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1주일

 



연중 제11주일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제1독서: 탈출기19,2-6a

제2독서: 로마 5,6-11

복음: 마태 9,36-38 ; 10,1-8



오늘의 제 2독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어주신 구원의 절대적 ‘무상성’에 대한 바울로 사도의 논증이 담겨 있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깊은 내용을-지난 주에 이어-계속 전해주고 있다.

 반면에, 제1독서와 복음은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완전히 무상으로 베풀어주시는 그 자비로운 사랑에 대한 아주 구체적인 예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오늘 전례의 독서들 상호간에는 밀접한 관계가 성립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그 관계를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개념에 관련시켜 이해할 수도 있다.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개념은 하느님께서 “뭇민족 가운데서 당신 것”(탈출기19,5 참조)으로 택하신 옛 이스라엘을 의미하기도 하고, 교회라고 하는 ‘새’ 이스라엘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수께서는 그 교회를 한편으로는 새로운 믿음의 공동체의 시조들인 열두 사도들의 선택으로써 예시하고 계시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당신 제자들을 보내어 세계도처에 세우고 계시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 일을 팔레스티나 지방에서부터 시작하신다 :“이방인들이 사는 곳으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삶들의 도시에도 들어가지 말라. 다만 이스라엘 백성중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마태 10,5-6).



“너희가 나의 말을 듣는다면 너희야말로 ant 민족 가운데서 내것이 되리라”



제 1독서는 출애굽기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 가운데 몇 구절을 소개하고 있다(19,2-6a) : 시나이산의 계약(19-24장)의 서문과도 같은 그 구절들 속에는 또한 계약 자체의 유효성에 관한 ‘조건들’도 내포되어 있다 :“너희가 나의말을 듣고 내가 세워준 계약을 지킨다면, 너희야말로 ant 민족 가운데서 내것이 되리라…”(5절).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간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에 사랑과 성실성을 요구한다 : 따라서 사랑과 성실성에 의한 응답이 없는 곳에서는 하느님과 이스라엘과의계약도 무너지고 만다. 사도 바울로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9-11장에 걸쳐 지극한 번민 속에서 염려하고 있는 선민의 패망은 이러한 차원에서 설명된다.

 하느님과 그분의 새 백성인 교회의 계약도 교회가 그 새로운 계약“의 요구에 불충실한다면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사도 바울로는 옛 이스라엘의 뒤를 이어 선택되었다는 느낌으로 얄팍한 정신적 안도감 속에 빠지기 쉬운 로마의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다시 상기시키고 있다 :\”그러니 여러분은  두려워할지언정 자랑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원 가지들도 아낌없이 잘라내셨으니 여러분들도 아낌없이 잘라버리실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시기도 하고 준엄하시기도 하다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거역하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시지만 여러분에게는 자비로우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이 하느님의 자비를 저버리지 않을 때에 한한일이고 그렇지 못할 때에는 여러분도 잘려 나갈 것입니다”(로마 11,20-22).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랑에 협력하기만 한다면 이방인들에게조차 당신의 구원계획을 이루어 주시리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원 교회는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개개 그리스도 신자들은 물론 지상 교회들 역시 역사가 폭넓게 극적으로 증명해주고 있듯이 무너질 수도 있고 나약 해질수도 있다. 이스라엘의 비극적 체험은 대표적 본보기로서 교회는 그것을 보다 신중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 이후 구원이 더 쉬워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제시하고 있는 그 드높은 목표 때문에 더 험하고 어렵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베풀어주실 바에 대한 보증으로서는 그분이 이미 행하신 일을 들 수 있다 :“너희는 내가 이집트인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너희는 어떻게 독수리 날개에 태워 나에게로 데려왔는지 보지 않았느냐?”(4절). ‘독수리’라는 표상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 종살이로부터 구해내시기 위해 행사하신 강한 힘과 온유함의 의미를 상기시켜주고 있다. 모세의 찬미가에 나오는 다음의 아름다운 구절들을 읽어보라 :“야곱을 만신 것은 광야에서였다. 스산한 울음소리만이 들려오는 빈 들판에서 만나, 감싸주시고 키워주시며 당신의 눈동자처럼 아껴주셨다. 독수리가 보금자리를 흔들어놓고 파닥거리며 떨어지는 새끼를 향해 날아 내려와 날개를 펼쳐 받아 올리고 그죽지로 업어 나르듯 야훼 홀로 그를 인도해주실 때, 어느 다른 신이 그와 함께하였더냐?”(신명 32,10-12).

 계약으로인하여 이스라엘은 “뭇 민족 가운데서”(5절)하느님의 ‘특별한’ 소유물이 되었다 :그분의 선택은 온전히 무상이지, 이스라엘이 공로가 있어서거나 또는 힘이 세거나 수효가 많거나 번영하였다거나 하는 등의 인간적 가치 때문만이 아니다 :“야훼께서 너희를 택하신 것은 너희가 어느 민족들보다 수효가 많아서 거기에 마음이 끌리셨기 때문이 아니다. 사실 너희는 어느 민족보다도 작은 민족이다. 다만 너희를 사랑하시고 너희 선조들에게 맹세하신 그 맹세를 지키시려고 야훼께서는 당신의 강한 손으로 너희를 이끌어 내신 것이다”(신명 7,7-8).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차별대우가 아니라 ‘대리자’로서의 선택이요 또한 기운을 북돋워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증거하고 알려야 할 하느님 사랑의 ‘표지’가 되어야 한다.



 “너희야말로 사제의 직책을 맡은 내 나라가 되리라”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거듭 맺고 지켜나가야 할 그모든 계약 때문에 부여받고 있는 부차적인 특성들도 더 잘 이해가 될 것이다 :“너희야말로 사제의 직책을 맡은 내 나라, 거룩한 내백성이 되리라”(6절).

 사제직은 예배와 전례거행의 개념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사제의 직책을 맡은 나라’로서 자기 백성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민족들의 창조적 역사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놀라운 신비들을 고양시켜야 할 ‘전례적’ 목적을 지니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시편으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노래를 주께 불러드리라, 온 누리여, 야훼께 노래 불러라. 당신의 영광을 백성에게, 그 기적을 만백성에게 두루 알리라”(시편 95,1.3).

 또 이스라엘은 다음 두가지 의미에서 ‘거룩한 백성’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특별한 모습으로 주님께 봉헌되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 몸바친 거룩한 백성이 아니냐?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는 세상에 민족이 많지만 그 가운데서 너희를 뽑아 당신의 소중한 백성으로 삼으신 것이다”(신명 7,6).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은 그들을 사랑으로 택해주신 하느님께 합당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거룩한 삶을 진실되이 실현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 “나 야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레위 19,2 ; 11,44-45 ; 17,1 참조).

 구원의 질서의 변천과정속에서 초기 그리스도 신자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새로운 계약’(루가 22,20 참조)의 구성원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또한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복음을 거부한 이스라엘 백성의 행위로 말미암아 중단됨이 없이 그들안에 지속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이 모든 나라와 언어와 종족으로 이루어진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묵시록에서 네 생물과 스물 네 원로들이 죽임을 당한 어린양을 향해 부르는 노래의 내용이 곧 이에 관한 것이다 :“당신은 두루마리를 받으실 자격이 있고 봉인을 떼실 자격이 있습니다. 당신은 죽임을 당하셨고 당신의 피로 값을 치러 모든 민족과 언어와 백성과 나라로부터 사람들을 구해내셔서 하느님께 바치셨습니다. 당신은 그들로 하여금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한 왕국을 이루게 하셨고 사제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들은 땅 위에서 왕노릇 할 것입니다”(묵시 5,9-10 ; 1,6 참조).

 또 사도 베드로는 이와같은 사실을 소아시아의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아주 위엄있게 그리고 강한 어조로 상기시키고 있다 :“그러나 여러분은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두운 데서 여러분을 불러내어 그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해주신 하느님의 놀라운 능력을 널리 찬양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하느님의 백성이며 전에는 하느님의 자비를 받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분의 자비를 받게 되었습니다”(1베드2,9-10).



 “그때에 예수께서는 목자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허덕이는 군중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이 드셨다”



아주 흥미로운 오늘 복음은 어째서 교회라는 이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 단순한 무정형의 획일적 집단이 아니라, 존립하고 성장하고 그리고 확장을 가져다주는 봉사의 조직과 각기 구별된 ‘직무’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집단인지를 이해 시켜주고 있다. 사실,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직무를 가지고 있고 또 서로서로에게 개방되어 있으며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부여하신 역할을 인식하는 그런 곳이 아니라면 참된 하느님의 ‘백성’은 이루어 지지 않는다.

 물론, 그 이유는 오직 하느님만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불러 모으시는 교회안에서는 그분만이 봉사의 직무 특히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고 감독하는 직무를 맡기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때, 교회는 본래의 의미에서 ‘신정적’(神政的)인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해, 하느님만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의 주인이 되신다. 또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완전한 칭호는 ‘그분의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교회 안에서 중개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권한’을 그분을 대신하여 행사할 수 있고 또 “이스라엘 백성 중의 길 잃은 양들”(마태 10,6)을 고통중에서도 열렬히 찾아나서는 사랑의 봉사직을 계속 이어갈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결코 그분의 권리와 특권을 침해하고나 차지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교회의 이러한 봉사적 특성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총칭적 개념은 ‘사도적’이라는 개념이다 :베드로, 안드레아, 요한, 바울로 등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파견하시고’ 또 그들이 자신들에게 부여된 ‘전교사명’을 수향함으로써만이 의미를 갖게 되는 명칭들이다.

 마태오에 의한 오늘 복음(9,36-38 ; 10,1-8)은 이에 관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오늘 복음은 소의 ‘파견사’-10장에서 전개되는데 그 일부(10,26-33)는 다음 주일에 접하게 된다-의 서문과 더불어 열두 제자의 ‘전교사명’에 관해 기술하고 있다.

