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연중제24주일 강론 모음

 

연중 제 24 주일




        1. 최기산 신부(가)/ 2                2. 강길웅 신부(가)/ 3


        3. 이병돈 신부(가)/ 5                4. 김창석 신부(가)/ 8


        5. 교구 주보(가)/ 9                  6. 최인호 작가(가)/ 11


        7. 용서는 선으로(가)/ 12             8. 무조건 용서(가)/ 14


        9. 용서는 가장(가)/ 15               10. 일곱번씩 일흔번(가)/ 17


        11. 애덕과 용서(가)/ 19              






1.         연중 제24주일   마태18,21-35 (가) 용서의 한계      


최기산 신부




용서한다는 것은 쉬운 것 같으나 만만치 않다. 특히 가까이 있는 사람을 용서하기란 쉽지 않다. 현재의 국제정세를 보더라도 가까이 있는 나라끼리 원수처럼 지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인도와 파키스탄, 중국과 대만, 러시아와 체첸, 미국과 쿠바, 우리의 남북이 그렇다. 또 겉으로는 안그런척 하면서도, 용서한 것 같으면서도 가슴깊이 새겨있는 우리와 일본과의 관계는 용서가 쉽지 않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가까이 있는 나라들이 서로 용서하기 쉽지 않은 것처럼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미움은 ꡐ용서ꡑ의 싹이 트기도 전에 질식시켜 버리기 일쑤다. 부부 사이의 마음이 용서로 치유되지 못한 채, 이혼법정에서 남남이 되는 경우가 점점 늘어만 가는 것을 보아도 용서란 참으로 어려운 우리의 과업임을 알 수 있다.




용서란 가능한 것인가? 결론부터 얘기하면 인간의 힘만으로는 가능치 않다. 내 부모를 죽인 사람, 내집을 망쳐놓은 사기꾼, 내 아내를 겁탈한 놈, 그런 인간들을 과연 인간의 힘으로 용서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하나의 도전으로 다가온다. 인간이 남을 용서한다는 것은 은총이다. 기적이다. 원수처럼 지내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용서할 마음이 생기는 것은 기적이다. 자기자식을 죽인 사람을 용서하고 그 사람을 자기자식으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은 기적이다.




용서를 위하여




ꡒ너희가 일어서서 기도할 때에 어떤 사람과 등진 일이 생각나거든 그를 용서하여라. 그래야만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실 것이다.ꡓ(마르 11,25)




ꡒ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ꡓ(마태 5,23) 위의 성서구절들에서, 기도나 미사 전에 우선 해야 할 것은 용서라고 강조한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으면서, 용서하지 않으면서 기도하고 미사를 봉헌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용서가 쉽게 될 수 있는가?




앞서도 언급했지만 용서란 쉽지 않다. 해를 끼친 사람의 상판만 보아도 구역질이 날 지경인데 어떻게 용서하란 말인가? 그의 발뒤꿈치만 보아도 오장이 소스라치며 손이 떨리는데 어찌 용서하란 말인가? 참으로 용서란 우리에게 큰 숙제중의 숙제다. 그러나 성서는 끊임없이 용서하라고 권한다. 원수까지도 용서하여 사랑하라고 명한다. 그러므로 남을 용서하긴 해야 하는데 나의 힘만으로는 부족하기에, 나의 결심만으로는 부족하기에 주님께 엎드려 기도해야 한다. ꡒ주님, 제가 용서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십시오. 은총을 주십시오.ꡓ예수님의 충고




베드로가 으스대며 7번 용서하면 어떻겠느냐고 나섰다. 유대인들에게는 남의 잘못을 3번 용서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있었으니 7번이면 대단한 자비를 베푼 셈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7번씩 70번 용서하라. 용서에는 한계가 없다는 말씀이다. 베드로는 머쓱해서 머리를 긁으며 되돌아갔을 것이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왜 한없이 남을 용서해야 하는 지를 설명하신다. 어떤 사람이 임금에게 1만 달란트 빚을 졌다. 우리돈으로 약 100억쯤 되는 어마어마한 돈이다. 그러나 그는 탕감받았다. 그런데 빚을 탕감받은 자는 100데나리온, 우리돈으로 약 1만원 정도의 돈을 빚진 자를 만나서 돈을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그는 정말 가난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많은 빚을 탕감받은 자가, 그 가난한 자의 돈을 탕감해주지 않고 감옥에 쳐넣는, 눈물도 피도 없는 짓을 하였다.




예수님은 우리가 죽을 죄에서 탕감받은 자 곧 1만 달란트 이상 탕감받은 자가 되었으니 우리에게 죄지은 자, 조금 빚진 자를 용서하라신다.복음의 메시지




내 자존심을 건드린 사람, 내 재물을 손해 보게 한 사람, 내 명예를 실추시킨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 주님의 기도에서 내가 내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한 만큼 내가 용서받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내가 용서한만큼만 용서받는다. 생각하면 할수록 기막힌 기도다. 나의 가슴 속 어디에 숨겨둔, 내가 아직 용서하지 못한 사람의 명단, 그의 인상을 찾아내어 용서해야 한다.




내가 남을 용서하지 않고 있는한 나의 가슴은 쓰리고, 나의 머리는 몽롱해진다. 그 결과 속병이 심해지고 간도, 심장도 나빠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용서하는 것은 나의 건강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내가 용서할 수 있는 것은 과감히 용서하고 내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은 주님께 간구하자. 그러나 정의와 용서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용서는 남이 나에게 잘못했을 때 하는 것이다. 남이 남에게 잘못하는 것을 보면서도 ꡐ용서해야지ꡑ를 외치는 것은 비겁하다. 바른말을 해주고 버릇을 고쳐주는 것이 사랑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다. 그러나 성전에서 민중의 피를 갉아먹는 사람들에게 분노하시며 채찍을 휘두르시고 환전상들의 좌판을 뒤엎어버리셨다. 정의와 용서는 그래서 구분되는 것이다.












