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10주일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가를 배워라
제1독서 : 호세 6,3b-6
제2독서 : 로마 4,18-25
복음 : 마태 9,9-13
이 주일의 제 1독서와 복음은 내용상으로도 서로 통하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당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아주 적절한 대목을 바로 호세 6,6,에서 취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동물을 잡아 나에게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가를 배워라”(마태 9,13).
잠시 후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여기서 예수께서는 비록 호세아서 자체의 내용을 약간 변화시키는 하지만 거기에 담긴 반형식주의적 의미는 예언적 형태 그대로 고스란히 유지하고 계시다. 예수께 있어서는 오직 외적으로만 하느님께 다가가게 하는 어떤 전례의식의 형테를 고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이 더중요하다. 특히 그 이웃이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방황하고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역설적이지만, 말하자면 하느님은 그분의 흔적조차도 있을 것 같지 않으 로 거기에서 만날 수 있는 분이시다!
이런 까닭에 진실한 그리스도 신자는 ‘진리’를 수호하고 ‘정의’를 실천하면서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바리사이파사람들이 진리의 수호자로 또 정의의 실천자로 행세했지만 예수께서는 복음 속에서 그들의 정체를 준엄하게 폭로하신다 :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옳은체 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넣희의 마음보를 다아시낟. 사실 사람들에게 떠받들리는 것이 하느님께는 가증스럽게 보이는 것이다”(루가 16,15).
“내가 반기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호세아서에 의한 제 1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웃사람들로부터 아랫사람들에게 이르기까지 온통 빠져 있었던 종교적, 윤리적, 사회적 타락의 참상을 단도직입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야훼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그러한 타락 때문에 그들이 아시리아의 왕 디글랏빌레셀3세와 보호조약 맺으려 시도함에도 불구하고(2열왕 15,19 ; 16,7-9 참조) 그들의 나라가 파멸되리라고 위협하신다 :“에브라임은 죽을 병이 든 줄 알아 아시리아를 찾아가고, 유다는 제 몸에 입은 상처를 보고 대왕에게 특사를 보내나, 그는 너희 병을 고치지 못하고 너희 상처를 아물게 하지 못하리라”(호세 5,13).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의 우정과 보호를 되찾고자 속죄의 전례를 행하며 그분께서 자기들의 훌륭한 회개의 약속을 듣고 분노를 가라앉히시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들의 언약은 다만 일시적 감정에 의한 것일 뿐 아침해를 넘기지 못한다 : “그리운 야훼님 찾아 나서자… 어김없이 동터오는 새벽처럼 그는 오시고…”(호세 6,3).
하느님께서는 마음으로부터 회개하지도 않고 또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도 않은 이러한 겉치레 전례의식을 거절하며, 이제까지 그들이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예언자들의 말을 상기시키신다 : “에브라임아,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너희 사랑은 아침 안개 같구나. 덧없이 사라지는 이슬 같구나. 그래서 나느 예언자들을 시켜 너희를 찍어 쓰러뜨리고 내 입에서 나오는 말로 너희를 죽이리라\”(4-5절).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예언자들에 의해 전헤 받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고 형제들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 야훼와의 계약에 ‘충실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한 하느님의 벌은 계속될것이고 그나라의 파멸은 가중될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순명과 형제들에 대한 사랑 이것이 곧 야훼께서 받아들이시는 참된 예배이다(호세 14,3 참조).
이와 같은 내용이 구약성서의 내적 영성의 최고봉 중의 하나를 이루고 잇는 오늘 호세아서의 마지막 짧은 구절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 “내가 반기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제물을 바치기전에 이 하느님의 마음을 먼저 알아다오”(6절). 그러므로 동물을 잡아 ‘희생제물’을 바치는 순수 외적인 제례의식 대신에 ‘사랑’과 ‘하느님ㄴ의 마음을 아는 일’이 요구되고 있다!
‘사랑’이라는 개념에 일치하는 히브리 말은 폭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khesed라는 말로서, 그 원초적 의미는 ‘계약에 따르는 태도’ 즉 계약을 맺은 당사자들이 서로 예속되어 있는 ‘결속’의 형테를 뜻한다. 그 말을 하느님께 적용할 때는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계약에 대한 그분의 ‘충실성’과 또한 선민에 대한 그분의 특별한 애정을 의미한다(탈출기34,6 참조).
실제로, 그 말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혼인’관계를 묘사하는 데 주로 사용된다 :“너와 나는 약혼한 사이. 우리 사이는 영원히 변할 수 없다. 나의 약혼 선물은… 한결같은 사랑과 뜨거운 애정이다”(호세 2,21).
하지만 하는미의 사랑은 또한 필연적으로 인간 편에서의 khesed의 태도 즉 성실한 우정, 자기 희생, 온유함, 자비로운 등 한마디로 말해 하느님의 뜻에 대한 기쁜 순명과 이웃형제에 대한 애덕을 통해 드러나는 ‘사랑’을 요구한다.
