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대축일


삼위일체 대축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을…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



제 1 독서 : 탈출기34,4b-6. 8-9

제 2 독서 : 2고린 13,11-13

복음 : 요한 3,16-18



엄ㅁ;ㄹ한 의미에서 본다면 삼위일체 대축일은 전례상 별도로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삼위일체의 축제는 매주일뿐만아니라, 그리스도교의 무한한 신비 가운데 어떤 관점이나 어떤 사건을 특별히 들어높이고자 하는 다른 모든 축일에도 끊임엇이 거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만 예를 들어 보자. 우리가 앞서 지난주에 기념하여 거행하였던 성령강림 대축일도 삼위일체 ‘신비’의  특별한 표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실로 이 삼위일체의 신비를 제외한다면 성령의 내려오심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다른 어떤 이유들보다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삼위일체 대축일은 뒤늦게 나마 전세계 교회에 독자적인 축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14세기).

 이렇게 삼위일체 대축일은 그 나름대로 존재 이유를 갖고 있기 때문에 성교회는 여러 가지 장해를 극복하고, 역사의 흐름 속에서 실현되고 있는 무수한 구원의 사건들이 비롯되고 또 그 의미의 원천이 되고 있는 가장 탁월한 신앙의 신비를 특별히 기념하여 거행할 전례의 기회를 신자들에게 마련해주기에 이르렀다.



그리스도 신자의 ‘생명의 공간’으로서의 삼위일체



이렇게 해서 삼위일체는 신학자들의 사변으로만 치우치려는 고립강테를 벗어나 우리의 고뇌에 찬 생활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즉 본체로서는 단 한분이시지만 실제상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동등하면서도 서로 구분되는 세 위격으로 존재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믿음과 공경의 대상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 구원의 ‘주역’이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는 우리에게서 멀리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안에 계시다. 더 정확히 말해 삼위일체는 우리의 몸 자체의 주인이 되심으로써 우리의 몸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살아있는 성전”(1고린 6,19 참조)이 된다.

 그결과 삼위일체는 그리스도 신자가 살고 움직이고 행동하는 생명의 공간이 되신다. 뿐만아니라 그리스도 신자가 자신의 전 존재를 삼위일체적 형태로 구축해 나가기 위해 자신을 비춰보아야 할 ‘모델’이 되신다.

 오늘 전례는 이 모든 점을 충분히 간파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오늘 영성체송에서 가볍게 다듬어진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로의 글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그러한 삼위일체 신비의 깊은 의미를 우리가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 “이제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속에 당신의 아들의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갈라4,6).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선물’ 은 본질적으로 삼위일체의 성격을 띤다 : 성부께서는 성자를 통하여 그선물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며 성령께서는 밝히 비추어 변화시키는 능력을 통하여 그 선물을 우리에게 열어 보여주고 또한 입증해주신다.

 이와 같은 사실을 항상 새롭게 발견하고 그로써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최고의 순간은 성체성사 안에서 예수님과 만나는 바로 그 순간이다.



 삼위일체께 대한 사도 바울로의 대표적인 신앙고백 형식



 오늘의 독서들은 삼위일체 신비의 ‘실체’ 외에 그 신비가 지니고 있는 ‘생명력’ 즉 모든 믿는 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과 우주적 실체를 그 신비의 영역 속에 감싸들이고자 하는, 역동적이며 구원적인 생명력을 우리게 이해시켜주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사도 바울로에 의한 제 2 독서가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의 결론 부분인 오늘 제2독서에서 바울로는 그곳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마지막 훈계와 더불어 성삼위의 이름으로 인사하고 있다 : “형제 여러분, 그러면 아녕히 계십시오. 온전하게 되기를 힘쓰며 내 권고를 귀담아 들으십시오. 그리고 뜻을 같이하여 평화롭게 사십시오. 그러면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셔주실 것입니다.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모든 성도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 (2 고린 13,11-13).

 바울로의 이 인사는 참으로 감동적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신자들이 저례를 거행할 때 주고받았던, 포옹과 입맞춤으로 표현된 형제적 사랑의 행위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한 마지막에 나오는 삼위일체께 대한 신앙고백의 형식도 전례적 행위에 근거를 두고 있음은 물로느 그당시 그리스도 신자들이 서로 주고 받았던 형제적 사랑의 행위를 따르고 있는 것이 거의 틀림없다. 즉 그 당시 그리스도 신자들은 서로 포옹하면서 ‘삼위일체’의 축복을 주고 받았다. 그 축복으 본질적으로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11절) 즉 일치를 이루어주시는 하느님이신 그분 안에서 통교를 이루어 서로 결합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바울로가 사용하고 있는 삼위일체께 대한 신앙고백의 형식을 짤막하게나마 분석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바울로는 이미 그의 서간집 여러 곳에서 항상 ‘삼위일체’ 께 대해 다른 형태로 언급하며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세 ‘위격’의 역할을 강조한다. 2고린 에서만 보더라도 우리는 시작 부분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훌륭한 구절을 기억할 수 있다 :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과 우리를 굳세게 해주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어 사명을 맡겨주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사람으로 확인해주셨고 그것을 보증하는 표로 우리의 마음에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2고린 1,21-22 ; 그밖에 로마 1,4 ; 15,16.30 ; 1고린 2,10-16 ; 6, 11.14.15.19 ; 12,4-6 ; 갈라 4,6 ; 필립2,1 ; 에페 1,3-14 ; 2,18.22 ; 4,4-6등 참조).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 바울로가 나중에 모든 신앙고백 형식의 전형적 형태의 근간이 될 그 질서를 따르고 있지 않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사실, 그는 첫 자리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말하고 있다. 더 나아가 1고린 12,4-6에서는 ‘성령’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그는 분명히 신학적인 어떤 정의 같은 것들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이면에 있는 ‘실체’에 관심이 있었다.



성부의 완전한 ‘선물’이신 그리스도



그리스도 신자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여정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실체는 그리스도의 위격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분을 생각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그분의 적대자가 되었을 때라도 우리를 향해 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로마 5,8). 그해서 우리는 그스도를 통해 우리 구원의 완전한 ‘무상성’을 깨닫게 되며, 우리의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이 ‘은총’임을 체험하게 된다. 가장 근본적인 ‘은총’은 바로 그분이다. 다른 모든 은총들은 그 다음에 그분으로 말미암아 주어지게 된다 :“하느님께서 우리편이 되셨으니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서겠습니까?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느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이든지 다 주시지 않겠습니까?”(로마 8,31-32).

 또한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우리 인간들에게 하느님의 참모습 즉 사랑의 참 모슷ㅂ도 발견하게 해준다. 방금 인용한 로마 5,8에서 바울로는 이 사실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총의 선물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더 크다!

 자 이제, 그분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실 수 있었던 모든 것이 언제나 그분 자신보다는 못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 이 세상 다른 피조물들도 하느님의 무한한 은총의 선물이긴 하지만 인간이라고 하는 가장 고위한 피조물에 비추어 볼 때 그것들은 그의 지혜, 아름다움 그리고 그의 능력의 모방 내지는 소극적 형상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구약성서에서 서술되고 있는 모든 구원적 개입들-그중 놀라운 하나의 증거를 오늘 제1독서 (출애34,4-9)에서 볼 수 있다-도 하느님의 완전한 선물은 아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에게서만 그분의 완전한 선물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또한 그 자신이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을 완전히 드러내주는 결정적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요한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못 믿겠든 내가 하는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요한 14,11).

 그러나 바로 그리스도께서 ‘아들’로서 우리에게 나타나시기 때문에 그분은 그와 동시에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의 가장 친밀하고도 고귀한 실체를 우리에게 열어 보여주신다 : 그러므로 하느님은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실 뿐만 아니라 윌 모두의 아버지 이시기도 하다.사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주심으로써’ 당신의 ‘부성’을 확장시켜, 당신의 모습을 다른 피조물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무수한 ‘자녀들’(성자를 통하여 맺어진 자녀들)의 형상을 통해 반영시키고자 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계시됨은 삼위일체신비의 문을 윌에게 넓게 열어줄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 신비의 매력과 깊은 맛을 완전히 느끼게 해준다. 그결과 성요한의 훌륭한 표현대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8)라는 사실을 거의 피부로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바우로는 그를 따랐던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13절 참조)하고 축원한다.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



 그리고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라는, 마지막으로 성령께 드리는 청원도 마찬가지로 그 의미가 깊고 감동적이다.

 사실, 바울로에게 있어서 ‘친교’(koinonia)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 또는 다른 어떤 구원적 사건과의 친밀한 결합의 관계를 표현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로는 고린토인들에게 그들이 종말의 때까지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들’로 지낼 수 있으리라는 자신의 확신을 알리며 그 근거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느님은 진실하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부르셔서 당신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게 해주셨습니다”(1고린 1,9). 좀더 뒤에 가서는 성체성사에 대해 말하면서 그 성체성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의 ‘친교’라고 말한다.(1고린 10,16참조).

 ‘친교’라는 말을 성령께 적용시킬 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성령과의 신비스럽고 친밀한 관계 즉, 성령과의 일종의 ‘공동’생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일치를 이루게 하는 성령의 절대적 능력도 뜻하낟. 이런 의미에서 성령은 신자들을 결합시키시는 원리가 되며, 교회를 믿음과 사랑과 희망의 ‘공동체’로 만들어주는 분이시다. 이와 같은 성령은 삼위일체 신비의 본질을 통해 이루는 것을 우리 안에 이루어 주신다. 실로, 성령은 성부와 성자를 위격과 사명으로는 명백히 구분시키면서도 탁월하고도 신비스럽게 하나로 일치시켜 영우너히 결합시키는 ‘사랑’이시다.

 이렇게 볼 때, 오늘 미사 전례의 입당송에도 있는 제 2독서의 짤막한 결어가 얼마나 놀랍고도 ‘풍부한 의미’가 담겨 있는지 아주 쉽게 알아들으 수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초오가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2고린 13,13). 이것은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그 순간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며, 교회가 오늘 전례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상기 시켜주고자 하는 것도 바로 그 의미에 대해서이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셨다”



오늘 복음은 요한의 사상이 얼마간 내포되어 있는 예수와 니고데모와의 대화의 끝부분으로서, 그리스도의 체험자체를 통하여 삼위일체 신비를 훌륭하게 소개하고 있다. 요컨대, 오늘 복음에서는 성자를 ‘보내주시는’ 하느님(성부)에 대해서 그리고 성부와 성자의 구원적 사명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셧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그를 믿는 사람은 죄인으로 판결받지 않으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죄인으로 판결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을 믿지 않앗기 때문이다”(요한 3,16-18).

 이렇듯 깊은 의미로 가득 찬 이 대목에 대해 길게 논할 수는 없고 다만 오늘 전례의 테두리안에서 몇가지 점만을 지적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무엇보다 먼저 드러나는 사실은 하느님께서 무한히 ‘사랑하시는 분’으로 계시되고 있는 점이다 :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셨다”(16절). 여기서 ‘보내주시다’(희랍어로 paredoken)라는 말은 ‘죽게 하다’(갈라 2,20 ; 로마 4,25 ; 8,32 등 참조)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부께서는 하나밖에 없는 성자(외아들)를 인간들에게 사랑의 선물로 주기 위해 포기하시는 것이나 다름없다. ‘세상’이라는 말은 여기서 분명히 인류를 뜻한다. 그러나 그 말이 인간과 관련되어 있는 다른 모든 우주 실체도 아울러 뜻하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우주를 감싸고 있다. 즉 삼위일체는 사랑을 통해 우주만물을 포용하신다.

바로 이러한 사랑의 강도에 비추어 볼 때, ‘하느님의 다들’이신 그리스도를 ‘믿기’ 거부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바로 그 순간부터 무거운 ‘심판’이 내려지고 있다는 사실은 납득할 만하다 : “그를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죄인으로 판결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을 믿지 아낳았기 때문이다”(18절). 사실,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은 사장 감동적인 사랑의 현현에 마음의 문을 닫는 것이며, 사랑할 줄을 모르는 파멸의 상태에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자비로우시고 인자하신 야훼”



보다시피, 이상의 모든 성서구절들은 다같이 하느님의 신비를 ‘사랑의 신비’로 강조하고 잇다. 오늘의 제1독서 역시 이와 같은 의미로 우리를 안내한다 : 시나이산에서 모세에게 하신 위대한 발현을 통해 야훼는 당신 자신을 “자비와 은초의 신, 좀처럼 화를 내지 아니하고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탈출기34,6)으로 선포하ㅛ다. 그러나 더 나아가 그분이 삼위일체이신 하는미으로 나타나실 때 그 사랑의 차원은 그리스도의 체험이 감동적으로 입증해주듯이 무한히 펼쳐진다.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 앞에 놓여 있는 유일한 문제는 이미 앞에서 강조했듯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이놀라운 삼위일체의 ‘구조’를 실현시키는 것이다 :“실로, 교회 안에서는 삼위일체가 활동하고 교회의 내적 생명은 삼위일체로부터 생겨난다. 즉 교회는 곧 삼위일체의 교회이다. 말하자면, 쇼회는 삼위일체의 영원한 사랑의 계획이 성취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삼위일체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세 위격으로 구분되며 그들을 한데 묶어주는 것은 사랑이다. 그러므로 인류가 서로간에 개인적이 ㄴ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최선을 다해서 세위가 영우너히 서로 나누고 있는 그 사랑에 참여하는 사랑으로써 하느로 결합된다면 삼위일체의 모습을 닮아가게 될 것이다”(Y. De Montcheu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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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대축일에 1개의 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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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위일체 대축일


             1. 강길웅 신부(가)/2                     2. 허영업 신부(가)/4

             3. 남재희 신부(가)/5                     4. 류봉구 신부(가)/7

             5. 김정진 신부(가)/8                     6. 세상을 사랑(가)/10

             7. 교구 주보(가)/12                      8. 최인호 작가(가)/13

             9. 김영진 신부(나)/15           10. 강길웅 신부(나)/16

            11. 김영남 신부(나)/18           12. 허영업 신부(나)/20

            13. 표창준 신부(나)/24           14. 교구 주보(나)/26

            15. 김명순 박사(나)/27           16. 세상 끝날 때까지(나)/28

            17. 세상 끝날 때까지(나)/31            18. 사랑의 친교(나)/33

            19. 강길웅 신부(다)/36           20. 조순창 신부(다)/37

            21. 강영구 신부(다)/39           22. 유영봉 신부(다)/42

            23. 지경대 신부(다)/44           24. 김신호 신부(다)/47

            25. 서웅범 신부(다)/49           26. 김순태 신부(다)/50

            27. 김정진 신부(다)/52           28. 신은근 신부/55

            29. 최상범 신부/56                 30. 성삼위께 찬미와 흠숭을/57

            31. 삼위일체의 신비/58



    1               삼위일체 대축일 (가해) 성부 성자 성령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출애 34,4b~6.8~9 (나는 주 하느님이다. 자비와 은총의 신이다)

    제2독서 Ⅱ고린 13,11~13 (성령께서 이루어 주시는 친교)

    복 음 요한 3,16~18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 3,16).


    오늘 복음에 나오는 앞의 말씀은 ‘복음서의 진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서의 요약이 그 한 문장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하느님의 사랑이요 축복인지 인간은 생각만 해도 감격이 철철 넘치게 됩니다. 사람은 과연 하느님의 보통 작품이 아닙니다. 그분의 영이 다 담긴 그분 자신이요 그분의 분신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들을 보내실 때 하느님은 당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히 감춰 계신 분이었습니다. 또한 지존하신 분이 구차스럽게 당신 자신을 소개하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세상을 존경하셨고 인간 각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셨습니다. 당신의 외아들과 맞바꿀 수 있도록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성서는 그분 자신의 모습과 애정을 환하게 밝혀 줍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느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첫 장면에 보면 ‘하느님의 기운이 물 위에 휘돌고 있었다.'(1,2)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기운’은 성령을 말합니다. 이것을 다시 풀어서 말씀드리면 아버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기운’이신 성령을 통하여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을 보내시기까지 오랜 세월 동안은 성령께서 이 우주와 세상 안에 역사해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그 이전에도 사랑이 있었고 도덕이 있었으며 효가 있었고 충이 있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모습은 희미했고 분명하진 못했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하늘이나 땅을 신으로 모시기도 하고 호랑이나 곰, 또는 바람이나 비 등을 신으로 모셨던 것을 보면 분명하진 않지만 하느님을 찾아 나서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태어났을 때에야 비로소 하느님의 윤곽이 제대로 잡히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어느 날 그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무엇을 원 하시는지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모습과 말씀은 감춰져 있었습니다. 후에 예언자들이 등장해서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목소리를 전달할 때도 하느님은 살아 계신 분으로 백성들은 이해하였지만 과연 어떤 사랑과 꿈을 가지고 계신지는 몰랐습니다.


    하느님께서 결정적으로 당신 모습을 확실하고 분명하게 보여 주신 것은 당신의 외아들인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 주실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 일은 너무나 중요하고 하느님 자신의 일이었기 때문에 성부와 성령께서 예수와 함께 일치된 모습을 보여 주셨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더 이상 당신의 비밀을 감추지 않으셨고 다 보여 주셨고 다 내놓으셨습니다. 성자는 늦게 등장하셨으나 성부와 성령과 함께 계셨고 세상 창조 때에도 성자는 함께 참여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을 온전하게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렇다고 하느님이 막연하신 분은 아닙니다. 어린이들은 어른들의 세계를 모릅니다. 어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바라고 있고 무슨 꿈을 가지고 있는지 자녀들은 모릅니다. 부모가 아무리 설명해 줘도 꼬마들은 한마디도 못 알아들을 때가 있습니다. 커 봐야 알 수 있습니다. 커서도 어느 땐 모르고 늙어 봐야 뭘 어렴풋이 알 수 있듯이 우리도 나중에 그분 나라에 들어가 봐야 압니다. 그분을 눈으로 뵈올 때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지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각각 독립된 위격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셋은 하나요 하나는 또 셋입니다. 말장난 같지만 하느님은 한 분이시면서 동시에 셋이라는 공동체의 하느님이십니다. 이것은 그분의 본체이시기에 우리가 알아들을 수는 없습니다. 그냥 믿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하느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하느님은 아름다우신 분입니다. 질서와 조화와 일치가 하나로 어우러진 위대한 신비입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을 만나고 닮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신앙입니다.


    성삼은 한마디로 사랑이면서 무한하며 영원합니다. 그 이름 안에 우리 존재가 있고 그 말씀 안에 우리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 안에 우리 목적이 있습니다. 성삼은 인간의 찬미가 필요치 않으나 인간의 흠숭은 그분께 영광이 됩니다. 그리고 인간의 참 행복은 그분을 찾고 부르는 신앙 안에 있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2.       삼위일체 대축일  <요한 3,16-18> (가) 

                                 심판과 처벌의 하느님이 아니라 사랑의 하느님

    허영업 신부



    예전에는 세례성사 전에, 항상 예비자들이 까다로운 교리문답 시험을 거쳐야 했다. 시골 공소를 방문하신 주임신부가, 한 예비자 할머니에게 교리에 관해 질문을 했다.

    「하느님은 몇 분이십니까?」「한 분이십니다?」

    사제는 삼위일체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나갔다.「좋습니다. 한분이신 하느님은 몇개의 위격입니까?」 한참 생각한 할머니는 거침없이,「두 개의 위격입니다.」어이없어 하는 주임신부에게 할머니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제가 아주 어린 소녀 시절 성당에 갔었는데, 그때 벽에 걸려 있는 성화를 봤거든요. 거기에 하느님의 그림이 있었는데 수염 달린 할아버지(성부)와 아주 젊은 청년의 예수님(성자)과 비둘기(성령)이 있어요. 그런데 그 할아버지(성부)는 벌써 죽었을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벌써 이 만름 나이를 먹어서 죽을 때가 되었는데 살아있을 리가 없죠」. 신학교 때 교수님으로부터 들은 우스갯소리이다.


    삼위일체는 교회의 신비로운 가르침

       

    삼위일체의 교리는 온전히 인간의 머리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교회의 신비로운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은 이론보다는 삶의 체험에 근거해서 접근해야 한다. 특히 사랑의 관점에서 체험적으로 다가갈 때 미약하지만 삼위일체의 신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때로는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십자성호를 그으며 기도한다. 그런데 얼마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랑과 일치를 깨닫고있는 지 생각해 볼 일이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내적인 사랑, 생명이, 우리 눈에 보일 수 있게 나타난 사건이 바로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인간이 되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강생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 지 드러났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셨다」 (요한 3,16)

    사도 요한이 말씀하신 대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1요한 4,16). 그 하느님 사랑의 특징은 그분이 먼저 인간을 사랑하신 것이다. 더구나 하느님의 사랑을 외면하고 배신하여 생명을 잃어버린 죄 많은 인간을 위해 대신 죄 값을 치르도록 하셨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신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를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하느님의 구원,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런데 하느님의 구원은 누구에게 이루어지는가?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외아들을 믿는 사람을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 즉 구원을 얻게 하셨다고 가르친다.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약속,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뜻이다.

    그 믿음의 내용은 하느님의 사랑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하느님은 심판과 처벌의 하느님이 아니라 사랑의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그 증거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인 나를 위해 피를 흘리시고 목숨을 바치셨다. 하느님의 구원은 사랑 받을 만한 사람이거나, 나의 선행이나 노력으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즉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의 대가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성자 그리스도는 성부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온전히 자신을 순명함으로써 구원의 역사를 가능케 했다. 즉 그리스도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하느님의 뜻을 따름으로써 하느님 사랑의 결실, 구원을 이루신 것이다.


