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대림 제 1주일 강론모음

 

대림 제1주일

12. 김정진 신부(나) / 24

13. 우리 미음의 자세(나) /25   14. 심용섭 신부(나) / 29

15. 회개로 준비(나)/ 31          16. 박성팔 신부(나)/ 33

17. 함세웅 신부(나) / 35         18. 강길웅 신부(나) / 37

19. 길요안 신부(나) / 39         20. 김석중 신부(나) / 40

21. 교구주보(나)/ 41              22. 최인호 작가(나)/ 42



12.           대림 제1주일 마르 13,33-37 (나) 대림절의 정신과 생활

                                                          김정진 신부



또 한해가 저물게 되면 교회에서는 대림절을 맞게 됩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날을 기다리며 마음과 정신의 준비를 하며 생활을 반성할 시기입니다. 매년 사랑과 평화 속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합당한 정신과 생활로 맞이하다가 결정적인 최후의 재림에 우리는 구원의 대열에 끼어야 할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미사 때마다 주의 기도문 후에 <복된 희망을 품고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나이다>하고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의심없이 그리스도교의 본질에 속합니다. 따라서 신자들의 전체 신앙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가져옵니다 .



성 바오로는 ,만일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신앙은 헛되고 우리는 가장 불쌍한 자라고 지적한 바 있지만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재림하지 않으신다면 우리의 신앙은 공허이며,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자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정녕 재림하실 날이 있기에 우리는 커다란 희망과 기쁨 속에 생활할 수 있습니다.



대림절 첫 주일에 <당신들은 깨어 있으시오. 항상 깨어 있으시오>라는 예수님의 경종의 말씀을 듣는 것도 역시 예수님의 재림을 조심스러이 기다려야 함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확실히 즐겁고 기쁜 일입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며 우리가 생각하지도 않았을 때 오시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노아 홍수 때의 사람들에 관한 말씀이나 밤 도둑에 관한 말씀이나 열 처녀에 관한 비유 이야기나 모두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항상 준비하고 있으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원하고 기다리는 것은 자신의 지상생활의 노고에 대하여 하느님의 상을 받으려는 타산적인 생각에서도 아니요, 자기를 괴롭힌 악인들에게 정당한 벌이 내리기를 바라는 복수심에서도 아닙니다. 이러한 뜻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원한다면 우리 자신도 하늘나라에서 추방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재림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은 사랑을 실천하는 자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일체의 이기주의를 배격하며 초월합니다. 그 날에는 사랑과 그 업적만이 남으면 빛나기 때문입니다.



최후의 심판날에 오시기에 앞서 예수님은 매년 성탄절 밤에 사랑과 평화 속에 고요히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자비와 용서와 축복을 주십니다. 이에는 우리의 마음의 준비가 요구됩니다. 누구나 회개하여 개전(改悛)의 정으로 예수님을 맞이해야 합니다. 통회하고 속죄하는 마음 없이는 예수님을 가까이 할 수 없으며 예수님이 천만 번 내려오셔도 그에게는 무의미합니다.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이다>(2고린 6:2) 라고 외친 사도의 말씀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매년 대림절에 신자들은 모두 판공성사라는 교회 법규를 이행해야 합니다. 신자로서는 모름지기 판공성사를 제때 제날에 받음으로써 슬기로운 다섯 처녀(마태 25:10)와 같이 오시는 예수님을 기꺼이 영접하는 영광을 얻어야 합니다. 가족 중에 냉담자나 주변의 미신자들을 권장하여 하느님과 화해하고 하느님 품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다음 또 하나가 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면 따뜻한 우리의 손길, 우리의 온정을 기다리는 겨레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주변에는 가난하고 불우한 동포들이 있습니다. 보육원도 있고 양로원도 있습니다. 그리고 군종후원회도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우리 신자들의 사랑과 도움을 필요로 하며 이들을 후히 대접함으로써 우리는 <이 미소한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곧 내게 해 준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을 실천하여야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을 영광과 구원의 날로 맞을 수 있게 됩니다. 아멘.



            







13.         대림 제1주일 (나) 마르 13,33-37 대림절을 맞는 우리의 마음 자세





우리는 또한번의 구세주 대림 1주일을 맞이합니다. 성탄까지의 4주간을 대림절로서 새로운 교회신념을 준비하는 시기로 정하고 있습니다. 대림절의 본뜻은 구세주로서의 예수의 탄생을 애타게 기다리는 뜻과 또 장차 권능과 영광으로 나타나실 예수의 재림에 대비하는 뜻의 두 가지를 겸하고 있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구세주를 맞이함에 있어서 마음의 집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회개의 정을 통절히 발해야 하겠고 또 한편으로는 구세주를 모시는 기쁨의 대망을 열렬히 품어야할 것입니다.



한국은 아직 4천년전의 구약시대나 다름없습니다.

항상 진리와 광명과 참된 사랑을 갈구해왔으나 한번도 얻지 못하고 암흑 속에서 황량한 광야를 헤매는 우리의 조국, 우리의 겨레와 더불어 나도 그 속에서 덕을 잃고 살아오지 않았던가요? 우리민족, 우리국민처럼 진리의 강탄(降誕), 순수(純粹)와 정결(貞潔)의 내림을 고대하기에 목말라하는 민족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 땅의 백성들은 대림절 속에서 언제 오실지 모르는 구세주를 기다리며 살아왔습니다. 참된 즐거움이 꼭 오리라고 믿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릇된 즐거움에 속아 살아왔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정치가들의 약속을 좋아하고 희망을 걸고 그 실현을 고대하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도 짧고 너무나 허무했습니다. 순간의 즐거움이었습니다. 많이 속았습니다. 라디오, 신문, 텔레비전 등은 거의 이 땅의 사고(思考)를 좌우하고 있습니다. 10년, 20년을 두고 닦아온 신자생활을 그들의 전위적(前衛的)인 선전에 여지없이 굴복당하는 일은 없는가요?



우리는 신문이 보도하는 소식을 진리로 믿고 슬퍼도 하고 즐거워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뉴스는 신문인들이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 즐거움은 하루밖에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은 같은 신문이 또다른 걱정을 한아름 싸들고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텔레비전은 더욱 확실한 것으로 믿고 「내눈으로 봤으니」 의심하지 않았고 참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나 그 즐거움도 사흘을 못 채우고 제작자의 카메라 장난임을 알게됩니다. 마침내 술을 마시고 창녀의 알몸을 내 손으로 더듬으며 즐거움을 찾았습니다. 이것은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과 허무와 자학(自虐)밖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또한 현대인이란 그 이름 때문에 자기판단의 함정에 헤매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아니면 현대인은 스스로 장만한 감옥에 갇혀 제 손으로 자물쇠를 놓고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는 자연의 미(美) 그 질서(秩序) 또 모든 지혜를 찾아보지 못하고 미(美)보다는 추(醜)를, 질서(秩序)보다는 무질서(無秩序)를, 지혜보다는 허무와 불가지(不可知)를…… 현대인은 이같이 스스로 파탄을 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처럼 그리스도께서 멀리 떠난 시대도 없지만 한편 현대처럼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시대도 이제까지 없었습니다. 현대처럼 영원에 연계되어 있는 기쁨을 잃어버린 시대는 없고 현대처럼 평화를 부르짖고 있는 시대도 없습니다. 현대인이 이렇게 영원에 연계된 기쁨과 평화를 잃어버리게 된 중요한 원인은 참된 기쁨과 평화의 원천을 잃어버리고 물질과 황금이라는 우상을 받들고 있기 때문이라 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세계는 물질만능과 쾌락지상(快諾至上)의 사상으로 팽만하여 신(神)에 대한 경외심(敬畏心)은 점차로 감소일로(減少一路)를 걷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맘몬(돈)과 성(性)을 신격화(神格化)하려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이는 실로 「소돔」과「고모라」의 고사(古事)를 방불케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현대인은 물질문명의 진보 가운데서 기쁨을 구하고 마음을 빼앗기고 있어 참된 기쁨과 영원에 연계된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만큼 경제가 중시되고 과학이 놀라울 만큼 발달하고 정치기술이 진보된 시대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의 진보가 과연 얼마만큼이나 인간의 기쁨을 더해주었으며 깊게 해주었던가요? 오히려 얼마만큼이나 인간의 기쁨을 더해주었으며 깊게 해주었던가요? 오히려 이러한 진보의 이름으로 인간은 그 본질까지도 빼앗겨가고 있지는 아니한가요? 본질마저 빼앗기고 있다는 말은 인간가운데 있는 기쁨과 관련되어 있는 원천을 빼앗김을 뜻하는 것이니 우리는 참된 기쁨과 오락을 혼돈해서는 안됩니다. 현대에는 거짓 기쁨, 영원에 연결되어 있지 않는 허망하고 상품화된 속되고 악한 기쁨을 배급하고 그를 앞에 두고 울며 웃는 것이라 해도 과한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근대사상계(近代思想界)에 있어 마지막으로 나타난 반 그리스도론자 니체는 「예수는 인류를 무기력하게 했다. 죄는 아름답다.」「강폭(强暴)은 훌륭한 것이며 삶을 긍정하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고 떠들었고, 반그리스도의 진영은 그리스도를 제마음대로 처치해 버리려고 했지만 그리스도의 위치는 그 누구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체사르는 그 생전 예수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의 화제에 올랐고 플라톤은 그리스도보다 몇배나 학문을 가르쳤지만 오늘날 로마의 지배자나 그리스의 철학자에 대해서 말하며 충성을 바치고자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2천년전 역사에 나타난 그리스도는 한잘 것 없는 존재였습니다.

