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19주일

 

연중 제19주일



주님이십니까? 그러시다면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십시오


제 1독서: 1열왕 19,9a.11-13a

제 2독서: 로마 9,1-5

복음: 마태 14,22-33



연중 제19주일의 독서들 상호간에는 두 가지 일치점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제 1독서와 복음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이중적 ‘신적 현시’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을-특히 응송에서-구원해주시고 ‘평화’와 모든 행복을 베풀어주시는 분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편의 저자는 하느님 나라를 이땅위에 그리고 인간들의 마음속에 실질적으로 세워주는 어떤 신적 기본 속성들을 지극히 아름답게 인격화하여 표현하고 있다 :“당신을 두려워하는 자에게는 구원이 정녕 가까우니 당신의 영광이 우리 땅에 계시게 되리라. 자비와 충성이 마주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함께 입맞추리라. 땅에서 충성이 움터나오면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시편 84,10-12).

 입당송도 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해 당신의 능력을 펼치시는 하느님께 대한 충만한 신뢰심을 표현하고 있다 :“하느님 당신의 언약을 돌아보시고 당신의 가난한 이들 생명을 내내 잊지 마소서”(시편 73,20.19).

 이 두가지 관점은 다른 한편에서 볼 때 배타적이 아니라 서로 합치되고 있다 : 하느님 또는 그리스도께서는 ‘구원하시기’위해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 모든 신적 현시의 행위는 우리가 이제 해석해 나가려고 하는 모든 성서 구절들이 보여주듯이 사랑과 자비의 행위이다.



 “엘리야는 겉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동굴 어귀로 나와 섰다”



“엘리야 전설집”(1열왕 17장-2열왕 1장)에서 취해지고 있는 제1독서는 하느님 야훼께서 호렙산(또는 시나이산)에서 엘리야 예언자에게 신비스럽게 나타나시는 장면을 묘사해주고 있다. 그 산은 ‘하느님의 산’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이미 거기서 모세에게 나타나셨고(탈출기3장 ; 33,18 ; 34,9 참조) 또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셨기 때문이다(탈출기19장 ; 24장 ; 34,10-28 참조).

 이세벨 왕후의 비호를 받던 바알의 모든 예언자들을 살해했기 때문에 그녀로부터 죽음의 위협을 받던 엘리야는(1열왕 18,20-40 참조) 고향을 떠나 은신처를 찾아 시나이산을 향해 가면서 그 모든 행위가 모세의 계약에 대한 자기의 충성심뿐만 아니라 자기 활동이 신적 영감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도 입증해주기를 바랬다.

 하느님에 의해 놀랍게 원기를 회복한 후(1열왕 19,5-8) 그는 밤을 지내기 위해 한 동굴에 이르렀다. 그때 야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앞으로 나가서 야훼 앞에 있는 산위에 서 있거라.’ 그리고 야훼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 한줄기가 일어 산을 뒤흔들고 야훼 앞에 있는 바위를 산산조각 내었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다음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지진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다. 지진 다음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불길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다. 불길이 지나간 다음 조용하고 여린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야는 목소리를 듣고 겉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동굴 어귀로 나와 섰다”(1열왕 19,11-13).

 ‘바위를 산산조각 내는’ 격렬한 바람, 지진, 불길 이런 모든 표징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인간들에게 힘있고 무서운 하느님으로서 나타내 보이신다. 그분의 그러한 모습은 두려움을 야기시킨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나이산 어귀에 엎드려 모세에게 하느님 야훼 대신으로 그가 자기들에게 말해주기를 간청한다 :“당신이 우리에게 말해주시오. 잘 듣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죽을 것입니다”(탈출기20,19).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엘리야 예언자에게 아주 다정한 친구처럼 나타나고자 하신다. 그분은 은밀히 속삭이시며 살랑거리는 바람처럼 말씀하신다. 거의 알아들을 수 없고 파악하기 어려울 만큼 빨리 지나가는 그분의 모습을 알아뵙기 위해서는 세심하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예언자 엘리야는 그분을 알아 뵙고 존경의 표시로 “겉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운다.”

 이 하느님의 현시 장면에는 하느님께서 계약을 새롭게 하시고 당신의 이름을 장엄하게 알려주시면서 구름 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던 그 장면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나는 야훼다. 자비와 은총의 신이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아니하고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이다. 수천대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베푸는 신, 거슬러 반항하고 실수하는 죄를 용서해주는 신이다..”(탈출기34,6-7). 두 경우 다 인간에게 나타나시는 하느님은 사랑과 용서의 하느님이시다!



일상생활 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기



 하느님께서는 위대한 우주적 사건이나 역사적 사건뿐만 아니라 거의 무의미하게 보이는 매일매일의 작은 일들에도 현존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오늘날 현대인에게 특별히 요구하시는 것은 바로 그런 작은 일을 통해서이다. 나의 일상적 노동, 가정,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 우정의 행위, 기쁨뿐만 아니라 고통, 병, 괴로움, 걱정, 심지어는 죄(그것이 회개와 영신적 재생의 기회가 될 때)에 있어서까지도 나의 충실성과 사랑을 요구하신다는 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하느님은 매일매일 우리의 일상적 생활 속에 계시는 하느님이지 어떤 중대한 기회에만 등장하는 하느님이 아니시다. 그렇게 드물게 나타나시는 하느님은 결코 ‘친구’가 되지 못하시고 오히려 우리의 벌이나 요구나 원의 또는 우리의 불만족과는 무관한 ‘방관자’가 되시기가 더 쉽다.

 하지만 하느님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들어오시는 일은 오직 우리가 그분 안에 둘어가고 마치 엘리야가 그랬듯이 그분을 간절히 청할 때만이 가능하다.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요한복음에서 말하는(15장) 그분과의 사랑과 우정의 교차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동안 배는 풍랑에 시달리고 있었다”



 오늘 복음도 그리스도께서 놀랍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권능과 자비의 두 관점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인간들의 모든 필요를 돌보아주시는 가까운 친구인 하느님은 우주적 사건들과 크나큰 역사적 사실들의 지배자로서의 권세있는 하느님의 모습도 배제하지 않으신다. 사도들이 ‘역풍’을 만나 배에서 고생하고 있을 때 물위를 걸으시는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의 이야기는 이러한 사실을 주제로 하고 있다. 마태오는 거기에다 자기 자신의 고유 사료 즉 스승을 따라 자기도 물 위를 걷게 해달라고 하는 베드로의 요청을 덧붙인다.

 첫 번째 빵을 많게 한 기적 후 즉시 예수는 또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먼저 가라고 명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군중을 보내신 뒤에 조용히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올라가셔서 날이 저물었는데도 거기에 혼자 계셨다. 그동안 배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역풍을 만나 풍랑에 시달리고 있었다. 새벽 네 시쯤 되어 예수께서 물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다.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본 제자들은 겁에 질려 엉겁결에 ‘유령이다’하며 소리를 질렀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향하여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하고 말씀하셨다”(마태 14,23-27).

 여기까지는 마태오의 이야기와 마르코의 이야기(6,46-52)가 일치한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은 마태오에 있어서는 배가 “풍랑에 흔들이고 있었고”(24절) 마르코에 있어서는 제자들이 “배를 젓느라고” 애를 쓰고 있었다(마르 6,48)는 점이다. 이제 보게 되겠지만 이 유별난 점이 바로 그 사건의 ‘교회론적’ 차원을 부각시켜주고 있다.

 지금 우리의 관심을 두 가지 극단적 대립의 현실을 드러내는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해 보는 것이다 : 한편에서, 예수께서는 밤새 기도하시러 혼자 산에 오르시고(23절) ; 다른 한편에서는 폭풍우에 압도된 제자들이 살려고 애써 노를 젓고 있다. 그 폭풍우는 오직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야 멈추게 된다(32절). 인간들의 행위는 만일 하느님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언제나 흔들리고 불안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현존은 특히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께서 혼자 기도하러 가셨다가 사도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개입하시는 모범적 행위는 모든 그리스도 신자 그리고 특히 교회의 태도가 어떠해야 되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이미 말했듯이 마태오는 자기도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해달라는 베드로의 엉뚱한 요구를 이 이야기에 덧붙이고 있다 :“베드로가 예수께 ‘주님이십니까? 그러시다면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십시오’하고 소리쳤다. 예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위를 밟고 그에게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거센 바람을 보자 그만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는 ‘주님, 살려주십시오!’ 하고 비명을 질렀다. 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함께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다.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앞에 엎드려 절하며 ‘주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28-33절).

 이 특별한 내용으로써 마태오가 전체 이야기에 부여하고자 했던 ‘교회론적’ 강조점이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더욱이, 마태오 복음사가가 무엇보다도 이 대목(13,53-16,20)에서 자기의 교회론적 관심을 뚜렷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베드로는 스승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그 누구보다도 열정에 차서 그분을 닮아 보고자 자신도 그렇게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한다 :“주님이십니까? 그러시다면 저더러 물위로 걸어오라고 하십시오”(28절). 하지만 그의 신앙은 처음에 열정에 찼던 만큼 강하지는 못했다 : 이미 ‘그러시다면’ 이라는 조건이 깊은 믿음의 감정보다는 넓은 의미에서의 가정을 더 생각하게 한다. 어쨌든 사실상 믿음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믿음은 거센 바람이 불자 곧 사라져 버렸다. 신뢰감과 두려움이 혼합되어 있는 미묘한 상태가 그가 물에 빠져들기 시작했을 때까지 그를 사로잡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진정으로 그를 대해주셨다. 만약 베드로가 보다 철저한 믿음을 가졌더라면 기적은 분명히 일어났을 것이다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31절).