2.      연중 제24주일   마태18,21-35 (가) 용서는 위대한 사랑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집회 27,30~28,7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 주어라.)


제2독서 로마 14,7~9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입니다) 


복 음 마태 18,21~35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평생 갚을 수 없는 용서를 받았습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도 이웃을 용서해 줘야 하는 빚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에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가 이미 받은 하느님의 용서도 언제나 유보된 채로 남아 있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성서의 내용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는 놀라운 지혜가 등장합니다.


옛날 유대인들은 많은 강대국들로부터 오랫동안 박해와 고난을 겪어 왔습니다. 그들은 실로 약소 민족이었으며 ‘동네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시 일어서고 재건하기 위해서는 먼저 압제자들을 용서해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다른 나라에서는 찾을 수 없는 지혜입니다. 실제로, 미움과 복수는 악순환만 계속 불러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유대인들도 용서로써 탁탁 털고 일어서기를 강조한 것입니다.




용서는 굴욕적인 것 같으나 위대한 것입니다. 용서는 또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참되게 용서할 수 있으며 크기가 좁쌀만도 못한 인생들은 평생을 걸어도 용서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용서와 우리의 용서에 대한 말씀이 비유로서 잘 나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왕에게 1만 달란트의 돈을 빚지게 되었습니다. 1만 달란트의 돈은 우리 돈으로 1조 원이 훨씬 넘는 돈으로서 서민들은 평생 벌어도 벌 수가 없고 평생 갚아도 갚을 수가 없는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그러나 왕은 그 사람의 불쌍한 처지를 생각하여 빚을 다 탕감해 줍니다. 왕은 바보처럼 한 푼도 건지지 않고 전액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용서입니다.




그런데 많은 돈을 탕감받은 사람은 나오다가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나자 그걸 탕감해 주지 못하고 무자비하게 감옥에 넣어 버립니다. 100데나리온은 지금 돈으로 2백만 원쯤 됩니다. 2백만 원이 큰 돈이긴 하지만 자기가 탕감받은 1조원 이상의 돈에 비하면 60만분의 일도 안되는 아주 작은 돈입니다. 다시 말해 눈꼽만한 잘못도 결코 잊지 않고 따져야만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용서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불행합니다. 남의 잘못 때문에 불행한 것이 아니라 용서를 못하는 자신의 옹졸함 때문에 불행합니다.




어떤 자매가 어렸을 때가 자기 계모한테 많은 구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머리도 좋고 아버지의 경제력도 좋아서 의대를 나와 의사가 되었습니다. 시집도 병원을 가진 의사 집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의사이면서도 자신의 얼굴에 돋아 있는 피부병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원인도 병명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성령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자신이 오랫동안 잊어 왔던 계모에 대한 잘못을 크게 뉘우치게 됩니다.


그리고는 병이 나아 버렸습니다.




학자들의 주장으로는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에서 두통, 불면증, 고혈압, 위장장애, 신경성 질환, 또는 정신질환 등이 생긴다고 합니다. 상식적으로도 그것은 맞는 말입니다. 가슴에 독한 쓰레기를 담고 있는 사람이 온전할 수는 없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그 더러운 것을 꺼내지 않으면 바로 그 찌꺼기 때문에 육신이 병들고 정신이 병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용서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죽어야 하는 처절한 아픔이 있습니다. 자기가 죽지 않고는 절대로 상대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죄많은 인간을 용서하시기 위해서는 당신이 직접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인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 번 죽어서 용서가 되면 그는 평생 자유로운 인생이 됩니다. 그러나 용서하지 못하면 그는 평생을 끌려 다니면서 천번 만번 죽어야 합니다. 그보다 더 비참한 인생도 없습니다. 미움은 세상 끝까지 인간을 따라다니며 괴롭힐 뿐만 아니라 저 세상에까지 따라가서 괴롭힙니다.




참 사랑은 용서에서 옵니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애긍을 많이 한다고 해도 그가 진정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고 있다면 그는 아직 사랑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가 아무리 어렵다 해도 우리가 마지막 심판 때에 하느님께 매달릴 자비와 용서에 비한다면 그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1조 원과 2백만 원의 차이보다도 더 큽니다.




인생은 아무리 잘못되었다 해도 용서받고 용서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썩은 찌꺼기를 깨끗이 씻고 다시 일어선다는 것은 매우 자랑스럽고 또한 아름다운 일입니다. 인생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며 지식으로 사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 때 그가 세상을 가장 지혜롭게 사는 것이 됩니다. 누가 여러분을 괴롭힙니까? 바로 그 사람을 사랑합시다.












3.       연중 제24주일   마태 18,21-35 (가) 무한히 용서하여라


                                                            이병돈 신부




모 본당에 외아들을 두고 있는 노부부가 있었습니다. 그 외아들은 3대 독자였으며, 노부부에게는 희망이요, 삶의 의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외아들은 과속으로 달리던 트럭에 목숨을 앗기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운전사의 잘못이었습니다. 잚은 혈기에 술 마시고 기분나는대로 차를 몰은 것이, 한 목숨을 앗아갔고, 한 부분의 삶의 의의를 빼앗아 가고 말았습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노부부에게 여러 위로의 말을 주었으며, 동시에 젊은 운전사에게는 저주와 욕설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노부부는 커다란 슬픔 중에도 오히려 젊은 운전사의 장래를 걱정하였고, 또 경찰과 법원에 운전사를 용서해 줄 것을 탄원하였으며 그 운전사를 자기의 아들로 삼는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운전사는 눈물로써 자기의 과오를 뉘우쳤고, 주위의 사람은 노부부의 크리스천적 사랑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교형 자매 여러분, 이 이야기는 용서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상하고 아름다운 것인가를 보여주는 예화입니다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 특히 원수를 용서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적인 신앙을 가지고서도 실천하기 힘든 것임을 체험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원수를 용서하라는 가르침은 완덕에 나아가려는 소수인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이가 지켜야 할 계명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타인을 용서해 주지 않을 때 어떤 결과가 올 것인가를 분명히 말씀해 주심으로써 용서의 중요성을 오늘 복음에서 강조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원수를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당시 상황으로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갚는 동태복수법이 성행하던 시대에 일곱 번 정도면 되지 않겠는가 생각했던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께서는 일곱번의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일곱번의 일흔 번은 글자 그대로 사백구십번이 아닌 무한히 용서하라는 내용입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무자비한 채무자의 비유를 들어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께 용서받을 희망이 없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께 우리가 용서받는 조건은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는 정신입니다. 용서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속에 증오심을 굳어 버리게 하는 것이며 증오심은 형제를 미워하는 격렬한 감정의 한 형태로서, 과격한 행위를 일으키며, 그 자체가 파괴적이며, 이런 증오심은 바로 사탄의 것입니다.


