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캐오의 구원

 

자캐오의 구원

1. 말씀읽기:루카19,1-10 예수님과 자캐오

2. 말씀연구

 자캐오라는 말은 “바르다, 혹은 깨끗하다”는 뜻입니다. 그는 죄 중에 있었지만 예수님을 만나서 그 이름처럼 깨끗하게 구원되었습니다. 자캐오가 회개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의 고백성사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스스로 보속을 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고백성사를 보는 사람의 모범이 아닐까요?



1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예리코는 유다 지방과 요르단 강 건너 베레아 지방간의 교역을 감시하는 세관이 있었습니다. 자캐오는 예리코의 세관장이었습니다.



2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세관장 자캐오. 그는 로마인들을 위해 세금을 거둬들이는 일을 하였고, 그 세관의 장이였습니다. 세리는 세금을 거두어들이기에 으레 부정축재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역을 담당하며 세금을 징수하는 세관원들은 외국인들과 자주 접촉하기 때문에 직업상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세관의 장이 바로 자캐오였습니다.



3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자캐오는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세리도 제자로 뽑으시고, 그 누구도 차별대우 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소식을. 믿음을 보이기만 하면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소식을 그는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궁금했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 뵙게 싶어서 사람들이 모여든 군중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그는 키가 작아서 도저히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군중들은 죄인의 대명사인 세관장에게 어떠한 배려도 하지 않았습니다.



4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보고 싶은 열망에 앞서 달려가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가서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평평한 지붕 위에 올라가 지나가는 예수님을 바라보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세리였던 자캐오는 유다인들이 죄인으로 여겼기에 그런 그를 자기의 집에 들여보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무 위에 올라가있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남들이 모두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인데, 그런 그가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데 사람들은 고운 눈으로 그를 쳐다볼 리 없고, 부드러운 말을 건넬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캐오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오직 예수님 밖에는 없고, 그의 귀에는 예수님의 소리밖에는 안 들리고, 그의 눈에는 오직 예수님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도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른 것들, 주변의 시선 등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열정은 모든 것을 이겨내게 만듭니다.



5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예수님께서 자캐오를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그 마음도 보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축복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를 부르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예수님께서는 보통 사람들의 초대에 응하셨지만 이번에는 직접 자청하고 계십니다. 기다림에 응답을 받은 자케오.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나무에서 내려왔을까요? 사람들의 야유와 자신의 신체적인 결함 등을 모두 이겨내고 기다렸던 그분께 응답을 받은 자캐오. 게다가 자신의 집에 머무시겠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자캐오는 행복이 충만합니다.



6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자케오는 예수님을 집에 모셔 들였습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이것을 “예수님께서 최초로 흔드시어 떨어진 새로운 시대의 잘 익은 무화과”였다고 표현하십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세리나 공적인 죄인들과 한 식탁에 앉는 일이 결코 없었습니다.



 자캐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무엇 때문에 안돼, 사람들의 눈도 있는데, 내가 그것을 어떻게,”이런 모든 분심들을 없애 버려야 할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청하면서 준비하고 기다린다면 주님께서는 꼭 들어주십니다. 자캐오가 응답 받은 것처럼 그렇게 응답받게 됩니다.



7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불평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모습은 출애굽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끊임없이 하느님께 불평하는 모습과 유사한 듯 합니다. 언제나 불평만 하는 사람들. 어쩌면 그 유다인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캐오의 집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이렇게 투덜거립니다.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저이가”라는 표현이 참 와 닿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존경이 사라지고 예수님을 죄인 취급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인의 집”은 누구의 집을 말할까요? 남을 판단하고, 남을 비웃고, 남을 모욕하는 사람들이 죄인 아니겠습니까? 내가 그런 사람이라면 내 집이 바로 죄인의 집이고, 내 집이 바로 구원에서 멀어진 집입니다. 그리고 자캐오의 집은 의인의 집입니다. 나의 집 또한 구원이 머무는 의인의 집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내 가정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8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자캐오는 변했습니다.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렇게 욕먹으면서 모아들였던 재산을 나눠 준다고 했습니다. 또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는 자신의 회심을 확실하게 증명해 보이려고 합니다.



