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제 1독서 : 신명 8,2-3. 14b-16a

제 2독서 : 1고린 10,16-17

복음 : 요한 6,51-58



“인간은 평범하지 않은 사실들에 자신을 익숙케 하는 존재이며 또 흔히는 그런 사실들로부터 어떤 순간에 받게되는 특별한 느낌을 습관적이면서도 피상적인 일상적 감정 표현의 테두리안에서 되새기느 ㄴ존재다. 그러한 인간의 습성은 인간의 상식을 초월하는 실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즉 인간은 흔히 그러한 실체들을 통상적인 것으로 여기고 또 마치 그것들이, 그것들을 수식하고 있는 수전히 용어상의 껍데기에 국한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함으로써, 그것들이 본래 지니고 있는 풍부한 내적 의미를 더 이상 근원적으로 파악하여 알아들으려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현상은 성체성사라는 형언할 수 없는 실체를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에서도 자주 일어나고 있다”(교황 바오로 6세, 1977.6.12,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강론 중에서).



경탄할 수 있는 능력



 바오로 6세께서 하신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교회에 마련하여주신 성체성사의 선물 앞에서 많은 그리스도 신자들이 취하고 있는 묘한 태도를 정확히 꼬집고 있다. 우리에게는 놀라거나 경탄할 수 있는 능력은커녕, 비록 배척하는 태도이긴 하지만 가파르나움 회당에서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이 느꼈던 그런 ‘거부감을 느낄 만한’ 능력(“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조차도 부족하다. 사실 그들은 방금 이용한 구절에서처럼 그신비를 이성적으로 알아듣기 어렵다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기 전에 다음과 같이 놀라움을 드러냈다 :“이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줄 수 있단 말인가?”(52절).

 그렇다고 한다면 적어도 그들은 지극히 중대하고 놀라운 어떤 사실을 직면하였을 때 ‘경탄하거나’ 어떤 반응을 보일 수 있는 능력은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반면에 우리는 ‘믿기는 하지만’ 더 이상 경탄하지는 않는다. 즉 우리는 놀랍고도 중대한 그런 사실들이 더 이상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하는 일상적인 것들이 되어버릴 만큼 그런사실들에 ‘타성화’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떤 놀라운 사건도 우리생활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한 가지 자문해 보자. 어리석은 가정이긴 하지만 만약 성체성사가 없어지게 된다면 과연 많은 그리스도 신자들의 생활이 현재의 생활과 달라지겠는가?

 오늘 전례의 독서들은 다같이, 믿기 어렵지만 생활 속에서 지속적으로 실현되어야 할 성체성사의 신비 앞에서 가지게 되는 ‘경탄’(놀라움)의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또한 모든 신학자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마음과 열정이 한데 어우러져 감동적인 찬미가로 표현되고 있는 ‘시온아, 찬미하라’라는 부속가(성체송가)도 마찬가지다 : “정성 다해 찬양하라, 찬양하고 찬양해도, 우리능력 부족하다.”



“사람은 빵만으로는 살지 못한다”



성체성사에 관한 예수의 담화에서 만나게 될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이해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고 있는 오늘 제1독서의 내용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속에다, 비록 많은 시간적 차이는 있지만 그들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힘든 유랑생활을 하 때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기억뿐만 아니라 그분의 자비하심에 대해 느꼈던 그 ‘열정적 감격’까지도 다시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것이 분명하다.

 “너희는 지난 사십 년간 광야에서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어떻게 너희를 인도해 주셨던가 더듬어 생각해 보아라…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고생시키고 굶기시다가 너희가 일찍이 몰랐고 너희 선조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여주셨다. 이는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지 못하고 야훼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씀을 따라야 산다는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주시려는 것이었다. 하느님께서…저 끝없고 두렵던 광야, 불뱀과 전갈이 우글거리고 물이 없어 타던 땅에서 너희 발길을 인도해주시며 차돌 바위에서 물이 터져나오게 해주시지 않았느냐? 또 너희 선조들이 일찍이 먹어보지 못한 만나를 너희에게 먹여 주시지 않았느냐?”(신명 8,2-3.14b-16a).

 그러므로 이 장면은 광야의 험한 날씨, 배고픔, 목마름, 숱한 죽음의 위험들, 함정, 무기력, 자주 길을 잃고 헤맴, 절망감 드을 배경으로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그 자체가 죽음의 구렁텅이인 그런 환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결코 살아 남을 수 없었으리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인간은 자기 혼자힘만으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오직 하느님께서만 생명력이 없는 모래땅에서 열매가 맺고 갈증을 풀어주며 생기를 돋게 하는 물이 솟아나는 것과 같은 기적으로 광야를 비옥하게 만드심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을 구해 주셨다. 광야가 자기힘으로 할 수 없었던 것을 “ 야훼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씀”(신명 8,3)이 이루어주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멀고도 먼 약속의 땅을 향해 기나긴 여행을 하는 중에 겪었던 그 모든 극적 체험의 진짜 주이농은 하느님의 ‘말씀’이시다. 그 ‘말씀’이 아니었다면 이스라엘 백성을 배불리 먹였던 ‘만나’도 또 ‘차돌 바위’에서 솟아난 ‘물’도 생겨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선물들보다 더 가치가 있고 중요한 것은 그분의 ‘말씀’이시다.

 우리가 읽은 대목 전체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한가지 시실은 하느님께서 다잇ㄴ 백성에게 베풀어주신 그 선물의 ‘예외성’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일찍이 몰랐고 너희 선조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여주셨다. 이는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지못하고 야훼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씀을 따라야 산다는 것을 너히에게 가르쳐주시려는 것이었다”( 3절, 16절 참조).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주는 것은 그들의 선조들이 일찍이 알고 있었던 ‘빵’을 주느느 것보다 더 큰 기적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항상 새로운 환경을 창조하신다. 즉 하느님은 항상 앞서가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신약시대에 와서 인생의 광야에서 험한 여정을 계속하고 있는 당신 백성들의 배고픔을, ‘만나’의 선물보다 더 신비스럽고 영양분이 있는 음식으로 채워주시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은 그 무엇도 저항할 수 없는 하느님의 ‘말씀’이 진정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요한 1,14) 때문에 그만큼 더 가능하다.



새로운 ‘만나’이신 그리스도



실로 말하자면, 하느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주고 계시고, 또 이미 ‘만나’와 바위에서 솟아난 ‘물’을 상징적 예표로 제시하셨던 더욱 신비스럽고 영양분이 있는 그 ‘새로운’음식은 바로 우리를 위햐여 십자가 위에서 희생되신 그리스도의 ‘살’과 ‘피’이다.

 그러므로 그 선물은 분명 무한히 더 큰 선물이며, 여기서 하는미의 자비는 도저히 믿기 어려울 정도에 이르고 있다. 또한 그선물의 목적도 방금 위에서 언급한 구약성서상의 구원적 개입의 차원에 비추어 본다 하더라도 훨씬 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선물은 하느님의 백성 가까이에 있으면서, 섭취되어 소화된 모든 음식이 유기체 안에 발생시키는 힘과 에너지를 그 백성에게 공급하여 원기를 회복시켜주고자 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 백성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생명 자체에 참여하여 ‘살도록’ 한다.

 사실 그리스도를 먹으면서 그리스도로 살지 않을 수는 없다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여한 6,57). 전혀 생소하지 않은, 이와같은 복음적인 어리석은 행위 때문에 그리스도신자들에게 있어서는 인생의 광야에서의 험한 여정 그 자체가 이미 천상 고향에 사는 것이다(필립 3,20 참조).

 이제 복음사가의 견해에 따르면, 예수께서 가파르나움 회당에서 말씀하셨다고 하는 (요한 6,59) 소위 ‘성체성사에 관한 담화’의 결론부분을 전해주고 있는 오늘 복음의 놀라운 내용을 짤막하게 분석해보자.

 지금 이 순간 우리의 관심은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한 이 이야기 전체의 구조에 대한 토론이나, 이 이야기가 예수 자신의 이야기인지 아니면 역사적 증거 외에 놀라운 성체성사에 관한 교리를 자기 독자들에게 제공할 기회로 삼은 복음사가의 저술에 속하는 이야기인지 하는 문제를 다루는 데 있지 않다.

 다만 우리가 지금 말할 수 있는 사실은 만약 앞의 대목 전체에서(요한 6,26-50) 예수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빵”(33.35.41절), “생명의 빵”(48절)으로서 당신 자신을 제시하셨다면, 그것은 당신 말씀을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을 통하여 더 더욱 놀라운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준비시켜주시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 그 놀라운 사실이란, 그 ‘빵’은 바로 세상을 구원하러 세상에 ‘보내진’(38-40절 참조)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자신으로서, 이세상 사람들에게 베풀어져 그들이 그것을 정말로 먹음으로써 영원한 하느님과 같은 영원한 신적 실체로 변화되어 다시 살안게 하는 ‘빵’이라는 사실이다. ‘죽음’은 ‘생명의 빵’을 먹는 곳에는 접근하지 못한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51절). 여기서는 선택된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서(희합어로 yper)가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해 희생제물로서 바쳐질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사실 요한의 작품을 포함해서 신약성서의 저작들에서 yper라는 전치사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구속적 가치를 표현하는 데는 거의 기계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마르 14,24 ; 루가 22,19 ; 로마 5,6 ; 1고린 11,24 ; 15,3 ; 요한 10,11.15 ; 11,50-52 ;17,14 ; 18,14 등 참조).

 여기서 정말로 놀라운 사실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 희생제물이 될 그 ‘살’을 ‘먹도록’ 주겠다(미래형을 쓰고 있음을 주목하라)고 약속하시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살은 최고의 봉헌의 행위를 통해 표현된 구속과 사랑의 모든 힘이 믿는 이들에게 베풀어지도록 하기 위해 봉헌된 ‘의생’의 음식이다. 여기서 유다인들은 그런사실의 가능성 여부를 시비거리로 삼으며 따지고 든다:“이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죽 수 있단 말인가?”(52절).