 베드로는 불과 수초 사이에 최고의 신앙심과 극도의 의심으로 인한 두려움을 체험하였다. 그 두가지 사실은 심리학적으로도 이해될 수 있겠지만 분명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의 모습을 이루어주지는 못한다.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이야기는 주님의 모든 제자에게 특히 마태오가 풍랑에 흔들리는 배의 모습에서도 또 베드로- 잠시 후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특별한 직책을 맡기실(16,18-19)-의 형상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고있는 교회에 하나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강한 반대를 무릅써야 하는 역사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마치 주님이 안 계신 것같이 느껴진다. 그분께 대한 용기있는 믿음이 요구되지만 실제로는 별로 믿음이 강하지 못한 공동체이다. 크나큰 위기에 부딪히게 되면 금방 말할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히고 만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것(그릿스도교 공동체)을 구원하시기 위해 현존하신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분은 가장 두려운 힘도 자기 자신에게 예속 시킬 수 있는 신적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 그분께 의탁하는 것이야말로 넘어지지 않기 위한 필수불가결의 조건이다. 보다시피,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의 영광스러운 계시적 가르침에로 바꾸어놓음으로써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분께 대한 용기있는 믿음과 의탁하는 태도를 가지도록 하였다. 그의 해석은 분명히 교회론적이며 구원론적 관심으로 향하고 있다”(G. Barbaglio, in I Vangeli, Cittadella Editrice, Assisi 1975, p.344).

 “용기있는 믿음과 의탁하는 태도를 가지라”는 이 메시지는 오늘 날의 교회에도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메시지다. 오늘날의 교회는 이미 어렴풋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종교적 윤리적 인간적 질서상의 갖가지 문제들을 정면으로 맞고 있다. 사회는 비탄에 차서 교회에 문제 해결을 요청하고 있다. 교회는 문제 자체의 거대함과 지체 할 수 없는 다급함 때문에 마치 그 제자들처럼 폭풍우에 휘말려 쓸려 가버릴 듯한 느낌에 사로잡힐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 그리스도께서는 큰소리로 말씀하신다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27절).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는 물론 권능의 표현도 결코 역사속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오늘도 우리는 그분의 사랑과 자비와 권능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것들은 만일 우리가 용기있는 믿음을 가진다면 결코 약화되지 않을 것이다.



“동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은 저주를 받아도 한이 없다”



 사도 바울로는그리스도께서 오신 후 이스라엘이 처하게 된 그비참한 상황 앞에서도 그러한 용기를 잃지 않았다. 즉 예언자들에 의해 선포된 구세주를 기다리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은 그분을 십자가에 매달았으며 그분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도 바울로는 이 비극적 사건의 모든 고통과 책임을 통감한다 :“나는 혈육을 같이하는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멀리 떨어져 나갈지라도 조금도 한이 없습니다”(로마 9,3). 어쨌든, 그는 하느님께서 비록 종말의 대가 되어서라도 반드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수 있으시다고 확신하고 있다(로마 11,26).

 과연, 하느님의 사랑의 현시는 온 역사의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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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 19 주일

    제 1 독서 : 1열왕 19, 9ㄱ.11-13ㄱ

    제 2 독서 : 로마 9, 1-5

    복     음 : 마태 14, 22-33


    제 1 독서 : 가르멜 산에서의 대결로 바알의 예언자 450명을 모조리 처단한 엘리야 예언자는 이세벨 왕비가 무서워서 목숨을 구하여 급히 도망을 쳤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있을 작정입니까?”(1열왕 18, 21)라고 불같이 호령하던 기세는 간데없고 여자에게 겁을 먹고 무서워 떨며 도망치는 엘리야의 연약한 모습을 보게 된다.  그는 사십주야를 걸어서 호렙 산에 이르렀다. 오늘 독서는 호렙 산에서 엘리야가 하느님을 체험하는 이야기이다.

    엘리야는 강한 바람, 지진, 불 가운데서 하느님을 체험하지 못하고 다만 조용하고 여린 소리 가운데에서 그분을 체험했다.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능력이나 힘을 통해서만 당신자신을 드러내시지 않는다. 오히려 조용한 침묵의 소리와 연약함 가운데 당신을 드러내신다. 더욱이 엘리야가 연약한 처지에 있을 때, 자기 사명을 완수하는 데에 실패했다고 생각할 때(10절) 이런 계시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조용한 침묵의 소리 가운데서 엘리야가 주님을 체험했다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열 살짜리 아이면 이미 자동차 이름, 야구 선수 이름, 유명 연예인의 이름을 쫙 외우는 세상인데, 조용한 침묵으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리 만무하다. 이 북새통 속에서 어찌 내심의 소리가 들려오겠는가? 하느님의 소리를 들으려면 먼저 침묵에 맛들이고 마음의 평화가 깃들어야 한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떠나서 지금 호렙 산에 와있다. 이유야 어떻든 – 아마도 그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모세의 경험을 새롭게 체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 그는 자기 사명의 장소를 버린 것이다. 그래서 두 번이나 질책을 당한다. “엘리야야, 네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9. 13절) 이 질문은 “역사가 이루어지는 장소를 버리고 무슨 일을 하겠다고 이 한적한 곳에 와있느냐?” 라는 뜻을 내포한다. 결국 주님은 예언자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셔서 역사의 현장으로 돌려보내신다(15-18절).


    제 2 독서 : 유다인 출신으로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도 바오로는 자기 동족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기 동족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면서 어둠 속으로 끌려들어 가는 것을 고통스럽게 보아야 했다. 그래서 자기 동족이 그리스도를 발견하도록 하기 위해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 나가겠다고 하는 이율 배반적인 소망을 말한다. 그러나 그는 온 이스라엘이 구원되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있다(로마 11, 25-26). 언젠가 하느님께서는 계약의 원천이 된 이스라엘 백성을 밝혀주시고 구원해 주시리라고 사도 바오로는 굳게 믿고 있다.


    복     음 : 우리를 믿음으로 이끄는 기적 이야기이다. 예수께서 물위를 걸었다는 기적이 중요하다기보다는 왜 이런 기적을 보여주셨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그 대답은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예수께서 산에서 기도하시는 동안 배는 역풍을 만나 밤새도록 시달렸다. 하느님의 아들(33절)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세상 풍랑을 이겨낼 수 없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부족한 베드로는 거센 바람 앞에서 물에 빠지고 말았다.

    예수께서 물위를 걸어서 오시는 것을 보고 베드로는 자기도 물위를 걷게 해달라고 청했다. 베드로의 청은 그의 꿈을 폭로한다. 즉 예수께서 하시는 것을 자기도 하겠다는 꿈이다. 예수를 따름으로써 그분의 권능과 세도를 입어보겠다는 뜻이다. 스승의 마음이 전해 다른 것임을 아직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위를 걸으시는 기적 직전에 예수께서는 오천 명을 먹였다는 것을 정치적으로 볼 때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당시 예루살렘, 가이사리아, 갈릴래아에 주둔하던 로마 군인은 약 3,500명밖에 안되므로 예수께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정권을 잡을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정치적인 메시아가 되기를 거부하셨기에 제자들을 억지로 재촉하여(14, 22) 배에 태워 먼저 따나 보내셨다. 제자들을 억지로 재촉했다는 이 구절은 매우 예외적인 언급이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군중들이 달려들어 억지로라도 왕으로 모시려는 낌새를 알아채시고”(요한 6, 15) 군중들의 열망을 차단하고 산으로 피하시려고 하셨던 것 같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부족해서 물에 빠졌던 베드로를 보며 우리는 믿음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하느님은 외모를, 마음을, 재주를, 사회적 위치나 업적을 보시는 게 아니라 믿음을 보신다. 믿음만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능케 한다. 영적으로 보면 우리의 삶은 어둔 밤, 물위를 걷던 베드로와 흡사하다 하겠다. 도대체 믿음 없이는 온갖 유혹의 바다, 쾌락과 탐욕의 바다를 건너 주님께 도달할 수 없다.

