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0주일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제 1독서: 이사 56,1.6-7
제 2독서: 로마 11,13-15. 29-32
복음: 마태 15,21-28
우리가 오늘 가나안 여인에 관한 생생한 이야기를 접하면서 받는 첫인상은 강력하게 ‘믿음’을 촉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께서는 친히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마귀에게 몹시 시달리고 있던 여인의 딸을 낫게 해주겠다고 확언하시면서(“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 마태 15,28)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 ‘믿음’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신다.
‘믿음’의 구심성
온르 복음은 비록 ‘믿음’을 드높이고 있고 또 예수께서 이루신 구원사업의 구심점으로 부각시키고 있긴 하지만, 이야기 전체의 내용에 비추어볼 때는 사실상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생활을 뒤흔들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 교회의 사고와 활동 양식을 속박하는 듯한 매우 심각한 문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즉 과연 복음선포는 당시 히브리인들을 지칭하였던 얼마 안되는 선민들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일반적으로 유다지방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이방인들까지도 그 대상에 포함하고 있는 것인지, 또 복음이 마태오 복음사가가 자신의 복음 끝부분에서 말하고 있듯이(28,19)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과연 어떤 과정으로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해야 보다 적절한 것인지 하는 등의 문제이다.
사도 바울로는 복음의 부차적인 관점이 아니라 본질 그 자체에 관련되어 있는 이러한 심각한 논쟁의 쟁점이 구원의 열쇠가-가나안 여인을 통하여 드러났듯이 또 어떤 이방인을 통하여 드러날 수 잇었듯이-‘믿음’인지 그렇지 않으면 그의 반대자들이 주장했듯이 모세의 옛 전통을 지키는 것인지 하는 문제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혹시 예수께서 어떤 지침이 될 수 잇는 말씀을 하셨는지 어떤지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었다. 가나안 여인에 관한 이야기는 초기 그리스도 신자들이 부딪혔던 이러한 실천적으로 어려운 문제들을 배경으로 놓고 숙독해야 하며 또 그래야 보다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야훼에게로 개종한 외국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리라”
더욱이 오늘 전례도 이러한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어가고 있는 것 같다. 오늘 전례가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두 개의 독서는 같은 문제를 서로 다른 입장에서 설명해주고 있다.
제 1독서는 제 3이사야서에서 취하고 있는데, 거기서 예언자는 귀양살이의 풍부한 체험을 아주 개연성 있게 기록하면서 그와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국가주위와 율법주의의 편협성을 탈파하고 보편적 구원론에 마음의 문을 열라고 권고한다. 하느님은 위대한 분이어서 히브리인들 외에 만일 ‘외국인들’도 ‘개종하여’ 그분의 계시와 율법을 지키기만 한다면 다 구원해 주시는 분이시다. 이렇게 해서 예루살렘은 진정 모든 민족들의 ‘고향’이 될 것이며 그 성전은 뭇백성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
“외국인들도 야훼에게로 개종하여 나를 섬기고, 야훼라는 이름을 사랑하여 나의 종이 되어 안식일을 지키고 나의 계약을 지키기만 하면, 나는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산에 불러다가 나의 기도처에서 기쁜 나날을 보내게 하리라”(이사 56,6-7).
이 대목은 ‘외국인들’과 또한 모세의 율법상 분순하다고 해서 또는 모자란다고 해서 전례 모임에서 제외시켰던 사람들 즉 조금 앞에서 예언자가 강하게 표현하고 있는 ‘고자들’(이사 56,4-5 ; 신명 23,2 참조) 같은 사람들에게도 확대되고 있는 보편적 구원론 외에도 뭇백성이 그 유일한 ‘기도처’ 즉 예루살렘 성전에(7절) 모여들고 있음을 강쪼하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모든 민족의 일치는 오직 하느님을 모든 인간의 아버지로서 깨닫고 ‘흠숭할’ 때만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하나의 극점 밖에서는 인간들 상호간에 항상 불신과 다툼만이 싹틀 것이며 인류가 하나로 일치한다는 것은 언제까지나 아름다운 꿈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의 ‘사회적’차원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오늘의 응송도 이스라엘의 유일하신 하느님에 대한 인식에서 단일화의 일치점을 발견하고 있는 이러한 보편적 구원론을 노래하고 있다 :“하느님,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옵소서. 어지신 그 얼굴을 우리에게 돌이키소서. 당신의 도가 세상에 알려지고 만백성 당신의 구원을 알게 하소서. 정의로 뭇백성을 다스리심을 이 세상 뭇 백성을 다스리심을, 창생들아 기뻐하라 춤추며 기뻐하라. 하느님 우리에게 복을 주소서. 천하 만방이 당신을 두리게 하소서”(시편 66,2-3. 5-6.8).