 요한의 경우에서 처럼 다른 사람들의 몰이해는 에수께있어서 당신의 생각을 보다 더 확실히 또 더 깊이 있게 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안에서 산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이 빵은 너희의 조상들이 먹고도 결국 죽어간 그런 빵이 아니다. 이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것이다”(53-58절).

 신비의 베일을 최대한 벗겨주며 사람들을 놀라움에 차게 하는 예수의 이 말씀들 중에는, 만일 우리가 최소한 그말씀들을 막연하고 애매모호한 것으로 돌려버리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더 정확히 말해 그것들을 다만 그분과의 깊은 일치 아니 신비스러운 일치에 대한 은유적 표현정도로 단정짓지만 않는다면 여러 가지 깊은 내용이 들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피는 참된 음료다”



우엇보다도 먼저 예수께서는 ‘현실성’입각해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점이다. 우선 그분은 사람들이 당신이 하시는 말씀의 내용을 경감기키지나 않을까 염려하시는 것 같다. 사실 우리는 그 말씀의 첫머리에서 “정말 잘 들어두어라”(53절)라고 말씀하신다. 이참된(α`ληθη\’ς)이라는 형용사는 요한 복음사가의 용법에 있어서 신앙의 관점에서 파악된 사물들의 가장 깊은 실체를 뜻하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다음에 여기서 여러번 나오고 있는 (54.55.58절) ‘먹는다’라는 말은 원래 희랍어로는 ‘게걸스레먹다’‘잘게 부수다’를 뜻하는 동사 Γεω´γει´υ이다. 그러므로 어떤 상징적행위가 아니라 아주 생생한 현실적인 행위를 뜻한다. 또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받았던 극심한 고통에 대한 내용도 언급되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한 여기에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몸의 상처에서 넘쳐 흘러나온 ‘피’에대한 내용도 담겨 있다 : 히브리인들은 결코 피를 마시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피에는 오직 하느님만이 주인이 되는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레위 17,11참조). 그런데 예수께서는 바로 당신의 피를 봉헌제물로 바치신다. 왜냐하면 당신의 ‘생명’자체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으신다! ‘몸’과 ‘피’는 형제들에 선물로 봉헌되신 그분의 위격 ‘전체’를 뜻한다. 고찰해야 할 두 번째 사실은, 예수께서 당신을 먹는 사람들이 얻게 될 ‘생명’에 대해 계속해거 말씀하고 계시다는 점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것이다”(51.54.58절). 여기서 문맥 전체를 통해 상기되고 있는 ‘죽음’의 행위로부터 ‘생명’이 태어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이상하게 여겨질지 모른다. 그렇지만 사실이 그렇다.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봉헌은 사랑의 최고의 표현이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스 사랑은 아주 단절되어버렸거나 또는 단순히 약화된 인간관계를 변화시키고 재생시키는 추진력이요 생명력이다.

 다른 한편, 주님의 몸과 피를 나누어 받음으로써 얻게 되는 ‘생명’은, 하느님의 아들 성자께서 지금 이순간 영광중에 살고 계시는 ‘생명’ 그자체이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삶도 나의 힘으로 살것이다”(57절). 그러므로 그생명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부활한이들’의 생명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힘으로’ 사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성체성사는 그리스도 신자가 신적 세계에 참여하여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충만한 생명을 자신 안에 간직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수단이 된다.

 마지막으로, 어째서 요한 복음사가는 여기서 공관 복음사가들이 사용하고 있는 ‘몸’이라는 말 대신에 ‘살’(sarx)이라는 말을 계속해서 사용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왜 그럴까? 그 이유를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학자들간에 의견도 서로 다르다. 요한 복음사가가 ‘인간전체’와 ‘몸’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아라메아어 besar(살, 육신)의 의미를 그대로 잘살리기 위해서라는 가장 개연성 있는 이유를 차치해놓고 본다면, 아마도 그가 성체성사와 육화의 신비를 의도적으로 결합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따. 그의 복음 서두의 내용을 상기해 보라 :“말씀이 사람(sarx)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다”(1,14). 성체성사를 통하여 육화의 신비가 사람들 가운데 ‘계속되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 성체성사를 통하여 당신 존재의 충만성과 전체성 안에서 우리 가운데 당신의 사랑과 구원의 현존을 계속하고 계시다.



 “빵이 하나이기에 우리는 모두 한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제 2독서가 담고 있는 깊은 내용을 이해하는 데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거기서 바울로 사도는 고린토의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성체성사의 의미를 koinonia, 즉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들과의 일치와 결합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감사를 드리면서 그 축복의 잔을 마시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를 나누어 마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우리가 그 빵을 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어 먹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빵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 이지만 모두 한몸인것입니다”(1고린 10,16-17).

 그러므로 우리는 성체성사를 ‘나눔으로써’ 그리스도에게 결합될 뿐만 아니라 우리 서로도 결합되어 비록 여럿이지만 모두 ‘한몸’을 이루게 된다. 그리스도의 몸을 먹음으로써 우리도 또한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이다(성 아우구스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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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에 1개의 응답

  1. user#0 님의 말:

     

    “성체와 성혈“

    하루는 안토니오 성인이 강론을 하는데, 성당 뒷좌석에 오랫동안 냉담하다가 나와 앉아 있는 귀족 한사람을 보고 그에게 내기를 하자고 했다. 내용은 당나귀 한 마리를 3일 동안 굶긴 뒤, 당나귀가 좋아하는 당근을 오른쪽에, 그리고 축성된 성체를 왼쪽에 놓고 당나귀가 어느 쪽을 먼저 선택하는가 하는 내기였다.

    냉담 중에 있던 귀족은 안토니오 성인의 내기를 받아들이며 말하기를

    “신부님이 당나귀를 3일 동안 성체 있는 곳으로 가도록 교육시킬지 모르니, 제가 데리고 있겠습니다.”

    라고 하여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3일 후에 동네 사람들이 당나귀가 하는 짓을 보려고 몰려들었다. 귀족은 3일 동안 굶긴 당나귀를 끌고 나오며 의기양양하였고, 사람들은 숨을 죽이며 당나귀가 어떻게 행동할까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 앞으로 나온 당나귀는 두리번거리더니 자기가 좋아하는 당근이 수북하게 쌓인 것을 보고는 입맛을 다시며 혀를 날름거렸다. 그런데 갑자기 머리를 돌려 성체가 있는 곳으로 가더니,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사람들은 괴성을 지르며 놀라워했고, 당나귀는 당근 있는 곳으로 천천히 가서는 배고픔을 채웠다.

    당나귀조차도 성체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임을 알거늘…,


    1. 성체와 성혈은 예수님의 몸과 피 입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성체와 성혈을 상징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내가 인정하건 인정하지 않던 간에, 보고 맛보고 만져 봐도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의 몸과 피입니다.

     전에 중고등부 지구 학생 체육대회 때 있었던 일입니다. 마침 그날이 성체와 성혈 대축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학생들에게 물어봤습니다. 성체가 예수님의 몸임을 믿습니까? 손드는 학생들은 많지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결국 알아듣지 못하고, 알아 뵙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성체가 예수님의 몸이라는 것을 못 느끼고, 못 알아보는 것입니다.


    2. 1264년 독일 신부님 하나가 로마를 순례하던 중, 「보르세나」에 들러 성녀 크리스티나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며, 과연 밀떡 속에 예수님이 계시는 걸까? 계시지도 않는 예수님을 계신다고 생각하며 헛수고만 하는 것은 아닐까? 하며 의심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사 예식을 거행하는 중에, 갑자기 밀떡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며 밀떡이 살덩어리로 변하는가 하면, 포도주 잔에 있던 포도주가 피가 되어 잔에 흘러넘치고 있었다. 당시 교황 「우르바노 4세」는 이 사건을 기념하여 교회 축일로 지정하였다,

    3. 아이들의 첫영성체

     예수님께서는 당신께로 오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초자연적인 양식을 영하는 데에는 적어도 어느 정도의 이성의 분별과 신심과 존경이 있어야 한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왜 어린아이들에게 돈을 주어서는 안 됩니까?”라는 질문과도 같을 수 있습니다. 한두 살 먹은 어린아이가 돈의 가치를 알지도 못할 뿐더러, 쓸 줄도 모릅니다. 그러니 어린 아이들에게 돈을 안 주지요. 용돈을 주기 시작하는 것도, 어느 정도 나이가 있고, 돈을 쓸 줄도 알아야 주지 않습니까?


    4. 그리스도의 살은 참된 양식이며, 그분의 피도 참된 음료입니다. 그리고 성체와 성혈을 영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 머물고 그리스도 또한 그 사람 안에 머무십니다. 그리스도를 영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로 채워지고, 그분에게서 샘솟는 생명의 물을 풍요롭게 마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도 사랑을 받고 있는 친구처럼 성체를 영한 사람 안에 머물러 계십니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아내가 어렵게 외아들을 키웠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죽음으로 나오게 된 “보상금(위로금)”으로 작은 밭을 샀습니다. 그리고 그 밭을 일구어서 두 가족이 함께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외아들은 어머니의 마음대로 커 주지 않았습니다. 삐딱한 친구들과 어울려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아들은 어머니 몰래 작은 밭을 팔았습니다. 도박 빚 때문에 밭을 몰래 팔았던 것입니다. 그것을 알게 된 어머니는 아들을 붙잡고 울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놈아! 그 밭이 어떤 밭인데, 그 밭은 네 애비 피여! 그 밭이 바로 네 애비 몸이란 말여! 어떻게 그것을 팔수가 있냐! 이놈아!~”

    아버지의 목숨이 밭으로 바뀐 것입니다. 어머니가 밭에 나가서 일을 하는 것은 바로 아버지와 함께 있는 시간이었다는 것을 아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던 아들은 그 밭이 그저 밭일 뿐 이었던 것입니다.


