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6주일
밭에 뿌리신 것은 좋은 씨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제1독서: 지혜 12,13.16-19
제2독서: 로마 8,26-27
복음: 마태 13,24-43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태13,3-9)와 가라지의 비유 사이에는 분명히 어떤 유사성과 연속성이 있다.
전자에도 후자에도 다같이 씨 뿌리는 사람과 씨가 뿌려지는 밭이 등장하고 있으며 원수 또는 악마가 등장하고 있다. 전자에서는 원수 또는 악마가, 방심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가고 있고”(마태13,19) 후자에서는 가라지를 “뿌리고 있다”(마태 13,39).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 예비’
하지만 배경과 의미상으로 보면 아주 다르다. 즉 가라지의 비유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악의 명백한 결과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종말의 때가 오면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 내리게 될 마지막 ‘심판’이다.
“그러므로 추수 때에 가라지를 뽑아서 묶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끝날에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날이 오면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남을 죄짓게 하는 자들과 악행을 일삼는 자들을모조리 자기 나라에서 추려내어 불구덩이에 처넣을 것이다. 그러면 거기에서 그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마태 13,40-43).
그릿도인에게 있어서 ‘종말론적 예비’는 한편 가라지가 거대한 “세상이라는 밭”(38절 참조)을 황폐하게 하여 농부가 학수고대해온 수확을 형편없이 만들어 버리는 듯 여겨지는 때라도 그의 온갖 희망을 불러일으켜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마치 어떤 사람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미’ 단죄를 받은 것처럼 사람들 사이를 터무니 없이 갈라놓으면서 세상을 저주하는 일이 없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이와 같이 행동한다면 교회는 단지 악으로부터 자기 자신들을 지키기에 급급한 광신주의자들의 집단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아무 맛없는 밀가루 반죽이 “온통 부풀어 오를 때”(33절)까지 그 속에 들어가 없어지는 누룩처럼 되기를 그들에게 바라셨다는 중대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과정이 진행되는 한 이러한 작업은 계속되어야 한다 : 선한 사람들이 악해질 수 있고 악한 사람들이 선해질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선한 사람들은 악한 사람들을 회개시켜 교회라고 하는 커다란 ‘나무’의 가지들을 확장시켜나감으로써 공중의 모든 새들이 거기에 깃들도록 해야 한다(32절).
그러므로 ‘최후의 심판자’께서 마지막 순간까지 ‘참아주신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을 위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추수 때까지 가라지와 밀이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오늘 복음은 다소 길다. 먼저 가라지의 비유가 나오고 있고(24-30절) 이어서 큰 나무로 자란다는 겨자씨(31-32절)와 누룩 한줌(33절)에 관한 짤막한 두 개의 비유가 등장하고 있다 : 학자들은 이 비유들이 하늘 나라가 확장되는 신비스러운 힘을 예고해주고 있다는 이유로 ‘성장의 비유들’이라고도 부른다. 그 다음 예수께서 ‘어째서’ 비유로 말씀하셨는지 그 동기에 대한 언급이 있고 나서(34-35절; 10-17절 참조) 가라지의 비유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가라지의 비유에 대한 설명도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마찬가지로(18-23절 참조) 의미를 알아듣지 못한 사도들에 의해 야기된다. 보다시피, 마태오 복음사가가 자신의 복음 구성에서 아주 능숙하게 추구하고 있는 구조적 특성이 드러나고 있다.
가라지의 비유가 길고 중요하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다른 두 개의 비유(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에 대해서는, 비록 그것들이 나름대로 논의 되어야 할 가치가 있긴 하지만 여기서 자세히 다룰 수는 없다. 전례상 두 개의 이 비유는 따로 발췌해서 제시했더라면 아마 더 좋았을 것이다.
여시거도 장면의 내용이 대단히 현실적이다. 이떤 사람이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렸다. 그런데 밤에 그의 원수가 악의로 거기에 가라지를 뿌린다. 가라지는 개화기가 되어야 그 모습이 드러난다. 그의 종들이 이런 사실을 알고 즉시 주인에게 달려가 알린다 :“‘주인님, 밭에 뿌리신 것은 좋은 씨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하고 묻자 주인의 대답이 ‘원수가 그랬구나!’하였다.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을 뽑아버릴까요?’ 하고 종들이 다시 묻자 주인은 ‘가만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추수 때까지 둘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에게 일러서 가라지를 먼저 뽑아서 단으로 묶어 불에 태워 버리게 하고 밀은 내 곳간에 거두어들이게 하겠다’고 대답하였다”(27-30절).
밀밭에서 가라지를 뽑는 어려움에 관한 이야기는 약 오십 년 전까지만 해도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접할 수 있었던 이야기다. 가라지는 그것이 다 자라 누렇게 되기 전까지는 밀과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좋은 씨앗을 다치지 않을 수 있다고 자신하고서 가라지를 뽑으려고 달려드는 것은 무모한 짓임이 뻔하다. ‘추수 때’를 기다리는 것이 더 낫다. 그때 가서는 일하기도 쉽고 위험부담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가라지는 단으로 묶어 불에 태우거나 아니면 가금(家禽)의 먹이로 주게 될 것이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이 비유로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일까? 우리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이미 보았듯이 여기서도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가진 두가지 의미가 겹쳐져 있음이 분명하다 : 하나는 ‘그리스도론적’ 의미요, 다른 하나는 ‘훈계적’ 특성을 띤 것이다. 첫째 의미는 직접 예수의 의도에서 비롯되고 있고 둘째 것은 정확히 말해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사변적 결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기적을 행하고 복음을 선포하심으로써 당신주위에 메시아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을 불러일으키셨다. 예언자들의 말에 따르면, 메시아는 필히 자기 주위에다 ‘성인들’과 죄없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형성한다고 한다. “너의 백성은 모두 올바르게 살아 영원히 땅을 차지하리라. 너의 백성은 내가 심은 나무에서 돋은 햇순이요 내가 손수 만든 자랑거리다”(이사 60,21)라고 이사야 예언자는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예루살렘의 모습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예수의 주의에 ‘성인들’의 공동체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 사도들 중에도 배반자가 있지 않았던가! 게다가 예수께서는 그 당시 사회적으로 고상한 계층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모두 거부하시고 오히려 세리들과 심지어는 창녀들의 친구가 되신다. 대부분의 성서문학이 꿈꾸었듯이 불경스러운 사람들을 올바른 사람들로부터 갈라 놓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악을 윤리적인 사실-그렇기 때문에 악은 바로잡을 수 있고 회복될 수 있고 극복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선으로 바뀌어 질 수 있다-이라기보다는 물리적 사실로 고찰했던 바로 이러한 ‘정의론자적’ 기다림을 거슬러 이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고 계시다.
그분이 메시아이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메시아의 시대는 요한복음이 언명하고 있듯이 ‘심판’의 시대가 아니라 구원의 시대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그러므로 분명 모든 사람에게는 구체적인 구원의 가능성이 부여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가라지가 좋은 씨와 더불어 성장하고 있는 것은 악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자비’의 표지다!
‘참아주시는’ 하느님과 ‘참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
그러므로 이 비유는 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낙관주의’로 가득 차 있다. 이 사실은 특히 다음과 같은 두가지 의미에서 볼 때 더 그렇다 : 우선 악이란 하느님을 거스르는 죄라기보다 그것의 극복을 위해 하느님의 현존이 요구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구원해야 할’ 죄인들을 발견하지 못하셨다면 과연 구세주로서의 메시아가 되셨겠는가? 둘째로, 또한 악은 실제로 극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일은 마지막 “추수때”(30절)에 이루어 질 것이다. 그때에는 구세주이신 메시아가 심판자이신 메시아가 되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남을 죄짓게 하는 자들과 악해응ㄹ 일삼는 s자들을 모조리 자기 나라에서 추려내어 불구덩이에 처넣을 것이다. 그러면 거기에서 그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41-42절).
이것은 하느님 편의 승리를 즉시 보고자 하는 지나치게 열심한 그리스도인들의 ‘참을성 없음’에 대한 경고다. 사실 이러한 태도를 잘 보면 열심하다기보다는 두려워하고 불안해 하는 태도임을 알 수 있다. 언제든지 야음을 틈타 침입할 수 있는 ‘적’에 대항하여 항시 전투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쉬운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이 찾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의 영광보다는 자신들의 평온함이리라!
또한 그것은 선과 악을 어떤 사상적 정치적 구조나 체제, 그리고 집단으로 보도록 우리 모두를 유혹하는 마니교적 사상들에 대한 나오는 종들의 의견처럼 어떤 것을 잘라버리면 족할 것이다. 그러나 선과 악은 이와 반대로 마음이라는 ‘같은’ 장소에 있을 수 있다. 즉 우리가 잠시 졸고 있는 사이에 사탄은 즉시 우리 마음속에다 억센 가라지를 뿌릴 수 있다.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시작’이라고 하는(교회5 참조) 교회조차도 가라지에 의해 침해되어 황폐화될 수 있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남을 죄짓게 하는 자들을 모조리 자기 나라에서 추려낼 것이다”
이러한 것이 사도들의 요청에 의해 제시되고 있는 비유의 설명에 담긴 의미인 것 같고 또한 그것은 틀림없이 마태오 복음사가가 관련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체험을 많이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이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를 말하는 것이다.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요 추수 때에 세상이 끝나는 날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다. 그러므로 추수 때에 가라지를 뽑아서 묶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끝날에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날이 오면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낵 터인데 그들은 남을 죄짓게 하는 자들과 악행을 일삼는 자들을 모조리 자기 나라에서 추려내어 불구덩이에 처넣을 것이다. 그러면 거기에서 그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37-43절).
쉽게 알 수 있듯이 여기서강조점은 선과 악의 ‘현실적인’ 공존보다는, 마태오 복음사가에서 매우 소중한 주제인(25,31-46 참조) ‘최후 심판’으로 옮겨지고 있다. 다니엘 12,3에 근거를 두고 있는 마지막 구절(“의인들은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도 ‘종말론적’ 관점을 상기시켜준다.
어째서 이처럼 강조점이 옮겨지는 것일까? 아마도 매우 단순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즉 마태오가 관련되어 있는 공동체가 처음에 가졌던 열의를 다 잃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이 세상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공동체 내부에서도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무감각해져 있다. 또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신앙과 생활의 불일치로써 다른 사람들의 ‘걸림돌’이 되고 있기도 하다.
그들을 정신차리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그들에게 상기시켜야 할 사실은 무엇보다도, 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 자체가 구원의 기준이 되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반드시 신앙의 행위가 동반되어야 한다. 언젠가는 우리 안에 있던 선과 악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 선과 악의 폭로는 준엄하고 공평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 악한 행실을 한 사람은 누구든지 즉, 그리스도의 ‘법’ 특히 사랑의 법에 불충실하게 되면 그리시도 신자이건 아니건간에 모두 단죄를 받을 것이며, 올바른 일을 행한 사람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신자이건 아니건 간에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입게 될 것이다.