세상에 오실 때 그가 소유한 방 한칸마저 없이 말구유를 빌리지 않으면 안되었고, 마지막 그의 순간은 십자가란 형틀에서 조소와 증오의 대상이 되어 최후를 마친 그였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세기를 통해서 모든 인류가 그를 따름은 무슨 까닭입니까? 「예수」이는 구세주란 뜻입니다. 그는 인류를 죄악과 불행에서 구하는 사명을 띠고 왔기 때문입니다. 일개 인간으로는 인류의 구세주가 될 수 없기에 그는 인간의 능력을 훨씬 뛰어넘은 하느님의 아들로 태어났던 것이기에…….



「소크라테스」여! 당신이 오신다고 누가 예언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마호메트」여!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당신이 나실 곳, 그리고 당신의 업적에 대해 누가 예언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침묵을 지킬 따름입니다. 오로지 「그리스도」만이 그가 나실 곳, 때, 이름, 그와 어머니, 그리고 그분 생애의 모든 일, 그의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수백년 수천년 전부터 미리 예언되어 있었지 않았습니까.



과연 그이는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탄생하신 이, 또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서 탄생하시지 않았습니까.

과연 그이는 당신 자신을 스스로 우주의 창조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요? 그이는 우리들이 하느님의 아들 딸이 되게하기 위해서 천주로서 사람이 되셨고 우리들의 강한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약한 아기가 되셨습니다.



그이는 우리를 죄악의 노예상태에서 속량하시기 위해 죄인처럼 되셨고 참된 위대함을 깨닫게하기 위해서 작은 어린이가 되시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천부(天父)의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서 천주의 아들이 이국 땅을 밟으신 것이며 천국의 좌석을 우리들에게 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는 몸둘 곳도 없는 외양간 움막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천상의 즐거움이 이 지상「베들레헴」고을, 보잘 것 없는 촌락(村落) 한 지점(地點)을 찾아 고요한 밤에 접선(接線)하여 천상과 지상의 즐거움과의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천국이 가까워졌으니 우리는 즐거워 해야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진정 즐거워할 것뿐입니다. 참된 즐거움, 언제나 즐거운 생활은 「주안에」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누리는 즐거움만이 참된 즐거움입니다. 다른 모든 즐거움은 즐거움을 가상한 자학(自虐)의 세계입니다.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신 하느님의 생애!

현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다시 인식함으로써 기쁨과 평화의 원천을 찾아야 할 것이니 새로운 생명은 여기서부터 솟아오를 것이며 우리의 시대, 우리의 문명, 우리의 생활은 새로운 가치를 발견할 것입니다.

뜻깊고 은혜 많은 성탄축일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 좋은 축일을 교우답게 맞이하기 위하여 우리는 몇가지 준비만은 꼭 해두어야 하겠습니다.

그 첫째는 마음의 준비입니다.



우리는 지난 일년동안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우리는 지난 1년동안 그 하고많은 나날을 허송세월하며 참된 인생의 길과 교회의 가르침을 알면서도 굳이 외면하고 세속과 육신의 종이 되어 허망한 생활을 해왔던 것이 아니었던가요? 우리는 정말 교회 안의 봉사에 투철했으며 또한 사회 안에서의 사도직의 사명을 다했는가? 내 생활이 얼마나 속되었던가? 실존적 모든 괴로움을 잊어보려고 소란 속에 마취 속에 음요 속에 내 마음이 추악한 속물이 되고 말지 않았던가? 이 마음에 참으로 구세주가 임하시겠는가?



명동거리의 모든 화려함은 구세주의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성탄이 되면 공연히 거리에 나가 번화가는 골목마다 인산인해가 되고 소란과 무질서와 낭비로 타락과 죄악의 명절을 만들어 놓습니다.



구세주는 고요한 밤 자정을 그의 강탄의 시간으로 택하셨습니다.

소란한 「예루살렘」도성을 피하시고 만상이 잠든 고요한 자정, 추악함이 없는 촌락을 택하셨습니다. 성탄은 금력을 자랑하고 물질을 휘두르는 소위 상업주의가 노리는 그런 축제가 아니라 가난하면서도 평화로운, 겸손하고 착한 사람의 마음에 탄생하시는 것입니다.



캄캄한 밤에, 그러나 잠든 사람들에게 구세주가 찾아가시지 않으셨습니다. 성모님과 요셉과 목동들과 짐승들마저 깨어서 기다리는 사람들 앞에, 그들의 마음속에 구세주는 강탄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아기는 섣달 스무닷새날 차가운 겨울밤의 그의 강탄의 날로 택하셨습니다. 차가운 모든 추악한 것들도 그 부패를 정지시킵니다.



부패한 곳에 어찌 예수 아기를 뫼시겠습니까? 우리도 빨리 소란스럽고 부패한 생활을 버리고 구세주 예수 아기가 참으로 내 마음에 강림하실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합시다.

고백성사를 받음으로써 족한 것이 아닙니다. 「베들레헴」외딴 촌락에서 4천년동안 겸손하게 구세주를 기다리던 목동들처럼 다만 며칠이라도 마음을 닦고 조용하게 성탄을 기다립시다.









14.         대림 제1주일 <마르 13, 33―37>(나)  ꡒ하늘을 쪼개고 내려 오십시오ꡓ

                                                               심용섭 신부



헤어날 수 없는 어려움 속에 처해 있는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도움받기를 절실히 원한다. 고통이 심할수록 도움을 줄 수 있는 능력이 큰 사람에게 호소하게 된다. 그러다가 인간의 도움에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여길 때 인간보다 더 큰 힘을 가진 분을 찾게 마련이다.

이스라엘이 바빌론으로 귀양을 감으로써 민족․국가․종교․문화․제도 등, 한마디로 그들의 정체성 및 존립의 위기를 맞았을 때 그들은 극심한 무력감에 시달렸다.ꡒ우리의 정의라는 것조차도 더러운 옷같고 우리는 모두 나뭇잎처럼 시들었다ꡓ(이사 64,5)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며 기댈 곳이라고는 하느님뿐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도움을 청하기 전에 잘못에 대하여 반성하였다. 귀양을 가게 된 것은 처음부터 하느님께 반역하고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고 그분을 따르려고 마음을 가다듬지 않았기 때문(이사 64, 4―6)이라고 고백한다.

이 반성이 탁월한 것은 잘못의 결과로 마음이 굳어지고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게 됐다(이사 63,17)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데 있다. 여기에서 눈여겨볼 것은 자신의 양심에 어긋나게 행동했음을 뉘우치는 데 그치지 않고 하느님께 바른 예의를 지키지 않았다고 호소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죄와 그로 말미암은 결과는 너무나 철저한 것이어서 하느님의 손길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새기고 있다. 잘못을 저지른 게 하느님의 탓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약속한 응답을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끊어져버린 하느님과의 관계에 모든 문제가 걸려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파기하였기 때문에 벌어진 하느님과의 간격은 하느님의 외면(이사 64,6)과 방치(이사 63,17)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 외면과 방치는 하느님의 무자비를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은 약속한 것을 꼭 이행하시는 분임을 보여준다. 인간이 하느님께 반역하였는데도 약속을 어겼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를 없는 척하고 지나치면 믿을 수 없는 하느님일 것이다. 견디기 어려운 죄의 결과를 대면시켜 주심으로써, 역설적이긴 하지만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신뢰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게 하신다.



인간의 도움으로는 도무지 해결할 길이 없음을 안 이스라엘은 그들과의 약속 자체를 하느님께서 처음 제시하실 때 하느님의 정체성에 호소한다. 이스라엘과 약속을 제시하는 것 자체가 하느님다우심에 기인한 것이라고 믿고 그 사실을 하느님께 여쭙는다.

이스라엘이 약속을 저버렸기 때문에 그 결과를 보여주지 않을 수 없다할지라도, 그래서 어떤 인간의 힘으로도 극복할 수 없을 만큼 하느님과의 관계가 멀어질 수밖에 없다 할지라도 하느님이 하느님다우심을 포기하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

그 하느님다우심은 곧 ꡒ우리를 구원하시는 이ꡓ(이사 63,16), ꡒ우리의 아버지ꡓ(이사 63,16 : 64,7)이시며 ꡒ사람을 창조하셨다ꡓ(이사 64,7)는 데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약속 또는 계약을 맺으실 생각을 하셨다. 그리고 약속을 어겼을 때 그 결과가 참담할지라도 그것을 보여주시고 그 참담한 결과 속에서 다시 솟아오를 수 있게 하신다. 이것이 하느님의 자비이고 하느님다우심이다.