     성체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의 형상 안에 당신을 담으셨습니다. 포도주의 형상 안에 당신을 담으셨습니다. 우리 눈에는 빵과 포도주만 보이지만,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 안에 예수님께서 계심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의 눈이 없다면 밀떡과 포도주밖에는 안 보일 것입니다.

  2. user#0 님의 말:

     

    성체성혈 대축일

             1. 박석희 주교/2                  2. 최기산 신부(가)/4

             3. 김정진 신부(가)/6                     4. 김몽은 신부(가)/7

             5. 박승원 신부(가)/9                     6. 윤경철 신부(가)/12

             7. 강길웅 신부(가)/13            8. 허영업 신부(가)/15

             9. 변기영 신부(가)/17           10. 신비의 교리(가)/18

            11. 교구 주보(가)/21                     12. 최인호 작가(가)/22



    1              성체성혈 대축일 :   성체에 담긴 사랑의 정신

    박석희 주교


    “성체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출발점이자 정점입니다. 성체대회는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이를 이웃에 대한 적극적인 사랑으로 승화시킬 것을 다짐하는 거룩한

    행사입니다.”

    18일부터 로마에서 개최되는 제47차 세계성체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하는 박석희(안동교구장)주교는 “성체성사의 신비는 인류를 위해 자신을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우리가 바로 이 자리에서 체현하는 것”이라면서 “자칫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기 쉬운 성체신심을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으로 유도하는 것이야말로 성체대회의 가장 중요한 의의”라고 밝혔다.


     “그리스도 강생 2000년의 의미를. 더욱 부각시키고자 마련되는 이번 성체대회는 수많은 대희년 행사 가운데 절정입니다. 특히 이번 대회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람이랄 수 있는 로마에서 개최되는 것 또한 각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박 주교는 “교황청 세계성체대회 위원회가 발표한 제47차 세계성체대회 기조문이 성체성사와 이천대회의 의미를 잘 나타내고 있다”면서 이를 하나하나 설명했다.


    첫번째 항목인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는 창조주 하느님과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늘 기억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 기억 상실증’에 걸린 현대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이를 삶 속에서 실천해야한다는 의미입니다. 

      

    박 주교는 두번째 항목; ‘이것을 받아먹어라’는, 인간이 육신을 위한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야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라면서 “성체성사는 하느님의 새 생명으로 거듭남을 뜻한다”고 말했다.


    세번째인 :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은, 성체성사야말로 사랑의 극치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성체에 담긴 가장 중요한 의미입니다. 이런 예수를 따르고 있는지 끊임없이 반성하고 또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웃에게 전파하는 것이야말로 신자들이 해야할 일입니다.

      

    박 주교는 마지막 항목인; ‘신앙의 신비’는,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신비와 예수 그리스도가 성체 안에 현존하심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면서, “우리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만 그 현존을 깨달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1989년 서울대회 이후 세계성체대회 참가는 이번이 처음이라는 박 주교는, 이번 대회기간 동안 한국 순례객들을 위한 미사집전과 함께 각 요일별로 지정된 주제의 교리해설을 담당할 예정이다.


    박 주교는 “한국 참가자들은 여행객의 기분이 아닌 순례자의 마음가짐으로 엄숙하게 참여해 주길 바란다”고 당부하면서, “직접 참석하지 못하는 국내 신자들도 대회기간 동안 본당 또는 단체별로 성체조배 모임을 갖고, 성체대회의 의미를 되새긴다면 같은 은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교회가 성체대회를 개최하는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체에 담긴 그리스도의 사랑이야말로 신앙의 핵심입니다. 교회의 어떤 활동도 이 핵심과 근본을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성체대회를 계기로 모든

    신자들이 성체에 담긴 사랑의 정신을 마음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남정률 기자)







    2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가) <요한 6, 51―58> 신비의 교리인 성체성사

    최기산 신부


    5년전 뉴욕타임스에 가톨릭 신자들의 성체 이해에 대한 설문조사가 실렸었다. 50% 정도의 신자들이 성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심을 믿는다고 응답했다. 나머지는 상징적 의미로 받아들인다고 응답하였다. 이는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나라 신자들은 어떻게 답할까? 미사 중에 사제가 빵을 축성하면 예수님의 몸으로 변화된다고, 또 포도주와 물을 섞어서 축성하면 예수님의 피로 변화된다고 정말 믿는가? 확실히 믿는가? 설문조사를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믿기 힘들다고 응답하는 신자들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미사에 참례하는 모습에서 어느 정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질문을 해보자. 과연 성당의 감실 안에 모셔진 성체 안에 예수님께서 확실히 현존하신다고 정말 믿는가? 확실히 믿는가? 이에 대한 응답에도 부정적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만일 신자이면서 이에 의심을 가지고 있으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교회헌장 제11항에 분명히ꡒ그리스도인의 생활 전체의 원천이요 그 절정이 성찬례다ꡓ라고 정의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체성사 안에 우리 신앙이 요약되고 집약되므로 이를 부정한다거나 의심한다는 것은 신앙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이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만일 미사 때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하여 영적 양식이 된다는 것을 확실히 믿으면 우리의 미사참례 태도는 달라질 것이다. 더 많은 준비를 한 후 미사에 임할 것이 분명하다. 또 감실 안에 모셔진 성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을 의심치 않고 믿으면 우리의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예를 들면 성당에 자주 오고 싶어할 것이고, 볼일이 있어서 성당에 왔을 때에는 우선 성전에 들어가서 감실 앞에 나가 무릎꿇고 기도할 것이다.


    살아 계신 주님께서 거기에 계시기 때문이다. 신비의 교리 미사중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축성한 다음 신자들에게 성체를 주기에 앞서 ꡒ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ꡓ라고 말하면 신자들은 ꡒ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ꡓ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성체를 모시려고 나아간다. 비신자들이 이 광경을 보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물론 이성적 논리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어떻게 빵이 몸으로 변했다고 믿고 그 빵을 받아먹으려고 눈을 지그시 감고 나가느냐고 빈정댈 것이다. 어떤 이들은 웃기는 얘기라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몸이라고 분명히 신앙으로 믿고 모시러 나간다. 빵이 예수님의 몸으로 바뀐다는 것은 신비의 교리다.


     이는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이 신비의 교리를 받아들이고 믿기 위해서는 신비한 방법이 요구된다 하겠다. 즉 성령께서 비추어주셔야만 이 신비를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다. 성 토마스는 성체 찬미 기도에서 ꡒ두 가지 허울 안에 분명 숨어 계시오나 우러러 뵈올 수록 전혀 알 길 없사옵기에 내 마음은 오직 믿을 뿐이오이다. 보고 맛보고 만져봐도 알 길 없고 다만 들음으로만 믿음 든든하오니…ꡓ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ꡒ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나를 먹는 사람은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ꡓ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이 알아듣기 힘들어서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이가 예수님을 떠나갔다. 심지어 우리더러 식인종이 되란 말이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ꡒ너희도 떠나가겠느냐?ꡓ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ꡒ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ꡓ(요한 6, 67―68)라고 대답하였다.


    그리스도 현존의 양면성 예수님께선 왜 성체성사를 세우셨을까? 다름 아닌 사랑 때문이다.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제물로 봉헌하신 사랑도 모자라 그 은혜를 계속 나누어주기를 바라셨다. 이젠 자신의 몸을 부수어 우리에게 영혼의 양식이 되고자 자청하셨다. 그러므로 미사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흠앙해야 한다.


    예수님께선 우리의 영혼에 양식으로 오신다. 또 감실 안에 계시면서 언제라도 만나고 싶은 사람은 만나고자 기다리신다. 그러므로 자주 미사에 참례함은 물론 성체조배, 성체강복, 성시간에 자주 참석하여 주님을 찬양해야겠다. 그러나 다른 한 면도 잊어서는 안 된다. 즉 예수님은 성체 안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가난한 자, 병든 자, 고통 당하는 자 안에도 계신다. 그러므로 성체께 대한 정성을 드리는 만큼 그들에게도 그러한 정성을 드려 예수님을 찬양하도록 해야 한다.


    복음의 메시지 오늘의 세계는 물질 우선의 세계다. 옛날에는 신 중심의 신본주의 사회였다. 그러다가 프랑스혁명을 거치면서 인간 중심의 세상이 됐고 이젠 물질 중심의 세상이 되었다. 하느님도 뒷전이고, 인간도 경시되고 있다. 물질을 위해서는 인간의 생명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이러한 위기의 시대에 우리는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살아 계시는 주님으로 받들어 모시는 혁명적 신앙을 가져야 한다. 어떤 이들은 흔히 역사상의 예수님만을 강조한다.


    과거 2000년전의 예수님만을 공부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분은 지금도 살아 계신다. 오늘날의 예수님, 살아 계신 예수님은 오늘도 성체 안에서, 고난받는 사람들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을 만나야만 우리의 신앙은 살아있는 신앙이 되는 것이다. 주님의 목소리를 감실에서, 고통받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들어보자. 성체 안에서 우리의 방문을 기다리시는 그분께 우리는 무슨 이야기라도 다 드릴 수 있다. 그분은 나의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3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요한 6,51-59 (가) 나는 살아 있는 빵

    김정진 신부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귀한 성체와 성혈을 주신 것 즉 성체성사를 세우신 것은 바로 수난 전날인 성 목요일인데, 이 날은 다음날에 예수님의 고통을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의 기쁨과 감사의 표시를 충분히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날을 택하여, 즉 오늘과 같은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의 대축일을 맞이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선물에 관하여 감사 드리고, 그 심오한 현의를 생각하고, 우리에게 사랑과 위로를 주시는 신비를 맛들이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첫째로 성체성사는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의 발로이며 사랑의 성사라는 것을 마음 속 깊이 느껴야 하겠습니다. 그 사랑은 조건이 없고 한계가 없습니다. 성체성사의 사랑과 불길은 우리의 온갖 허물과 티와 죄악을 말끔히 불살라 버리고 미지근하고 냉랭한 이 마음에 선과 덕행에 대한 불꽃을 일으켜 줍니다.