성 요한은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누구나 살인자”(1요한 3,15)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용서하는 것만큼 용서받기를 바라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당신들도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께서도 당신들에게 이같이 하실 것입니다.”(마태 18,35) 또한 그리스도는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길 빌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반대하고, 조롱하고, 모욕한 사람을 용서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 생활에서 실천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이 순전히 공상이 아닌, 우리 모두가 지켜야만 할 계명이기에 우리 모두는 힘껏 노력하는 수밖에 달리 길이 없습니다.




어느 본당에 한 젊은 청년이 자기의 명예를 더럽힌 자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기에 이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본당 신부님께 상담하러 왔었습니다. 그때 본당 신부님께서는 “당신도 타인에게 잘못하지 말고, 그리고 하느님께 앞으로 조그만 잘못도 저지르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다면 결코 그를 용서해 주지 않아도 좋다”라고 대답하시는 것을 듣고 청년은 깨닫고 돌아간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교형 자매 여러분! 우리는 흔히 남의 잘못을 찾아내고 남이 나에게 끼친 해에는 극도로 민감하나, 우리 자신이 타인에게 저지른 과오나 더 나아가 하느님께 매 순간 죄짓고 또 용서받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 것은 너무나 쉽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티는 잘 본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이웃과 하느님께 더 심각한 해를 끼쳤을지 모른다는 생각과 또 하느님께 용서받고 있다는 신앙으로 우리가 남에게 받은 피해를 용서해 주도록 노력합시다.




우리가 누군가에 피해를 받아 분노가 우리 마음을 휩싸고 있을 때에 화해하기를 힘써 노력합시다. 주님께서는 화해를 빨리 해야 할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십니다.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마태 5,24). 혹시 우리는 먼저 화해를 청하기보다는 화해를 청하여 온 우리의 형제를 저버린 일은 없습니까?




교형 자매 여러분, 그러나 이러한 용서와 화해는 순전히 인간적인 노력만으로 이룩될 수 없고 오히려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힘을 받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께 지은 죄를 용서하여 달라고 기도하고 또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잘못한 형제가 올바른 길로 돌아 올 것을 기도해야 합니다. 죄를 미워한 나머지 죄지은 사람까지 미워하여 하느님께 우리 자신이 또하나의 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교형 자매 여러분, 우리가 이웃을 용서할 때에 우리는 주님께 더 가까이 가는 것이고, 그분과 같아질 것이며, 더 순수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3,36).












4.            연중 제24주일   마태 18,21-35 (가) 위대한 용서


                                                            김창석 신부




얼마 전 우리 성당에 다니는 대학생 한 명이 등산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청량리 역 안에서 동료 대학생에게 피살된 사건이 있었다. 사소한 일로 다투다가 일어난 불의의 사고였다. 뜻밖에 아들을 잃은 부모와 가족의 슬픔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죽은 학생의 어머니는 창피한 줄도 모르고 사람들이 많은 길거리에서 뒹굴면서 통곡하였다. 가해자 학생은 즉시 수감되었다. 그러나 고의적인 살인이 아니었으므로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피해자 학생의 부모에게 가해자 학생을 용서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그 부탁을 받은 피해자의 부모가 용서할 마음이 생길 리가 없었다.




가해자 학생의 가족은 결국 나를 찾아왔다. 피해자의 가족이 우리 성당의 신도였기 때문에, 주임 신부인 나더러 그 부모를 설득해서 용서를 받아내도록 중개 역할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나서서 여러가지로 설득해 보았지만 피해자 학생의 부모는 쉽게 용서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 부모는 결국 나의 간청을 받아들였다. 피해자 학생의 아버지는 가해자 학생의 석방을 위한 합의서에 ‘나는 그 학생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한다’고 썼다. 이렇게 어려운 용서를 한 후에 아들을 잃은 그 가정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예기치 않았던 즐거운 평화가 그 집안에 찾아든 것이다. 근처에 가기도 싫던 죽은 아들의 방에 대한 무서움이 사라지고, 죽은 아들이 어딘가 집안에 살아있다는 느낌을 식구마다 가지게 되었다. 어려운 용서를 해낼 수 있었다는 기쁨이 식구마다의 마음에 가득했다. 이것은 분명히 놀라운 변화요 예기치 않았던 행복이었다.




그 부모는 죽은 아들 대신 가난한 대학생 한 사람을 골라서 학교를 마칠 때까지 장학금을 주기로 마음먹었다. 매월 그 학생에게 학비를 줄 때마다 그 부모는 죽은 아들이 살아있다는 기쁨과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죽음을 초월하는 부활의 힘인지도 모른다.


여수․순천 반란 사건 때 자기 아들을 죽이고 사형선고를 받은 공산당 청년을 용서해 달라고 간청해서, 아들로 삼은 어느 목사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서도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느님 아버지에게 청하였다. 형제의 잘못을 일곱 번 용서해 주면 되겠느냐는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는 대답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마태 18,21-22).