“제물을 바치기 전에 이 하느님의 마음을 먼저 알아다오”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더불어 ‘그분의 마음을 앎’이 필요하다. 그분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 자신을 의탁함으로써 그분을 체험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계약을 통해 인간을 당신 자신에게 결합시키시어 인간에게 당신의 마음을 알려주신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그분과의 계약에 ‘충실하고’ 그분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드리며 그분을 사랑함으로써 그분의 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호세아서에서는-이미 앞서 말한것처럼-‘하느님의 마음을 안다’는 개념과 혼인의 개념이 연결되고 있다 :“진실도 나의 약혼 선물이다. 이것을 받고 나 야훼의 마음을 알아다오”(호세 2,22).
그러므로 ‘하느님의 마음을 아는 것’은 그분께 대한 ‘사랑’과 더불어 우리에게 하느님과의 만남의 유일한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러한 관점 밖에서 바라보는 하느님은, 흔히 우리가 우리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어떤 위기의 순간들이나 두려움 때문에 향을 피워대거나 몇 마디의 기도를 읊조리며 매달리는 하나의 ‘객체’에 머물고 말 뿐, 우리 생명의 유일한 ‘주체’가 되어야 할 그분은 “우리 자신보다 우리에게 더 친밀한”(성아우구스티노)존재가 되지 못하신다.
여기서 호세아 예언자는 그 당시 히브리인들의 신앙심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가르침을 ‘생활화하기’보다는 그분에 대해 ‘이야기하는’일에 더 급급하고, 또 “우리 자신이 그분의 찬미”(성아우구스티노)가 되기보다는 고작 그분께 대한 찬미의 노래를 부르기에 더 급급한 모든 크리스찬들에게 얼마간 남아 있는 ‘유다인 기질’의 신앙심도 바로잡아주고자 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온통 외적 형식위주의 전례의식을 공박하고 있는 오늘의 응송은 매우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하겠다 :“네번제가 항상 내앞에 있으니, 너를 제사 때문에 꾸짖음이 아니로라. 누리와 그 안에 찬 것이 내 것이니, 굶주려도 너에게는 말하지 않으리라. 찬미의 제사를 하느님께 바치라, 지존께 네서원을 채워드리라. 너 나를 부르는 곤궁한 날에, 나는 너를 구하고 너는 내게 영광을 돌리리라”(시편 49,8.12.14-15).
“예수께서 세관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시고 ‘나를 따라오라’ 하고 부르셨다”
짧은 오늘 복음(마태 9,9-13)은 문학적으로나 교리상으로 아주 잘짜여진 작품으로서, 어째서 그리스도만이 인간들의 마음을 ‘회개시킬 수 있으시며’ 그들의 잘못을 사랑으로써 덮어줄 수 있으신지를 가르쳐주고자 한다. 사실, 이용서와 자비야말로 어떤 전례의식보다도 더 가치있는 ‘의식’이다. 그리고 바로 이의식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께 봉헌하게 하시고, 또한 모든 믿는 이들에게 요구하시는 참된 예배이다!
제일 먼저 마태오-마르 2,13-14과 루가 5,27-28에서는 ‘레위’라고 칭하고 있다-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오고 있다. 예수께서는 “자기 동네”(1절)즉 가파르나움을 지나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오라’하고 부르셨다. 그러자 그는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 나셨다”(9절). 루가 복음에서는 짤막한 삽입구가 첨가되어 있다 : “그러자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 나섰다”(5,28). 이러한 태도는 다른 사도들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는 ‘예수를 따를 때’의 독특한 태도이다(마태 4,20.22등 참조).
이 대목을 깊이 있게 고찰해볼 때 참으로 우리는 8-9장 전체에 걸쳐 나오는 다른 모든 기적들보다도 더 놀라운 사실을 접하게 된다. 그것은 여기서 기술되고 있는 기적들이 모두 아홉가지 인데 다같이 다음과 같은 동일한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그리스도의 말씀 한마디면 사람의 운명은 물론 그 삶의 의미와 내용까지도 완전히 바뀌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말씀’으로 하여금 그토록 큰 ‘능력’을 갖게 하는 것일까? 이것은 예수께서 폭풍우가 치는 바다와 바람을 ‘꾸짖으신’ 후 그에 놀란 제자들이 제기했던 물음의 내용이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인데 바람과 바다까지 복종하는가?”(마태 8,27). 신비는 말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말씀을 하시는 ‘분’에게 있다 : 예수님의 말씀은 새로운 상황을 ‘창조하는’ 능력과 아직 드러나지 않은 여정을 ‘밝혀주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가다라 지방의 마귀들린 사람들이 외쳐댄 것처럼(마태 8,29)-‘하느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모든 문제는 그 ‘말씀’ 앞에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느냐 못 드러내느냐에 달려 있다 : 그 말씀 외에는 아무것에도, 이를테면 마태오가 지니고 있었던 돈이나 사회적 지위나 명예 같은 것에조차 마음을 두지 않고 또 아무런 계산이나 속셈을 품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그 ‘말씀’보다 다른 어떤 것을 ‘더’ 사랑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있지 않고나 또는 조금밖에는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씀’이 곧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 비추어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믿음’에의 부르심뿐만 아니라, 사도적 일치와 풍요로움을 정점으로 하고 있는 교회의 여러 가지 ‘직무’에의 부르심에 관한 문제를 소홀히 할 때마다 우리는 하느님께 잘못을 범하고 있거나 또는 그럴 우려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 들을 수 있다. 만일 마태도가 응답을 하지 않았다면 다른 어느누구도 그의 역할을 대신 할 수없었을 것이다. 아무도 그의 복음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단테가 없었다면 다른 어느 누구도 단테가 될 수는 없었을 것ㅅ이다. 하느님조차도 이사람이 저 사람이 될 수 있게 하는 식으로 사람들을 대치시킬수 없으시다. 또 그렇게 하고자 하지도 않으신다.