보다시피, 심판자이신 그리스도 앞에서는 어떤 특권도 용납되지 않는다. 신앙의 특권까지도! 이 모든 사실은 그리스도 신자들로 하여금 결정적인 최후심판의 때가 닥치기 전에 스스로 반성하고 회개하도록 해주었다.
힘을 가지신 주님은 자비로운 심판을 내리신다
제1독서도 마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종들처럼, 하느님께서 강력하게 모든 우상들을 응징해 주시기를 바랐던 알렉산드리아 디아스포라의 일부 유다인들을 당혹케 하는 하느님의 행동 양식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대략 그리스도 강생전 1세기 경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씌어진 지혜서의 저자는 구약성서의 역사적 발전 단계, 특히 그 중에서도 출애굽기의 내용을 더듬으면서, 어째서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와 가나안 백성들을 “당장에 없애버리시지 않고”(지혜 12,9) 그토록 크나큰 관용을 보이셨는지에 대해 놀라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 그는, 하느님은 비록 모든 것을 힘으로 하실 수 있지만 사람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 참으시는 자비의 하느님이라는 점에서 그러한 관용의 근거를 발견한다 : “이러한 힘을 가지신 주님은 자비로운 심판을 내리시고 우리들을 대단히 너그럽게 다스리신다. 주님께서는 무엇이든지 하시고자 하면 그것을 하실 힘이 언제든지 있으시다. 주님은 이와 같은 관용을 보이심으로써 당신 백성에게 의인은 사람들을 사랑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셨다. 그리고 죄를 지으면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것을 가르치셔서 당신 자녀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셨다”(지혜12,18-19).
그러므로 우리는, 나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힘이 있지만 그 힘을 사람들을 회개로 이끄는 데 사용하고자 하시기 때문에, 악을 너그러이 참아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또다시 대하고 있다. 또 그분은 이런한 당신의 행동을 그분의 “백성”(19절)인 우리에게 모범으로 주신다 : 하느님의 밭에 좋은 낱알은 얼마 안되더라도 가라지에서 변모된 풍성한 결실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사도 바울로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듯이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주시는”(로마 8,26) 성령의 신비스러운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관대한 마음을 갖게 하며 또한 비극적이지만 이 세상에 악이 현존하고 있는 의미를 깨달을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준다. 즉 악의 현존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랑의 능력과, 세상이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는 그들의 낙관주의를 입증해 보이라는 도전장이다. 분명 하느님의 능력은 이세상을 우리의 선한 의지의 도움을 받아 지금 나타나고 잇는 모든 양상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역사의 마지막 장에 가서는 보다 나은 만들어주실 것이다.

밀과 가라지
1. 말씀읽기: 마태13,24-30 가라지의 비유
2. 말씀연구
예수님께서는 농사에서 따온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비슷합니다. 왜냐하면 밭과 파종과 수확이라는 같은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는 그물의 비유와도 비슷합니다. 우리는 이 비유 안에서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선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비를 내리시고, 햇볕을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24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농 부 한 사람이 낮에 밭에 나가 씨를 뿌렸습니다. 그는 좋은 씨를 뿌렸습니다. 그 씨를 뿌리면서 그는 좋은 수확을 기대하였습니다.
25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그런데 그에게 원한이 있는 이웃 사람이 지켜보고 있다가 악의에 찬 계획을 꾸며 그 밤에 실행에 옮겨버립니다. 그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살그머니 그 밭에 가서 가라지 씨를 뿌립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26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처음에 싹이 트고 줄기가 날 때는 밀과 가라지를 구분하기 어렵지만 열매를 맺을 때는 확실하게 구분이 됩니다.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열심한 신앙인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그의 열매가 드러납니다. 열심한 신앙인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의 열매를 맺습니다. 하지만 열심 하지 못한 신앙인들은 미움과 불평과 불안과, 조급함과 성냄과 악행과, 분노와 거짓과 방탕의 열매를 맺습니다.
27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가라지를 보자 종들은 집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분명 좋은 씨를 뿌렸으니 좋은 밀을 열매 맺어야 합니다. 하지만 가라지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가족과 함께 미사에도 참례하고 기도생활도 하고 좀더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자 그것을 본 믿지 않는 이가 그의 삶을 방해합니다.
“자네! 요즘 성당 다닌다면서?”
“응! 성당에 한번 다녀 보려고!”
“그래! 자네가 믿으려 하는 하느님은 뵈었나?”
“아직…”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술이나 한잔 하세. 마음의 평화를 얻는 데는 술이 최고 아닌가?”
“…”
“역시 마음의 평화에는 술이 최고 아닌가? 어때! 성당에서 기도하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이렇게 술 한잔 하는 것이 좋은가?”
“…”
“자! 우리 술도 얼큰하게 취했으니 2차 가세 그려!”
“…”
“여보게! 내 돈 내고 술 먹고 내 돈 내고 2차 가는데 누구한테 피해 준 것이 있나? 마누라한테야 들키지만 않으면 될 것 아닌가? 우리 둘만 입 다물면 아무도 모르는 일일세. 아무도…”
“……”
사람을 유혹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의 밭에 가라지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예화2)
깜씨는 성당에서 복사를 열심히 하였고, 다른 친구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평일미사도 열심히 나왔고, 어른들께도 인사를 참 잘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깜씨를 유혹하는 곰탱이를 만나게 됩니다. 이 곰탱이는 깜씨를 유혹했습니다.
“깜씨! 지금은 시험기간이잖아. 오늘은 학원가서 공부를 하자!”
“안돼! 오늘 학생미사 가야 한단 말야!”
“좋은 성적을 얻는 것이 중요하지. 그리고 빠졌다고 고백성사 보면 되잖아!”
그렇게 곰탱이는 깜씨에게 “가라지”를 뿌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깜씨는 부모님께서는 성당에 갔다 왔다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부모님께서도 성당 갔다 왔는지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시험이 끝난 토요일! 깜씨는 성당에 가려고 하는데 곰탱이가 또 깜씨를 유혹했습니다.
“깜씨! 오늘 시험 끝났는데 게임방에 가서 스트레스를 좀 풀면 어떨까?”
“아냐! 지난주에도 성당 빠졌는데 오늘은 꼭 가야 해!”
“깜씨야! 성당 가봤자 복음나누기나 하고, 미사 하잖아. 또 미사시간에 헌금도 해야 하고. 게임방에서 게임하다가 미사 끝나는 시간에 맞춰 들어가면 헌금 안 해도 되잖아. 그리고 성당에는 갔으니까 너네 엄마도 모르실꺼야!”
깜씨는 그렇게 곰탱이의 손에 이끌려 게임방으로 갔고, 미사가 끝날 무렵에 성당 뒷자리로 들어와서 앉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집으로 갔습니다.
그렇게 깜씨의 마음에는 가라지가 자랐습니다.
……,
지금은 가끔 성당에 나오지만 그의 얼굴에서 신앙을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 미사 시간에는 지겨워하고, 고개 숙이고, 기도문을 외우지도 않고, 성가를 부르지도 않습니다. 전에는 복사를 열심히 했던 깜씨인데 말입니다.
그 깜씨는 어떻게 될까요? 하느님 앞에 그렇게 서게 된다면 어떤 말씀을 들을까요?
사람을 유혹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의 밭에 가라지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유혹하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가라지에게 거름을 듬뿍 듬뿍 주는 사람과 같습니다.
28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집주인은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때 종들은 합리적으로 생각하여 가라지를 뽑아 버려야 하지 않느냐고 집주인에게 물었습니다. 밀들만 남겨두고 가라지는 뽑아 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29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집주인의 생각은 가라지를 뽑아 낼 때, 밀이 다치지 않도록 둘 다 자라게 놔두는 것이었습니다. 뿌리가 서로 얽혀 있기에 가라지를 뽑다가 밀을 뽑을 수도 있습니다.
주인은 추수 전에 밀과 가라지를 판별하여 갈라내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결정도 번복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기다려 주십니다. 선과 악의 관계는 언제나 밀접한 관계이어서 조금만 마음을 돌리면 금방 죄로 빠져 버립니다. 믿는 다는 것도, 회개한다는 것도 순간의 믿음이나 회개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속적인 믿음과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 입니다. 모든 이가 순간의 사랑보다는 영원한 사랑을 꿈꾸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흔들리지 않고 변함없이 당신께로 향하길 원하십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지켜보고 계십니다. 나의 의지를 존중하면서 내가 좋은 길로 들어서면 함께 기뻐하시고, 내가 좋지 않은 길로 들어설 때는 마음아파하십니다. 나에게 그 길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시지만 대부분 내가 듣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오늘 집주인처럼 억지로 돌려놓지는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인의 결정입니다. 추수 전에 밀과 가라지를 판별하여 갈라내려는 모든 노력은 주인의 계획을 간섭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주인은 가라지와 그로 인한 피해를 참아 주며 이 결정은 번복되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제자는 세상 돌아가는 형세를 견딜 수가 없다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실망을 하거나 때가 되기 전에 질서를 바로 잡고자 독자적으로 행동하려는 유혹을 끊임없이 느끼기까지 합니다. 추수 때에 선한 사람들의 고통은 끝날 것이며 악한 자들은 그들을 위해 마련되어 있는 운명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30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수확 때에 밀과 가라지의 운명은 바뀔 것입니다. 밀은 곳간에, 그리고 가라지는 불 속으로 던져질 것입니다. 수확 때는 주님 앞에 나아갈 때입니다. 내가 어떤 모습으로 주님 앞으로 나아갈 것인지, 지금 주님 앞에서 어떤 열매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볼 때 입니다.
3. 나눔 및 묵상
1. 밀과 가라지의 비유 말씀을 들으면서 주인의 마음과 종들의 마음을 각각 헤아려 보면서 내 마음은 어떠한지를 생각해 봅시다. 자비롭게 기다려 주는 편인지, 원리원칙에 의거하여 판단하는지, 타인의 마음에 유혹을 심어 그가 흔들리도록 하고 있지는 않은지…,
2. 추수 때에 나는 하느님 앞에 밀로서 서 있을지, 가라지로 서 있을지를 생각해 보면서 내가 밀로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1. 박동순 요셉
1.1. 연중 제16주일(가해)
1. 제1독서 (지혜 12,13.16-19)
본문은 이집트 탈출 때에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고 이집트인들을 멸망시키신 사실을 의인과 악인의 운명에 비교하여 설명하는 지혜서 제3부의 (11,2-19,22)일부이다. 11,17-12,22에서 저자는 “왜 하느님께서 악인들을 즉시 벌하지 않으시고 오래도록 참아 주시는가?”하는 질문을 다루고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하느님께서 힘이 없으셔서 악인들을 벌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악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마찬가지로 의인들도 죄를 지으면 주님의 관대하심에 기댈 수 있으며, 의인들 역시 악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13절에서 이미 하느님께서 의인들을 박해하는 원수들을 관대하게 대하시는 이유가 설명된다. 주님께서는 악인들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 주님께서는 악인들도 회개할 기회를 주시려는 것이다(12,2 참조). 따라서 주님께서는 결코 사람을 불의하게 심판하시는 일이 없으시다. 16절에서 하느님의 정의는 악인들을 벌하시는데서 뿐만이 아니라 악인들을 관대하게 대하시는데서도 드러난다. 17절에 보면, 주님께서 당신의 힘을 드러내시고 벌을 내리시는 대상이 있다. 첫째는 하느님의 권능에 대해 들었으면서도 믿지 않는 자들이고 둘째는 하느님의 권능을 이미 알면서도 굴복하지 않고 대드는 자들이다. 주 하느님께서는 비록 심판을 내리실 때에도 당신의 진노를 완전히 표현하시지 않고 모든 사람을 관대하게 대하신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힘과 권능의 증거이다(18절). 하느님의 관대함은 유다인들에게 이중의 교훈을 제공한다. 첫째는 비록 악인일지라도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하여야 한다. 둘째는 유다인들이 죄에 떨어질 경우에도 하느님의 관대하심에 기댈 수 있다(19절).