    33절의 “주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은 전례적인 흔적을 갖고 있다. 예수께서는 배에 탄 사람들을 죽음의 수렁에서 구해 내신다는 점에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마태오에게 있어서 배는 교회를 표징한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의 성서 말씀은 하느님 체험과 관련한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나고 체험하는가는 그 사람의 신앙을 새롭고 깊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고 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해줍니다. 각 사람의 하느님 현존 체험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실존을 되돌아보게 하는 소중한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 따르면 엘리야 예언자는 호렙 산(또는 시나이 산)의 한 동굴 속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는 하느님의 현존 체험을 강풍이나 지진, 불길 가운데서가 아니라 조용하고 여린 미풍 가운데서 체험합니다. 험난한 호렙 산에 강풍이 불고 지진이 일어나고 불길이 번졌을 때 그는 하느님의 분노가 내린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감히 얼굴을 내밀지 못하고 두려워 떨었던 것입니다. 절망과 암흑의 순간에 자신이 던져져 있었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다 지나가고 미풍의 고요함 속에서 하느님의 여린 소리를 듣습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조용함 가운데 찾아오는 참 평화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시련과 역경의 두려운 순간을 떨치고 맞이한 평화로운 시간 속에서 위로와 기쁨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뙤약볕이 지나가고 난 다음 저녁나절에 불어오는 산들바람과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하느님 체험이 사도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는 풍랑이 내리치는 갈릴래아  호수 한가운데서 이루어집니다. 맞바람과 풍랑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던 새벽 네 시에 예수께서 사도들의 눈에 유령의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예수께서는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사도들을 위로해 주시지만 그들은 아직 완전히 믿지 못하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래도 사도 베드로는 용기를 내어 예수를 향해 배 위에서 내려 물을 밟고 걸어갔지만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지게 됩니다. 즉 주님의 말씀을 믿었지만 순간적으로 의심을 품음으로써 물 속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의심, 믿지 못하는 마음이 그를 곧 죽음의 경지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곧 그를 붙잡아 일으켜 주시고서는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느냐?”하고 꾸짖으셨던 것입니다.

    이 꾸짖음은 곧 우리 모두를 향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엄청난 기적을 매일 체험하면서도 어려운 순간 순간마다 하느님의 권능을 믿기보다는 인간적인 해결과 답을 찾는 모습은 곧 불신으로 가득 찬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한 도시에서 서커스가 열렸는데 높은 줄 위에서 멋지게 곡예를 부리는 단원이 한 명 있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곡예는 흔들거리는 줄 위로 순수레를 밀며 건너가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온 군중을 사로잡는 최고의 구경거리였습니다. 그 곡예 단원이 군중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생각에 제가 손수레를 끌고 저쪽 편으로 건너갈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군중은 그렇다는 대답의 표시로 큰 박수로 응답하였습니다. 그는 두 번째도 같은 질문을 하였고 군중은 더 큰 박수로 믿는다는 표시를 보냈습니다. 그런 다음 그 곡예 단원은 자기가 손수레를 끌며 줄 위를 걸어서 다시 이쪽으로 돌아오리라고 믿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소리로 “물론이지요.”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곡예 단원이 그 사람을 위로 올라오라고 손짓하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러시다면 올라오셔서 이 손수레 안에 타십시오. 제가 당신을 싣고 줄 위를 건너보겠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올라오지 않고 차라리 관중의 입장으로 남아 있기를 원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주님의 전능을 믿으면서도 정말 용기를 내어 뛰어들지 못하는 우리들 자신의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사도 베드로가 주님께 대한 완전한 신뢰를 지니지 못하고 결국 물에 빠져 예수께로부터 구조를 받지만 물에 들어간 사도 베드로의 그 용기와 믿음만은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를 꾸짖으신 예수의 질책, 곧 “왜 의심을 품었느냐?”라는 말씀은 갖가지 시련과 유혹에 쉽게 떨어져서 주님이 늘 함께 모든 것을 해준시다는 믿음이 없는 우리 모두를 향한 꾸짖음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오늘 제2독서를 통해 동족을 위해서라면 이스라엘 사람들을 대신해서 저주받아도 좋다고 하십니다. 즉 자기 민족을 위해서 아픔을 함께 하는 마음은 하느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마음이요, 동병상련의 마음인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자신의 일상적 생활 안에서 그리고 공동체적 삶 안에서 하느님이 현존하신다는 확신을 갖는 삶을 살 때 이것이야말로 하느님께 바치는 우리의 선물이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라 할 것입니다.

  2. user#0 님의 말:

     

    1. 강대원 즈카르야

    1.1. 연중 19주일(가해)


    1독서 : 1열왕 19,9ㄱ.11-13ㄱ

    2독서 : 로마 9,1-5

    복음 : 마태 14,22-33


    제1독서

     그가 거기에 있는 동굴에 이르러 그곳에서 밤을 지내는데,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 내렸다.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바로 그때에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난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야는 그 소리를 듣고 겉옷 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동굴 어귀로 나와 섰다.


    종합1)

     ‘바위를 산산 조각 내는’ 격렬한 바람, 지진, 불길 이런 모든 표징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인간들에게 힘 있고 무서운 하느님으로서 나타내 보이신다. 그분의 그러한 모습은 두려움을 야기 시킨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엘리야 예언자에게 아주 다정한 친구처럼 나타나고자 한다. 그분은 은밀히 속삭이시며 살랑거리는 바람처럼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위대한 우주적 사건이나 역사적 사건뿐만 아니라 거의 무의미하게 보이는 매일 매일의 작은 일들에도 현존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오늘날 현대인에게 특별히 필요하다. 하느님께서 나의 충실성과 나의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은 바로 그런 작은 일을 통해서이다. 나의 일상적 노동, 가정,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 우정의 행위, 기쁨뿐만 아니라 고통, 병, 괴로움, 걱정, 심지어는 죄(그것이 회개와 영신적 재생의 기회가 될 때)에 있어서까지도 나의 충실성과 사랑을 요구하신다는 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하느님은 매일 매일 우리의 일상적 생활 속에 계시는 하느님이지 어떤 중대한 기회에만 등장하는 하느님이 아니시다. 그렇게 드물게 나타나시는 하느님은 결코 ‘친구’가 되지 못하시고 오히려 우리의 벌이나 요구나 원의 또는 우리의 불만족과는 무관한 ‘방관자’가 되시기가 더 쉽다. 하지만 하느님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들어오시는 일은 오직 우리가 그분 안에 들어가고 마치 엘리야가 그랬듯이 그분을 간절히 청할 때만이 가능하다.


    제2독서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나의 양심도 성령 안에서 증언해 줍니다. 그것은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이 내 마음속에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 영광, 여러 계약, 예배, 여러 약속이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들은 저 조상들의 후손이며, 그리스도께서도 육으로는 바로 그들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는 하느님으로서 영원히 찬미 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종합

     바오로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율법과 수많은 약속을 받음으로 하느님의 자녀성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자녀성은 같은 혈족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정점에 이르고, 역사적으로 그러한 실현을 체험하게 된다고 말한다. 즉 구약을 통하여 이미 선사되었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되고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오로는 유다 백성의 불신앙 때문에 파손된 자녀성을 다시 회복시켜야 한다고 느낀다.2)  결국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 이스라엘이 처하기 된 그 비참한 상황 앞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았다. 즉 예언자들에 의해 선포된 구세주를 기다리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은 그분을 십자가에 매달았으며 그분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비록 종말의 때가 되어서라도 반드시 이스라엘 구원하실 수 있으시다고 확신하고 있다. 과연, 하느님의 사랑의 현시는 온 역사의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3)

    복음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 배는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 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너라.”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하고 소리를 질렀다.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하고 말하였다.


     종합

     예수께서는 바다를 지배하는 권능을 갖고 계신다. 하느님만이 깊은 물 위를 걸으시는데 예수께서도 물 위를 걸으신다. 제자들의 공포는 미지의 운명 속에서 안전의 위협을 받는 모든 사람의 공포와 같다. 그러나 극한 곤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실 때 예수께서는 자연의 세력을 지배하실 뿐만 아니라 악 자체까지도 지배하시는 주권적인 권능을 소유하고 계신 분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안심하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예수의 말씀은 헛되거나 무의미한 말씀이 아니다. 곤궁의 상황에서 어떤 신자가 믿음으로 응답하고 베드로처럼 미지의 상황으로 들어가지만, 너무나 현실적인 악에 압도되어 의심이 일어나 가라앉기 시작하자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부르짖을 때, 예수께서는 즉시 그 곳에서 그를 구원하실 수 있다. 이 단락의 기적은 마태오의 교회에 의해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이해되고 실제적인 적용을 발견하도록 의도된 것이다. 빵과 물고기를 크게 늘리셨고,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물에 빠진 베드로를 구출하신 예수께서는 바로 자기 백성에게 구원을 가져오셨고, 자기 백성이 에워싼 악으로 인해 의심할 때 그들을 구원하실 준비를 하고 계신 교회의 주님이시다.4)

     마태오 복음 저자가 ‘물위를 걸으신 기적’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다양하다.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교회론적인 의미와 그리스도론적인 의미다. 초기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해석으로 ‘역풍을 만나 풍랑에 시달리던 배’의 모습은 이 세상의 악과 투쟁하는 ‘교회의 모습’을 상징한다. 날은 이미 저물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망망대해에서 바람은 세차게 불고 예수님조차 계시지 않는 그 상황에서 제자들은 배를 저어 저 건너편으로 가야만 했다. 희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고, 절망감과 두려움만 엄습해오는 그런 상황들이 바로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가 처해 있던 상황이었다. 바로 이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위험 가운데 있는 제자들과 함께하시고, 그들을 그 위험에서 구해주신다.5)

     그분께서는 한 마디로 ‘나다’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명령으로 물위를 걸은 베드로가 보여준 것은 ‘믿음이 있다면 못할 것이 없다.’(17,20)라는 진리다. 그분께서 지켜보신다면 물위를 활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자신이 약해지고, 위험에 빠져있다고 생각하고 믿음이 약해지면 즉시 물속으로 빠져들 것이다. 하지만 주님께서 오셔서 손을 내미시고 구해주실 것이다.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이 신뢰와 믿음을 갖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부족했던 것이다. 필요한 것은 아무런 조건도 내걸지 않는 투신이다. 주님 앞에 존재하는 교회는 모든 위험의 영역을 벗어나며 역사의 흐름 속에서 침몰되지 않고 보존될 것이다.6)


    강론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늘 함께 계신다. 하지만 하느님의 현존을 잘 체험하지 못하는 신앙인들이 많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하느님을 느끼기 위해,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혹시나 우리가 그런 노력조차 없었다면 하느님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신다.