이스라엘의 귀양은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는 극복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느님의 개입을 간절히 원하였다. 그 기대와 원의가 하늘을 쪼개고 내려오시라는 기도를 드리게 하였다.

시작도 끝도 없어 보이고, 앞도 뒤도, 위도 아래도 구별되지 않는 하늘을 옷을 찢듯이(2열왕 5,8 : 예레 41,5) 쪼개시는 날은 세상이 뒤바뀌는 날이다. 결정적인 새로운 현실이 드러나는 날이다. 그 분이 세상에 내려오시면 그때까지 권력을 휘두르던 사람, 재력을 자랑삼던 사람, 지성을 뽐내던 사람은 물론, ꡒ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느냐ꡓ는 사람들이 쌓아놓은 가치, 문화, 제도 등도 재평가 받게된다. 하느님의 판단이 우선하는 날이다. 그러기에 이 날은 심판의 날이라고 한다.

하느님이 세상에 내려오시면 모든 것이 달라질 수밖에 없음을 모세의 변화(출애 3,1―6)에서 확실하게 볼 수 있다. 자신의 힘을 믿던 그가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하게 되었다. 하느님이 내려오셨기 때문이다.(출애 3,7) 이 하느님은 시나이 산에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셨다. 그러기 위해 내려오셨다.(출애 20, 9)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좋다고만 여기신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애정 때문에 이 곳에 내려오시고 함께 계시려고 하신다.



그러나 인간은 그분이 세상에 내려오시면 그때까지 전부라고 믿었던 것을 바꾸고 포기할 수밖에 없으므로 내려오시지 말고 하늘에서 편안히(?) 계시기를 바란다. 그리고 인간 세상에서 하느님의 흔적을 몰아내려고 한다. 물론 그 속에는 세상에 대한 주인행세를 하려는 목적이 있으므로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는 노력이나 고민은 있을 수 없다. 오직 무엇이든 마음대로 하고 추후에 하느님의 뜻이라고 미화하는 것이 상식으로 바뀐다. 하느님 행세를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대림 첫주 나해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얻은 언변이나 지식의 카리스마에 몰두하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을 경고하신다. 예수님께 대한 증거를 게을리 하지 않으면 그 분이 오셔야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이 완성되기 때문에 그분의 오심을 기다려야 한다. 인간은 날 때부터 악한 마음(창세 8, 21)을 지니고 있어 은총, 또는 결과만 ꡐ따먹고ꡑ 그것을 베푸시는 분은 외면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분은 이를 일깨워주신다.

예수님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는 것은 그릇된 신앙을 통회하고 반박하는 고백이다.

참된 변화를 희망하는 기도다. 이 기도에 맞게 늘 깨어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15.            대림 제1주일  <마르 13,33-37>(나)  회개로 준비하는 성탄





예수님의 탄생 2000주년을 경축하는 대희년이 목전에 다가 왔다. 금년 성탄전 전야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성 베드로 대성전의 성문을 여는 것으로 2000년 대희년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은 성탄절을 준비하는 대림시기가 시작되는 날이다. 이렇게 금년의 대림시기는 「주님의 특별한 은총을 담고있는」 2000년 대희년을 목전에 두고 맞이하기에, 여느 대림시기와 다르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금년의 대림시기는 성탄 대축일을 준비하면서 동시에 성탄전야에 개막되는 대희년의 막바지 준비를 함께 해야하는 시기이다. 성탄의 준비도 대희년의 준비도, 그 준비의 핵심은 회개에 있다. 마음의 진정한 회개 없이 맞는 성탄은 의미가 없듯이 진실한 참회의 정신으로 준비하지 않고 맞는 대희년은 의미가 없다.



  대희년은 기쁨의 축제이다. 우리는 대희년을 참된 기쁨 속에서 맞이하고 보내야 한다. 그러면 희년의 기쁨은 어디서 오는 기쁨인가? 그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기쁨이어야 한다.

  하느님만이 참된 기쁨을 지니신 유일한 분이시다. 하느님의 기쁨만이 완전하고 영원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만이 기쁨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충족시킬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헤아릴 길 업는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오직 우리의 행복만을 원하신다.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지고의 행복은 하느님의 기쁨을 누리는 데 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영원한 기쁨을 주기를 바라신다.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선의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그의 길을 동행하시며 당신의 기쁨으로 그의 마음을 채워 주신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느님을 떠나서 악의 길을 걷는 사람의 경우에는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을 버리고 떠나신다. 이렇게 하느님을 버림으로써 하느님의 기쁨을 상실하게된 사람의 마음은 찰나의 기쁨과 쾌락을 탐닉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악이 가져다 주는 달콤한 맛이다. 죄는 그것이 어떤 형태가 되었든지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만족을 주며 쾌락을 준다.



  악은 언제나 매혹적인 모습으로 사람의 시선을 끌고, 피상적이고 자극적인 쾌락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악은 맛보아서는 안되는 열매이다. 사람의 감각을 만족시키는 가면 뒤에는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치명적인 독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죄는 찰나의 기쁨을 맛보기 위해 하느님을 버리고 악을 선택하는것이다. 하느님을 버리면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잃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기쁨을 주는 모든 선을 한없이 완전하게 소유하고 계신 분이고,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가질 수 없는 존재이기 때

문이다. 세상에서 사람이 하는 행동 중에 죄를 범하는 행동만큼 어리석은 행동이 없다. –



  죄는 영원한 기쁨을 주시는 하느님을 버리고, 찰나의 순간에 지나가는 기쁨을 주는 악을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찰나의 기쁨을 맛본 대가는 사람을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하는 영혼의 타락이다. 죄로 인해 잃는 것이 무엇이고 얻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죄보다 인간을 더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들은 죄인들이다. 사람에게는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죄인의 처지에 머물러 있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이 없고, 죄를 용서 받는다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없다. ,



  우리가 죄를 용서받는 길은 회개하는 길 밖에 없다. 죄는 하느님을 버리고 악을 선택하는 것이고, 회개는 죄를 버리고 다시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아무리 큰 죄인일지라도 그 사람에게 용서를 베풀어주기만을 간절히 바라신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용서를 베푸실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인 회개를 애타게 기다리신다. 그리고 일단 진실하게 뉘우치는 마음을 보시면, 한없이 기뻐하시며 그 영혼을 찾아 오셔서, 죄를 용서하시고 당신의 기쁨을 돌려주신다. 이 때 하느님께서는 애타게 기다리던 자식을 다시 찾은 기쁨으로 감격하시고, 용서받은 죄인은 한없이 자비하신 아버지를 다시 찾은 기쁨으로 감격하게 된다.



  대희년이 진정할 기쁨의 축제가 되려면 진실한 회개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은 기쁨 속에서 대희년을 맞고 보내야한다.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기쁨이 흘러 넘치고, 땅에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입은 사람들의 기쁨이 흘러 넘칠 때 대희년은 참으로 기쁨의 축제가 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그 때가 언제 올지 모르니 조심해서 항상 깨어 있어라”고, 말씀하신다. 「그 때」는 세상을 심판하러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이다. 이 마지막 날이 언제 을 지 모른다는 주님의 경고는, 내일로 미루지 말고, 오늘 회개하라는 절박한 호소이다. 금년의 대림시기는 이 절박한 호소를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때이다. 











16.             대림 제1주일 마르 13,33-37 (나) 그리스도인의 삶

                                                        박성팔 신부



낡은 생활을 청산하고 그리스도로 무장하여 살아가자.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한 해의 마지막 달을 보내면서 또 한번의 대림절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덧없이 흐르는 세월속에 무척이나 바빴던 지난 날들을 돌이켜 볼 때 자기도 모르게 두 손이 모아지고 숙연해짐은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지 않은 신앙인이라면 더욱 괴롭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연중 전례가 새로이 시작되는 대림절을 맞이하여 과거의 신앙생활을 정리하고 새로운 신앙설계를 해야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감춰져 있지만 꺼지지 않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대림절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앞두고 구세주의 강생을 기다릴 뿐 아니라 세상종말에 영광스럽게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희망하면서 맞갖게 살아갈 것을 촉구하는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복음 말씀에 따라 크리스천의 신앙생활이 어떠해야 되는지 살펴봅시다.