“어찌하여 당신네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음식을 나누는 것이오?”
그런데 마태오는 즉시 그리스도를 ‘따랐을’뿐만 아니라, 다른 공관 복음사가들에 의해 더 명백히 밝혀진 것처럼 예수와 그분의 제자들 그리고 다른많은 친구들을 위한 잔칫상을 마련하여 자신의 ‘기쁨’과 ‘감사의 정’을 표하고자 했다. 그러자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당신네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음식을 나누는 것이오?’ 하고 물었다.”(11절). ‘세리’들은 세금을 매기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평판이 좋지 못했고 자연히 ‘죄인’들과 같이 취급되었다. 때문에 평판이 좋지 못했고 자연히 ‘죄인’들고 같이 취급되었다. 때문에 이 두 개념은 복음 속에서 자주 혼합되어 사용된다. 유다 전통에 따르면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사람들과도 함께 식사를 할 수 없었다(마르 7,3-4.14-23 ; 사도 10,15 ; 15,20 등 참조). 그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만일 예수께서 그런 전통에 따라 행동하셨다면 기것해야 ‘종교인들’ 또는 소위 내적이 saus보다는 외적으로 ‘깨끗한 이들’이 되고자 하는 경향을 조장할 수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사실, 인간의 마음을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했다면 거의 모든 인간들에게 구원의 희망이 막혀버렸을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단지 어떤 외적 사실에 근거해서 사람들을 가려내는 하나의 종파로 전락해버렸을 것이고 더 나아가 인간들을 모든 짐-죄라고 하는 가장 파괴적인 짐을 포함해서-에서 해방시키기보다는 억누르는 도구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이런 까닭에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태도를 더더욱 못마땅히 여기면서 그들의 전통과 형식주의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의 특권의식의 모든 장벽들을 무너뜨려버리신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동물을 잡아 나에게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가를 배워라.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12-13절).
예수께서는 복음 전체를 통해 가장 혁신적인 이 말씀으로써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기대를 완전히 뒤엎으신다. 하느님께 대한 우선권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그분을 보다 더 필요로하는 사람들 즉 ‘병자들’과 ‘죄인들’을 위한 것이다. ‘선한 사람들’-만약 이세상에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은 하느님께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사실 그들은 스스로 선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구태여 하느님을 찾을 필요도 없고 자신의 힘만으로도 스스로를 지탱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또 그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실질적으로 볼 때 ‘무신론자들’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께서 그들의 생활 영역에 들어와 당신의 척도에 따라 또 당신 은총의 선물로써 그들을 ‘선한 사람들’이 되게 해주시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사도 바울로가 자기 시대의 유다인들에게 말하고 있듯이(로마10,3 참조) 그들 나름대로의 ‘정의’를 추구하고 있다.
예수께서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12절)고 하신 말씀은 8-9장에 걸쳐 예수에 의해서 치유된 모든 육체적 병자들(나병환다, 소경들)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용서를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2.6절 참조)즉 영신적 병자들에 대한 말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모두는 그리스도라는 천상 ‘의사’의 친절한 돌보심을 입고 있는 것이다. 비록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같이 그분앞에 내세울 만한 공로가 없더라도 그분이 우리에게 쏟아주시는 보다 큰사랑이 있기 때문에 그로써 충분하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우리와 같이 죄의 상태에 있는 모든 형제들에 대한 이해심을 넣ㅂ혀줄 것이다.
여기서 마태오 복음사가만이 덧붙이고 있는 “너희는 가서‘내가 바라는 것은 동물을 잡아 나에게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하신 말씀이 무슨뜻인가를 배워라”(13절)라는 말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무엇보다도 ‘죄인들’과 음식을 나누지 못하는 전통적 규범을 어겼다고 해서 공박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드높여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또한 마태오 복음사가의 심중에는 모든 믿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모범적 행동을 본받아 갈라진 형제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형제들을 받아들이라는 권고도 들어 있음이 분명하다 : 사랑과 용서 그리고 하느님과 우리와 사회에 냉담한 사람들을 이해하고 가까이 하려는 노력이야말로 우리가 주님께 봉헌할 수 있는 가장 참된 ‘예배’요 ‘제사’이다.
그리스도께서 온세상 도처에 세우러 오신 교회는 선한 사람들과 완전한 사람들의 교회가 아니라, 매일매일 하느님께 자신들을 용서해주심과 또한 끊임없이 무수한 다른 형제들도 용서해주실 수 있는 ‘표지’를 이루어주심에 대해 감사의 찬미가를 부르고 있는 ‘죄인들’의 공동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은 틀림없는 곳이고 누구나 받아들일만한 사실입니다. 나는 죄인들 중에서 가장 큰죄인입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앞으로 당신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사람들에게 나를 본보기로 보여주시려고 먼저 나에게 한량없는 관용을 베푸신 것입니다”(1디모 1,15-16).