스페인의 어느 수도원 성당에 고해소가 있는데, 그 고해소 위에는 십자가가 걸려 있다. 그런데 그 십자가에 달린 예수상의 오른팔은 축 처져 있다.


안내하던 수사의 설명에 의하면, 오래 전에 그 고해소에서 어느 신자가 신부에게 죄의 고백을 했는데, 그 죄가 엄청나게 커서 그랬던지 신부가 그 신자의 죄를 사하는 것을 거절했다고 한다. 그때 그 위에 있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오른팔이 움직이며, 그 신자의 죄를 사하라는 뜻으로 십자가 표를 그었다고 한다. 그 이후부터 십자가에 달린 예수상의 오른팔이 축 처져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하느님은 우리 인간의 죄를 아주 쉽게 용서해 주시는데 비해 오히려 사람이 쉽게 용서를 안 한다는 것을 풍자해 주는 것같다.


<성경>에는 하느님이 얼마나 쉽게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는지를 말하는 구절들이 얼마든지 있다.


<지혜서> 12장 19절에는 ‘죄를 지으면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것을 가르치셔서 당신 자녀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셨다’는 말이 있다.


<로마서> 8장 26절에 사도 바오로는 말하기를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연약한’ 우리를 대신해서 ‘성령께서’는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 하였다.


<복음 성경>에는 간음하다가 들켜서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여자를 구해 주고 용서하는 예수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방탕한 생활로 가산을 탕진한 끝에 거지꼴이 되어 돌아온 둘째아들을 맨발로 뛰어나가 반갑게 맞아주는 아버지의 이야기 등, 하느님이 우리 죄많은 인간을 얼마나 쉽게 용서하시는지를 말해주는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남의 잘못이나 죄를 용서하는데 매우 인색하다. 하느님이 용서하시는데 사람이 용서하지 않는다니 말이 되는가? 부부끼리, 고부(姑婦)끼리, 식구끼리, 이웃끼리, 친구끼리 마음이 맞지 않을 때, 하느님은 상대방을 이미 용서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가 직접 만들었다는 <주의 기도>에는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라’는 기도의 내용이 있다. 이 말을 뒤집어 말하면 하느님이 용서하시는데 사람이 용서하지 않으면 말이 안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우리 주위에는 하느님을 따라 용서의 미덕을 보여준 사람들이 더러 있다. 서해의 외딴 섬에서 전도하던 어느 미국 신부는 자기 비서가 사무실에 있는 금품을 훔치는 것을 알고도 그냥 내버려두었다 한다. 도둑질하는 것을 지적하면 그 비서의 자존심이 상하고 그의 부인이 충격을 받게 될까 봐 가만히 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용서의 훌륭한 예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용서하는 것은 신적(神的)인 행위”라고 말했다. 우리가 남을 용서하는 것은 곧 하느님을 닮는다는 뜻이리라.












5.    연중 제24주일   마태18,21-35 (가) 용서의 체험을 통해서 서로 용서


(가) 교구 주보




오늘 복음의 주제는 ‘용서’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용서하고 또 용서받으며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마태오 복음을 통해서 다시 한번 하느님의 용서와 인간의 용서에 대해 생각해보자.




1. 끝없는 용서의 삶


사도 베드로는 예수께 잘못한 형제를 일곱 번 정도 용서해주면 되느냐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22절)고 말씀하셨다. 즉 잘못한 형제가 회개하면 끝없이 용서해주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무제한적 용서’의 가르침을 현실에서 실천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끝없는 용서는 고사하고 일곱 번, 아니 단 한 번의 용서도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나의 인격을 모독하고 상처주고 재산 손해를 끼친 사람들을 어떻게 무제한으로 용서할 수 있을까?


2. 무자비한 종의 비유


이런 의문을 가진 우리들에게 예수께서는 무자비한 종의 특례비유(特例比喩)를 말씀하셨다. 왕은 자기에게 엄청난 빚을 진 종의 처지를 가엾게 여겨 모든 빚을 탕감해주었다. 그런데 자유롭게 된 종은 자기에게 몇 푼 안되는 빚을 진 동료를 만나자 호통치고 감옥에 가두었다. 이 사실을 안 왕은 그 종을 불러들여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33절)라며 몹시 노하여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형리에게 넘겼다. 우리가 서로 용서해야 하는 까닭은 하느님으로부터 엄청난 용서를 받았기 때문이다(과거). 그처럼 큰 용서를 이미 받았으니 이제 교우들과 이웃의 작은 허물을 마땅히 용서해주어야 한다(현재). 만일 교우들이 서로 용서해주지 않으면 장차 종말에 엄청난 심판을 받을 것이다(미래).


3. 하느님의 용서, 우리의 용서


  어떻게 하면 우리들이 실생활에서 서로 용서하며 살 수 있을까? 그런 삶을 가꾸기 위해서는 먼저 개개인이 하느님 아버지의 용서를 깊이 체험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지금도 끊임없이 우리를 용서해주신다. 만일 우리가 잘못했을 때마다 하느님께서 심판하셨다면 그 누구도 생명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과 용서가 끝없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오늘날에도 이 같은 하느님의 용서는 교회 안에서, 특별히 고해성사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다. 일반적으로 용서란 잘못이나 죄를 꾸짖거나 벌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교에서 용서한다는 것에는 훨씬 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다시 당신의 소중한 자녀로 받아주심을 뜻한다. 우리가 용서한다는 것은 죄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죄지은 사람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를 다시 나의 형제자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용서는 사랑의 한 표현이며, 서로간의 용서를 통해서 가정과 교회, 사회와 세상의 모


든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












6.          연중 제24주일   마태18,21-35 (가) 용서의 전문가


최인호 베드로/작가




중세기 이탈리아의 화가 페루기니는 독실한 가톨릭 교우였습니다만 평소에 고해성사에 대해서 회의적(懷疑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벌을 받을까 두려워 고해성사를 보려는 생각이 드는 경우에는 아예 성사를 보지 않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다만 벌을 받을까봐 하는 고해성사는 하느님의 징벌을 막아주는 보증서로 전락되어 하느님의 자비보다 사제의 사죄(赦罪)를 더 신뢰하게 될 위험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임종을 맞게 되었을 때 그의 부인이 고해성사를 안 보고 죽는 것이 두렵지 않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페루기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보, 난 평생동안 그림을 그린 화가요. 내 전문은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고 제법 뛰어났었다고 자부하오. 하느님의 전문은 용서하시는 일인데 그 하느님께서 당신의 전문일을 잘 하신다면 내가 두려워할 까닭이 없지 않겠소.”