 먼저, 머리말(9,35-38)에서 우리는 그때까지 펼쳐진 예수의 활동이 요약되고 있으며 동시에 열두 사도들의 부르심과 그들의 첫번째 파견의 근거가 제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때에 목자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허덕이는 군중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그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하여라’”(9,35-38).

 이 대목에는 두 개의 상징적 개념이 겹쳐서 나오는 데 그 하나는 목자없는 ‘양’에 관한 것이고(36절), 다른 하나는 추수할 사람은 얼마 안되는 데 비해 거의 무한하다 할 만큼 많은 “추수 할 것”에 관한 것이다(37절). 그렇지만 두 사실의 결과는 극적으로 일치된다 : 만일 적절한 때에 양들을 목장으로 인도하여 맹수들로부터 지켜줄 목자들이 오지 않는다면 그 양들은 지쳐 쓰러지거나 이리떼의 먹이가 될 위기를 맞게 될 것이며, 만일 추수할 사람들이 늦게 오거나 또는 ‘하느님의 백성’이 되도록 불림을 받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요청에 훨씬 못미치는 수효가 오거나 하면 이미 거둬들일 때가 된 ‘농작물들’은 들판에서 썩어버리거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릴 위험에 처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은 극적인 방법으로 당신이 당신 구원 사명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협력자들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피력하고 계시다. 적어도 그 구원사명이 모든 시대, 모든 장소, 모든 문화, 모든 종족의 사람들에게 펼쳐져야 한다는 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께서도 감당하기가 어려우신가 보다! 오직 ‘추수의 주인’이신 천상 성부만이 그분이 원하시는 ‘일꾼들’을 보내줄 권한을 갖고 계시다. 하지만 그분은 사람들이 그분께 요청해야만 그 일꾼들을 보내주신다(38절).



 “추수 주인에게 청하여라”



그러므로, 구원사명에 관한 모든 것은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고 그분께로부터 온다. 아무도 스스로 목자가 될 수 없으며 양들도 스스로 자신의 목자를 선발할 수 없다! 다만 목자를 청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청해야 한다. 아니 보내달라고 간청해야 한다는 말이 더 옳다 :“그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하여라”(38절).

 그러나, 어째서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하느님께 청해야 하는가? 그분이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또 그분이 추수의 주인이면 어째서 그분이 직접관여하지 않으시는가? 우리가 요청한다는 그 자체가 모순이 아닌가?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 있는데 인간들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하라는 권고에는 매우 타당한 이유가 있다 :‘추수’가 하느님께 속하는 일이고 ‘일꾼들’도 그분께 속하는 것은 분명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러나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필요로 하고 또 그들의 자유로운 협력을 요구하신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때 ‘청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우리가 하느님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하늘로부터오는 모든 가르침을 받아들일 마음 자세를 갖게 한다. 따라서 ‘청하는’ 사람은 만일 하느님이 그를 부르신다면 파견될 마음자세를 이미 갖추고 있는 사람이다!

 교회는 바로 이런 길을 통해서만이 오늘날 매우 심각해지는 사제성소와 수도성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즉 신자 공동체 전체가 그분께 추수의 일꾼들을 보내주시기를 청하면서 만일 그분이 바로 우리 자신을 형제들의 구원을 위해 파견하고자 하신다면 사도들의 모범을 따라 이내 응할 마음의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그들을 파견하셨다”



 10,1-8에서는 “열두 제자들의 부르심”과(10절) 뒤이어 즉시 ‘사도들’의 이름이 불리고 있는데(2절), 사도들이라는 말은 희랍어로 ‘파견된 자들’이라는 뜻으로, 말할 것도 없이 예수께서 바로 그 순간에 그들에게 부여하시는 ‘전교사명’에 연결되어 있다. 다른 두 공관 복음서에서는 사도들의 부르심과 그들의 파견이 따로 떨어져 있다(마르 3,13-19 ; 6,7-13 ; 루가 6,12-16 ; 9,1-6).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예수께서 이 열두 사람을 파견하시면서 이렇게 분부하셨다. ‘이방인들이 사는 곳으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에도 들어가지 말라. 다만 이스라엘 백성 중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사람은 고쳐주고 죽은 사람은 살려주어라. 나병환자는 깨끗이 낫게 해주고 마귀는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10,1-8).

 5-6절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께서는 당신 사도들의 전교사명을 다만 “이스라엘 백성 중의 길 잃은 양들”에 제한하고 계시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지상생활을 하시는 동안 처음으로 행하신 ‘파견’의 모습을 접하고 있다 : 그 복음선포가 명백히 보편적으로 펼쳐지는 것은 주님의 부활 후에야 실현된다(28,19 참조). 그러므로 이 이야기의 역사성은 분명하다. 즉 주님의 부활 이전의 사실이다.

 고찰해야 할 또 다른 흥미로운 사실은 사도들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구원의 선포 그 자체를 반복하고 있고(“가서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여라”:7절 ; 4,17절 참조), 또 구원적 행위 그자체를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다(“앓는 사람은 고쳐주고 죽은 사람은 살려주어라. 나병환자는 깨끗이 낫게 해주고…” : 8절). 이것은 예수의 활동과, 여기서 열두 사도들-열둘이라는 숫자는 성조들이 이루고 살던 옛 이스라엘이 사도들과 그들의 활동을 통해 이어지고 있음을 뜻한다-에 의해 대표되고 있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예시되고’ 있는 교회의 활동이 서로 단절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예수께서는 복음선포를 구원의 구체적인 활동과 밀접히 결합시키고 계시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사실은 “오직 말과 행동의 일치에서만 하느님의 나라가 드러난다”(J. Jeremias)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하겠다. 사도로서의 역할이 매우 어렵고, 그래서 많은 삶들이 겁을 집어먹고 뒷걸음질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해야 한다”(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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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1주일에 1개의 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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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11주일



             1. 최기산 주교(가)/ 2                2. 최봉원 신부(가)/ 4

             3. 병의 승화(가)/ 6                  4. 김창석 신부(가)/ 7

             5. 허영업 신부(가)/ 9                6. 교구 주보(가)/10

             7. 최인호 작가(가)/11               

    1         연중 제11주일   마태 9,36-10,8 (가) 이 시대의 사도

                                                            최기산 주교


     대통령이 특사를 뽑아서 보낼 때는 잘난 사람을 뽑아서 보내기 마련이다. 적어도 대통령의 의중을 분명히 깨닫고 그의 뜻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큰 회사의 사장을 대신하여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도 그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배움도 부족하고 주변머리도 부족한 사람이거나 말솜씨도 거칠고 침을 아무 데서나 뱉는 사람이 특사나 대변인으로 채용되면 지나가던 개도 웃을 것이다. 더구나 그가 횡령을 하고 깡패처럼 칼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들 말할까! 한심하다고 말할 것이다. 안나오는 기침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12사도


    예수님께서는 늘상 연민의 정으로 가득 차 계셨다. 고난받고 있는 사람들이 안쓰러워 바삐 움직이셨다. 이 동네 저 동네 다니시며 병든 자를 치료하셨고 마귀 들려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서 마귀를 쫓아버리셨다. 그분은 인간들이 참 자유를 느낄 수 있도록 즉 병고로부터의 해방, 고난으로부터의 해방, 악마로부터 해방되기를 늘 갈망하셨다. 예수님은 병 고치는 일을 혼자 하셨다. 혼자의 몸으로 여러 지방에 있는 사람들을 동시에 고치실 수 없으시기에 늘 마음 아파하시며 제자들을 뽑으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뽑으신 제자들은 특사로 보내기에는 너무나 인간적으로 부족했다. 그야말로 어중이떠중이들이 뽑혔다. 참으로 의외의 인물들이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어부들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어부들은 어군 탐지기나 무전기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아무나 어부가 될 수가 없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시대의 어부들은 대부분 문맹이고, 가난하고 예의 없고 거칠었다.


    특히 갈릴래아 사람들은 이스라엘에서도 하층민이었고 천한 말을 즐겨했다. 어부가 아니더라도 마태오 같은 사람은 세리였다. 당시 세리는 세금을 거둬 로마에 바쳤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았다. 또 그들은 세금을 슬금슬금 횡령하여 자기네 배를 채웠다. 예나 지금이나 시체가 있는 곳에 까마귀가 모이고 돈이 있는 곳엔 유혹이 뒤따르고 부정이 난무하게 마련이다. 시몬은 어떠한가? 그는 혁명당원 출신이었다. 그는 로마인들을 박살내겠다며 칼을 품고 다니는 무리 중의 하나였다.


    유대의 경우에도 혁명당원 출신이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뽑으신 제자들은 다 시원찮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용감하지도 못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했고 예수님께서 잡히셨을 때는 모두 줄행랑쳤다. 어쨌든 이런저런 상황으로 볼 때 예수님은 시시한 사람들을 제자로 뽑으셨다.


    왜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제자로 뽑으셨을까? 여러 가지 가설을 내세울 수 있다. 우선 부족한 사람들을 뽑아야 전적으로 주님만을 의지할 것이기에 그들을 뽑으셨을 것이다.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은, 잘난 사람은 오만해져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기는커녕 자신의 영광을 탐하게 될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부족한 사람도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시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주님께서 만일 잘난 사람만을 뽑으셨다면 부족한 사람들은 자신의 부족을 늘상 한탄하며 살 것이다. 부족한 사람도 희망은 있다. 부족한 사람을 주님은 사랑하신다. 아흔 아홉 마리 양보다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더 염려하시는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절대 절망에 빠져서는 안 된다. 자신의 부족함을 비관해서도 안 된다.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든 어떤 상태에 있든 주님은 남들과 똑같은 사랑을 주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이 시대에 누구를 사도로 뽑으셨는가? 일차적으로 성직자들이다. 성직자는 예수님의 특사로서 대변인으로 뽑혔다. 아마도 부족한 인간을 뽑으시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인사정책이기에 변하지 않을 것이다. 만에 하나 ꡒ나는 잘난 사람이기에 당연히 뽑힐만하기에 뽑혔다ꡓ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예수님의 실수였다고 강변하는 것밖에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부족한 사람들을 뽑으시어 그들에게 병 고치는 능력과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을 주셨다. 그러므로 오늘도 부족한 사제들을 뽑으시어 병 고치는 능력과 마귀를 몰아내는 능력을 주셨다. 왜 오늘의 사제는 병을 고쳐주지 못하는가? 혹시나 인간적인 능력을 내세워서가 아닌가? 약한자 안에서 당신의 능력을 발휘하시는 예수님을 잊은 것은 아닌가!