“하느님께서는 유다인들과 이방인들 모두를 불순종에 사로잡힌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하지만 제 2독서는, 이미 구약성서를 통해 충분히 드러난 이러한 보편적 구원론의 확대 움직임을 방해하는 하나의 장애요소 내지는 ‘걸림돌’을 보는 것 같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메시아를 열렬히 기다렸고 또 그 메시아를 세상에 전해준 후에도 그분이 곧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사도 바울로는 이미 우리가 지난 주일에 강조했듯이(로마 9,1-5 참조) 자기 민족의 비극적 사건-오늘날에도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을 개탄하며 그것에 담긴 의미를 설명해주고자 애쓴다. 그는 그러한 사실이 하느님만이 아시는 신비의 ‘영역’에 속한다는 점(로마 11,33-36)을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이스라엘 백성의 그러한 일시적 거부가 한편으로는 이방인들ㅇ르 구원의 문에 들어서게 했다는 의미에서 그들에게 공헌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마침내 이방인들에 대한 시기심으로 그들 스스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을 결정하게 되리라는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에게도 공헌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 그때가 되면 마치 죽은 이들에게 부활의 신비가 이루어지듯이 모든 이에게 크나큰 기쁨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로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자신의 봉사활동을 통해서 자기의 동료들이 이방인들에게 ‘시기심’을 느끼게 함으로써 그들의 구원을 돕고자 한다 :“나는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서 내가 맡은 직책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나는 내 동족 유다인들에게 시기심을 불러일으켜 그들 가운데 일부나마 구해주고 싶습니다. 그들이 버림을 받은 결과로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다면 하느님께서 그들을 다시 받아주실 때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었던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실 것이 분명합니다. 하느님께서 한번 주신 선물이나 선택의 은초응 다시 거두어가시지 않습니다”(로마 11,13-15.29).
이렇듯 이스라엘 백성의 운명은 모든 사람들에게 상징적 표상이 되고 있다 : 모든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베풀어지고 있지만 만일 각자가 하느님이 끊임없이 베풀어주시는 새로운 제의를 거부한다면 그 구원을 잃어버릴 위험을 만나게 된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로는 독서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전에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았던 여러분이 이제 이스랑레 사람들의 불순종 때문에 하느님의 자비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지금은 순종하지 않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여러분이 받은 하느님의 자비를 보고 회개하여 마침내는 자비를 받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불순종에 사로잡힌 자가 되게 하셨ㅅ브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30-32절).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서는 종족의 특권이나 신앙의 특권 같은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오직 자기 자신이 “불순종에 사로잡힌”(32절) ‘죄인’이라는 점을 깊이 깨닫는 겸손만이 필요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용서와 사랑이 필요한 것이다. 하느님은 이러한 조건에서만 히브리인들이건 이방인들이건 또 의로운 이들이건(혹시 그런 사람이 있을 경우에) 죄인들이건 모두를 구원해 주시는 분이시다.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돌보라고 해서 왔다”
결국 이것이 오늘 가나안 여인에 관한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이다. 마태오는 그 이야기를 마르코복음(7,24-30)에서 취하고 있긴 하지만 특히 대화의 내용을 풍부히 늘림으로써 예수께서 어떻게 해서 히브리인들(유다교 출신의 초기 그리스도 신자들도 포함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다)의 종교적 ‘배타주의’의 장벽을 실질적으로 무너뜨리시고 비록 점진적이긴 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베풀어주고 계시는지를 알려준다.
“그때에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띠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이 때 그 지방에 와 사는 가나안 여자 하나가 나서서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제 딸이 마귀가 들려 몹시 시달리고 있습니다’ 하고 계속 간청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때에 제자들이 가까이 와서 ‘저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따라오고 있으니 돌려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예수께서는 ‘나는 길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께 다가와서 꿇어 엎드려 ‘주님, 저를 도와 주십시오’ 하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며 거절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는 ‘주님, 그렇긴 합니다마는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제야 예수께서는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 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마태 15,21-28).
그 여자에게 덧붙여지고 있는 ‘가나안’이라는 호칭은 종족의 특성이 아니라 종교적 특성을 지적하는 말이다. 즉 단순히 그녀가 이교도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더 명백히 말하고 있다 :“그 여자는 시로페니키아 출생의 이방인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달라고 간청하였다\”(7,26).
명백한 교훈적 목적을 지니고 있는 대화의 내용이 돋보이고 있는 이 이야기 전체의 내용을 통해 복음사가는 외형적으로는 대립되어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일치되는 두가지 태도를 명백히 밝히고자 하는 것 같다.
우선 우리는 그렇듯 간청하는 그 이교도 여인에 대해 멸시하는 태도는 아니지만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시는 예수의 태도를 본다. 그분은 처음에 ‘그녀에게 대답조차 하지 않으신다’(23절). 그래서 사도들이 그 불쌍한 여인을 도와주어야겠다고 느낄 정도였다.
이때 예수께서는 당신의 폐쇄적인 태도를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정당화시키신다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24절). 이 구절은 마르코 복음에는 전혀없다. 또한 마르코 복음사가의 독자들 즉 이교도 출신의 독자들에게는 물의를 일으킬 수 있었지만, 아직까지도 선택된 민족이라고 느끼고 있던 유다 출신의 마태오 복음사가의 독자들에게는 물의를 일으키기보다는 오히려 호감을 살 수 있는 구절이었을 것 같다. 예수께서는 이미 앞에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명하셨다 :“이방인들이 사는 곳으로도 가지 말고 리아 사람들의 도시에도 들어가지 말라. 다만 이스라엘 백성 중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10,5-6).
그래도 그치지 않고 계속 간청하는 여인에게 예수께서는 더욱 가혹한 표현을 쓰신다 :“자녀들이 먹을 빵르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26절). 이 암시적 표현은 분명히 이방인들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예수께서 그 비유적 표현을 그저 통속적 습관에 따라 쓰고 계시며 또한 그 축소형(‘강아지’)을 쓰고 계시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그 속치이 원래 지니고 있었던 경멸의 의미는 들어 있지 않다”(La Bibbia di Gerusalemme, Ed. Dehoniane, Bologna 1974, p.2122).