언젠가 인생과 사랑 그리고 사업에 실패한 젊은 분이 실의에 빠져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하더군요. “자네는 무엇을 바라며 사느냐?”고 말입니다. 그 순간 나는 난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태도로 보아 예삿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삶에 회의를 느끼고 자살까지 시도했다는 그분의 말을 듣고 두려운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정말이지 그분에게는 어제의 우정도 사랑도 그리고 희망도 영원히 사라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렇게 절박한 상황인데도 나는 그분에게 용기를 잃지 말고, 희망을 갖고 하느님께 신뢰하며 살아야 한다는 평범한 얘기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나의 얘기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었음인지 그분은 수긍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합리적인 사고로 오늘을 사는 현대인은 그분과 같이 드러나지 않는 결과를 앞당겨 계산하고 마음대로 생각하여 좌절하는 경우가 많은 것같습니다. 사실 세상과 인간적인 것에만 희망을 건다면 쉽게 실망할 수밖에 없겠지만 말입니다. 만일 우리의 희망이 눈앞에 환히 드러나 보이고, 내 마음대로 계산되며 감춰져 있지 않다면 우리의 삶은 아무런 의욕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삶은 이미 희망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희망은 감춰져 있고, 꺼질 줄을 모릅니다. 그러기에 크리스천의 삶은 감춰져 있지만 희망으로 꽉 찬 삶입니다. 크리스천은 하느님께 빛을 받아 자신의 모든 행위 즉 신앙, 사랑, 희생 등을 통해서 천국을 완성해 나가며 세상에 희망을 주는 중개자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로서 영생의 표를 받은 우리의 삶은 물질의 풍요함과 육체의 쾌락에서 행복과 기쁨의 가치를 찾으려는 사람들의 삶과 달라야 되겠습니다. 물질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세상과 인간적인 것에만 희망을 걸고, 눈앞에 드러나 있는 것에만 관심이 있어 언젠가 자신이 이 세상에 있기를 그만두어야 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 자신의 죽음과 심판을 생각하면 두렵기에 아예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자기사업에 정신 없이 쫓아다닙니다. 그러다 보면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윤리적으로도 타락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이러한 생활은 희망에 꽉 찬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는 우리에게도 예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모든 이에게 재림의 때 심판의 때는 아버지 외에 아무도 모르니 늘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뜻하지 않은 죽음과 재난을 숫하게 경험해 왔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하느님을 원망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둑이 언제 올지 모르듯 완성될 하느님 나라도 언제 올지 모릅니다. 그날이 오면 땅을 치고 하느님을 원망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러니 늘 깨어 준비하고 주님의 아낌없는 채찍에 귀를 기울여 그리스도를 본받으며 살아갑시다. 우리는 주께서 오실 때까지 삭막한 세상에 사랑의 표적을 세우고 십자가의 비극을 극복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굳게 믿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심판기준은 세상과 이웃 형제에게 베푸는 사랑으로 측정되기 때문입니다. 즉 하느님을 얼마나 사랑했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구원의 때, 멸망의 때는 언제일지 모르나 분명히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연중전례가 새로이 시작되는 대림 첫 주일을 맞아 낡은 생활을 청산하고 그리스도로 무장하여 살아갑시다. 비록 살기가 어렵고 가혹할지라도 우리에겐 주님 오시는 그 날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용기를 냅시다. 그리하여 사랑으로 완성될 하느님 나라를 성실히 맞이합시다.

주 예수여 오소서 ! 아멘.









 17.             대림 제1주일  <마르 13,33-37>  (나)        대림의 의미

                                                        함세웅 신부



 금년도 한 달밖에 남지 않았읍니다. 이제 나머지 한 장의 달력이 금년을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1년을 12개월로 나누고 있는데 그 마지막 한 달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달력(교회력)은 1년을 대림 시기, 성탄 시기, 사순 시기, 부활 시기, 성신강림 시기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1년은 1월로서 시작되지만 교회력에 있어서는 대림절로부터 새해가 시작됩니다.

  

오늘은 대림 제 1주일입니다. 오늘로서 교회력으로서는 새해가 시작되는데 새해는 B해입니다. 따라서 오늘부터 우리는 미사 기도문도 B해의 것을 보게 됩니다.

  

대림절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교회는 성탄 전 네째 주일부터 대림절을 지냅니다. 대림절은 옛날 주께서 친히 이 세상에 오신 것을 기념할 뿐 아니라 또 우리에게 지금 이 자리에 오시는 주님의 현존하심을 뜻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장차 이 세상 마칠 때에 영광 중에 오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4천 년간 구세주 오실 것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렸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는 구세주 오심을 준비하는 역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상징적으로 4주간을 주님을 맞이할 준비 기간으로 정하고, 주님께서 가까이 오심을 기념합니다. 그러나 기념이라고 해서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다시 실현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사건들은 하느님께서 인간들과 만나셨던 사건입니다. 우리는 그 사건을 기념하는 전례를 거행하는 신앙 안에서 과거 그 사건 안에 나타났던, 그 사건의 본질적인 은총을 지금 받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은 전례를 통해서 과거에 인간들에게 당신의 마음을 열어 주셨던 주님을 오늘날에도 만나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앙인들이 전례를 통하여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과거에 세자 요한의 설교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보낸 사람들이나 예수님의 설교를 외면한 사람들이 몸으로만 그곳에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훌륭한 만남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외적인 상징을 통해서 내적으로 그 상징이 표시해 주는 은총을 주는 것을 성사라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를 구원의 성사라고 합니다. 우리는 대림절의 상징적인 4주간 동안의 전례를 통해서 실제로 내적으로 주님을 만나 뵙는 것입니다.


 대림절 전례의 골자는 하느님의 임하심을 갈망하는 고대(苦待)요, 희망이며, 기쁨이며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회개하라\’는 경고입니다. 대림절의 주제와 관련하여 대림절 전례에 등장하는 3대 인물은 이사야 예언자와 세례자 요한과 구세주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대림절 전례의 독서는 구세주를 고대하는 구절이 풍부히 들어 있는 이사야 예언서를 읽게 되는데, 메시아를 보내시리라는 믿음과 기대에 가득찬 이사야의 말씀은 오늘날에도 하느님을 갈망하는 신앙인들의 외침이어야 할 것입니다.


또 한 분의 인물 요한 세자는 요르단 강변을 무대로 곧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회개를 경고한 분입니다. 요한의 말씀은 \’참빛\’이신 예수님이 오신 지금에는 잊어 버려도 좋을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우리 각자가 필요한 준비를 하도록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오랜 옛날 어느 한 때에 일어나고 지나가 버린 사실이 아닙니다.

항상 적용되는 진실로 우리 귓전에 울려오고 있습니다. 요한이 설교한 회개가 예나 지금이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이며 하느님과 만나는 길임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신앙인들은 정신을 가다듬고 정신적으로 요르단강에 이르러 요한 세자의 경고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가 바로 대림절을 지내는 지금입니다.

우리는 대림절 2,3주일에 요한 세자의 설교를 듣게 됩니다. 대림 4주일에는 직접적인 준비로서 예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체험을 듣게 됩니다. 마리아는 메시아를 맞이하는 희열에 넘친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이사야, 세자 요한, 마리아 이 세 분은 한결같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구세주에게 우리의 주목을 끌어 줍니다. 그 분위기는 예언자의 괴로운 동경(憧憬)에서부터 젊은 어머니의 행복한 기다림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색조가 얽혀 있습니다.

고대와 경고, 희망의 색조가 조화된 대림절을 살아가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한가? 우리는 과연 구세주 오심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가? 어쩌면 우리는 구세주가 필요 없는 존재인양 의기양양하게 살아가는 자신에 넘친 현대인은 아닌지, 어쩌면 우리는 구세주 오심의 문제는 생각해 보지도 않는, 그러나 멋모르고 흥청대는 속세의 위인들의 명절인 크리스마스를 고대하는 무심한 신자들은 아닌지, 우리는 대림절에 구세주를 맞이하기 위해 모두 지난날을 뉘우치고 회개해야겠습니다.

  

우리 마음의 길이 굽었다면 곧게 해야겠고, 우리 마음이 울퉁불퉁 하다면 평탄하게 하여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해야겠습니다. 이기심이나 그릇된 욕망으로 가로막힌 길에, 죄로써 태어나간 길에 터널을 뚫고 다리를 놓아 주님이 오실 수 있게 준비해야겠습니다. 주님은 과거에 나신 것이 아니고 지금 이 자리에서 내게 오시고 계십니다.

또 주님은 분명 세상 마칠 때에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내게 오시는 주님을 영접할 준비를, 또 마지막 날에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는 주님만을 고대하고 주님만을 위해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 놓고 준비해야겠습니다.









 18.      대림 제1주일 (나해)   아, 하늘을 쪼개시고 내려 오십시오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이사 63,16b~17.19b; 64,3~7 (하늘을 쪼개시고 내려 오십시오) 

제2독서 Ⅰ고린 1,3~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실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복 음 마르 13,33~37 (집주인이 언제 올는지 모르니 깨어 있어라)



오늘부터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이제 우리는 마음의 옷깃을 여미고 주님께로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아주 진정으로 기다리십니다. 따라서 지난 1년의 삶을 반성하면서 돌아가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는 주님을 만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1독서에서는 유배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지난 잘못을 반성하면서 하느님의 새로운 사랑과 축복을 기원하는 일종의 탄원 기도문입니다. 기도문 자체가 매우 고상하면서 감동적이고 그리고 내용이 아주 풍부합니다.