    오늘 우리는 성소자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를 느낀다. 때로는 왜 일류대학에 갈만한 실력을 갖춘 자들만 신학생으로 뽑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주님의 생각은 다르시다. 주님의 뜻은 더 깊고 더 심오하시다. 약한 자 안에서 주님의 영광은 드러나는 것이다. 복음의 메시지


    광의로 보면 세례 받은 우리 모두는 이 시대에 예수님의 대변인으로 뽑힌 사람들이다. 이 시대의 사제들은 물론 우리 모두는 영적으로, 내적으로 육적으로 고난받는 사람들을 치유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우리에게 맡기셨다. 주님께서는 누구든 사랑하신다는 소식을 전하여 영적치유를 해주고, 미움과 절망 속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과 기쁨, 평화를 전하여 내적인 병을 치유하며 병자를 위해 함께 기도하면서 병원에 보내어 고쳐주는 치유를 우리가 함께해야 한다. 오늘의 사탄은 뱀에 붙어있지 않고 인간이 좋아하는 돈에 붙어있다. 사람들은 돈에 모든 가치를 두고 있다. 돈에서 해방시키는 것, 그리고 주님께 모든 가치의 우선을 두도록 하는 것이 마귀로부터의 해방이 아닐까!



    2             연중 제11주일  마태 9,36-10,8 (가) 부르심을 따라

                                                                  최봉원 신부


    크리스챤은 모두 파견 받은 자임

    오늘 복음은 예수님 사업의 일꾼으로 뽑힌 열 두 제자들의 파견에 대한 내용을 들려줍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놓으시고 그들에게 여러 가지 권능을 주신 후, 가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성부께서 성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성자는 제자들을 보내시며(요한 20,21) 만방에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만약 오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당신 제자들을 다시 뽑으신다면 우리들 중에 누가 뽑히겠습니까? 요즈음 여성 해방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고, 사회 각 분야에 침투된 그들의 활동이 지대하기에 혹시 여자들을 부르실지, 아니면 상호 유익성을 생각하시어 혼성으로 부르실지 모르겠습니다. 어찌 되었건 우리들 중에 평범한 사람들이 제자가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파견 받은 열 두 제자들은 사실 그 시대의 평범한 사람들로서 성격과 재능도 각각 달랐습니다. 고기잡이 어부들이 있었는가 하면 세리도 있었으며, 보수파 유대인이 있었는가 하면 열렬한 혁명 당원도 있었습니다. 또 야심 많기로 유명한 사람, 물욕(物慾)이 많은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서민도 있었습니다. 물론, 이들 중엔 형제가 함께 불리운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다양성은 누구나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으며 또 각자의 고유한 방법으로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참여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말로써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행동으로써 병을 고쳐 주며 악령들을 쫓아 내 주었습니다. 오로지 그들은 예수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고서 타고 난 재능과 소질을 충분히 발휘하여 사명 수행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믿고 세례를 받았으며, 병자가 치유되고 죽은 자가 살아났으며, 마귀들이 도망을 치기도 했습니다.


    또 하느님의 정의는 결국 악을 멸하고 선을 이룰 것이라는 점을 사람들은 깨달았으며, 병을 고치고 악령을 쫓아내는 권능은 새 시대, 곧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표(보증)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과 현존으로써 우리 안에 나타났다는 것이지만, 그 완성을 기다려야 하며, 곧 실현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느님 나라의 특징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에서 명한 “사람을 죽이지 말라. 도둑질을 하지 말며, 간음(姦淫)하지 말라”는 등 불의(不義)를 금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사랑”의 실천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선 가져야 할 마음의 태도는 여덟 가지 참된 행복의 정신(마태 5,3-10)이며,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서 중심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 없이는

    세상을 변형시켜 하느님께 바칠 수 없으며 하느님 나라의 완성도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성직자나 수도자가 아닌 평신도의 길을 걷도록 하느님으로부터 불리움을 받은 여러분들은 어떠한 사명을 띠고 있습니까? “평신도들은 본래 현세적 일에 종사하여 하느님을 뜻대로 모든 것을 관리함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즉 복음의 정신대로 자신들의 임무를 성실히 이행함으로써 세상의 성화를 위해 마치 누룩과도 같이 내부에서 작용하여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빛으로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 보이도록 불리운 자들입니다.”(교회헌장 31)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업을 완수하시기 위해 많은 일꾼을 필요로 하신다는 것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듯이 하느님의 일을 돕는 것은 수도자나 성직자만이 하는 일이 아니라 세례 받은 모든 이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불리운 크리스챤은 믿지 않는 이들에게 가서 그리스도를 전하여 하느님 나라에 대한 복음을 선포해야 할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열 두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직제자로 뽑히지는 않았으나, 오늘과 같은 시기에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 모두는 주님의 제자로 뽑혀 각자 삶의 터전으로 파견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가정에서, 학생은 학교에서, 회사원은 회사에서, 직공은 공장에서 자기 생활에 충실함으로써 각자 누룩이 되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해야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믿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고, 들어야만 믿을 수 있으며, 복음 전파자가 있어야 들을 수 있습니다.


    복음을 믿음은 곧 구원과 생명을 얻는 것이고, 거절함은 심판과 죽음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믿고 믿지 않고는 듣는 이들의 자유이지만 복음 전파는 파견 받은 크리스챤의 중대한 사명임을 깨달아 하느님 나라의 복음 전파에 게을리 하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아멘.










    3         연중 제11주일  마태 9,36-10,8 (가) 병(病)의 승화(昇化)



    어느 나라에서 있었던 일이다. 사형수에게 사형집행을 하는데, 집행장에서 우선 눈을 가리우고 손을 뒷짐지게 하였다. 그리고는 그를 기둥에 붙들어 맺다.


    다음에는 목구멍을 뾰족한 연필로 찔렀다. 피는 한 방울도 흘러나오지 않았지만 집행자는 말로만 “어이구, 피가 흘러내리네!” 하고는 즉시 그 피를 담을 그릇을 목에 매달았다. 10분 후에 와서 “어이구, 그릇에 다 찾네!” 하며 그릇을 다시 떼었다가 그대로 걸어 주었다. 사형수는 그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몰랐고, 피가 한 그릇 나온 것으로만 알았다. 사형 당하는 입장에서는 10분이 한 시간 이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10분 후에 다시 와서 같은 말과 같은 일을 되풀이했다. 그리고 세 번째 또 와서 두  번째와 같이 되풀이했다. 그러자 그 사형수는 쓰러졌다. 사실은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죽은 것이다. 위의 이야기는 정신이 육체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는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그밖에도 담을 뛰어 넘었다든지, 장정 넷이서 간신히 들 수 있는 무거운 물건을 혼자 들었다든지 꼼짝 못하던 환자가 백리길을 걸었다든지 하는 예도 위의 이야기와 비슷하다 할 수 있다.


    창세기에 따르면,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하느님과 유사하게 만들어졌다. 때문에 우리 인간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이 가능성은 대개 발휘되지 못하고 인간에게만 부여된 이런 특권을 무위로 끝내는 수가 흔하다. 참으로 아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대개 기(氣)가 병들었을 때, 병자가 되는 만큼 병중에 있을 때나 의사나 약에만 의존하지 말고 병을 극복하도록 노력함도 좋을 것이다. 이것을 투병이라 하지 않는가? 그렇다고 의사도 약도 병원도 필요 없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아담이 낙원에 있을 때 병도 없었고 죽지도 않았던 상태를 한 번 쯤은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다. 우리가 병들게 되는 원인을 생각하면 결국 무리와 불합리가 많다는 것을 시인하게 된다. 무리라면 과로를 들 수 있겠다.


    불합리라면 분수에 넘치는 일을 욕심내서 했을 경우를 들 수 있겠다. 병원에서의 치료는 의사의 인술이나 약의 효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병원에 오가고 또 입원해서 심신을 쉬게 하는 때문이기도 하다. 의술이나 약은 쉬며 조절하는 데에서 치료시키는, 자연을 돕는 역할을 하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도 “중용”이란 말을 꺼낼 수 있겠다. 중용을 견지하지 못한 데에서 심신의 균형을 잃고 병이 생긴다면 이제 처방은 뻔하다. 중용을 견지하는 일은 보통 의지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이 중용을 곧잘 견지하게 된다. 신자라고 병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어려움과 병고에 대처하는 마음가짐이 신앙이 없는 사람보다는 어딘가 다르다. 고통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병 앞에서 뿐 아니라 죽음 앞에서도 그렇게 태연할 수 없다. 우리 선조 순교자들의 예만 보아도 알 일이다.


    예수님이 생존시 병을 낫게 해 주시는 전제 조건이 항상 믿음이었다. 그것은 의지행위이고 마음에 달린 문제란 뜻이다. 예수님 자신이 병으로 앓고 고생하신 일이 있었던가? 치유와 건강을 위해서는 육보다는 영에 치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장수 비결 중에 하나가 영육이 균형을 잡는 것이지만 마음을 편히 갖는 것이란 말을 많이 들었다.