“아브라함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의한 제2독서에서 사도 바울로가 ‘믿음을 통해’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은 사장 전형적인 인무롤 제시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태도는 이미 우리가 보았듯이 예수께서 복음 속에서 냉혹하게 가면을 벗기고 계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태도와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믿어서 마침내 ‘네 자손은 저렇게 번성하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만민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의 나이가 백 세에 가까워서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이 되었고 또 그의 아내 사라의 몸에서도 이제는 아기를 바랄 수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믿음을 가지고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믿음을 보시고 아브라함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습니다’”(로마 4,18-19.22). 야훼 하느님께서 그에게 ‘자손’을 하늘의 별들만큼이나 많이 주시리라고 약속하신 그때(창세 15,5참조), 그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절망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18절) 믿었다 :즉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자신의 것은 없다고 생각했고 마침내는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 이 지니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내세울 만한 것이 못되는 출산 능력까지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나이가 많았고 아내 사라도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하느님께서 모든 약속을 ‘이루어주시리라’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그는 하느님께 온전히 자기 자신을 봉헌함으로써 모든 ‘영광’이 하늘로부터 그에게 이르게 되었다.
아브라함은 마태오에 앞서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따랐고 또 우리모두보다 앞서 믿음의 역설적 자세를 받아들였다. 우리는 그러한 믿음의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즉 우리는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 분을 믿어야 한다. 예수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가 우리를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신 분이기 때문이다(로마 4,24-25 참조). 곧 예수 그리스도는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음식을 나누는 것(마태 9,11)보다 훨씬 더 엄청난 일을 행하셨다 :그분은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죄인들과 어울리시는 예수님
1. 말씀읽기: 마태9,9-13
마태오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다 (마르 2,13-17 ; 루카 5,27-32)
2.말씀연구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로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단죄하던 세리를 부르십니다. 세리는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사람을 말하는데 로마의 식민지로 살아가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세금을 거두어서 로마에 바치는 세리를 좋아할 리가 없었습니다. 또 유다인들은 이방인들과 어울리지 않았는데, 또 어울렸을 경우에는 몸을 씻는 정결례를 거행하였습니다. 그러니 이방인들과 어울리고, 돈을 만지는 세리를 좋아할 리 없고, 또 그들을 죄인으로 취급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세리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9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세리는 징세 청부인, 곧 세금 징수관을 말합니다. 이들은 정부로부터 어느 구역의 세금을 사 들입니다. 곧 우선 얼마의 금액을 국고에 내고(이를테면 그 구역의 세금 징수 권한을 사는 것입니다), 세금을 거두어들입니다. 국고에 낸 금액보다 많은 세금을 거둔다면 물론 그들의 소득이 됩니다. 이 징세 청부인이 신분이 높은 사람이라면 지방의 대표자, 곧 세관장을 파견합니다. 자케오는 세관장으로 그 밑에 세금 징수세리, 통행세 징수세리, 시장세 징수세리 등 여러 분야의 세리들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리들은 아주 욕심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였고, 가난한 백성을 괴롭혔기 때문에 뱀처럼 지겨워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로마를 위해 일하고 있으니 세리란 죄인과 같은 뜻을 가진 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마태오는 단순한 세리로 아마 카파르나움 시장의 하급 세리로 읍내로 들여오는 화물의 세금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이 마태오는 마르코와 루카가 말하는 “레위”와 같은 인물입니다. 그런데 왜 마르코와 루가는 마태오라고 쓰지 않았을까요?
다른 복음사가들은 마태오에 대한 존경과 세심한 배려 때문에 마태오의 별명인 ‘레위’라고만 쓴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태오 자신은 ‘세리 마태오’라고 뚜렷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떠한 신분이라 할지라도 회개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마태오는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 마태오를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그런데 아무런 설명이나 조건이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오도 아무런 조건 없이 벌떡 일어나서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마치 자석이 쇠붙이를 끌어 들이듯이 예수님께서는 마태오를 부르십니다. 쇠붙이가 자석에게 끌려가듯이 마태오는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피조물의 주인께서는 자신이 바라시는 대로 사람을 끌어당길 수 있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예!”할 수 있습니다.
마태오 사도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마태오는 사도이며 동시에 복음사가입니다. 마태오란 히브리말로 ‘하느님의 선물’이란 뜻입니다. 또한 ‘위대한’이란 뜻을 가진 라틴어의 Magnus와 ‘하느님’이란 그리스어의 Theos의 합성어로 본다면 ‘하느님을 위한 위대한 자’가 될 것이며, 또는 ‘손’이란 라틴어의 manus와 그리스어의 Theos의 합성어로 본다면 ‘하느님의 손’이란 뜻이 됩니다. 이름은 레위일 것입니다. 출생은 갈릴레아 지방으로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그는 세리였습니다. 주의할 일은 마르코와 루가가 단순히 마태오라고 하여 토마스 앞에 기록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마태오 자신은 세리라는 직책을 밝히고 토마스 다음에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세리는 죄인의 대명사였기에 다른 사도들은 마태오를 세리라고 하지 않고 레위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겸손한 마태오는 자신을 세리라고 있는 그대로 표현했던 것이고, 자신을 토마스 사도 다음에 기록했던 것입니다. 마태오는 년간 유다와 에디오피아에서 전교활동을 했고, 이집트의 에깃부스왕의 왕자를 기적으로 치유하였습니다. 이로써 왕가 전체가 신자가 되고 왕의 딸 에피케네이아도 동정녀로 지내기로 서약하였습니다. 그러나 헤르따고라는 왕이 왕위에 올랐고 에피케네이아와 결혼을 하려고 하였지만 거절당하자 공주도 죽이고 마태오도 죽임(90년)을 당했습니다. 유해는 이탈리아의 살레르노에 모셔져 있습니다.