     먼저 1독서를 바라보자. 엘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었던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뵙게 된다. 큰 지진 속에서도, 거대한 바람에서도 하느님을 찾아 볼 수 없었다. 하느님의 현존을 느낀 때는 조용하고 여린 소리 안에서였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큰 사건들 속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작은 일상 안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지내고 있는 작은 일상들 안에서 언제나 함께하고 계신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작은 일상들 안에서 하느님을 뵐 수 있는 것인가? 복음 말씀을 들여다보면 제자들이 거친 풍랑 속에서 시달리고 있을 때 주님께서 나타나신다. 주님을 본 베드로는 진정 주님이시라면 물 위를 걸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였고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물 위를 걷던 베드로는 거친 파도를 보자 겁을 집어 먹게 되었고 물에 빠지게 되었다. 물에 빠진 베드로는 주님께 구해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죽음의 상황에서 외쳤던 그의 절규를 예수님께서는 외면하지 않으시고 바로 그를 건져주셨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주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 예수님께서는 바로 들어 주신다. 마치 베드로를 물속에서 건져 주셨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일상생활 안에서 주님께 도와 달라고 외쳐 본 적이 있는가? 어려운 상황 속에서는 그렇게 할 수 있겠지만 기쁜 일이 있거나 즐거운 일이 있을 때도 주님께 감사를 드리며 하느님을 찾았던 적이 있는지 생각해 보자. 나 자신도 그렇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럴 때 하느님을 찾기 시작하고 모든 일에 있어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기 시작한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더 이상 무미건조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와 언제나 함께 하시려 하지만 우리가 함께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과 함께, 모든 일상생활 안에서 살아가려고 노력한다면 그 안에서 분명히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나다. 안심 하여라’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어려움 속에서 힘들어하는 우리에게 친히 손을 내밀어 구해주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주님께서 내 뻗으신 손을 마주잡게 될 때 우리는 임마누엘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주님을 체험할 수 있는 때는 특별한 상황 속에서도 가능한 것이지만 우리의 일상 안에서 매일매일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과거를 돌아보면 주님의 사랑이 내 눈에 선하게 보이지만 과거가 아닌 현재의 시간 안에서 나를 바라보면 그 사랑이 잘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매 순간을 주님께 봉헌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고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나는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성전이 되는 것이고 내가 또 다른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우리의 영성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기초가 되는 부분이다.

     우리가 매일 숨 쉬고 살아가지만 공기에 대해서 고마움을 느껴 본 적은 별로 없을 것이다. 또한 우리가 매일 밥을 먹고 살아가지만 우리에게 힘을 주고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음식에 대해 감사함을 느껴본 적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없다면 우리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듯이 주님의 사랑을 매일 받고 있지만 그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에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하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될 것이다.

  3. user#0 님의 말:

     

    연중 제 19 주일



            1. 최기산 신부(가)/2           2. 강길웅 신부(가)/4

            3. 허영업 신부(가)/6           4. 교구주보(가)/7

            5. 최인호 작가(가)/8           6.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가)/10

            7.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가)/11                  8.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가)/12

            9.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가)/13                  


    1.         연중 제19주일   마태 14,22-33 (가) 주님, 살려주십시오

    최기산 신부

      

    호주를 다녀온 적이 있다. 거기서 들은 이야기인데 여러 명의 한국인들이 낚시를 즐기다가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파도를 피하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한국인의 열정적인 낚시열이나 골프열은 어느 대륙에서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아마도 한국에서 낚시를 하던 사람들은 태평양에서 밀려오는 거대한 파도의 위력을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거대한 파도 앞에서는 수만톤 되는 배도 풍전등화격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무리 건강하고 경험 많은 어부라 해도 거대한 파도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그래서 남편을 바다에서 잃고 홀로 사는 여인들이 섬에는 많다고 한다.

    거대한 파도만큼이나 인생의 파도 역시 거세지 않은가!


    갈릴래아 호수 높은 헤르몬 산에서 내려오는 찬 공기와 해발 200m 정도 되는 낮은 지역의 고온지대에서 생겨난 더운 공기가 만나면 갑작스럽게 바람이 분다. 세차게 불어대는 바람 때문에 잔잔하던 갈릴래아 호수는 성이 나서 물결은 요동치기 시작한다. 평화롭게 고기잡이하던 어부들은 놀라서 뱃전을 잡고 어쩔 줄을 몰라했을 것이다.


    약한 위장을 가진 사람들은 심하게 멀미하여 먹은 것을 다 토하게 됐을 것이다. 성서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제자들이 뱃멀미로 고생했다고 전한다. ꡒ선생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돌보시지 않습니까?ꡓ(마르 4, 38)라는 제자들의 부르짖음은 얼마나 고통이 심했었는지를 가늠케 한다. 이때도 갑작스럽게 바람이 불면서 생긴 돌발 사고였다.


    복음의 내용 제자들은 먼저 배로 떠났다. 5000명을 먹이신 기적이 있던 후라서 제자들이 몹시 지쳐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휴식을 주시려고, 먼저 보내신 다음 홀로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올라가셨다. 기도의 중요함을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예수님도 기도가 필요하셨다면 우리야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의 기도는 새벽 4시까지 계속되었다. 참으로 절절한 기도였을 것이다. 우리의 기도는 어떠한가? 기도가 끝나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호수를 가로질러 물위를 걸어가셨다.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기적의 행동이다.


    예수님만이 물위를 걸으실 수 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자 유령이라고 소리쳤다. 당연한 반응이다. 인간이 어찌 물위를 저벅저벅 걸을 수 있겠는가! 예수님께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시자 베드로는 정말인지 아닌지를 시험해 보고 싶어서인지 ꡒ주님이시면 저더러 물위를 걸어오라고 하십시오ꡓ라고 청한다.


     예수님은 ꡒ오너라ꡓ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물위를 걸었다. 자신도 놀라고 다른 동료들도 놀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예수님께 대한 믿음도 잠시뿐이었다. 세찬 바람이 불자 파도는 요동쳤을 것이다. 세찬 파도 앞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던 시선은 옮겨졌다. 파도 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예수님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파도에 휩쓸려 버렸다.


    복음의 메시지 우리는 태평성대 때에 예수님을 잘 믿을 수 있다. 한 가정의 태평성대란 평범한 것이다. 경제적으로도 그만하고 부부사이도 원만하고, 자녀들 문제도 별로 없고, 성당도 잘 다니며 사람들과 웃으며 잘 지내는 정도다. 이럴 때는 가정에서도 기도를 그런 대로 잘 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그 집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집이라고 말을 하며 자신들도 어느 정도는 긍정한다.


    그러나 믿음은 폭풍우 속에서 진위가 밝혀진다. 가정에 모진 풍파가 몰아쳐오면 상황은 달라진다. 경제가 파탄되고, 가족 중에 어느 하나가 심한 병고에 휩싸이게 되면 예수님만을 바라보면서 걸어가던 길에 제동이 걸릴 수 있다. 그의 인생 길에 세파가 덮쳤을 때에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바람과 파도만 보이며 두려움만 가득하게 된다.


     생 전체가 어둠으로 가득하게 되는 것이다. 세파에서 허우적거리게 되는 상황에서 어떤 이들은 주님을 향해 ꡒ주님, 살려주십시오ꡓ라고 소리치기보다는 주님을 원망하게 되고, 한 걸음 더 나간 사람들은 점쟁이에게 찾아가고, 어떤 이들은 잡신을 찾아 나서기도 한다. 혹은 절망 속에서 술로 세월을 보내기도 한다.


    고난 속에서 주님을 찾는다는 것은 참 믿음 없이는 쉽지 않다. 욥의 끈질긴 믿음의 용기나 순교자들의 영웅적 믿음을 갖기란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ꡒ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ꡓ 베드로에게만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우리는 거센 세파를 뚫고 주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세파 속에서도 주님을 계속 바라볼 수만 있다면, 계속 손을 내밀며 도움을 청할 수만 있다면 우린 구원받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희망이다. 베드로는 ꡒ주님, 살려 주십시오ꡓ라고 소리쳤다. 우리도 이 한마디를 계속해서 예수님께 할 수 있다면 그 분은 손을 내미신다. 어차피 인생은 세파에서 허덕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여기는 천국이 아니다. 여기는 불완전한 곳이다. 많은 세파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절망해서는 안 된다.


    주님은 우리편이시다. 주님은 우리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함께 계시면서 나만 바라보라고 말씀하신다. 그 분만 바라볼 수 있고 그 분 곁에만 있다면 안심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철모르고 기어다니며 여기저기 부딪치고는 고통스러워하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도 어린이 같은 신세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꾸 우리더러 ꡒ내 곁을 떠나지 말라, 나를 바라보라ꡓ 말씀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자꾸 간섭을 피하여 달아나고 있다. 주님을 멀리 피하면 피할수록 고난은 더 깊어지고 어둠은 더 심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ꡒ주님, 살려주십시오.”