                                    (1981, 10, 1 월보「가톨릭 중앙의료원」제18호)






    4            연중 제11주일  마태 9,36-10,8 (가) 사랑의 치유(治癒)

                                                    김창석 신부



    <성서>에 보면 예수가 나환자들을 낫게 해준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요즈음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예수처럼 병자들을 고쳐 준다고 하면서 실제로 병자들을 낫게 해주는 경우가 있는데, 나병을 고쳐주었다는 말은 아직 들은 적이 없다. 그래서 나도 나환자의 치유를 육체적인 치유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실존적인 치유로 해석하고 싶다.


    실존적인 치유라는 의미는 나환자가 실제로 나병은 낫지 않았어도 자기가 나환자라는 것을 잊고 생각하지 않으면 완쾌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담배 연기가 자욱하고 사람들로 가득찬 파리 시내의 한 다방을 둘러보고 “아무도 없군!”하고 뇌까렸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는데, 그만큼 인간의 생각은 실존과 직결되는 것이다. 하늘이 푸르니까 푸르게 보는 것이 객관적인 사실이지만, 내가 푸르게 보니까 푸르다고 하는 주관주의적 입장에도 일리가 있는 것 같다. 같은 이치로 나환자가 스스로 나환자라는 것을 잊고, 그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나환자가 아니라고 볼 수 있다는 말에도 일리가 있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실존적인 치유인 것이다. 그런데 나환자들이 스스로 나환자임을 잊도록 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나환자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계기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18년 전 내가 의정부 성당의 주임 신부로 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한 나환자가 나를 찾아왔다. 자기 친구가 죽게 되었는데 가서 병자 성사를 해달라는 사연이었다. 나는 그를 따라 의정부에서 약 6킬로미터 떨어진 어느 다리 밑으로 갔다. 그곳에는 만신창이인 한 나환자가 죽어가고 있었다. 참혹해서 차마 보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축성된 올리브 기름을 이마에 발라 주어야 하겠는데, 도저히 손을 갖다 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젓가락이나 붓으로 발라 줄까 하다가 그 환자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봐 ‘에라, 모르겠다’하면서 손가락으로 이마에 성유(聖油)를 발라 주었다. 그때부터 나는 불쌍한 나환자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나환자들은 물질적으로 아무리 도와 주어도 잘 살기 어렵다. 나환자들이 진짜로 필요한 것은 물질적인 도움이 아니라 정신적인 도움, 즉 인간 대우를 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때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빈손으로라도 나환자 마을을 가끔 찾아가서 그들과 같이 기도하고 식사하고, 또 그들의 방에서 잔다. 그래서 그들은 나와 함께 지내고 대화하는 동안 자신들이 나환자라는 것을 잊고 생각하지 않게 된다. 솔직히 말해서 나환자들과 같이 식사하고 그들의 방에서 잔다는 것이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지금은 좀 익숙해졌지만 전에는 매우 어려웠다. 악수는 고사하고 그들이 만졌던 문고리를 하이타이로 일일이 씻고, 그들이 가까이 올까 봐 몸을 움츠리곤 하였다. 손가락 없는 뭉툭한 손이 잠긴 막걸리 잔을 받아 마시고, 손가락이 없으니까 잘 닦지 못해 고춧가루나 음식 찌꺼기가 말라붙은 유리컵에 물을 받아 마시면, 뱃속에서 온통 나병 균이 꿈틀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하여 기를 쓰고 그들이 주는 음식을 받아먹고 마셨다.

    잠자리에 들면 닭똥 냄새 같은 이상하고 역겨운 냄새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도 우리와 같은 영혼을 가진 인간이고, 오히려 영혼은 우리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꾹 참았다. 익숙해지니까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 나환자촌에 갈 때마다 내가 신부라는 것이 매우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이가 옮아 왔다고, 또는 썩는 냄새가 난다고 내 아내가 소위 바가지를 긁는다면 어떻게 할 뻔했나 생각하면 아내가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신부니까 소외된 나환자들과 전적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에 나는 큰 보람을 느낀다. 그래서 나환자들도 그들이 나환자라는 것을 잊고 나와 어울릴 수 있는 것이다.

    몇 해 전 중림동 성당의 남녀 회장들이 나와 함께 나환자촌에 가서 같이 1박 2일 동안 기도회를 가진 적이 있다. 우리들은 나환자들과 같이 식사하고, 같이 손잡고 기도하고, 그들의 집에서 잤으며, 여 회장들은 나환자들의 아기를 돌보아 주었다.


    기도회 후 어느 나환자는, 그들이 우리에게서 수억 원의 돈을 받았다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즐거울 수가 있겠느냐고 감격해 하면서, 인간 대접을 받은 것이 너무나 기쁘다고 털어놓았다. 그 기도회 때 어느 나환자가 “문둥이 예수님!”하고 기도하였는데,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그 절실한 뜻과 심정을 알아들을 만했을 것이다.

    5        연중 제11주일  마태 9,36-10,8 (가) 삶의 현장에서 주님을 증거하자 

                                           허영업 신부



      나환자들의 성자인 다미안 신부가 나환자 수용소 물로카이섬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곳은 지옥과 같은 곳이었다. 매일같이 욕설과 싸움이 그칠 즐 몰랐고, 비관에 빠져 자살하는 사람도 많았다. 다미안 신부가 그들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말도 붙일 수가 없었다.

      나환자들을 위해 봉사하려는 다미안 신부에게「하느넘 사랑 좋아하시네! 하느님이 있다면 우리가 나병에 걸리게 내버려두고, 썩은 채로 죽어가게 하겠어? 만약 하느님이 있다해도 그런 하느님은 못믿겠어. 하느님이 사랑이다! 뭐다 하는 것은 건강한 당신같은 사람이나 하는 잠꼬대 같은 소리야‥‥」하며 빈정거렸다.


      그럴 때마다 다미안 신부는「오 주여! 나로 하여금 문등병 환자가 되게 하소서! 그래서 이들이 마음을 열고, 하느님 사랑을 깨우치게 하소서!」하며 간절히 기도드렸다. 결국 다미안 신부는 자신의 기도대로 나병에 걸려 손바닥이 썩어들어갔다.

      그 때 그는「나도 너희와 같은 나병환자다. 비록 육체는 썩어가지만 마음에는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가 있다. 나를 따라 하느님을 믿어라」고 외쳤다. 다미안 신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복음을 선포하고 증거했다. 드디어 지옥같은 물로카이 수용소는 믿음과 평화의 공동체가 되어갔다.


    희생과 사랑, 그리고 봉사


      다미안 신부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흘륭한 삶을 살다 나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온 세계는 다미안 신부의 희생과 사랑, 그리고 봉사정신을 오늘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여 파견하신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당신의 능력을 나누어주신다. 제자들의 파견은 예수님의 일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뽑으신 제자들의 명단을 보면, 결코 인간적인 능력이나 재능이 많온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인간적인 약점도 많고 무능하고 둔한 사람도 있었다. 세속적인 기준, 즉 좋은 학벌, 명석한 두뇌, 훌륭한 가문 등으로 제자를 뽑으신 것이 아니었다.


    12사도의 선별 기준


     예수님이 제자들을 뽑으신 기준은, 예수님께 대한 헌신적인 사랑이었다고 생각된다,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순수하게 그 말씀을 받아들이냐가중요한 기준이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축복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이었다. 마치 빵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제지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그것은 자칫 자신을 내세우는 꼴이 되기 쉽다. 자신이 철저히 도구됨을 인정할 때, 가장 흘륭한 제자가 될 수 있다.

      부활 후 제자들의 복음선포는 예수님의 선포와 같은 것이다.「하늘 나라가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는 예수님의 선포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한 제자들도 내용상 같은 의미이다.

    그런데 이 선포는 심판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선포를 받아들이냐의 여부에 따라 구원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음 선포는 종말론적이나 또한 뉘우침과 회개의 기회이기도 하다. 특별히 제자들의 기적 행위는 복음선포의 징표와 중거로 사용되었다.


      세례받은 우리가 해야 할 일


    세례를 받은 우리도 모두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다.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분명하다. 삶의 현장에서 주님의 일을 해야하고 주님을 증거해야 한다. 물론 우리의 힘으로써가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으로 할 수 있다.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나누어주셨던 당신의 능력을 우리에게도 똑같이 주신다. 우리가 겸손되이 청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6         연중 제11주일   마태 9,36-10,8 (가) 부름 받은 우리가 먼저

    교구 주보


    선택받은 민족의 사명(출애 19,2-6ㄱ)

    하느님께서는 선택받은 민족으로서 그에 맞갖은 사명을 이스라엘에게 주신다. 그 사명이란 이스라엘이 인류 속에서 사제의 직책을 맡는 일이요 거룩한 백성이 되는 일이다. 사제의 직책을 맡은 이스라엘은 야훼만을 섬기며 뭇 민족에게 야훼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증언하는 데에 전적으로 종사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이 여러 민족들 가운데서 한복판의 징표로 빛을 발할 때(이사 2,1-4 참조) 여느 민족들은 이 하느님의 백성으로부터 배우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택받은 이스라엘의 역할이고 본연의 임무임을 출애굽기는 상기시켜주고 있다.


    하느님과 화해한 인간(로마 5,6-11)

    모든 인간이 죄에 물들어 살았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많은 우리 인간을 위하여 죽으심으로써”(로마 5,8)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키셨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약한 인간 속에 자리잡은 악과 죄를 정복할 수 있는 참사랑을 인간에게 보여주셨다. 당신 아들을 통해 보여주신 하느님의 사랑 덕분에 우리들은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과 화해했다면 물론 사람들끼리도 화해할 수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올바른 관계를 얻었으니, 그리스도인은 죄에서 벗어난 기쁨으로 살아갈 것과 사랑하면서 살도록 불림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가르치고자 한다.