10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마태오는 자신의 집으로 예수님을 모십니다. 마태오는 자신의 친구들과 동료들을 불러서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의롭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고 죄인으로 판명 받았던 그들이 그들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11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와서 시비를 걸었습니다. 예수님께 항상 당하기만 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직접 시비 걸 용기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에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율법을 지키는 이들이 죄인들이나 부정한 이들과 함께 한다는 것을 있을 수가 없는 일이고, 비위가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죄인들은 유다인의 사회생활에 참여할 수가 없었고, 재판할 때 증인으로 나설 수도 없었습니다. 도박, 고리대금, 도둑질, 깡패, 그 밖에 일반적으로 모세의 율법을 지키기 않는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세리나 죄인들과 한 자리에서 식사를 하면 안 된다는 금령은 없었으나, 율법학자들은 그런 교제를 위험한 일이라 하여 금하고 있었고, 백성들은 이 금령을 지키고 있었습니다(사도10,28-29;11,2-3;갈라2,12).
누가 의인이고, 누가 죄인일까요? 누가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나는 의인이라고 자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던지는 돌에 많은 이들이 죄인으로 찍혀서 가슴 아파 할 것입니다.
누가 죄인이고 누가 의인입니까? 의인과 죄인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나는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 아닙니까?
12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제자들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이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직접 대답을 해 주십니다. 의사는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분은 병자이며 죄인인 세리를 위해서도 오셨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건강한 의인(?)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습니다. 한방 먹은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이 어떻게 의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죄인이라 하여 멀리하는 그들이 어떻게 의인이라고 불리 울 수 있으며 어떻게 그들의 목자라고 불리 울 수 있겠습니까?
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께서는 완고하여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하느님께서는 호세아(6,6)의 입을 통하여 당신이 무엇을 가장 좋아하시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단 위의 제물을 바치는 것도 기쁜 일이지만 그보다 먼저 마음에 사랑과 자선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느님을 존경하는 예배의 중심입니다. 만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불행한 죄인을 불쌍히 여겼다면, 율법을 세밀히 지키는 것 이상으로 하느님께서 즐겁게 받아 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람을 버린다는 뜻은 아닙니다. 착한 사람보다도 더 하느님을 필요로 하는 죄인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지은 자들과 식사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청하며 새로운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고 있는 사람들과 식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가르침을 청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기에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나는 결코 고백소를 찾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주님께 용서를 청하는 이들을 예수님께서는 늘 함께 하십니다.
3. 나눔 및 묵상
1. 나는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의인입니까? 예수님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죄인입니까?
2. 함께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일 수도 있고, 어려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좋은 사람과 함께라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하지만 힘든 사람과 함께라면 밥이 넘어가지도 않을 것입니다. 나는 내 옆에 있는 사람들 중 어떤 사람과 함께 하고 싶습니까? 나는 또 어떤 사람이 함께 하려고 하고 있습니까?
3. 예수님을 따르면서 내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버린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바뀐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바뀌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연중 제10주일
1. 최용진 신부(가)/ 2 2. 한종훈 신부(가)/ 4
3. 박인선 신부(가)/ 5 4. 간음하지 말라(가)/ 7
5. 안충석 신부(나)/ 10 6. 수원교구 사제단(나)/ 13
7. 예수 마귀를 쫓아내심(나)/ 15 8. 임승필 신부(다)/ 18
9. 송광섭 신부(다)/ 19 10. 소년아, 내 말대로 일어나(다)/ 21
11. 생명과 죽음(다)/ 23
1 연중 제10주일 마태 9,9-13 (가) 선한 사람보다 죄인을
최용진 신부
죄인임을 인정하면서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오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하는 말씀을 정당화하시기 위해 마태오를 부르셨습니다. 예수께서 죄인인 마태오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 오시오” 하자 예수를 따라 나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는 마태오 집에서 초대를 받아 세리와 죄인과 함께 음식을 먹게 되었는데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반문하기를 어째서 당신네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 거요 하고 말했습니다.
이때 예수께서 이 말을 옆에서 들으시고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의사는 건강한 사람에게 필요하지 않고 병자에게 필요합니다. 당신들은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내게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 대한 자선이다 하신 말씀의 뜻을 좀 배우라”고 하시면서 예수님 자신은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오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논박했습니다.
즉 이 말씀은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의 사명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다같이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에 대해서 묵상해 봅시다. 예수님은 먼저 죄인을 부르십니다. 예수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오를 보시고 “나를 따라오시오” 하고 부르셨던 것입니다. 먼저 말씀을 주시며 먼저 대화를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 인간은 말씀을 통하여 다른 인간과 위격적인 만남을 이룹니다.