“여인아! 참으로 네 마음이 장하다”
하지만, 마침내 예수께서는 점점 더 자신의 확고한 믿음을 드러내 보이는 가나안 여인의 항구한 자세에 양보하신다. 이방인인 그녀가 예수께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청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이미 그녀가 예수께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또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22절) ;“주님, 저를 도와 주십시오”(25절) 등의 점점 더 강력한 표현을 써가며 예수께 매달리고 있다는 사실도 그녀의 믿음을 잘 증명해준다. 그러나 여기에는 복음사가 자신의 편집활동도 개입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단호하기까지 한 예수의 말씀을 무색케 할 수 있었던 그녀의 마지막 항변은 그녀의 깊은 믿음과 고통을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주님, 그렇긴 합니다만는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먹지 않습니까?”(27절).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주인’의 ‘집’에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거기서 그녀는 주인의 발밑에 웅크리고서라도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그녀의 ‘장한’ 믿음에 탄복하시고(28절), 그녀에게 그녀가 요청하는 은총을 베풀어주신다. 다른 한편, 그녀의 그러한 믿음을 야기시켜주고 증대시키는 일에 적극적으로 기여하신 분도 바로 예수 자신이셨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제 아무리 유다화(化)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구원이 이방인들에게도 이루워졌다는 사실에 의구심을 품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가나안 여인의 믿음과 같은 그러한 믿음이라면 당연히 ‘하느님의 나라’에 이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외적인 경우를 인정하는 것은 또한 다음과 같은 혁신적 원칙을 긍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즉 구원의 기준은 이제 더 이상 육체적으로 아브라함의 종족에 속한다는 사실이 아닐, 예수를 주님으로서 또 다윗에게 한 계약의 계승자로서 ‘믿을 수 있는’ 능력이다.
사도들과 특별히 사도 바울로는 이렇듯 언뜻 보기에 명백히 모순적인 예수의 태도에서 이교도의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투신할 수 있는 힘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유일한 보편적 가치 즉 ‘믿음’의 가치에다 구원의 최고 결정 능력을 부여한다. 믿음의 가치는 보다 더 높은 가치 즉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을 위해 하신 ‘말씀’의 가치에 근거하고 있다.
오늘날 교회는 바로 이 ‘말씀’을 새로운 형태와 방법으로 널리 선포함으로써 20세기의 새 ‘이방인들’-비록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라 할지라도-이 구원의 길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사실 하느님은 분명 우리도 구원해주고자 하신다. 아마도 오늘날 처럼 구원이 절실히 요청된 적은 결코 없을 것이다!

1. 강대원 즈카르야
1.1. 연중 20주일
1독서 : 이사 56,1. 6-7
2독서 : 로마 11,13-15. 29-32
복음 : 마태 15,21-28
제1독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여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로움이 곧 드러나리라.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며 주님의 종이 되려고 주님을 따르는 이방인들,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않고 나의 계약을 준수하는 모든 이들. 나는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고 나에게 기도하는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하리라. 그들의 번제물과 희생 제물들은 나의 제단 위에서 기꺼이 받아들여지리니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
이사야 예언자는 귀양살이의 풍부한 체험을 아주 개연성 있게 기록하면서 그와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국가주의와 율법주의의 편협성을 탈피하고 보편적 구원론에 마음의 문을 열라고 권고한다. 하느님은 위대한 분이시며 히브리인들 외에 만일 ‘외국인들‘도 ’개종하여‘ 그분의 계시와 율법을 지키기만 한다면 다 구원해주시는 분이시다. 이렇게 해서 예루살렘은 진정 모든 민족들의 ’고향‘이 될 것이며 그 성전은 ant 백성이 모여서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 모든 민족의 일치는 오직 하느님을 모든 인간의 아버지로서 깨닫고 ’흠숭할‘ 때만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하나의 극점 밖에서는 인간들 상호간에 항상 불신과 다툼만이 싹틀 것이며 인류가 하나로 일치한다는 것은 언제까지나 아름다운 꿈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의 ’사회적‘차원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2독서
이제 나는 다른 민족 출신인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나는 이민족들의 사도이기도 한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내가 내 살붙이들을 시기하게 만들어 그들 가운데에서 몇 사람만이라도 구원할 수 있을까 해서입니다. 그들이 배척을 받아 세상이 화해를 얻었다면, 그들이 받아들여질 때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전에는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들의 불순종 때문에 자비를 입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들도 지금은 여러분에게 자비가 베풀어지도록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지만, 이제 그들도 자비를 입게 될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 안에 가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
이미 구약성경을 통해 충분히 드러난 이러한 보편적 구원론의 확대 움직임을 방해하는 하나의 장애요소 내지는 ‘걸림돌’을 보고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메시아를 열렬히 기다렸고 또 그 메시아를 세상에 전해준 후에도 그분이 곧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사도 바오로가 이미 강조 하였듯이(로마 9,1-5 참조) 자기 민족의 그 비극적 사건을 개탄하며 그것에 담긴 의미를 설명해주고자 애쓴다. 하느님 앞에서는 종족의 특권이나 신앙의 특권 같은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오직 자기 자신이 “불순종에 사로잡힌” ‘죄인’이라는 점을 깊이 깨닫는 겸손만이 필요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용서와 사랑이 필요한 것이다. 하느님은 이러한 조건에서만 히브리인들이건 이방인들이건 또 의로운 이들이건 죄인들이건 모두를 구원해 주시는 분이시다.