    부름받은 우리가 먼저(마태 9,36-10,8)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신 후 파견하시면서 “이방인의 길로 가거나 사마리아인 고을로 들어가지 말고 이스라엘 백성 중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10,5ㄴ-6)고 명하신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중 길 잃은 양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면 많은 사람이 하느님께로 몰려오리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마태 8,11; 루가 13,29).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을 받들어 각지로 다니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고쳐주는 일을 해야 한다(10,2. 7-8). 예수님의 궁극적 사명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이며 예수님의 모든 활동 지향은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에 초대하는 일이었다. 이 초대에는 그 누구도 배제되지 않았다. 죄인도 병자도 소외자도 결코 배제된 사람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서는 사람들의 온갖 아픔이 말끔히 사라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교회를 하느님 백성이 모인 공동체라고 말한다. 이 공동체에서는 “약하다고 여겨지는 것일수록 오히려 더 요긴하고, 천하다고 생각되는 지체일수록 더 품위있게 여겨야”(1고린 12,22-23 참조) 할 것이다. “지치고 고통받는 이들을 측은히 여기시고 동정하신”(마태 9,36 참조) 예수님의 모습을 교회 내에서 먼저 살아야 여느 사람들도 이 구원의 징표를 보고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7     연중 제11주일   마태 9,36-10,8 (가) 베드로의 뉘우침과 유다의 후회

    최인호 작가


     예수께서 산으로 올라가 밤을 새우시며 하느님께 기도하시고, 직접 뽑아 사도로 삼은 제자는 모두 열두 명입니다(루가 6,12-13). 예수께서는 이 열두 제자에게 악령을 제어하는 권세와 병을 고치는 능력을 주시어 병자를 고쳐주게 하셨습니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베드로부터 시작되어 유다로 끝납니다. 제자 이름의 나열을 통해 으뜸제자는 누가 뭐래도 주님께서 “이 바위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신 베드로임을 알게 되고 꼴찌제자는 주님께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을 뻔했다”(마르 14,21)고 말씀하신 “예수를 팔아 넘긴 가리옷 사람 유다”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으뜸제자인 베드로나 꼴찌제자인 유다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정열적이고 힘센 어부출신인데 유다는 세리였던 마태오를 제치고 회계를 맡아보던 머리 좋고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뭐니뭐니해도 두 사람의 공통점은 주님을 배신했던 점일 것입니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배신자이고 유다는 주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 넘긴 배반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두 사람의 운명을 극과 극으로 갈라놓았을까요? 그것은 주님을 배반한 직후에 보인 행동에서 비롯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모른다고 한 후 주님과 눈을 마주친 다음 “밖으로 나가 슬피 울며”(루가 22,62)


    자신의 행동을 뉘우쳤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내가 죄없는 사람을 배반하였으니 나는 죄인입니다”(마태 27,4)라며 죄의식을 느끼고 후회는 하였지만 결코 회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죄를 뉘우침으로써 용서받을 수 있었지만 유다는 자신의 죄를 후회는 하였으나 회개하지 못했으므로 끝내 용서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죄를 뉘우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주님을 등지지 않고 항상 주님 곁에 머물며 주님을 마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주님을 배반함과 동시에 주님을 등지고 떠나 멀어져갔던 것입니다. 이를 요한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유다는 곧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요한 13,30).

    베드로와 유다는 똑같이 밖으로 나갔으나 한사람은 슬피 울었고, 한 사람은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유다의 결정적인 차이는 이처럼 주님을 ‘마주봄’과 주님을 ‘등지고 떠남’에 있습니다.


    죄인인 우리들이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베드로처럼 주님을 향해 몸을 돌려 그를 마주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죄인인 우리들이 유다처럼 주님을 등지고 캄캄한 밤 어둠 속에 머물러있을 때 우리 죄는 죄책감인 ‘피의 밭’ 속에 그대로 묻혀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뉘우침은 우리가 선 그 자리에서 주님께로 ‘뒤로 돌앗!’ 하고 마주보는 자세를 취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며, 회개야말로 배신자 베드로를 으뜸제자로 만든 원동력인 것입니다.                                                  

  2. user#0 님의 말:

     

    연중 제11주일

     제1독서 : 출애 19, 2-6ㄱ

      출애 19장은 민수 10,10까지 이어지는 ‘시나이 사건’의 시작 부분이다. 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에집트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신 근본 목적은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시어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한 것이었다. 하느님께서는 처음으로 이스라엘에게 공적으로 나타나시어 계약을 제안하시고(출애 19장) 계약의 조건을 제시하시며(출애 20,1-17) 이스라엘과 계약을 체결하신다(출애 24,3-8). 여느 민족과 다를 바 없이 평범했던 이스라엘이 시나이 사건을 통하여 특별한 백성, 곧 하느님 백성으로 태어난다. 하느님 백성이란 그분의 소유가 되고 사제들의 왕국이 되며 거룩한 민족이 됨을 뜻한다. 이 특별한 지위에 머물기 위한 조건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계약을 지키는 것이다.

      신앙은 하느님의 선택과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며 선택이다. 신앙은 하느님께서 제안하신 계약에 동의하는 것이다. 이 계약은 실천을, 곧 삶 안에서 구체적인 표현을 요구한다. 하느님께서는 역사 안에서, 특별히 그리고 결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구원 의지를 보여 주시고 실현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새로이 맺어진 계약을 지키겠다고 동의하는 것이 신앙이다. 이 신앙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계명을 충실히 지킴으로써 완성된다. 이러한 실존적 신앙을 살 때에야 비로소 신앙인은 하느님의 소유가 되고 그분에게 사제의 왕국이 되며 그분만을 위해 몸 바치는 사람, 곧 거룩한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제2독서 : 로마 5, 6-11

      로마서 5장 앞부분에서 바오로는 ‘의화’가 왜 ‘벌써 일어난 사실’인지 밝힌다(1-2절). 이것은 유다인들이 미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달성하리라 바랐던 생각과는 아주 달랐다. 성령께서 지금 우리 안에 이루시는 사랑의 역할이 바로 이 의화의 증거이다(5절). 그러나 벌써 의화를 이루었다는 사실이 우리를 구원의 “희망”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사실을 통하여 더 새로운 희망으로, 유다인들은 결코 생각할 수도 없는 목표로 향하게 된다(3-5절). 이러한 주제는 6-11절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비추어지고 새롭게 설명된다.

      이스라엘의 종교적 삶은 의인에게 상을 주고 악인은 벌한다는 미래에 있을 야훼의 심판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벌 받는 심판을 피하려고 애썼다. 선한 자의 편에 있는 야훼의 정의가 그분의 심판에서 빛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실망스러운 체험을 하게 된다. 즉 하느님은 의인을 지켜 주고 상을 주는 심판자이면서도 동시에 완전히 다른 분으로 나타나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는 의인을 지켜 주시면서도 마찬가지로 죄인들도 구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분 앞에 자신의 어떤 공로도 자랑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즉 하느님의 정의는 결코 인간의 정의의 틀에 맞지 않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개인적으로 이 두 가지 형태의 정의를 잘 아시고 이를 사셨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정의를 지키셨지만 이를 “사랑”에서 승화시키셨다. 당신의 용서를 통하여 전체 인류에게 의화를 선사하셨고, 그리스도께서는 더 이상 유다인처럼 최후 심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셨다. 하느님의 정의는 그분께는 전혀 다른 정의였고, 이 정의는 벌써 당신의 피를 통하여 인류의 화해로 나타난 것이다.

      성찬의 전례에서 우리는 이 의화의 가장 깊은 체험을 하게 된다. 빵을 나누고 말씀을 나눌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 단 한 번, 특히 그분의 죽음 사건에 나타난 은총이 가장 구체적인 모양으로 이 체험을 위한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성체는 그리스도 신자를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동반자로 삼는다. 즉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의화되어 하느님 정의의 나라를 이루는 데 함께 일하도록 불리운다. 신자들의 성실한 생활이 모든 이를 비추는 좋은 표양이다. 이 표양을 보고 다른 사람들도 사랑이신 하느님의 생명과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복 음 : 마태 9, 36―10, 8

      마태오 복음이 다섯 개의 설교군(群)으로 짜여져 있다는 주장에 따라서 보면 10장의 파견 설교는 산상 설교(5-7장)에 이은 두 번째 설교다. 이번 주부터 연중 제13주일까지 3주간에 걸쳐 마태오 복음서의 파견 설교를 복음으로 듣게 된다. 물론 예수님께서 한꺼번에 이 모든 설교를 하신 것은 아니다. 조직적인 사고를 하는 마태오 복음사가가 제자들의 파견에 관한 말씀들을 모아서 파견 설교를 엮었다. 비록 파견 설교가 10장부터 시작되지만 설교 바로 앞에 놓인 9,35-38은 예수님의 활약상을 요약하고 제자들의 협조 필요성을 강조하는 이른바 ‘집약문’이다. 이 집약문은 8-9장을 마무리하면서 10장에 나오는 제자들의 파견을 예고한다.

      오늘 복음에서 무엇보다도 맨 먼저 강조되는 것은 지도자 없이 방황하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예수님의 자비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어 병자와 허약한 사람을 고쳐 주시고, 굶주린 이들을 배불리시며, 죽은 이들을 살려 주시는 것 모두는 그분의 백성에 대한 연민 때문이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로 그 자비와 사랑의 권능을 주셨고, 그 제자들을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시고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키기를 원하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권능을 받아 스승과 마찬가지로 기적을 베풀었던 것은 기적뿐만이 아니라 스승의 사랑과 자비까지 드러낸 것이다. 오늘날 사도들의 직무를 계승한 교회와 그 지도자들도 마찬가지다. 사도들로부터 물려받은 권한은 백성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 ‘연민의 권한’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권한을 거저 받았으니 거저 베풀어야 할 따름이다.