    예수님은 <내가 당신들을 고아들처럼 버려 두지는 않겠습니다.>(요한 14,18)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이 제자들과 이별하시기에 앞서 당신의 살과 피란 최고의 선물을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 뿐이겠습니까. <나는 세상 끝날까지 항상 당신들과 함께 있겠습니다.>(마태 28,20)라고 하시며 우리와 같이 언제나 계실 수 있는 놀랄 만한 방법을 우리를 위하여 마련해 주셨습니다.


    즉 성체성사를 세우시고 성당의 감실에 현존하시면서 우리를 언제나 기다리시며 우리와 항상 같이 계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깊은 배려와 사랑을 어찌 이해를 못하겠습니까. 이 같은 사랑과 일치의 신비인 성체께 어찌 우리가 냉정하게 대하고 무관심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오늘 성경 말씀대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삽니다.>(요한 6,56)라고 하셨음과 같이 영성체 하는 이와는 일치의 생활을 도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영성체로 우리에게 내려  오시고 현존으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신자 여러분! 둘째로 성체성사는 우리의 천상 양식입니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빵입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요한 6,58)라고 예수님은 오늘 성경을 통하여 들려주십니다. 정말 성체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활한 빵입니다.


    이스라엘인들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로는, 죽게 되었으나 이 천상 음식으로는 영원히 죽지 않게 되는 기적의 빵입니다. 우리의 인생 항로는 고해(苦海)라고도 하는 힘들고 험준한 비탈길과도 같습니다. 자칫하면 힘없고 기운 빠지고 허기져서 쓰러질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우리 인생의 길이 사막의 길과도 같아서 메마르고 굶주리고 고독합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님은 중도에서 쓰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천상의 생명의 빵을 주십니다. 때때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나 주십니다.


    이 자리에 계시는 신자 여러분! 우리의 생활은 너무나 고달픕니다. 너무나 지쳐 있습니다. 육신 생활보다 우리의 영신생활이나 신앙생활은 사방에서 도전을 받고 있고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 관능주의, 안일과 오락 위주의 경향, 현실주의와 그리고 찰나주의 등은 우리의 신앙을 뿌리부터 뒤흔들어 놓으려고 덤벼듭니다.


    겨자씨와 같은 우리 신앙의 등불은 풍전등화와 같이 가련한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하지만 실망할 것은 없습니다. 좌절감과 실의에 찰 것까지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힘과 위로와 도움을 주시는 분이 항상 우리 앞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곁에는 천상 양식으로 우리를 살찌게 하시고 어떠한 유혹에든지 승리하고 극복해 나갈 수 있는 건강한 영혼으로 길러 주시는 예수님의 성체와 성혈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성체와 성혈을 주실 뿐더러 항시 성당에 계시며 우리를 반가이 맞아들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직자나 수도자나 신자들이나 만일이라도 성체와 성혈과 멀리 떨어져 산다면 그는 자기 생활에서 빛을 잃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날개 잃은 새요, 울 줄 모르는 카나리아나 종달새와 같이 자기 삶의 의의를 상실하고 존재의 가치를 잃은 자입니다.


    오늘도, 아니 이 시간에도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외치십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입니다. 누구나 내 살을 먹지 않고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입니다.>(요한 6,53)라고.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으며 성체 성사를 가까이 하는 생활 습성을 기르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아멘






    4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요한 6,51-59 (가) 나는 살아 있는 빵

    김몽은 신부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초대 신자들 중에서까지도 이 진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걸려 넘어갔다.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 사실 이것을 인간적인 지식으로써 알아들으려 한다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요한 3,6)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요한 6,62-63). “그래서 나는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사람이 아니면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요한 6, 65).


    그리스도의 진리는 원래가 초자연적인 것이다. 따라서 자연적인 면으로만 볼려고 할 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게 된다. 육적인 면에서만 바라볼 때는 어리석게만 보일 것이다.

    특히 성체성사에 대한 가르침은 인간적인 생각으로서는 해득할 수 없다. 우리는 성체 안에 감추어 계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영의 눈으로 바라본다. 지존하신 주님께서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고자 성체 안에 당신의 현존을 보존하신다. 그리고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당신 “살과 피”를 보존하신다.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앙의 신비로써 영속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항구히 그 믿는 자들의 영혼 안에 현존하시어, 함께 살아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믿는 자는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일을 계속하게 된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또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삶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받아, 하늘 나라의 시민으로서,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힘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기에 “믿는 사람에게는 기적이 따르게 될 것인데 내 이름으로 마귀도 쫓아내고 여러 가지 기이한 언어로 말도 하고, 뱀을 쥐거나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을 것이며, 또 병자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마르 16,17-18).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주시기 위해 “최후의 만찬”에서 “성체성사”를 세우셨다. 이에 대해서 복음사가들은 한결같이 전해주고 있다.(마태 26,26-30 : 마르 14,22-26 : 루가 22,14-23 참조). 그리고 사도 바울로는 어떠한 마음으로 성체성사에 임해야 되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곧 주 예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식후에 잔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것은 내 피로 맺은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고, 이것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십시오.”(Ⅰ고린 11,23-26). 우리는 주님의 살과 피를 영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되자.






    5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요한 6,51-59 (가)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위해서>

    박승원 신부


    오늘은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의 대축일입니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의 강생과 부활의 신비와 더불어서 우리 그리스도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그 중심이 되는 신비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생활은 바로 이 성체성사 안에서 그 극치를 이룬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최후의 만찬 이야기들을 통해서 이미 성체가 어떻게 “우리를 위하여 바친 몸”과 “우리를 위하여 흘린 피”가 되었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성체성사가 바로 당신이 우리에게 준, 당신 교회에 남겨주신 얼마나 고귀하고 값진 최고의 선물이며 당신 사랑의 그 증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복음 말씀에서는 당신 자신이 살아 있는 빵으로서 우리의 생명의 양식일 뿐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그리고 마지막날의 부활을 위해서 당신의 몸인 성체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직접 말씀해 주신 이 생명의 빵이란 과연 무엇을 뜻하며, 그리고 이 빵을 먹는다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잠시 교우 여러분들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요한 복음 1장 14절에 보면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사셨는데 은총과 진리가 가득 찬 분이시었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말씀이 사람이 되신, 즉 은총과 진리로 가득 찬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서 이분의 살과 피가 바로 우리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인 것입니다.


    양식이란 무엇입니까? 양식이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즉, 먹고 살기 위한 재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고 계신 생명의 양식, 영혼의 양식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영혼을 살찌게 하고,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며 우리를 진리의 사람으로 만드는, 은총과 진리로 가득 찬 그리스도 자신과 당신으로부터 나온 진리와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먹는, 우리가 모시는 이 그리스도의 몸은 한 잔의 포도주나 한 조각의 빵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생명이 되는 살과 피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빵을 먹는다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가?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은총과 진리로 가득 찬 그리스도를,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리고 그리스도의 정신을 우리의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준행한다는 우리의 신앙적인 결단과 응답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죄악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영신적으로 살찌며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영적인 식사로써 우리의 영혼은 늘 재생하며, 우리의 이기적인 자기 중심성을 벗어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랑하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임재하시는 빵과 포도주를 우리가 먹고 마심으로써 우리의 체내에 흡수되어 육체에서 섭취하는 음식의 자양분이 우리의 몸 안에서 작용하여 점차 살과 피로 그 기능을 발휘하듯이 영혼의 양식도 또한 우리의 영혼 안에서 영혼의 살과 피가 되어 우리의 영혼 생명을 유지하고, 나아가 쇠약했던 영혼의 기능을 회복시켜주고, 우리 덕행의 미흡했던 점과 악습을 고쳐주고 온갖 유혹에서 우리가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인 이 성체를 우리가 영(領)한다고 하는 것은 준주성범에 (나오는) 말처럼 “가난한 자가 천국의 왕에게로, 종이 그 주인에게로, 피조물이 그 조물주에게로, 그리고 아무런 위로가 없는 자가 그의 진실한 위로자에게로” 즉 사랑의 샘이신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우리가 당신의 몸을 영할 때마다 그리스도는 당신이 처음으로 사람이 되사 동정녀의 복중에 내려 임하시는 것처럼,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몸소 당신이 고난을 받고 죽으시는 것처럼 아무런 부족함도 당신은 없으시면서도 당신의 지극한 사랑 때문에 우리와 함께 살으시고자,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시고자 당신의 몸을, 당신의 전실존을 연약하고 미천한 우리에게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당신의 사랑이며 위대한 신비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그대로 받기만(보존만)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나의 살과 피가 되도록,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랑을 꼭꼭 씹어서 나의 살과 피가 되도록 먹어야 되겠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말씀과 이러한 사랑을 우리는 그대로 보고 듣기만 하면,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저 받아 모시기만 하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먹어도 먹지 않은 소화되지 않은 빵과 포도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먹은 이 성체와 성혈이 바로 우리의 생명을 구성하는 활력소가 되도록, 즉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실을 우리의 생활에서 실천함으로써 이를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인 살과 피가 단순한 정신적인 양식으로서의 품목만이 아니라, 우리들이 직접 손으로 집어들고, 눈으로 보기도 하고, 쪼개어 나누어 먹기도 할 수 있는 순수한 실체를 지닌 물질 즉 물리적인 현존인 것처럼 바로 성체가 우리의 육체적인 실존으로서의 참여, 동참을 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질 때 비로서 우리는 영성체의 중요한 효과인 그리스도와의 일치, 그리스도에로의 변형이 우리에게서 현실적으로 이루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사 때마다 그날의 독서와 복음을 그리고 강론 중에서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 그리고 성인들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본받았는가에 대해서 잘 듣고 우리도 그와 같이 되겠다고 하는 원의를 갖고 그리스도의 몸을 모심으로써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양식이란 산자의 음식입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아무리 좋은 산해진미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가 먹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건강 상태가 나쁜 환자는 아무리 좋고 기름진 음식을 주어도 먹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그의 병을 악화시키거나 잘못하면 생명을 위독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병원의 의사에게 가서 처방을 하고 의사의 지시에 따라서 음식을 조절하고 병을 고칠 때까지 음식을 가립니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 영혼의 양식인 그리스도의 몸을 모시는데 있어서는 어떠하겠습니까? 더구나 영혼의 죽음을 뜻하는 대죄중의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에게는 어떠하겠습니까? 그의 영혼에 병을 고칠 때까지 영혼의 양식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와 성혈을 모독하는 독성죄를 범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체를 합당하게 모시기 위해서 먼저 영혼의 건강 상태를 진단해 봐야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이 은총 지위를 잃고 영혼의 죽음상태인 대죄에 놓여 있다고 하면, 먼저 고백의 성사로서 우리 영혼의 병을 치유하고, 우리 영혼의 건강 상태인 은총 지위를 되찾은 후 성체를 받아 모실 바른 지향과 합당한 준비를 갖추고 모신다면, 그리스도께서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의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고 하신 말씀이 바로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성체 전에 성체성사가 지닌 이러한 뜻을 생각하고 합당하게 우리가 성체를 배령할 수 있도록 영육간에 합당한 준비를 항상 해야 하겠습니다. 그럼 오늘의 이 영광된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의 대축일을 다같이 축하하며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멘