    2.     연중 제19주일   마태 14,22-33 (가) 시련은 하느님의 발자국 소리   

    강길웅 신부


    제1독서 Ⅰ열왕 19,9a.11~13a (주님 앞에 있는 산 위에 서 있거라) 

    제2독서 로마 9,1~5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도 한이 없겠습니다) 

    복 음 마태 14,22~33 (저더러 물위로 걸어오라고 하십시오) 


    사람은 자신의 생애를 통해서 올라가는 때와 내려가는 때를 만나게 됩니다. 순풍에 돛단 듯이 일이 순조롭게 풀려서 평탄할 때가 있는가 하면 역풍을 만나서 사나운 풍랑과 힘겹게 싸우는 고달픈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생의 여정에서 중요한 것은 올라갈 때보다도 오히려 내려갈 때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성공할 때보다도 실패할 때가 실은 하느님을 더 깊이 체험할 수 있는 은혜로운 시기입니다.


    오늘 1독서에 나오는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의 숭배자들과 싸워서 그들의 예언자 450명을 모조리 쳐죽였습니다. 아주 통쾌하고도 멋진 승리의 장면이었으며 이때 엘리야의 놀라운 기세는 아무도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알의 광신자였던 왕후 이세벨이 엘리야에게 복수를 다짐하자 그는 이제 거꾸로 무서움에 떨며 죽어라고 도망치는 신세가 됩니다. 하늘을 찌를 듯한 그 믿음의 기운이 한 순간에 꺾여서 이제는 모두 끝장이 났다고 하느님께 죽여 달라는 온전치 못한 애원도 했습니다.


    어제의 당당한 승리자가 오늘은 완전한 패배자가 되어 자기 몸 하나 숨길 수가 없었고 놀라운 신앙을 증거하였던 그도 하느님은 자기를 버렸다고 판단했습니다. 일종의 신앙의 위기를 만난 것이며 이제 더 이상의 탈출구가 없었습니다. 막다른 코너에 몰렸으니 희망이 절벽이었습니다. 바로 이때 엘리야가 하느님을 새롭게 만납니다. 하느님은 그를 버린 것이 아니었으며 새로운 차원에서 그를 만나기를 원하셨습니다. 마치 어제의 승리로 오만해질 수도 있는 엘리야를 역시 하느님이 아니시고는 스스로는 벌레만도 못한 인생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하시면서 ‘조용하고 여린 소리’에서 당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옵니다. 5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빵의 기적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제자들을 배에 먼저 태워 보내십니다. 풍랑이 그들을 괴롭힐 줄을 뻔히 아시면서도 당신은 한적한 곳에 가시어 기도를 하시는데 새벽 4시까지 기다리십니다. 마치 당신이 없는 세상을 어디 좀 살아 보거라 하는 식으로 버려두셨다가 나중에 물 위를 걸어서 가시는데 제자들은 이때 가까이 오시는 주님을 유령으로 착각하여 더 큰 두려움에 떱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주님은 “나다, 안심하여라.”하시며 배에 오르시자 바람은 그치고 풍랑은 잔잔해졌습니다.


    인생이라는 배를 저어 가는 호수에는 언제나 사나운 바람과 성난 물결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마치 갈릴리 호수의 변덕 많은 바람처럼 갑자기 불어왔다가는 갑자기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련의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나다, 안심하여라.”하시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마치 유령처럼 두렵게 다가오시는 그분의 손길을 바라보며 겁내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진정 우리가 내려갔을 때 그 밑바닥에서 만날 수가 있습니다.


    오래 전의 얘기입니다. 어떤 형제가 몇천만 원을 가지고 사업을 하다가 폭삭 망해서 다 날리고는 수중에 꼭 7만원이 남더랍니다. 집까지 다 팔아서 빚을 갚았으니 오갈 데도 없었고 남은 것은 처자식과 오직 그 돈뿐이었습니다. 너무도 허망하고 답답했던 그는 문득 성당을 찾아가 신부님의 조언을 청했더니 신부님은 의외로 껄껄 웃으시며 “그 7만원은 뭐하러 가지고 있노. 내 3만원을 더 줄 테니까 10만원을 채워서 하느님께 봉헌하고 진짜 빈주먹으로 다시 시작해 보거라.” 하시더랍니다.


    형제가 처음엔 그 말씀을 듣고 참으로 기막힌 생각이 들더랍니다. 없는 사람 도와줄 생각은 않고 겨우 몇푼 남은 ‘벼룩의 간’마저도 뺏으려 하는구나 하는 착각도 들었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어차피 망한 것, 7만원이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이라는 판단이 들더랍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에 자기가 거꾸로 살았던 사실을 깨닫고는 신부님 말씀대로 무일푼으로 다시 시작했는데 지금은 크게 성공했습니다. 하느님은 참으로 짓궂은 분 같아서 인간이 시련을 통해 ‘여린 소리’처럼 순수해질 때 바로 그때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오늘 물 속에 빠졌던 베드로의 주책(?)도 가히 일품입니다. 소위 첫째가는 제자라는 그가 그 모양이니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 하겠습니까마는 물 속에 빠지는 인간의 그 허망한 현실에서 주님께 온전히 매달렸기 때문에 베드로는 자기를 잡아 일으키시는 그분의 손길을 체험하게 됩니다. 역설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내려가는 때가 바로 그분을 만나는 때요 새롭게 크게 일어서는 때입니다. 엘리야도 그랬고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마음에 풍랑이 심하고 분노의 불길이 크게 솟구칠 때는 하느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또는 마음이 지진처럼 갈라지고 어둠에 휩싸일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의 허망함밖에는 아무 것도 만날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를 인내로이 참고 견디면 하느님의 ‘여린 소리’를 진실로 체험하게 됩니다. 실패해서 고생할 때나 시련으로 몸부림칠 때는 하느님이 우릴 찾아오시는 발자국 소리입니다.






    3.    연중 제19주일   마태 14,22-33 (가) 고통의 바다에서 건져주시는 주님

                                                                        허영업 신부


      아버지와 약속을 잘 지키지 않은 어린 아들에게 아버지가 말했다.“한번만 더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너를 추운 다락방으로 보내겠다.” 그러나 아들은 또 다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아버지는 약속대로 추운 다락방에서 자게 했다. 아들을 다락방으로 보내고 잠자리에 든 부부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우리가 괴롭더라도 참읍시다. 아이를 데려오면, 오히려 그 아이를 망치는 것입니다.」 한참을 괴로워하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당신말이 옳아요. 그러나 지금 혼자 추운 방에 떨고 있는 아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오, 내가 그 아이에게 가야겠오?」


      아버지가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아들은 추운 다락방에서 베개도 없이 구부린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 옆에 누워 꼭 안아주었다. 아버지 품에 안긴 아들은 한참 후에 가만히 아버지의 볼을 비벼댔다. 아들의 눈물이 양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들은, 잠깐 동안이지만 춥고 어두운 다락방에서 부모님 곁을 떠났다는 것, 자신의 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 것인지를 알았다. 그리고 추운 방에서 자신과 함께 누운 아버지가 그렇게 고맙고 믿음직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춥고 어두워도 아버지가 그와 함께 한다는 것이 큰 위로와 힘이 되었다.


        물위를 걷다 빠져버린 베드로


      오늘 복음은 두 가지의 장면을 묵상할 수 있다. 우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물위를 걷다가 의심이 생겨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베드로의 모습이다. 다른 하나는 물에 빠져 허덕이는 베드로의 손을 잡아주시는 예수님의 자비로운 행동이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믿음이 무엇인가」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물위를 걷는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예수님이 기도하러 산에 오르신 동안 제자들이 탄 배는 역풍에 시달려 위험에 처해진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배는 자주 교회를 상징한다. 어떻게 보면 곤경과 수난에 처한 교회를 가르치고 있다.


      교회가 위험과 고통을 당할 때, 가장 큰 위로와 힘은 무엇일까? 믿음이다. 믿음이란 하느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다. 풍랑에 허덕이는 제자들의 배에 예수님은 다가오셨다. 그리고 겁에질린 제자들에게 “나다. 안심하여라” 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베드로는「주님이십니까? 그러면 저더러 물위를 걸어오라고 하십시오」라고 간청한다. 예수님께서「오너라」하시자 베드로는 물위를 걷는다. 그러나 거센 바람이 불자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지게 된다.


      베드로에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러기에 물위를 걸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물에 빠진 베드로는 다시 예수님께 구조 요청을 한다.「주님, 살려주십시오」그가 위기 상황에서 예수님을 찾고 살려달라고 요청하는 것도 믿음의 행위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손을 잡아주셨다.「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 믿음이 약하냐?」예수님의 이 말씀은 질책이라기보다 격려의 말씀으로 들린다.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자 비로소 풍랑은 그친다.

      예수님께서는 교회가 위험하고 어려운 상황에 빠져도 결국 지켜주신다는 것이 신앙인에게는 큰 위로가 된다.