         삼위일체의 실천적 삶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위해,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우리 자신을 희생하고 봉사하며 사랑해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과 일치, 봉사와 헌신의 삶을 우리 가정과 사회에서 실현하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가족들이 미움과 분열, 이기심에서 벗어나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하겠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결코 교리적이거나 이론적인 가르침이 아니다. 열심히 사랑하려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드러나고, 확인되는 하느님 사랑의 실체이다.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는 하느님 안에 머무르게 된다. 이웃을 위해 봉사할 때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게 한다. 이웃을 위해 나 자신을 아낌없이 봉헌할 때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






    3       삼위일체 대축일  요한 3.16-18 (가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남재희 신부


    지난 주일 우리는 성령 강림 대축일을 지내면서 성령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심으로써 새 나라 새 백성이 시작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이 나라의 목적은 무엇이며, 이 백성이 나아가고 있는 목표는 무엇입니까? 바로 오늘 우리가 축하하는 이 축일, 성령 강림 후 첫 번째로 맞이하는 이 주일이 우리에게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바로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거룩하시고 권능을 가지신 하느님은 한 분이시지만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가 계시고, 세 위가 한 분 하느님이시다는 말이 바로 삼위일체란 뜻입니다. 하느님이야 세 위가 한 분이시던, 세 위가 여러 하느님이시던 우리와 무슨 상관일까? 하고 의아해 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라는 말은 바로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라는 말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성부께서는 완전하고 생활한 당신의 모상이시며 말씀이신 성자를 바라보고 흡족해 하시고, 영원한 말씀이신 성자는 당신 아버지(성부)의 뜻에 완전히 일치해 계시며, 성부께 찬미를 드립니다. 이렇게 성부와 성자가 사랑하는 그 사랑이 바로 성령이시며 이 사랑은 하느님의 생명이십니다. 서로 사랑하는 두 분과 두 분이 나누는 이 사랑, 이 세분은 하느님의 생명 안에서 오묘한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 이 사랑을 영원히 누리는 것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지내는 삼위일체 대축일의 뜻이며 새 나라가 지향하는 목표입니다. 또한 새 백성이 나아가고 있는 목표는 바로 성삼의 사랑의 일치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사실 삼위일체의 신비를 우리의 지력으로 깨닫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삼위일체의 신비를 설명하려고 노력해 왔지만 완전한 설명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삼위일체를 설명하려 시도해 보았습니다. 알고, 느끼고, 뜻하는 것, 곧 知․情․意 3가지가 하나의 인격을 이루듯이 하느님 안에서도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의 신적 실재를 이룬다고 설명해 보았습니다. 그렇다고 하느님의 신비가 바로 이해되는 것은 아닙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해 주지 않았다면 인간의 머리로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해 볼 수 없는 신비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께서 계시해 주심으로써 성부의 능력으로 창조되고 성자의 피로서 구원되며, 성령의 은총으로 성화됨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느님의 모습은 바로 자비로운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자신의 목숨을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상에 달려 죽기까지 내 놓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보았고 또 그 사랑 안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오늘 둘째 독서가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사랑을 베푸시는 성부와 은총을 내리시는 성자와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게 하시는 성령의 활동으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분명하게 또한 생생하게 지금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직 성부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의 생명, 다시 말해 하느님의 사랑이 충만하게 꽃피지 않았기에 그 사랑의 일치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그분의 크신 사랑의 조각들이며 또한 그림자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비록 어렴풋하게 나마 우리의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크신 사랑의 일치를 그리워하고 찬미하면서 살아가지만, 하느님과의 사랑의 일치를 믿고 있기에 우리의 사랑이 풍요해지는 것입니다.






    4       삼위일체 대축일 요한 3.16-18 (가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류봉구 신부


    다른 축일들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을 말해 주고 있고 오늘의 삼위일체 축일은 우리가 하느님께 그 지극히 거룩하신 신비를 찬미해 올리는 축일입니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알아들을 수도 없고 식별할 수도 없는 진리로서 인간적인 언어로 표현을 불완전하게 시도해 보는 것뿐입니다.


    오늘은 하느님 자신의 순전한 존재와 내적 생명의 거룩하심을 찬미하는 축일이므로 사람으로서의 의무 즉 찬미를 드리는 날입니다. 찬미를 드리는 우리 마음의 태도는 겸손하여야 합니다. 물론 하느님께로 완전히 집중시켜 옛 조상들이 주님을 경외하던 것보다 못지 않게 경외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의 우리는 주님께 찬미드리기를 무척 어렵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침착하지 못하며 여러 가지에 복잡하게 사로잡혀 있는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그런지 깊은 문제를 풀 때 혹은 깊은 교리를 생각할 때 억지를 쓰려고 하거나 불만을 품거나 환멸을 느끼는 것 같은데 이런 기분으로는 찬미를 위해서 절대로 요구되는 정신적인 평온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에 주님께 올바로 찬미를 드리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더구나 자연계에 있어서 옛날 선조들이 못 알아듣던 것을 지금 우리가 좀 안다고 해서 선조들보다 겸손한 생각을 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천둥 번개 벼락 일식 월식 혜성 등등을 지금 우리는 과학을 통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아직도 못 알아들은 것들이 자연계 안에 얼마든지 있고 또 그 자연계 안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생각 못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주를 창조하실 때 사람을 조성하시면서 사람으로 하여금 전파 망원경을 발견 향상시켜 우주탐색기를 신속히 처리하게끔 하셨지만 사람은 하느님 생각을 안 합니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사람은 하느님을 경외하며 겸손하여야 합니다.


    과학이 무지개를 설명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하늘을 우러러 볼 때 하느님을 찬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러러 당신 손가락이 만드신 저 하늘하며, 굳건히 이룩하신 달과 별들을 보나이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아니 잊으시나이까, 그 종락 무엇이기에 따뜻이 돌보시나이까, 천사들보다는 못하게 만드셨어도,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나이다.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삼라 만상을 그의 발아래 두시었도다”(시편 8.4-7)하는 시편도 있지 않습니까.


    “천사들보다는 못하게 만드셨어도”하느님의 모상대로 우리는 조성되었고 또 하느님께로부터 어버이 사랑을 담뿍 받았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찬미는 어느 권력자에게 바치는 것같은 찬미가 아니고 진심으로 바치는 찬미이며 기쁘게 받으시는 찬미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만드신 조물들로부터 마땅히 영광을 누리셔야 하며 먼저 우리들에게서 찬미를 받으셔야 하고 또 우리들은 하느님 아니 다른 데서 만족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성 아우구스띠누스는 말하기를 “주께서 당신 모상대로 너를 만드셨으니 주님 홀로 너를 만족시키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께 다 같이 존경과 찬미를 바쳐야 하겠습니다.


    성부께서는 우리를 조성하신 다음 우리가 고통 중에도 인내하며 당신께 신뢰하는 것을 아시고 우리를 보호해 주시며, 성자께서는 우리의 희로애락을 잘 알고 계시는 맏형이시며,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시며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하며 다른 자녀들과 더불어 잘 지내는 좋은 세상을 만들도록 인도하여 주시고 계십니다.






    5      삼위일체 대축일 요한 3.16-18 (가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김정진 신부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나이다. 성령을 믿나이다’ 하고 우리는 매일같이 사도신경을 외웁니다. 이것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노상 행하여진 그리스도 신자들의 신앙고백입니다. 여기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비가 표면화되어 있고 성삼위에 대한 인간의 전면적 위탁이 드러나 있습니다. 하지만 삼위일체의 현의는 현의 중에 현의이며 가톨릭 신앙의 기초이며 가톨릭 생활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삼위일체의 교리는 너무 심오하여서 우리의 조그마한 두뇌로써는 모두 인식하기가 곤란하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란 관념을 터득하기가 난삽하지만 하느님이 계시해 주시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셨으므로 우리는 삼위일체의 교리를 믿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이 계시해 주시고 예수님이 명시해 주신 말씀을 성서에서 보기로 합시다.


    예수님이 요르단강에서 세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적에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가장 기뻐하는 자로다” 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성부의 말씀이었는데 그와 동시에 성령이 비둘기 모상으로 내려 오셨습니다.(마태 3.16)

    다음 삼위일체를 가장 힘있게 증명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들은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라”(마태 28.19)하신 최후의 부탁의 말씀입니다.


    이상의 하느님의 계시와 예수님의 말씀으로도 하느님은 한 분이시지만 위격으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성부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셨고 성자는 성부로부터 세상에 파견되신 성부의 외아들로서 인간이 되시어 우리를 구원하셨으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되사 교회 안에 항상 머무르시며 우리를 성화시키시고 우리를 사랑으로 일치시키시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신자 여러분, 다음은 천주 성삼과 우리와의 관계를 더듬어 보십시다. 우리 신자들은 모두 성삼의 이름으로 성세를 받았고 성삼의 이름으로 죄의 사함을 받기도 하고 그 외 모든 성사를 성삼의 이름으로 받으며 많은 축복과 은총을 받고 있으며 또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며 성호를 그으며 기도를 시작합니다. 인간의 구원사업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함께 이룩하셨으니 우리는 얼마나 큰 존경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삼의 이름을 불러야 하겠습니까.


     ‘성부와’ 할 적에는 성부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의 길로 부르심에 대한 감사를 드리고, ‘성자와’할 적에는 우리를 위하여 세상에 오시어 많은 교훈을 남기시고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를 구속하심을 감사 드리고, ‘성령의 이름으로’ 할 적에는 성령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려 주심으로써 우리를 성화시켜 주심을 감사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십자성호를 그을 적에는 언제나 경문을 똑똑히 그리고 정성되이 외우면서 비교적 크게 또한 천천히 잘 긋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저 습관적으로나 기계적으로 그리고 건성으로 정신없이 그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십자성호는 삼위일체의 현의에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이니 우리는 마음과 행실로 그어야 하겠으며 우리의 마음과 입술에서 떠날 새가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십자성호의 위력을 생각해 봅시다. 사도들은 성삼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었고 영생의 길을 가르치며 기적을 행하였고 수난 중에도 성삼의 이름으로 큰 위로와 용기를 얻었습니다. 성 베네딕또는 십자성호로써 죽음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가톨릭 성인전 상 393쪽)


    교형 자매 여러분, 천주성삼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의 신적, 내적 생활과 신적 생명에 참여시키기 위하여 인간의 지위를 높이시어 비천하고 낮은 인간을 자녀로 혹은 친구로 부르시어 함께 계시기를 원하십니다. 즉 천주 성삼은 허리를 구부리시어 인간에게 가까이 오사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가정에 들게 하시어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사랑은 어디까지나 상호적인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에 대한 응답을 기다립니다. 인간은 천주성삼의 커다란 사랑에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겸허한 마음과 굳은 신앙과 열렬한 사랑으로 성삼을 흠숭하고 찬미하고 감사함으로써 성삼께서 우리 안에 항상 살으시며 우리 모두 당신의 영광스러운 성전이 되도록 굳게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아멘.






    6      삼위일체 대축일 요한 3.16-18 (가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신데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이시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나 성부, 성자, 성령은 그 역할이 각각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전기는 하나이지만 움직이는 성질과 빛을 내는 성질, 열을 내는 성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느 해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방학동안 공소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과수원을 지나가는데 새빨간 사과가 탐스럽게도 주렁주렁 달렸는데, 정말 너무나 아름다워서 표현력이 부족해 무어라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순간 아주 멋있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저 사과는 삼위일체가 아닌가!” 이 생각은 아주 값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과는 하나인데 껍질, 과육, 기리고 씨앗이 분명히 다르고 각기 그 역할도 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은 하나이면서 아버지, 가장 그리고 남편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가장으로써의 할 일이 있고, 아버지로써의 할 일이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느님은 한 분이시나 성부, 성자, 성령은 각기 다른 일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외아들로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강생의 신비를 우리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듯이, 이 삼위 일체의 신비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조그마한 그릇 속에 커다란 호숫물을 모두 쓸어 담고자 노력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한하신 하느님, 시간과 공간 밖에서 시간과 공간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에 대해, 유한하며 동시에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살아야 하는 인간의 능력은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 그 신비를 조금이나마 풀어 볼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수학적인 계산으로써도 아니고, 놀 리가 정연한 이론으로써도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이것만이 삼위 일체의 신비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임을 우리는 너무나 자주 잊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만나러 온 니고데모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참된 사랑인가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셨다. 여러분 중에 외아들이 있다고 합시다. 피를 나눈 아들, 그것도 단지 하나뿐인 아들을 오직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때문에, 과연 아낌없이 내 놓을 수 있겠는가?

    외아들은 가장 소중한 존재이기에, 어느 누구도 이러한 제의앞에선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외아들을 보내주시어’라고 할만큼 깊으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반분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까지 우리에게 주셨으니, 그 밖의 그 무엇을 주시지 않을 수 있겠는가?’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언제나 머리 속에서 주판알을 퉁기며 계산적인 생활 속에 익숙해진 우리들이기에 우리는 하느님마저도 우리가 생각하는 개념 속에 집어넣고자 하는 잘못을 쉽게 저지르고는 합니다. 그리하여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을 우리가 만들고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만 아는 이기주의가 우리를 사로잡을 때 ‘너’와 ‘내’가 ‘우리’가 될 수 없습니다. 각자는 분리된 개체, 전혀 딴 사람으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 속에 일치를 이룰 때, ‘너의 것’과 ‘나의 것’, ‘너’와 ‘나’의 구분은 사실상 사라지고 맙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면서 자기의 모든 것을 줄 수 없다면, 그것은 완전한 사랑이 못될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완전한 일치’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고, ‘진정한 우리’가 형성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과는 껍질과 과육 그리고 씨앗이 하나로 합쳐 사과 덩어리가 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사랑 덩어리’!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은 ‘일체’ 즉 하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바로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의 사랑 덩어리를 만들어 내셨듯이, 우리도 이같은 삼위 일체적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일 것입니다.


    어느 주보에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 우리 교우들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합니다. 혓바닥 신자, 손바닥 신자, 그리고 발바닥 신자! 바닥 신자라는 칭호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분류 방법에 있어 어느 정도 수긍이 가기도 했습니다. 혓바닥 신자란 행동보다 말이 앞서는 신자, 손바닥 신자는 혼자서 열심히 기도는 하지만 자신만을 위한 신앙생활에 몰두해 있는 분을 가리켜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발바닥 신자란 성당을 위해 궂은 일은 도맡아 하지만 기도엔 별로 관심이 없는 교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우들 중엔 이 세 부류 중에 한 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져서는 안 된다는 논거였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삼위 일체적 사랑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참된 신앙인은 삼박자 일체가 아닌가! 삼박자 일체! 혀와 손 그리고 발이 하나를 이룰 때, 가장 이상적인 크리스천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삼위 일체 대축일을 맞아, 사도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작별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 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다음과 같은 인사 말씀으로 강론을 마칠까 합니다. ‘하느님의 손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과 성령의 혀가 여러분 안에서 일치를 이루시기를 기원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7 삼위일체 대축일(생명의 날)<요한 3,16-18>(가)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의 숨결이며 선물

    주교회의 가정사목위원회


    오늘날 인간은 자신을 신화(神化)하여 생명마저도 계획, 조정하는 권한을 지닌 절대자의 위치에 오르려 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신비,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한 모든 수수께끼의 해답이 오로지 하느님께 있다는 우리의 확신과 신앙은 이제 또 다른 위기를 맞게 된 것입니다.


    생명공학-인류의 미래?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인해 인류가 걱정하는 식량 문제가 해결될 조짐이 보이고, 불치의 병이라고 하던 많은 질병들이 극복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생명공학의 업적은 아직 사람의 형체도 갖추지 못한 인간 배아 단계에서도 일부 유전적인 질병의 치료도 가능하게 하였고, 고가(高價)의 치료의약품들을 값싸게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제는 인간의 유전자를 가진 동물복제가 가능해지면서, 인간에게 이식 가능한 장기를 가진 동물을 복제하여 그 복제된 동물로부터 장기를 공급받아 생명을 연장할 수 있으리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인간복제 — 그러나 이러한 놀라움이 큰 두려움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놀라움을 주는 생명공학의 연구가 인간 자신을 대상으로 삼으면서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인간 배아를 복제 하여 치료용 복제인간을 만들고, 복제인간을 이용하여 이식용 장기를 양산할 뿐만 아니라 인간 배아의 근원세포를 가지고 의약품을 만든다고 하니 이러한 발상 자체가 인간의 건강과 생명을 위해 인간을 희생시키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오류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현대의 인간이 온갖 재능과 창의력을 쏟아 이룩해놓은 결과가 결국 인간을 파멸로 몰고가는 수단이나 도구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시면서 그 파멸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상의 모든 이변과 파국은 시시하게 여겨질 정도의 파멸이 될 것임을 경고하셨습니다(인간의 구원자 15항).


    인간 생명의 시작 —인간 생명의 시작에 대해 거룩한 교회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난자가 수정된 순간부터, 아버지의 것도 어머니의 것도 아닌, 새로운 사람의 생명이 시작된다. 그것은 그 자신의 성장을 가지는 한 새로운 사람의 생명인 것이다”(인공유산 반대선언문).


    그렇다면 인간 배아에 대한 조작과 실험, 그에 따르는 희생은 다름 아닌 인간 생명에 대한 살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 배아 복제가 아무리 좋은 목적을 가진다 하더라도 인간 생명의 존엄성은 어떠한 경우에도 보호되어야 한다는 대원칙에 따라 인간 배아의 복제를 반대합니다.

    인간의 생명은 어떠한 경우라도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 생명에 대하여 존중과 사랑을 보이라고 우리 모두에게 요구하시는 생명의 하느님과 일치하여 함께 생명의 길로 나아갑시다.






    8               삼위일체 대축일<요한 3,16-18>(가)   에밀레 종

    최인호 베드로/작가


    경상북도 경주시 국립박물관 앞마당에는 동종(銅鐘) 하나가 놓여있습니다. 우리 나라에 현존하는 최고, 최대의 종으로 통일신라 성덕왕(聖德王 ?-737)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그의 아들 경덕왕이 만들기 시작하여 손자 혜공왕이 완성한 국보 제29호입니다. 이 종의 공식이름은 ‘성덕대왕 신종’이지만 흔히 ‘에밀레종’이라고 불립니다. 이종이 그렇게 불리게 된 데는 유명한 전설이 있습니다.

    그 무렵 도둑들이 들끓고 흉년이 드는 난세가 되자 경덕왕은 선왕의 명복을 비는 종을 만들면 악귀들이 물러가고 태평성대가 오리라는 염원으로 구리 20만 여 근으로 종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작업은 그의 아들인 혜공왕 때까지 이어졌는데 종을 만드는 재료가 부족하여 스님들은 집집마다 시주를 받으러 다녔습니다. 한 스님이 다 쓰러져가는 집을 방문했을 때 아기어머니가 “저희 집에는 아무것도 시주할 것이 없습니다. 이 아이라도 괜찮으시다면 받아주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드디어 종이 완성되어 타종해보았으나 이상하게도 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스님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산 아기를 넣어 종을 만들어야 소리가 난다”는 것이었습니다.

    꿈을 깬 스님은 그 여인을 찾아갔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과의 약속이니 기꺼이 아이를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 아이는 곧 뜨거운 쇳물에 넣어졌고, 마침내 종이 완성되었습니다. 타종을 하자 이제껏 들 어보지 못했던 웅장한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에게는 그 종소리가 마치 아기가 어머니를 애타게 부르는 소리 ‘에밀레- 에밀레-’로 들렸습니다. 이로부터 그 종 은 ‘에밀레종’으로 널리 불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생전에 예수님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마태21,33-46)를 통해서 자신을 비유하셨습니다.

    “하느님이 포도원을 만드셨다(이 세상을 만드셨음에 비유). 철이 되면 종(예언자)을 보내어 말을 전하게 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종들을 때리고 돌로 쳐죽였다. 하는 수 없이 하느님은 ‘내 아들이야 알아보겠지’ 하고 자신의 외아들을 보내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저자야말로 상속자다. 저자를 죽이면 이 포도원은 우리 것이 될 것이다’ 하고 끌어내어 죽여버렸다(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의 예언).”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처럼 하느님은 자신이 만든 포도원인 이 세상에 여러 사람을 보내어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포도원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마치 소리가 나지 않던 종처럼 포도원 사람들에게는 그 말씀의 종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셨으므로 마침내 외아들인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버린 것입니다. 이 엄청난 비극이 이 세상에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가져올 것을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기를 넣어 죽임으로써 그 종이 ‘에밀레-에밀레-’하고 울며 이 세상의 어둠을 물리치듯이 외아들 주님을 끓는 물에 넣어 완성한 그리스도왕국의 신종(神鐘)이야말로 우리들 마음속에 영원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 아버지-’ 하고 울려 퍼질 것입니다.







    9          삼위일체 대축일 <마태 28,16-20>(나) 사랑x사랑x사랑 = 하느님

    김영진 신부


    신학생 시절 방학이 되면 외국 신부들이 본당신부를 맡고 있는 곳에 가서 지내며 교리를 가르치곤 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교리를 가르치면서 어렵게 느껴지고 이해시키기 힘든 교리 하나가 있다.

    그것이 바로 삼위일체,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각각의 위격을 지니고 계시면서도, 한 하느님이시라는 교리다.