    6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요한 6, 51-59 (가) 나는 살아 있는 빵

    <사랑의 정표, 당신 몸을 정표로서 남겨주신 주님께 감사하는 생활>

    윤경철 신부


    우리는 많은 이별의 순간을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군대에 가는 아들, 시집가는 딸, 돈을 벌기 위해 객지나 먼 나라에 가는 아빠나 친척…  작게는 일시적인 이별이 있는가 하면 크게는 사별이라는 이별이 있습니다.


    영원히 함께 살 수 없기에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야 하고, 또한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이별의 아픔이 있습니다. 이별의 순간엔 서로 어디에 가 있든지, 어디서 살든지 몸성히 잘 지내기를 기원합니다.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지마는 마음만은 항상 함께 하고 있기를 바랍니다.


    언젠가는 다시 즐겁고 행복하게 서로가 만나기를 기약하며 항상 잊지 않고 생각하며 살자는 뜻으로 정표를 주고 받습니다. 그것이 이별을 서러워하는 눈물로 얼룩진 손수건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담긴 한 장의 사진이거나 반질반질 닳은 새끼 반지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어 서로 떠나야 하는 이별의 순간엔 정표를 주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듯이 최후의 만찬은 주님께서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먼 나라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나는 아빠들처럼 하늘에 거처할 우리의 집을 마련하기 위하여 죽음의 길을 나서기 전에 사랑하는 제자들과 이별의 자리를 마련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은 이별하지 않으려 하고 항상 함께 있으려 합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가시게 되었지만 우리들을 고아처럼 버려 두시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우리가 간직할 수 있도록 사랑의 정표를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정표는 무엇입니까? 전쟁터로 떠나 보내는 애인이 주는 것과 같은 한 줌의 머리카락이었습니까? 주님이 끼시던 반지, 주님의 옷, 주님의 얼굴이 주님의 얼굴이 담긴 그림이었습니까? 주님께서 주신 것은 바로 당신의 살과 피, 즉 몸이었습니다. 빵과 포도주의 모습 아래 감추어 계시지만 부활하여 우리와 함께 계시는 살아 계신 주님의 몸, 성체를 우리에게 남겨주셨습니다.


    적어도 주일에 한번 모여 주님의 몸을 나누어 먹고 마시는 미사를 거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사 중에 당신의 몸을 주시는 신비를 항상 묵상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성체는 살아 계시는 자신의 몸을 우리가 먹고 마시도록 줌으로써 모든 사람을 자신의 영원한 생명에로 부르시는 성부께 대한 최대의 사랑과 순명을 나타내고 조건 없는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성체를 먹고 성혈을 마시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먹고 마시는 것이기에 영원히 살겠다는 인류의 종교적 염원을 성취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는 말씀과 같이 주님과의 일치요 만남입니다.    또한 이 세상 끝날 때 우리가 참여할 영원한 잔치의 예고이며, 보증이고, 또한 전야제입니다.


    형제 여러분!

    사랑의 정표를 받았지만 마음이 산란하고 미덥지가 않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마도 지금 우리의 눈으로 빵과 포도주의 모습 아래 감추여 계신 살아 계신 주님을 우리가 볼 수 없다는데 있지 않을까요? 우리의 육안으로는 도저히 빵과 포도주의 모습 아래 감추여 계신 주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하얀 빵과 포도주가 보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써 볼 때 참으로 빵과 포도주의 모습 아래 감추여 계신 주님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을 굳건히 하여 주님을 볼 수 있게 아빠, 아버지께 항구히 기도해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사랑의 기쁨과 희망과 약속을 이해할 수 있고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체를 우리 마음에 모셔도 주님을 체험할 수 없을 때 부족한 우리들의 신앙에 대해 주님은 유대인들의 불신에 엄히 책망하신 것과 같이 우리를 책망하여 경고하실 것입니다. “정말 잘 들어두시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않는다면 영원한 생명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아멘.






    7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가해)  하느님을 먹는 사람들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신명 8,2~3.14b~16a (선조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여 주셨다) 

    제2독서 고린 10,16~17 (빵은 하나이고, 우리는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입니다) 

    복 음 요한 6,51~58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 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먹는 사람들입니다. 옛날 로마 시대에 천주교가 여러 세기에 걸쳐서 큰 박해를 받았습니다. 많은 치명자들이 나왔지만 그러나 교회는 마치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로웠습니다. 이때 우리 교회가 박해받는 이유 중의 하나가 어이없게도 신자들이 은밀하게 모여서 어린이들을 잡아먹는다 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대단히 큰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당신의 살과 피를 인간의 음식으로 나눠주셨습니다. 당신의 살을 나눠주시는 방법 또한 실로 오묘하고 신비로웠습니다. 누가 지금까지 이와 같은 사랑을 보여 주었습니까. 막말로 당신의 몸을 송두리째 내어 주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잡아먹도록 섭리하셨습니다. 원하기만 하면 누구에게나 당신은 그 몸을 떼어 주셨습니다. 인간은 이처럼 하느님을 먹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미사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찾아 주시는 최고의 전례이면서 동시에 당신의 살을 음식으로 나눠주시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하느님께 바치는 최고의 제사이면서 동시에 천상의 식사로 불리는 최고의 잔치입니다. 얼마나 크고 놀라우신 하느님의 사랑입니까?


    우리는 주일마다 혹은 매일 주님의 거룩한 성찬에 초대받고 있습니다. 자격도 없는 죄인들이 감히 하느님을 먹기 위해서 모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먹는 우리는 우리도 하느님처럼 그 사랑을 나눠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살까지 먹는 우리가 이웃에게 나누지 않고 베풀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자체로 하느님을 배반하는 것이고 마치 도둑이나 강도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우리의 살과 피를 이웃에게 나눌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갖도록 합시다.


    오, 거룩한 신비여! 하느님의 사랑이여! 이를테면 별 해괴망측한 사이비 종교가 나타나서 인륜을 거스르는 야만적인 집단 행동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로마의 오해요 또한 탄압 구실이었습니다. 교회는 그 시초부터 그리스도의 몸을 서로 나눠 먹기 위해서 함께 모였습니다. 이것은 또 예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루가 22,19. Ⅰ고린 11,23~25참조).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주님께서 들려주신 말씀과 그분의 업적을 가슴에 새기고 또 그것을 실천했으며 성체 성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서로 나눠 먹음으로써 세상을 이기는 힘과 지혜를 얻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실로 생명의 양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살과 피를 서로 나눠 먹는다는 내용이 와전되어 마치 천주교가 사람을 잡아먹는 사이비 종교로 오해되고 조작되었던 것입니다. 오해는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제자들 중에서도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주님께서 ‘생명의 빵’에 대한 설교를 하셨을 때 사람들이 못 알아듣습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 고 내어 줄 수 있단 말인가.’하며 아주 큰 불평과 거부감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게 됩니다(요한6,66). 생명의 양식인 성체는 인간이 좀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하느님 사랑의 신비입니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따지기 보다는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은 먹어야 삽니다.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먹어도 인간은 한계가 있습니다. 부정적으로 얘기하면 먹을수록 죽어갑니다. 제가 미국에 와서 느끼는 것은 사람들이 너무 지나치게 병적으로 먹고 마신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정상적으로 배가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계속 들고 다니면서 먹고 마십니다. 들어갈 곳이 더 없을 것 같은데도 계속 먹습니다.


    사람들은 자주 썩어 없어질 양식에 지나치게 묶여져 있습니다.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이 아니라 마치 먹기 위해 사는 것처럼 그렇게 사람들은 먹어댑니다. 그래서 우리는 왜 하느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까지 우리에게 주셨는지 진지하게 묵상해 봐야 합니다. 사람은 죽습니다. 어떤 음식을 먹어도 죽습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지은 원죄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여기서 인간이 살고자 한다면 무엄하게도 하느님 을 먹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먹는 방법 이외에는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인간이 하느님을 먹습니까?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며 생각만으로도 용납될 수 없는 대죄악입니다. 인간의 미래는 그래서 절망이었습니다. 아주 비참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당신의 살과 피를 인간의 음식으로 나눠주셨습니다. 당신의 살을 나눠주시는 방법 또한 실로 오묘하고 신비로웠습니다. 누가 지금까지 이와 같은 사랑을 보여 주었습니까. 막말로 당신의 몸을 송두리째 내어 주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잡아먹도록 섭리하셨습니다. 원하기만 하면 누구에게나 당신은 그 몸을 떼어 주셨습니다. 인간은 이처럼 하느님을 먹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미사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찾아 주시는 최고의 전례이면서 동시에 당신의 살을 음식으로 나눠주시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하느님께 바치는 최고의 제사이면서 동시에 천상의 식사로 불리는 최고의 잔치입니다. 얼마나 크고 놀라우신 하느님의 사랑입니까?