       흔들리는 신앙, 손 잡아주시는 주님


    물위를 걷다가 물에 빠져 허덕이는 모습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어쩌면 우리는 물위를 걷는 것은 시도조차 못할지도 모른다. 쉽게 유혹에 빠지고, 늘 흔들리고, 좌절하고, 쓰러지는 것이 우리의 약한 모습이다. 사실 주님이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 우리의 주위에는 믿음을 해치는 요소가 너무 많다. 또한 내 자신 안에도 늘 부족함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주님, 도와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하고 주님께 손을 내미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오히려 우리는 물에 빠졌을 때, 비로소 주님께 손을 내밀게 된다. 역경과 고통 중에 주님을 더 간절히 원하고, 그분의 도움을 절실하게 찾는다. 어려움이나 고통이 와도 좌절할 필요가 없다. 나 혼자 힘으로 해결하려고 발버둥쳐서도 안 된다. 손을 내밀기만 하면 잡아주시는 주님이 늘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주님, 믿음이 약해 세속과 유혹의 바다에서 허덕이는 저희를 버리지 말고 건져주소서」






    4.       연중 제19주일   마태 14,22-33 (가) 죽음의 힘도 다스리시는 주님

    교구주보


    오늘 마태오 복음(14,22-33)에는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이 표현되어 있다. 그 기적의 배경과 의미, 믿음의 삶에 대해 살펴보자.

    1. 복음의 배경

    구약성서와 초창기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부활신앙이 배경이다.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힘의 표상인 바다, 재앙을 제어하는 유일한 주님이신 야훼께 대한 신앙고백, 인간을 보호하고 구원하시는 하느님 현존의 표징인 지나가심, 이 세 가지 내용이 오늘 복음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이다. 마르코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그들 쪽으로 오시다가 그들 곁을 지나쳐 가시려고 했다”(마르 6,48)는 표현이 나온다. 구약성서에는 하느님께서 나타나심이 ‘지나가시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호렙산에서 예언자 엘리야가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도 같은 방식으로 표현했다. 하느님께서 엘리야에게 “앞으로 나가서 야훼 앞에 있는 산 위에 서있거라”하고 말씀하신 다음 지나가셨다는 것이다(1열왕 19,1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고 말씀하신다. ‘나다’라는 말씀과 ‘두려워하지 말라’고 고무하는 말씀도 구약성서에서 그 배경을 찾을 수 있다. 야훼께서는 모세에게 당신 자신을 “나는 곧 나다”라고 계시하셨고(출애 3,14), 또한 이스라엘 백성은 유배의 고난기에 다음과 같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나, 내가 곧 야훼다. 나 아닌 다른 구세주는 없다”(이사 43,11).

    2.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의 의미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이야기는 야훼의 나타나심에 대한 구약성서의 내용에 기초하여 엮어진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야훼나 그분의 계약 백성인 이스라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과 제자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신앙고백을 하던 사람들이 언제부터 그 고백을 예수께 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난 뒤부터였다.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에도 하느님과 함께 살아계시다는 것이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제자들에게는, 예수께서 사람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모든 세력을 제어하고 죽음의 힘도 다스리는 주님이심이 분명해진 것이다. 따라서 부활하신 주님을 굳게 믿는 사람들만이 오늘 복음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3. 주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믿음을 통해서 주님의 능력 안에 머무를 수 있었고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분과 함께 실행할 수 있었다. 베드로가 시선을 예수님께 고정시키고 있는 동안은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으나 의심을 품자 그만 물 속에 가라앉고 만다. 이로써 시련의 때일수록 주님을 똑바로 응시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베드로를 통해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분은 주님밖에 없음을 배우게 되었다. 불안과 걱정 속에서 항상 동요하는 우리들이 신뢰하고 귀의할 분은 부활하신 주님이시다. 이러한 믿음을 간직하며 사는 한 우리는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실감하면서도 용감할 수 있으며 어떤 난관에서도 좌절하지 않을 수 있다. 주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은 다른 모든 상대적인 두려움과 걱정을 몰아낸다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 되어야 할 것이다.






    5.           연중 제19주일   마태 14,22-33 (가) 사랑의 힘

    최인호 베드로/작가


    이탈리아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1181-1226)는 가톨릭사상 가장 위대한 성인입니다. 단순하고 천진한 신앙, 자연에 대한 사랑과 겸손 등으로 ‘또 하나의 그리스도’라고 불렸습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흔을 손에 받았던 이 성인이 노래하라고 하면 새들도 노래했다고 합니다. 클라라(1194-1254)는 프란치스코의 설교에 감동하여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수녀가 되었던 성인입니다. 두 사람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옵니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수도원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의 영적인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여 말들이 많았습니다. 결국 프란치스코는 클라라를 멀리 보내기로 했습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부는데 클라라를 배웅 나간 프란치스코는 말없이 눈에 덮여가는 길만 바라보았습니다. 클라라는 작별인사를 하고 눈길을 가다 갑자기 돌아서서 프란치스코에게 물었습니다.

    “언제 우리가 또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이제는 다시 만나기 힘들다는 것을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저 산의 눈이 녹고 꽃이 필 때쯤이면 다시 만날 수 있겠지요”라고 프란치스코가 대답하자마자 갑자기 눈이 녹고 산마다 꽃이 피었습니다.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다가 풍랑에 시달리는 제자들에게 물 위로 걸어서 오신 예수님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 번도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많은 환자를 고쳐주고 귀신을 몰아내고 심지어는 죽은 사람까지 살리셨지만 자신이 직접 기적의 주체가 된 적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밤중에 역풍을 만나 파도가 치는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매우 이례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물 위를 걸어오셨을까요. 제자들에게 초능력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풍랑에 시달리는 제자들을 안심시키려 하신 것뿐입니다. 새벽 4시였으므로 배도 없었고 제자들에게 건너갈 다른 방도가 없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탄 배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물 위를 걷는 기적뿐이었습니다.


    클라라를 사랑하는 프란치스코의 마음이 한순간에 눈을 녹게 하고 꽃을 피우는 기적을 일으킨 것처럼 제자를 사랑하는 예수님의 마음이 물 위를 걷는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은 바로 사랑의 힘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자신을 뽐내기 위해서 물 위를 걷는 기적을 흉내내다 물에 빠진 것입니다.

    믿음은 사랑입니다. 사랑하십시오. 제자를 사랑하여 물 위를 달려오신 예수님처럼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십시오. 그리하면 눈덮인 산봉우리에서 갑자기 눈이 녹고 단숨에 꽃들은 피어나 그대와 나는 헤어지는 일 없이 주님의 사랑 안에서 영원히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6.          연중 제19주일   마태 14,22-33 (가)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


    하느님께서는 위대한 우주적 사건이나 역사적 사건뿐 아니라 거의 무의미하게 보이는 매일매일의 작은 일에도 현존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오늘날 현대인에게 특별히 필요하다. 하느님께서 나의 충실성과 나의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은 바로 그런 작은 일을 통해서이다. 나의 일상적 노동, 가정,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 우정의 행위, 기쁨뿐 아니라 고통, 병, 괴로움, 걱정, 심지어는 죄에 있어서까지도 나의 충실성과 사랑을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하느님은 매일매일 우리의 일상적 생활 속에 계시는 하느님이지 어떤 중대한 기회에만 등장하는 하느님이 아니시다. 그렇게 드물게 나타나시는 하느님은 결코 친구가 되지 못하시고 오히려 우리의 벌이나 요구나 원의 또는 우리의 불만족과는 무관한 방관자가 되시기가 더 쉽다.


    하지만 하느님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들어오시는 일은 오직 우리가 그분 안에 들어가고 마치 엘리야가 그랬듯이 그분을 간절히 청할 때만 가능하다.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그분과의 사랑과 우정의 교차가 이루어질 것이다.


    오늘 복음도 그리스도께서 놀랍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인간들의 모든 필요를 돌보아주시는 가까운 친구인 하느님은 우주적 사건들과 크나큰 역사적 사실들의 지배자로서의 권세있는 하느님의 모습도 배제하지 않는다. 사도들이 역풍을 만나 배에서 고생하고 있을 때 물 위를 걸으시는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의 이야기는 이러한 사실을 주제로 하고 있다.


    첫번째 빵을 많게 한 기적 후 즉시 예수는 또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먼저 가라고 명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군중을 보내신 뒤에 조용히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올라가셔서 날이 저물었는데도 거기에 혼자 계셨다. 그동안 배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역풍을 만나 풍랑에 시달리고 있었다.


    새벽 네 시쯤 되어 예수께서는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다.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본 제자들은 겁에 질려 엉겁결에 유령이다 하며 소리를 질렀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께 주심이십니까 그러시다면 저더러 물위로 걸어오라고 하십시오 하고 소리쳤다.


    예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밟고 그에게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거센 바람을 보자 그만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는 주님 살려주십시오 하고 비명을 질렀다. 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함께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다.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주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하고 말하였다.


    여기서는 교회론적 강조점이 맹백히 드러나고 있는데 그리스도께서 혼자 기도하러 가셨다가 사도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개입하시는 모범적 행위는 모든 그리스도 신자 그리고 특히 교회의 태도가 어떠해야 되는가를 말해줌과 함께 “용기있는 믿음과 의탁하는 태도를 가지라”는 이 메시지는 오늘날의 교회에도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메시지이다.