2. 제2독서 (로마 8,26-27)
로마서 8장은 사람들이 다만 인간적 생각만을 고집하기 때문에 바오로는 이를 “육”(肉)이란 말로 표현하며, 이러한 “율법과 보이는 의식”에 대한 유다적 이해를 설명한다. 바오로는 하느님의 성령께서 신자 안에 사시는데 왜 그토록 신자들이 기도에서 많은 어려움들을 맞이하게 되는가 하는 어려움에 대해서 말한다(26-27절).
기도할 수 있다는 것 또는 기도 중에 말을 많이 하거나 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맞게’(올바르게)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26절). 그리고 이것은 오직 성령의 도우심만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한다. 성령께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아시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이다(27절). 성령께서 조정자로서, 그리고 추진력으로서 주요한 역할을 하고 계신다. 즉 성령께서는 사람을 더 나은 상태로,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와 유산으로서 자신의 성소를 완성하도록 안내하신다.
3. 복음 (마태 13,24-43)
복음은 세 비유와 그 해설로 되어 있다. 즉 가라지의 비유(13,24-30), 겨자씨의 비유(13,31-32), 누룩의 비유(13,33), 가라지 비유 해설(13,36-43)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 중에서 가라지의 비유는 마태오 복음에만 있는 것이고, 겨자씨의 비유는 세 공관복음 모두에 있고, 누룩의 비유는 마태오, 루가 복음에만 있는 것으로 예수 어록(Q문헌)에서 왔다.
① 가라지의 비유와 그 해설은 다음과 같다. 먼저 비유는“하늘나라”에 관한 비유다. 예수님께서 예수님께서 이 비유로써 강조하시고자 하신 요점은 구별의 때가 결국 오게 되겠지만 하느님 나라는 모든 부류의 사람들,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나 어기는 사람이나, 존경받는 사람이나 버림받은 사람들을 거두어들인다는 것이다. 가라지 비유의 해설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부(37-39절)에서는 가라지 비유에 나오는 일곱 개의 낱말 하나하나의 뜻을 되새기고 있는데 이는 전형적인 우의적 해설이다. 후반부(40-43절)는 인자의 종말 심판을 묘사하는 짤막한 묵시록이다.
전반부(37-39절)에서 비유에 나오는 일곱 개의 낱말들이 우의적으로 해석되고 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사람의 아들, 밭=세상, 좋은 씨=하늘나라의 자녀, 가라지=악한 자의 자녀, 가라지를 뿌린 원수=악마, 추수 때=세상 끝날, 추수꾼=천사들. 후반부(40-43절)는 묵시문학적인 표상에 근거하여 확대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종말적 심판의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② 겨자씨의 비유(13,31-32)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표상으로 이 비유를 드셨다. 마태오는 겨자씨가 씨 중에서 가장 작은 씨라고 한다(32절). 그러나 변변치 못한 겨자에 과연 몇 마리의 새가 날아와서 둥지를 틀 수 있을까? 그 뜻인즉 종말에 만민이 하느님 나라로 몰려온다는 것이다.
③ 누룩의 비유(33절)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골자는 ‘누룩은 밀가루 속에 숨겨져 있지만 그 엄청난 분량의 밀가루를 계속해서 부풀린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도 그렇다. 겨자씨의 비유보다 이 비유에는 ‘성장’이라는 관점이 두드러지게 들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비유로써 비록 지금 하느님께서 예수님 당신을 통해서 이룩하시는 일은 작아 보일지라도 앞으로 하느님께서는 더욱 영광과 능력을 드러내실 것이요, 장차 종말에는 엄청난 위력을 떨치시리라는 확신을 피력하신 것이다.
4. 이 주일의 초점
1) 너그러이 참고 기다리시는 하느님을 주제로 잡는다.
2) 이스라엘 역사를 회상하면서 하느님께서 권능과 힘을 가지신 심판관인 동시에 너그럽고 관대하시어 죄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신다는 점을 강조한다.
3) 오늘 복음의 비유를 각각 설명하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구체적으로 알려주면서 우리도 실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제시한다.
강 론
찬미 예수님!
지난 한 주간동안 말씀의 씨앗을 잘 싹틔우셨나요? 고개를 숙이시는 것보니까,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했는데, 벌써 열매를 맺으셨나봅니다. 계속해서 열심히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일꾼인 여러분에게 주님의 은총이 함께하실 것입니다.
오늘은 연중 제16주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세 비유를 들어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즉 가라지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입니다. 먼저 가라지의 비유를 보겠습니다. 가리지는 모양이나 크기가 밀과 비슷한데 밀에게는 아주 좋지 않은 식물입니다. 그 열매는 사람의 몸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고 합니다. 이러한 가라지를 원수는 밀밭에 뿌립니다. 이 사실을 안 주인과 종의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서로 다릅니다. 가리지를 뽑아버리자는 종의 제안에 주인은 밀에 피해를 주기 때문에 추수 때까지 자라도록 내버려 두라고 합니다.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안 좋은 것을 당장 뽑아내야 하는데 왜 자라도록 내버려두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인인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밀과 가라지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말합니다. 추수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죄인의 회개를 위해 기다리고 인내하시는 하느님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선한 존재로 태어났지만, 살다보면 잘못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회개하여 되돌아 올 수도 있지만 헤아나오지 못한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악하다고 하여 그 사람을 바로 심판하여 끝내버린다면, 세상에 남아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이 비유의 핵심은 하느님께서는 너그러이 참고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밀이 다치지 않도록 수확 때까지 기다리시는 하느님을 우리는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비록 형제 자매의 행실이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인간은 성장과 더불어 변화될 수 있기에 자기 뜻대로 판단하지 말고 참고 기다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겨자씨의 비유를 보겠습니다. 겨자씨를 보셨습니까? 겨자씨는 팔레스티나에서 가장 작은 씨앗이지만 자라면 약 2-3미터정도까지 자란다고 합니다. 비유가 말하는 것처럼 큰 나무가 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비유의 의미는 작은 씨앗처럼 시작되는 하느님의 나라는 나중에 그 완성될 결과에 비하면 시작과는 비교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것에서 위대한 것을 이끌어 내시는 하느님께 신뢰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떤 거창하고 큰 일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보다는 하찮고 볼품없는 그 속에서 움직이고 계시다는 것을 겨자씨의 비유가 말하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누룩의 비유입니다. 누룩은 부패의 상징입니다. 오늘날에는 누룩의 발효작용과 새로운 생명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나 본래의 의미는 불결과 부패의 표상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누룩에 비길 수 있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어쩌면 누룩으로 발효된 엄청난 양의 반죽은 오히려 부패의 양이 커진 것을 말하는 것이니 좋은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의미를 잘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 누룩의 비유는 부패 속에서도 하느님의 나라는 활발하게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일상 생활 속에서 부정적으로 보이는 상황 속에서 현존하시며 그곳에서 힘차게 작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더욱 신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모든 피조물의 주인인 하느님께서 악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자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의인들도 죄를 지으면 주님의 관대하심에 기댈 수 있으며, 의인들 역시 악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이나 판단은 불완전하며 위험요소가 있습니다. 어느 한 면만을 보고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다릅니다. 마음 속까지 꿰뚫어보시며 우리를 판단하십니다. 그 판단은 나중에 하시고 지금은 회개할 기회를 주시며 당신의 나라인 하느님 나라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이 나라는 부패 속에서도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 말씀의 핵심은 너그러이 참고 기다리시는 하느님입니다. 가라지, 겨자씨, 누룩의 비유가 모두 하느님을 드러내고 있으며 그분께서 계신 곳에 그분의 나라가 드러남을 우리는 들었습니다. 독서는 바로 이를 뒷받침하며 심판은 주님의 몫이므로 우리는 끝까지 선하게 살도록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성령의 인도가 필요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그 성령께서는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할 수 없을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 한 주간동안 사랑의 힘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닮기 위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께 우리의 마음을 봉헌합시다.
연중 제16주일
1. 김몽은 신부(가)/ 2 2. 이기우 부제(가)/ 4
3. 최창덕 신부(가)/ 6 4. 염수완 신부(가)/ 8
5. 최기산 신부(가)/11 6. 서경윤 신부(가)/13
7. 김현준 신부(가)/14 8. 강길웅 신부(가)/16
9. 마지막 날에 드러나는 (가)/18 10. 교구 주보(가)/20
11. 최인호 작가(가)/21
1 연중 제16주일 마태 13,24-43 (가) 추수 때까지 둘 다 자라게 버려두라
김몽은 신부
“죄 지은 자의 죄를 미워하되 그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가라지의 비유를 이 말과 연관지어 생각할 때 더 잘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죄란 그 사람의 인격과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죄와 죽음의 세력이 극복되어 구원이 베풀어지고 있는 은총의 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하느님께서는 항상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끔 왜 세상에 악이 있는가? 어찌하여 죄가 있고 고통이 있으며 우리에게 죽음이 있는가를 반문하기도 한다. 이러한 나쁜 상황을 인간에게 허락하시는 하느님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는 적이 없지 않다. 이러한 의문에 대해 예수님은 가라지의 비유로 잘 설명해 주시고 있다.
우리는 악의 신비를 이해해야 한다. 이 세상의 시련과 단련을 통하여 우리 육신은 새 사람으로 부활할 수 있고, 우리의 자유와 봉사가 더욱 영광스러워질 수 있다. 그러기에 성 아우구스티노는 원조 아담과 에와가 지은 원죄를 두고 “오 복된 죄여!”라고 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명은 악과 훌륭히 투쟁하여 굳건히 살아나가 이기는데 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가라지를 뽑아 버리고 싶어한다. 그러나 가라지를 버려둠은 곡식을 잘못 뽑을까봐 참는 것이다. 또한 교회 내의 이단도 가라지 같이 분별하기 어려우며, 이 이단이 도리어 교회의 진리를 밝히는데 원인이 되기도 한다. 또 자기가 잠시나마 가라지일 수 있으므로, 우리는 자기 죄과에 너무 무자비하거나 남을 단죄하는데 조급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시급히 회개하는 것만이 절대로 요청되는 것이다.
이 가라지의 비유는 예수의 가장 실제적 비유 중의 하나이다. 이제 그 의미를 좀더 살펴보면
첫째, 좋은 씨를 망치려는 악한 세력이 세상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깨어 지켜야 한다.