베드로가 “주님, 형제의 잘못을 일곱 번 용서해주면 되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주님께서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고 하신 말씀에는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 말씀을 ‘7×70=490’, 그러니까 490번 용서해야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웃의 잘못을 무한대로 용서하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주신 기도문에도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저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마태 6,12)라는 구절이 있습니다만 우리에게 잘못한 형제를 무한정 용서하는 것이 정말 가능한 일일까요? 아마도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가 남을 용서할 수는 없다’는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남을 용서한다는 것은 사랑의 행위인 것 같지만 실은 교만인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남을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남을 단죄할 수 없듯이 내가 남을 용서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 앞에서는 이미 ‘용서받은 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용서는 ‘내가 너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이미 용서받은 너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한다면 일곱 번도 용서할 수 없겠지만 그 형제가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존재임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수만 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친히 용서의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 “나는 너희를 용서한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34)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용서야말로 하느님이 하실 수 있는 일임을 분명히 가르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화가 페루기니의 말처럼 용서의 전문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웃이 이미 아버지로부터 용서받았으니 저희도 아버지의 용서를 배우게 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7.    연중 제24주일   마태18,21-35 (가) 용서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 길




타인으로부터 크나큰 은혜를 입었으면 남에게도 은혜를 베푸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 그 사람이 너무도 무자비하게 굴었으니, 그 광경을 본 다른 관리들이 도저히 보고 있을 수가 없어, 일어난 그 일을 왕에게 일러바쳤다.


그러자 왕은 그를 불러들여 “이 몹쓸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건만, 너는 네 동료에게 얼마 되지 않는 그 돈도 탕감해 주지 못하고 협박까지 하였도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여봐라, 저놈을 당장 감옥에 처넣어라”고 호통쳤을 것이다.


감옥에 갇힌 그 종은 빚진 액수로 보아 아마도 종신형을 받았을 것이고, 그의 가족은 모두 노비가 되었을 것이다.




   “일곱번씩 일흔번 “




  주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데 있다. 주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베드로가, 형제가 잘못하면 몇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주님께 질문한 부분이 나온다. 그는 셈족인들의 논리이자 사고방식에 따라 “일곱번까지 용서하면 되겠습니까?”라고 묻는다. 일곱은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성스럽고 완전한 숫자이다. 아마도 베드로는 일곱번도 힘들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유다교의 어떤 랍비는 하느님은 세번까지 용서하신다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느님의 용서방법을 본받아 세번까지 용서하면 최고로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주 예수님의 용서 방법은


달랐다. “일곱번이 아니라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이를 계산해 보면 490번이 된다. 이 말씀은 ‘언제나’ 용서하라는 뜻일 것이다,




  예로니모 성인은 이 부분을 “형제가 그 이상 죄를 범하지 않게 될 때까지 용서해주어야 한다”라고 해석하였다. 우리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우리가 하느님께 나아가 우리의 잘못을 진정으로 용서받고 싶다면, 우리의 이웃이 나에게 잘못한 것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어떤 때에는 경우와 정의를 앞세워 대화하고, 따지고 항의할 수도 있으나, 마지막에는 용서해 주어야 한다. 비록 그 사람이 나의 밥줄을 끊어버린 직장 상사라도, 인사 명령을 통해 나를 한직으로 보내도, 심지어 나를 국외로 추방해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할 일이자, 주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이다.




  어렵고 고통을 동반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렇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죽어 가시면서도, 당신을 박해하고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기꺼이 용서하셨기 때문이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지금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나이다.”


우리도 이런 주님을 본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 길은 영광으로 나아가는 부활의 길이리라.




  이런 신자가 있다. 매일 미사에 참례하여 영성체하고, 적어도 한 달에 한번 고해성사를 보고, 매일 묵주의 기도를 수십단 바치고, 사순절에는 금요일마다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하고, 레지오 마리애 단원으로 열심히 활동하는 할머니 신자다. 그 할머니는 누가 보더라도 훌륭한 신자이다. 그런데 그 할머니는 자기 며느리의 잘못을 절대로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


며느리의 실수로 삼대 독자인 손자가 교통사고를 당하여 죽었기 때문이다. 그 할머니는 성당에 다녀와서 집에 들어갈 때 며느리가 보이면 “이 죽일 년. 내 손자를 죽인 년, 집안의 대를 끊은 년—“하면서 며느리를 호되게 욕하곤 한다. 절대로 용서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안 된다고 신자들이 말해도 막무가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며느리를 용서 못하겠다고 한다. 본당신부가 부드럽게 충고를 해도 듣지 않는다. 매일 주님의 기도를 수없이 바치고, 매일 미사에 참례하여 성체를 영하면서 말이다. 이처럼 용서는 어려운 것이다.




   참으로 하기 힘든 용서




  용서와 함께 할 수 없는 것에는 복수가 있다. 이는 자기에게 해를 입힌 사람에게 원한을 갚기 위하여 해를 주는 행위다. 복수가 자기 보존의 유효한 수단이라는 사고 방식도 있다. 역사이래 부족과 부족, 나라와 나라, 개인과 개인 사이에 얼마나 큰 복수가 자행되어 왔는가? 구약시대 모세 율법의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복수동태법은, 무제한 보복을 바로잡아 일대일의 보복을 그치도록 제한한 것으로서, 황야지역에서 지켜져야 할 사회정의의 표현이었다(레위 24,17-21).