    물론 성서의 이 구석 저 구석에 이 교리를 뒷받침할만한 구절들이 있지만, 그래도 삼위일체교리는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어, 그냥 믿을 수밖에 없는 교리라는 것을 깨닫게되었다.

    이 교리에 대하여 전해 내려오는 일화가 하나 있다. 하루는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 삼위일체 교리를 어떻게 하면 잘 깨닫고 설명할 수 있을까 하여 고민하면서 바닷가를 산책하고 계셨다. 하루종일 바닷가에서 생각에 잠겨 있는데, 한쪽 구석 백사장에서 아이들 세명이 역시 하루종일 모래성을 쌓아 놓고 작은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퍼부으며 놀고 있었다. 성인께서 가까이 가서 “애들아, 너희들 무엇을 하고 있어”라고 물으시자, 어린이들은 “저희들은 저 바닷물을 이 모래성에 모두 퍼담으려고 합니다”라고 답했다. 성인께서 웃으시며 다시 “애들아, 너희가 죽을 때까지 해도 그 일은 못 끝낼 것이야”라고 하시자, 아이들은 “그래도 선생님께서 삼위일체교리를 깨닫는 일보다 더 쉬울 거예요”라고 답했다고 했다.

      

    이 일화는 소중한 교훈을 준다. 바닷물을 퍼담으려면 그릇이 바다만큼 커야 하고 하느님의 신비인 삼위일체 교리를 깨달으려면 인간의 지능이 하느님의 지능만큼 커야 하는데, 이것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삼위일체 교리는 그냥 믿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교리다.


    조개껍질로 바닷물, 퍼담기


    예비신자 교리를 배우던 교감선생님 한 분이 집에 가서 신자인 부인에게 말하기를 “천주교 교리는 그냥 무조건 믿어야되는 것이 많더구먼. 처녀가 아이를 가졌다는 것, 성부 성자 성령은 각각의 위격이면서 한 몸이라는 것 등은 이해할 수가 없어. 그냥 믿어야지 뭐”하더라는 것이다,

      

    흔히들 삼위일제에 대한 교리를 설명할 때 여러가지 비유를 든다. 예를 들어 클로버의 잎은 셋이지만 한 잎이고, 사람은 지, 정, 의(智情意)가 있지만 한 사람이며, 촛불과 태양은 빛과 열과 모양이 있지만 하나의 촛불이요, 태양이며, 삼각형은 각이 셋이지만 하나의 삼각형이고, 꽃은 모양, 색깔, 향기가 있지만 하나의 꽃송이며, 물체도 길이, 폭, 두께가 있지만 하나의 물체이다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비유일 뿐, 삼위일체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그냥 믿어야 할 교리다.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하늘에서 떨어지는 함박눈을 이해시키고 설명하기 어렵듯이, 천상의 신비인 삼위일체 교리를 우리인간의 유한한 두뇌로써 이해하고 설명하기란 어려우므로, 무조건 믿고 받아들일 때만이 이해와 설명이 가능하다.

    책상에 하루종일 앉아서 어떻게 하면 삼위일체교리를 보다 쉽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을까 궁리해 보아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 호우주의보 속에 쏟아지는 빗속을 거닐다 성당 뒷좌석에 쪼그리고 앉아있었는데, 하느님께서 내 머릿속에 한가지 생각을 심어주셨다.

    1곱하기(X) 1곱하기(X) 1은 1이 되듯이, 사랑 곱하기 사랑곱하기 사랑은 하느님이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하느님의 사랑은 폭탄과 같은 위대한 힘이 있는 것으로서, 더하는 것이 아니라 곱하는 것이다. 성부도 사랑이시고 성자도 사랑이시며 성령께서도 사랑이시다.


    하나 x 하나 x 하나는 하나이듯


    이 세 위격의 사랑은 서로 다른 역할의 사랑이시면서 또한 한 하느님이시다. 사랑만이 하나가 되는 힘을 가진다. 갈라진 부부, 흩어진 민족, 상처받은 인간관계는 사랑으로서만 하나가 되고 치유될 수 있다, 1x1x1은 하나이듯이, 그리고 사랑x사랑x사랑은 한 하느님이듯이, 또 성부, 성자, 성령도 한 하느님이듯이, 나와 너 그리고 우리는 모두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10               삼위일체 대축일 (나해) 하느님의 놀라운 신비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신명 4,32~34.39~40 (그분 밖에 다른 하느님은 없다)

    제2독서 로마 8,14~17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복 음 마태 28,16~20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라)


    우주를 보면 그 웅대함과 오묘함에 절로 감탄하게 됩니다. 무엇이 저 넓고 깊은 우주를 형성하고 운행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 태양 하나만 봐도 너무도 신비롭습니다. 무엇이 저렇게 이글이글 타고 있는데도 끝이 없이 계속되고 있는 것일까.


    학자들은 수소가 탄다고 합니다. 1초에 약 6억 톤에 가까운 수소가 타는데 1시간이면 2조 톤에 가까운 수소가 탑니다. 그것이 무려 45억 년이나 탔는데도 아직 반도 안 탔습니다.


    태양은 또 지금 어디로 달려가고 있습니까.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1초에 약 17km이상의 속도로 저 깊은 우주 속으로 달려갑니다. 그런데 혼자만 달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지구와 화성과 금성 등 태양계의 작은 별들을 거느리고 달려갑니다. 그러면 태양의 무엇이 이 별들을 끌어당기면서 달려가고 있을까요. 학자들은 중력이라고 합니다. 그 중력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이기에 수십억 년 동안 지구로 하여금 1분 1초도 틀리지 않게 자신을 공전하게 하 는 것입니까. 모릅니다. 다만 보고 감탄만 할 뿐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만 해도 너무 오묘합니다. 지구가 현재처럼 23.5도로 기울어져 있어서 사시사철의 계절을 구경할 수 있지 만일에 그 각도가 기울지 않았더라면 지구는 사람 살 곳이 되지 못했을 정도로 뜨겁거나 춥거나 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다의 면적이 지구 표면의 70% 이상을 차지했기 때문에 물의 순환이 이루어져 생물이 존재하고 있지 만일에 바다보다 육지가 더 넓었다면 지구는 죽음의 땅이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숨을 쉬는 대류권의 층의 두께도 지금보다 더 높거나 낮아도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됩니다.


    그렇게 볼 때 무엇 하나 오묘하고 신비롭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지구는 차치하고라도 인간의 육신 하나만 해도 너무 신비롭습니다. 여러 장기들과 뇌의 기능을 보면 컴퓨터보다 수천 수만 배 더 정밀하고 치밀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음식을 섭취하면 각 장기에서 양분을 흡수하고 저장하며 배설하여 순환시키는 그 모습과 기능들을 보면 위대한 공장이요 산업시설이면서 동시에 생명의 놀라운 약동이요 환희입니다. 무엇이 저것들을 형성케 하고 또한 운행케 하고 있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가능하기나 하며 또한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인간은 인간 자신도 모릅니다. 하느님의 작품인 우주 만물 그 어느 하나에 대해서도 뚜렷하고도 분명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리고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작품을 인간의 눈과 머리로써는 온전하게 이해할 수도 없고 또한 탐구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하느님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인간이 인간 자신도 모르는데 어찌 감히 하느님을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은 태양이나 우주보다도 몇만 배 더 놀랍고도 위대한 신비입니다. 그분이 어떻게 사람이 되시고 어떻게 죽음에서 부활로 빠스카 하셨는지 또한 성령이 어떻게 우리와 교회 안에 역사하시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모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머리와 지혜를 통하여 그분 의 신비를 파헤쳐 보고 또한 적으나마 맛들여 봐야 합니다. 그것이 또 하느님의 뜻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신비를 말할 때에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씁니다. 인간에게 인격이 있다면 하느님께는 위격이 있습니다. 그 위격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각각 다르고 독립적입니다. 세 위가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면서도 체는 오직 하나입니다. 몸이 하나이기 때문에 절대로 세 분이 아닙니다. 위격이 셋이면 세 분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세 위격을 가지셨으면서도 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인간의 언어 개념이나 지식으로써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냥 믿어야 합니다.


    성서에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없습니다. 이것은 성서의 가르침을 토대로 해서 교회가 만들어 낸 신학적인 용어입니다. ‘하느님’이라는 단어도 그 자체는 ‘하나’라는 단수이지만 그러나 그 내용은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이 이루는 복수가 됩니다. 마치 가정에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가 있으며 자녀들이 있지만 그러나 그 가정은 하나인 것과 같습니다. 물론 크게 적절한 예는 아니지만 이를테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삼위일체에 대한 명백한 신앙고백입니다. 이 신비야말로 모든 구원 질서의 원천이요 또한 우주 만물의 형성과 운행의 근본입니다. 모든 에너지가 거기서 나오며 모든 완성이 그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 속으로 우리의 삶을 이끌고 가야 합니다. 사랑의 완전한 일치요 생명의 근원이신 그분을 닮고 따라가야 합니다.






    11                   삼위일체 대축일. 마태 28,16-20 (나)

    김영남 신부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이하여 오늘 교회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 관하여 네 복음서 중에서 가장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는 마태오 복음서의 제일 끝자리에 나오는 말씀을 듣는다. 먼저 복음 말씀 자체를 묵상하고, 이어서 ‘삼위일체 대축일’인 오늘 축제의 의미에 관하여 묵상하겠다.


    오늘 주일 복음의 내용은 매우 집약적이다. 특히 “열한 제자는 예수께서 일러주신 대로 갈릴래아에 있는 산으로 갔다”라는 오늘 복음의 첫 문장은 한 마디 한 마디가 복음서의 앞 부분에 이미 나왔던 내용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 지면 관계상 몇 가지만 집중하여 살펴보겠다.


    “갈릴래아에 있는”: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말씀하셨는데(마태 28,10; 참조: 26,32의 예고), ‘갈릴래아’라는 장소는 제자들에게 큰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던 곳이었다.

    왜냐하면 갈릴래아는 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처음으로 소명을 받은 곳이었고, ‘제자로 양성된 곳’이었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후 당신의 제자들을 새 출발시키시려는 예수께서는 이제 그들을 그들의 ‘첫 사랑’이 있었던 갈릴래아로 불러내신 것이다(참조: 호세 2,16).


    산으로 갔다”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산’도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큰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구약성서를 보면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뵙고 그 분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다. 마태오 복음서에 의하면 제자들은 ‘산’에서 ‘산상설교’라는 새롭게 해석된 “계명”을 예수님으로부터 받았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갈릴래아의 그 산”으로 다시 부르신 것은 매우 의미 깊다. 그것은 당신의 제자들을 ‘모든 민족들에게 파견’하시기에 앞서 그들에게 당신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상기시켜주시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갖고 계신 분, 즉 죽음까지도 그분의 권한 아래에 두고 계신 “주님”으로서의 예수님이 제자들을 “만민에게” 파견하신다. 그런데 이 때 그분이 주시는 제자들의 사명의 핵심은 “만민을 ‘예수님의’ 제자로 삼는 것”이다. 언뜻 보면 매우 의아하게 생각될 수 있는 부분이다.


     ‘제자로 삼다’, ‘제자가 되게 하다’가 핵심사명이라니 도대체 무슨 뜻인가? 이 점은 지상 생애 동안 예수께서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제자들의 공동체를 형성”하려고 하셨는지를 생각해 보면 좀 더 이해가 될 수 있다. 무릇 제자란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의 사명은 복음선포를 듣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제자가 되도록 하는 데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열 한 제자는 ‘예수님의 제자’로만 남아 있었는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까지고 체험한 이제 그들은 만민에게 파견되어,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실 때에 하셨던 말씀대로 “사람 낚는 어부들이 되게”(마태 4,19) 된 것이다.


    “나는 세상 종말까지 어느 날이나 항상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에 의하여 새롭게 탄생되어, 계속 자라날 예수님의 제자공동체 곧, 교회에게 주어진 가장 든든한 보증의 말씀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면서 “세상의 빛과 소금”(마태 5,13-16)의 역할을 하려면, 갖가지 어려움을 겪게 되겠지만, 그 공동체는 당신 자신이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뜻하는 “임마누엘”이셨던 분이신 주님께서 “그들과 늘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을 받은 공동체이다.


    이제는 오늘 “삼위일체 대축일”의 주제와 직접 관련되는 말씀에 대하여 묵상할 차례가 되었다.

    사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관한 신앙 교리는 궁극적으로 인간적 이해의 능력을 초월한 것이다. 그것은 역사적 사건이었던 ‘예수님의 사건’을 통해 ‘계시’된 것으로서, 인간 인식의 한계를 겸손하게 인정할 줄 아는 사람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역사상 초기의 몇 세기 동안 교회는 ‘세상의 지혜’에 비추어 ‘쉽게’ 이해하려는 경향에 맞서, 이 신앙교리를 지키기 위해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어야 했다.


    오늘 복음말씀에 의하면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을 포괄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의 사랑의 친교”안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사람들은 성자 예수님과 결합되고, 성령을 받는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성자 예수님과 가장 깊은 사랑으로 ‘일체’가 되어 계신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데, 이 때 성령은 이런 친교를 근본적으로 가능하게 해 준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성부와 성자 성령의 삼위로 되어 계시다는 가르침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가르침을, 예수님의 삶 전체를 통하여 증언된 것처럼,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참조: 1요한 4,8.16)라는 점과 연결시켜 묵상하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다. 사랑은 역동적이다. 사랑은 가만히 정체되어 있지 않는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그토록 충만하셔서, 피조물인 인간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통하여” 그 삼위일체적 사랑의 친교에 참여할 수 있도록 부르시기까지 하신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생이 삼위일체이시며 사랑이신 이 하느님 안에 든든한 기초를 두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늘 경탄하며 감사드려야 할 것이다.






    12       삼위일체 대축일 <마태 28,16-20>(나) 세상 끝날때까지 너희와 항상

    허영업 신부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이다. 그리스도교인은 한마디로 ‘유일하신 아버지 하느님을 믿으며,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생명을 주시는 주님이신 성령을 믿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기도를 할 때나 식사를 할 때, 무슨 일을 하든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고 십자 성호를 긋는다. 이것은 무엇을 할 때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한다는 것이다.


      한 하느님 안에는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의 세 위가 계시는데, 모두가 같은 하느님이시다. 교회는 이성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이 삼위일체의 가르침을 믿음으로 고백한다. 왜냐하면 삼위일체 신비는 그리스도께 받은 계시의 교리이며, 하느님의 신적 생명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바로 하느님 자신에 관한 신비이다. 삼위일체의 신비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성삼께서 서로 나누시고 사귀시는 사랑이시다. 끝없이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사랑, 온전히 의탁하는 아들의 사랑, 아버지와 아들을 일치시키시는 성령의 사랑이시다. 이 모든 사랑은 하나의 사랑이고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흘러넘친다. 따라서 삼위일체의 신비는 사랑의 신비이다. 이 삼위일체의 신비는 어려운 가르침이 아니라 삶을 통해 본받아야 하는 하느님 사랑의 가르침이다. 또한 실제로 삶을 통해 이해되고 체험되는 사랑의 진리인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어라.”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에 따라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성실한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을 주님 앞에서 약속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함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세례를 받고, 모든 일을 하느님의 아들, 딸로서 사랑으로 행한다는 의미이다. 위격이 서로 다른 성부와 성자, 성령께서 하나의 완전한 일치를 이루시는 것도 바로 사랑 때문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하나로 일치시키고, 화해시키고, 변화시킨다. 사랑은 바로 다른 사람을 진정한 마음으로 인격적으로 받아들인다. 부부나 형제 사이처럼 가까울수록 서로의 인격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또한 다른 사람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서로 인격을 존중해 주고 소중하게 여길 때 사람들은 사랑으로 하나가 되고 그 사람들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삼위일체의 신비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표현’이 아닐까. 표현의 의미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사랑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표현하지 않으셨다면 우리 인간은 그분을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성부께서는 당신의 크신 사랑을 성자라는 표현적 존재로 구현하셨다. 육체와 세상 속에 존재하는 우리 인간은 이 표현이라는 양식으로 사랑에 접근하고 사랑의 실재를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표현은 그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지만 분명히 제외될 수 없는 수단이요 방법인 것이다. 하느님께서도 구체적인 역사 안에서 자신의 사랑을 전달하며 표현하신다.


      하느님의 자기 전달은 성서적으로는 파견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곧 성자와 성령의 파견이다. 이 파견 역시 표현이라는 형식 속에서 모든 것이 완성되는 절대적 미래를 지향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표현은 우리 삶의 모델이며 지향이다. 그 표현은 분명히 손이 닿는 곳, 곧 나의 삶 안에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표현의 삶을 충실히 할 때, 삼위일체의 신비에 참여할 수 있지 않을까.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대로 삼위일체의 신비는 절대적 신비로서 이성적으로는 분명히 관찰될 수는 없을 것이다. 신비를 이성적으로 이해하려는 자체가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대로 어리석은 짓이 될 것이다.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의 신비에 “나는 믿나이다.”라고 응답하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일 것이다.


        제1독서/신명 4,32-34.39-40


      “하느님께서 땅 위에 사람을 내신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나간 어느 세대에서나 물어 보아라”(32절).

       이스라엘은 주님을 무엇보다 당신 백성의 역사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으로 인식하였다. 이 하느님의 백성은 동시에 그분께서 창조주이시며, 사람과 모든 것의 원천이심을 깨닫는다. 이 구절은 신명기에서 유일하게 하느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곳이다. 구약 성서의 하느님은 마치 인간처럼 행동하시는 분으로 드러난다. 우리 인간과 이야기를 나누고, 듣고, 분노하시는 등 인간과 똑같이 감정을 갖고 행동하시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런 표현들은 하느님을 우리 인간과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은 살아 계시는 분, 곧 활동하시고 위격을 지니신 분으로 강조하는 표현이다. 곧 하느님은 만물을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인간 역사에 깊이 개입하시고 주관하시는 능력의 하느님이신 것이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께서 내 곁에 살아 계시고, 내 삶에 깊이 개입하시는 분으로 믿고 있는가? 나에게 하느님은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한 번 솔직히 자문해 볼 일이다.


      “그래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잘 될 것이다”(40절)라는 표현은 우리 삶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라는 믿음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주시는 ‘좋은 땅’에서 ‘행복’을 발견할 것이다. 히브리 말에서 ‘좋다’와 ‘행복’은 어근이 같다. 이 행복 가운데 하나가 이 땅에서 누리는 평화로서, 사람들은 여기에서 오래 살 수 있다.


        제2독서/로마 8,14-17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14절)에서 하느님의 자녀들을 직역하면 ‘아들들’이다. 곧 신앙과 세례를 통해 시작된 하느님의 양자 신분은 영의 힘으로 구현된다.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서간에서 자주 ‘영’과 ‘육’을 대조하고 있다. ‘육’은 죄에 기울어지고 이 세상 가치에 집착하는 인간 존재의 나약함을 의미한다. 반대로 ‘영’은 하느님께로 자신을 회두시키는 인간 존재를 통해 나타나는 하느님의 권능을 의미한다.


      양자 신분(15절)이라는 말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권에서 어떤 사람을 법적으로 양자로 삼아 가족의 한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을 표현하는 전문 용어였다. 바오로는 위의 용어를 채택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아버지 하느님의 부권에 속해 죄와 죽음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이 아닙니까?”(17절)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부활의 영광을 상속받으셨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인이 되어 영의 중개로 영광으로 상속받기 위해, 곧 아버지 하느님의 현존 속에서 살기 위해 그분의 죽음에 참여해야 한다. 다른 서간에서는 그들이 영광(로마 8,21), 하느님의(1고린 6,9.10; 15,50; 갈라 5,21) 불멸(1고린 15,50)을 상속받는다고 한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가 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기꺼이 동참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복음/마태 28,16-20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열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전에 갈릴래아에서 이스라엘 전도를 시작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이제 같은 땅에서 제자들을 시켜 세계 만민을 상대로 한 전도를 시작하신다(16절).


      만민 중에는 이스라엘 백성도 들어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 절대 다수는 예수님의 전도도 교회 사도들의 전도도 배척한 까닭에, 마태오 복음서 집필 무렵의 교회는 이스라엘 전도를 포기한 상태였다. 그러니 만민을 상대로 한 전도는 주로 이방인들을 향한 전도였다. 유다 지방과는 달리 갈릴래아 지방에는 이방인들이 많았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로 가신 것은 이방인 전도를 의도하신다는 상징 행위이다.


      구체적으로 어느 ‘산’인지 따질 필요는 없다. 마태오의 경우 산은 계시가 내리는 곳, 곧 상징적인 장소이다. 모세가 하느님께 율법을 받았고(출애 19,3), 엘리아가 하느님을 체험한 장소(1열왕 19,8-18)도 바로 산이었다. 갈릴래아의 산에서 열한 제자 역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명령을 받는다.


      “절하다”(17절) 동사는 마르코에 두 번 루가에 세 번 나오는데 마태오서는 무려 열세 번 나온다.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신성(神聖)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서에서 절하는 행위는 예수님께만 표현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18절) 받으셨으니 우주적 통치권을 물려받았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19절)라는 말씀대로 온 누리에 대해 통치권을 행사하신다. 종말 심판에 앞서서 이미 부활 순간부터 저 무한한 전권을 행사하신다. “너희는 이제부터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것을…… 볼 것이다”(마태 26,64).