둘째, 이 세상에는 선인같은 악인, 악인같은 선인이 있다. 따라서 사람의 선악을 구별하는 데는 신중해야 한다.
셋째, 우리의 판단은 추수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심판은 순간의 선악보다 전 생애를 보는 것이다. 죄인이 성인이 되는 수도 있기 때문에 끝까지 기다려야 한다.
넷째, 결국은 주님의 심판이 오고야만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죽은 후와 종말의 날에 선악은 구별되어진다. 즉 하느님의 심판은 반드시 온다는 것이 세상에는 악이 이기고 선이 지는 것 같으나, 하느님의 심판은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르다.
다섯째, 심판할 권리는 하느님만 갖고 계시며, 그분만이 생의 전체를 보실 수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 비유의 경고를 요약하면 남의 심판하지 말라는 것과, 하느님의 심판이 꼭 온다는 것을 말하고 이다.
여기서 우리는 “권세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루가 1,52)의 노래와 같이 우리가 남이나 우리 자신에 대해 선한 이로 인정하거나 자부하더라도 하느님의 눈에는 심판을 면치 못하는 자일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자기 죄를 겸손되이 뉘우치고 그 마음을 하느님께 드리는 자에게는 항상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하심이 있고 어려움 중에서도 돌보아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하겠다.
우리는 대개 남을 평가할 때 그 외모에 의해서 행한다. 즉 외적 조건이 그럴사하면 그 사람을 우러러 보고, 초라하고 남루한 모습을 하고 있으면 그 사람을 멸시한다. 그 뿐만 아니라, 전혀 자기 탓이 아닌 환경적 조건에 대해서도 편견을 갖고, 차별대우하기가 일쑤이다. 단순히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로, 흑인이 백인세계에서 멸시당하는 일이라든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서 천시당하는 일들이 모두 그러한 것들이다.
밭에 좋은 씨를 뿌렸는데도 가라지가 나타났다. 그러나 하느님은 끝까지 기다리신다. 성급한 판단을 금하게 하시고, 인간의 기준으로 평가할 것을 중지토록 하신다. 하느님은 인간의 내면을 보시고 평가하시는 분이시기에, 외모나 환경은 하느님의 눈에는 전혀 관심도 되지 못한다. 좋은 밀이 언제 가라지가 될지도 모르며, 가라지일지라도 언제 주님의 은총으로 좋은 밀이 될지는 아무도 판단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항상 신중한 태도로서 하느님의 뜻만을 구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인간적인 생각이나, 판단은 항상 미숙하고 불완전하며, 그르칠 위험이 많다. 그러나 하느님의 생각이나 판단은 항상 정확하시고 큰 의미를 지니신다.
2 연중 제16주일 마태 13,24-43 (가) 천당이야기
이기우 부제
교우 여러분, 무더운 날씨에 안녕하셨습니까?
방금 우리는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늘 나라를 예전에는 천당이라고들 불렀습니다. 여러분은 천당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 보셨겠지요? 오늘은 천당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과거에는 죽어서 천당가기 위해서 성당에 다닌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요즘에도 낯선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이 이야기는 신앙생활의 이유와 목적을 담고 있습니다. 왜 믿는냐? 천당 가기 위해서지요. 문제는 천당이 죽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 더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천당은 우리가 주의 기도에서 기도하듯이 “하늘에서 뿐만 아니라 땅에서도”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우리가 천당에서 살기를 하느님께서 원하십니다.
만일에 그와 반대로 연옥이나 지옥에서 우리가 살고자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지옥에서는 사람이 못삽니다. 사람 살 곳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많은 사람들이 지옥인지도 모르고 지옥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서로 미워하고 의심하며 먹고 살 걱정에 찌든 나머지 걱정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가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태오 복음 6, 15-34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걱정하지 말고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여라. 그러면 다른 모든 것도 곁들어 받게 될 것이다. 하늘에 게신 아버지께서는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 너희들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교우 여러분,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살아갈 걱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 곧 천당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당을 찾기에는 너무나 바쁘고 또 너무나 걱정이 많습니다. 걱정은 또 다른 걱정을 낳고 나중엔 권태감과 공허감이 마음 가득히 채워지게 되는 것이 현대인의 생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천당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바쁘기만 해서는 일이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지혜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알아내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천당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씀하신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그저 비유로만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그리고는 “알아들을 귀가 있으면 알아들으라”고 하실 뿐입니다.
우리는 그토록 바쁘게 살아가는데도 걱정이 끊이질 않고 무력감에 시달리는데,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도 비유로만 알아들으라고 하시니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천당이 그토록 중요한 문제라면 뭔가 분명한 대책이 세워져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대책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미 세상에서 천당을 사셨던 예수님의 생활을 잘 살펴보면 하나의 생활리듬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고독과 공동체의 순환입니다. 고독과 공동체. 그분은 하느님 앞에 늘 혼자이셨고 또한 늘 다른 이들과 함께 하느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고독하다는 것은 대부분 바람직하지 않은 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자기 혼자만의 고요한 시간과 공간을 마련한다는 것은 분주하고 걱정 많은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일입니다. 고독함이 없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마저도 그저 열심한 마음으로 바쁘게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수도 있지만 먼저 내 마음 안에 하느님만을 위한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 정말로 중요합니다. 천당은 하느님이 손수 마련해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힘이 들 것입니다. 공연한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조용히 앉아 있으면 오히려 잊어버렸던 걱정들이 생각나기도 하고 분심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너무 신경쓰지 말고 하느님의 말씀을 고독의 중심에 두면 마음을 비울 수가 있습니다. 헛된 욕심에서 비롯된 쓸데없는 걱정들이 사라지고 정말 필요한 지혜가 샘솟게 됩니다. 이건 말로 되는게 아니고 실제로 해보기 전에는 알아들을 귀가 생기지 않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 매순간 하느님이 계실 수 있는 고요한 빈 자리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참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다른 이들 마음 안에서도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게 됩니다. 인간 관계가 향상됩니다. 어렵게만 느껴지던 애덕의 실천이 쉽게 이루어집니다. 힘들기만 하던 봉사가 자연스러운 일로 바뀝니다. 공동체를 통하여 사람들 사이에는 하느님이 계실 자리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천당이라는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해보셔야 알아들을 귀가 생기는 일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것이 천당 가는 대책입니다. 혼자 있을 때나 여럿이 있을 때나 먼저 하느님을 위한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야말로 으뜸가는 지혜입니다. 그때 우리는 천당에서도 하느님 말씀이라고 하는 밀과 세상 걱정이라고 하는 가라지가 처음에는 어쩌면 한동안 함께 섞여 있을 수 밖에 없음을 한 마디의 설명 없이도 알아들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성당 다닌다고 해서 한 순간에 갑자기 살아갈 걱정이 없어지는 것이 아님은 지급도 많은 분들이 체험하시는 일일 것입니다.
한편 가라지와도 같은 세상 걱정들은 하느님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는 즉시로 혹은 그 크기만큼 마치 추수때처럼 다 뽑아져 버리는 일도 자연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소중한 공간은 한 알의 겨자씨와도 같이 처음엔 아무리 작고 미미하더라도 우리 자신이 거부하지 않는 한,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커져서 마치 커다란 나무와도 같이 되어 마침내는 우리의 생활이 천당 생활이 되도록 이끌어 갈 것입니다 .
믿음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할 지도 모르는 우리를 성령께서 도와주십니다.” “자비로우신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보살피시려고” 천당을 마련하셨습니다. 구태여 지옥을 애써 마련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지옥이라고 하는 곳은 사람 살 데가 못됩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저는 교우 여러분들께 성체를 중심으로 해서 고독과 공동체의 생활리듬으로 생활하시기를 권고해 드리고 싶습니다. 매일 미사 참례가 어려우시다면 이같은 매일미사책에 나오는 매일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 말씀을 이웃에게 에누리 없이 실천함으로써 공동체를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성체와 교회의 해요, 성모성년인 이때에 성모님의 모범을 본받아 성체를 중심으로 한 고독과 공동체의 생활이 우리 안에 뿌리내리기를 기도합니다. 천당은 결코 멀리 있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찬미 예수님!
3 연중 제16주일 마태 13,24-43 (가) 천만의 말씀
최창덕 신부
하느님의 나라는 현재 나에게 주어진 삶의 순간,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이뤄진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가지 비유로써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 중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가지고 함께 잠시 묵상해 봅시다.
이 두 비유에서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바로 미미한 시작과 엄청난 결과의 대조입니다. 사실 겨자씨가 씨 중에서 가장 작은 씨는 아닐 것입니다. 다만 작은 씨라는 점에서 그 당시 통속적 표현으로 겨자씨를 예로 든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 씨가 자라면 그 나무는 말탄 사람만큼의 높이가 되며, 또한 새들이 그 씨를 좋아하니 겨자나무에는 많은 새들이 모여듭니다. 마찬가지로 누룩도 그 시작과 결과가 겨자씨처럼 엄청나다는 것을 빵을 만들어보신 분을 잘 아실 테지요.
이 두 비유를 볼 때 지난주에 우리가 생각해 본 점과 같은 배경하에서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셨으리라 추측됩니다. 즉 예수님의 활동이 당대 사람들에게는 대단치 못한 것으로 평가되었기에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에 회의를 품는 사람들에게 이 이중 비유를 통해 답변하시는 것입니다.
“뭐라고요? 싹 수가 노랗다구요? 천만의 말씀. 한 톨의 겨자씨, 한 줌의 누룩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대단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처럼 내가 선포하는 하느님의 나라가 무력하게 보일지라도 언젠가는 큰 위용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 위용은 상상을 초월하리만큼 대단한 것입니다”라고요. 사실 하느님의 나라 그 시작은 눈에 뜨이지도 않으며, 관심거리도 되지 않고 성공의 전망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는 즉 하느님의 통치가 세상에 나타나게 될 “최후의 날”에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통치로 발효되어 있는 것을 보고 놀랄 것입니다.
신자 여러분 중의 어떤 분은 이런 의문이 마음 속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도대체 하느님의 나라란 무엇이며, 또 현실적으로 구체적 삶을 살고 있는 나와는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간단히 요약해서 한 가지 연만 우선 제시할까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하느님의 뜻을 행하라는 것은 같은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함은 필연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행할 때 이루어질 하느님의 나라는 인격적인 것이며 그것은 국가나 민족을 우선으로 하거나 가장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지금 있는 현재의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순간 순간을 두 가지로 살수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살수도 있고 나의 뜻대로 살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바치는 주의 기도문 가운데서도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뤄짐과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드리지 않습니까? 순간 순간마다 나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향할 때 그분의 나라는 내 안에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나라는 가장 작고, 비천한 것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가장 작은 씨에서 발아하여 크게 성장하는 겨자나무처럼 작은 것에서 시작하여 신비롭게 성장하니까요.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우리 마음 속에 있습니다.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극복, 남에게 친절하고, 기도와 성체성사, 사소한 행위 하나 하나에서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우리 마음 속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자랄 수 있게 해줍니다.