    강론


     오늘은 연중 제11주일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용기를 내어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뭐든지 퍼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다가서셨습니다. 오늘 1독서의 말씀처럼 어떻게 이집트인들로부터 데려왔는지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먼저 다가서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계약을 말씀하십니다. 여기서의 계약은 우리들이 말하는 서로의 이익을 위한 계약이 아닙니다. 여기서의 계약은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성립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그것을 실천하면 복을 주신다고 합니다. 사랑을 받아주면 더 큰 것, 온 세상을 주신다고 합니다. 바로 우리의 태도를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건 순전히 사랑에 의한 죽음입니다. 우리는 사랑 때문에 목숨을 바친다고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께 비하면 이기적인 사랑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당신에게 침을 뱉고 거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셔서 죽음에 이르게 하여 우리가 그것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따르게 합니다. 전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우리 스스로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해놓으신 것을 거들 뿐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이라고 하셨으니까 이미 모든 곡식은 영글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찾으시는 일꾼은 처음부터 씨를 뿌리고 모를 내는 일꾼이 아니라 이미 주인이 다 해 놓으셨고 다만 수확할 것을 거들어 줄 수 있는 일꾼이 적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확을 거들어 줄 수 있는 일꾼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일꾼은 처음부터 자기가 무엇을 시작해서 어떤 결실을 맺게 하고 그 결실을 거둬서 주인님께 갖다 바치는 일꾼이 아닙니다. 씨를 뿌려서 수확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모든 일은 이미 예수님이 다 해놓으셨습니다. 일꾼이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이 이미 다 해놓으신 것을 거두어들이는 일입니다. 모든 일의 시작은 항상 예수님이 시작하십니다. 또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아버지의 뜻에 따른 것입니다. 아버지는 인류를 구원할 계획을 세우셨고 그 일을 할 일꾼으로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죽기까지 순명하시면서 인류 구원의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바로 목전에 두고 “다 이루어졌다.”(요한 19, 30)하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인류 구원이라는 구원사업을 완수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누군가가 예수님이 완성해 놓은 구원 사업을 계승해서 일할 일꾼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완성해 놓으신 인류 구원의 일을 계속할 열 두 사도들을 뽑으셨고, 교육시키셨고, 파견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인류 구원을 위해 새롭게 무엇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에 의해 완성시켜 놓은 구원의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일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열두 제자들에 의해 이 일은 이 세상 끝날 때까지 이어져야 하고 또 열 두 사도들에 이어서 계속해서 그 일을 할 일꾼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이는 누구나 자기 방식대로가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방법에 의해 수확을 거두어드려야 합니다. 그 일에 불리움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예수님이 하신 방법대로 수확을 거두어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일꾼은 많지만 각자 자기 방식대로 수확을 거두어드리려고만 하지 예수님 방식대로 수확을 거두어드리는 일꾼은 많지 않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 예수님의 일꾼들이지만 정말 믿을만할 일꾼은 많지 않습니다. 수확할 것을 거두어드리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 것만 챙기기 위해 일을 하려는 경향이 많습니다. 남들을 보지 말고 우선 자신을 평가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구체적으로 어떤 마음을 가지며 지내왔는가 되돌아봅시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나의 방식대로 하며 그 일이 잘못되면 나의 능력 탓으로 돌리고 체념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며 주님께서 이루어주십니다. 주님께서 먼저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준비해주시고 주님이 몸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내 일로 여기고 있는지, 아니면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주님을 대신하는 일이며 주님이 하셨던 방식으로 하고 있는지 되돌아봅시다. 우리는 그 사랑을 깨닫고 받아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복을 내려주십니다.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나의 것이다.”









  3. user#0 님의 말:

     

    제자들을 뽑으시고 파견하시는 예수님

    1. 말씀읽기: 마태 9,36-10,8

    2. 말씀연구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기 위하여 열두 제자를 뽑으시고, 그들에게 권한과 능력을 주시고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사도로 뽑힌 사람들은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뽑으시고 파견하신 분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 일은 바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나 또한 하느님 나라를 전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36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자비로우신 예수님께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실 리가 없습니다. 모두 고쳐 주셨다는 말씀이 와 닿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백성들의 목자였지만 그들은 백성들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을 통하여 자신들을 돌보았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과연 내가 나를 믿고 따르는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사목을 하고 있는가? 나 자신의 만족과 자아도취를 위하여 사목을 한다고 착각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아무리 다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이 바로 하느님 백성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백성들을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측은하게 여기십니다. 그 이유는 당시의 목자들이 양을 돌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꿔서 생각을 해보면 목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양들도 지금 우리 주위에는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목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귀에 듣기 좋은 말만을 찾아서 다니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목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7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추수는 모든 일들의 마무리를 묘사하는 고대적인 표현입니다. 예언자들이 이러한 표현을 만들어 냈으며,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추수는 바로 하느님 나라로 모아 들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고,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도록 도와주어 그들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고, 말씀을 듣고 실천하게 함으로써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이 바로 일꾼입니다.

    38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수확할 밭은 세상이고 밭의 주인님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밭을 돌볼 일꾼들(목자)을 선택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성실치 않은 일꾼을 물리치시고(지금의 백성의 지도자들) 성실한 사람으로 당신 밭의 일꾼을 채우실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마음을 다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힘을 다하고 정신을 다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부르십니다. 나를 통해서 당신 구원의 손길을 온 세상에 펼치시고자 하십니다.

    “예”하고 응답하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갑시다. 그렇게 살아갈 때 하느님께서는 나를 통해서 풍성한 수확을 하실 것입니다.


    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십니다. 그래서 마귀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칠 수 있는 권한을 주시고,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성경에서 보면 벙어리 마귀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더러운 영들은 말하지 못하게 합니다. 말을 하지 못하기에 하느님을 찬양하지 못하게 하고, 자신의 아픔을 호소하지 못했고, 공동체에서도 소외되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을 쫓아내시어 그들이 말하게 하고, 하느님을 찬양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병으로 고생하며 공동체와 함께 하지 못했으나 예수님께 치유를 청하고, 예수님께로부터 치유를 받아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추수는 예수님을 통하여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하여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예수님의 일을 계속 한 것처럼 나 또한 그렇게 예수님의 일을 해 나가야 합니다. 그런 능력을  나에게 주셨습니다. 나는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능력으로 말 못하는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고, 그들이 말할 수 있게 해 주고, 그들의 말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병든 이들을 찾아보고, 그들에게 예수님의 축복을 전해주어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어야 합니다. 육체의 고통뿐만 아니라 마음의 고통까지도 주님 사랑으로 쉽게 어루만져 줄 수 있을 것입니다.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3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4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도로 열둘을 뽑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회적인 능력이 있고, 명문 대학의 학위가 있는 사람들을 뽑으시지 않으셨습니다. 어부들이었고, 열혈당원도 있고, 세리도 있지만 이들 모두는 하느님께 대한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다를 제외하고 모든 사도들은 그렇게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예수님의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렇게 사도들로부터 이어오는 신앙을 내가 받아들여 나 또한 커다란 기쁨을 가지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1. 베드로

    아버지 요나와 어머니 요안나에서 태어난 시몬은 예수님께서 ‘반석’이란 의미로 베드로란 이름을 새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요르단 강가에서 시몬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를 베드로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마르코3,16;루가6,14) 결정적인 부르심 또는 가이사리아의 선언 후입니다(마태16,18). 그때까지는 그를 시몬이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마르코1,16.29.36;루가5,3.4.5.10).


     당시 히브리인, 특히 평민들 사이에서는 별명이 곧잘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별명만 쓰다가 본 이름을 잃는 경우까지도 있었습니다(마카상2,2-5).


    12사도의 수장으로서 베드로 사도가 다른 사도보다 탁월했던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예수님의 몸에 대해 염려가 많았다. 예수님께서 수난을 예고하셨을 때 그는 안 된다고 펄쩍 뛰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그런 것입니다.

    ② 배반하고서 즉시 통회를 했습니다. 이 모습은 다윗 왕과 비슷합니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바세바를 범했을 때, 그리고 나단 예언자가 그 잘못을 지적했을 때 즉시 잘못을 시인하고 통회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지만 즉시 통회하고 결국 순교까지 하시게 됩니다.

    ③ 예수님 부활 후에 예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느냐’를 세 번 물으시고 그 응답을 보시고 교회의 모든 권한을 맡기셨습니다.

    ④ 성령강림 후 당당하게 신앙을 증거하고, 3천명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⑤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천사의 도움으로 구출되었습니다(사도 12, 6-19).

    ⑥ 이방인들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첫 번째 공의회를 예루살렘에서 소집하였습니다.

    ⑦ 로마에 전교 중 박해를 피해 로마를 빠져나가다 예수님께서 ‘네가 양들을 버리고 가니 내가 다시 십자가를 지러 간다.’는 말씀을 듣고 로마에 다시 들어가 순교를 하셨습니다. 사도의 무덤위에 세워진 성전이 바로 베드로 대 성전이고 축일은 6월 29일 입니다.


    2. 안드레아 : 축일 11월 30일

     안드레아란 ‘남자다운, 용감하다’란 뜻이 있습니다. 베드로의 동생으로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말을 듣고 요한과 예수님을 찾아가 하루를 묵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먼저 자기 형 시몬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였습니다.

    빵 5개로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때 소년을 데리고 왔었으며, 예수님 부활 후에는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러시아 발칸반도를 거쳐 그리스에 가서 전교를 하였습니다. 안드레아는 X형의 십자가에서 ‘오 영광의 십자가여’라고 기도하며 순교를 당하셨습니다. 축일은 11월 30일 입니다.