 율법학자들은 회개가 참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일정한 금액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재산의 5분의 1을, 그 다음부터는 매년 수입 중 그에 상당하는 액수를 바쳐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민수기 5,6-7 참조). 자캐오는 율법이 정하는 바와 같이(레위기 5,20-26) 부정한 수입과 그 수입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양을 보태어 배상하는 것으로만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등쳐먹은 일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아 주겠다고 했습니다. 자캐오는 이렇게 자신의 회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주일학교 친구들이 성사를 보러오면 이렇게 묻습니다. “그럼 보속으로는 무엇을 할래?” “저기요. 앞으로는 동생 안 때리고요, 부모님 말씀 잘 듣고요, 친구들과도 사이좋게 지내고요….” 주일학교 친구들이 자신에게 주는 보속이 바로 오늘 자캐오가 한 것과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른들은 어떻게 말할까요? 혹시“주님의 기도 한번 하겠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참된 회개는 행위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자캐오처럼 성사를 봐야 만이 구원을 얻습니다.



 오상을 받으신 성 비오 신부님이 성사를 주는데 어떤 이가 제대로 죄를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비오 신부님은 그를 꾸중하시며 내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돌아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성사를 보았습니다. 성사를 보기 위해서는 ①성찰 ② 통회 ③ 정개 ④ 고백 이 꼭 필요합니다. 올바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제대로 뉘우치고, 제대로 마음잡고,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 그것이 고백성사에서 필요한 것입니다.



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진실하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뉘우친 자캐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구원이 자캐오의 집에 왔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때에, 경건한 유다인들이 죄인이라고 간주하던 목자들에게 선포된 내용이 이제 예수님의 말씀으로 세관장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유다인들은 세리 자캐오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지만 그의 믿음과 그가 예수님께 드린 환대는 그가 아브라함의 참된 자손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10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예수님께서는 파괴나 단죄가 아니라 구원을,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1티모 1,15)



 구원의 때에 관하여 예언자들이 예언한 내용이 예수님에게서 실현되었습니다. “헤매는 것은 찾아내고 길 잃은 것은 도로 데려오리라. 상처 입은 것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힘나도록 잘 먹여 주고 기름지고 튼튼한 것은 지켜 주겠다. 이렇게 나는 목자의 구실을 다 하리라”(에제키엘 34,16)



 예수님께서 나를 부르시면 “예”하고 달려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이유는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르심은 큰 축복이라는 것을 명심합시다.



3. 나눔 및 묵상

① 나는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나 주변 상황이 어려워서 신앙생활을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캐오처럼 예수님께로 다가가는데 어려움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 자캐오는 나무위로 올라갔고, 예수님과 만나게 됩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어려움을 어떻게 이겨냈습니까?



② 자캐오는 진실한 마음으로 자신의 삶의 방향을 돌렸습니다. 참된 회개를 한 것입니다. 내가 자캐오라면 예수님께 어떻게 고백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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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캐오의 구원에 1개의 응답

  1. 샘지기 님의 말:

    있었습니다. 아니 늘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양날개를 다 자르고도 모자라 숨통까지 죄여 오는 고통에 가슴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공동체에서 하는 모든 행사에 모습을 감추게 되더군요.
    제 날개를 자른 이들이 높은 천을 가리운채 저를 경계함을 알았기에 그들을 배려했습니다.
    아름다운 배려!! ㅎㅎ
    저때문에 불안해 하는 그들의 무거운 마음을 조금은 들어주고 싶었거든요.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매일미사에 참례하고 봉사를 열심히 하는 것이었답니다.
    그리고 전에 방문하였던 노자매님을 찾아뵌 적이 있었는데 강론때 “불순명하면서 뭐하는 것인지…” 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마저도 아닌가보다 싶어서 마음이 아렸지만 그리고 방황도 하였지만 무너지기엔 너무나 억울함이 있었음도 사실이었지요.
    그 억울한 마음으로 하루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잘린 날개를 재생하는 방법과 고통을 기쁨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지혜를 얻었습니다.
    제게 만약 아버지의 말씀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가슴에 아버지를 모시고 산다면 제 삶에는 말씀이 빛이 되시어 저를 인도하시는 것을 깨달았기에 이젠 없어서는 안될 아버지의 말씀이랍니다.
    어떤 일이 닥쳐도 이젠 무섭지 않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제 사랑이 진실이 아니었다면 구원의 문이 닫힌다 하여도 울지 않겠습니다.”
    라고 고백하지만 정말 고개를 들기 어려울 정도로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자식이 아버지를 사랑함은 당연한 것인데 그것을 가지고… ㅎㅎ
    사랑하는 아버지께 제 사랑을 드림은 변함이 었지요.
    무엇이 되었든간에….
    자캐오처럼은 어려워도 닮아가려 노력하는 저가 되어야 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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