복음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하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예수께서는 그녀의 ‘장한’ 믿음에 탄복하시고 그녀에게 그녀가 요청하는 은총을 베풀어주신다. 다른 한편, 그녀의 그러한 믿음을 야기 시켜주고 증대시키는 일에 적극적으로 기여하신분도 바로 예수 자신이셨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제아무리 유다화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구원이 이방인들에게도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의구심을 품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가나안 여인의 믿음과 같은 그러한 믿음이라면 당연히 ‘하느님의 나라’에 이르지 낳은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외적인 경우를 인정하는 것은 도한 다음과 같은 혁신적 원칙을 긍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즉 구원의 기준은 이제 더 이상 육체적으로 아브라함의 종족에 속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예수를 주님으로서 또 다윗에게 한 계약의 계승자로서 ‘믿을 수 있는’능력이다.
강론
우리가 지금 이렇게 성당에 모여 있으면서 미사를 드리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느님을 믿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또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분임을 믿기 때문에 이 자리에 모여 있으며 찬미의 제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는 것입니까? 우리가 세례를 받으며 하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교회에 무엇을 청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우리는 ‘신앙을 청합니다.’라고 대답을 하며 이 신앙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게 되면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그 선물을 얻기 위해, 하느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며 믿음을 키워나가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무엇인지 오늘 선포된 말씀들을 통해 우리 마음에 새겨보도록 합시다.
오늘 복음 말씀을 들여다보면 한 이방인 여인이 예수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소리를 들은 척도 안하십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계속해서 예수님께 부르짖자 주님께서 그 여인에게 이스라엘 백성만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고 매정하게 말씀을 하십니다. 하지만 그 여인은 자신의 자존심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을 강아지에 비유하며 주님의 자비를 간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믿음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자신을 강아지에 비유하며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하는 여인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그 여인은 이미 자기 자신이 어떠한 모습으로 비추어지는가에 대한 관심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자비를 얻기 위해, 그분만이 자신의 딸의 병을 낫게 해주실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그 여인은 하느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은총을 청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아니시면 얻을 수 없는 것이고,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어떤 사람도 줄 수 없는 것을 알았기에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간절히 청하고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우리 신앙인들은 잘 배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어떤 믿음의 자세를 보여드리고 있습니까? 그렇게 간절히, 그분이 아니시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그분의 사랑이 아니면 살아갈 수 없을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믿음이라는 것은 원래 우리 자신이 갖게 된 것은 아닙니다. 믿음 그 자체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기에 우리는 그 믿음을 통해 하느님을 알 수 있게 된 것이고, 그리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영원한 행복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거기에 더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노력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을 더 잘 키워 나가야만 우린 그 선물을 잘 보존하고 간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때 오늘 복음에서 보았던 여인의 믿음처럼 굳건한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느님께서 주신 믿음이라는 선물을 소중히 간직할 때 우리는 그 믿음을 통해 이 세상 어느 것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볼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간절함, 그런 소중함을 가지고 있을 때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에게 내려,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의 진정한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강론의 시작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하느님을 믿기에 지금 이 자리에 모여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는 우리는 복음의 여인처럼 하느님이 아니시면 우리가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하느님이 아니시면 우리는 하느님만 바라고 사랑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시작된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다시 돌려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모습이 바뀔 때만이 우리는 믿음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하느님에게서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은 다시 거두어 가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있음은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음이 분명하다면 우리가 다시 돌려 드려야 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사랑을 하느님께 다시 돌려 드립시다. 우리가 하느님만을 사랑하고 하느님께만 의지하고 하느님만 믿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사랑을 하느님께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바로 그 모습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복음의 여인의 모습입니다.
연중 제 20 주일
1. 강길웅 신부(가)/ 2 2. 강아지도 주인의(가)/ 4
3. 강아지도 주인의(가)/ 5 4. 강아지도 주인의(가)/ 6
5. 강아지도 주인의(가)/ 7
1. 연중 제20주일 마태 15,21-28 (가) 만인에게 열려진 구원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이사 56,1.6~7 (이방의 아들들은 내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리라)
제2독서 로마 11,13~15.29~32 (하느님께서 한 번 주신 은총은 거두어 가시지 않는다)
복 음 마태 15,21~28 (그대의 믿음이 크도다)
아득한 옛날에 세상에는 여러 민족들이 있었지만 하느님께선 특별히 이스라엘 민족을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시어 구원의 계획을 실천해 나가셨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3천여 년 전의 일입니다. 따라서 그때부터 이스라엘 백성은 여느 민족과는 다릅니다.
그들의 후손인 유대인들도 우리와는 근본이 다르고 차원이 다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선 그들만을 당신 백성으로 뽑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라고까지 부르면서 그들을 천시했습니다. 물론 지나친 교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구원이 꼭 유대인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차적으로는 물론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었지만 그러나 유대인을 통해서 만인을 위한 구원이 하느님의 본래 계획이요 뜻이었습니다. 만일에 하느님께서 어떤 종족이나 지역에 묶이고 한정된 신이었다면 그는 더 이상 ‘하느님’으로서의 존재 가치는 상실했을 것입니다.
오늘 성서에서는 바로 하느님께서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도 구원의 은총 안에 포함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1독서에서는 하느님은 출신 성분이나 특정 민족을 가리지 않고 당신의 계명에 충실하면 어떤 이방인도 성전에 모일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기원전 520년경의 이야기인데 그때 이미 구원은 유대인을 넘어서 이방인들에게까지도 전달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만이 하느님의 백성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불충실과 배신으로 인해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유대인을 포함해서 이방인에게까지도 확대됩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최종적으로 확실하게 드러났습니다. 오늘 복음이 그 단적인 예가 됩니다.