    3. 야고보

    야고보 사도는 사도 요한의 형으로 알페오의 아들 야고보와 구분하기 위해 장(長) 야고보라 부릅니다. 아버지는 제베대오이고 어머니는 성모 마리아의 친척 살로메입니다. 별명은 천둥의 아들이고 요한과 마찬가지로 성격이 급했던 것 같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냉대할 때 하늘에서 유황불을 내려 동네를 불살라 버리자고 예수님께 말씀을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헤로데의 박해 때 예루살렘에 남아 있다가  44년 파스카 축일전날(성금요일) 참수로 순교하였습니다. 12사도중 제일 보수파(유대법에 철저)라 할 수 있고, 유해는 예루살렘에서 스페인의 꼼포스텔라로 옮겨졌습니다.(이곳을 순례하며 교육시킨 것이 오늘날의 꾸르실료로 발전).축일은 7월 25일입니다.


    4. 요한

    요한은 “야훼께서 은혜를 베푸셨다.”는 뜻입니다. 제베데오의 아들이며 야고보의 동생인 요한은 요한복음을 섰으며, 요한 서간과 요한 묵시록을 섰습니다. 별명은 형과 함께 천둥의 아들입니다. 사마리에서 예수님께서 환영받지 못하자 “하늘에서 불을 내려 태워버릴까요 ”라고 말했던 요한은 성격이 급하고 활달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사랑받던 제자라고 전해주고 있는데, 아마도 사도단 안에서 나이가 제일 어렸기에 예수님께서 더욱 사랑해 주셨던 것 같습니다. 요한은 십자가 아래에서 마지막까지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았으며, 예수님의 유언대로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고 살았습니다. 43년 박해 때 에페소로 피난을 가서 그곳의 일곱 교회를 돌보았습니다.

    95년 제2의 네로라고 하는 도미시아누스 황제 박해 때 파트모스 섬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요한의 묵시록을 저술하였습니다. 이 요한을 사랑의 사도라 부르며, 애덕은 그리스도교의 기초이고 사랑만 있으면 죄를 범치 않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축일은 12월 27일 입니다.


    5. 필립보

     필립보는 ‘말의 친구’, ‘말을 좋아하는 사람’이란 뜻이 있습니다. 벳사이다 출신(요한 14, 7)으로서 나타나엘(바르톨로메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였습니다. 필립보는 나타나엘이 믿으려 하지 않자 “와서 보시오.”하고 말하여 예수님께로 인도하였습니다. 또 예수님께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필립보는  스케디아 지방에서 전교하였고, 78년에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셨습니다. 유해는 로마의 열두 사도 성당에 안치되어 있으며 축일은 5월 11일 입니다.


    6. 바르톨로메오 : 축일 8월 24일

    바르톨로메오는 ‘톨마이(탈미)의 아들’이란 뜻으로 ‘높은 곳에 계시는 분의 아들’ 또는 ‘물을 높은 곳에 바치는 분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바르톨로메오는 성(姓)이고 이름은 아마 ‘나타니엘’(요한 1, 21)일 것입니다. 에우세비오에 의하면 성령강림 후 인도까지 전교하였고, 또 에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전교하며 왕과 왕비를 개종시켰다고 합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에 의하면 소아시아 지방인 아르메니아에서도 전교하였습니다.

    알바누시아에서 산채로 가죽을 벗겨 십자가에 달려 목을 베어 죽임을 당하셨고, 유해는 알바누시아에 있다가 메소포타미아에 옮겼었고 839년에 로마로 옮겨 티베리아 강 가운데 있는 섬의 성당에 안치되었습니다. 축일은 8월 24일 입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을 처음 보셨을 때“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1,47) 라고 칭찬하셨습니다.


    7. 마태오 : 축일 9월 21일

    마태오 사도는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세리 일을 하였습니다. 주의할 일은 마르코와 루가가 단순히 마태오라고 하여 토마스 앞에 기록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마태오 자신은 세리라는 직책을 밝히고 토마스의 다음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록 세리는 죄인으로 취급당했지만 그 자신이 세리였으니 세리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즉 죄인이라고 취급당했지만 회개하고 복음을 믿게 된다면 구원받게 된다는 것을 스스로 보여 준 것입니다. 다른 사도들은 그를 레위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이름은 레위일 것입니다.

     마태오란 히브리말로 ‘하느님의 선물’이란 뜻입니다. 또한 ‘위대한’이란 뜻을 가진 라틴어의 Magnus와 ‘하느님’이란 그리스어의 Theos의 합성어로 본다면 ‘하느님을 위한 위대한 자’가 될 것이며, 또는 ‘손’이란 라틴어의 manus와 그리스어의 Theos의 합성어로 본다면 ‘하느님의 손’이란 뜻이 됩니다.

     9년간 유다와 에디오피아에서 전교활동을 하였고, 이집트의 에깃부스왕의 왕자를 기적으로 치유하였습니다. 이로써 왕가 전체가 신자가 되고 왕의 딸 에피케네이아도 동정녀로 지내기로 서약하였습니다. 그러나 헤르따고라는 왕이 왕위에 올랐고 에피케네이아와 결혼을 하려고 하였지만 거절당하자 공주도 죽이고 마태오도 죽였습니다(90년). 유해는 이탈리아의 살레르노에 모셔졌습니다. 축일은 9월 21일 입니다.


    8. 토마스 : 축일 7월 3일

     별명은 ‘의심 많은 사람’, ‘증거를 볼 때까지 믿지 않는 고집이 센 사람’입니다. 토마스는 쌍둥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를 쌍둥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갈릴레아 출신의 어부로서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 토마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대답했고, 부활하신 후 발현하셨을 때에도 믿지 않다가 예수님을 보고 나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인도에서 전교활동 했고, 우상숭배 교도들에 의해 창에 맞아 순교하셨습니다. 축일응ㄴ 7월 3일 입니다.


    9. 야고보

    예수님의 친척이라도고 하였고 요셉, 시몬, 유다의 형제(마태13,55).이며 소 야고보(마르코15,40-41)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알패오와 마리아(마태27,56)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초대 주교가 되었습니다(사도15,13;갈라1,19). 빌레크벡크의 연구에 따르면, 그의 부친 알패오는 야고보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남편 글레오파(요한19,25)와 같은 인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형제라 하였는데,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등은 모두 예수님의 친척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엄격한 생활을 하였고(금육, 금주, 수염과 머리를 안 깎음),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 떠밀려 땅에 떨어뜨린 다음 돌로 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유해는 예루살렘에 안치되었다가 후에 이탈리아의 앙코나의 성 칠리아고 성당에 안치되었습니다. 축일은 5월 1일 입니다.

    10. 시몬

    시몬은 ‘하느님께서 들어주셨다’ 라는 뜻을 가진 시므온(시메온)의 약어입니다. 별명은 카나나이오스 또는 젤로테스(혁명당원)입니다. 시몬 베드로와 구별하기 위하여 혁명당원 시몬이라고 불렀습니다.  젤로테스는 기원 후 70년의 예루살렘멸망 때까지 가장 과격한 이스라엘 독립 운동당이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페르시아에서 체포되어 톱으로 육신이 두 동강이 나는 형벌을 당하고 순교했다고 합니다. 또는 동방 전승에 의하면 에뎃사에서 평화로이 운명했다고도 합니다. 축일은 10월 28일 입니다.


    11. 유다(JUDAS,THADDAEUS : 축일 10월 28일)-타대오

     유다는 예수님의 사촌으로서‘하느님은 찬양 받으소서’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의 ‘여후다’를 그리스식으로 발음한 것입니다. 유다의 다른 이름은 “타대오”로서 이는 ‘왕을 붙드는 사람’ 이라는 뜻입니다.

     타대오(마태10,3;마르3,19)로 불리기도 하고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루카 6,16)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고사본에는 타대오 대신에 렛베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와 유프라테스강 가까운 에뎃사에서 선교하고 또 아르메니아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교회를 건설하고, 그로테스탄으로 옮겨 그곳에서 화살에 맞아 순교하였습니다. 축일은 10월 28일 입니다.


    12. 유다 이스가리옷

     유다 이스가리옷. 그는 예수님을 팔아먹은 배반자입니다. 그 이름에는 자객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다른 사도들과 같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그래서 사도단에서 재정을 담당했었지만, 배반의 죄를 범한 이후 그의 이름은 언제까지나 “예수님을 팔아 넘긴 가리옷 사람 유다”라 불릴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그렇다 치고, 유다의 선택은 잘못되지 않았을까요? 배반자 유다. 유다가 사도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어느 때를 막론하고 가장 가공스러운 신비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숭고한 사명을 부여해 준 제자들 중의 하나인 유다에 의해서 죽음에 부쳐지는 위험을 스스로 감수하셨습니다.


     우리는 유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하느님의 나라와 사탄의 영역간의 경계가 서로 밀접하게 붙어 있다는 것을 볼 수 가 있습니다. 마음을 조금만 잘못 먹으면 곧바로 악의 도구가 된다는 것을 많은 경우 체험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마음을 조금만 잘못 먹으면…,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막지 않으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때 하느님께서 그들의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신 것처럼, 하지만 가슴아파하시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보내시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의지를 꺾지 않으십니다.