      교회 공동체를 건설하는 구체적 방편은 두 가지, 곧 세례 수여와 계명 준수 교육이다(19-20절). 두 번째 방편은 예수님께서 평소에 명하신 것들을 모두 다 지키도록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일이다. 세례를 받은 이들이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익혀야만, 특히 산상 설교와 공동체 설교에 실린 그분의 윤리적 지침들을 일상 생활에서 지켜야만 참 제자들이 되어 참 교회 공동체 형성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20절).


      우리와 세상 종말까지 늘 함께하신다(20절)는 말씀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 약속이다. 곧 교회 공동체를 돕고자 늘 함께 계시겠다는 말씀이시다. 그러니 교회 공동체는 현존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의탁하면서 안심하고 종말을 향해 머나먼 순례의 길을 떠날 수 있다.






    13    삼위일체 대축일 마태 28.16-20 (나해) 세상 끝날때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표창준 신부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신데 성부, 성자, 성령이십니다. 하느님은 단세포와 같은 분이 아니고 성부, 성자, 성령 구별이 뚜렷한 셋이 일치를 이루시어 한 분이라는 말입니다. 얼른 이해가 가질 않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삼위로서 일체이신 하느님이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그리고 알아듣기 어려운 내용을 무슨 필요가 있어서 구태여 생각하고 말하는지, 우리 사람의 일상생활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를 이 시간에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욕망 중에 가장 강한 욕망은 무엇입니까? 식욕, 성욕, 명예욕, 소유욕, 사랑하고 싶은 욕망 등 인간에게 여러 욕망이 있는데 끝까지 없어지지 않는 가장 강한 욕망은 무엇입니까? 어떤 욕망을 채우게 되면 뿌듯해지고 기뻐집니다. 어느 욕망이든지 욕망이 이루어지면 내게 무엇이 얻어지고 채워짐으로써 내 생명이 더해지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만족과 기쁨을 느낍니다.


    돈이 생겼다거나 지식이 늘었거나 음식을 먹었거나 직접, 간접으로 내게 얻어지고 내 생명에 보탬이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뿌듯함과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사랑하면 기뻐진다’  ‘사랑하면 살리라’ 같은 이치로 생각해서, 사랑하면 즉 사랑의 욕망을 이루게 되면 내게 얻어지는 것이 있고 내 생명에 더해지는 것이 있어서 기뻐지고 살게 된다는 말이겠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것이고 나를 희생하고 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희생하고 내주는 사랑이 다른 이와 더 가까워지고 일치되게 하면서 결과적으로 내게도 얻어지고 생명이 더해지는 것이 되어 뿌듯함과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나의 이익을 타산하지 않고 나를 희생하는 것이 사랑인데 이 남을 위하는 사랑이 더 근본적으로 나를 채워주고 생명을 더해주는 효과를 낸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더해주고 살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데에서 옵니다.


    유태인 정신병리학자인 빅터 프랭클은 나치시대에 강제 수용소에 수용당했던 사람인데 그는 그 강제 수용소에 있을 때, 언제 죽을 지 모르는 극한 상황인 그 강제 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의 행동들에서 한 가지 공통된 점을 보았다고 합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계속 처형당하고 죽어가는 암흑과 같은 그 생활에서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친분이 있는 사람들끼리 손을 잡고 걷거나, 등을 대고 앉거나, 서로 손을 얹고 눕거나, 몸의 어떤 부분을 맞대고 있으려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함께 가까이 접촉을 유지하며 고독을 면하는 것을 생명선으로 하여 살아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그 사람의 파트너가 죽으면 예외 없이 이쪽 사람도 며칠 안 가서 죽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이 끊어질 때 살 힘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50대, 60대가 나이가 들면서 점차 시각, 청각이 약화되고 일할 능력도 줄어들고 기력이 쇠하여지며 식욕, 성욕도 점차 기울지만,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함께 있고 싶어하는 사랑의 욕망은 줄어들지 않으며 끝까지, 한 사람이 살아있는 한 강하게 남아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에서 사람은 자신도 살게 되는 생명력이 솟아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나 아닌 ‘너’를 독립된 주체로 긍정하고 존중하여 도와주고 이해하고 자기를 내주는 사랑은 나와 너의 일치를 가져오게 하면서 동시에 둘 사이에 구별을 뚜렷하게 합니다. 사랑이 클수록 일치가 커지고 구별도 더 뚜렷해집니다. 이때 둘의 일치는 둘만으로 머물지 않고 또 다른 사람에게로 확대되어 나아가면서 일치를 불러일으킵니다.


    저는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침묵 속에 기도하는 중에 어떤 사람을 생각하며 마음으로 그에게 다가갔을 때 그 사람 한없이 가까워지는 느낌이 생생하게 들면서 그가 뚜렷이 부각되어 나와 구별된 존재로 떠오르고 제 자신 안에 생기와 평화와 기쁨이 솟아났었습니다. 그와의 일치감으로 생동하게 된 이 마음은 그 한 사람만을 생각하는 것으로 멈추지 않고 또 다른 사람을 생각하면서 마음으로 다가가게 합니다.


    그래서 둘의 일치를 느끼는 데에서 출발하여 여러 사람과의 일치도 느끼게 했으며 하나인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을 가지게 하고, 이로써 제 마음은 생기를 띠며 무한히 넓어지고 평온함과 힘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랑은 구별된 둘 사이에 일치를 가져오고 이 둘의 일치는 또 다른 이와 일치케 하면서 공동체를 낳게 하는 폭발하는 생명력을 지녔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는 누구와 누구 사이입니까? 예를 들어, 주인과 강아지, 부모와 자녀, 부부 사이를 생각해 봅시다. 강아지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언제나 주인의 손안에서 움직이면서 주인에 속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치해 있습니다. 한편, 자녀는 자유의지를 가진 주체로서 부모의 뜻과는 독립된 자유의사가 있어서 부모의 뜻과 구별된 독립된 행동을 하기 때문에 강아지처럼 부모의 손안에 있지 않습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독립된 주체로서의 자녀는 부모를 생각해 드리고 존경하며 신뢰하고 사랑하면서 부모와 가까이 일치해 있습니다. 부모가 미처 생각지도 못한 것도 자녀는 부모를 위한 마음에서 하기로 합니다. 부모는 강아지보다도 자녀를 더 가까이 느끼고 아끼며 사랑합니다. 강아지보다는 자유의지로 엄연히 구별되고 독립된 자녀와 더 가까운 일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자유의지에 의해 구별과 독립성이 커진다고 해서 일치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더 깊고 지속적인 일치에 들어가게 됩니다.

    다음으로 부부 사이는 어떻습니까? 본래는 전혀 관계가 없는 남남이었고 자유의지를 가진 주체들로서 독립되고 구별된 각각이었으나 자유의사로 자발적으로 ‘너’인 상대방을 향한 사랑을 하게 되면서 가장 깊은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엄연히 구별된 둘이 이렇게 일치케 하는 것이 사랑의 효과입니다. 그리고 그 둘의 일치는 둘만으로 끝나지 않고 둘의 사랑의 일치로써 자녀를 낳고 그 자녀를 부부는 함께 기뻐하고 사랑하며 자녀와도 일치를 가져옵니다. 이렇게 사랑은 구별을 뚜렷이 하며 일치를 낳고 또 다른 구별된 너를 대하면서 기뻐하고 일치를 넓혀가고 깊게 하면서 공동체를 탄생시킵니다.


    하느님이 삼위일체이심도 셋이 뒤섞여서 구별이 없어진 하나가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의 구별이 뚜렷하면서 사랑으로 일치하고 그 일치는 또 하나의 ‘너’인 성령을 낳아 구별된 그 성령을 기뻐하고 일치케 되어 구별이 뚜렷한 성부, 성자, 성령이 사랑으로 일치되어 한 분이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사람을 하느님의 사랑의 일치에 참여시키시어 우리가 삼위일체이신 사랑의 하느님과 일치되어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을 닮은 우리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나, 너로 구별이 뚜렷한 주체로서 개체들이지만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면서 생명력을 얻고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멘.






    14     삼위일체 대축일 (마태 28,16-20)(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서울대교구 홍보실


    1. 복음 이야기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사명을 주시는 발현사화입니다.

    예수께서 평소에 일러주신 대로 열한 제자들은 갈릴래아 지방에 있는 산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제자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뵈옵고 처음에는 의심도 했지만 결국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어 그분께 경배했습니다. 그러자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능을 받으셨다고 선언하시면서 열한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어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그들이 받은 사명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본디 갈릴래아에서 이스라엘 백성만을 상대로 전도하셨는데, 이제 같은 땅에서 제자들을 시켜 모든 민족을 상대하여 전도를 시작하십니다.


    제자들이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해야 할 일은 ‘세례수여’와 ‘계명준수교육’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세상에 나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그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평소에 명하신 것들을 다 지키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시면서 “보시오, 나는 세상 끝날까지 항상 그대들과 함께 있습니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교회 공동체를 돕고자 늘 함께 계시겠다는 현존약속이라 하겠습니다.


    2. 우리의 이해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이는 니케아 공의회(325년)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를 거치면서 형성된 그리스도교의 핵심적인 교리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일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짐을 말하는 언어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끊임없이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 역시 하느님의 뜻을 따라 무상으로 모든 이들에게 베푸셨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인류 역사 안에 베푸심을 계속해 나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삼위일체의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으로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오늘 한국 교회는 외형적으로만 볼 때 분명히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교회 내적으로는 인구 증가율만큼 교회가 성장하지 못하고 있으며, 교회 외적으로는 현대 사회에서 교회는 그 영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교회는 외형적인 성장에만 치우칠 것이 아니라 내적 성장을 꾀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교회는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주님의 현존 약속을 믿고 끊임없이 베푸시고 사랑하시는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세상에 전해야 하겠습니다.






    15          삼위일체 대축일 (마태 28,16-20)(나)   아름다운 세상

    김명순 루피나/영문학 박사


    지금 저는 환갑이 지난 나이입니다. 그러다 보니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이 거리가 먼 것이 아니라 바로 제 주위에서 머뭇거리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 떠나는 것을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이사가는 것”이라고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인생은 하늘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즐거운 소풍 길”이라고도 했습니다. 작년에 세상을 떠난 미국의 한 여기자는 “먼 바다를 나서는 배는 이쪽에서 보면 점점 멀어지지만, 바다 저쪽에서 보면 점점 다가오는 것이다. 그것이 죽음이다.” 즉, 하늘나라로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저는 20여 년간 살던 집에서 지금의 집으로 이사올 때 묵은 짐을 과감히 정리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차마 버릴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아이들의 자라는 모습이 속속들이 배어있는 것들, 아스라한 추억이 담겨있는 저의 발자취 하나하나가 모두 제 삶에 발자국이 박힌 것들이었습니다. 아끼던 물건과의 이별이 이렇거늘 하물며 사랑하는 남편, 나의 분신인 세 딸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손자 손녀들, 몇십 년을 두고 사귀어온 정다운 나의 친구들, 허물없이 지내는 이웃들을 두고 어찌 이 세상을 떠나겠습니까?


    아기가 태어날 때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더욱 힘껏 움켜쥐려고 하듯, 더 많이 가지려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큰소리로 울며 이 세상에 태어나지만, 이 세상과 하직할 때는 모든 것을 떨쳐 내린 듯, 편안히 두 손을 활짝 펴고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두고 “돌아가셨다”라고 말합니다. 즉 주님의 품으로 영원히 돌아가는 것입니다.


    죽음은 필연적인 것이니 얼마남지 않은 저의 생애에 그 동안 직장 다닌다는 핑계로 하지 못하던 일들, 사랑과 시간을 나누고 능력과 재물을 나누며, 섬김과 나눔과 베품의 생활을 하며 하루하루를 주님의 사랑 속에 마무리지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천상병 님의 시가 생각납니다.


         귀 천(歸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저는 여기에 다음 한 구절을 보태고 싶습니다.

    “아름다운 이 세상, 주님의 사랑이 넘치는 곳.”






    16    삼위일체 대축일   마태 28.16-20 (나해) 세상 끝날 때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당신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면서 복음, 즉 기쁜 소식을 온 세상에 전파하라고 말씀하신다. “당신들은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으시오.” 기쁜 소식이란 무엇인가? 이 기쁜 소식은 인간들 사이에 오셔서 그들을 위해 돌아가시고 그들에게 당신 성령을 보내시기 위하여 하느님의 아들에 의한 인간들의 구원의 성취인 것이다. 이 구원은 역사 안에서 이루어졌고, 복음이 선포된 성탄에서부터 성령강림까지 축일을 지낸다.


    이 복음을 믿을 사람들에게 예수의 제자들은 세례를 주었고, 이 세례는 신앙으로 동의한 구원의 표지인 것이다. 이 구원이란 무엇인가? 마태오에 의하면 예수님이 세례의 양식을 가르쳐 주신다. “내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시오.” 이 신비로운 양식은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안에 인간들의 신앙을 일으키는 설교의 내용이고, 성령에 의해 세례자들에게 전달된 생명의 신비를 요약하는 것이다.


    사도들은 설교를 통해서 하느님의 아들의 전해준 하느님 생명의 신비를 계시하였다.

    신자들이 성세성사에서 받는 은총은 성령으로서 그들을 그리스도와 일치시켜 주면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계시되고 우리를 참여하도록 초대하는 천상적 생명의 신비를 지적하기 위해서, 교회는 성서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성경은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교회가 만들어 낸 것으로서 하느님 안의 일치를 드러내는 것이다. 하느님은 세분이지만, 하느님의 이름은 오직 한분이신 참 하느님이시고, 살아 계시고 영원하신 하느님이시다. 왜 교회는 성령강림축일 다음에 이 신비를 묵상하게 하는가? 그것은 성령강림이 어떻게 교회가 탄생했는지를 회상케 해주며, 성령의 은총이 무엇인가를 회상케 해주기 때문이다. 삼위 일체 축일은 교회가 어떤 생명으로 태어났는지를 가르쳐 준다. 즉 교회는 하느님 아버지가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신 생명으로 태어났다고 가르쳐준다.


    삼위일체 축일은 오늘만이 아니라 모든 전례주년에서 이 신비를 거행하도록 교회는 강조한다. 왜냐하면 삼위일체 신비는 모든 신비를 비춰주는 근본적 신비이기 때문이다.

    우리 신자 생활이란 나와 살아계신 하느님 아버지, 아들, 성령과의 개인적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기에 관해서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간에서 전개하고 있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의 가르침을 상기시키면서 우리가 하느님과 대화할 때 아빠, 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고 가르친다. 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효도와 사랑을 드려야 한다. 또 하느님은 우리를 창조해 주셨고 계속 보살펴 주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하느님은 구약시대에 한 백성을 선택하여 그들과 계약을 맺으셨고, 당신의 증거자가 되게 하셨다. 즉 이스라엘 백성은 한분이신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그 분께 의탁하고 살았다.


    그런데 하느님은 당신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시면서 아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이 분이 예수로서 하느님은 무한한 사랑을 보여 주신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고 유일하신 분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당신 아들을 주셨고 아들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시다. 아버지와 아들은 너무나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이 상호간의 사랑의 폭발이 성령이시다.


    이것이 생활하신 하느님의 신비로서 고립되지 않고 한분이신 하느님이시며 언제나 새로운 은혜 안에 완전히 일치되어 있는 하느님이시다. 예수는 언제나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불렀고, 예수의 제자들도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영원한 생명의 원천으로 믿었다.

    마태오는 하느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루가는 그저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친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과 자녀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아들인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받은 은총이며, 성세성사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다. 성령의 활동이 없이 우리는 아버지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도 없고, 예수를 믿을 수도 없다.


    우리는 성령의 활동과 그의 내적 작용과 우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주심으로써 비로소 성령을 알 수 있다. 성령만이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신다. 바오로는 이것을 강조한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로마 8.14, 16)

    성령은 일치시켜 주시는 분이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를 일치시켜 준다. 왜냐하면 성령은 그들처럼 사랑이기 때문이다. 성부께서는 우리 인간들을 당신 아들과 일치시키기 위해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다. 성령은 우리에게 신앙을 주시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 마음 안에 부어 주신다.


    성령과 우리의 관계는 우리 신자 생활의 원천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야 한다. 성령은 우리에게 신앙, 희망, 사랑을 북돋아 주신다. 성령께 충실하는 것은 바로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당신 사도들을 떠나면서 “나는 세상 끝날까지 항상 당신들과 함께 있겠습니다.”라고 선포하셨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언제나 신자들과 함께 계실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 성령이 우리 마음 안에서 살아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언제나 하느님의 자녀로서 착실히 살고, 또 모든 인간이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들이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성령께 의탁해야 한다. 우리는 또한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의 자자가 되게 해주시도록 성령께 기도해야 한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용감하게 따라 가도록 사랑의 생활을 함으로써 당신 아버지와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성령께 기도하자.






    17    삼위일체 대축일 마태 28.16-20 (나해) 세상 끝날때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천주 성부와 그 독생 성자와 성령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셨으니, 찬미받으소서”(봉헌송).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반년을 지내온 오늘 이 노래를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천주 성자이심으로써 또 당신의 말씀으로써 우리에게 삼위일체 교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리아와 요셉께서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으셨을 때 예수께서는 “나는 내 성부의 일에 마음을 써야 할 것을 모르고 계셨습니까?”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첫 번째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가장 마음을 쓰신 일은 성부의 영광입니다. “나의 음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나와 성부는 하나입니다.” 예수께서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성부여, 내 영혼을 당신 손에 맡깁니다.”라고 소리치셨습니다. 주께서는 부활하신 후 사도들에게 나타나시어 “성부께서 나를 보내셨음같이, 나는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사도들과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그 나라가 임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주께서는 성령께 대해서도 아주 똑똑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누가 나를 사랑하면, 그는 내 말을 준행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빠라끌리또 성령께서 모든 것을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시겠고,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말한 바를 다 회상시키실 것입니다.” “아버지한테서 내가 보낼 빠라끌리또께서 오시면, 아버지께로부터 좇아나신 진리의 성령 그분이 나를 증언하실 것입니다.” – 이렇게 사도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께서는 삼위일체 교리를 간추려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나를 사랑하면 그는 내 말을 준행할 것이니, 나의 어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겠고 또한 우리가 그 사람에게 가서 함께 살겠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우리 신앙의 크나큰 신비입니다. 천주 성자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람이 되신 것도 이 신비를 계시하시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교리를 깨우치시기가 매우 힘드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교리를 얼마나 깨닫고 있습니까? 하여간 우리는 삼위일체 교리가 그리스도와 성교회에서 매우 중대하며 따라서 우리 인생에게도 중대하다는 것을 어느 정도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성세를 받았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도 성삼위의 이름으로 사함을 받습니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하면서 성호를 긋고 기도를 시작합니다. 또 우리가 이 세상을 하직할 때에는 성삼위의 이름으로 성유를 발리우는 병자의 성사를 받습니다. 그런데 삼위일체 교리는 대부분의 신자들에게 있어서 그저 교리일 뿐입니다. 이 교리가 신자들의 마음을 따뜻이 하거나 영신적 생각이나 생활 태도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 듯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한 분이신 하느님께 세 위가 계시며, 세 위께서 각각 온전히 천주성을 차지하고 계신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완전히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성삼위께 진정으로 관련을 맺고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천주 성자이신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 안에 사시게 하여,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신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우리 정신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가득 차고 우리 마음은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하여금 우리를 충만케 하시도록 하여 하느님의 사장을 맛들이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우리 마음의 귀빈으로 모시기를 더욱 더욱 원해야 합니다.

    끝으로 성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며 성령께서 우리를 이끄시는 대로, 우리는 우리의 생명과 사랑과 기도와 우리 전체를 성부께로 향해야 합니다. 미사 때의 말씀대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과 더불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온갖 영예와 영광을 세세에 영원히 받으시나이다. 아멘”


    우리는 언제나 미사로 돌아옵니다. 삼위일체 교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의 절정이요 결정이듯이, 미사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가르치심과, 주님의 구원과, 성부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기도를 알려 줍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외로운 인생의 구렁에서 건져내시어 하느님의 가족, 성삼위의 가족에로 다시 이끌어 들이십니다. 우리는 미사 때 우리 기도를 올바로 드려서 성삼위께 대하여 올바른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에 대한 태도도 올바르게 취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야 주께서 우리에게도 말씀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가서 만백성을 가르쳐 나의 자자가 되게 하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주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다 지키도록 가르치라. 보라, 나는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노라.”






    18           삼위일체 대축일 <마태 28,16-20>(나)  사랑의 친교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이하여 오늘 교회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 관하여 네 복음서 중에서 가장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는 마태오 복음서의 제일 끝자리에 나오는 말씀을 듣는다. 먼저 복음 말씀 자체를 묵상하고, 이어서 「삼위일체 대축일」인 오늘 축제의 의미에 관하여 묵상하겠다.

      

    오늘 주일 복음의 내용은 매우 집약적이다. 특히 「열한 제자는 예수께서 일러주신 대로 갈릴래아에 있는 산으로 갔다」라는 오늘 복음의 첫 문장은 한 마디 한 마디가 복음서의 앞부분에 이미 나왔던 내용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 지면 관계상 몇 가지만 집중하여 살펴보겠다.

      

    「갈릴레아에 있는」;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갈릴레아로 가라」고 말씀하셨는데(마태 28,10: 26,32), 「갈릴레아」라는 장소는 제자들에게 큰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던 곳이었다. 왜냐하면 갈릴래아는 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처음으로 소명을 받은 곳」이었고, 「제자로 양성된 곳」이었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후 당신의 제자들을 새 출발시키시려는 예수께서는, 이제 그들을 그들의 「첫 사랑」이 있었던 갈릴래아로 불러내신 것이다(참조: 호세 2,16).