  그러나 주 예수님은 복수동태법을 폐지하시고 제자들에게 원수까지도 용서하도록 가르치심으로써, 복수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악을 선으로 갚도록 하셨고, 사도 성 바오로 역시 선으로써 악을 이기도록 가르쳤다.












8.     연중 제24주일   마태18,21-35 (가) 무조건 용서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은,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시인하면서 용서를 청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모두 용서해 주신다. 성서에서 드러나는 대표적인 예는 루가 복음사가가 전하는 탕자의 비유(15장)다. 둘째 아들은 자유와 독립, 그리고 자기 실현을 위하여 아버지의 집을 떠난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해방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제까지 억눌려왔던 모든 굴레에서 스스로 해방되었다고 느끼면서,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해보고 마음가는 대로 놀아보았다. 그러나 결국 자기에게 돌아온 것은 파산, 비참, 그리고 좌절뿐이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난 결과가 그렇게 드러난 것이다. 그는 하느님을 떠나 자기의 원의에 따라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뿐 아니라, 죄를 지어 방황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다행히도 그는 자포자기하지 많고 사랑이신 하느님께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살아 돌아온 것만도 장하다” 그 아버지는 한없이 아들을 기다렸다. 아들의 잘못을 보지 않고, 살아 돌아오기만을 기다린 것이다.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본 아버지는, 사랑으로 아


들을 감싸안는다, 아버지는 “네가 왜, 이런 몹쓸 짓을 했느냐?”하거나 “이 죽일 놈아, 썩 나가거라”고 호통치지도 않는다, “이놈아, 네가 죽은 줄 알았더니 죽지 알고 살아 돌아온 것만도 장하다. “무조건 용서하시는 그 아버지는 바로 사랑이신 하느님이시다.” 어서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 잡아라. 먹고 즐기자!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 이것이 자기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태도다.




  잘못을 징벌하지 않으시고 뉘우치는 사람을 무조건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이런 식으로 드러난다. 한편 동생의 비행을 못 참는 형은 옹졸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아버지는 큰아들도 너그럽게 수용한다. 역시 사랑이신 하느님의 관대함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성서에 나오는 하느님은 “자애롭고 자비로우시며 화를 참으시고 사랑이 지극하신”(시편 145,8)분이다. 또 그분은 “비록 어미는 혹시(자기가 낳은 아이를)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하노라”(이사 49,15)고 말씀하시는 분이다, 이런 하느님을 시편에서는 이렇게 노래한다. “주님께서는 자애롭고 불쌍히 여기시며, 역정에 더디시고, 사랑이 지극하시오이다. 주님께서는 온갖 것을 선으로 대하시고 일체의 조물들을 어여삐 여기시나이다. 넘어지는 이는 누구라도 붙들어주시고 억눌린 사람이면 일으켜주시나이다”(시편 145).




  이런 내용을 잘 아는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잘못을 솔직히 시인하면서 하느님께 나아가 용서를 청한다. 작은 죄는 뉘우침이나 고해성사로, 큰 죄는 고해성사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는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사랑이신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며 희망을 가지고 살아간다.




     무자비한 종의 비유




  그런데 우리는 각자의 잘못은 하느님께 말씀드리고 용서를 청하지만, 이웃 사람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너그럽지, 못할 때가 있다. 바로 이것이 문제다, 이런 주제와 연관된 비유 중에서 가1장 대표적인 것은, 복음사가 마태오가 전하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18장)다. 이 내용을 모르는 이들은 꼭 읽어보기


바란다. 줄거리는 대충 이러하다.




  옛날에 어떤 왕(또는 대지주)에게 ‘1만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있었다. 달란트는 로마제


국에서 사용되던 금화로서 1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이고, 1데나리온은 그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다, 참고로 요세푸스 플라비우스라는 장군이 기록한 ‘유대고사’에 따르면 그 당시 유다와 사마리아를 통치하던 헤로데 아르켈라오 임금의 연수입은 600달란트, 갈릴래아와 베레아를 통치하던 혜로데


안티파스 임금의 연수입은 270달란트, 이두레아와 트라코니티스를 다스린 헤로데 필립보의 연수입은 100달란트였다. 그러니 1만달란트나 되는 돈은 너무나 엄청난 액수라,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금액이다. 요즘 우리 식으로 계산하여, 하루 일당을 5만원이라 하면 1달란트는 3억원이? 1만달란트는 3조원이 될 것이다. 하루에 10만원 버는 사람을 기준으로 하면 6조원이나 된다.




  이렇게 엄청난 돈을 빚진 사람이 도저히 갚을 길이 없자, 그를 가엾게 여긴 왕은 그 빚을 모두 탕감하여 주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그는 너무 기분이 좋아 하늘에라도 오를 것 같은 심정으로 집으로 돌아가다가 자기에게 단지 100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났다. 그는 빛을 갚으라고 호통을 쳤다. 그 동료는 시간을 좀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동료의 사정을 들어주기는커녕 골탕을 먹이고는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버렸다. 이런 몹쓸 짓이 어디 있겠는가?