    우리는 주일마다 혹은 매일 주님의 거룩한 성찬에 초대받고 있습니다. 자격도 없는 죄인들이 감히 하느님을 먹기 위해서 모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먹는 우리는 우리도 하느님처럼 그 사랑을 나눠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분의 살까지 먹는 우리가 이웃에게 나누지 않고 베풀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자체로 하느님을 배반하는 것이고 마치 도둑이나 강도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우리의 살과 피를 이웃에게 나눌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갖도록 합시다. 오, 거룩한 신비여! 하느님의 사랑이여!






    8        성체성혈 대축일 <요한 6,51-58> (가) 삶의 현장에서 주님을 증거하자

    허영업 신부


    주님의 일을 하는 제자들


    나환자들의 성자인 다미안 신부가 나환자 수용소 몰로카이섬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곳은 지옥과 같은 곳이었다. 매일같이 욕설과 싸움이 그칠 줄 몰랐고, 비관에 빠져 자살하는 사람도 많았다. 다미안 신부가 그들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말도 붙일 수가 없었다.

      

    나환자들을 위해 봉사하려는 다미안 신부에게「하느님 사랑 좋아하시네! 하느님이 있다면 우리가 나병에 걸리게 내버려두고, 썩은 채로 죽어가게 하겠어? 만약 하느님이 있다해도 그런 하느님은 못믿겠어. 하느님이 사랑이다 뭐다 하는 것은, 건강한 당신 같은 사람이나 하는 잠꼬대 같은 소리야‥‥」하며 빈정거렸다.

      

    그럴 때마다 다미안 신부는「오 주여! 나로 하여금 문둥병 환자가 되게 하소서. 그래서 이들이 마음을 열고 하느님 사랑을 깨우치게 하소서!」하며 간절히 기도드렸다. 결국 다미안 신부는 자신의 기도대로 나병에 걸려 손바닥이 썩어들어 갔다.

      그 때 그는 「나도 너희와 같은 나병환자다. 비록 육체는 썩어가지만 마음에는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가 있다. 나를 따라 하느님을 믿어라」고 외쳤다.

      

    다미안 신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복음을 선포하고 증거 했다. 드디어 지옥 같은 몰로카이 수용소는 믿음과 평화의 공동체가 되어갔다. 다미안 신부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훌륭한 삶을 살다 나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온 세계는 다미안 신부의 희생과 사랑, 그리고 봉사정신을 오늘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예수님이 뽑으신 제자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여 파견하신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당신의 능력을 나누어주신다. 제자들의 파견은 예수님의 일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뽑으신 제자들의 명단을 보면, 결코 인간적인 능력이나 재능이 많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인간적인 약점도 많고, 무능하고 둔한 사람도 있었다. 세속적인 기준, 즉 좋은 학벌, 명석한 두뇌, 훌륭한 가문 등으로 제자를 뽑으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뽑으신 기준은, 예수님께 대한 헌신적인 사랑이었다고 생각된다.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순수하게 그 말씀을 받아들이냐가 중요한 기준이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축복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일을 하는 이들이었다. 마치 빵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고, 헌신하는 자세가 중요했다. 자신의 능력이나 재능을 믿고 활동한다면. 그것은 자칫 자신을 내세우는 꼴이 되기 쉽다. 자신이 철저히 도구됨을 인정할 때, 가장 훌륭한 제자가 될 수 있다.


           제자들의 복음선포


    부활 후 제자들의 복음선포는 예수님의 선포와 같은 것이다. 「하늘 나라가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는 예수님의 선포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한 제자들도, 내용상 같은 의미이다. 그런데 이 선포는 심판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선포를 받아들이냐의 여부에 따라 구원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음 선포는 종말론적이나 또한 뉘우침과 회개의 기회이기도 하다. 특별히 제자들의 기적행위는 복음선포의 징표와 증거로 사용되었다.

    세례를 받은 우리도 모두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다.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분명하다. 삶의 현장에서 주님의 일을 해야하고, 주님을 증거해야 한다. 물론 우리의 힘으로써가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으로 할 수 있다. 제자들을 판견하시면서 나누어주셨던 당신의 능력을 우리에게도 똑같이 주신다.

    우리가 겸손되이 청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9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요한 6,51-59 (가) 나는 살아 있는 빵

    <나를 잊지 말아다오 - 알고 믿기 전에 사랑해야>

    변기영 신부


    우리 가톨릭 신자들이 가장 이해하기 힘들고 믿기 어려워 하지만 믿어야 할 교리 중의 하나는 바로 성체성사에 관한 것입니다.

    또 7성사 중에서도 가장 빈번히 거해되고 자주 받게 되는 오묘하고 신비로운 기적이면서도 흔히 큰 정성 없이 심지어는 흔히 무심한 태도로 참여하고 소홀히 받게 되기 쉬운 성사 중의 하나가 바로 성체성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성체성사를 알아들으려고만 하고 믿으려고만 하는 그 노력에 치중한 나머지 성체께 대한 사랑과 흠숭에는 크게 부족하거나 혹은 아예 거기까지 도달하지도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신 근본 목적은 무엇입니까? 신자들이 성체를 이해하기 위해서입니까? 성체를 믿게 하기 위해서입니까? 우리는 이제 성체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바라시고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수난 전날 저녁에 성체성사를 세우심은 제자들로 하여금 성체성사의 그 신비 사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나 혹은 믿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을 기억하고 잊지 않고 계속 사랑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시대부터 신자들은 이 성체성사를 ‘사랑의 잔치’, ‘사랑의 식탁’ 등으로 부른 적도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성체성사 건립의 근본 동기와 목적이 ‘그리스도의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과 모든 신자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이들과 현세에서도 늘 영육으로 인성과 신성으로 함께 살고자 하셨고 이들을 사랑하고자 하셨으며 동시에 당신의 제자들과 당신을 따를 모든 제자들이 당신을 사랑해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예를 행함으로써 나를 기념하라”는 말씀은 바로 ‘나를 잊지 말아다오!’ 하는 말씀이요. 이는 다른 말로 ‘나를 사랑하여 달라’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체와 성혈은 우리가 ‘이해’하려고 하거나 ‘신앙’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하려고 해야만 할 성사인 것입니다. 성체성사는 이해와 신앙보다도 우리의 애정을 요구하는 성사이며 존경과 흠숭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성사는 애정과 흠숭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고 신앙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합리주의자들은 흔히 주장하기를 ‘사랑’이란 ‘이해’를 전제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적지 않은 종교인들은 ‘신앙’이 ‘애정’에 반드시 선행해야만 하는 줄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해하기 전에 신앙하기 전에 사랑하게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많은 이들이 모르고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주교가 그의 유명한 신애론(神愛論)에서 사랑의 선행성(先行性)을 말하고 있듯이 순진하고 성실하고 근면한 영혼은 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이해’와 ‘신앙’을 필요로 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순진한 영혼의 진정한 사랑은 ‘이해’라는 조건을 귀찮게 여기며 ‘신앙’이라는 장애물을 짐스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께 대한 참다운 사랑을 가진 자라면 ‘이해’와 ‘신앙’이라는 조건이 짐스럽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들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체를 이해하고 신앙하기 전에 사랑하고 흠숭한다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취해야 할 태도입니다. 외교인들에게서나 요구되어야 하는 조건 즉 ‘이해’와 ‘신앙’을 넘는 ‘신앙인’이 아닌 ‘애인’의 태도가 아쉽습니다.

    그러므로 ‘성체의 그리스도’를 사랑하십시오! 흠숭하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의 성체’를 알게 될 것이고 믿게 될 것입니다. ‘성체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이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기억하게 될 것이고 따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은 영원히 사랑과 흠숭을 받으소서!






    10       성체성혈 대축일 <요한 6, 51-58>(가)   신비의 교리인 성체성사



     5년전 뉴욕타임스에 가톨릭 신자들의 성체에 대해 이해에 관한 설문조사가 실렸었다. 50% 정도의 신자들이 성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심을 믿는다고 응답했다. 나머지는 상징적 의미로 받아들인다고 응답하였다. 이는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나라 신자들은 어떻게 답할까?


    미사 중에 사제가 빵을 축성하면, 예수님의 몸으로 변화된다고! 또 포도주와 물을 섞어서 축성하면 예수님의 피로 변화된다고 정말 믿는가? 확실히 믿는가? 설문조사를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믿기 힘들다고 응답하는 신자들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미사에 참례하는 모습에서 어느 정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질문을 해보자, 과연 성당의 감실 안에 모셔진 성체 안에 예수님에서 확실히 현존하신다고 정말 믿는가? 확실히 믿는가? 이에 대한 응답에도 부정적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만일 신자이면서 이에 의심을 가지고 있으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교회헌장 제11항에 분명히 “그리스도인의 생활전체의 원천이요, 그 절정이 성찬례다”라고 정의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체성사 안에 우리 신앙이 요약되고 집약되므로 이를 부정한다거나 의심한다는 것은 신앙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이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만일 미사 때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하여 영적 양식이 된다는 것을 확실히 믿으면 우리의 미사참례 태도는 달라질 것이다. 더 많은 준비를 한 후, 미사에 임할 것이 분명하다. 또 감실 안에 모셔진 성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을 의심치 않고 믿으면, 우리의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예를 돌면 성당에 자주 오고 싶어할 것이고, 볼일이 있어서 성당에 왔을 때에는 우선 성전에 들어가서 감실 앞에 나가 무릎꿇고 기도할 것이다. 살아 계신 주님께서 거기에 계시기 때문이다.