    「산으로 갔다」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산」도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큰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구약성서를 보면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뵙고 그 분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다. 마태오 복음서에 의하면 제자들은 「산」에서 산상설교라는 새롭게 해석된 계명을 예수님으로부터 받았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갈릴래아의 그 산」으로 다시 부르신 것은 매운 의미 깊다. 그것은 당신의 제자들을 「모든 민족들에게 파견」하시기에 앞서, 그들에게 당신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상기시켜주시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갖고 계신 분, 즉 죽음까지도 그분의 권한아래에 두고 계신 주님으로서의 예수님이 제자들을 만민에게 파견하신다. 그런데 이 때 그분이 주시는 제자들의 사명의 핵심은 만민을「예수님의」 제자로 삼는 것」이다. 언뜻 보면 매우 의아하게 생각될 수 있는 부분이다.


    「제자로 삼다」「제자가 되게 하다」가 핵심사명이라니 도대체 무슨 뜻인가? 이 점은 지상 생애 동안 예수께서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제자들의 공동체를 형성」하려고 하셨는지를 생각해 보면 좀 더 이해가 될 수 있다. 무릇 제자란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의 사명은 복음선포를 듣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제자가 되도록 하는 데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열한 제자는「예수님의 제자」로만 남아 있었는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까지 체험한 이제 그들은 만민에게 파견되어,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실 때에 하셨던 말씀대로 「사람낚는 어부들이 되게」(마태 4,19) 된 것이다.

    「나는 세상 종말까지 어느 날이나 항상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 이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에 의하여 새롭게 탄생되어, 계속 자라날 예수님의 제자공동체 곧, 교회에게 주어진 가장 든든한 보증의 말씀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면서 「세상의 빛과 소금」(마태 5,13-16)의 역할을 하려면, 갖가지 어려움을 겪게 되겠지만, 그 공동체는 당신 자신이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뜻하는 「임마누엘」이셨던 분이신 주님께서 「그들과 늘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을 받은 공동체이다. 이제는 오늘 「삼위일체 대축일」의 주제와 직접 관련되는 말씀에 대하여 묵상할 차례가 되었다.


    사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관한 신앙 교리는, 궁극적으로 인간적 이해의 능력을 초월한 것이다, 그것은 역사적 사건이었던 「예수님의 사건」을 통해 「계시」된 것으로서, 인간인식의 한계를 겸손하게 인정할 줄 아는 사람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역사상 초기의 몇세기 동안 교회는 세상의 지혜에 비추어 쉽게 이해하려는 경향에 맞서,이 신앙교리를 지키기 위해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어야했다.

    오늘 복음말씀에 의하면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을 포괄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의 사랑의 친교」안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사람들은 성자 예수님과 결합되고, 성령을 받는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성자 예수님과 가장 깊은 사랑으로 「일체」가 되어 계신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데, 이 때 성령은 이런 친교를 근본적으로 가능하게 해 준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성부와 성자 성령의 삼위로 되어 계시다는 카르침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가르침을, 예수님의 삶 전체를 통하여 증언된 것처럼,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참조: 1요한 4,8․16)라는 점과 연결시켜 묵상하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다.

    사랑은 역동적이다. 사랑은 가만히 정체되어 있지 않는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그토록 충만하셔서 피조물인 인간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통하여」그 삼위일체적 사랑의 친교에 참여할 수 있도록 부르시기까지 하신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생이 삼위일체이시며. 사랑이신 이 하느님 안에 든든한 기초를 두고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늘 경탄하며 감사드려야 할 것이다.







    19                  삼위일체 대축일 (다해) 하느님의 신비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잠언 8,22~31 (땅이 생기기 전, 지혜는 이미 태어났다) 

    제2독서 로마 5,1~5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로 나아갑니다) 

    복 음 요한 16,12~15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다 나의 것이다.) 


    아이들은 어른의 세계를 모릅니다. 부모가 얼마나 자기들을 사랑하고 또 세상 사는 일이 얼마나 힘드는지 그리고 부부간의 애정이나 사업에서 오는 여러 가지 애환들을 자녀들은 모릅니다. 부모는 그냥 자기들을 키워 주시는 분이며 달라면 주는 분이고 필요하면 찾는 분이지 부모가 과연 어떤 삶을 사는 분인지는 잘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하느님을 모릅니다. 그의 두뇌를 동원하여 하느님의 속성을 파헤쳐 보고 그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추구하고자 하지만 그러나 인간은 성서에서 등장되는 몇 가지 안되는 말씀들을 통하여 어렴풋이 짐작이나 하고 추측이나 할 뿐입니다. 사실, 우리가 모두 알 수 있다면 그분은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닙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각 사람에겐 ‘인격’이라는 것이 있듯이 하느님께도 ‘위격’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위격이 하나면 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위격이 셋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십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세 분이어야 하는데 그런데 성서는 그 세 위격이 오직 한 분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삼위일체’ 대목에서 고개가 자꾸 갸우뚱해집니다.


    위격이 셋이면서도 한 분이시고 한 분이시면서도 위격이 셋이 되십니다. 신학자들은 그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을 시도하지 만 그러나 세상 끝날까지 이 시도는 제자리 걸음에 그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그분을 직접 뵙기 전에는 우리는 사실 확실한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성서 말씀이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는 하느님의 심오한 신비의 내용을 아스라이 비춰 주고 있습니다. 즉 ‘지혜’라는 위격화된 존재가 창조 이전부터 존재하면서 하느님과 함께 작업을 하시고 특히 사람들이 있는 곳에 기쁘게 있으면서 어떤 목적의 일을 하십니다. 이 지혜가 도대체 누구냐?


    이 지혜는 하느님의 속성이 아니며 하느님과 세상과 관계를 맺는 중개자로서 등장되는 분인데 이를테면 요한 복음에서는 ‘로고스’ 로 나오며 그리고 그분은 바로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가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오늘 1독서에서는 삼위일체의 신비가 희미하게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2독서와 복음에서는 성령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시어 믿음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 그리고 예수께서 인류에게 하신 말씀을 깨닫게 하시며 앞으로 다가올 일을 일러주실 분, 그분이 성령이십니다. 즉 예수님께서 다하지 못하신 말씀을 성령께서 계속 전달해 주시며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하느님의 구원사업이 가능케 하십니다.


    그러고 보면 하느님 안에서도 그 역할이 분담되어 있는 듯이 보입니다. 하느님이라는 하나의 공동체 안에는 선후의 관계는 없지만 아버지가 계시고 아들이 계시며 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그 관계를 가능케 하고 또한 아버지와 아들에게 근본적인 힘이 되시는 성령이 계십니다. 그런데 이 세 역할이 고유하면서도 그러나 하느님은 한 분이십니다.


    성부인 아버지께서 창조 사업을 주도하셨다면 지혜이신 말씀께서는 구속 사업을 수행하셨고 그리고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는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의 일을 가능케 할 뿐만 아니라 성자가 이룩한 구원사업을 마무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역할을 억지로 붙인다면 그렇지만 또 가만히 들여다보면 창조고 구속이고 모든 작업은 세 위격이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말 표현이 이상하지만, 하느님이 세 위격을 가지고 계시다 해서 한 위격씩 따로 따로 분해되는 것도 아니며 또는 조립된 것도 아닙니다. 한 위격을 빼면 다른 위격도 존재가 되지 않는 그런 공존과 공유와 공생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자체가 놀라운 신비입니다.


    이 지구는 땅덩어리와 물과 공기가 있습니다. 마치 삼위일체처럼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라도 떼어 버린다면 생물체는 존재되지 않습니다. 지구는 하나의 신비이듯이 우주도 신비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몸도 들여다보면 ‘신비’를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작은 미물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하느님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신비는 어떻겠습니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성부는 성자를 사랑하시고 성자는 성부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원인과 결과는 성령이십니다. 그런데 인간이 감히 그분의 사랑에 초대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할 때, 그리고 하느님 때문에 이웃을 사랑할 때 그분의 신비를 보다 깊이 이해할 것입니다.






    20         삼위 일체 대축일 요한 16.12-15 (다해) 아버지의 것은 내것

    조순창 신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로 계시된 하느님을 믿는 ‘신앙고백’을 새롭게 하며, 믿음의 뜻을 지혜로 깨닫고, 깨달은 바를 ‘공동체 생활’에서 실천함이 이 삼위일체 대축일의 뜻입니다.


    영원하신 하느님께서 한처음(태초)에 우주와 사람을 창조하시고 섭리로써 오늘도 보존 진화케 하십니다. 이는 혼돈에서 지혜로 질서지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고,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이며, 그분을 아버지 하느님 성부라 부릅니다.


    그 하느님은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시어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사랑의 가교를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은총을 받고, 은총은 고통을 이기고,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끈기를 낳고, 끈기는 희망을 낳으며,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이 되신 ‘성자’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성자’라 부릅니다.


    그 예수님은 당신 사명을 마치시고, ‘진리의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은 제자들을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셨고, 말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그리스도 부활의 기쁜 소식을 만방에 전하게 하셨으며, 진실한 형제애는 나누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창조로써 생명과 일치를 주시는 ‘성령’의 모습을 보는 것이며, 그분을 ‘성령’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성삼위의 신비를 알도록 설명하고, 이해할 수는 없으나, 하느님을 믿는 믿음의 생활이 더욱 절실히 필요한 오늘입니다.


    삼위일체의 생활 신앙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계약을 깨뜨렸어도 덩달아 취소하지는 않으시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성실히 약속을 지키심과 같이 우리도 일관성있는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영세 때에 “마귀를 끊고, 하느님 믿는다”과 한 ‘신앙 고백’을 지켜, 변덕 부리지 않고, 주일을 잘 지키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부부 서약 때에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하거나 병들었거나, 일생 동안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의를 지키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는 부부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속죄하여 주시기 위해서, 사랑으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찾아 주셨고, 사랑으로써 사람들간의 화합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우리들도, 끼리끼리 뭉쳐서 파벌을 이루고, 무관심이나 원수처럼 담을 쌓고 사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그리고, 민주․평등 사회라지만, 돈이나 지위나 학벌로의 넘나들 수 없는 계층간의 위화감이나, 공평하기보다 친한 사람만 봐 주느라고 질서를 어김으로써 사회의 불안과 불신 조성이 오늘의 문제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계층과 파벌의 장벽을 쳐부수는 사랑과 희생적 사명감으로 화합의 가교를 놓아야 합니다.


    성령은 새로운 창조를 새롭게 하여 하느님의 자녀로서 새 생명을 주시고, 사랑의 위력으로 새로운 낙원을 이루게 하여 주셨습니다. 현대 산업화에 따라서 비인간화로 가정의 애정 기능이 깨어지고, 소외 등으로 비정의 사회가 되어가는 것은 걱정입니다. 부모의 사랑이 부족한 탓으로 아기가 손가락을 빨고 있어도 무관심하여 2세들이 반사회적 인물이 되고 맙니다. 자녀의 실수에도 놀라지 않는 무감각과 비정한 태아 살인의 독을 녹이는 것은 사랑과 봉사와 희생이고, 그것으로써 공동체를 이루는 일입니다.


    교회는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고통받고 소외당한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사랑을 실천합시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21       삼위일체 대축일 <요한 16,12-15> (다)  삼위일체 – 살아야 할 신비

    강영구 신부


    오늘은 하느님의 신비인 삼위 일체를 기념하면서 그 신비를 묵상하는 날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은 삼위 일체의 신비 속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할 때나 밥을 먹을 때나 어떤 일을 할 때나 언제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광송을 외우면서도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하면서 기도합니다.

    즉 우리의 모든 언행이 삼위 일체이신 하느님께 영광이 되기를 바라면서, 모든 일을 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교인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삼위 일체의 신비가 어떤 것인지를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이 세상의 일도, 아니 나 자신도 누구인지 잘 알지 못하는 처지에 어찌 하느님의 저 깊고 큰 신비를 알 수 있겠습니까?

      

    한 분이신 하느님, 그러면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계시는 하느님. 한 분이신 데, 성부도 계시고 성자도 계시고 성령도 계신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계신데도 세 분이 아니고 한 분이다? 셋인데 하나다? 하나인데 하나가 아니고 셋이다?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는 한 분이시면서도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계시는 하느님에 대하여 끊임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무지 우리가 알아들을 수도 없는 이런 신비를 하느님께서 성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삼위 일체의 신비는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신비, 사랑의 신비, 일치의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성서 특별히 구약성서는 절대 주권을 지니신 유일(唯一)하신 한 분 하느님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장 3절에서 하느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로 내가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하느님이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그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 나 야훼 너희의 하느님은 질투하는 신이다.” 즉, 출애굽기는 절대적이며 배타적인 흠숭을 요구하시고, 당신 이외에 그 어떤 신(神)도 용납하시지 않는 한 분 하느님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한 분 하느님을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하느님, 즉 우리 인간들의 삶과 무관하게 하늘 저 위에 계시는 어떤 분을 계시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느님(마태 22,32), 인간 역사에 개입하시면서, 인간들 가운데서 인간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 인간들에게 말씀을 건네시고 인간들로부터 섬김을 받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의 모습이 삼위 일체(三位一體)입니다. 즉,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 만물의 주인으로서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하시는 하느님. 인간을 당신의 모상대로 만드시고 숨결을 불어넣어 주심으로써, 당신 생명에 참여케 하시는 하느님, 타락한 인간을 내팽개치지 않으시고 사랑하셔서 구원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지켜 주시는 하느님, 주린 배를 채우도록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 주시는 하느님, 시나이 산에서 그들과 계약을 맺으심으로써 구원의 역사를 주도하시는 하느님, 십계명을 통하여 바른 삶의 길을 제시하신 하느님, 바로 이런 하느님이 살아 계시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신약에서는, 또 다른 모습의 하느님을 우리는 만나게 됩니다. 그분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입니다. 사람들 가운데서 사람들과 함께 사시면서,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시는 하느님, 사람들을 위한 일이라면 그 무엇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기쁘게 행동으로 옮기시는 하느님, 인간을 옭아매고 있는 온갖 속박에서 사람을 해방시키시고자 몸으로 부딪치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끝내는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 내어주시는 하느님,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리심으로써 참으로 무력하게 죽어 가는 하느님, 하느님이시지만 하느님 같지 않은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런 모습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또는 구원받기도 합니다. 사람들 가운데 사람으로 오셨으니 사람들이 긴가민가하면서 헷갈릴 수밖에 없는 하느님이신 데, 그분을 하느님으로 알아보고 믿는 사람들은, 그분을 통하여 구원을 받고 평화를 누리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스스로 심판받게 되는 그런 하느님입니다. 그분이 곧 성자 그리스도이신데 나자렛 사람 예수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 다른 하느님의 모습을 성서에서 발견하게 되는데 ,모든 것을 살리시는 하느님, 생명을 불어넣으시고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하느님입니다. 진흙으로 만들어진 인간 안에 숨결로 들어가시어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하느님, 기드온이나 삼손 같은 평범한 인간 위에 내리시어 그들에게 지혜와 힘을 주시어 그들을 판관이 되게 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하는 하느님, 엘리야나 예레미야 혹은 이사야 같은 인물 위에 내리시어 그들을 예언자가 되게 하시는 하느님, 사울과 다윗 위에 내리시어 그들에게 능력과 지혜를 주시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변모시키는 하느님, 그리고 오순절 날에 사도들 위에 내리시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생동하게 하는 하느님, 인간과 인간사이에 쌓여 있던 장벽을 허물어서 하나 되게 하는 하느님, 사도들을 변화시켜 그리스도의 증거자가 되게 하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성령은 바로 그 하느님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 인간을 구체적인 모습으로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변모시키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이 삼위 일체이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들은 제2 독서에서도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져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금의 이 은총을 누리게 되었으며,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이 말씀에서도 삼위 일체의 신비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런 하느님을 믿는 우리가 일상의 삶 속에서 삼위 일체의 신비를 드러내야 할 차례입니다. 하느님께서 삼위 일체의 신비를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어 버린 하느님이나 머리 속에 관념적으로 들어 있는 하느님을 믿지 않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하늘 저 멀리 우리와는 무관한 곳에 머물러 있는 하느님을 믿지 않습니다.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시는 삼위 일체이신 하느님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서 거듭나는 사람이 되었고, 모든 일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고 있는 우리의 신앙 생활은 살아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살아 있는 신앙 생활을 하게 됩니까?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시는 하느님으로부터 생명력을 받는 사람들이 살아 있는 신앙 생활을 하게 됩니다. 끊임없는 회심으로 자신을 비우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은총은 쏟아지게 되고 생명력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실한 기도 생활과 성사 생활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충실히 하는 사람이 생명력으로 충만케 됩니다. 성서를 읽고 하느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명력으로 충만케 됩니다.

      

    이런 모습으로 사는 신앙인들이 일상의 삶 속에서 삼위 일체의 신비를 드러내게 되는데, 무엇보다도 사랑으로 하나 되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셋이면서도 셋이 아니고 하나인 신비는 하느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여럿이지만 사랑하면 하나가 됩니다. 너와 나가 하나가 되고 우리가 하나가 됩니다. 사랑하여 하나가 되면 우리는 모두 살아납니다. 부부가 사랑으로 하나 되고 부모 자식이 사랑으로 하나 되면 생명력으로 충만한 가정이 됩니다. 사랑으로 이웃과 이웃이 하나가 되면 기쁨과 평화가 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촌은 심각한 분열 현상을 겪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민족 분규가 끊이질 않고 나라와 나라는 서로 힘 겨루기를 하면서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죽음밖에는 없습니다. 지금 유고슬라비아라는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족 분규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수천 명의 무고한 생명들이 죽었고 수백만의 전쟁 이재민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참상을 겪으면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그렇습니다. 남북으로 갈라져 있기에 늘 서로를 불신하고, 총부리를 겨눈 채 서로를 잡아먹으려 하고 이산 가족들은 그들대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 고통도 부족한지 이제는 영남이 어떻고 호남이 어떻고 하면서 편가름을 하려 합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요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요즘은 또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부부들의 이기심 때문에 파탄을 맞고 있습니까? 모두가 사랑하지 않기에 또 너그럽게 서로를 포용하지 못하기에 일어나는 비극입니다. 우리는 삼위 일체이신 하느님의 생명 안에 살아가는 데 장애가 되는 분열과 당파심, 이기심을 몰아내고 일치의 사도가 되어야 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삼위 일체의 신비는 머리로 알아들을 수 있는 신비가 아니라 몸으로 실천해야 할 신비입니다. 우선 우리의 가슴속에서부터 나 중심적인 이기심을 쫓아내도록 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가정을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이 되게 합시다. 나아가서 이 사회 속에 분열과 불화를 조성하는 온갖 악들을 추방하는 데 앞장서 가도록 합시다. 삼위 일체이신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 속에 하나 되는 삶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주와 항상 영원히. 아멘.”






    22      삼위일체 대축일 <요한 16, 12-15> (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사는 생활

    유영봉 신부

      

    묵상 : 三位一體 교리는 알아들을 수 없는 교리이기에 ‘그냥 그렇다 치고’ 넘어가야 할 교리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성삼교리는 우리 신앙의 목표이며 이상이다. 우리는 매일의 생촬 안에서 성부 성자 성령께서 사랑으로 하나되는 신비를 체험해야 한다.


    구원의 역사 안에 드러난 삼위일체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이다. 구약의 백성들은 한분이신 야훼 하느님을 믿었지만, 그 하느님이 삼위일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계시된 하느님의 신비다.

    세상을 창조하신 아버지 하느님은, 죄악으로 인해 당신께로부터 멀어진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당신의 아들 성자를 파견하셨고, 성부와 성자께서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발하시는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우리를 당신 사랑 안에 살도록 이끌어 주신다. 구원의 역사 안에서 드러나는 삼위의 모습은 바로 사랑이신 하느님의 모습이며 영광인 것이다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신자(信者)라는 말은 믿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무엇을 믿느냐고 물으면, 대개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한다. 당신이 믿는 하느님은 어떤 분이냐고 물으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아마도 ‘하느님은 영원하신 분이시고,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시며, 전지(全知)하신 분이시고, 악의 그림자도 없는 전선(全善)하신 분이시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느님은 철학자들이 그려낸 신(神)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서가 우리에게 계시해주는 하느님은 ‘창조주이시며, 아버지시다’는 것이다,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살피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 그리고 크신 사랑을 지니신 분이라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1요한 4,8)고 하였다. 이 얼마나 마음에 바로 와닿는 표현인가? ‘하느님은 창조주이시고 아버지시다’는 것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것과 같은 뜻이라고 생각된다.