    오늘날 교회는 이미 어렴풋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종교적 윤리적 인간적 질서상의 갖가지 문제들을 정면으로 맞고 있다. 사회는 비탄에 차서 교회에 문제 해결을 요청하고 있다. 교회는 문제 자체의 거대함과 지체할 수 없는 다급함 때문에 마치 그 제자들처럼 폭풍우에 휘말려 쓸려 가버릴 듯한 느낌에 사로잡힐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 그리스도께서는 큰 소리로 말씀하신다.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






    7.        연중 제19주일   마태 14,22-33 (가)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


    오늘 복음은 교회론과 관계되는 말씀입니다. 풍랑은 현실의 시련이며, 배는 교회를 뜻하고 베드로는 길잡이입니다. 교회는 현실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합니다. 이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는 함께 계시고 보호사시며 기도를 바치고 계십니다.


    우리는 때론 많은 경우에 의심과 회의를 품게 됩니다. 물위를 걷다가 물에 빠지는 베드로는 바로 우리들 자신의 모습입니다. “주님 살려주십시오” 믿음 약한 우리의 필연적 기도는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는 참으로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 우리 삶의 전체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간청과 기도 속에서 실제로 우리의 소원이 실현되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 단계 진전한 우리의 기도는 감사한 마음을 지닌 신앙고백이어야 합니다. “주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사람의 아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예수의 발자취를 따르며 우리는 매일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위를 걸으신 예수의 기적은 바로 그의 신적 능력과 초월성, 그리고 하느님의 현현을 드러내는 표지인 것입니다. 불은 구원의 표징이기도 하지만 또한 무서움의 상징으로 죽음을 뜻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홍수의 범람 속에서 우리는 엄청난 두려움을 느낍니다. 예수께서 물위로 걸으셨다는 것은 온갖 죽음, 무서움, 공포를 제거시키시고 이기셨다는 그 초월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람과 바다, 자연을 순응케 하시는 예수의 능력은 바로 하느님을 보여주는 구체적 표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바로 그 예수를 우리의 주님으로, 우리의 구원자로 모시고 있습니다. 모진 풍랑과 시련 속에서 우리를 구해주십사 간청하며 함께 기도합시다.


    예수님 우리로 하여금 자연과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체험케 하소서. 동족애, 형제애를 통하여 당신의 성실한 제자 되게 하소서, 모든 여러움을 극복케 하소서. 아멘.






    8.          연중 제19주일   마태 14,22-33 (가)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


    우리는 오늘 복음 말씀에서 믿음이 약해 물에 빠진 베드로 사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만 있다면 산더러 저기 옮겨져라 해도 그대로 되고, 바다더러 땅이 되라고 해도 그대로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믿음의 중요성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우리는 믿음보다도 불신이 앞을 맏아 자칫 믿음이 흐트러지고 사도 베드로처럼 되는 수가 허다합니다.


    어떤 마음에 소위 전문가라 하는 등산가가 있었다고 합니다. 친구 몇명과 함께 쌀쌀한 날씨에 등산을 갔었다고 합니다. 날이 저물자 다른 친구들은 모두 산에서 내려왔지만 산을 잘 타는 이 친구는 이런 저런 이유로 어두워진 다음에 혼자서 산을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깜깜한 가운데 밧줄을 타고 절벽을 내려오던 이 친구가 그만 발을 헛딛어 공중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밤이 어두워 밑고 보이지 않고 구조를 청할 사람도 보이지 않기에 이 친구는 그만 눈앞이 깜깜해지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소리쳐도 누구 하나 오는 사람 없는 가운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러 이 친구는 하느님께 간절한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나 절망적인 순간에서는 진정한 기도가 나오게 마련이지요. 얼마나 지났을까 이 친구는 문득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바로 기도가 하늘에 닿아 하느님께선 내리시는 말씀이었지요.

    형제야 너는 나를 믿느냐?”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이 친구는 있는 힘을 다하여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주여 물론이지요, 저는 당신만을 믿습니다.” 이 대답에 또다시 같은 질문이 하늘에서 들려 왔고 이 친구는 역시 큰 소리로 같은 대답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세 번 물음과 답이 있은 다음에 하늘에서는 이런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형제여 네가 나를 그토록 믿으니 이제 네가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겠다. 그 줄에서 손을 놓아라” 이 소리를 들은 그 친구는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밑이 얼마인지 보이지 않는데 나의 생명과도 같은 이 줄을 놓으라니 어찌된 일인가 하고 고민하기 시작했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는 하였지만 마지막 말에서 의심을 가지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이 친구는 줄을 꼭 붙들고 매달려 있다가 그만 추위에 얼어죽고 말았답니다.


    다음날 궁금하여 산에와 본 친구들은 불과 일미터도 되지 않는 높이의 절벽에 대롱대롱 매달려 죽은 친구를 보고는 도무지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가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친구는 그 절벽을 거의 내려와서 발을 헛딛었으며 주님의 말을 믿고 졸을 놓았으면 살 수 있었건만 줄을 놓치면 죽는다는 관념에 그만 졸을 놓지 못하고 절벽에 매달려 얼어 죽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믿는다는 것과 그것을 행한다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이 이야기도 바로 이 점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나 순종의 표양이신 성모님을 통하여 우리는 믿음의 자세를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이 크게 작게 내게 닥칠 양이면 우리는 의혹을 갖거나 시련 등으로 저버리는 수가 많습니다.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서 주님은 여러 차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불찰로 그분께 의혹을 갖고 그분을 배반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우리는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고 탓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그리고 주님이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다시금 고백하고 그분께 의심을 버리고 따르도록 합시다. 바로 믿는 자에게 복이 있는 것입니다. 아멘.






    9.        연중 제19주일   마태 14,22-33 (가)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


    오늘 복음도 그리스도께서 놀랍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권능과 자비의 두 관점이 한데 어우러져 있습니다.

    인간들의 모든 필요를 돌보아주시는 가까운 친구인 하느님은 우주적 사건들과 크나큰 역사적 사실들의 지배자로서의 권세있는 하느님의 모습도 배제하지 않으십니다. 사도들이 ‘역풍’을 만나 배에서 고생하고 있을 때 물 위를 걸으시는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의 이야기는 이러한 사실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마태오는 거기에다 자기 자신의 고유 사료 즉 스승을 따라 자기도 물 위를 걷게 해달라고 하는 베드로의 요청을 덧붙입니다.


    첫 번째 빵을 많게 한 기적 후 즉시 예수는 또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먼저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군중을 보내신 뒤에 조용히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올라가셔서 날이 저물었는데도 거기에 혼자 계셨다. 그동안 배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역풍을 만나 풍랑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새벽 네 시쯤 되어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다.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본 제자들은 겁에 질려 엉겁결에 ‘유령이다’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여기까지는 마태오의 이야기와 마르코의 이야기가 일치한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은 마태오에 있어서는 배가 “풍랑에 흔들리고 있었고” 마르코에 있어서는 제자들이 “배를 젓느라고” 애를 쓰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 유별난 점이 바로 그 사건의 “교회론적” 차원을 부각시켜주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관심은 두 가지 극단적 대립의 현실을 드러내는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해 보는 것입니다. 한편에서 예수께서는 밤새 기도하시러 혼자 산에 오르시고 다른 한편에서는 폭풍우에 압도된 제자들이 살려고 애써 노를 젓고 있다. 그 폭풍후는 오직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야 멈추게 됩니다. 인간들의 행위는 만일 하느님의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언제나 흔들리고 불안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현존은 특히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 혼자 기도하러 가셨다가 사도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개입하시는 모범적 행위는 모든 그리스도 신자 드리고 특히 교회의 태도가 어떠해야 되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미 말했듯이 마태오는 자기도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해달라고 베드로의 엉뚱한 요구를 이 이야기에 덕붙이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주님이십니까’ 그러시다면 저더러 물 위를 걸어 오라고 하십시오‘ 하고 소리쳤습니다. 예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밟고 그에게로 걸어갔습니다. 그러다가 거센 바람을 보자 그만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그는 ’주님, 살려주십시오!‘ 하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함께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습니다.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주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 특별한 내용으로써 마태오가 전체 이야기에 부여하고자 했던 ‘교회론적’ 강조점이 명백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더우기, 마태오 복음사가가 무엇보다도 이 대목에서 자기의 교회론적 관심을 뚜렷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베드로는 스승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그 누구보다도 열정에 차서 그분을 닮아 보고자 자신도 그렇게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주님이십니까? 그러시다면 저더러 물 위로 덜어오라고 하십시오” 하지만 그의 신앙은 처음에 열정에 찼던 만큼 강하지는 못했습니다.


    이미 ‘그러시다면’ 이라는 조건이 깊은 믿음의 감정보다는 넓은 의미에서의 가정을 더 생각케 합니다. 어쨌든 사실상 믿음이 있었다 하더라고 그 믿음은 거센 바람이 불자 곧 사라져버렸습니다. 신뢰감과 두려움이 혼합되어 있는 미묘한 상태가 그가 물에 빠져들기 시작했을 때까지 그를 사로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진정으로 그를 대해주셨습니다. 만약 베드로가 보다 철저한 믿음을 가졌더라면 기적은 분명히 일어났을 것입니다.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베드로는 불과 수초 사이에 최고의 신앙심과 극도의 의심으로 인한 두려움을 체험하였습니다. 그 두 가지 사실은 심리학적으로도 이해 될 수는 있겠지만 분명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의 모습을 이루어주지는 못한 것입니다.