요사이 맑은 밤하늘을 쳐다보노라면 하늘의 별들이 너무나도 영롱하게 빛나고 있음을 느낍니다. 마치 아름다운 대화를 나누고 있기라도 하듯이 말입니다. 별 하나 하나가 제각기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별이 다른 별에게 또 그 별이 또 다른 별에게 빛을 되내어 비쳐주기에 별들은 초여름 밤하늘을 곱게 수놓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주변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들은 어떠합니까? 자기 한 개인의 안일한 삶, 개인의 이익, 영달, 행복만을 위해서 너무나 각박해져 이는 것이 아닐까요? 신문지상의 사회면을 들추기가 두려워지기 조차 할 때가 있습니다. 자신을 더욱 두껍게 싸고 두꺼운 벽을 축조하여 높은 성을 쌓아 올리고만 있습니다. 그래서 공격과 방어를 자유자재로 하는 지혜로운 자가 이기고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냥 자신 안에서 그 껍데기 안에서 고치처럼 아주 작은 세계에서 스스로의 만족을 꾀하는데 급급해져 감을 진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정말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세태가 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고요한 가운데 밤하늘을 쳐다보노라면 조화로 가득한 별들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속삭여 주는 듯 합니다. 별들을 창조하신 하느님, 그 하느님은 사람들 사이에도 같은 조화를 원하시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죽기까지 그것도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시고, 부활하여 우리 가운데 살아계시지 않습니까?
조화를 가져다주는 힘은 바로 사랑임을 예수님의 생애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가 가끔 생활에서 체험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사랑이 하느님 나라의 대헌장이자 헌법입니다. 내 안에서 이 사랑이 싹트고 그 싹이 자라, 큰 나무가 되어 하느님과 이웃에게 기쁨과 위안을 안겨주는 것,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며 그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 백성의 자격이 있으며, 마지막 날 우리에게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건너가는 승리의 기쁨을 안겨줄 것입니다.
교령 자매 여러분!
집을 한 채 태우는 데 성냥 한 개피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각자 사랑의 성냥 한 개피가 되어 우리 주위를, 사회를 사랑의 불러 태워 이 땅에 그분의 뜻이 조금이라도 더 이뤄지도록 노력합시다.
4 연중 제16주일 마태 13,24-43 (가) 오늘 이 순간부터 좋은 씨로 살자
염수완 신부
주인이 밭을 다듬고 좋은 씨를 뿌렸는데 밤중에 원수가 와서 가라지 씨를 뿌리고 갔다 합니다. 처음 싹이 나고 잎이 날 때 누가 알겠습니까? 그러나 그 어린순이 점점 자라면서 구별이 돼 갑니다. 좋은 씨와 가라지도 뿌리를 뻗고 얽히어서 서로 생존경쟁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자기 전체를 내걸고 싸우지 않으면 결국 진다는 것보다는 죽음을 가져오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경지에서 지게 된다면 씨의 결실인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경우엔 아무 쓸모가 없고 생명을 주는 양식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밖에 버리거나 불태워 버리거나 할 것입니다.
그러면 가라지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 의미란 바로 우리를 암암리에 해치는 독소입니다. 그러한 독소를 제거하지 않을 경우엔 중독이 되어 인간의 생명을 조금씩 끊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러한 독소란 유혹을 통해서, 마술이나 덫을 통해서 우리의 오관을 어지럽혀 무질서하게 만들고 마음을 산란하게 할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탄로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어두움 가운데 향하기를 좋아하며 드러나지 않는 방법으로 그리고 겉으로는 착한 얼굴을 가장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무엇을 하거나 이것이 옳은 일이냐 그른 일이냐를 진정한 자세에서 잘 분별하여 행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분명히 “그것은 나쁜 일인데···· 인간이란 본래 약한 의지를 가지고 있으니깐 이런 일 정도는 괜찮겠지. 하느님도 별 것 아닌 것으로 눈감아 주실꺼야”라는 식으로 자기 합리화 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런 것은 그렇다고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만 해야지 그 이상의 말은 악에서 나온다고 마태 5,37에서 명백히 밝히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악과 대결해야만 합니다. 요한 16,33에서 말씀하시듯이 「당신들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시오. 내가 세상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완전 승리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선조로부터 내려오는 악의 세력 즉 죽음을 완전히 뒤엎어 놓으셨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악의 세계가 이끄는 곳은 죽음이요 멸망이며 이러한 죽음을 통해서 죽음을 극복하신 것은 생명을 통해서 되었습니다. 생명을 얻기 위한 바로 그 길은 자기를 끊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6,24)
그러면 왜 세상 안에 악과 선이 그래도 있습니까? 또 착한 사람들이 왜 고통을 받고 있습니까?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선 피와 땀으로 노력한 대가로 지불받게 됩니다. 아무런 노력도 들이지 않고 거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인간의 자유를 거둬들이는 결과가 됩니다. 또한 선택할 권리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또 한가지는 착한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이 과연 가치있다는 것을 악한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께로 귀화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선 미래의 추수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추수때 영원한 불속에 내던져질 것이냐 아니면 간선된 자로 남을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러한 견지는 분도 12세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죽음의 결정적 순간에만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전에 지내온 과정이 대상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오늘 이 순간이 중요한 것이란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매순간 매순간이 한 인간의 역사의 좌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것이냐 안 받아들일 것이냐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러한 문제는 단순히 ‘그 말씀 지당하군’하면서도 나와는 아무 관련없는 것으로 해서는 안되다는 점입니다. 하느님이 하신 말씀은 내 행동의 좌표가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만일 내 행동에 반영되지 않을 경우엔 요한 8,27에서도 볼 수 있듯이 “당신들은 나를 죽이려고 합니다. 당신들은 내 말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하신 말씀으로 예수님을 배척하게 되는 결과를 빚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이 문제가 되는 것은 2,000년전 그리스도께서 오늘 이 순간에도 우리 가운데에서 “나를 따르라(마태 9,9 마르 1,17 요한 1,43 요한 10,27등)”는 단호한 말씀을 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물리치고 승리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구원을 받는다는 확신과 희망을 가지고 바로 이 순간 가라지가 무성한 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 나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특히 허위와 교만, 착취라는 굴레로서의 경제적인 살인, 악법이 성행하는 이 시기에 처한 많은 사람들이 공포와 삶의 좌절을 안고 있다는 점을 귀로 눈으로 직접 간접으로 보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사시는 교형자매 여러분! 삶의 희망을 이들에게 안겨주시지 않겠습니까? 사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고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맞아들여야 하기 때문입니다.(루가 18,17) 그 손가락질하는 사람, 자기 안에서 비추어 볼 때 바로 내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악과 타협을 잘 할 뿐 아니라 남이 잘하는 모습을 보고 배가 아파서 파괴하려는 가라지와 같은 마음, 남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곳에서 나올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라지와 같은 허위와 교만, 질투, 사기, 이간질의 씨앗이 내 마음속에 자라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좋은 씨앗이 자라도록 하나씩 하나씩 자기 잘못을 고쳐나가면서 힘써야 하겠습니다. 또한 바로 내 이웃을 통해 이웃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발견하도록 노력할 뿐 아니라 서로 도와가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해도 힘이 모자라게 될 경우엔 성령에 매일매일 의탁하십시오. 성령께서 잘 되도록 이끄신다고 하셨습니다.(로마 8,26)
5 연중 제16주일 농민주일 마태 13,24-43 (가) 밀과 가라지
최기산 신부
옛날 시골에는 천수답이 많았던 관계로 동네 사람끼리 물싸움을 많이 했다. 개울에서 내려오는 물은 적은데 위에서 몽땅 쓰고 나면 아래에서는 모도 심지 못할 형편이어서 서로가 옥신각신하다가 급기야 치고 받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되면 서로 원수가 된다. 언젠가는, 물싸움을 하다가 상대방의 논둑을 뚫고 물을 몽땅 흘려보내는 보복을 하여 경찰이 오는 소동도 있었다. 이런 것이 우리나라의 원수갚는 형태였다면 약 2000년전의 이스라엘과 이집트 지방에서는 원수진 사람의 밭에 가 지를 몰래 뿌려놓는 정말 고약한 일들이 벌어졌다.
후텁지근한 열대성 기후에다 우기인지라 비가 알맞게 내리면 밀과 가라지는 매일이 다르게 자라난다. 밀과 가라지는 너무나 비슷하여 농부들조차도 구별이 어려웠으니 보통 사람들이 구별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결국 농부들은 밀이나 가라지에게 똑같이 거름주고 김을 매주어야 했다. 판별의 날은 그들을 팼을 때다.
우리나라에서는 논에서 자라는 ꡐ피ꡑ라는 식물이 있는데 이 또한 벼와 너무나 흡사하여 구별하기 힘들다. 결국 다 자란 다음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나면 명확히 드러난다. 사람인들 다르겠는가! 도둑과 보통사람이 어디가 구별되는가? 오히려 도둑이 더 상판이 그럴싸하게 펑퍼짐하고 복스러울 수도 있다.
종의 성급함 가라지를 팼을 때 비로소 종은 알아보고 주인에게 식식거리며 달려가서 아뢰었다. ꡒ주인님, 주인님, 큰일입니다. 어인 일로 밭에 가라지가 그리도 많습니까! 어서 뽑아야겠습니다. 명령만 내리십시오. 한시가 급합니다.ꡓ 일꾼은 화가 나서 어서 빨리 가라지를 뽑아야겠다는 생각만 하였다. 그에겐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주인의 사려 깊음 일꾼은 하나만 생각하고 둘은 생각지 못했으나 주인은 둘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만사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가라지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밀에 중심을 두고 있었다. 가라지는 밀에 엉겨 붙어있기에 가라지를 잘못 뽑다간 밀이 뽑힐 가능성이 많았다. 그걸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가라지가 나쁜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밀이 하나라도 다치면 안된다고 믿고 있었다. 이것은 종으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종은 얼마간의 밀이 훼손되더라도 가라지를 박살내면 후련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복음의 메시지 세상은 밀과 가라지가 공존하는 것처럼 선과 악이 공존한다. 선인과 악인이 공존한다. 그뿐이 아니다. 교회 안에도 선인과 악인은 공존한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너무 성급하게 판단한다. 일꾼이 주인에게 조르듯이 그렇게 조르는 것이다. ꡒ주님, 어찌하여 저 못된 놈들을 그냥 두십니까? 어서 악인들이 끝장나게 하십시오ꡓ라고 투덜거리기도 한다. 마치 가라지가 양분을 다 섭취하여 정작 밀은 비실비실 말라가고 있다는 듯이, 악인들이 이 세상에서도 호의호식하는 바람에 의인은 고난 속에서 살수 밖에 없다는 푸념을 늘어놓기까지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ꡒ그대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악인을 제거하려다가는 선인들이 다친다. 선인들도 악인들과 무관할 수는 없다. 그들의 친척도 되고 친구도 되고 이웃도 된다. 그러니 마지막 날까지 기다리자. 그때는 분명히 판가름날 것이다.ꡓ 그때는 따로따로 거둘 수 있기 때문에 뿌리를 다칠 필요도 없어진다. 뿌리가 다친들 어떠하랴! 알곡만 거두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서두르는 병이 있다. ꡐ빨리, 빨리!ꡑ 한국말 중에 외국인이 제일 잘 아는 말일 것이다. 동남아, 유럽의 음식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수도 없이 이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ꡐ인내. 기다림.ꡑ이 단어들은 우리 민족에게 화두처럼 중요하게 여겨진다.