말씀은 인간이 자기 속을 남에게 들어내는데 있어서 정상적인 통교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인간은 때로는 자기 지식만을 전달하기도 하고 때로는 내밀한 원의와 희망을 지식과 함께 전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가장 내밀한 비밀을 마음속에 포함시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사실 아무리 정확하고 훌륭한 말씀이라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완전히 그 말씀 속에 담아서 전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전부 다 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결국 자기 자신과 자기 지식의 일부분밖에는 남에게 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영적인 풍요로움을 함께 나누고 싶은 그 사람에게만 자기의 속을 드러내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상대편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고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에 따라 마태오는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여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조건 응하였습니다. “나를 따르시오” 그 말씀에 체면을 무릅쓰고 자기의 내밀한 속을 드러내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마태오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부르시고 계십니다. 부르심에 응할 때는 결코 우리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먼저 불러 주셔야 합니다. 구약에서는 먼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셨고, 또한 신약에서 모든 인류에게 구원을 약속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부르시고 계십니다. 마태오 역시 그 부르심은 구원을 약속한 것입니다. 그 부르심은 마치 메시아 시대의 기쁨의 상징이요 하느님과의 일치의 상징이며 죄에서의 해방을 가져다주기 위함입니다.
다음으로, 부르심에 응할 때는 자신을 온전히 포기해야 합니다. 마태오 역시 주님이 부르시자 모든 것을 버리고 즉시 주님을 따라 나섰던 것입니다. 아무런 조건도 부담도 없이, 오직 기쁜 마음으로 응했습니다. 자기의 삶을 포기하고 영원한 삶에로 전환한 것입니다. 즉 새로운 삶을 택했다는 뜻입니다. 사도 베드로 역시 주님께서 부르실 때 그물을 버리고 처자식도 버리고 주님을 따르지 않았습니까? 자신을 온전히 포기한 상태는 죄에서의 해방, 노예에서의 해방, 구속에서의 해방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죄없다고 자처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부르시지 않고 죄인인 마태오를 부르시고 세리와 죄인들과 대화도, 초대도, 받으시고 하셨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접촉하면 부정탄다고 그들과 식사는커녕 한마디 말조차도 하지 않으려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자들을 멀리 하시고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초대도 받으시곤 하셨습니다. 신자 여러분! 우리 중에 누가 죄없다고 말하겠습니까? 우리는 마태오와 같이 주님의 부르심에 다 응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주님 부르심에 우리 자신을 포기하고 주님을 잘 따랐는가. 의인으로 자처하지는 않는지 반성해 봅시다. 주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의인은 주님에게 필요치 않고 죄인은 주님을 필요로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의인으로 여깁니까? 우리는 주님을 필요로 하는 죄인들입니다. 죄인으로 인정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 가까이 계시며 우리를 항상 불러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항상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억압당하는 사람들에게 무한한 동정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은 참회하는 죄인에게는 한없는 자비와 용서를 베풀어주시는 죄인들의 친구이십니다.
우리는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을 깊이 인식하여 죄인인 우리게도 불러 주시도록 진정한 참회를 발하면서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도록 노력함으로써 부르심에 귀를 기울입시다.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오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아멘.
2 연중 제10주일 마태 9,9-13 (가) 주님의 구원
한종훈 신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 (로마 10,13)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도와달라”고 하는 부르짖음으로 꽉 차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배가 고프면 즉시 울부짖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곧 달려와서 허기진 어린이를 도와줍니다. 이런 짓은 어린이에게 있어서는 목숨을 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한 가정을 비롯해서 사회든 국가든 어려운 일을 당하면 도움을 청하고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정은 어려움을 맞이할 때 대항하여 도와주는 공동체이다”라고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고 있습니다. 의학의 발전은 바로 병은 사람들의 부르짖음에 대한 도움을 줌에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의사의 마지막 임무는 죽음에 대한 증명이 아니겠습니까?
죽음이라는 문제는 가장 어려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으로써 그 사람의 세상에서의 역사는 마지막이 되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는 많은 철학자들이 죽음에 대해 무진 애를 쓰며 연구하였지만 확실한 대답은 못해 주고 있습니다. 현대의 대표적인 철학자 하이데거는 “죽음을 마주하여 용기를 가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에 관한 참다운 문제는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 다음에 오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일 죽음 그 자체로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죽음 다음에도 남아 있을 생명이 없는 것이라면 인생은 참으로 편리한 것입니다. 다른 동물보다도 편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이 싫고 귀찮으면 자살로 간단히 결말을 지으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방식은 로마제국 시대에 사상가들이 권장한 일이기도 합니다. “매일 즐겁게 사십시오.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할 수 있는 한 즐거움의 술잔을 드십시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도대체 죽음에서 구원될 수 있는 즐거움이 있을 수 있을까요? 이 문제는 인간에 있어 가장 큰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죽음에 관해 생각하려 하지 않습니다. 최대의 적인 죽음에 대해 사람은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성서의 말씀을 상기합시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로마 10,13). 어떻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일까요? 우리는 어차피 하느님 대전에 도달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구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기쁜 소식이 있었음을 상기하여 하느님을 찾도록 시도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시도해볼 뿐 아니라 연습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교만한 탓으로 믿음(신앙)에 의한 구원을 저버려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을 찾습니다. 기도를 바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도움을 얻지 못합니다. 되풀이해서 하느님께 도와 주십사 하고 외침으로써 영원한 세상을 점차로, 실제로 깊이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의 고독함에 관하여 잠깐 생각해 봅시다. 사람이 혼자 있으면 반드시 쓸쓸함을 느끼고 고독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것도 인간에 대한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계획 중 하나입니다. 사람이 외로움을 느낄 때 그의 마음은 지옥과도 같은 것입니다. 현대적인 표현으로 노이로제는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요즈음은 여러 가지 새로운 시설들이 어느 정도 사람의 외로움을 덜어주고는 있지만 문제는 나이를 먹어갈수록 일을 점점 더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사는가? 인생의 의미는 무엇으로 채워지는가? 현대인들은 인간존재에 대해서 더 많은 괴로움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영원한 삶에 관해 말씀하신 하느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때가 올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영원으로 향한 희망(망덕)으로 인해서 이 세상에서의 어떠한 무거운 짐도 어렵지 않게 지고 갈 수 있을 것입니다.