‘띠로’와 ‘시돈’은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가파르나움에서 약 50km 떨어진 서북쪽 해안지방으로서 이방인 지역입니다. 그곳은 특히 우상숭배가 심했던 곳인데 예수님께서 왜 그곳까지 가셨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치 않는 모순과는 달리 그곳에 사는 이방인 여자는 예수를 메시아로 알아 뵙고 구원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놀라운 사건이면서 동시에 ‘개’라고까지 천시 받는 것을 개의치 않고 끈질기게 예수님께 매달리는 위대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 줬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아이러니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왜 이방인 여자를 무시하셨느냐 라는 내용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본래 이방인을 천시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이방인 여인의 진실된 믿음을 제자들 앞에 끌어내어 그들로 하여금 그 신앙과 용기를 배우고 또한 앞으로 전개될 제자들의 전도 활동에 있어서 이방인들이 주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우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구원은 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성서의 말씀을 들으면서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인 우리도 단지 천주교회 안에서 세례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구원에 이르는 가장 확실하고도 안전한 길은 예수님께서 세우신 우리 교회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답게 올바르게 살지 않는다면 구원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주 희박한 가능성이긴 하지만 실제로도 구원은 개방되어 있다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예를 들어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이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아프리카 의 성자였던 슈바이처 박사나 중국의 고승 달마대사 같은 분들도 우 리 교회 밖에 있었다 해서 그들이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에 구원받지 못한다고 단정한다면 그는 이단입니다. 왜냐 하면 구원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폭넓게 열려 있는 것이며 또 자기 탓이 아닌 것으로, 천주교를 비록 몰랐다 해도 진리를 찾아 걸었던 이들은 넓은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길에 일치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이며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선민’입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가지고 누렸던 특권보다 훨씬 더 위대한 은총이 우리 안에 주어져 있습니다. 여느 다른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개신교 신자들과도 엄연히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답게 살지 않는다면 그 모든 특권과 커다란 은총은 물거품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가나안 여인의 믿음은 많은 것을 암시해 줍니다. 아무리 무시당해도 예수님께 매달릴 수 있는 신앙인, 가나안 여인처럼 어떤 처지에서도 자신을 끝까지 낮출 수 있고 예수님을 신뢰 할 수 있는 신앙인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 요청되는 믿음의 자세입니다. 구원의 길은 항상 열려져 있습니다.
진실한 믿음을 늘 간직하도록 합시다.
2. 연중 제20주일 마태 15,21-28 (가)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빵을
우리가 오늘 가나안 여인에 관한 생생한 이야기를 접하면서 받는 첫인상은 강력하게 믿음을 촉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는 친히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마귀에게 몹시 시달리고 있던 여인의 딸을 낫게 해주겠다고 확언하시면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 믿음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십니다.
오늘 복음은 비록 믿음을 드높이고 있고 또 예수께서 이루신 구원사업의 구심점으로 부삭시키고 있긴 하지만, 이야기 전체의 내용에 비추어 볼 때는 사실상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생활을 뒤흔들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 교회의 사고와 활동 양식을 속박하는 듯한 매우 심각한 문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즉 과연 복음선포는 그 당시 히브리인들을 지칭하였던 얼마 안되는 선민들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일반적으로 유다지방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이방인들까지도 그 대상에 포함하고 있는 것인지, 또 복음이 마태오 복음사가가 자신의 복음 끝부분에서 말하고 있듯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과연 어떤 과정으로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해야 보다 적절한 것인지 하는 등의 문제인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 앞에서는 종족의 특권이나 신앙의 특권 같은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왹 자기 자신이 불순종에 사로잡힌 죄인이라는 점을 깊이 깨닫는 겸손만이 필요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용서와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러한 조건에서만 히브리인들이건 이방인들이건 또 의로운 이들이건 죄인들이건 모두를 구원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결국 이것이 오늘 가나안 여인에 관한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입니다.
만약에 예수께서 이와 같이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신다면, 우리처럼 예수님의 사랑에 젖은 사람들은 어쩌면 처음의 무관심한 단계에서 벌써 예수님께 실망하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기도 중에 예수께서 나에게 무관심하다고 느껴지거나, 일부 다른 사람의 기도만 들어주신다고 느껴지거나,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에 자신이 부적격하다고 생각되면 오늘의 가나안 여인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주의 말씀에서는 이 겸손하고 오래 참는 믿음도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3. 연중 제20주일 마태 15,21-28 (가)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빵을
오늘 복음에서는 이방인에 대한 사랑과 은총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행동 반경은 갈릴래아 지역을 넘어 띠로와 시돈 지방으로 넓혀집니다. 이 두 도시는 모두 이방인의 도시입니다. 예수는 이방인의 도시를 찾아가십니다. 여기서 예수는 가나안의 한 여인을 만납니다.
가나안 사람도 성서에서는 이방시하며 죄인시하였습니다. 이 여인은 딸의 병을 예수께서 치유해주시기를 간청하였습니다. 예수의 대답은 냉정하고 예의에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일차적 소명은 길 잃은 이스라엘인들을 되찾는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이 대답은 보편적 구원사상에 반하는 것입니다. 보편적 메시아가 왜 이렇게 배제적인 자세, 배타적인 입장을 취했는지 우리에게는 의아하게 생각됩니다.