\”아, 하늘을 쪼개시고 내려오십시오.\”



이스라엘의 애절한 그리움과 진실한 뉘우침이 그 기도문에 새겨 있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일어설 수 없다는 절실한 믿음은 하나의 아름다운 꽃입니다. 실로 하느님께 믿음과 희망을 갖는 자만이 진정한 행복을 얻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늘 깨어 있어라.\’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즉 그 때가 언제 올 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때가 무엇이냐?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주님이 찾아 오시는 때를 말합니다.



세상은 참으로 이상합니다. 사람들이 왜 사는지를 모르며 자기 인생이 어디로 가는지를 모릅니다. 그래도 거기엔 관심이 없이 그저 많이 벌어 잘살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10년, 20년 잘살고 나면 무엇이 남습니까? 그래서 잘먹고 나면 무엇이 남습니까? 허무밖에 없습니다. 눈물밖에 없습니다.



성찰을 통해서 자기 삶을 반성해 본다는 것은 물질적으로 잘 사는 것보다 훨씬 위대한 것입니다. 인생의 방향이 어딘 줄을 알고 올바르게 걸어가는 것은 백만장자가 되는 것보다 훨씬 훌륭한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때\’가 언제인 줄을 알고 미리 준비하는 것은 가장 지혜로운 일입니다.



미국으로 이민가는 어떤 형제가 부모님 산소를 지키지 못하고 그냥 떠나기가 죄스러워서 묘지기를 돈으로 사서 부탁해 놓고는 안심하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고생을 하면서 5년 만에 제법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부모님 산소 생각이 났으며 고마운 묘지기 아들도 미국으로 불러 교육을 시켜 주리라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불쑥 서울에 갔습니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그는 묘지기에게는 미리 연락을 못했습니다. 그냥 김포에서 내리자마자 산소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산소에 도착해 보니 부모님의 묘는 잡초로 아주 엉망이었습니다. 그렇게 부탁을 했고 그렇게 돈으로 베풀었건만 허사였습니다. 그는 대성통곡을 한 뒤에 묘지기에게 그랬습니다. “일 년에 서너 차례만 산소를 돌봤다면 당신에게 백 배 감사를 드렸을 것이다. 그런데 이게 뭐냐?\” 묘지기는 그 날로 집과 땅을 빼앗기고 쫓겨났습니다.



사람들은 너무 약삭빠르게 살려고 하다가 결국은 미련하게 사는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조금만 주의를 하고 우 리가 조금만 깨우치기만 한다면 아무 탈이 없이 오히려 큰 상을 받을 것인데 바보같이 살기 때문에 좋은 세상을 아주 망치는 불행을 만들게 됩니다.



진정으로 잘사는 것은 사업을 잘하고 병 없이 오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진실하게 자신을 성찰해서 잘못되었으면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게 행복입니다. 아무리 재산을 많이 모으고 아무리 권력이 하늘까지 올랐다 해도 자기 성찰을 모르고 자기 잘못을 고치지 못한다면 그는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 우리는 진흙이요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 코가 비뚤어졌다고 고백한다면 하느님께서 고쳐 주십니다. 우리 귀가 떨어졌다고 고백한다면 하느님께서 다시 붙여 주십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고작 잘못이지만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항상 새롭게 고쳐 주시는 사랑이십니다.



대림절은 은혜로운 시기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시기이며 또한 그분을 만나는 시기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선 우리보다 더 간절하게 기다리시며 우리보다 더 큰 애정으로 우리를 만나고자 하십니다. 따라서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고 주님 만날 채비를 하면서 그분을 기다립시다.       \”아, 하늘을 쪼개시고 내려오십시오.\”

19.             대림 제1주일 (나) 준비 됐나요?

                                                         김요안 신부



가을비가 을씨년스럽게 내리던 며칠 전 앨범을 보다가 한 사진에 시선이 쏠렸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가족 전체가 찍었던 사진이었다. 때는 추석 연휴였고, 극장에서는ꡐ빨간 마후라ꡑ가 상영되고 있었다. 가족사진 찍었던 그 날은 가족전체가 극장가기로 한날이었다. 영화를 보고 싶어서 내가 촐랑댔던 기억도 생생하다. 빨리 사진 찍고 극장 가자고 재촉했었다. 식구 중 한명이 늦었다. 난 벌써 대한뉴스도 다 끝났고, 본 영화가 시작하고 있다면서 거의 울먹이다시피 한 표정으로 사진에 찍혔다. 32년이 지나서 그 추억의 가족사진을 바라보니 부모님과 같은 모든 어르신들이 얼마나 가정을 위해 준비하고 또 자녀들이 잘 되기를 기다리면서 일생을 헌신했던가를 깊이 느끼고 감사하고 또 감사하게 되었다. 우리네 부모님들이 우리의 탄생을 고대하고 자녀들이 잘되기를 수십년 동안 기다리고 기다리면서 교육시키고 또 결혼도 시켜주고 거기에다가 상속까지 해주고, 도대체 이같은 부모님의 일생처럼 기다리고 준비하고 희생하는 여정을 다른 어디서 찾아볼 수 있단 말인가?!

  

교회 전례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대림시기는 우리에게 다시 오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가까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네 가운데 탄생하셨음을 기념하는 성탄대축일을 준비하는 시기이다. 우주만물의 아버지께서 오신다는 데 우리가 대환영하고 정성껏 모시려는 마음을 갖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세속에서도 고귀한 분이 방문을 한다면 조금도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는데 우리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 오신다는 데 우리들 생명까지도 기꺼이 내놓으려는 자세로 임해야 됨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부모님들은 자녀들을 위해 온힘을 다하여 준비하고 기다리면서 일생을 보내셨다. 다시 오시는 우리 주님께서도 못난 우리를 위해 당신 목숨까지 내놓으면서 구원을 이룩하시고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고 계신다. 아버지이신 주님의 기다림은 너무도 인내로우시다. 우리네 부모님들은 80평생정도를 기다리고 준비하시지만 생명의 주관자인 아버지 주님께서는 수천년을 기다려주고 계신다. 우리가 육신의 부모님께도 잘못하고 있는데  대림시기에 오시는 주님께 어찌하면 좋을지 두려움과 걱정이 앞선다. 육신의 부모님을 모시는 것에 소홀하고 또 고부간의 갈등도 계속 증가하고, 서로 부모님을 모시지 않으려는 경향도 많아지고 있는 마당에 어떻게 영신의 부모인 주님을 잘 모실 수 있을까. 눈에 보이는 육신의 일도 게을리 하고, 힘들어하는데 어떻게 영신의 일을 잘 준비할 수 있을 것인가?

  대림시기는 우리가 회개의 삶을 살아가므로 오실 주님께 드릴 선물을 준비하는 시기이다. 성탄판공성사가 시작된다. 나, 가족, 주변의 냉담교우, 모두 참회와 고백성사로 주님을 맞이 할 준비를 하자. 현세만을 생각하는 삶에서 후세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걱정하며 잘 준비하는 삶으로 바꾸어보자. 눈에 보이는 지상의 축복만을 원하는 삶에서 영원한 행복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며 사는 삶으로 바꾸어 보자. 주님, 부족한 저희를 용서해주시고 변화에 더딘 저희를, 일찍 깨우쳐 주시어 주님 안에서 항상 은혜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주소서. 아멘.

20.           대림 제1주일 (나) 시작과 기다림

                                               김석중․루도비꼬 신부



오늘 우리 교회는 대림 제1주일을 맞이하면서, 교회의 새로운 한 해, 즉 새로운 전례주년(전례력)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달력을 의미하는 전례주년은 일년의 시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업적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풀이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강림이라는 일련의 사건들을 역사적으로 시간 순서에 맞게 경건하게 기념하며 축하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지내고 있는 대림시기는 성탄 축제의 준비 기간으로 넓은 의미에서 보면 성탄시기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전히 보속과 단식의 시기인 사순시기와는 달리 기쁨과 즐거움의 시기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미사전례 안에서 이 대림시기에 주일의 성대함을 표현하는 대영광송(Gloria)을 생략하는 이유는 성탄 성야미사 때에 이ꡒ천사들의 노래(루가 2,14)ꡓ가 다시 한번 새롭게, 또한 장엄하게 울려 퍼지기 위한 교회의 배려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ꡒ대림(待臨)ꡓ이라는 말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린다는 우리 신앙인들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는 단어로서 교회 공식적인 용어인 라틴어의 ꡒ앋벤투스(Adventus)ꡓ의 한자어 번역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준비하면서 기다리는 시기인 대림시기는 미사 전례 안에서 두가지 내용을 표현하고 있는데,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던 성탄의 대축일을 준비하는 시기이며, 동시에 성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세상 끝날에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구체적으로 대림 제1주일부터 12월 16일까지의 미사전례의 기도문과 성서 봉독은 세상 끝 날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그 내용으로 하고, 12월 17일부터 12월 24일까지는 이미 인간으로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신자 여러분, 대림시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일어날 최후의 심판을 염두에 둔 두려움과 전율의 시간, 보속과 단식과 고행의 시간이 아니라 사람으로 오신 지난날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쁘게 기념하며, 동시에 약속하신 재림을 충실한 자각과 굳은 희망 속에서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왜냐하면 저녁이 되고 어둠이 깊어 갈 때에 불을 밝히듯이 세상이 어둠에 덮여 있을 때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빛을 밝혀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밝히는 대림초는 바로 세상 끝날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준비이며 또한 그분의 영원한 광명과 통치에 대한 그리움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오늘 미사전례의 입당송에 나오는 시편(시편24, 1~3)ꡒ주님, 제 영혼이 당신을 우러러 뵙나이다 …ꡓ의 내용처럼, 비록 우리는 현실적으로 때로는 고독과 절망, 위험과 곤경 중에 있을 때라도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생각하며, 그분께 신뢰하며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21.                   대림 제1주일(나)        