3 연중 제10주일 마태 9,9-13 (가)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오지 않고 오직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박인선 신부
우리는 오늘의 복음에서 간단하지만 많은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마태오의 간택입니다. 세관에 앉아있던 세리 마태오는 예수님의 “나를 따라오시오” 라는 한마디 말씀으로 즉시 예수를 따라 나섰습니다. 다음 하나는 바리세이파 사람들과의 논쟁입니다. 예수를 따라나선 마태오는 예수를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예수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데, 그 자리에는 제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태연히 같이 식사를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목격한 바리세이인들은 예수의 제자에게 항의했습니다. “어째서 당신네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저렇게 같이 먹고 마시고 있는 거요? 당신네 스승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지 않소?” 아마도 예수께서 그 말씀을 들으셨나 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이 답답한 사람들! 의사에게 성한 사람이 찾아오는 것을 보았소? 의사는 병자에게 필요한 것이요, 당신네들이 그렇게도 구약성서를 들먹이는데 호세아서의 말씀은 모른단 말이요? 기록되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내게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 대한 자선이다 하였소.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오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왔기 때문에 의인인체 하는 사람들보다는 이렇게 죄인들과 같이 먹고 마시겠소”
이상이 여러 교형자매들이 들으신 오늘 복음의 내용입니다만, 오늘은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에 대해 같이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예수께서 활동하시던 당시에는 몇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우선 율법학자들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바리세이파를 들 수 있겠는데, 그들은 율법을 충실히 지키는 사람들이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구원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신념으로 가끔씩은 엉뚱한 고집을 부린다는 것을 성서에서 알 수 있겠습니다. 사두가이파도 있었는데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다음에는 유대아와 갈릴레아 사이에 다소 비정통의 신앙을 가진 사마리아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으로 간주되어 유대아인들은 그들과 접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음으로는 동족들에게 사기꾼이요 배신자라고 백안시되면서 로마인들을 위해 일하는 세리들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창녀 등 죄인의 무리가 나타납니다. 소외 바리세이인들이나 율법학자들은 세리나 창녀, 혹은 사마리아인들과 접촉하면 부정해진다고 하여 그들과 같이 식사를 하기는커녕 그들과는 한마디의 말조차 하지 않으려 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바리세이인들과도 식사를 하실 뿐 아니라 태연히 세리의 집에도 초대받아 가셨습니다. 어떤 때는 먼저 청해서 손님이 되기도 했습니다. 야곱의 우물에서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청하시고, 그녀와 이야기 하셨으며 그들에게 손님이 되기도 했습니다. 창녀가 예수의 발을 눈물로 씻고 향액을 뿌릴 때에 그 여자에게 “당신의 죄를 사한다”고도 하셨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러한 일은 아직 아무도 하지 않았던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태연히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행동의 정당성을 주장하시기까지 하셨으니 그 일에는 분명히 어떤 커다란 뜻이 있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그 뜻은 바로 “모든 사람에게 열려진 하느님의 나라” 그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만의 구원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는 모든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크신 선물이라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8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외국인인 가파르나움의 백부장에게 “많은 사람들이 동쪽과 서쪽에서 와서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치에 참석할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심으로써, 이제는 이스라엘이라는 좁은 경계가 없어지고 하느님 나라에 참여할 사람들은 온 세상에서 모여든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죄인들과 같이 식사를 하셨다는 것에서도 마찬가지의 말을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께서 죄인들과 그저 사이 좋게 지내시면서 죄인으로 버려 두려고 하신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들은 불행 중에 있었고, 모든 사람들에게서 무시와 천대, 손가락질을 받았는데, 이제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를 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과 식사하셨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가 그들에게 임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메시아 시대의 기쁨의 상징이요 하느님과의 일치의 상징이라는 의미에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신 것은 하느님 사랑의 지배와 죄에서의 해방을 가져다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루가복음 19장에서와 같이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임했습니다. 이 삶도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습니다” 하고 죄인인 자캐오에게 자신 있게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오늘의 복음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해 주시는가를 보았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헌장 8장에서 교회는 그 품에 “죄인”들을 품고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어쩌면 여기에 모인 우리 모두가 다 죄인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인이면 죄인일수록 그만큼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계시면서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죄인이었던 마태오가 “나를 따라오시오” 하는 주님의 한마디 말씀으로 선뜻 주님을 따라 나섰듯이, 죄인이던 자캐오가 주님을 그 집에 모시고 구원을 얻었듯이, 우리 모두도 죄인이라는 깊은 자각과 아울러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려고 노력하며, 그럼으로써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깊은 묵상과 실천이 따르도록 노력합시다. 그러면 우리 모두도 창녀였던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인 “당신의 죄는 용서받았소.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했으니 평안히 가시오” 하시던 말씀을 우리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의사는 건강한 사람에게 필요하지 않고 병자에게 필요합니다.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오지 않고, 오직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아멘.