9.         연중 제24주일   마태18,21-35 (가) 용서는 가장 큰사랑의 표본




  얼마 전 어느 텔레비젼 프로그램에서 한 부인이 자신의 어머니를 찾는 장면을 보았다. 그 부인은 어릴 때 어머니가 자신을 버려서 고아원에서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가정에 입양되어 살았는데 새 어머니와의 불화로 스무살이 되기 전에 집에서 가출하고 말았다. 낳아주고 길러준 두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이 불쌍한 여인은 세상의 온갖 고생을 겪으며 마음속으로는 두 어머니, 특히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를 증오하며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지금의 착하고 부지런한 남편을 만나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도 낳게 되었다. 세상에 태어나 사랑을 처음으로 맛보고 행복한 삶을 살게된 것이다. 그리고 남편을 따라 성당도 나가게 되었다. 신자생활을 하면서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두 어머니에 대한 미움이었다. 어느 날 용기를 내어 길러주신 어머니를 찾아가 용서를 청하고 또한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와도 화해를 하고 싶어 방송 프로그램에 나오게 되었다고 했다. 그 여인의 절규와 오열하는 모습이 보는 이의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용서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 용서의 가르침은 율법을 초월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용서의 은총을 입은 사람이 다른 이를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용서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 사랑의 표지이다. 하느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은 겸손되이 다른 이의 잘못을 용서해주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께 받은 용서는 빛이다. 그 빚은 다른 사람에게 갚아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는 심판과 경고의 의미를 지닌다. 임금으로부터 일만 달란트나 빛을 탕감받은 종이 풀려나서는 백 데나리온 빛을 진 동료를 감옥에 처넣는다. 그 사실을 전해들은 임금은 몹시 노하여 무자비한 종을 형리에 넘긴다.


마지막날 모든 것을 분명하게 셈하시는 분은 인간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시다. 은총을 잘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 용서를 받고 다른 이를 용서해주지 못하는 편협한 사람,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사는 이기적 사람들은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용서는 하느님의 은총




  인간이 할 수 있는 행동 중에 가장 어려운 것이 용서가 아닐까! 특히 나에게 상처를 주고, 손해를 끼치고, 고통을 안겨준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나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준 사람에게 똑같이 복수하고 싶은 심정은 누구나 같을 것이다. 또한 그것이 인간적으로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신다. 「용서하라, 무한히 용서하라‥‥ 」 어쩌면 용서하라는 것은 사랑하기보다 훨씬 더 어렵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의 표현은 바로 용서에 있다.


  내가 다른 이를 절대로 용서하지 못한다고 생각이 들 때 우선 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과연 나는 다른 이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와 고통을 주고 살았는가?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또한 내 주위에 많은 사람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혔는지를 솔직하게 반성해야 한다.




  사랑의 계명은 한 마디로 용서하는 것이다. 용서는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다. 내가 나에게 잘못한 이를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내 능력이 아니라, 내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능력의 결과이다. 나는 잘못이 없지만, 동정과 사랑으로 내가 너를 용서한다는 마음을 지닌다면 그것은 교만한 생각이다.




  용서는 단순히 잊어버리거나, 상처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이 나에게 베푸신 지극한 사랑을 기억하며, 그 사랑의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또한 나와 너, 우리 모두 약하고 죄 많은 인간임을 겸손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용서할 수 없을 때도 많다. 그러므로 용서의 기도를 바쳐야 한다. 또한 하느님은 내가 용서하려고 노력하고 애쓰는 바로 그 마음을 가상히 여기실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형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와 용기가 생겨난다.




  내가 화해하지 못하고 미움과 증오에 사로잡혀 주님 대전에 나가 제물을 바쳐도 그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주님께서 진정으로 바라는 마음의 제물이 무엇인가?












10.     연중 제24주일   마태18,21-35 (가)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라




무자비한 종의 비유 




준비기도를 드린 후 마태오복음 18,21-35을 한두 번 읽는다. 내용은 이러하다. 형제가 죄를 지을 때 용서하라는 가르침을 듣고 있던 베드로의 머리에는 하나의 의문이 떠올랐다.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이것은 셈족의 논법이자 사고방식이다.




베드로는 유다인들에게 성스럽고 완전한 수(數)인 일곱을 내세워 일곱번 용서하면 되느냐고 물어본다. 그는 아마도 일곱 번만 용서하는 것도, 매우 힘든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유다인들의 스승인 랍비들은 세 번만 용서하면 족하다고 가르쳤다, 주님은 “일곱 번 뿐아니라 일곱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라고 하신다. 계산을 해보면 490번이다. 아마도 이 숫자는 상징적일 것이다. 이는 형제가 죄를 범할 때마다 언제나 용서하라는 가르침이다.




용서받은 종의 혹독한 처사




  그리고 이어서 하늘 나라에 관한 비유가 등장한다. 우선 화폐의 가치를 알아보자. 1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이며, 1데나리온은 그당시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이다. 그러면 1만 달란트는 얼마나 될까? 노동자의 하루 품삯도 사람에 따라 다르니 계산하기 나름이다, 시골에서 남자들의 하루 품삯은 추수할 때 5만원 정도이며, 여자들은 그 반을 받는다. 5만원으로 계산해 보면 3조원이나 된다. 어마어마한 돈이다,




이만한 돈을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나와, 가족과 재산의 모든 것을 다 팔아 빛을 갚으라고 하니, 그는 사정을 말하고 애걸복걸하였다. 구약 율법에는 물건을 훔친자가 그것을 갚지 못할 때는, 그를 팔 수 있었다.(출애 22,2) 빈털터리도 팔려갈 수 있었다. (레위 25,39)


그러므로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이라면, 그 채무자를 팔아도 무방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비 지극한 임금은 사정을 다 듣고는,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밖으로 나가다가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만나자 멱살을 잡고는 빚을


갚으라고 호통을 쳤다. 이는 지위가 낮은 사람들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사소한 일이다. 그 사람이 사정을 하자 그는 용서해주기는커녕,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이 일을 지켜본 다른 동료가 그 혹독한 처사에 분개하여 그 사실을 왕에게 일러바쳤다.


그 말을 들은 임금은 대노하여, 그 잔인한 사람을 불러들여 그의 비인도적이고 무자비한 처사에 대하여 야단을 치고는, 빚을 다 갚을 때까지 형리에게 넘겨 감옥살이를 하게 하였다.