                                    늘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1. 소묵시록(마르 13장)

마르코 복음의 13장에서는 종말사상(終末思想)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소묵시록’(小黙示錄)이라 부릅니다. 이 13장은 전쟁의 발발이나 반그리스도의 출몰 등 세상의 역사가 끝나는 종말사건(14-23절)과, 인자(人者)가 영광에 싸여 천사를 이끌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종말사건(24-27절)이라는 두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말이 오기 전에 우선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야 하며(10절), 종말까지 박해를 참고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마침내 구원을 받는다는 것(13절), 이것이 마르코의 종말사상입니다.



2. 항상 깨어 기다려야 한다(33-37절)

마르코는 임박한 종말을 느끼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무화과나무의 비유(28-30절)를 들면서 시대의 징조를 잘 읽어 항상 깨어 있으라고 권고합니다(33-37절). 이것은 종말의 날과 시간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나 심지어 아들까지도 모르고 오직 하느님밖에 모른다는 것 때문입니다. 또한 마르코는 주인을 기다리는 문지기의 비유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의 원형은 깨어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의 비유(루가 12,35-40)와 같은 내용으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르코가 예수 재림에 관한 언급(26절) 다음에 이 비유를 말한 것

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께서 언제 재림하실지 알 수 없으니(35절) 예수 재림에 대비하여 늘 준비하고 깨어 있으라는 것을 충고하는 것입니다.



3. 우리의 이해

  묵시문학은 기원전 200년경부터 서기 200년경 사이에 이스라엘에서 생겨난 난세문학(亂世文學)으로 실의와 절망에 빠진 백성들에게 미래의 종말에 대한 희망만이라도 갖게 하려는 목적으로 생겨난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 신약성서 작가들 역시 묵시문학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종말의 날과 시, 도래의 장소, 구원받을 사람들의 숫자를 논하지 말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노력하라고(루가 13,24) 말씀하심으로써 묵시문학적인 호기심을 일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언제 재림하시든 간에 늘 깨어 그분의 가르침을 익히고 지키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대림절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 다시 태어나도록 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가는 것, 이것이 곧 깨어 대비하는 삶의 자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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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대림 제1주일(나)             꿈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더불어 우리 나라 최고의 역사서입니다.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一然, 1206-1289)은 경주에서 태어나 9세 때 출가했고, 83세 때 제자에게 북을 치게 하고 앉은 채 담소하다가 갑자기 입적했는데, 그가 남긴 저서 중 오늘날 남아 전하는 것은 삼국유사뿐입니다. 그 속에는 ‘조신(調信)의 꿈’이란 짤막한 설화가 있는데, 이광수가 ‘꿈’이란 제목으로 소설화해서 유명해졌고,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신라시절, 스님 조신이 장원(莊園)으로 파견되어 관리하고 있었는데 그는 태수의 딸을 좋아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미 그 여인에게는 배필이 있었습니다. 그가 법당 안에서 관음보살에게 그 여인과 함께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을 때 갑자기 여인이 들어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는 일찍부터 스님을 마음 속으로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조신은 기뻐하며 여인과 함께 40년을 숨어 살아갑니다. 자녀 다섯을 두었는데 가족들은 걸인처럼 살다가 15살인 큰 아이가 굶어 죽고, 두 내외는 늙고 병들어 10살 된 딸을 앞세워 구걸을 하며 먹고 살게 됩니다. 이에 부인이 말합니다.

“아름다운 모습도 풀 위에 이슬이요. 지초(芝草)와 같은 사랑의 약속도 바람에 흔들리는 버들가지와 같습니다. 이제 그대는 내가 있어 더 누가되며, 나 역시 그대 때문에 더 근심이 됩니다.” 그리고 나서 두 사람이 울면서 헤어지는 순간, 조신은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부부간의 40년의 세월이 불당(佛堂) 안에서 깜박 졸았던 하룻밤의 꿈인 것을 조신은 그제서야 깨달았던 것입니다.』

일연은 이 이야기 후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지금 모든 사람들이 속세의 즐거움만 알아 기뻐하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이것은 다만 하룻밤의 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주인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잠자고 있는 것을 보게 되면 큰일이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으라”(마태 14,36).

주님은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최후의 기도를 드리는 순간에도 잠들어 있던 베드로처럼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으며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마태 26,41)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삶은 너무나 지쳐서 깨어 있으려 해도 눈을 뜨고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리가 잠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항상 깨어 있는 방법을,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마태 26,41).

일찍이 성욕에 괴로워하던 프란치스코는 눈밭을 뒹굴고 나서, 눈으로 아내와 자식들의 눈사람을 만든 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것이 너의 아내고, 저것이 너의 아이들이다. 보아라, 그 가족들이 저처럼 녹아서 흔적도 없지 아니하냐.”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한낱 꿈에 지나지 않으며 한낱 눈으로 빚은 설인(雪人)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헛된 망상에서 일어나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처럼 항상 ‘기도’함으로써 늘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최인호 베드로/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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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대림 제 1주일 강론모음에 1개의 응답

  1. user#0 님의 말:

     

    대림 1주일


    아, 하늘을 쪼개고 내려오십시오

    제1독서 : 이사 63, 16b – 17 ; 64, 1. 3b – 8


    제2독서 : 1 고린 1, 3 – 9


    복   음 : 마르 13, 33 – 37


    대림절과 함께 전대미문의 ‘새로운’ 어떤 것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솟아오른다. 이 열망은 이 시기의 그레고리안 성가의 감동적인 격조를 통해서도 잘 반향되고 있다.

    그러나 이 전대미문의 ‘새로운’ 것은 이미 일어난 것으로서 우리가 그것과 재일치하고 또한 그것을 다시 체험하기 위해 과거를 향해 마음과 정신을 돌려야 할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일어날 것으로서 하느님께서 계획하시고 또한 우리의 열망과 원이에 의해서 그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모습을 드러내도록 작정되어 있는 것인지?

    이 ‘새로운’ 것은 오랜 세기에 걸쳐 그리스도의 현존이 확산되어 왔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것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성 이레네오는 “그분이 오신 뒤에는 우리가 기다려야 할 다른 어떤 새로운 것은 없다”라고 말했다.


    모든 역사가 ‘대림’이다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있어 모든 역사가 대림의 ‘연속’인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의 모든 기다림의 시간은 ‘대림’이다. 어떤 의미에서 성탄은 그러한 기다림을 끝맺게 한다. 대림시기의 전례는 우리가 구갹성서의 예언자들이 가졌던 괴로움과 간원과 원의로 충만된 자세로써, 또한 마리아가 지녔던 초조함과 부드러움, 섬세함과 모성적인 기다림의 태도로써 그 사건을 생활 속에서 재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좀더 구체적인 면에서 볼 때 대림시기는 우리를 최초의 예수 탄생의 신비를 살도록 이끌어주고 준비시켜주는 시기이며, 또한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의 구세주를 경배하기 위해 출생지인 베들레헴을 향해 가는 목자들과 동방박사들과 함께 여행하게 하는 시기이다.

    그렇듯 ‘대림’은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도 감동적인 사건을 반향하지만 우리를 과거의 사건에 대한 회상에만 머물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미래를 향해 가고 있으며 역사는 멈추지 않는다. 우리가 방금 말한 대로 ‘새로운’ 것이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한다면 그분 아닌 다른 무엇이 미래에 있어서 우리에게 새로운 것이 될 수 있겠는가? 사실, 그리스도는 첫번째 오심에서 끝난 것이 아니다. 즉 그분이 장차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어 그분의 영광스러운 왕국에 우리를 초대하실 때의 결정적인 오심이 있다. 전례에서 “우리는 당신의 오심을 기다리며 당신의 부활하심을 선포합니다”라고 외칠 때 우리의 갈망은 바로 이 결정적인 ‘대림’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 볼 때, 만일 우리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자비로운 심판을 은근히 예견하고 기대하면서 매순간순간에 복음의 본질을 생활화하지 않는다며, 우리는 이 결정적인 대림을 잘 준비할 수 없다. 대림을 잘 준비한다는 것은 그분의 진실에, 그분의 요청에, 그분의 부르심에 그리고 매순간 살아야 할 그분의 메시지에 대한 완전한 개방을 의미한다. 이렇게 할 경우 그리스도께서는 늘 우리의 생활 속에, 교회의 생활 속에 그리고 이 세상의 생활 속에 오시어 함께하시게 된다.