4 연중 제10주일 마태 9,9-13 (가) 간음하지 말라!
주님의 말씀 중에 마태 5, 27-37절을 현세태와 비교해 보면서 묵상해 보자. 이 내용은 산상설교에 나온다. 준비기도를 드린 다음 성서 본문을 천천히 한두번 읽는다.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는 사람은 벌써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했다”.
우선 주 예수님의 가르침은 어디에 있을까? 그분은 육체의 순결은 물론이고, 그 이전에 마음의 순결을 강조하셨다. 행위로써 죄를 범하기 이전에, 악한 생각을 한다면 벌써 죄를 범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이 부분을 읽을 때 깨꿋한 마음, 순결한 마음씨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은 행복선언에서 “마음이 깨꿋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될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주님과 함께 우리의 현실을 보자.
이 시대는 여러가지 매체을 통하여 인간의 육체를 속속들이 밝혀내고 즐길 수 있는 데까지 즐기는 그런 시대가 되어버렸다.
순결이란 용어가 사라진 시대인지도 모르겠다. 육체는 상품 선전의 도구가 되어버렸고, 사랑의 수단이 아니라 쾌락의 노예가 되어버린 시대다. 식당에 가보면 점잖은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릴 그런 그림들이 사방에 걸려 있어, 기분이 좋지 않을 때가 있다. 보통 사람들은 당연하게 생각해버릴지 몰라도, 이런 현상을 보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히느님이 퍼부으신 유황불로 멸망된 소돔과 고모라 도시처험, “너무나 엄청난 죄를 짓고들 있다”(창세 18, 20)라는 말을 듣지 않을까 걱정된다.
순결이란 말이 사라진 시대
최근에 미국 대롱령이 여성 편력이 심하다고 하여 자주 매스컴에 오르내리더니 비밀들이 탄로나 세상을 시끄럽게 하다가, 대통령의 도덕성이 문제가 되어 탄핵으로까지 가지 않을까 하는 심각한 지경에까지 이른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이런 퇴폐풍조와는 대조적인 정반대의 현상도 있어 흐뭇하게 생각하며,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박수를 보내고 싶다. 몇몇 학교와 교회에서 젊은이들이 순결서약을 한다는 보도가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건전한 사고로 또는 신앙에 입각하여 자발적으로 한 것인지, 아니면 현실을 보고 통탄하는 의식있는 선생님들의 교육과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인지는 몰라도, 현세태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어 흐뭇한 마음 금할길 없다,
정결은 욕망 제어하는 덕챙
우리는 주님의 정신으로 들어가 보자! 성서의 말씀을 읽고 그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축복을 받을것이다. “간음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는 사람은 벌써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했다.” 우리는 말장난을 피해야 한다. 죄를 범한 자는 누구나 주님 앞에 나아가 솔직히 죄를 인정하고, “주님, 저는 죄를 범했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할 것이다.
사람을 “금수와 같다”거나 “짐승만도 못하다”라는 극한적인 표현을 쓰면서 비하시키는 경우가 있다. 아마도 인간이 타락하면 그 어느 생물 못지 않게 잔악해지고 짐승과 다름없이 되어버린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라, 이성이 없는 짐승들보다 더 잔악 해지지 않을까?
정결과 순결은 절덕(節德)에 속한다. 이 덕행은 쾌락을 느끼는 경향을 완화하고, 쾌락을 신앙으로 조명된 이성의 제약 아래 두는 초자연적 습성이다. 본성적으로나 습득적으로 절덕을 얻을 수 있으나, 신앙의 조명을 받아 얻어질 때 초자연적이된다. 절덕은 신앙 생활에 대단히 중요하다. 절식, 절주, 정결, 순결, 동정, 자제 등이 여기에 속한다.
순결한 것은 무엇이나(필릴 4, 8) 성령이 맺어주는 열매다.(갈7? 5,22-23)
성 암브로시오는 정결을 결혼에서의 정결, 과부들의 정결, 동정녀들의 정결로 구분하였다.
정결이란 신앙으로 조명된 을바른 이성 판단대로, 생활의 필요성에 따라 성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제어하는 덕행이다. 이를 위해서는 각자의 신분에 따라 수행의 자세가 요구된다.
교회는 주님의 정신에 따라 정결과 순결을 강조한다. 마음이 깨꿋하고 순수하면 순수할 수록 주님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일생을 하느님께 봉헌한 사람들의 수행 모습을 우리 모두가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