  오늘 묵상의 주제는 용서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용서를 받는 것처럼 우리도 남을 용서해야 하며, 만일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주님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이다. 이것이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내용이 아닌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가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모두 죄인임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나약하기 때문에 세례를 받은 다음에도 자주 실수하고 죄를 범하므로, 매일 용서를 받아야 한다. ‘비는 데는 무쇠도 녹는다’라는 말처럼 우리는 수시로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도록 대자대비하신 주님께 청해야 한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이웃 사람들의 잘못까지도 용서해주어야 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원수가 나를 싫어하여 공격해와도 그 사람을 끝까지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것이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태도이다,


영원을 향한 인생 여정에서 우리는 별 이상한 일을 당할 때가 있다. 사소한 일로 가까운 사람들끼리 문제가 생기는가하면, 오해와 모함을 사는 경우도 있고, 직장에서 윗사람들로부터 압력을 받을 때도 있다.




그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상관없이 우리는 무조건 그들을 용서해주어야 한다. 어떤 경우에 용서는 바보스럽고, 누가 보든지 당하는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는 용서해야 한다. 더구나 복수하지 말아야 한다. 복수가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하실 것이다. 우리는 악을 선으로 이겨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이다. 그분이 그렇게 사셨으니 우리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면서도 당신을 못박는 사람들을 용서해 주시도록 아버지 하느님께 청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34)












11.           연중 제24주일   마태 18,21-35 (가) 애덕과 용서




성교회의 달력의 연말에 접어든 시절의 복음 성경은 최후의 심판과  그리스도의 재림(再臨)을 강조하는 대목들입니다. 오늘 복음 성경이 심판의 특별한 면을 강조한 것을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즉 애덕과 용서의 면입니다.




오늘 비유의 교훈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몇 백만원을 빚진 사람이 그 주인으로부터 그 빚을 면제받았는데, 그는 자기 동료가 자기에게 백원 빚진 것을 벌어서 갚겠으니 좀 참아달라는 것을 거절하였습니다. 그 사악한 종은 크나큰 자비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소한 자비를 베풀기를 거절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비열한 짓을 하고 무사할 리가 없었습니다. 이 사실을 그의 동료에 의해서 보고되었고 그 결과 주인한테 처벌을 받았습니다.




“이 악한 신하야, 네가 빌기에 네 모든 빚을 면제해 주었으니, 내가 네게 자비를 베풀었듯이, 너도 마땅히 네 동료 신하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겠느냐?” 우리 주께서는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십니다. “만일 여러분이 누구나 제 형제를 진심으로 용서해 주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여러분에게 이와같이 하실 것입니다.”




이 말씀이 마음에 찔리지 않는 한 그 악한 종을 멸시하려들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 내가 바로 그 악한 종입니다. 그가 한 짓을 나는 거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우리의 서로간의 관계, 따라서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의 핵심을 찌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자주 우리의 죄악, 우리의 빚을 면제해 주셨습니까? 고백의 성사를 몇번이나 받았는지 헤아려 보십시오, 하느님께 빚을 진 큰 죄의 수효를 헤아려 보십시오. 몇 백만이 아니라 몇 억이 될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간청하는 까닭에 우리를 거듭거듭 용서해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이가 우리의 감정을 손상시켰다거나, 우리를 약간 낮추 대하였다거나 또는 자칭 생각하는 자기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경우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합니까? 용서하기는커녕 앙갚음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행동은 저 악한 종의 행동보다 더 경멸을 당해야 마땅합니다. 돈을 빚진다는 것과 지존하신 하느님을 거슬러 범죄한다는 것과는 결코 비교될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저 악한 종은 단지 한번만 용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한테 항상 용서를 받으면서도, 너무나 자주 남을 용서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중대한 사실입니다. 이것은 현세에서 뿐 아니라 내세에서의 행복의 관건이 되는 문제입니다. 우리 교우들간에는 육신의 죄악만이 참으로 중대한 죄악이라고 여기는 불행한 정신 태도가 있습니다. 애덕을 거스른 죄는 거의 죄로도 여기지 않습니다. 소설가들은 이러한 신자들의 참담한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대단히 열심하고 꼿꼿하며, 순결하고 교회 유지를 위해 경제적 뒷받침을 잘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는 냉정하고 뒤를 헐뜯거나 중상 비방하거나 자기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박해하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그러한 교우들을 묘사한 소설이 적지 않습니다.




남을 용서해 주지 않는 것은 불순결한 죄처럼 우리 본성의 나약함의 표가 아닙니다. 이것은 고의적인 것입니다. 감정이 상했다거나 교만이 손상되었다고 느낀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용서해 주시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성숙한 어른이 아직 되지 못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행동은 우리 영혼의 구원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이 비유에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 이웃에 대해 용서해 주지 않는 태도는, 현세에서는 우리의 정신의 평화를 점차로 파괴하고, 영원한 세상에서의 하느님과의 일치 생명을 파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애덕을 배우지 않는 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즉 “만일 여러분이 누구나 제 형제를 진심으로 용서해 주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여러분에게 이와 같이 하시겠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이 끝날 때 셈을 바쳐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과의 영원한 사랑의 일치를 위한 조건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무력하고 너무나 인간적입니다. 그렇지만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치료되기를 원하며 또 용서하는 정신 태도에 계속 발전되기를 원한다면, 주께서 어김없이 우리를 치료해 주실 수 있고 또 치료해 주실 것입니다.




미사는 우리의 구원입니다. 미사에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가 구현되는 것입니다. 미사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기를 계속하십니다. “성부여, 그들은 그들이 하는 바를 모르오니, 그들을 용서하소서”하고 기도하시기를 계속하십니다. 미사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용서하시는 마음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실제로 손상을 입었거나 혹은 손상을 입었다고 여겨지더라도, 주님 안에서 그리고 주님을 통하여 우리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사에서 우리는 기도합니다. “내 영혼이 주의 도우심을 바라고 당신 말씀에 희망을 거옵나니, 내 천주여, 언제나 나의 원수들을 심판하시려나이까? 간악한 자들이 나를 박해하오니, 내 천주여, 나를 도와 주소서”




이 글은 카테고리: logos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