이 대목의 공통적 해석은 이렇습니다. 사랑에는 그 신원과 여러 대상이 있습니다. 사랑은 필연적으로 가까운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자신, 자녀, 부모, 가족, 이웃사랑 등등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는 편협한 사랑의 인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구원의 실현에 있어서도 그 어떤 절차와 순위가 있음을 이렇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예수는 그 시대, 그 현실, 그 문화전통을 일단 존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혈연보다 더 진하고 깊은 믿음의 차원을 역설하기 위한 교육의 새로운 방법을 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의 종교전통과 의식으로 보아 결코 이방인과 상대해서는 안되고 더구나 그들의 구원을 평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믿음과 신앙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그분 특유의 교육방법인 것입니다. 이 여인은 참으로 믿음과 신뢰의 사람이었습니다. 냉정하고 무례한 예수의 대답에서조차도 마음 상하지 않고 더욱더 겸손되이 간청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를 믿었고 사랑했고 예수께서 꼭 치유해주시리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이 여인의 위대함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여인, 그는 하느님을 움직이고 기적을 가능케 하고 그리하여 그 사랑과 신뢰때문에 딸을 치유케 했습니다. 자신을 강아지에 비유하면서 까지 예수의 은총을 간청했던 겸허한 이 여인의 믿음은 시공을 넘어 우리 모두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이방인도 믿음으로 하느님 앞에 가장 의롭고 위대해질 수 있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교훈입니다. 예수 친히 이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참으로 겸허했습니다. 자신을 끝까지 낮춘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믿음과 신뢰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청이 꼭 이루어지리라 확신했었습니다. 이 여인은 참으로 기도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자녀를 위해서 자신을 던진 사랑의 어머니이고, 끝까지 버틴 인내와 항구심의 모범자이기도 합니다. 이방인들을 구원하신 전능하신 하느님, 죄, 잘못, 약점 투성이인 우리 모두를 당신의 자비로 깨끗이 씻어주시고 우리 모두 은총의 새사람이 되소 하소서. 아멘.
4. 연중 제20주일 마태 15,21-28 (가)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빵을
오늘 우리는 연중 제 20주일을 지내며 지난 주일의 주님의 말씀과는 대조적인 어느 이방인 여인의 믿음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시던 제자 베드로 사도는 주님께 의심을 품음으로 해서 물에 빠지게 되었지만 오늘 복음에 나오는 가나안 여인은 이방인이면서도 그 믿음이 강하였기에 주님께서 여인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 사도의 자세나 가나안 여인의 믿음에 대한 자세를 비교해서 생각해 보고 우리들의 신앙의 자세가 어떤지 함께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두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한 사람은 예수님의 측근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치없게 여기는 가나안 사람이란 점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 비교하고자 하는 이 성서상의 사건에서는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한 가나안 여인의 믿음이 더 컸습니다.
우리의 신앙 자세도 여기에 견주어 볼 수 있습니다. 설마 그런 분들이야 없겠지만 혹 내가 너보다 영세받은 지가 오래됐으니 내가 신앙에 있어서는 네 선배라고 말하거나 아니면 내가 다니는 성당이 네가 다니는 성당보다 훨씬 크고 좋으니까, 내가 예수님과 더 가깝다고 말하는 분이 있다면 이것은 큰 문제가 아니 할 수 없겠습니다. 외형의 것들은 언제라도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님에게로 향한 우리 믿음의 자세입니다. 베드로 사도와 가나안 여인에게서 우리는 바로 겸손되이 엎디어 간구하는 믿음의 자세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두번째로 생각해 볼 두 사람의 차이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베드로 사도를 포함해서 제자들 모두가 그토록 보고 모신 예수님을 유령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여인은 먼 지방에서 단지 예수님을 소문으로 들었지만 그 믿음은 누구 못지 않게 열렬했습니다. 그러기에 그 여인은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하고 외쳤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여러가지 형태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성체를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이웃을 통하여 그리고 대자연의 섭리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처럼 그분을 바로 알아 뵙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가나안 여인처럼 오시는 그분을 바로 알아보고 “다윗의 자손이시여, 제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요” 하고 큰 소리로 신앙을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믿음의 척도를 외적인 것에 두는 수가 많습니다. 물론 외적인 신앙 고백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믿음입니다. 하지만 마음의 믿음이 중요하다고 해서 외적 경신 행위를 게을리 한다든가 하면 곤란하겠지요. 진정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신앙을 바탕으로 주님을 찬미하고 찬양하는 것이 바른 신앙인의 자세일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이 될 때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교회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성당을 열심히 나가고 기도도 열심히 하지만 내적인 믿음이 부족해 혹 일상 생활에서 비신자들에게 웃음거리가 된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랄 수 없으며 반대로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저 사람이 성당을 다니는지 안다니는지 모르게 형식에 무관심하다면 그것 역시 바른 신앙인의 자세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둘째 독서에서 어떻게 하느님과 유다인이 화해를 했으며 그 결과 유다인들은 어떤 선물을 하느님께 얻었는지를 들었습니다. 우리도 이제부터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본받아 예수님에게 간구한다면 하느님의 선물인 은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과 단단히 결합하도록 노력합시다. 아멘.