    예수님은 지상의 온 생애를 통해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사실을 가르치셨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말은 너무나 때가 많이 묻은 말이라, 때로는 그 뜻이 애매한 경우가 많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고 할 때,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성부, 성자, 성령 세분은 서로를 위하고, 서로를 향해 자신을 완전히 내놓은 사랑으로 한몸을 이루시는 사랑이시다. 셋이 사랑으로 하나되는 신비, 이것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본질이며 모습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질문에 대한 확실한 대답이라 할 수 있다. 삼위가 서로를 위하는 사랑으로 하나가 되신 분이 하느님이시다, 우리에게 많은 것을 깨우쳐주는 교리가 아닐 수 없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사는 공동체인 교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다’라고 하였다. ‘백성’이란 공동체를 뜻한다. 그런데 이 백성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사랑으로 한몸을 이루듯이, 신자 상호간에 서로를 위하는 나눔과 섬김을 통해 하나가 되는 백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은, 네 것 내 것 없이, 가진 바를 나누고 서로의 기쁨과 고통을 나눔으로써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었던 초대교화의 모습이다,(사도 2․4장) 서로를 향해 서로를 바치는 상호수여(相互受與)의 사랑으로, 일체를 이루시는 성삼위(聖三位)의 신비는 바로 교회의 이상인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사는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성삼위의 신비를 사는 생활


    우리는 흔히 삼위일체교리는 잘 이해할수도 없고, 잘못하다가는 이단자가 되기 십상이므로 ‘그냥 그렇다 치고 넘어가면 되는’교리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삼위일체의 현의야말로 신앙생활의 핵심이며 매일 살아야 하는 교리인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는 성삼의 신비,는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을 가꾸기 위한 정치, 경제, 사회윤리의 근본 원리임을 알아야 한다. 어떤 가정에 부부간, 부모 자식간, 형제간에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를 향해 자신을 바치는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는 그런 사랑이 흐르고 있다면, 그 가정에 바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 계시고 하느님의 생명이 넘치게 될 것이다.


    서로를 위하는 사랑을 체험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생명을 체험하는 것이다. 영광송과 성호경을 바칠 때마다 성삼의 신비를 되새기며 사랑으로 하나되는 성삼의 신비를 살도록 다짐하자.






    23       삼위일체 대축일 (다) 삶 속에서 체험하는 삼위일체의 사랑과 평화

    지경대 신부


    오늘날 엄청난 기술문명의 발달로 인한 생활문화의 윤택함은, 우리들로 하여금 마치 아무런 아쉬움과 어려움도 없는 것처럼 다가옵니다. TV의 광고를 보고 있거나, 현란하게 번쩍이는 광고판들 사이를 지나가게 되면 더욱 그러합니다. 마치 모든 것들을 다 충족시켜줄 수 있고 모든 심중의 불안들을 털어 버릴 수 있는 것들이 다 준비되어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찾는다는 것이 그리 쉽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이르는 신앙인의 길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복음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세상이 풍족과 풍요로움보다는, 우리 삶의 기반을 뒤흔드는 공포와, 증오와, 폭력을 먼저 준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풍족과 풍요라는 미명 아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날로 이기적으로 변해가며, 극에 치닫는 증오와 시기와 싸움이 계속되고 있는지, 우리는 그 현실에 치를 떨고 불안해하고 있지만, 나 또한 그 세상의 굴레 속에 점점 파묻혀 때로는 허우적거리고, 때로는 지쳐서 안주해 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공포, 근심, 걱정거리로 노심초사하면서 살아가는 데에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삶들로부터 벗어나 영원히 머물 수 있는 집을 그리워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비록 공포와 증오와 폭력이 점철된 이 세상을 살지만, 세상의 굴레 속에 묻히지 않고,  하느님의 참 생명, 참 평화를 찾는 길을 끊임없이 갈구합니다.

      

    1425년 안드레이 루불료프는, 위대한 러시아의 성인 세르기(1313-1392)를 추모하기 위해 「삼위일체」라는 이콘 성화를 그렸습니다. 그가 이 성화를 그리게 된 가장 중요한 동기는,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해 자기가 묵상한 것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 뿐 아니라, 공포와 증오가 가득찬 정치적인 불안 속에 살면서도, 늘 마음을 하느님께 모으고 사는 길을 동료 수사들에게 제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그린 그림을 조용히 보고 있으면, 성당의 아름다운 장식이나 어려운 교리의 보조해설로 그린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가 머물기 위한 장소로 그렸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림은 세 거룩한 천사가 식탁에 동그랗게 둘러앉아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림입니다.

      

    성자한테로 몸을 기울이신 성부의 움직임과 ,성부한테로 몸을 기울이신 성자와, 성령 두 분의 움직임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깊은 사랑과 일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그림의 핵심은, 성삼위가 나누고있는 대화에 있습니다.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성작, 그리고 성작 안에 담겨 있는 어린양의 피를 성삼위는 각기 손짓으로 가리키면서, 그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성자는 신성과 인성을 겸비한 희생양이 되시는 당신의 사명을 암시하고, 성부는 성자를 축복하는 손짓으로 격려하고, 성령은 식탁 앞쪽에 열린 사각형을 가리키면서, 성자의 거룩한 희생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희생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이 가리키는 사각형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믿는 우리 모든 신앙인들이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그 길은 하느님에 이르는 길이며, 좁은 길, 고통의 길, 십자가의 길인 것입니다.


    성삼을 찾기 위한 예수와의 이별


    결국 이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삼위일체의 신비가 인간의 지성과 역사를 초월하는 신비이지만, 결코 우리의 삶과 무관한 신비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즉 성삼위께서 이루시는 삼위일체의 신비는 신적 신비이자 인간적 신비이기도 하며, 그 신비는 인간의 모든 감정을 초월한 즐겁고 영광스러운 신비이지만, 또한 모든 인간의 기쁨과 슬픔을 다 건드리는 신비라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신비는 우리와 동떨어진, 그래서 우리의 영광과 경외심만을 자아내는 신비가 아니라, 우리 삶 안에 아주 구체적으로 살아 있고 생생하게 체험되는 신비입니다. 그리고 그 신비는 성자께서 걸어가신 어린양의 길, 수난의 길을 선택할 때에만 터득할 수 있는 길이고, 그 길을 통해서만이 우리의 공포와 폭력과 증오의 현실을 이겨나갈 것이고, 성삼위께서 누리시는 사랑과 평화를 실현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삼위일체 축일을 지내는 교회는, 바로 이 사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 말씀을 통해서 지혜는 창조 이전에 이미 하느님과 함께 있었고 사람들과 함께 하였다는 내용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지혜는 하늘나라에만 고고하게 머물러 계시지 않고, 우주의 생성과 변화를 주관하고 사람들 안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시어, 당신의 구원사업을 계속하십니다. 그래서 흘러 넘치는 삼위의 사랑은 성자를 통하여 인간조건을 취하셔서 구원을 위하여 사람들에게 당신의 신비에 동참하는 길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바의 의미를 찾고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이별을 고하십니다. 이별은 인간적인 면에서 슬픔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슬픔을 이겨나가도록 격려합니다. 하느님의 신비를 찾고 간직하려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육신을 떠나 보내는 것은 더 큰 하느님의 진리, 성령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떠나가는 것은 숨는 것이 아니오, 삼위일체이신 그분의 신비를 더 드러내는 것이며, 끊어버리는 이별이 아니라 제자들로 하여금 그 신비의 삶을 끊임없이 찾도록 변화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겪는 이별의 고통은 바로 더 큰 하느님의 신비, 즉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깨닫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성삼 사랑의 근거인 어린양의 피


    제2독서의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로는 이 신비를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금의 이 은총을 누리게 되었고, 또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안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루불료프가 그린「삼위일체」 성화 안에 성삼위의 사랑과 평화는, 세상과 동떨어진 아무런 근심과 걱정 없는 환상적인 세계가 아닙니다. 성삼위가 어린양의 피를 대화의 주제로 삼았다는 것은, 이미 자발적인 고통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선택적인 고통이 있을 때에만 성삼위 사랑의 근거가 됩니다. 아니 바로 고통은 사랑과 일치를 이루는 성삼위의 영원한 집을 건설하는 초석이 됩니다.

      

    공포와 증오와 폭력의 검은 세력이 구석구석 침투해 버린 세상, 거기서부터 혜어나기란 여간 어렵고 힘이 드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력에 속하지 않고, 그 세상에 거처를 마련하지 않고, 사랑의 집을 끊임없이 우리의 집으로 택할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성삼위 안에 숨겨진 고통을 끊임없이 선택하는 것이며, 그 안에 자리잡은 사랑의 깊은 숨결을 끊임없이 들이마시는 생활입니다. 이때 성삼위가 이루는 사랑과 일치는 우리 삶 안에 깊숙하게 자리할 것이고, 우리는 세상의 굴레에 속하지 않고, 영원한 사랑의 집을 이 세상 안에서 실현시킬 것입니다.



    24  삼위일체 대축일 <요한 16,12-15> (다) 본체적으로는 한분이시지만 위격으로는 셋

    김신호 신부


    삼위일체라는 개념은 인간의 건전한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어떻게 보면 불가능한 것이라고까지 교리를 설명하는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삼위일체라는 교리를 설명할 때에 단골로 등장하는 성인이 있는데, 이 성인의 이름은 아우구스티노이다, 아우구스티노는 성 토마스와 더불어 가톨릭 신학의 양대산맥을 이루는 분이시다.

      

    우리는 또한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일생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다. 그가 젊었을 때에 방탕한 생활을 했다느니, 그의 어머니인 모니카 성녀가 한 기도의 결과로 회개하여 히뽀의 주교가 되어 교회 발전에 큰 공로를 세웠느니, 하는 것들이 이에 해당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회개하고 교리를 연구하던 중에 삼위일체라는 벽에 부딪혔다고 한다. 이 벽을 통과하기 위하여, 그는 깊은 생각 속에서 바닷가를 거닐며 사색을 하게되었다.

    그때 그 바닷가에서 아주 어린아이 하나가 모래에 웅덩이를 만들어 놓고, 조가비로 물을 퍼내어 웅덩이에 계속해서 붓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이상한 마음에서 그 어린아이에게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고, 이에 대해 그 어린아이는 “바다의 모든 물을 이 웅덩이에 넣으려 한다”는 대답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가 이루어질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이라는 지적에, 그 어린아이는 자기가 바다의 모든 물을 그 조그만 웅덩이에 넣을 수는 있어도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말과 함께 사라졌다고 한다.


    이해하기 어려운 삼위일체


    이 이야기가 정말로 일어난 실제 사건이었는지, 혹은 지어낸 이야기인지에 대한 진위여부는 가려지고 있지 않다. 다만 삼위일체를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하기에 앞서서 늘어놓은 일종의 인간의 무능을 변명하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겠다.

      

    요즈음 우리는 눈부신 과학의 발전 속에서 우리가 간직하였던 여러가지 꿈을 상실하면서 살고 있다, 떡방아를 찧고 있던 토끼나 계수나무도 사라졌다. 그러면 이러한 과학이 발전함으로써 모든 의문점이 사라졌느냐 하면,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복잡한 가운데 의문점은 더 많아지고 인간은 더욱더 복잡한 한계성에 부딪히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성령이 오시면 진리를 깨닫게 해주실 것이라는 말씀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진리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실제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여러 해 동안 같이 살면서 예수님께 교육을 받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도 예수님의 실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더구나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있다는 아무런 조짐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本體 한분, 位格은 세 位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낙담을 했고, 희망이 사라져버린 상태에 빠지게된 것이다. 이를 예견하신 예수님은, 오늘 제자들에게 앞으로 오실 성령께서 모든 것을 알려주실 것이고 예수님의 실체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시겠다는 약속을 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자신의 것이라는 말을 통하여, 아버지와 자신이 같은 존재임을 암시하고 계신다. 그리고 성령께서 내게 들은 모든 것을 알려주실 것이라고 하심으로써 성령과도 일치하고 있음을 알려주신다.


    사실 삼위일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본체적으로는 한분이시지만 위격으로는 셋임을, 이 서로 구분되고 있다는 설명으로 이해되도록 하는 내용을 가진 최상의 추상적인 실체이면서, 또한 이해될 수는 없지만 매우 구체적인 현실적 개념이다.

    그러나 삼위일체는 현상적인 면만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삼위일체를 현상적인 면으로 이해하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한 것처럼, 우리도 만약 진리를 현상적인 면으로만 이해하려고 한다면 실패하고 말 것이다.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한 시대에 우리는 지금 살고 있다.






    25 삼위일체대축일<요한 16,12-15>(다)사랑과 힘과 영(靈)」으로서 그분의 일을 수행하며

    서웅범 신부


    三位一體라는 용어에서「위(位)」라는 개념은 희랍어 Prsopon-가면(仮面)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가면극에서 배우들은 가면을 쓰고 자기에게 주어진 역 (役)의 연기를 합니다. 배우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언제나 그이지만, 그는 자기가 쓴 가면의 역할에 따라 매번 다른 연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네 삶에 있어서도 그 상황은 비슷합니다. 사람은 시간과 장소, 자격이나 주어진 소임의 성격 등등에 의해 각기 다른 호칭으로 불려지기도 하고, 또 다른 활동을 하기도 합니다.


    저는 사제로서 신부라고 불리며, 그에 따르는 여러 성무를 집행합니다. 그러나 생가에서 저는 아들․형 ․오빠․동생으로 불려지며, 그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저를 아저씨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처럼 저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또 그에 따라 각기 다른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는 언제나「나」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시고 무궁세세에 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을 성부 하느님으로, 인류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성자 하느님으로, 성부와 성자의「사랑과 힘과 영(靈)」으로서 그분의 일을 수행하며, 우리로 하여금 성부와 성자를 온전히 알고 또 그분께로 올바르게 나아가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을 성령으로 인식하며, 그분께 믿음을 고백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간과 그 역할에 따라 완전히 따로 존재하시며, 활동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성부 안에 성자와 성령께서, 성자 안에 성부와 성령에서, 성령 안에 성부와 성자에서 늘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태양에 견주어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태양은 거대한 불덩어리로서 밝은 빛과 열을 발산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불덩어리와 빛과 열이라는 태양의 속성은, 언제나 「함께」입니다. 절대로 그 속성들이 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내적 사랑으로 온전히 하나이신 성부․성자․성령의 하느님께서도 그와 같으시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랑 자체이신 성부를 태양이라는 불덩어리에, 은총을 내리시고 계시의 빛을 인간에게 비추어 주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태양 빛에, 그리고 따뜻한 친교와 사랑의 일치를 이루어 주시는 성령을 태양열에 비겨 생각하며, 3위1체의 신비를 묵상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이처럼 3위1체 신비의 내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늘 이 대축일을 지내며 우리가 더 생각해야 할 일은, 성부․성자 ․성령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그 사랑을 겸손되이 느껴, 그에게 감사를 드리고, 아울러 3위1체이신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그 「사랑의 내적일치」를 우리도 하느님과 이웃들 안에서 온전히 이루며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기 위 해 먼저, 자기자신의 Persona(가면, 역할)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칼 융」이라는 심리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살지 못해 그 이상(理想)과 현실 사이에 괴리가 생기게될 때, 그 사람은 정신적 장애를 겪게된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적용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persona 곧 역할을 띠고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이때 우리가 늘 신앙인의 모습을 제대로 살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영육으로 건강하고 기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사랑을 하면 알게 될 것입니다. 3위1체이신 하느님의 신비와 그분의 아름다움과 그 사랑을!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나와 같은 「하늘나라의 좋은 친구」들임을! :‥‥ 기도로써 하느님과 일치하며, 사랑으로써 세상 모든 이와 일치하는 「3위1체적인 삶」을 실천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3위1체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이 풍성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6          삼위 일체 대축일 요한 16.12-15 (다해) 아버지의 것은 내것

    김순태 신부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위는 셋이요, 본체는 하나” … 간략하게 축소된 이 말마디는 우리의 얇은 지식으로써는 매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전쟁터에서 어린 아기가, 총탄에 맞아 쓰러진 엄마의 젖을 빨며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천진난만하게 앉아 놀고 있는 것처럼, 우리 인간도 영원하시고 무한하신 하느님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삼위일체 교리를 알기 위해 고심하다가, 어느 바닷가에서 천사 소녀를 만나 “내가 이 바닷물을 이 작은 구멍에 모두 퍼부을 수는 있어도, 당신은 그 교리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는 설화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분을 믿고,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따를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내게는 당신들에게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그 말을 하더라고 당신들이 알아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서의 여러 군데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습니다.

    “아들은 아무 것도 자진해서 할 수 없습니다”(요한 5.19)

    “나와 아버지는 하나입니다”(요한 10.30)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1)

    “당신들은 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시오”(마태 28.19)

    우리는 지금 들려드린 성서귀절로부터 한 가지 공통점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삼위의 관계가 서로 하나와 같이 같다는 점입니다.


    이 관계는 보통의 관계가 아니라, 친밀한 사랑으로써 한데 뭉친 관계입니다. 마치 물동이에서 물이 흘러 넘치면, 그 물동이 안에 있는 물이나, 흘러 넘친 물이나 꼭 같은 것처럼, 이 관계도, 사랑이 흘러 넘쳐 성부의 사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며, 예수님의 넘친 사랑이 이 바로 성령의 사랑과 같은 것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합시다.


    손에 꽃 한송이를 들고 보면, 거리에는 꽃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꽃의 신비스러운 생명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그 꽃의 생명과 그 꽃의 모양, 또한 그 꽃의 향기는 비록 3가지가 다른 것이지만, 그 꽃은 셋이 아니요, 하나입니다. 이 비유에서 우주의 생명이신 하느님의 거룩하신 사랑은, 꽃과 같이 아름답고 흠이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는 성령의 감화가 마치 꽃의 향기처럼, 우리 마음 안에서 향기를 가득히 풍기고 계시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신자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의 오묘한 진리를 모두 터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이하여, 성삼의 관계가 사랑으로써 뭉쳐있음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 자신에게로 눈길을 돌려봅시다. 우리들도 삼위가 사랑으로 하나인 것처럼, 우리 신자 모두가 사랑으로 봉사하고 계십니까? 또한 교회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고 계십니까? 오늘 우리는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안에서 하나가 됨을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이기심을 버리고, 가정 안에서 먼저 화목하며, 또한 우리 신자들의 공동체를 형성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전세계의 평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때에 우리는 성삼의 사랑에 하나가 되는 것이고,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사랑을 이야기하면서도, 어렵게 실행되어지는 것이 사랑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랑은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의 욕구를 채우면서 베풀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오직 자기를 낮추고 인내하면서, 조그만 희생을 아끼지 않을 때에 베풀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조그마한 일에 소홀한 사람이 큰 일을 다할 수 없듯이, 조그만 희생을 갖지 못하는 자가 결코 사랑을 실천하기는 힘든 일입니다. 우리는 옆에 있는 형제에게 조그마한 희생을 실천함으로써, 사랑 안에 하나가 되는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도록 합시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27          삼위 일체 대축일 요한 16.12-15 (다해) 아버지의 것은 내것

    김정진 신부



    신자 여러분!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인류의 구원을 이룩하여 주신 성부, 성자, 성령, 성 삼위께 우리가 찬미와 감사의 영광을 특별히 바쳐야 될 날입니다. 성부께서는 당신 독생 성자를 보내 주셨고 성부와 성자께서는 성령을 보내 주시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주십니다. 또한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여 주시고 하느님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구약성경에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가르침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창조 때부터 하느님은 인류에게 점차적으로 당신 모습을 드러내 보이시다가 드디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하느님의 모습이 완전히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신약 성경을 일독하면, 삼위일체에 관한 교리가 명백히 기록되어 있음을 압니다. 즉 성모 마리아께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했던 가브리엘 대천사의 인사 말씀에서, 예수님이 요르단강에서 세례자 성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던 때와 타볼산에서 당신의 모습을 변하시던 때에 일어났던 사건에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교리가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더구나 “당신들은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라”(마태28,19)고 하신 오늘 복음 말씀은 삼위일체의 교리를 더 한층 힘있게 세 위가 계시다는 신비를 우리의 이 미약한 머리로서는 도저히 다 알아듣지는 못합니다. 옛날 아우구스띠노라는 유명한 성 학자는 삼위일체에 과한 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고민하면서 살아오다가 하루는 바닷가에 나가서 걷고 있었답니다. 이윽고 한 소년이 조개껍질로 모래사장에 파놓은 구멍에다 바닷물을 퍼 넣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성인은 하도 이상해서 “얘! 너 무얼 하고 있니?”하고 물었더니 “제가 이 조개껍질로 이 바다의 물을 다 넣는다고 해도 당신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깨달을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퉁명스레 대답을 하고 어딘가 사라지더랍니다. 그 때서야 성인은 이 삼위일체 교리를 머리로는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우리가 굳게 믿고 따라야 한다는 진리를 깊이 깨달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교리 시간에 삼위일체 교리를 삼각형이나 크로바니 전기 등으로 설명하는 것을 배웁니다. 우리는 성 바오로의 말씀과 같이 훗날 하늘나라에서 얼굴을 맞대고 하느님을 직접 뵈옵고 성삼께 관하여 보다 더 많은 것을 깊이 알게 될 것을 기대하며 커다란 희망과 기쁨 속에 신앙생활을 영위해야 되겠습니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우리의 신앙의 바탕이요, 기초이며, 중심이기도 합니다. 성부께서는 우리를 창조해 주셨고 성자께서는 우리들 대신 속죄함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약속해 주셨고 성령께서는 성화의 은총을 주시며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수월히 얻게 해 주십니다. 이러하건대 어찌 우리가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성삼께 대한 사랑 이상으로 우리의 마음을 다른 것에 빼앗겨서는 안되겠습니다.

    신자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하면 성삼께 대한 신앙생활을 보다 열성으로 할 수 있겠습니까.


    우선 우리는 성삼께 깊이 감사 드리는 생활을 해야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게 도니 것을 창조주이신 성부께 감사 드리고 우리의 구원과 영원한 행복을 주시기 위하여 수고 수난하시며 죽으신 성자께 감사 드리고 유혹과 시련이 있을 적에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께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나날을 보내야 되겠습니다.