    그러므로 그분의 ‘도래’는 우리가 처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채워야 할 상황들이 항상 새롭고 다르다는 의미에서뿐 아니라 그분께 대한 윌의 사랑과 믿음의 증거가 항상 부족하여 우리의 매일매일의 현실에 그분께서 보다 깊이 참여하셔야 할 공간이 남아 있다는 의미에서도 늘 ‘새로운’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대림은, 대림의 근거를 밝혀주는 전례시기를 초월하여 우리 신앙구조의 본질적인 구성요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대림은 항상 계속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자신 안에 총괄하시는 분으로서 항상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또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13, 8)


    우리는 예전부터 당신을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라고 불러왔습니다


    오늘 전례의 기도내용과 독서를 통해서 크리스찬적 대림의 의미가 풍부하고 조화있게 표현되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봉헌 기도에는 “전능하시 천주여 당신 자녀들의 뜻을 굳게 하시어 이 세상에 오시는 그리스도를 착한 행위로 맞이하고 마침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 나라를 차지할 수 있게 하소서”라고 표현되어 있고, 영성체 후 기도에서는 그 동기가 잘 표현되고 있다 : “주여 비오니, 신비로운 미사성제를 거행하는 우릴로 하여금 잠시 지나가는 현세를 살아가면서도 지금부터 벌써 천상 것을 좋아하며 길이 머무를 것에 마음을 두게 하소서.”

    그리스도교 신자는 지금 성탄을 향해 가고 있지만, 보다 진정한 의미의 성탄은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통해 말씀하시는(마태 19, 28 – 29 참조) 결정적인(최후의) 재생을 기다리면서 모든 생활을 끊임없이 ‘재생’시켜 나가는 바로 그러한 것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587년의 성전파괴를 마지막으로 하는 이스라엘의 과거와 현재의 재난에 대해 묵상하는 이아야 예언자의 비탄에 찬 탄식을 그리고 있는 제1독서의 내용은 고통스럽지만(이사 63, 18 참조) 믿음의 자세로 하느님의 능력과 구원의 새로운 어떤 움직임의 기다림을 묘사하고 있다. 그분은 예전부터 자기 백성의 아버지, 곧 사랑의 선택을 통해 자기 백성을 이루신 바로 그분이 아니신가? 그분은 친척관계에서 비롯되는 권리와 의무를 통해 자기의 친지들에게 행해진 모욕을 갚아주시고 악한 자들과 억눌린 자들을 보호해 주셔야 할 바로 그 구원자가 아니신가?(이사 43, 14 참조)

    “당신, 야훼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예전부터 당신을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라고 불러왔습니다. 야훼여, 어찌하여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길을 떠나 헤메게 하셨습니까? 어찌하여 우리의 마음을 굳어지게 하시어 당신을 두려워할 줄도 모르게 만드셨습니까? 당신의 종들을 생각하시고 당신의 유산인 이 지파들을 생각하시고 돌아와 주십시오. 아, 하늘을 쪼개시고 내려오십시오. 산들이 당신 앞에서 덜 것입니다.”(이사 63, 16 – 17 ; 64, 1)

    마지막 표현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것은 아주 강렬한 기다림과 하느님의 새로운 개입이 야기시킬 놀라움과 경이의 의미를 말해주고 있다. 즉 삼라만상조차도 떨게 될 것이다. 그 놀라움은 무엇보다도 만일 하느님께서 개입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은 다른 그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구원될 수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불행은 다만 외적이고 정치적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 부정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우리의 탄식은 귀양살이의 첫 순간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그 때문에 바빌론의 왕 앞에서 국가의 몰락과 압박의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은 하느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불충실에 근거한다. 만일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고 마음의 차유를 얻지 못한다면 이스라엘은 계속 형벌에 짓눌리게 될 것이다. 그러한 이스라엘을 죄로보터 구원하여 새로운 마음을 되돌려줄 분은 오직 하느님 뿐이시다. 이사야 예언자가 주님의 권능과 자비에 의탁하여 비탄 속에서 기적적인 위대한 행위를 간청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당신께서 이렇듯이 화를 내신 것은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고 처음부터 당신께 반역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부정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기껏 잘했다는 것도 개짐처럼 더럽습니다. 우리는 모두 나뭇잎처럼 시들었고, 우리의 죄가 바람이 되어 우리를 휩쓸어갔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는 자도 없고 당신께 의지하려고 마음을 쓰는 자도 없습니다.

    당신께서 우리를 외면하시므로 우리는 각자 자기의죄에 깔려 스러져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야훼여, 당신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진흙, 당신은 우리를 빚으신 이, 우리는 모두 당신의 작품입니다.”(이사 64, 5b-8)

    이 상징적인 표현은 아주 효과적이며 때로는 너무 가혹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 근본적 사상은 인간의 내면을 가루처럼 분쇄하여 모든 저항의지를 제거시켜버리는 죄의 파괴적인 힘을 그리는 데 있다 : “우리의 죄가 바람이 되어 우리를 휩쓸어 갔습니다.”(6절).

    여기서, 하느님께서 개입하셔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그분 없이는 인간의 마음이 조금도 새롭게 변모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성벽이 재건된다 할지라도 사람들이 낡아빠진 옛 마음을 계속 지니고 있는 한 새로운 도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벌을 받아 다시 파괴될 것이다.

    ‘진흙’(8절)은 하느님께서 인간들을 내면으로부터 새롭게 하기 위해 인간들의 마음 속에 이루어 주셔야 할 재형성의 작업을 상징적으로 의미하고 있다. 그분의 목든 도래는 항상 변형시키는 역할을 한다. 즉 하느님은 역사 밖에서 그 역사를 그저 스쳐 지나서 통과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를 내면에서 새롭게 하고 발효시킴으로써 역사를 파악하고 변형시키기 위해 역사 안에 임하신다. 만일 예수의 탄생이 신화 속에서 이미 그 고대성이 신화화된 신적 존재의 위대한 공현에 불과할 뿐 모든 인간들을 쇄신시켜 그들에게 하느님의 게획에 다시 참여할 능력을 되돌려주기 위해 모든 인간들의 마음과 역사 안에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면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할 것이다.

    하느님은 오직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다. 즉 그분의 도래는 구원적이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성탄을 준비해야 한다. 즉 우리 모두는 성탄절에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는 표지가 되고 말 것이다.


    조심해서 항상 깨어 있어라


    제 1독서와 제 2독서는 주님의 도래가 갖는 종말론적 차원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이런 사실은 공관복음서의 다른 두 복음서에 비해 훨씬 짧게 다루고 있는 마르코복음의 소위 종말론적 대화의 결론부분을 포함하고 있는 복음구절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 종말론적 대화는 대체로 예루살렘의 파괴를 다루는 근본적인 방향을 유지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은 지금의 우리와는 무관한 문제들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앞 구절에서 “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마르 13, 32)는 내용을 상기시켜주신 후 ‘깨어 있음’에로 초대하신다. 즉 깨어 있음으로써만이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항상 준비하고 있을 수 있다.

    ‘그때가 언제 올는지 모르니 조심해서 항상 깨어 있어라. 그것은 마치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이 종들에게 자기 권한을 주며 각각 일을 맡기고 특히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한믄 것과 같다. 집주인이 돌아올 시간이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인지, 혹은 이른 아침일지 알 수 없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서 너희가 잠자고 있는 것을 보게 되면 큰일이다. 늘 깨어 있어라.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또한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33-37절).

    이 구절이 강조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깨어 있어야 할’ 의무에 대해서이다. 여기서 깨어 있음의 개념은 세 번(33,35,37절) 명령형으로 분명하게 표현되고 있고, 그 다음 한 번은 떠나면서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고 분부한’(34절) 집주인에 대한 짧은 비유에서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비유가 마태오복음에서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25,14-30)와 루가복음에 나오는 ‘금화의 비유’(19,12-27)에서 더 발전되었음은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마르코복음은 간결하면서도 더 예리하게 기다림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집주인의 돌아옴은 불확정적이어서 갑작스레 들어닥치리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네 번(저녁, 한밤중, 닭이 울 때, 이른 아침 등)에 걸쳐 깨어 기다림을 상기시키고 있다.