    5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6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며 다른 민족들에게는 가지 말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실까요? 이방인들은 구원에서 제외되었음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먼저 예수님께서는 “구원은 유다인들로부터 시작하여 세상 모든이들에게로”라는 원칙을 지키십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이스라엘 민족을 포함한 온 세상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하느님께서 세우신 계획에 따라 유다인으로부터 시작되어 이방인들에게 퍼져나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원칙을 지키려고 하십니다.“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해서 왔다”(마태15,24).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제한을 따르는 것이 어려웠을지도 모르지만, 이러한 순명은 하느님의 아들이 자기를 비우는 작업인 것이며, 이로써 우리는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나중에 파견될 때는 이러한 규율이 더 이상 그들에게 해당되지 않습니다. 모든 이들에게로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을……….가르쳐라.”(마태28,19)


    ◀사마리아▶

    앗시리아 왕들이 이곳으로 이동시킨 이방인의 자손인 사마리아인은(기원전 722-21년) 유다교의 영향을 받고 있었지만 민족으로서도 또 종교상으로도 서로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과는 언제나 사이가 나빴습니다. 예수님의 시대에도 그러했습니다. 복음서에 아름다운 예외가 기록되어 있다고는 하지만(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루카10,25, 사마리아 여인-요한4장), 서로 증오한 일반적은 감정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 적대감정은 1세기 말까지 계속되었고, 2세기 로마에 대한 혁명이 끝날 무렵부터 이 반목은 완화되고, 이윽고 같은 종교, 같은 민족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6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구역장님들도 가끔 눈물을 흘리시며 오십니다. “제가 전교를 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상처만 받았어요.” 더욱 성숙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전교하면서 상처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전교하러 갔지 상처받으러 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이나 사마리아인들에게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믿음이 아직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지 않았기에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에게는 복음을 전하다가 오히려 상처를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내 안에 확고한 믿음이 없다면 내가 내 믿음을 전하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배려하셨을 것입니다.


    또한 유다인들이 자신들의 역할을 다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로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것과 똑같이 선포해야 합니다. “하늘나라가 다가 왔다고…”

    선포의 주제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면서 세례자 요한이 먼저 외쳤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핵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입니다. 신앙인들도 하느님 나라를 선포해야 합니다. 그 선포는 말이 아니라 내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내가 하느님 나라를 살아 갈 때, 비신자들은 나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선포할 수 있는 방법: 웃으면서, 친절하게, 기쁘게, 진실한 마음으로, 내 것을 나누면서, 한번 참고, 정화된 말을 전하고, 손잡아 주며, 인사하기.

    나는 지금  무엇을 선포하고 있습니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있습니까? 나의 능력을 선포하고 있습니까?


    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그리고 엄청난 권한도 주십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면서 제자들은 ①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②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며, ③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④ 마귀들을 쫓아내야 합니다. 사도들은 하늘에서 받은 선물을 이 세상의 이익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며, 생명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죽음으로 나아가는 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들어납니다. 그럴 능력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합니다. 즉 나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계산하지 말고 가난한 이들을 찾아가고, 병자를 방문하고, 냉담자를 찾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3. 나눔 및 묵상

    1. 예수님께서는 가서 하늘 나라가 다고 왔다고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선포하고 계십니까? 무엇을 전하고 계십니까? 누구를 찾아가고 계십니까? 제자들이 받은 사명을 기억하면서 내가 받은 사명을 어떻게 수행하고 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2.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내가 받은 것을 나누어 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3.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권한과 의무를 부여하십니다. 권한은 무엇이고 의무는 무엇입니까? 내가 마음에 드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권한입니까? 의무입니까? 혹시 의무에는 관심 없고 오직 권한만을 찾으려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4. user#0 님의 말:

     

    연중 제11주일

    제 1 독서 : 출애 19, 2-6a

    제 2 독서 : 로마 5, 6-11

    복     음 : 마태 9, 36-10, 8


    제 1 독서 :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네들을 탄생시킨 출애굽 사건을 계속해서 묵상하고 숙고했다. 제1독서는 양식 비판적으로 볼 때 도입절을 가진 독립된 단위이다. 여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특별한 소명에 대한 성숙한 신학적 반성이 잘 나타난다. 사제라는 단어는 출애굽을 통한 이스라엘 백성의 특별한 사명을 강조한다. 즉 이 백성은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증인이 되도록 뽑힘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계약으로 갱신된 삶을 만민 앞에서 보여주어야 한다.


    제 2 독서 :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5장, 6장에서 악의 세력을 의인화시켰다. 죄와 죽음의 관계 속에서 악의 세력이 잘 드러난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무상의 사랑을 발견했다. 거저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사랑은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읻. 그리스도 덕분에 죄 많은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고, 인간의 구원이 성취되었고, 하느님을 섬기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화해, 구원 그리고 기쁨은 그리스도 신자의 근본적인 체험을 말해 준다.


    복     음 :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뽑으신 이유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분부하시는 말씀에 잘 나타난다. 그것은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뒤따라 병자의 치유나 구마도 제자들의 사명으로 제시되지만 그것은 복음선포를 도와주기 위한 수단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제자들의 사명은 다른 인간적인 사업과 차이가 난다.

    이 첫 파견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제한된다. 왜 세상 만민에게 파견하지 않고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보내지 않고 다만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것일까? 그 이유는 예수께서 아직 수난을 겪고 부활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아직 복음의 알맹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나라가 완성되었다고 하지 않고 다만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는 사명으로 파견된다.

    마태오 복음 9장 38절은 사제성소를 말할 때 곧잘 인용되는 구절이다. 추수할 것에 비해 일꾼이 적다는 호소이다. 교회 내의 어떤 신문에서 읽은 글귀가 생각난다. “사제성소는 고속도로와 같다. 모든 사람이 고속도로가 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자기 집 앞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성서의 말씀은 부르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신 하느님께서는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주시면서 당신 법을 알려 주시고 당신께서 어떻게 이집트인들의 손아귀에서 이스라엘을 건져주셨는가를 회상하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당신 자신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당신의 백성이 될 것이라 하시면서 사제의 직책을 맡은 하느님의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명하십니다. 거룩함으로의 부르심은 ‘독수리’라는 표상을 사용하여 강인함과 온유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독수리가 보금자리를 흔들어 놓고 파닥거리며 떨어지는 새끼를 향해 날아 내려와 날개를 펼쳐 받아 올리고 그 죽지로 업어 나르듯 야훼 홀로 그를 인도해 주실 때 어느 다른 신이 그와 함께 하였더냐?”(신명 32, 11-12)라는 모세의 마지막 노래, 찬미가는 이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부르시는 이 부르심은 신약에 와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당신의 열두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당신 나라의 추수의 일꾼들로 초대하시는 데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고 앓는 사람을 고쳐주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신약의 시대가 열렸음을 알게 해줍니다. 그는 또 죽은 사람은 살려내고 나병 환자는 깨끗이 낫게 하고 악마를 추방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

    복음 선포의 명령을 내리시면서 아무런 보수없이 거저 받은 모든 것을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 다른 복음(루가 10, 1-12 참조)에 보면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오직 주님의 평화만을 빌어주고 주인이 주는 음식을 먹으며 그 집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십니다. 복음 자체가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이요, 무상으로 주어진 것이기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하느님 나라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아무 조건없이 거저 베풀어주며 가난하고 빈 마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는 곧 가난 그 자체가 복음의 선결 조건이 되며 그런 상태에서만 진정 복음이 사람들 마음에 와 닿을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오늘날과 같이 교회가 대형화하고 중산층화한 상태에서 어찌 보면 맞지 않는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해야 하는 마음 자세와 정신적 태도는 시대를 초월한 영원 불변의 진리로 세속화되고 물질 만능주의로 점철된 오늘날의 사회와 교회의 속물화한 모습에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이런 복음의 가르침과 관련, 벤 구리온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묵상 거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곡창 제대인 네게브 언덕에 자리잡은 두 개의 무덤에는 이스라엘의 초대 총리였던 벤 구리온과 그의 아내가 잠들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땅의 대부분은 황무지였습니다. 특히 네게브는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매우 척박한 땅이었습니다. 1948년 독립한 이스라엘이 초대 총리에 오른 벤 구리온은 바로 이 네게브 황무지를 개간하는 것만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네게브 황무지가 필요한 것은 물과 사람의 땀’이라고 외치며 개간 사업을 주도해 나갔습니다. 그는 13년 간 총리직에 있으면서 황무지 개간에 온갖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송수관을 만들어 갈릴래아 호수에서 물을 끌어왔고 지하수를 개발하였으며 바닷물을 담수화하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씨를 뿌려 첫 수확을 거둬들였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적이라며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 후 그는 명예롭게 총리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총리 공관에서 나온 그는 운전사에게 네게브로 갈 것을 부탁했습니다. 네게브에서는 농부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벤 구리온은 황무지를 개간하는 것을 돕고 싶으니 그들의 공동생활 형태인 키부츠(kibutz)의 일원으로 받아달라고 말했습니다. 주민들의 따뜻한 박수 속에 벤은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 때 그의 나이 이미 77세였습니다. 다음날부터 벤은 다른 농부들과 똑같이 손에 흙을 묻히며 일을 했습니다. 때때로 너른 바위에 앉아 땀을 식히며 일꾼들과 농담을 주고받는 벤은 영락없는 농부였습니다.

    벤이 총리로서 받은 특혜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단지 벤을 찾아오는 세계적인 지도자가 너무 많아 그들이 쉬어 가게 만든 4평짜리 방이 유일한 특별 대우였습니다. 1973년 벤은 87세의 나이로 네게브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가 남긴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한 푼의 동전도 단 한 개의 저금 통장도 한 평의 땅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남긴 것이라곤 척박한 네게브 땅을 황금 밀밭으로 바꿔 놓은 정신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사막에 금자탑을 세운 벤 구리온의 그 정신, 그 마음으로 우리도 사심없이 주님의 복음을 세상에 선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 로마서의 말씀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죄 많은 우리 인간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 우리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하느님과 원수되었던 우리 인간을 하느님과 화해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생명을 바쳐 사랑을 확인해 주신 주님의 사랑, 그 사랑은 우리를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시고 있고 이 거룩함이 온 세상에 널리 퍼져서 모든 이가 구원의 은총을 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구원의 은총이 주님을 모르는 모든 이들에게 널리 널리 퍼져 나가 하느님 나라가 이 땅 위에 이룩될 수 있도록 헌신의 정열을 바쳐 복음선포의 길에 앞장서도록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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