    다음은 성삼께 대한 기도를 열심히 바쳐야 하겠습니다. 「주의 기도」를 열심히 바침으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과 찬미를 드려야 합니다. 기쁠 때나 슬픈 때나 언제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영광과 흠숭을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영광송’과 미사 때 외우는 ‘대영광송’을 열심히 바쳐야 됨은 물론, 십자성호를 정성껏 긋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십자성호를 그을 때는 정신을 가다듬고 정중히 할 것이요, 파리를 쫓듯이 해서는 안됩니다. 언제나 천천히, 되도록, 크게 정성어린 마음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해야 합니다.


    이같이 십자성호를 긋는 행위는 한 분이신 하느님께 세 위가 계심을 믿고 자기의 믿음을 선언하는 아주 훌륭한 신앙고백입니다. 십자성호는 가장 간단하고 가장 쉬운 기도이면서 가장 힘있고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우리는 성삼의 이름으로 온갖 은총과 축복을 받습니다. 우리는 성삼의 이름으로 성세를 받으며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납니다. 사제는 바로 이 거룩한 십자성호를 그으면서 사람의 죄를 사해 줍니다.


    견진성사 때, 혼인성사 때, 그리고 병자성사 때에도 성삼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을 빕니다. 이외에도 우리는 기도를 바치기 전에나 후에나, 아침에 일어날 때나 취침 전에나, 식사 전에나 후에나, 성당에 들어와서나 나갈 때에 십자성호를 언제나 긋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십자성호를 정성되이 자주 그으며 천주 성삼께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참된 그리스도 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멘.







    28                           삼위일체 대축

    신은근 신부



    삼위일체는 한 분 하느님 안에 계신 세 위격을 뜻한다. 세 위격은 성부 성자 성령이시다. 단순한 교리건만 늘 꼬리표가 붙는다. 삼위일체란 신비에 속한다. 하느님에 대해 인간은 완전히 알 수 없다. 대충 이런 말들이다. 정말 인간은 하느님을 완전하게 알 수 없는 것일까. 신비에 속한다면 왜 공적축일로 정해놓고 의미를 되새기려는 것일까.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완전하게 아는 자식이 얼마나 되겠는가.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알게 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다 자식을 낳고 살면서 비로소 부모의 심정을 깨치게 된다. 하느님을 알게 되는 과정도 비슷하다. 처음부터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살아가면서 깨닫게 된다. 죄와 잘못에도 불구하고 은총과 축복으로 끌어주시는 하느님을 느끼면서 비로소 조금씩 깨닫게 된다.


    그러니 깨달음에는 이론이 중요하지 않다. 부모의 사랑을 깨닫는데 무슨 이론이 절대적이겠는가. 그분들이 어떻게 사셨고 어떻게 대해주셨던가. 이것을 깨닫고 느끼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삼위일체 교리도 이론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삼위일체는 그저 하느님께서 사시는 모습(존재 양식)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분들의 이 모습이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가, 이것을 깨닫는 일이다.


    삼위일체 교리 안에는 중요한 진리가 있다. 세 위이신 하느님 안에는 높고 낮음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 분은 높고 저 분은 낮다는 그런 삶이 아니라 서로 똑같은 일치의 모습으로 계신다는 것이다. 일치가 얼마나 심오하던지 하나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갈수록 세상은 물질화 되고 있다. 물질을 가운데 두고 일치한다. 사랑을 중시하고 신의 때문에 일치하던 세상은 지나가고 있다. 결과는 불신이다. 물질이 떠나면 마음도 떠나버린다. 삭막하고 단절된 관계가 된다. 그러니 위안을 찾는 쪽은 본능이다. 쾌락에서 위로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돌아갈 본래의 위치는 사랑의 관계다. 그리고 사랑의 관계는 일치에서 시작된다. 일치는 획일화가 아니라 조화의 관계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도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니셨지만 일치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이것이 삼위일체다. 우리의 가정에는 삼위일체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부모와 자녀사이에, 부부 사이에 일치의 모습이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아버지는 야훼의 역할을, 어머니는 예수님의 역할을, 자녀들은 성령의 역할로서 희망과 기쁨을 불어넣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이전에는 너무나 우리를 간섭하시고 잘하는가 못하는가를 살피시는 분으로만 오인되어 왔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분들은 일치의 모습으로 계신다. 그리고 그 일치 속으로 우리들을 초대하고 계신다. 그러니 먼저 우리는 가족 안에서 일치의 모습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삼위일체 축일의 메시지인 것이다.






    29            삼위일체 대축일(청소년 주일)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서

    최상범 신부


    많은 경우 청소년 문제의 원인은 청소년 자신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어른들의 문제인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문제를 갖고 있고 균형잡히지 못한 삶의 태도를 가진 어른들과 함께 사는 청소년들은 사실상 어른들의 문제를 마치 거울처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청소년들이 왜 적응하지 못하는가? 왜 문제를 일으키는가?하는 질문을 하다보면 그것은 그 청소년을 돌보고 교육하고 키우는 어른들과 연결돼 있는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정과 학교, 교회와 사회가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수용하는 분위기라기 보다는 지시하고 요구하고 주문하는 분위기이기에 그들은 대화의 빈곤과 제대로 수용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묵상하는 오늘 청소년들을 기억한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하시는 아버지, 자발적으로 응답하는 아들, 그리고 서로 한 몸이 되도록 일치시켜주고 그 일치에로 모든 사람을 부르시는 영의 신비는 청소년과 맞물려 있는 가정과 학교, 교회와 사회에 중요한 원리를 제공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화를 통한 균형잡히고 건강한 문제해결은 가정의 복음화를 현실안에 가능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에서의 불일치를 극복하고 성가정을 이루려는 노력이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대학별로 또 동아리 활동이 가능한 중고등학교 별로 복음화에 대한 활동을 더욱 촉진시켜서 신앙에 갈증을 느끼는 학생들이 보다 쉽게 신앙에 다가 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일선에서 교편을 잡고 계시는 교육자들의 관심과 희생이 필수적입니다.


    그런면에서 전구교구 중등교육자회의 재기가 요청됩니다. 얼마전 어떤 변호사 한 분이 특별한 어려움에 처한 청소년들이 있다면 법률적인 면에서 자문과 도움을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음악, 미술, 교육, 심리, 매스콤, 레크리에이션, 상담 등 각계 각층의 능력과 지식을 갖춘 신앙인들이 청소년들을 위한 기획과 협의에 물심양면으로 관심을 가질 때 교회내의 청소년 문화가 보다 더 복음적인 방향으로 촉진돼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랑과 일치안에 청소년에 대한 개인개인의 관심과 사랑과 경험을 합쳐서 보다 더 복음화되어 나가는 교구 공동체를 이루어야 되겠습니다.






    30                 삼위일체 대축일 :   성삼위께 찬미와 흠숭을!

    4세기말 정립된 교리 : 하느님의 초월적 특성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부, 성자, 성령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 또한 하루에도 수 없이 여러 번 성호경과 영광송으로 성삼위께 찬미와 흠숭을 드린다. 그러나 한 분이면서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 삼위일체 신비’는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하느님의 내적 신비라고만 생각하기 쉽다.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아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정리해본다.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位格)으로 계시며, 이 위격들은 선후(先後)나 높고 낮음이 없이 같은 신성(神性)을 지닌다는 것이 4세기말 정립된 삼위일체 교리의 주요 내용이다. 초기 교회 신자들은, 신약성서에 명시된 이 신비를 주로 세례 때 고백함으로써 신앙생활의 바탕으로 삼아왔다.

      

    199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반포된 ‘가톨릭 교회교리서’는 이를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의 핵심적인 신비'(261항)라고 강조하면서, 오직 하느님만이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로 당신을 계시해 주심으로써, 이 신비를 깨닫게 해줄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가톨릭 신앙은 ‘한 분이신 하느님을 삼위일체로, 삼위일체를 한 분의 하느님으로 흠숭하되 각 위격을 혼동하지 않으며, 그 실체를 분리하지 않는다'(266항)고 이 교리를 요약한다.

      

    현대 신학자들은, 삼위일체신비를 하느님의 초월적 특성이기도 한 동시에, 하느님께서 역사 안에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드러내는 신비라고 말하고 있다. 당신 사랑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인간에게 자신을 송두리째 열어 보이고 기꺼이 내어주는 하느님 사랑의 신비라는 것이다.

      즉 인간과 세상을 창조하고, 지극히 사랑해주는 하느님 아버지로서의 성부, 인간과 세상의 구원을 위한 희생 제물로 자신을 온전히 봉헌한 예수 그리스도인 성자, 교회와 세상을 은총으로 이끌어가는 협조자로서 우리와 친교를 나누는 성령의 세 위격이, 구세사 안에 드러난 것이라고 설명한다.

      

    해방신학자 세군도는, 성부는 우리 앞에 계시는 하느님으로, 성자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으로,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으로 이해한다. 그는 사랑으로 일치, 하나의 사회를 이루는 성삼위의 신비를 우리도 엮시 매일의 삶 속에서 생활화해야 한다고 강조하고있다.

    교회는 삼위일체 대축일을 성신강림 대축일 후 첫 주일에 기념한다, 이는 성령강림으로 시작된 교회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삼위일체 신비를 우리 신앙생활의 기본 원리로 삼도록 권고하는 뜻을 담고 있다. 또한 하느님께서 삼위로서 인간과 관계를 맺고 계시듯이 우리도 삼위의 사랑을 이웃과 함에 나누도록 초대하고 있다






    31                   삼위일체 대축일 :   삼위일체의 신비



    ▲ 성서 안에 감추어진 삼위일체 신비 = 구세주로 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사실 ‘삼위일체 신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밝혀주신 하느님의 존재 모습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마태 28,19)”고 제자를에게 가르쳤다. 또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께서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요한14,16-17)며 삼위일체의 위격에 대해 강조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성삼위의 신비를 추상적인 언어가 아닌 구체적인 계시의 말씀으로 풀이해 주었다.

      

    ▲ 교부들의 비유 = 삼위일체 신비에 대한 많은 이단들이 발생하자, 교부들은 여러 비유를 이용해 삼위일체를 설명했다. 그 대표적인 비유가 ‘태양’ , ’새 잎 클로버’ , ‘정삼각형’이다.

      “태양은 불꽃과 빛 그리고 열로 구성돼 있다. 이 셋은 서로 각자 존재하고 고유한 역할을 하지만 하나의 태양을 이루고 있다. 하느님도 성부․성자․성령으로 구분되는 세 위격을 가지고 계시나, 한 분

    이시다. “

    “세 변의 꼭지점이 하나의 삼각형을 이루듯 삼위일체이신 하느님도 성부․성자․성령께서 서로 고유하게 계시면서, 완전한 일치를 통해 한 하느님으로 존재하신다.”

      

    ▲ 이콘에 나타난 삼위일체 하느님 = 신약성서에서는 삼위일체를 표현할 때, 성부를 ‘아버지’로, 성자를 ’아들’로, 성령을 ‘비둘기’로 묘사하고 있지만, 구약성서에서는 그처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신․구약의 삼위일체 하느님을 표현하는 이콘 그림도 사뭇 다르다.

      루블료프가 그린 구약의 삼위일체 이콘을 보면, 성 삼위가 같은 천주성을 지니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 똑같이 푸른 빛 옷을 입고 계신 모습이 그려져 있다. 또 배경 전체를 노란색으로 칠해 성삼위가 따뜻한 사랑의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표현했다.

      

    그리고 인간처럼 영혼과 육신을 가진 존재가 아닌, 순수한 영적인 존재임을 드러내기 위해 삼위일체를 천사의 모습으로 그렸다.

    신학자들은, 이런 교부들의 비유는 전통적으로 존중돼야 하겠으나, 삼위일체 신비를 표현하기에는 부적당한 비유라고 지적한다. 오히려 신학자들은 성서 안에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본성을 찾을 것을 권고하고 있다.

      

    성서는 복되신 성삼위를 이해하는 데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목표가 있음을 일깨워 주고 있다. 성삼위께서 우리를 아시듯이 우리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해서 아는 것이다.

      

    ▲ 가톨릭 기도문 안에 드러난 삼위일체 신비 = 삼위일체 신앙을 가장 간결하면서도 제대로 고백하는 것이 바로 ‘성호경’이다. 십자가를 그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부르는 기도인 성호경은, 천주 성삼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또 교회는 초세기부터 ‘사도신경’을 통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께 대한 믿음을 선언해 왔다.

  2. user#0 님의 말:

     

     

    1.1. 삼위일체 대축일(가해)


    <제 1독서: 출애 34,4b-6. 8-9>

    신학적 핵심과 초점:  모세는 하느님을 만나 뵈러 시나이산에 오른다. 그 때 야훼께서 구름을 타고 내려와 그의 앞을 지나가시며 “나는 야훼다. 야훼다. 자비와 은총의신이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아니하고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이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면서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분이시라고 알려 주신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본성은 반드시 삼위일체이어야 한다. 사랑이라는 것은 우선 둘 이상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그런데 둘 사이의 관계 안에서 사랑과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은 인간에게도 가능하다. 하지만 셋 사이의 관계 안에서의 사랑과 일치는 오직 신적 차원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사랑 자체이시며 사랑 중에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마땅히 삼위일체적 본성을 가지실 수밖에 없다는 설명에 초점을 둔다.


    <제 2독서: 2고린 13,11-13>

    신학적 핵심과 초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13,13). 하느님께서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로 계시면서 온전한 일치와 친교의 상태로 계시는 분이심을 알려 주는 대목이며, 이러한 삼위일체의 모상인 우리 인간들, 특히 신앙의 자녀들인 교회의 구성원들은 이 삼위일체적인 일치와 친교의 삶을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실현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인간은 아직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진행중의 상태인데, 궁극적인 완성의 목표는 바로 삼위일체적인 사랑에 도달하는 것이다. 삼위일체적인 사랑은 곧 완전한 사랑의 상태를 의미하며 이러한 사랑을 통해서 인간은 구원에 이를 수 있게 된다는 것에 초점을 둔다.


    <복음: 요한 3,16-18 >

    신학적 핵심과 초점: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3,16-17). 인간이 그토록 배은망덕하고 극악무도한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와 사랑으로 받아주시겠다는 하느님의 신적 사랑이 잘 드러난다. 이것은 둘 사이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차원으로는 불가능한 마인드이다. 셋 사이에서 완전한 사랑과 일치를 이루는 신적 사랑, 즉 완전한 사랑의 차원에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어떠한 큰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모든 것을 다 용서해 주시겠다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는 끊임없는 희망과 위로를 발견하게 된다. 오로지 인간에게 이로운 것, 유익한 것만을 주려고 하는 하느님의 흘러넘치는 사랑을 삼위일체라는 신비스러운 차원 안에서 설명하고 나아가 삼위일체적 본성은 타인에게로 끊임없이 나아가는 역동적인 사랑이기에 마땅히 선교에로 방향지워져 있다는 것에 초점을 둔다.



    <강론>


      찬미 예수님!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시지요. 그런데 삼위일체로써 한 분이시라는 신비스러운 표현을 사용해서 우리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듭니다. 단 한 분이시라면서 삼위라는 말은 또 무엇인가? 그냥 한 분이면 한 분이지 왜 굳이 삼위로 한 분이라는 표현을 써서 헷갈리게 하는가? 그리고는 교회의 믿을 교리이고,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니까 그냥 막무가내로 믿으라고 합니다. 이 삼위일체 교리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영 복잡하고 혼란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성부, 성자, 성령을 계시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대로 믿고 있는 것이지만, 사실 이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의 그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은 교리입니다. 다만 초대 교회의 주교와 사제, 그리고 신학자들이 성경 말씀을 알아듣는 과정에서 성령의 영감을 받아 성부, 성자, 성령이 삼위일체이심을 깨닫게 되었고, 그것을 교회의 교리로 확정한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세월이 흐르면서 성령의 영감으로 깨닫게 된 진리라는 뜻입니다. 바로 이렇게 성령께서는 교회의 주교들과 사제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욱 깊이 깨닫게 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성경 말씀만으로 다 알아 듣기 어려운 진리들도 주교와 사제들의 가르침을 통해 배울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교회의 교도권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의 주교님들과 신부님들의 지도와 지시에 잘 따라야 하는 것이지요. 오늘날 우리가 믿고 있는 가톨릭 교회의 교리는 2000년이 가까운 세월 동안 바로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체적으로 다 말씀하시지 못한 진리들을 성령께서는 교회의 주교들과 사제들을 통해서 하나하나 깨닫게 해 주시고 되새기게 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믿고 있는 교리들은 바로 성령께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해설해 주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이제는 성령을 통해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시기 때문에 그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성령의 시대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해서 함께 묵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그냥 한 분이신 하느님이 아니라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일까요?

      요한 1서 4장 16절에 보면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신 분이라는 뜻인데요, 바로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대상이 있어야 하지요. 사람이든, 사물이든,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든, 또는 하느님이든, 무언가 대상이 있어야만 사랑이라는 것이 성립될 수 있습니다. 아무런 대상이 없이 그냥 혼자서만 있다면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그 본질상 다른 대상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고, 자신의 것을 내어 주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대상이 없다면 도무지 사랑이 성립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이기심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단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사랑 자체이신 분이라면, 사랑의 속성상 당연히 하나 이상의 대상이 있어야 하겠지요. 삼위일체 하느님이라는 말은 이러한 사랑의 관계로 이루어진 대상들이 셋 있다는 뜻이고, 이 셋의 관계가 사랑으로 온전히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사랑이라는 것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 이상의 대상이 필요하고 관계가 필요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삼위일체 하느님은 둘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셋의 관계라는 점과 이 셋이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둘 사이의 일치는 어떤 면에서 볼 때 쉽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하나가 더 끼어들어 셋이 되면, 셋이 일치를 이루기는 거의 불가능해지지요. 아무래도 더 나은 한쪽에 기울어져 자꾸만 둘이 일치를 이루려 하기 때문에 셋의 일치는 쉽게 깨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셋이 일치가 안 되고 둘 만 일치하려 할 때, 우리는 이것을 삼각관계라고 부릅니다. 반대로 셋이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있을 때, 이것을 삼위일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셋이 완전한 일치를 이룬다는 얘기는 사랑의 최고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며, 완전한 사랑, 곧 신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은 가장 완전한 사랑, 곧 삼위일체로 계실 수밖에 없습니다.


     둘이 서로 마음이 맞아서 사랑하고 일치를 이루는 것은 완전한 사랑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물론 사랑이긴 하지만 조금 부족한 사랑이라는 뜻이지요. 왜냐하면 그것은 어느 정도 내 만족을 채워주는 부분이 있고, 내 기준과 입맛에 맞기 때문에, 그리고 내 것이라는 무의식적인 욕구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둘 사이의 관계 안에 다른 제 3자가 들어오려 할 때, 대부분 거리감을 두거나 소외시켜버리게 됩니다. 셋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일치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지는 것이죠. 셋이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각자가 온전히 자기 자신을 포기할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마음이 맞는 둘 사이의 일치만을 추구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볼 때, 아직 소유욕이 제거되지 않은 이기적인 사랑의 모습일 수도 있지만, 셋의 일치를 추구하는 것은 완전한 사랑을 위한 보다 성숙한 사랑의 모습이 됩니다. 셋이 일치할 수 있는 상태만 된다면, 그 이상부터는 쉽게 일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셋이 일치할 수 있다는 것은 각자가 자신의 것을 모두 포기하고, 오직 서로를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어 놓는다는 것을 뜻하며, 이 상태라면 아무리 수가 많아진다 하더라도 자신보다 상대방을 더 염려하게 되어 일치가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본성입니다. 또한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 구별되는 고유의 영역을 그대로 존중해 주면서 서로 일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즉 삼위일체는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가장 완벽하게 설명해 주는 말이며, 삼위일체란 곧 사랑인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역시 “사랑을 본 것은 삼위일체를 본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고 창세기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즉 삼위일체를 닮은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 내면의 본성에는 삼위일체를 향한 강한 열망이 있는 것입니다. 삼위가 일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그 어떤 이기심도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 사이의 일치와 셋 사이의 일치는 그 차원이 다르지요. 둘 사이의 일치는 인간적인 사랑(에로스나 필리아)의 차원이고, 셋 사이의 일치는 신적 사랑(아가페), 곧 하느님 사랑의 차원입니다. 신학교에서도 보면 한 공동체 안에서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만 어울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물론 당연한 일이고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삼위일체 하느님의 정신에는 맞지 않는 것이지요. 둘 사이의 일치만 추구한다는 것은 내 입맛에 맞는 것만을 추구하는 것이지만 셋 이상의 일치를 추구한다는 것은 벌써 신적 사랑의 차원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이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목표입니다. 인간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셋 이상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 다가가야 합니다. 우리가 선교를 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물론 둘 사이의 관계에서 처음 사랑이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곧 부모님과의 사랑, 형제자매들을 비롯한 가족과의 사랑, 그리고 마음이 맞는 친구와의 사랑 등이 되겠죠. 하지만 성경에 “자기에게 잘 해 주는 사람에게만 잘 해 준다면 칭찬할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는 말씀처럼, 이러한 사랑은 사실 불완전한 사랑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다만 완전한 사랑으로 나아가기 위한 사랑의 체험인 것이지요. 둘 사이의 관계에서부터 배우게 되는 사랑의 체험으로 셋 이상의 관계로 끊임없이 나아가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 모든 인간의 소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인간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은 삼위일체이십니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고 사랑한다면 우리 역시 삼위일체적인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중국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으며, 베트남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언제나 서로 내어주려는 삼위일체의 불타는 사랑이 끊임없이 우리를 재촉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역시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나 자신의 문제 안에만 갇혀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내가 안고 있는 모든 고민들과 문제들, 그리고 고통들은 내 안에서 빨리 해결 되어서 없어져야 할 것들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나를 더욱 성장하게 하고, 성숙하게 하여 완성의 길로 나아가도록 하느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들입니다. 완성의 길이라는 것은 완전한 사랑의 길을 의미하는데요, 이것이 바로 셋 이상의 일치를 추구하는 삼위일체적인 사랑의 길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들을 잘 극복해 내고, 더욱 성장하며 성숙해지기 위해 기도하는 것도 사실은 우리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웃을 위한 것이 궁극적인 목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내 안의 문제가 빨리 다 해결되고 안 되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 안의 문제들에만 집착한다는 얘기는 내가 원하는 모습대로 나 자신이 되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이기적인 불만일 뿐입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본질적인 목적을 잃어버린 것이죠. 우리가 완성을 향해 나아가려면 반드시 다른 이웃에게 끊임없이 다가가는 사랑을 실천해야만 합니다. 즉, 셋 이상의 일치를 추구하는 삼위일체적 사랑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청주교구 사명 선언문의 표어가 ‘이웃으로, 세계로’인데요,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적 사랑의 모습일 것입니다.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를 할 수밖에 없는데, 바로 삼위일체의 사랑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오직 사랑을 주기만 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줄 수만은 없으며, 받기도 하여야 합니다. 사랑을 주고자 하는 사람은 사랑을 선물로 받기도 해야 합니다. 자기가 받은 것만을 남에게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교황님의 회칙「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에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 안에서 영원히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을 마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물을 마시기 위해 우리는 바로 관상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관상은 고독과 내적 침묵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과의 영적 친교를 말합니다. 즉, 고독 가운데서 하느님을 만나고 위로와 힘과 사랑의 샘물을 마셔야 하는 것입니다. 고독은 외로움과는 다르지요. 외로움은 소모적인 것이지만, 고독은 창조적인 것이라고 어느 책에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회칙「교회의 선교 사명」에서도 말하기를 선교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관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로 관상을 통해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그 사랑의 기운으로 역시 삼위일체적인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우리 안에 선교하고자 하는 열망이 없다면 아직도 이기적인 사랑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 선교하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우리 모두에게 선교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결국 선교야말로 우리 구원의 길이고, 완전한 사랑의 길이며, 삼위일체 하느님을 닮는 길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서 끊임없이 다른 이웃에게로 다가가는 삼위일체의 사랑을 실천하도록 합시다. 아멘.