    주님의 오심을 불확실성에 근거한 ‘깨어 기다림’에 대한 비유로 제시함은 종말론적인 모든 대화에 실천적인 배경을 제시해주고 있다. 예수의 말씀들은 마르코가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제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종말에 관한 정보와 징표를 제시해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에게 정신을 차려 깨어 있어야 할 책임성 있는 태도를 가르쳐 터득케 하려는 것이다.

    책임성 있게 깨어 기다림은 환상적인 세계에 대한 망상에 사로잡혀 미래를 꿈꾸는 묵시적인 열광이하든지, 현실에 대한 무감각증이나 도피 등을 배제한다. 다시 말해서, 주님을 기다리는 그리스도교 신자 공동체의 종말론적 긴장은 유토피아에로의 도피나 경직된 현재 상황에 대항하는 비판적인 힘이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실 것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바울로 사도께서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의 내용은(제 2독서) 주님의 도래에 대한 기다림의 테마를 다시 취하면서 한층 더 명백하게 삶의 모든 순간에 확대적용하고 있다. 중님께서 실제로 오실 것이기에 나는 그분의 오심을 항상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순간순간이 그분께 대한 신뢰와 사랑을 드리는 만남의 시간이 되어 그분께서 고린토 공동체에 풍성히 베풀어주신 것처럼 모든 인간 각자에세 베풀어주신 은총의 선물들이 결실을 맺게 된다.

    “그리스도는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이 받은 하느님의 은총을 생각하면서 나는 언제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면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갖추게 되었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에 깊은 확신을 가졌으며 모든 은총의 선물을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받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거 다시 나타나실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주께서도 여러분이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으로 우리 주 에수 그리스도의 심판날을 맞이할 수 있도록 끝까지 굳게 지켜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진실하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부르셔서 당신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게 해주셨습니다.”(1 고린 1,4-9)

    우리가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으로 주님의 심판날을 맞이한다는 것은(8절 참조) 우리가 그분의 은총의 빛 안에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광된 왕국에서 겨합시켜줄 그 친교는(9절 참조)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즉 매일매일의 무수한 작은 ‘도래’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그 ‘위대한 마지막 도래’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2. user#0 님의 말:

     

    나해 대림 제 1주일 묵상

    깨어 있어라.

    1. 말씀읽기: 마르코 13,33-37

    2. 말씀연구

    신앙인은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만일 기다리지 않을 것이라면 기다린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그분께서 오시면 기다리지 않았던 사람들은 당황하게 될 것입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준비를 합니다.


    33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예수님께서 모르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으로서는 물론이지만 인간으로서도 심판 날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 모든 비밀을 밝혀 주셨습니다. 단지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과 그 시간을 알릴 사명을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날을 알려 주시지 않고 대신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34 그것은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의 경우와 같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한다.

     주인은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겼습니다. 주인은 종들이 자신들에게 맡겨진 일들을 성실하게 수행하기를 원합니다. 성실한 삶, 그 삶이 바로 깨어 있는 삶입니다.

     문지기는 그 집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 집을 지키는 이가 깨어 있어야 주인이 돌아오실 때 기쁘게 환영하며 문을 열어 드릴 수 있습니다.

    나는 내 삶의 문지기입니다. 내가 올바로 깨어 있어야 제때에 문을 열어 들여보낼 것은 들여보내고, 내 보낼 것은 내 보냅니다. 또한 나의 문을 활짝 열어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나 또한 내 삶의 문지기라는 것을 기억합시다. 또한 봉사를 하는 사람들도 문지기입니다. 그 문지기가 슬기롭고, 열정을 가지고 있어야 열어주고, 닫아주는 일을 성실하게 합니다.


    35 그러니 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주인은 깨어 있으라고 분부를 합니다.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말입니다. 그런데 각자 일이 있는데 어떻게 깨어 있으라는 말일까요? 들에 나가서 일을 하고, 집안일을 하고, 피로에 지쳐서 저녁에는 자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문지기만 깨어 있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주인은 전부 깨어 있을 것을 말씀하시는데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그 주인이 바로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종들은 바로 우리 신앙인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인이 깨어 있다는 것은 신앙인 답게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일을 할 때나 길을 갈 때나, 집에서 쉴 때나 친구를 만날 때도 신앙인은  신앙인으로 일을 하고 쉬고 만나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깨어있는 것입니다.


    36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

     주인이 갑자기 돌아왔을 때는 언제입니까?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지만 하루하루 미루고 있었다면, “그래 내일부터, 아니 모레부터 신앙생활 열심히 해야지…,”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오늘 오신다면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회개하지 못하고 갑자기 죽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 일이 없을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잠을 잔다는 것은 주어진 일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이 잠을 잔다는 것은 결국 신앙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주님 앞에 서게 된다면 결코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신앙인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며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을 기다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더디 오시겠지”라고 게으름을 피운다면, 그리고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거나 냉담을 한다면 주님께서 오셨을 때 당황하게 될 것입니다.


    37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

    예수님께서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으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깨어 있는 삶입니다. 모두가 깨어 있을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그러므로 내가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늘 말씀 안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주님께 귀 기울이며, 말씀 안에서 나를 성찰하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3. 나눔 및 묵상

    ① 나는 깨어 있는 신앙인 입니까? 잠을 자고 있는 신앙인입니까?


    ② 내가 지금 예수님의 다시오심을 기쁘게 맞이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요?



  3. user#0 님의 말:

     

    대림시기

    1. 대림절의 의미

    교회의 전례력은 예수님의 다시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시기를 시작으로 하여 성탄시기, 연중시기, 사순시기, 부활시기, 연중시기, 그리고 다시 대림시기로 이어집니다. 신앙인들은 이미 시작된 하느님나라에서 천국을 맛보며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다시오심으로 완성되는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전례력은 대림 첫 주일부터 12월 24일까지를 포함하는 4주간을 대림절로 정하고 있습니다. 태양력에 의해 예수 성탄 대축일인 12월 25일이 무슨 요일이 되느냐에 따라 대림절은 가장 빠르면 11월 27일부터, 가장 늦으면 12월 3일부터 시작됩니다. 대림(待臨)은 한자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 임하심을 기다린다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심을 기쁜 마음으로 깨어 기다리라고 대림시기의 전례 안에서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회 전례 안에서 대림시기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참회와 고행의 의미보다는 기쁨을 가지고 기다리는 시기인 대림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고, 예수님의 탄생을 맞이할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며, 예수님께 드릴 신앙의 선물을 준비하는 성탄의 준비기간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다시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임을 상기시키는 시기입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다시 오십니다. 그래서 대림환에 대림초를 꽃아 놓고, 시작도 없으시고 끝도 없으신 하느님께서 온 세상에 때가 되면 다시 오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성실하게 살아가며 깨어 기다리는 것입니다.


    2. 대림시기의 전례적 특징

    ① 대림초와 대림환

    대림시기 전례의 장식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대림환(待臨環)입니다. 대림환은 전나무 가지와 같은 푸른 나뭇가지를 둥글게 엮은 환에 4개의 초를 꽂아 만듭니다. 푸른 나뭇가지와 둥근 환은 생명과 공동체를 상징하며 4개의 초는 東․西․南․北, 곧 온 세상을 비추는 그리스도의 빛으로서,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를 나타냅니다. 이 대림초는 대림 제1주일에는 한 개의 초에, 2주일에는 두 개의 초에, 3주일에는 세 개의 초에, 마지막 4주일에는 네 개의 초에 모두 불을 밝힙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탄이 가까울수록 빛이 더욱 밝게 빛나, 그리스도의 탄생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③ 판공

    가톨릭 신앙인들은 부활과 성탄 때 판공성사를 보면서 부활과 성탄을 준비합니다. 특히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성탄판공은 중요합니다. 한 해를 정리하고, 되돌아보며 새로운 해를 준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탄판공 때는 집안 구석구석을 정리하면서 내일이면 이 모든 것들이 나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내가 다른 이들에게 남겨 두고서 떠나야 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리고 성탄을 맞이하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했을 때, 그 한 해를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선물로 생각하면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한해를 정리하고 새로운 한 해를 정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롭게 출발하는 것입니다. 버릴 것은 버려야 합니다. 버려야 하는데 “언젠가는 또 쓰겠지!”라고 생각하고서 끌어안고 있으면 집안은 엉망이 됩니다. 정리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기회가 바로 판공성사입니다. 성탄판공 준비를 잘 해서, 기쁘게 성탄을 맞이하고, 새롭게 한 해를 시작 했으면 좋겠습니다.


    3. 대림절의 삶

    전례력으로 새롭게 한 해가 시작된 이 시점에서 올 한해는 좀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깨어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지향을 두고 기도합시다. 그리고 내년 대림시기에 다시 한 해를 평가해보면 좀더 성숙된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 한 해 동안의 삶을 돌아보고

    – 내년도의 신앙생활을 기획하고

    – 나에게 신앙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 내가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중요하게 생각하지 못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고

    – 성경을 자주 읽는 내가 되겠다고

    –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겠다고

    필요한 것들을 결심하면서 기도합시다. 예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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