하느님 나라가 오기까지 우리는 참고 기다려야 한다. 농부가 가을 추수를 기다리듯이 그렇게 기다려야 한다.
추수 때가 오면 옥, 석은 가려진다. 밀과 가라지는 가려진다. 선인과 악인은 가려진다. 그 추수의 때를 우리는 심판의 때라고 한다. 올해는 유난히 많은 종말론자들이 사기충천해 있다. 왜냐하면 추수 때가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추수의 시기는 주인께서 정하실 것이다. 종들이 왈가왈부 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종말이 왔다느니, 가라지가 끝장날 때가 왔다느니 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인간은 약하디 약한 존재인가보다.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는 종말이라는 수순을 거친 다음에 우리에게 주어진다. 종말의 때가 되면, 추수때 알곡은 거두어서 비도 맞지 않고 새도 쥐도 파먹지 않는 창고에 보관되는 것처럼 의인들은 하느님 나라에 가지만, 가라지 같이 악을 저지르며 한평생을 살다가 악한 모습으로 죽어간 사람은 불구덩이에 던져질 것이라는 말씀은 소름돋게 한다.
가라지는 위선자의 상징이다. 가라지는 기생충처럼 밀에 붙어서 살아간다. 이 세상도 위선자가 넘쳐난다. 가라지 같은 인생이 밀과 같은 인생으로 바뀔 수는 없는가! 오늘날 종의 변화가 가능하게 되어가고 있다. 감히 인간의 힘으로 종의 변화가 가능하다면 하물며 하느님께서는 가라지에서 밀로의 변화를 얼마든지 가능케 하실 것이다. 나는 가라지는 아닌지? 순수한 가라지는 많지 않겠지만 가라지에 사로잡힌 상태는 아닌지?
6 연중 제16주일 마태 13,24-43 (가) 먼저 천국에 다다른 사람들
서경윤 신부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마태 13,30)
서울역에 내리자마자 맛있는 국수집이 있다기에 친구를 따라 갔습니다.
지금의 대우빌딩 근처라고 여겨지는 곳이었습니다. 한참 국수를 먹고 있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어디 갔다가 큰 소리로 떠들면서 들어왔습니다. 종업원 아주머니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던 것 같습니다. 주인 아주머니는 「그만하니 다행」이라고 했습니다. 같이 간 친구가 호기심에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대강 다음과 같은 내용을 얘기했습니다.
이웃에 사는 아이가 놀다가 넘어져 얼굴을 어디에 부디쳤는데 피를 많이 흘렸으며, 그 집에 함께 사는 박양과 함께 병원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그 집은 여러 사람이 세들어 사는데, 아이 아버지는 서울역에서 승객의 짐을 날라다 주는 일을 하며, 어머니는 남의 집에 일을 나가므로 낮에는 아이가 혼자 집에 남아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한 집에 세들어 사는 여러 아가씨들이 돌아가며 아이를 돌보아 준다고 했습니다. 특별히 박양은 아이가 어릴 때부터 돌보아왔기에, 거의 박양이 키우다시피 했답니다. 그 뿐 아니라 아이 어머니가 저녁까지 일을 하고 밤에 돌아오므로 그 집 살림을 다 맡아 주다시피 한답니다. 낮 동안에는 별로 손님이 없기 때문에, 아이가 어질러놓은 방도 치워주고, 널어놓은 빨래도 걷어 손질해주고, 심지어 김칫꺼리를 사다 놓으면 다듬어서 김치도 담궈준다고 했습니다.
박양이 없었다면 아이 어머니는 아이 때문에 일하러 나갈 생각을 감히 할 수도 없었을 것이라 했습니다. 비록 창녀생활을 하고는 살지만, 다른 집 아가씨들과는 달리 모두가 가족처럼 살기 때문에, 보기 좋다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밖에 없는 아이가 다쳐서 피를 흘리게 되니까, 온 집안이 발칵 뒤집히고, 특히 박양이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므로, 국수집 주인 아주머니가 병원에까지 따라가서 치료한 후, 이제 박양과 아이는 집으로 가고, 자기는 가게로 돌아오는 길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박양은 친척도 부모도 없는 것 같아 명절에도 아무데도 안가고, 집을 지킨다고 했습니다. 또 저렇게 맘씨곱고 착하고 인물도 그만하면 예쁜 애가, 어쩌다가 이런 곳에 와서 저런 생활을 하게 되었는지 안타깝고 아깝다고도 했습니다. 내가 이 얘기를 들을 때는, 그저 그런 사람도 있겠거니 하고 넘어 갔습니다.
그 후 수년이 지나서 나는 공동체 묵상회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하루는 「밀과 가라지」작업을 하게되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는, 밀과 가라지를 식별하라는 작업이었습니다. 나는 평소에「창녀가 사회악」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라지를 식별하면서 얼른 창녀를 떠올렸습니다. 그 순간, 전에 국수집에서 들은 얘기가 생각나서 한참 고민을 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가라지를 가려내는데 있어서 어떤 사건이나 어떤 집단을 말할 수는 있겠지만, 어떤 사람은, 개인은 우리가 가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편견이나 선입관을 가지고 보는 우리 눈에 아무리 가라지 같이 보이는 사람도, 결코 그렇게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그전에 예수님이 나더러 이 세상 가라지를 싹 다 뽑아 불에 태우라고 했더라면, 나는 여지없이 창녀들을 모조리 처치해 버리는 실수를 저질렀을 것입니다. 「밀과 가라지를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게」하신 주님의 결정은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주일 미사는 빠지지 않지만, 좋은 집에다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며 비싼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며 먹고, 안락한 생활을 하면서도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고 무관심하며,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보다는, 비록 창녀생활을 하더라도 어려운 처지에 서로 도우고, 사랑을 나누며, 화목하고, 평화롭게 사는 그들이 예수님 말씀따라 「먼저 천국에 다가가 있는 사람들」임에 들림없습니다.
『주님, 나는 누구를 향해서도 가라지로 단정할 권리가 없습니다』
7 연중 제16주일 마태 13,24-43 (가) “이미”와 “아직” 사이의 시간
김현준 신부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다. 눈을 감고 오늘 복음 말씀을 생각했을 때, 제일 먼저 이 속담이 떠올랐다, 어쩌면 예수님이 살던 곳, 팔레스티나 지방에도 원수진 사람끼리 서로 폐농을 시키려고 남의 밀밭에 가라지를 뿌리는 예가 적지 않게 있었던가 보다.
한 농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씨만 잘 뿌리면, 반 농사”라는 말대로 제때에 정성들여 밀씨를 뿌렸습니다. 마음보가 나쁜 이웃 사람은, 이 근면한 농부의 살림살이가 번창해감을 시기하였습니다. 왜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지요. 그래서 그 밤에 몰래 가라지를 뿌렸습니다. “가라지가 밀을 덮어 밀밭은 망쳐지고, 그는 손해를 볼 것이다”는 못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지요.
밀밭의 가라지 비유
밀씨가 자라서 이삭이 됐을 때, 그 가라지도 드러났습니다. 농부는 즉시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챘습니다. 당장 가라지를 뽑아내고 싶지만, 추수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심합니다. 혹시나 가라지를 뽑다가 밀이삭 하나라도 다치게 될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좋은 계획이 있으니 추수 때에는 어차피 뽑을 것인데, 그때에 밀은 곳간에 거두어들이고, 가라지는 땔감으로 쓸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이렇게 예수님은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생활의 이야기를 통해,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려준다. 오늘 복음 말씀, 밀밭의 가라지 비유는 예수님의 설명대로 밀밭은 이 세상이고, 씨를 뿌리는 농부는 예수님이시다. 밀씨는 하느님의 착한 자녀이고, 가라지는 악인을 가르킨다.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이고 추수 때는 이 세상 끝나는 때, 즉 심판 때이다. 그렇다. 농부의 씨 뿌림으로 하느님이 다스리는 하늘나라는 이 세상에서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추수 때까지는 기다려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이미’와 ’아직’ 사이의 시공(時空)에 있으며, 이 세상에는 선인과 악인이 섞여 있고 일견 악인이 더 득세하는 듯 하다. 교회 안에도 그러하다. 가끔 이 점이 매우 의문이고 속상할 노릇이지만 현실은 틀림없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런 모습이 끝없이 계속 된다는 것은 아니다. 한번은 ‘가리어 냄’을 당할 것이다. 그 가리어낼 때 가라지가 밀이 되는 이변이 없는 이상 가라지는 곳간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이 밀밭의 가라지 비유에서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알려주는 맥점 (脈點)은 ‘추수 때’이다.
하느님은 밀 옆에 가라지가 뿌려지고 자라는 것을 허용하신다. 그것은 변화와 성장의 가능성을 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드시 추수 때가 있으며 추수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이며, 그 추수 때에는 반드시 가리어 낸다는 것이다. 이때 가라지가 밀이 되는 이변이 없는 이상 가라지는 뽑혀서 불에 태워질 것이다,
추수 때, 그때는 가라지에게는 경고의 때요, 밀에게는 희망의 때이다. 추수 때, 그 때는 시인 신동엽이 “껍떼기는 가라”고 노래부르는 때이다. 신동엽은 이세상의 무수한 회색분자들, 그리고 사이비들을 제거하고 알맹이를 지키고, 가꾸려는 열망을 이렇게 노래하곤 했다.
껍테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깹데기는 가라/(중략)/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향기로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은든 쇠붙이는 가라. 추수때, 그때는 천지 창조 때부터 ‘감추인, 하느님만이 아시는 ’하느님의 시간표’이다.
하느님의 시간표 인정을
최남순 수녀는 ‘하느님의 시간표’대로 오늘을 사는 삶의 지혜를 이렇게 제시한다. “어떻게 써야 할지/가르쳐 주십시오.” 또한 “순간의 지금은 /영원과 무한을/ 이어주는 선(線)/ 모든 시간 속에/ 주인이신 당신은/ 항상/ 나를 기다리고 계심을/ 잊지 않게 하십시오”
누가 이 세상에서 ‘이미’ 시작된, 그러나 ’아직’ 아니기에, 추수 때가 있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맛볼 수 있는가? 세상 안에만 악과 선이 섞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도 나쁜 습관과 좋은 습관이 있음을 알고, 악습은 고쳐나가고 좋은 습관은 키워 덕(德)을 이루는 사람이다.
생명을 가진 모든 씨가 뿌리내리고 싹트는 스스로의 힘을 지니고 있음을 알고, 흙의 섭리를 믿는 사람이다. ‘이미’와 ’아직’ 사이의 시간이 내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간표’임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말씀 속에 변화와 성장의 본질이 있음을 믿는, 그래서 깊이 있게 말씀을 듣는 사람이다.