5. 연중 제20주일 마태 15,21-28 (가)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빵을
하느님 앞에서는 종족의 특권이나 신앙의 특권 같은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이 “불순종에 사로잡힌” ‘죄인’ 이라는 점을 깊이 깨닫는 겸손만이 필요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용서와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러한 조건에서만 히브리인들이건 이방인들이건 또 의로운 이들이건 죄인들이건 모두를 구원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결국 이것이 오늘 가나안 여인에 관한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입니다.
마태오는 그 이야기를 마르코 복음에서 취하고 있기 하지만 특히 대화의 내용을 풍부히 늘림으로써 예수께서 어떻게 해서 히브리인들의 종교적 ‘배타주의’의 장벽을 실질적으로 무너뜨리시고 비록 점진적이긴 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베풀어주고 계시는지를 알려줍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띠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이 때 그 지방에 와 사는 가나안 여자 하나가 나서서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제 딸이 마귀가 들려 몹시 시달리고 있습니다.’ 하고 계속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때에 제자들이 가까이 와서 ‘저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따라오고 있으니 돌려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가 예수께 다가와서 끊어 엎드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애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며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주님 그렇긴 합니다마는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제야 예수께서는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그 여자에게 덧붙여지고 있는 ‘가나안’ 이라는 호칭은 종족의 특성이 아니라 종교적 특성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즉 단순히 그녀가 이교도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더 명백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 여자는 시로페니키아 출생의 이방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쫒아내 달라고 간청하였다.”
명백한 교훈적 목적을 지니고 있는 대화의 내용이 돋보이고 있는 이 이야기 전체의 내용을 통해 복음사가는 외형적으로는 대립되어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일치되는 두 가지 태도를 명백히 밝히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우선 우리는 그렇듯 간청하는 그 이교도 여인에 대해 멸시하는 태도는 아니지만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시는 예수님의 태도를 봅니다. 그분은 처음에 ‘그녀에게 대답조차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그 불쌍한 여인들 도와주어야겠다고 느낄 정도였습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당신의 폐쇄적인 태도를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정당화시키십니다.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 이 구절은 마르코 복음에는 전혀 없습니다.
또한 마르코 복음사가의 독자들 즉 이교도 출신의 독자들에게는 물의를 일으킬 수 있었지만 아직까지도 선택된 민족이라고 느끼고 있던 유다 출신의 마태오 복음사가의 독자들에게는 물의를 일으키기보다는 오히려 호감을 살 수 있는 구절이었을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앞에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명하셨습니다. “이방인들이 사는 곳으로도 가지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에도 들어가지 말라. 다만 이스라엘 백성 중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
그래도 그치지 않고 계속 간청하는 여인에게 예수께서는 더욱 가혹한 표현을 씁니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이 암시적 표현은 분명히 이방인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점점 더 자신의 확고한 믿음을 드러내 보이는 가나안 여인의 항구한 자세에 양보하십니다. 이방인인 그녀가 예수께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청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이미 그녀가 예수께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 줍니다. 그리고 단호하기까지 한 예수의 말씀을 무색케 할 수 있었던 그녀의 마지막 항변은 그녀의 깊은 믿음과 고통을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 그렇기는 합니다마는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사도들과 특별히 사도 바울로는 이렇듯 언뜻 보이게 명백히 모순적인 예수의 태도에서 이교도의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투신할 수 있는 힘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유일한 보편적 가치 즉 ‘믿음’의 가치에다 구원의 최고 절정 능력을 부여합니다. 믿음의 가치는 보다 더 높은 가치 즉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을 위해 하신 ‘말씀’의 가치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바로 이 ‘말씀’을 새로운 형태와 방법으로 널리 선포함으로써 21세기의 새 이방인들이 구원의 길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사실 하느님은 분명 우리도 구원해주고자 하십니다. 아마도 오늘날처럼 구원이 절실히 요청된 것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연중 제20주일
제 1 독서 : 이사 56, 1. 6-7
제 2 독서 : 로마 11, 13-15. 29-32
복 음 : 마태 15, 21-28
제 1 독서 : 팔레스타인 내에 사는 외국인들은 제한적이나마 어느 정도의 권리와 보호를 받고 있었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사람을 구박하거나 학대하지 말아라. 너희도 에집트 땅에서 몸붙여 살지 않았느냐?”(출애 22, 20; 신명 10, 19 참조) 그러나 제3 이사야는 약속된 땅 밖에 사는 외국인들에게까지도 권리를 확대시킨다. 그런 점에서 제3 이사야는 이방인들과의 결혼을 금지한 에즈라 9-10장에 나타난 국수주의적 경향을 벗어나 룻기나 요나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보편주의적 경향에 부합한다. 이런 관점은 특히 이사야 60장 1-22절과 66장 18-21절에 잘 나타난다.
오늘 제1독서는 바로 그런 보편주의적 경향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계명(예를 들면 안식일 법)을 지키기만 한다면, 외국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참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물을 바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성전은 뭇백성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
이런 보편주의적 관점은 바빌론 유배의 경험에서 연유한다. 바빌론 유배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나라 밖에서 이방인들과 섞여 살아야 했다. 거기서 한 가지 중요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다시 해방되어 돌아갔을 때 이방인들의 지위는 어떻게 될 것인가? 유배에서 돌아온 후에 한 예언자(소위 제3 이사야)가 그 해답을 제시했다. 참된 하느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이스라엘 공동체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혈통이 아니라 주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주님의 계명에 대한 충성심이기 때문이다.
