을 다할 때, 나는 구원을 체험할 수 있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천국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 내가 해야 되는 것들과 하지 말아야 되는 것들이 있다는 것. 꼭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주님 뜻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구원의 문에 바짝 다가가 있은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제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입니다. 내가 그것을 차지할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주실 것입니다.



3.2. 율법과 믿음과의 관계

 의롭게 된다는 것은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스스로 하느님 앞에 의롭게 될 수 없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인들의 참된 겸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율법을 완전히 지킴을 통해서 의롭게 되고 율법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형식적으로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없는 율법학자들을 꾸짖으셨고, 율법학자들이 백성들에게 지워 놓은 무거운 규정들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으로 가볍고 편하게 해 주셨으며,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심을 통하여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구원이 주어집니다. 즉 율법을 지킴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 안에서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바로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단순히 입으로만 고백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천적인 믿음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믿음과 실천에 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4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15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16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7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18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대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실천이 있소.” 나에게 실천 없는 그대의 믿음을 보여 주십시오. 나는 실천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 주겠습니다.(야고2,14-18)

 예수님을 믿고 있기에 그 믿음은 행위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① 구원과 율법 

 율법은 인간을 구원해 줄 수 없습니다. 율법은 죄를 인식케 하는 기능을 갖고(참조: 로마 3,20), 그것을 통하여 인간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구원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으나(로마 5,13) 율법이 모든 인간에게 죄가 있음을 알려 주었습니다. 결국 율법이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이며, 인간에게 죄를 깨닫게 하여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율법의 완성자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바오로는 바리사이인으로서 어느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율법종교에 헌신적이었습니다(갈라 1,14). 율법종교는 인간의 노력에 의한 구원의 교리를 가르칩니다. 하지만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렇게 율법의 규정들을 지키려 하다보니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들을 치유해 주셔도 감사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날 치유하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아무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서 구원받을 수 없는 원인은 인간의 육에 자리 잡고 있는 죄의 힘 때문입니다(로마 7,18).

 누구보다도 율법을 철저히 지켰던 사도 바오로가 율법을 죄와 동일시한 이유는 바로 율법 자체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선물이지만,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은 누구나 타락한 본성을 지니게 되었으며 그 타락한 본성의 결과로 인간은 필연적인 ‘有限性’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오로 사도는 바리사이들의 주장을 거슬러 타락하고 유한한 인간이기에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채울 수 없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받아들여(위선자들을 꾸짖으시는 예수님, 너희는 화를 입을 것이다~), 율법을 완전히 채울 수 있다고 과신하는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공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는 자신의 체험을 통하여 율법이 인간을 구원할 수 없고, 율법의 마침이 되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참조: 로마 3,28 ; 10,4).



② 구원과 믿음

 사도 바오로는 인간이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룩하신 구원을 얻는 사실과 방법에 대하여 말할 때는 항상 “믿음”에 관하여 언급합니다. 그에 따르면 구원에 이르는 길은 “믿음”뿐이라는 것입니다(참조: 로마 3,25; 5,1; 갈라디아 2,16 등).

 믿음의 대상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참조: 갈라티아 2,16; 로마 3,22.26; 필립비 3,9)와 하느님이십니다(1테살로니카 1,8). 그리고 믿음의 내용은 구원의 소식(복음) 전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참조: 1테살로니카 1,9-10; 1코린토 15,1-8).

  그러므로 “믿음”2)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룩하신 하느님 구원의 계시를 “진실로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인간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과 접함으로써 그 복음과 접하게 되고, 믿음은 그 복음을 전해 들음으로써 생기게 됩니다(참조: 로마서 10,17). 그리고 믿음은 복음을 받아들이기로 결단하는 행위임으로, 그 복음을 진실로 믿고 자기의 전존재와 생애를 그 복음으로 규정하는 행위입니다. 여기에 비로소 믿는 이의 신뢰가 솟아납니다(참조: 갈라티아 3,6; 로마 4,3). 또한 복음은 미래에 관한 것이고 미래에 완성될 것에 관한 것이므로 믿음은 미래와의 연관에서 “희망”과 동일시할 수 있다(로마 4,18-25).

 “믿음”이라는 개념 대신에 사도 바오로는 “안다”를 쓰기도 합니다. 즉 믿는 사람은 예수님께서는 죽음으로부터 살아나셨다는 것과 다시는 죽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며(참조: 로마 6,9), 주 예수님을 죽음으로부터 부활시키신 이가 우리도 부활시키시리라는 것(참조: 2코린토 4,14 등)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로마4,22) 말하자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예수님께서 하느님께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모두 진리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자비에 우리 자신을 맡기셨듯이 우리도 하느님의 자비에 우리 자신을 맡기고 전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떠나서 혹은 믿음이 없이는 구원이 없다는 것과 신자들은 자신의 모든 행위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첫째로 하느님의 은총이지만 둘째로 이 은총이란 믿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구원은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인류에게 필요한 구원의 공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셨고 이 구원의 공로가 내 것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은총은 구원의 근원이고 믿음은 구원의 방편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원을 은총으로 주시는데 그 구원을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은 구원을 얻는 방편입니다. 따라서 바오로 사도는 이 믿음이 하느님의 구속의 언약에 있어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하나의 요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라는 것은 하느님이 하느님의 義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안에서 나타내셨는데 바로 이 義로 인하여 예수님을 믿는 자들 또한 의롭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③ 구원과 恩寵

 하느님의 은총은 바오로 사도의 구원론의 핵심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인간의 구원은 하느님의 은총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로마 3,24).

 “은총”3)이란 말 안에는 언제나 완전히 값없이 그리고 자격을 따지지 않고 주는 선물이라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즉 거저 주지 않는 사람은 은총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또 자비를 베풀지 않은 사람은 주님께로부터 결코 자비를 입을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은총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상이란 말과 같은 것입니다. 은총의 근본적인 개념은 주로 사람이 전적인 아량을 가지고 주는 선물이며 받는 사람이 절대로 벌어들이거나,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 그것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받을 수 있는 선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은총이란 그야말로 사랑하지 못할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어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총을 받아 누리는 사람은 다른 이들에게도 값없이 자신이 받은 것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주신 그것을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구원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은총입니다. 어떤 자격이 있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은 그 사랑에 감사하며 받은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내가 다른 이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으면 결국 내가 가진 것 마저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참조: 매정한 종의 비유: 마태오18,23-25)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느님의 그 크신 은총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며, 그것을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드러내는 삶의 증거자가 되는 것입니다.



4. 나눔 및 묵상

① 구원받는 삶은 어떤 삶이겠습니까? 주변에서 아름답게 신앙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②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믿음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나는 어떤 믿음 생활을 하고 있고, 어떤 믿음 생활을 하고 싶습니까?





5. 실천사항



6. 마침기도 및 성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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