“아침저녁 마음속 구름 닦고 맑은 하늘 보는” 사람이다. 가라지 뿌리는 훼방을 놓치 않고, 남 잘되는 것 배아파하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맛보는가?
8 연중 제16주일 마태 13,24-43 (가) 가라지 존재의 의미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지혜 12,13.16~19 (죄를 지어도 주님은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
제2독서 로마 8,26~27 (성령께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복 음 마태 13,24~43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악은 도대체 어디서 옵니까?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데 왜 세상에 악이 득실거리며 판을 치고 있고,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다 만드셨다고 하는데 그러면 악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한마디로 모릅니다. 악이라는 존재의 근원은 미스테리입니다. 그런데 존재의 근원은 알 수도 없는 것이 하느님의 반대 세력으로 등장해서 인간을 망치고 세상을 망칩니다. 그래서 신학에서는 악의 존재를 신비로 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서 악의 존재를 말씀하셨습니다. 악은 영원히 제거되어야 할 하느님의 반대 세력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하느님 나라의 튼튼한 성장과 인간 선의 순수한 발전을 위해서 악이 도구로 이용될 때도 있습니다. ‘필요악’이기도 합니다.
가라지는 밀밭에 자라는 억센 잡초를 말합니다. 이것이 처음에는 밀과 너무도 흡사하기 때문에 경험 많은 농부들도 구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크게 자라고 나면 밀과는 엄연히 달라서 어린이라도 구별할 수 있지만, 그때는 가라지가 밀의 뿌리를 덮고 있어서 뽑고 싶어도 뽑지를 못합니다. 가라지 때문에 밀이 뽑힐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악이라는 것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것이 처음에는 선과 너무도 흡사해서 경험 많은 사람들도 잘 속습니다. 심하게는 성직자나 수도자들까지도 쉽게 속아 죄에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악은 항상 선으로 위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떤 일을 성급히 단순하게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혼자 사는 어떤 마담이 있었는데 억척스레 일해서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점잖은 신사가 나타났습니다. 예의 바르고 여자를 존경할 줄 아는 신사요 인격자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경험 많은 마담도 믿었고 주위에서도 인정을 해서 모든 것을 의탁했습니다. 그러나 마담은 결국 자신의 전 재산을 날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기꾼이었던 것입니다.
악이라는 것은 너무도 교묘해서 얼른 알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마귀라는 것이 실상은 천사가 타락한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그럴듯하며 믿음직스럽고 진실된 선으로 자신을 감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섣불리 경솔하게 판단해서는 안되며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악의 정체는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악으로 판명되었다 해서 서둘러 급하게 제거하려 해서도 안됩니다. 밥사발 위에 파리가 앉았다 해서 밥사발을 파리채로 때려서는 안됩니다. 다리에 종기가 났다 해서 다리를 칼로 잘라서도 안됩니다. 괴로워도 참아야 하며 억울해도 기다려야 합니다. 악을 잘못 제거하려다가는 오히려 선이 크게 상처를 받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하느님의 깊으신 뜻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큰 죄를 짓는다 해도 하느님께선 회개할 기회를 주시며 악이 아무리 극성을 부려도 선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오늘의 가라지가 내일엔 밀로 변할 수 없지만 오늘의 가라지 같은 인생은 내일엔 밀과 같은 인생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도 그랬고 성인 아우구스띠노도 역시 그랬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기다림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무작정 끝없이 기다리시지는 않습니다.
하느님께선 악의 회개를 기다리시면서 동시에 악을 심판하실 마지막 날을 기다리십니다. 세상엔 파렴치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온갖 악의 세력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 그들의 세력을 당신의 권능으로 일시에 제거치 않는 것은 그들의 참다운 회개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심판은 오직 하느님의 것입니다. 악을 우리가 악으로 갚으려 해서도 안되며 지금 당장 선이 보상을 못 받는다 해도 서운해 해서는 안됩니다. 마지막은 꼭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갚아 주실 날은 꼭 있습니다.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신앙인에게 가장 큰 도전이요 위협입니다. 그러나 악의 도전이 없다면 인간의 성장과 세상의 발전은 굉장히 둔화됐을 것입니다.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이 풍성하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박해시대에 많은 순교 성인들이 나오며 어려운 시기에 영웅이 나오는 것도 그 이치입니다. 이처럼 악은 나쁘지만 악의 존재는 인간의 선을 위해서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사랑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분명히 악에서 선을 일으키십니다.
9 연중 제16주일 농민주일 마태 13,24-43 (가) 마지막 날에 드러나는 가라지
신심단체장을 맡고있는 A자매는 B자매에게 영 못마땅하다. 왜냐하면 B자매는 단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말썽과 분열만 일으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A자매는 열심히 기도했다.「주님, 우리 공동체를 위해서도 B자매를 이사가게 하시거나 스스로 우리 단체에서 나가도륵 섭리하여 주옵소서」. 정말 기도의 효력(?)인지 얼마 안 있어 B자매는 멀리 이사를 가게 되었다. A자매는 이제는 우리 단체가 정말문제가 없겠구나 하면서 흡족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전혀 생각지 못하던 C자매가 더 큰 골치 덩이가 되었다. 그러자 A자매는 다시 주님께 기도를 드렸다.「주님, B자매가 가면서 새끼를 치고 갔습니다. 우리 공동체를 위해서 C자매도 없애주십시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A야, 그러지 말고 네가 나가거라, 그러면 아무 문제가 없을테니 ‥‥」 물론 우스갯소리이다.
인간은 누구나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이를 쉽게 판단하고 단죄를 한다. 사실은 자신 안에 더 큰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자신의 약점은 관대하고 이웃의 약점에는 용서가 없을 때가 많다.
세가지 비유의 가르침
오늘 복음은 하늘나라를 가라지, 겨자씨, 누룩 등 세 가지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은 밀밭에 가라지가 많이 생겨도 당장 뽑지 말고 추수 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리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의 배경은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고려해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꼭 로마의 탄압에 시달리며 메시아를 기다리던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순수한 공동체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죄인들을 제거해야만 흠 없는 공동체를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죄인들과 어울리고 그들을 위해 봉사함으로써, 많은 유다인들의 비난과 공격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미 시작하였고, 마지막 심판 때는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판단은 완전치 못하고 오로지 추수하시는 분인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하신 것이었다. 따라서 인간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신뢰하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도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설명한 것이다. 아주 작은 씨앗인 겨자씨가 자라 커다란 나무가 되고, 작은 누룩이 밀가루를 부풀려 큰 빵을 만드는 것에 하느님의 나라를 비유하셨다.
하느님의 다스림은 이미 시작되었고 그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큰 결과를 낸다는 확신의 말씀이었다.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하잘 것 없고 작게 보여도, 엄청난 성공과 열매가 결국 이루어진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그래서 하늘나라는 신비이다. 이루시고 완성하시는 분은 인간이 아니고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판단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뿐
인간이 극복하기 어려운 심성 중에 하나는,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마음이다.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생각과 판단은 가장 바르다고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을 마음대로 판단하고 단죄하기까지 한다. 가정이나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다른 이의 단점을 자기 마음대로 고치려고 한다. 마치 가라지를 뽑아 깨끗한 밭을 만들려는 유혹이다. 그러나 세상의 어느 곳에도 선과 악은 공존하고 있다. 사회에도 가정에도 내 마음속에도 항상 공존하고 있다. 거부할 수 없는 진리이다.
바꾸어 생각하면 다른 사람의 판단에는 내 자신도 쓸모 없는 가라지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기적이고 편협한 눈으로 볼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 안에서 모든 것을 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또한 온전히 밀과 가라지를 구분하시는 분은 바로 주님뿐이라는 겸손한 마음을 지녀야 한다. 우리의 판단과 결정이 얼마나 잘못되고 실수를 했는지는 우리 자신이 살아오면서 잘 경험하고 있다.
가족이나 형제가 못마땅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점이 있더라도 단죄하지 않고, 참고 기다리면서 이해하고 용서하려는 마음을 지녀야 할 것이다. 이웃 안에 가라지를 뽑고 싶은 유혹이 들 때, 우리 자신을 먼저 반성하는 마음을 가지는 습관을 지니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10 연중 제16주일 마태 13,24-43 (가) 하느님의 다스림에 희망을 걸고
교구 주보
오늘 마태오 복음(13,24-43)에는 예수님의 3가지 비유(가라지, 겨자씨, 누룩)가 나온다. 먼저 이 비유들을 차례로 살펴본 후 비유가 지닌 의미를 고찰해보기로 하자.
1. 가라지의 비유(13,24-30)
마태오가 소속된 시리아 교회에는 그리스도인들과 사이비 그리스도인들이 공존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성급한 이들은 사이비 그리스도인들을 가려내어 교회에서 내쫓아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선인들과 악인들에 대한 판단과 상벌은 하느님의 종말 심판에 맡겨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또한 주인의 참을성 있는 모습이 강조되어 있다. 이는 곧 하느님 ‘아빠’의 자비와 관용이다. 따라서 교회는 공동체 내의 악한 이들을 참아주어야 하고, 교회의 지도자들은 서둘러 악인들을 단죄함으로써 교회를 경직시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
2. 겨자씨의 비유(13,31-32)
겨자는 일년초로서 근동 지방에서 빨리 자라고 쉽게 번식하는 흔한 식물이다. 이 식물의 키는 보통 1.5m, 갈릴래아 호수변에서는 3m까지 된다. 그 열매는 새까맣고 좁쌀보다 더 작은데, 예수께서는 아마도 이 겨자씨를 생각하셨을 것이다(마태 17,20; 루가 17,6). 이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성장(成長) 비유’이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의 작용이 하찮지만 마침내 종말에는 엄청난 위력을 드러나리라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이처럼 은밀히 시작하여 큰 결과를 낸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로써 비록 하느님께서 지금 예수님을 통해서 하시는 일이 작아보일지라도 앞으로 더욱 엄청난 위력을 펼치시리라는 확신을 피력하신 것이다.