제 2 독서 : 유다 출신인 사도 바오로는 인류를 단순히 둘로 나누어 본다. 즉 유다인과 이방인 또는 이스라엘 민족과 다른 민족들로 나눈다. 선택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이 걸려 넘어진 반면(로마 9, 32-33)에 이방인들이 오히려 구원을 받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믿지 않는 그들의 잘못에 기인한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이고 일시적이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고 또 지금도 받고 있다(로마 11, 28). 그러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하느님께 돌아온 후에 이스라엘도 구원받게 될 것이다(로마 11, 25). 하느님께서 한번 주신 선물이나 은총을 다시 거두시지 않기 때문이다(로마 11, 29).
복 음 : 예수께서 띠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는 것은 단순히 지리적인 언급이 아니라 신학적인 의미를 내포한다(마태 11, 21 참조). 띠로와 시돈이라는 표현은 예수의 활동 대상이 된 이방인들을 뜻한다.
24절의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는 예수의 거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예수께서는 교육적인 의도로 가나안 여자의 청을 거절함으로써 그 여자의 신앙을 시험하려 했을까? 아니면 예수께서는 우선 먼저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파견되었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일까? 교육적인 의도가 있기도 하지만, 마태오 복음 10장 6절에 비추어볼 때 아마 후자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결국에는 예외적으로 가나안 여자의 청을 들어주신 것은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 후에는 이방인들도 구원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알려준다.
이제 이방인들에게도 하느님의 자비는 베풀어지며 이방인들도 생명의 빵을 먹을 수 있다. 주님의 식탁 둘레에 모인 공동체 안에는 부스러기를 주워먹는 제24급의 신자는 없을 것이다. 모두 다 자녀로서 빵을 먹기 때문이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이방인들을 위한 기쁜 소식으로 구원의 보편성입니다. 즉 누구나 인종과 신분과 계급의 차이없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만 있다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바빌론 유배생활이 끝나(기원전 538년경) 고향으로 돌아온 유다인들은 다시 예루살렘에 모여 공동체를 형성하고 성전을 그들 생활의 중심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의혹이 생겼습니다. 약속된 구원과 새 예루살렘의 영광은 언제 이루어지는가? 그리고 누가 우리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성전에서 기도하며 제사를 바칠 수 있는가?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해답을 얻습니다. 구원 즉 평화와 행복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고 하느님께서 이를 곧 주실 것이라는 것과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나 공동체에 속한다는 답을 듣게 합니다.
아울러 하느님의 집은 모든 이를 위한 집으로 기도하는 곳입니다. 즉 이스라엘인이나 이방인이 함께 모여서 기도하는 곳, 이곳이 바로 하느님의 집 성전입니다. 어느 성당에 가보면 성전 입구에 “낫기를 원하느냐?”(요한 5, 6)라는 성서 구절이 쓰여있는데 의미심장한 의미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영육이 온전히 치유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를 불문하고 성전에 들어와 하느님을 만나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이기에 성전은 모든 이에게 열려져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제2독서 로마서에서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서 선택되셨다고 하시면서 자신이 맡은 직책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하셨습니다. 아울러 하느님께서는 비록 불순종했던 유다인이라 할지라도 자비를 베푸셔서 구원을 받도록 하셨으며 유다인과 이방인이 차이없이 모든 이들이 구원을 받는 것은 하느님 자비의 덕분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가나안 여인 즉 이방인이 예수의 구원을 받는 장면을 자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의 청을 주님께서 처음에는 그녀가 이방인이기에 거절하신 것처럼 보였지만 그녀의 믿음을 보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처음에 이렇게 하신 것은 그녀의 믿음을 떠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의 이런 자기를 경멸하는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매달림으로써 예수를 탄복시킵니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는 예수의 말씀은 분명 그녀에게는 큰 모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런 인간적인 것들을 넘어서서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께 다가섬으로써 예수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큰 것을 얻기 위해서 작은 것을 포기한 그 마음에서 기적은 일어난 것입니다.
한번은 큰 화물 트럭이 달리다가 다리 밑을 통과하는 중에 그만 높이가 같아 다리 밑에 끼어서 옴짝달싹 못하고 멈춰 서있었습니다. 경찰도 오고 소방서에서도 나오고 여러 사람들이 둘러서서 의견을 내보았지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어린이 하나가 나와서 한다는 말이 자동차 바퀴의 공기를 조금씩 빼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그 아이의 말대로 해서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우리 인간 사이에서도 서로 양보하지 않고 자신의 위치나 주장만 내세우면 일이 풀리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한쪽이 양보할 때 혹은 더 좋게 두 편이 다 뒤로 물러설 때 쉽게 합의가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양보를 할 줄 알았기 때문에 주님의 칭찬을 받았고 큰 선물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참된 일치와 구원은 서로를 받아들이고 용서하며 양보할 때 이루어집니다. 이런 것이 이루어지기 위한 전제 조건은 가나안 여인처럼 일의 순서와 중요성에 상관없이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는 마음과 믿음인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조급하게 서두르는 것은 공동체의 일치를 깨고 자제력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당장은 모든 일이 잘 안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진득한 마음으로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며 지혜롭게 살아갈 때 하느님 구원의 은총이 그분의 선물로서 우리에게 내려지는 것입니다. 흑백의 논리로서 상대방을 저울질하고 단죄하는 모습이 아니라 상대방의 처지를 헤아릴 줄 아는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너그럽게 포용성을 갖고 서로를 받아들일 때 진정한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든 민족과 언어와 종파 그리고 풍습을 초월한 주님 안에 일치를 이루는 구원의 공동체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