  4. user#0 님의 말: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1. 말씀읽기:마태14,22-36

    물 위를 걸으시다 (마르 6,45-52 ; 요한 6,16-21)


    2. 말씀연구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 우리의 생각을 뛰어 넘으십니다. 배고픈 군중을 빵을 많게 하여 배불리 먹이시고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돌려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산으로 기도하러 올라가셨습니다. 제자들을 먼저 보내시고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신 다음에 내려가셨습니다. 밤새워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 또한 그렇게 고요 속에서 하느님과 일치를 이뤄야겠다는 다짐을 해야겠습니다.


    22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여 건너편으로 보내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군중들은 예수님께서 빵을 많게 하시니 무척 놀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분이야말로  필경 오시기로 약속된 메시아라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왕으로 모시려고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알아차리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군중들의 생각에 동요되지 않기 위해 먼저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태워 건너편으로 보내셨을 것입니다. 즉 군중들과 떼어 놓기 위해 출발을 재촉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잘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군중들은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을 찾고, 바로 앞의 것만을 생각합니다. 이들도 부활을 체험하게 되면 예수님께서 어떤 메시아이신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23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

     기도란 무엇인가? 언제 해야 하는가?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 안에서 기도가 무엇인지, 언제 해야 하는 것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쁜 일상생활 속에서도 일을 마치신 다음에는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늘 아버지와 함께 하셨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과 군중을 먹이신 일을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기도는 내 뜻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것이며,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이룬 다음에 그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예수님처럼 일을 하기 전에, 일을 마친 다음에 기도를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을 예수님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24 배는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 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

    군중들을 돌려보내고 제자들은 어떻게 했는지 자세히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 몇 시에 어떻게 출발했는지는 나와 있지 않지만 역풍을 만나서 고생하고 있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배가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다고 했는데 멀리가지 못한 것 같습니다. 1스타디온은 185미터이니 제자들은 역풍을 만나서 고생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이야기 하면서 배에 올랐지만 좀 있다가 역풍을 만났을 때는 모든 것을 잊어 먹고 살아야겠다는 생각 밖에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 예수님께서 이것을 염두에 두신 것이 아닐까요? 분명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상황을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산 위에서 기도하셨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상황을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서 곧장 달려가지 않으십니다. 아마도 빵의 기적으로 인해 들떴던 그 마음들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그러시지 않았을까요? 또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는지도 모릅니다. 물위를 걸으시고, 바다마저 복종할 수밖에 없는 분이라는 것을…,


    25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그런데 새벽 네 시 쯤에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새벽 네 시에 호수를 건널 배가 있을 리가 없고, 또 역풍이 부니 배를 운행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그리고 주머니엔 돈도 없었을 것이니 걸어가야겠지요).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사공! 건너갑시다!”

    “예수님! 심야할증에 역풍까지 부니 따따불입니다요!”

    “나 돈 없는디!”

    “저도 흙 퍼서 장사하는 것은 아닌디유! 무지 어려운 것 아시쥬?”

    “어쩔 수 없군….그냥 걸어 가야쥐…”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하십니다.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성당에서 계획을 잡으면 비가 오다가도 그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장소가 여의치 않으면 다른 장소가 생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저 우리는 계획을 세우고 밀고 나가면 됩니다.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알아서 해 주십니다. 또 폭우가 내리던 새벽, 새벽미사에 변함없이 참례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우비를 입고 오토바이를 타고 오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우산을 받쳐 들고 걸어오시는 분들…, 예수님께 물이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 것처럼, 신앙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떤 것도 예수님께로 향하는 내 발걸음을 막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마귀의 유혹입니다.


    26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

     놀랄 만도 합니다. 호수 한 가운데서 사람을 만났으니. 그것도 배를 타고 온 사람이 아니라 물 위를 걸어오는 사람을 만났으니. 그렇게 놀란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안심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어두운 밤길에 두려움에 떨면서 걸어갈 때, 저 앞에서 사람이 나타나면 무척 당황할 것입니다.


    27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런데 그 앞에 나타난 사람이 귀신이 아니라, 그리고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요한아! 나다!”라고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였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제자들은 그렇게 기뻤을 것입니다.

    바다 한 가운데서 역풍을 만나 고생하고 있을 때, 물 위를 걸어오신 주님께서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라고 말씀하실 때의 그 기쁨은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28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베드로는 기쁨을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주님이십니까? 그러시다면 저더러 물 위로 걸어 오라고 하십시오.” 비록 물이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를 가로 막았지만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로 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또한 물 위를 걸어오신 전능을 보여주신 예수님께서는 자신 또한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이 표현된 것이기도 합니다.


    29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의 청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걸어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믿고서 물 위로 걸어갑니다.

    예수님께 가는데 장애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분이 부르시면 나는 달려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 무엇이 앞을 가로막는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님께로 가기만 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예수님께서 알아서 해 주실 것입니다.


    30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그도 인간인지라 갑자기 두려움에 빠져 버리게 됩니다. 믿음이 사라지자 그는 물 속으로 빠져 들고 맙니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물 위를 걷는 기적 바라보기>

    베드로가 물에 빠진 것을 보면서 “어떻게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을까?”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갖추신 분이시지만 우리 인간과 똑같이 살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실 때, 당신 몸을 아주 가볍게 하셔서 물 위를 걸으셨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자칫하면 십자가위에서도 아프신 척 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시기 위해 물 위를 걸으십니다. 당신의 모든 행동은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예수님의 발걸음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에 발을 내 딛을 때 아마도 물들이 알아서 예수님을 받쳐 주었을 것입니다. 물들끼리 서도 당기는 표면장력이 강해져서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셔도 빠지지 않았겠지요. 베드로 사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물위를 걸어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즉 믿음을 가지고 나에게로 오라고 말씀을 하셨지요. 믿음을 가지고 걸어갔을 때는 물이 베드로 사도의 발을 받쳐 주었지만 믿음이 사라지자 물이 베드로 사도를 받쳐 주지 않습니다. 믿음이 물을 바꿔 놓은 것이지, 베드로 사도 자신을 바꿔 놓은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31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한 순간도 의심 없이 오롯이 주님께 믿음을 둔 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평상시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게 물 위를 걷는 중에 별의 별 생각 다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있어야 한 다는 것을 알았으니 내 안에 조금이라도 불신이 남아있지 않도록 몰아내고 믿음으로 채워야 하겠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으로 저 산도 옮기리, 믿음으로…,”


    32 그러고 나서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베드로 사도는 다시 예수님과 함께 물 위를 걸어서 배에 오르게 됩니다. 이때 지금까지 제자들을 괴롭혔던 바람이 그치게 됩니다.


    33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누가 있어 바다 한 가운데서 오롯한 믿음으로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의심을 안 품으려고 해도 자연스럽게 의심이 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인성뿐만 아니라 신성까지도 가지고 계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기쁨과 두려움은 얼마나 컸을까요? 이렇듯 크신 하느님의 아드님과 함께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34 그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렀다.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후,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돌려 보내시고, 제자들은 먼저 겐네사렛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산에서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로 돌아가십니다. 그런데 늦은 시간이라 배가 없으니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어서 가셨고, 제자들은 무척 놀랐습니다. 역풍을 만나 제자들은 고생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른 것입니다.


    35 그러자 그곳 사람들이 그분을 알아보고 그 주변 모든 지방으로 사람들을 보내어, 병든 이들을 모두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 일행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예수님, 병자들을 치유 하시는 예수님, 기적을 베푸시는 예수님, 사랑과 자비가 넘치시는 예수님. 이제 그들의 마음은 바빠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알아 본 사람들은 마르코 복음에서는 뛰어다니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 예수님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데려오기 시작합니다.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들것에 눕혀서 예수님께로 데려왔습니다.

     뛰어다니는 사람들, 들것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 그들이 그렇게 수고를 마다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만일 내가 그 자리에 있더라도 그렇게 뛰어 다녔을까요?

    그 모든 것은 환자들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뛰어 다니지 않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들것을 들고 환자들을 데려오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믿었기에 환자들을 데려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보았고, 알았고, 그리고 믿었기에 환자들을 데려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나 또한 그렇게 움직여야 합니다.


    36 그리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모두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참된 믿음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병을 고쳐 달라는 부탁이나,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믿는다는 고백에 나타난 것이 나의 신앙의 전부는 아닙니다. 신앙은 말이 없고 단순합니다. 신앙은 외적인 동작을 하게 합니다. 신앙은 그분의 옷자락을 만지게 만들고, 그것만으로도 만족하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것으로 표현하고 예수님께서는 그 언어를 이해하시고, 치유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신앙의 언어를 들으시고 이해하십니다. 우리도 그렇게 내 몸으로 신앙을 표현해야 할 것입니다. 미신적인 행위로 하지 말고, 말로만 하는 신앙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는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손을 모으는 것, 무릎을 꿇는 것, 고개를 숙이는 것, 묵주를 손에 쥐고 사는 것, 성경을 가슴에 꼭 품는 것…, 이 모두가 신앙의 언어입니다.


    3. 나눔 및 묵상

    ① 행동으로 옮기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 내가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② 풍랑 속에서 “나다. 안심하여라”라는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내가 그렇게 예수님의 음성으로 마음 편해졌을 때가 언제였는지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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