3. 누룩의 비유(13,33)
누룩의 비유도 ‘성장 비유’이다. 이 비유의 초점은 누룩의 숨겨진 활동과 두 배, 세 배로 불어난 밀가루 반죽의 비교에 있다. 누룩은 밀가루 속에 숨어있지만 엄청난 분량의 밀가루를 계속해서 부풀린다는 것이 골자이다. 하느님 나라가 비록 지금은 밀가루 속의 누룩처럼 숨어있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엄청난 위력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지금은 아니 계신 것 같지만 차차 그 모습을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4. 비유들이 지닌 의미(13,34-43)
우리들은 교회 안에서 성(聖)과 속(俗)을 지나치게 구별한다. 하지만 가라지를 가려 뽑아내는 일이 추수꾼의 몫인 것처럼 성과 속을 구별하고 의인과 죄인을 가르는 기준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현상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러기에 신앙에 회의를 느끼고 교회를 떠나는 이들도 있다. 또 복음의 씨를 뿌린 다음에도 제대로 자라나는지 그 과정을 여유있게 지켜보지 못하고 조바심한다. 하느님의 다스림은 겨자씨처럼, 밀가루 속의 누룩처럼 매우 작고 은밀한 곳에 숨겨져 있지만 장차 큰 위력을 드러낼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다스림에 희망을 걸고 복음을 실천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11 연중 제16주일 마태 13,1-23 (가) 하느님께 앙갚음을 한 사나이
최인호 작가
1849년 1월12일에 미국 켄터키주에서 태어난 존 그린 한닝은 어렸을 때부터 불과 같은 성격을 지녀 싸움을 좋아하며 반드시 앙갚음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16세 되던 해 아버지와 싸우고는 그 앙갚음으로 아버지의 담배창고에 불을 지르고 가출했습니다. 그는 리오그란데 강변으로 도망쳐 카우보이 생활을 오래하여 거친 서부의 사나이가 되었습니다. 9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그는 메리라는 여인에게 매혹되었다가 남편은 반드시 진실한 가톨릭 교우라야 한다는 말을 듣고 앙갚음을 하기 위해 36세에 트라피스트 봉쇄수도원에 입회합니다. 수도원 생활도 불과 같은 그의 성격을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메리 요아킴 수사로 이름을 바꾼 그는 자기를 괴롭히는 수사를 향해 건초갈퀴를 휘둘러 앙갚음을 하려 하기도 하고 설거지를 하다가 깬 접시값을 보상하라는 수도원장에게 덤벼들기도 합니다. 40세일 때, 어느 날 수염을 깎고 있는 그에게 수도원장이 “자네는 거만해. 언제쯤 겸손을 배울 것인가”라고 주의주자 면도칼을 휘두르며 “왼쪽귀에서 오른쪽 귀까지 베어버리겠다”고 난동을 부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곧 수도원장을 찾아가 무릎 꿇고 “죄송합니다. 그리고 부끄럽습니다. 저의 기질, 저의 오만, 격렬한 피가 저를 망치고 말았습니다” 하고 용서를 빕니다.
그는 거칠고 교만한 성격을 주신 하느님이야말로 앙갚음과 복수를 해야 할 최고의 대상임을 깨닫고 “이제야말로 하느님께 앙갚음을 하겠다”고 결심하고는 “내 주 예수여, 저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차례입니다. 이제는 당신이 저를 십자가에 매달아주십시오” 하고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카우보이 존 그린 한닝은 1908년 4월30일 이 세상에서 가장 겸손하고 가장 온순한 성인이 되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밭에 좋은 씨를 뿌린 것에 비길 수 있다. 사람들이 잠을 자고 있는 동안에 원수가 와서 밀밭에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마태 13,24-25).
우리들의 마음은 하느님이 주신 밭입니다. 이 밭에 하느님께서는 겸손과 절제와 온유와 인내의 좋은 씨앗을 뿌리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원수인 악마는 우리들 마음의 밭에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과 교만, 방탕과 이기주의의 나쁜 씨앗을 뿌렸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하느님이 만드신 에덴 동산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라는 마음속의 잡초를 뽑아내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불과 같은 성격의 존 그린 한닝이 온순하고 겸손한 메리 요아킴 성인으로 변한 것은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속에 자라는 잡초를 뽑아낸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이야말로 반드시 앙갚음을 해야 할 최고의 상대입니다. 하느님, 나도 존 그린 한닝처럼 반드시 당신에게 앙갚음을 해 보일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연중 제16주일
제 1 독서 : 지혜 12, 13. 16-19
제 2 독서 : 로마 8, 26-27
복 음 : 마태 13, 24-43 or 13, 34-30
제 1 독서 : 시기적으로 볼 때 지혜서는 구약의 마지막 책이다. 기원전 1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어떤 유다인으로 간주되는 지혜서의 저자는 헬레니즘의 영향하에 살던 유다인들에게 헬레니즘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전통적인 교리를 옹호하며 참된 지혜를 찾으라고 권한다. 특별히 지혜서 10-19장은 천지창조부터 출애굽까지의 이스라엘 역사상에서 교훈을 이끌어내는 전형적 하가다 미드라쉬이다.
지혜서 저자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대하시던 역사를 깊이 숙고한 후에 하느님의 관용과 인내를 발견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원수들에게까지도 관용을 베푸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느님께서 관용을 보이시는 이유는 사람들을 회개로 이끄시기 위해서이다.
제 2 독서 : 지난 주 제2독서에서 언급된 것처럼 하느님의 자녀로서 영광에 참여할 날이 올때까지 모든 것이 신음하고 있다. 피조물이 신음하고(로마 8, 22) 그리스도 신자들이 신음하고(로마 8, 23), 성령께서도 신음하고 계신다(로마 8, 25).
그러면 성령의 신음은 무엇에 관계된 것일까? 그것은 로마서 8장 15절에 언급된 하느님의 자녀에 관계된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느님 은총의 선물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 신음하고 계신다(1고린 2, 12 참조).
복 음 : 하느님 나라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예수께서는 세 가지 비유를 동원한다. 가라지와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이다. 예수께서는 왜 이처럼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을까?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없다. 다만 누군가가 “하늘나라는 ——처럼 생각할 수 있다.”고 설명해 주어야 어렴풋이 알아들을 수 있을 따름이다. 또한 예수 자신에게도 하느님의 나라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수난과 부활 사건 전에 예수께서 행한 일은 다만 표징이고 초대일 뿐이었고 비유일 따름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군중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예수께서는 이 모든 것을 군중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마태 13, 34).
어떻게 하늘나라의 삶을 이 세상에서 살 수 있을까? 첫째, 겨자씨와 같이 작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너나할것없이 서로 커지고자 하기에 싸움이 끊이질 않는다. 커지기 위한 삶에서 겨자씨만큼 작아지기 위한 삶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둘째, 외적으로 변화시키는 누룩이 되는 것이다. 누룩같이 보이지 않게 내적으로 성장할 때 필연적으로 도달하는 경지이다. 셋째, 가라지를 뽑지 않는 것이다. 작아진 사람, 성장하고 변화된 사람에게 도달되는 깨달음이다. 가라지가 가라지를 뽑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겠는가? 밭에서 잡초를 뽑듯이 인간 현실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우리 내면의 마음 밭에서 쉬임없이 솟아나는 가라지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가라지를 뽑는 일, 이것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심판 때 하실 일이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지난 주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 나라를 알아보았습니다. 이번 주의 복음은 지난주에 이어 씨 뿌리는 자가 좋은 밭에 씨를 뿌렸는데 거기에 밀과 가라지가 섞여 나왔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밀과 가라지는 서로 엉켜 있어서 가라지를 뽑으려다가 밀까지 뽑게 되므로 추수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는 성인도 있고, 죄인들도 있습니다. 한국 교회사를 보더라도 한 명의 순교자 뒤에는 세 명의 배교자가 있었고, 배교한 사람들이 회개하여 다시 순교자가 된 경우도 있었기에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모든 것이 판가름나는 법입니다.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사울도 나중에 회개하여 사도 바오로가 되어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전하지 않았습니까? 또 성 아우구스티노는 어떠합니까? 어머니인 성녀 모니카의 간절한 기도와 기다림 속에, 성 아우구스티노도 성 암브로시오의 강론을 듣고 회심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는 자신의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고 완전히 변화하여 세기의 대성인이 되지 않았습니까? 만약 성녀 모니카가 조급하게 생각하여 모든 것을 포기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너무 성급하게 판단하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일을 그르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했던 갈릴레오나 끝까지 충절을 버리지 않았던 성삼문 등 사육신의 경우도 그러하지 않습니까? 모든 것은 역사의 심판에 맡겨놓아야 하며, 더 정확히 말해서는 하느님의 손길에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중국 고전의 「열자」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북산에 우공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나이 아흔에, 다니는 데 불편하기 때문에 문 앞의 태항산과 왕옥산을 옮기려는 뜻을 세웠습니다. 아는 사람들은 이룰 수 없는 일이니 공연히 수고하지 말라고 충고했습니다. 그러나 우공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결심이 정해진 이상 내가 죽으면 내 아들이 있고 아들은 또 손자를 낳을 테고 손자도 아들을 낳을 테니까 한 세대 한 세대 옮기면 될 거야. 저 산쯤이야. 삼태기에 조금씩 옮기면 평평해지지 않을 리 없겠지.” 우공의 이러한 행위가 상제를 감동시켰습니다. 상제는 두 신선에게 명령하여 두 산을 옮겨주도록 했습니다.
이 이야기의 원래 의미는 빨리 효과를 보려 하고 눈앞의 이익을 노리는 사람들의 생각을 깨뜨려 우공처럼 욕심과 사심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내려온 이 이야기의 의미는 오히려 곤란을 무릅쓰고 산을 옮기겠다는 불온불굴의 정신입니다. 이 정신은 곧 인내를 요하는 것이고 기다림 속에서 터득되는 것입니다.
제1독서 지혜서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는 하시고자만 하면 무엇이나 다 하실 수 있는 분이시고 악인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수도 있지만 너그러움 마음으로 사람들이 옳은 길로 돌아오도록 기다리고 계십니다. 인내와 관용을 가지고 죄인들이 회개하도록 기다려 주십니다. 하느님 편의 승리를 즉시 보고자 하는 지나치게 열심한 그리스도인들의 참을성 없음에 비해 참아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은 큰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마태 18, 21-22)고 하셨고 제자들이 사마리아 동네 사람들이 냉대를 하고 예수의 일행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대해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불살라 버리자고 했을 때 그들을 꾸짖고 나서 다른 마을로 가셨다는 이야(루가 9, 51-56)는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무엇이든지 성급하게 판단을 하고 즉시 결정에 옮기기보다는 여유 있게 기다리는 마음, 너그러운 마음으로 상대방이 바른 길로 돌아올 수 있을 때까지 기회를 주는 태도가 소중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너무 빨리 뜨거워지는 것은 빨리 식는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은 시간을 요하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한 마리의 빈대를 잡는다고 초가삼간을 태우고 공산주의자를 색출한다고 양민을 무참하게 학살하는 그런 어리석음을 범한다면 얼마나 그릇된 일이겠습니까?
지나치게 빨리 속단을 내려 균형을 잃어버리는 것, 이것이 불신앙이요, 증오와 교만입니다. 우리는 이 증오와 불신의 시대에 무엇이 진정 하느님의 뜻인지 간절히 구하고 죄인들까지도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포용할 수 있는 사랑의 공동체, 화해와 기쁨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지난날 모 대학 총장이 주사파 선풍을 일으키면서 교수, 대학생을 공산주의자로 몰아세우던 그 어리석음도 결국 따져보면 성급한 예상에서 나온 것임을 알고 있는 우리들이기에 항상 신중하게 모든 것을 판단하고 여유 있게 기다리는 마음으로 성숙된 하루하루를 삶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이라는 넓은 밭에 좋은 씨를 뿌리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 널리널리 퍼지도록 땀흘려 일하는 일꾼이 됩시다. 마지막 날의 추수와 심판은 하느님께 맡기고 오직 묵묵히 일하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이 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