    신비의 교리


    미사 중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축성한 다음 신자들에게 성체를 주기에 앞서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라고 말하면, 신자들은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성체를 모시려고 나아간다. 비신자들이 이 광경을 보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물론 이성적 논리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어떻게 빵이 몸으로 변했다고 믿고, 그 빵을 받아 먹으려고 눈을 지그시 감고 나가느냐고 빈정댈 것이다. 어떤 이들은 웃기는 얘기라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몸이라고! 분명히 신앙으로 믿고 모시러 나간다. 빵이 예수님의 몸으로 바뀐다는 것은 신비의 교리다. 이는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이 신비의 교리를 받아들이고 믿기 위해서는 신비한 방법이 요구된다 하겠다. 즉 성령께서 비추어주셔야만 이 신비를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다

    성 토마스는 성체 찬미 기도에서 “두가지 허울 안에 분명 숨어 계시오나, 우러러 뵈올수록 전혀 알 길  없사옵기에 ,내 마음은 오직 믿을 뿐이오이다. 보고 맛보고 만져봐도 알 길 없고, 다만 들음으로만 믿음 든든하오니․”라고 하였다.


    그리스도 현존의 양면성


     예수님께선 왜 성체성사를 세우셨을까? 다름 아닌 사랑 때문이다.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제물로 봉헌하신 사랑도 모자라, 그 은혜를 계속 나누어주기를 바라셨다. 이젠 자신의 몸

    을 부수어 우리에게 영혼의 양식이 되고자 자청하셨다, 그러므로 미사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흠앙해야 한다. 예수님께선 우리의 영혼에 양식으로 오신다. 또 감실 안에 계시면서 언제라도 만나고 싶은 사람은 만나고자 기다리신다. 그러므로 자주 미사에 참례함은 물론 성체조배, 성체강복, 성시간에 자주 참석하여 주님을 찬양해야겠다.


    그러나 다른 한면도 잊어서는 안된다. 즉 예수님은 성체 안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가난한 자, 병든 자, 고통 당하는 자 안에도 계신다. 그러므로 성체께 대한 정성을 드리는 만큼 그들에게도 그러한 정성을 드려 예수님을 찬양하도록 해야 한다.


    복음의 메시지

    오늘의 세계는 물질 우선의 세계다. 옛날에는 神 중심의 신본주의 사회였다. 그러다가 프랑스혁명을 거치면서 人間 중심부 세상이 왔고, 이젠 物質 중심의 세상이 되었다. 하느님도 뒷전이고, 인간도 경시되고 있다. 물질을 위해서는 인간의 생명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러한 위기의 시대에 우리는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살아 계시는 주님으로 받들어 모시는 혁명적 신앙을 가져야 한다.


    어떤 이들은 흔히 역사상의 예수님만을 강조한다. 과거 2000년 전의 예수님만을 공부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분은 지금도 살아계신다. 오늘날의 예수님, 살아계신 예수님은 오늘도 성체 안에서, 고난받는 사람들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을 만나야만 우리의 신앙은 살아있는 신앙이 되는 것이다. 주님의 목소리를 감실에서, 고통받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들어보자. 성체 안에서 우리의 방문을 기다리시는 그분께 우리는 무슨 이야기라도 다 드릴 수 있다. 그분은 나의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11    성체성혈 대축일  <요한 6,51-58>(가) 내 살과 피는 참된 양식이며 음료

    사무처 홍보실


    오늘은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이다. 이 축일을 맞이하여 주님의 성만찬의 의미를 살펴보고, 우리가 생활 속에서 그 의미를 어떻게 구현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살아있는 빵(요한 6,51-52절)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51절). 유다인들이 이 말을 듣고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줄 수 있단 말인가?”(52절)라며 대꾸했다. 예수께서 성체성사적으로 언급하신 ‘살’을 유다인들은 신체적인 ‘살’로 오해했던 것이다.

    내 살과 피는 참된 양식이며 음료(6,51-52절)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만 영생을 얻는다고 하신다. 유다인들은 이 말씀을 글자 그대로의 의미, 즉 인육(人肉)으로 곡해했기 때문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요한 복음서 작가는 “인자의 살과 피”로 빵과 포도주의 상징 안에 계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생각했다.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56-57절)    성체와 성혈을 모시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과 불가분의 인연을 맺게 된다고 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56-57절).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은 성만찬의 음식을 매개로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58절)

    예수께서는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며 조상들이 먹고도 죽어간 만나와는 달리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임을 강조하시고 가파르나움 회당에서 뜻깊은 설교를 마치신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미사 때마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나누면서 성만찬 전례를 거행한다. 성만찬의 근본 의미는 오늘 제2독서인 고린토 전서(10,16-17)에 포괄적으로 나타나 있다. “우리가 감사를 드리면서 그 축복의 잔을 마시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를 나누어 마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우리가 그 빵을 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어 먹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빵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만찬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친교요 그리스도인 서로간의 친교의 뜻이 담겨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 이 성만찬을 “빵 나눔”(루가 24,35; 사도 2,42)이라고 부른 것이다. 최후 만찬 때 예수께서 “주는 몸”, “쏟는 피”라고 말씀하신 것은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성만찬의 핵심은 바로 나눔에 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는 오늘 복음 말씀에는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겠다는 결의가 담겨있다. 따라서 성만찬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안에서 서로간의 일치를 위해 나눔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12             성체성혈 대축일  <요한 6,51-58>(가)   생명의 빵

    최인호 베드로/작가


    샤토브리앙(Chateaubriand, 1768-1848)은 프랑스 낭만파 문학의 선구자입니다. 그는 귀족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군대생활도 했었고, 정치가로도 활동했습니다.

    어렸을 때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지만 한때 종교를 부정하기도 했던 그는 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머니와 누이가 희생당하자 가톨릭에 복귀, 호교론(護敎論)의 열렬한 투사가 되어 「그리스도교의 정수(精髓)」란 책을 썼습니다.

    이후 자연에의 동경, 연애지상주의적 정열, 허무주의적 번민 등을 화려한 필체로 묘사함으로써 낭만주의 문학을 꽃피우기도 했습니다. 말년에는 방대한 자서전 「무덤 저편의 추억」을 집필하였는데 이 자서전에는 15살 때 첫영성체를 했던 자신의 기억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는 부활절 전주 수요일에 판공성사를 받으러 가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날이 저의 첫영성체 전날이었기 때문이지요. 저는 철야기도를 열심히 하면서 미리미리 준비했습니다. 성당에 도착하여 저는 성체를 모신 감실 앞에서 완전히 도취된 채 무릎을 꿇었습니다. 제 차례가 왔을 때 저는 마지막으로 올바르게 고해하고 거룩한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 고해실로 들어갔습니다. 온몸이 떨려서 무릎을 꿇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스스로 놀랄 정도의 용기와 믿음을 가지고 모든 것을 고백했습니다. 이제 제 영혼을 압박하던 어떤 부담감도 떨어져 나갔습니다. 커다란 기쁨이 제 마음속에 스며들었습니다.

    이런 축복과 사랑이 언제나 저를 감싸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흐느꼈습니다. 그것은 참회의 눈물이었고 천국의 행복감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의 눈물이었습니다.”

      하루 뒤인 성목요일에 샤토브리앙은 마침내 첫영성체를 했습니다. 그때의 기쁨을 그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빵과 포도주의 겸허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당신을 내어주시는, 하늘과 땅의 왕이신 주님께 저 자신을 바쳤습니다. 성찬례 때 진실로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신 것을 마치 어머니가 옆에 같이 계신 것처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입을 벌려 성체를 받았을 때 저는 제 자신이 축복을 받는 상태로 변한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감격과 경외심으로 몸이 떨렸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제 마음속에 불을 붙여주셨기 때문에 하느님을 공경하기 위해 마치 순교자처럼 기꺼이 제 생명을 바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6,51).”

    샤토브리앙은 빵과 포도주의 겸허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주시는 주님을 첫영성체 함으로써 자신이 축복받은 상태로 변화했음을 느꼈던 것입니다.

    우리는 매주일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참생명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다만 밀로 만든 떡을 먹는 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3. user#0 님의 말:

     

    1. 임승욱 요한금구

    가.  성체 성혈 대축일


    1. 제1독서 주석 : 신명 8,2-3. 14b-16

      2-3절 :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십 년 동안 주님께서 인도하신 길을 ‘기억하라’고 말한다(히:‘자카르’, 공동:‘생각해 보아라’). 주 하느님의 구원 행위를 언제나 ‘기억’하고, ‘현재화하는 것‘은 하느님 백성의 의무이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굶주림과 목마름, 더위와 추위, 외적의 침공을 겪도록 허용하신 이유는, 이 백성을 낮추심으로써 그들이 주 하느님 외에는 의지할 곳이 없음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


      14b-16절 : 모세는 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에집트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시고 위험한 광야의 길을 무사히 지나가게 인도해 주셨으며 만나와 물을 주신 사실을 잊지 말라고 가르친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 주님의 은혜로 잘 살게 될 때, 마음이 교만해져(14ㄱ절) 자신이 누리는 풍요로운 생활이 스스로의 능력과 힘으로 이룬 것이라는 착각을 해서는 안된다(17절). 이스라엘이 자유로운 백성으로 좋은 집에서 배불리 먹으며 많은 재산을 모으게 될 때에도 결코 주 하느님을 잊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들이 가지고 누리는 것은 모두 주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잊다’(히 : ‘샤카흐’)는 ‘기억하다’의 반대이다.

      주님을 ‘기억하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계명을 지키며 그분을 충실히 섬기는 것을 뜻한다. 반대로 주님을 ‘잊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고 계명을 무시하며 그분을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을 뜻한다(19절). 주 하느님을 잊지 않을 때는 복이 따르지만, 그분을 잊으면 멸망이 따를 뿐이다(19-20절). 만나의 기적은 이스라엘이 이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해 주는 징표이다.