  3. user#0 님의 말: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한분이시지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로 현존하신다.”는 삼위일체의 신비는 온전히 인간의 머리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계시 진리입니다. 신앙인들은 이해할 수는 없지만 믿을 수 있기에 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믿음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모든 시작과 끝을 성호경,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시작합니다. 또한 신앙인들의 희망은 거룩하게 살다가 주님 앞으로 나가가 주님의 현존을 두 눈으로 보아, 삼위일체의 신비를 보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삼위일체에 근거합니다. 교회는 삼위일체 교리가 하나의 신비로서 계시로 알려지는 진리이고, 계시를 떠나서는 인식이 불가능하다고 가르칩니다. 또 계시가 되었다 하더라도 삼위일체의 신비가 남김없이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성삼위 신비는 창조계를 까마득하게 초월하는 것이므로 창조된 사물에 비유하는 것은 어느 것도 이 신비를 적당하게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1. 삼위일체 신앙의 발단

    그리스도교 신앙의 고유성을 드러내주는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는 하느님께 대한 역사적인 체험을 소화하려는 노력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신약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측면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만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하면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심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성령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역사 안에서 삼중형태를 지닌 하느님과 마주하게 되면서 이 체험을 어떻게 유대교의 유일신 신앙과 융화시킬 수 있는가를 궁리하게 되었으며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세 분이시라면 유일신교가 아니라 다신교가 되기 때문입니다.


    2. 성경에 나타난 삼위일체

    역사적으로 많은 교부들이 구약의 많은 본문을 삼위일체 진리를 암시하는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래서 창세기1,26절의 우리라는 말마디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는 세인물의 방문(창 18,1-16), 이사야의 삼중찬미를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드러내는 계시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명확하게 이것을 통해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속성을 설명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신약성경에 명시적으로 나타나는 삼위일체 신앙은 예수님의 직제자들에게는 분명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상당히 일찍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이해하게 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신약성경은 삼위일체 신비가 성자 하느님과 성령 하느님의 체험을 통해서 계시되었음을 알려 줍니다. 하느님의 구원역사 안에서 명백하게 계시는 성부 하느님, 성자 하느님, 성령 하느님의 체험이 있었기에  하느님의 실재에 대한 신비가 이성적으로 남김없이 알아들을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 신앙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삼위일체 신앙의 형성과정

    초대 교회는 일찍이 입교자들과 신자들의 교리교육 때문에 요약된 신앙교리문을 작성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당시 많은 이단들이 그리스도교를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신앙을 저해할 첫 위험은 성경 전통을 강하게 고수하며, 성서적 유일신론을 옹호하려는 종교 철학적 조류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신 그리스도는 단순한 인간이었지만 세례 대 특별히 하느님의 능력을 힘입어 하느님의 아들의 위치로 입양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성자와 성령은 한 분이신 하느님의 현현 양식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또한 하느님 안에 세 위격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성자와 성령은 성부 하느님과 본질이 같음을 거부하고 성부 하느님께 종속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이단들이 있었습니다.


    결국 니체아 공의회를 개회하여, 공의회 교부들은 “성자가 성부의 본질에서 출생하여 성부와 본질이 같다.” 라는 가르침으로 처음으로 성자의 참된 신성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였습니다.

    니체아 공의회에서는 성령의 문제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성부와 성자의 관계만을 동일 본질성으로 규정짓고 있으며, 그 구별성도 분명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부족한 니체아의 삼위일체 교리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교부들은 바실리와 니싸의 그레고리오,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였습니다. 이들은 삼위일체 신비를 해설하는데 성부, 성자, 성령 세위의 구별점에서 출발하여 하느님의 본질 단일성에 이르고자 시도하였습니다.


    세 위격의 개체적인 표징들은 성부의 원천성과 비출생성. 그리고 성자의 성부로부터의 출생성, 성령의 성부와 성자로부터의 발출성으로부터 드러납니다.


    아타나시오 신경은 종래의 어느 신경보다도 삼위일체 교리를 체계적으로 해설되어 있는데 삼위 안에 한 분 하느님이 계시고, 같은 영광을 받으시며, 창조되지 않으시고 무한하시며, 영원하시고 전능하시며, 그렇다고 세 하느님이 아니고 한 하느님이 계시며, 누구든지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삼위에 대하여 생각하여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삼위의 구별성을 성부의 비출산성, 비발출성, 성자의 출산성,성령의 발출성에서 찾아내고 동일한 영광, 동일한 위엄, 동일한 신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4.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교리

    ① 한 하느님이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데 하나의 하느님이시며 이 위격들은 동일하게 영원하고 전능하십니다.

    ② 세 위격들이 구별됩니다. 성부 위격은 무근원적 위격이고, 성자의 위격은 성부로부터 출생되는 위격이며, 성령의 위격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되는 위격이라는 점에서 구별됩니다. 그리고 출생과 발출이 정확하게 구분되지 않고 다만 유래성만을 지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③ 이 하느님의 세 관계적 위격들은 하나의 하느님 본질에 있어서 구별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유일성이 강조됩니다.

    ④ 하느님의 위격들은 존재 안에서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외부를 향하는 하나의 역사 원리입니다.


    5. 삼위일체론의 중심 사상과 그 적극적 의미

    그리스도교가 삼위일체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결단의 기본적 관점은

    ①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직접적이라는 믿음에 기인합니다. 어떤 반신이나 반인 같은 중간적 존재로서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제대로 중재 하지도 못하고, 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②“하느님은 오직 한 분 뿐이시다.”는 철저한 유일신론적 신앙고백에 그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③ 하느님과 인간의 역사를 진지하게 고려하자는 노력의 태도입니다.


    6. 부정신학으로서의 삼위일체론

    교회가 시도하고 있는 하느님의 삼위일체에 대한 신비는 어쩌면 부정적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은 이렇다.”가 아니라, “이것은 하느님이 아니다.”라고 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식으로는 하느님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암시이지 설명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보다 하느님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부분이 더 크다는 것을 겸허하게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무작정 그분을 받아들이는 무비판적 입장은 거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참 신앙의 자세도 아닐 뿐더러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자세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야곱처럼 부단하게 하느님과의 한판의 씨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하느님과 말하려는 사람은 적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아는 것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삼위일체 대축일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으면 합니다.


    7. 예화

    ① 본당신부님과 나이드신 자매님과의 대화

    어느 본당 신부님께서 성탄을 준비하면서 판공성사를 주고 계셨습니다.

    공소나 구역의 신자들과 일일이 면담하면서 교리도 물어보셨습니다.


    신부님께서 나이 많은 자매님께 여쭈었습니다.

    “자매님! 하느님은 몇 분이십니까?”

    그러자 그 자매는 당연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연히 한 분이시지요!”

    그러자 신부님께서는 또 물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몇 개의 위격이십니까?”


    자매님은 고민하다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있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두개의 위격만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놀란 신부님은 그 자매님께 다시 물었습니다.

    “왜요?”

    “그거야 간단하지요. 제가 어릴 적에도 성부 하느님께서는 수염이 하얀 할아버지의 모습이셨거든요. 지금 제가 80세이니, 성부 하느님께서는 돌아가셨을 것입니다.”

    “……,”


    ② 아우구스티노 성인 이야기


    하루는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 “삼위일체 교리를 어떻게 하면 잘 깨닫고 설명할 수 있을까?” 하여 고민하면서 바닷가를 산책하고 계셨습니다. 하루 종일 바닷가에서 생각에 잠겨 있는데, 한쪽 구석 백사장에서 아이들 세 명이 역시 하루 종일 모래성을 쌓아 놓고 작은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퍼부으며 놀고 있었습니다. 성인께서 가까이 가서

    “애들아, 너희들 무엇을 하고 있어”

    라고 물으시자, 어린이들은

    “저희들은 저 바닷물을 이 모래성에 모두 퍼 담으려고 합니다.”

    라고 답했습니다. 성인께서 웃으시며 다시

    “애들아, 너희가 죽을 때까지 해도 그 일은 못 끝낼 것이야”

    라고 하시자, 아이들은

    “그래도 선생님께서 삼위일체교리를 깨닫는 일보다 더 쉬울 거예요”

    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바닷가에서 돌아와 5시간 동안 삼위일체에 대하여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이렇게 내렸습니다.

    “자, 저는 지금까지 인간의 말을 총동원하여 성부, 성자, 성령이 한분의 하느님이라는 삼위일체를 설명해 드렸습니다. 마지막 결론을 말씀드린다면 이것입니다. ‘삼위일체는 신비다. ’”




    8.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비유들

    어떤 비유로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드는 비유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① 인간과 삼위일체

    인간은 ①지능 ②의지 ③정서를 지닌 존재입니다. 세 가지 기능을 가졌지만 한 사람의 인간입니다. 지능은 생각하고 판단하는 기능이고, 의지는 생각한 것을 행동으로 옮깁니다. 정서는 자기가 지능으로 생각한 것을 의지에 의해 행동한 다음 그 결과를 보고 좋다든가 나쁘다든가 하고 느낍니다. 한 사람의 어떤 행동을 보고 “저 사람은 이렇게 했다”고 말하지 ‘저 사람의 지능이 그랬다’ 또는 ‘그의 의지가 그랬다’거나 ‘저 사람의 정서가 그랬다’고 평하지 않습니다. 성삼위께서도 따로 따로 작용하시기도 하고 동시에 작용하기도 하십니다.



    ② 삼각형과 삼위일체

    하나의 삼각형은 세 개의 각과 세 개의 변이 있으나 삼각형은 하나라고 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세 위격을 지녔으나 한분의 하느님이십니다.


    ③ 성냥불과 삼위일체

    성냥은 불이 켜짐과 동시에 불꽃과 빛과 열이 생깁니다. 삼위일체는 영원으로부터 삼위를 갖고 계신 천주 성부께로부터 성자가 나왔으나 동시에 낳았다고 볼 수 있으며, 영원한 이상이신 성부의 이념이 성자가 되었는데 그것을 ‘말씀’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머리로 생각한 것을 말로써 표현하듯이 성부의 이념이 말씀으로 표현된 성사입니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의 사랑이 너무 치열하여 또 하나의 위격이 피어나는데 이것이 곧 성령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왔다고 하나 이것은 이론적 설명일 뿐이고, 그 시간이나 지위에는 차이가 없이 서로 구별되면서도 다 같이 무한히 거룩하시고, 완전하시고, 모든 것을 아시고, 영원하심으로 삼위는 같은 흠숭과 찬양을 받으십니다. 위는 삼위나 하느님은 다만 한 분이십니다.


    ④ 촛불과 삼위일체

    촛불은 초와 심지와 불꽃으로 구성되어 있고, 서로가 내어줌을 통해서 빛을 발합니다. 초는 심지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고, 심지는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초와 함께 타오릅니다. 그리고 초와 심지를 바탕으로 촛불이 환하게 세상을 비춥니다. 촛불은 이렇게 사랑과 내어줌을 통해 하나가 되어 세상을 비춥니다.


    ⑤ 아버지와 삼위일체

    베드로라는 아버지는 한 여인의 아내이기에 아내에게서는 “여보”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아이의 아버지이시기에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직장에서는 직책이 부장이기에 “부장님”이라고 불립니다. “여보”라고 부르는 그 사람과 아이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과 그리고 직장에서 “부장님”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같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어떤 비유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온전히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성으로는 오롯하게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한 분이시라는 것과 성부 하느님께서는 창조 사업을 하셨고, 성자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으심을 통해 구원사업을 하셨고, 성령께서는 성실한 보호자로서 교회를 붙들어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것을 구원 역사 안에서 체험으로 받아 들에게 된 것입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이하여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은총 안에서 힘을 얻어, 교회 공동체와 친교를 이루며 구원에로 힘차게 나아가는 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4. user#0 님의 말:

     

    삼위일체 대축일

    제 1 독서 : 출애 34, 4b-6. 8-9

    제 2 독서 : 2고린 13, 11-13

    복     음 : 요한 3, 16-18


    제 1 독서 : 금송아지 경배 사건(출애 32장)으로 하느님을 배반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의 약속을 깨뜨렸다. 모세는 이 백성을 위해 빌었고, 새 증거판을 받으러 시나이 산으로 올라갔다. 바로 이때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열어 보이셨다. 즉 준엄한 하느님이면서 동시에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hesed)과 진실(emeth)은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약속을 충실히 지키시는 데서 분명히 드러나며, 고집 센 백성을 계속 용서해 주시는 데서 체험되었다. 하느님의 사랑과 진실 덕분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제 2 독서 : 바오로의 서간은 하느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언급하는 이중적 인사양식(필립 1, 2; 갈라 1, 3; 1고린 1, 3; 2고린 1, 2; 로마 1, 7)이 대부분인데 오늘 제2독서는 성령을 동시에 언급하는 3중적 인사양식이다. 이 인사양식은 로마 가톨릭 미사 전례에 그대로 채택되었다.

    한 분이신 하느님께 삼위가 있다는 것은 하느님이 분열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풍부하게 자아 표현과 자아 개방을 하신다는 것을 뜻한다. 성자와 성령께서 영원으로부터 성부와 같은 신성을 갖고 계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을 표현하고 개방하기 위해서 당신 아닌 제3자가 필요없다는 것을 말한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통해서 당신 스스로를 드러내시고 열어 보이신다. 그 목적은 우리와 함께 사랑과 은총과 친교를 나누기 위해서이다.


    복     음 : 이스라엘의 이름난 선생 니고데모는 나자렛에서 온 예수라는 사람과 대화하던 중에 놀라운 사실을 듣게 된다. 즉 새로운 탄생이 있어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계속해서 못 알아듣는 니고데모에게 예수께서는 두 번이나 물과 성령을 통한 새로운 탄생을 말씀하신다.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의 사명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가운데 하느님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설파하신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16절). 세상의 구원을 위해 넘겨진 하느님의 아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곧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만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 그에 따르는 성령을 통한 새로운 탄생(세례성사)과 영원한 생명, 결국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와의 만남으로 니고데모와의 대화는 요약될 수 있다. 이처럼 니고데모와의 대화는 어려운 삼위일체 교리를 이야기식으로 훌륭하게 설명한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우리가 무심코 성호를 그을 때마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 성령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며 삼위일체인 하느님을 향해 기도 드리는 것입니다. 이 하느님은 아버지 성부와 아들 성자 그리고 진리를 깨닫게 해주시는 성령, 즉 삼위로 이루어진 분으로서, 본체는 하나이나 위격은 셋인 삼위일체의 하느님이신 것입니다. 아버지 성부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셨다면, 아들 예수 성자는 성부의 뜻에 따라 몸소 육신을 취하여 세상 안에 들어오시어 아버지의 나라를 선포하신 구세주가 되셨고, 제삼위이신 성령께서는 예수께서 전해 주신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고 은총의 빛으로써 우리를 늘 바른길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의 요한 복음 3장 16절은 삼위일체의 하느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명확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는 표현이 바로 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이 마침내는 아들 예수를 세상에 내려오게 하였고 그로 하여금 사람들 안에 살면서 몸소 고통과 수난을 겪고 마침내는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게 한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나누었던 뜨거운 사랑과 깊은 마음을 어찌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마는 이 사랑은 바로 장미 한 송이를 두고 서로의 마음을 나누었던 어느 부부의 이야기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유명한 심리학자인 라르스 그렌버그는 젊은 시절,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굽힘없이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곁에서 끊임없이 격려해 주는 그의 아내 덕분이었습니다. 결혼식을 올린 후에도 그렌버그는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으며 그가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의 아내는 혼자서 생활비를 벌었습니다. 이른 아침 그렌버그는 학교에, 아내는 직장에 가기 위해 집에 나섰습니다. 기차역 앞에서 헤어져 아내가 종종걸음으로 길을 건너는 모습을 볼 때면 그렌버그의 가슴은 몹시 아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업이 끝나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그렌버그는 한 정거장에서 기차가 멈추었을 때 철도 건널목에서 꽃을 파는 노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렌버그는 문득 아내의 얼굴이 떠올라 기차에서 내려 달려갔습니다. 얼른 주머니를 뒤져보니 달랑 동전 한 개가 들어있었습니다. 그렌버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동전을 내밀자 노인이 장미꽃 한 송이를 건네주었습니다. 그가 돌아섰을 때 기차가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렌버그는 꽃 한 송이를 들고 뛰었습니다. 아슬아슬하게 기차에 올라탄 그렌버그는 손을 흔드는 노인을 향해 씨익 웃어보였습니다.

    그후 그렌버그는 점심값이나 커피값을 쪼개 매일 밤 그 기차역에서 장미꽃을 샀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아예 그렌버그가 올 무렵이면 기차역에서 장미를 들고 그렌버그를 기다렸습니다. 기차가 역에 들어서면 그렌버그는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장미 한 송이를 들고 서있는 등이 구부정한 노인에게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러면 노인이 뒤뚱거리며 뛰어와 꽃을 창 밖에서 건네주곤 했던 것입니다. 기차에서 내린 그렌버그는 한 손에는 무거운 책가방을, 다른 한 손에는 장미꽃을 꼭 쥐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현관문을 열어주는 아내에게 장미 한 송이를 수줍게 내밀었습니다. 아내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장미꽃을 받아들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그의 무거운 책가방을 얼른 받아들었습니다.

    그렌버그 부부의 지고하고 숭고한 사랑, 이 아름답고 감동적인 사랑의 모습에 비추어 우리는 아버지 성부와 아들 성자간의 뜨겁고도 친밀한 사랑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성자를 세상에 보내주신 성부 하느님은 오늘 제1독서의 말씀처럼 자비와 은총의 신이십니다. 이스라엘의 대표자 모세는 이른 아침에 홀로 새로운 돌판 두 개를 들고 시나이 산으로 올라갑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영광을 구름 속에서 체험하면서 자신과 백성을 위하여 용서와 자비를 간구했던 것입니다.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야훼 하느님께 간구하며 엎드렸던 모세의 모습은 우리 신앙인이 걸어가야 할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저지른 죄와 실수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길이 당신의 것으로 삼아주십시오.”라는 모세의 간청은 바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간구하는 우리들의 기도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간구의 자세는 사도 바오로가 고린토 후서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 라고 한 삼위일체의 기도 안에서 함께 어울어져야 할 것입니다. 평화롭게 살며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라는 사도 바오로의 권고는 우리의 신앙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누리는 사랑과 친교를 본받아 항상 기쁨과 감사 속에서 살아가라는 깨우침을 주고 있습니다.

    진정 우리의 신앙은 삼위일체의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구원의 은총을 받아들이면서 서로서로 용서하고 베풀고 사랑과 친교를 나누는 삶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즉 교회 안에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이 각각 자신들의 고유한 역할을 해 나가면서 하나의 교회, 공번된 교회, 거룩하고 사도들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이루어 나가고, 모든 이가 한 사람도 예외없이 구원의 은총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이루어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결코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순례하는 나그네의 모습으로 영원을 향해 나아가는 교회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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