    2. 제2독서 주석 : 1고린 10,16-17

      우리는 성체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고 바오로 서간은 자주 언급한다. “이것은 내 피로 맺은 새로운 계약의 잔입니다”(11,25). “피”는 계약으로써 하느님과 인간의 생명 공동체를 이루어 준다. 최후 만찬 때 성체성사가 제정된다. 빵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살과 피로, 이를 먹고 마시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과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즉 ‘성찬’(Kommunion)이 의미하는 ‘함께 먹고 마심’은 구약성서에서 하느님과 유다 백성의 연대성을 말해 주는 ‘계약’의 개념을 대체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교도들이 그들의 신에게 제물을 바침으로 우상과 상종하게 되는 것에 대한 반대의 뜻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성체를 통한 각자의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또한 다른 모든 사람과의 공동체를 이루어 준다. 이 공동체는 개인들이 모인 연합체가 아닌 하나의 유기적인 기관을 의미하는 ‘몸’인 교회이다 : “우리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우리 많은 사람이 다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17절). 즉 성체는 빵과 포도주의 축성을 통하여 교회를 이루는 성사가 된다. 감실에 축성되어 보존되어 있는 빵을 중심으로 모인 작은 성찬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을 표징적으로 나타내면서 신비체로서의 교회를 잘 보여 준다. 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닌, 이른바 우상의 식탁에 모인 자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모습을 나타낸다.


    3. 복음 주석 : 요한 6,51-59

      요한복음 6장은 요한 복음서에서 가장 중요한 장 중의 하나이다. 전부 71절로 된 긴 장인데 무엇보다도 성체성사에 관한 담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긴 담화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첫 번째 담화는 ‘생명의 빵의 담화’이고(35-50절), 두 번째 담화는 ‘성체 성사적 담화’라고 한다(51-58절). 오늘 복음은 바로 이 성체성사적 담화이다.


      51-58절 : 이 담화는 표현이나 내용면에서 바로 앞의 ‘생명의 빵의 담화’와 직접적인 관련을 갖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담화에서 당신을 “생명의 빵”, “하늘에서 내려온 빵”으로 당신을 계시하셨지만, 이제 한 차원을 뛰어넘어서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말씀하신다. 당신의 살이 참된 양식이며 당신의 피가 참된 음료라는 것이다.


      51절 : 51절은 35절의 반복이다. 단지 35절의 “생명의 빵”이 51절에서는 “살아 있는 빵”으로 표현되었을 뿐이다. “살아 있는 빵”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 이 표현이 성체성사에 더 적합한 것 같다. 35절에서는 ‘예수님께로 가는 이는 굶주리지 않을 것’이라고 되어 있지만, 51절에서는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믿고 가는 것’에서 이제 ‘먹는 것’으로 옮아갔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결정적인 말씀을 하신다. 당신이 주실 빵은 바로 당신의 “살”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께서는 자신의 인격, 즉 자기 자신을 자기 형제들에게 내어 주신다. 예수님께서 먹으라고 내어 주신 “살”은 최고의 봉헌의 행위를 통해 표현된 구속과 사랑의 모든 힘이 믿는 이들에게 베풀어지도록 하기 위해 봉헌된 ‘희생의 음식’이다.

      

      52절 : 유다인들은 “살”에 대한 언급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면서 서로 따졌다.

      53절 : ‘살을 먹는다’라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유다인들 사이에 혼란이 일어나 서로 따지고 있는 판에 예수님께서는 더욱더 분위기를 무겁게 하는 충격적인 양식으로 말씀을 계속하신다. 당신의 살을 먹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피까지 마셔야 함을 강조하신 것이다. 당신의 살은 “참된 양식”이며 당신의 피는 “참된 음료”라고 하신 것이다(54절). 성서에서 ‘살을 먹는다’는 표현은 적개심과 복수에 가득 찬 행동의 은유적인 표현이다(시편 27,2; 즈가 11,9). 인간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가혹한 행위를 말할 때나 원수에 대해서 처절한 복수를 말할 때나 쓸 수 있는 말이다.

      

      54절 : 53절의 반복이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53절에서 3인칭(사람의 아들)을 쓰면서 부정적으로 서술했던 것을 이제 1인칭(내 살, 내 피)을 사용하면서 긍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는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는 예수님 당신의 ‘살과 피’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같은 내용을 반복하시는 것은 우리가 모시는 성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실재(實在)하신다는 사실을 재삼 강조하시려는 것이다.

      

      56절 : 56절은 54절의 반복이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아들과 긴밀한 일치로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의 선물과 종말의 부활을 구체화하고 있다. 이 절의 전반부는 54절과 글자 그대로 일치하는데, 후반부는 성체성사적인 잔치의 열매 – 즉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면 그분 안에 머물고 그분도 그 안에 머문다는 – 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성체를 모심으로써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에 생명의 일치가 이루어진다.

      

      57절 : 이 절에서 예수님의 살을 먹는 자가 어떻게 생명에 도달하는가를 보여 준다. 아버지께서는 생명의 원천이시다. 아들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살고, 그 아들을 먹음으로써, 즉 그와 밀접한 일치를 통하여 생명의 원천으로 나아갈 수 있다.

      

      58절 :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신 생명의 빵이시며 조상들이 먹고도 죽어간 만나와는 달리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이심을 강조하시고 가파르나움 회당에서의 설교를 끝맺으신다.


    4. 이주일의 초점

    1) 성체와 성혈의 의미를 설명한다.

    2) 성찬례가 단지 빵의 나눔이나 상징이 아닌 진정으로 예수님의 몸과 피를 내 안에 모시는 것임을 설명한다.

    3) 예수님을 모심으로서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를 제시한다.

     임승욱 요한금구


    강론 : 성체 성혈 대축일


      찬미 예수님!

      

      한 주일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오늘은 성체성혈대축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에서 40년 동안 생활하면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신 여러 가지 표징 중에서도 만나를 먹게 해 주셨다는 말씀이 나오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의 체험 안에서 하느님께 대한 여러 가지 체험과 깨달음을 얻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큰 체험과 깨달음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속한 백성이라는 체험과 깨달음이었습니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궁핍을 통해서,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축복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식을 하느님께서는 성숙도 시키시고 시험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만나는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속해 있는 것을 나타내는 표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헤 메이던 광야의 여정은 많은 고난과 불안정으로 가득 찬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광야에서의 자유는 이집트에서의 비참한 종살이보다 나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바로 인간존재가 바닥의 공간에까지 떨어졌을 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방법으로 그들을 당신께로 이도해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음식과 물이라는 생명과 연관되는 양식의 제공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살펴주시고 사랑해주신다는 표징이었습니다. 즉 인간은 세속적인 양식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말씀으로도 살아간다는 더 큰 사실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 하느님의 은혜로 잘 살게 될 때, 마음이 교만해져 자신이 누리는 풍요로운 생활이 스스로의 능력과 힘으로 이룬 것이라는 착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그들이 가지고 누리는 모든 것은 주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상 숭배를 경고하면서 이교도들이 바치는 제물과 구별되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가 축복하는 잔과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피와 몸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함께 나누어 먹고 마심으로써 우리는 한 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잔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보장받은 은혜를 나누고 또 다 같이 그러한 은혜에 동참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수단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제 빵을 떼고 한 빵을 나누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부활 이후에 다가오는 새로운 세대에 들어가게 될 수 있으며 모든 사람들과 한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함께 먹고 마심’은 구약에서의 하느님과 유다백성의 연대성을 말해주는 ‘계약’의 개념을 대체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교도들이 그들의 신에게 제물을 바침으로 우상과 상종하게 되는 것에 대한 반대의 뜻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성체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다른 사람들과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이 공동체는 더 이상 ‘나’와 ‘너’가 아닌 ‘우리’의 모습으로 ‘교회’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피와 같은 몸을 나누어 마시고 먹기 때문에 여럿이지만 한 몸이요, 곧 그리스도의 신비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몸과 피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미사 때 영성체를 하는 예수님의 몸은 단지 밀떡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받아 모시는 성체는 제1독서에서 만나가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과 연관되어지는 양식이었듯이, 바로 우리를 영적인 생명을 이어가게 하는 힘을 주는 예수님의 몸이고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의 표현 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영성체를 할 때 사제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면 ‘아멘’이라고 대답합니다. 이때 우리가 고백하는 ‘아멘’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참으로 그렇습니다’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약하고 부족한 존재이기에 때로는 예수님의 몸을 습관적으로 받아 모시는 경우가 많이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다음의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이렇게 인간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인격, 즉 자기 자신을 우리들에게 내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주신 당신의 ‘살’은 최고의 봉헌의 행위를 통해 표현된 구속과 사랑의 모든 힘이 믿는 이들에게 베풀어지도록 하기 위해 봉헌된 ‘희생의 음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참여하는 미사성제는 먹고 마시는 인간의 가장 간단한 행위로 집전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하느님과의 일치와 아울러 신자들 상호간의 일치라는 인격적인 기쁨을 동시에 느끼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의 몸이 습관적으로 세상의 기준에 따르며 살아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아니 바로 나에게 당신의 몸과 피를 주시고 계십니다. 이 세상의 음식은 아무리 맛난 음식이라도 먹어도 순간이며 허전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아니 세상의 음식만이 그러하겠습니까?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세상의 모든 것은 물질이 되었든, 아니면 명예가 되었든 간에 육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은 불완전하고 유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지금 주어지는 세상에서 살아갈 때, 육적이고 세속적인 것들만을 추구하며 살아간다면 우리에게 예수님의 몸과 피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성체를 내 안에 모실 때 단지 나의 시선과 행동으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밥이 되어 오신 예수님께서 내 안에 함께 사신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새롭게 시작하는 은총의 한 주간을 지내며 우리의 생활 안에서, 사람들과의 만남 안에서 우리에게 아니 바로 나에게 오시는 그 분을 알아보고 받아들이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가 생활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고 예수님을 드러내는 일이 무엇인가를 찾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신 존재로서 이웃을 향한 무관심이 아닌 관심과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랑이 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는 것은 또 다른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무관심에서 관심으로, 개인주의에서 공동체 의식으로의 전환이며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함께 하는 우리의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이 사랑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우리의 생활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실천하고 계시겠지만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에 작은 정성이라도 후원을 해주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이러한 모습, 즉 ‘나’와 ‘너’가 아닌 ‘우리’가 되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가 그 분께 드리는 그 어떠한 것보다도 귀한 예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나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고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할 때 ‘나’안에도 예수님께서는 머무르실 것입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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