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연중제24주일

 

연중 제24주일




제 1 독서 : 집회 27, 30-28, 7 


제 2 독서 : 로마 14, 7-9


복     음 : 마태 18, 21-35




제 1 독서 : 아주 오랫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하느님이 그들의 원수들을 쳐부수고 복수해 주시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화되었다. 기원전 2세기에 벤 시라는 용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하느님의 자비가 어떤 것인지를, 인간에 대하여 가지고 계시는 하느님의 이해심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미움을 버리고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라는 권고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제 2 독서 : 사도 바오로의 죽음에 대한 묵상이다. 사도 바오로는 더 이상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삶을 거부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을 거부하는 것은 영적인 죽음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영적인 죽음은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인도한다. 바로 이런 새로운 삶에서부터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고 형제의 짐을 져주는 애덕이 가능한 것이다.




복      음 : 숫자의 상징성으로 볼 때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용서하라는 것은 490번을 용서하라는 뜻이 아니라 끝까지 완전하게 용서하라는 뜻이다.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는 용서함으로써 용서받는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비와 용서를 베풀어주시지만 아무것도 받는 것이 없다. 하느님 자비의 무상성은 이를 말한다. 반면에 우리 인간은 순수하게 주는 것이 없다 아무도 받는 것 없이 줄 수 없다. 항상 줌으로써 받는다. 용서해 줌으로써 이미 용서받고 있는 것이다.


용서는 하느님의 것이다. 우리는 그 용서를 거저 받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용서는 사고파는 대상이 아니라 거저 베푸는 것이다. 거저 베푸는 용서만이 폭력의 악순환을 제거한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의 성서 말씀은 조건없는 용서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사도 베드로께서는 예수께 몇 번이나 형제들의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하는가 묻고 일곱 번 용서해 주면 되느냐면서 자신을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하시면서 용서란 숫자로 따질 문제가 아니라 한없이 해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십니다. 그 예로 일만 달란트를 빚진 사람이 임금에게서 빚을 탕감받고도 가지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한 이야기를 비유로 들면서 용서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달란트’는 화폐가 아니라 금액 계산 단위인데, 한 달란트는 6,000드락메입니다(1드락메 = 1 데나리온). 헤로데 대왕의 연간 수입이 900달란트였다고 하니 일만 달란트의 빚이란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빚을 뜻합니다. 결코 비교되지 않는 일만 달란트와 일백 데나리온과의 관계는 하느님의 용서와 인간의 용서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의 용서가 천문학적 숫자로도 이야기될 수 없는 엄청난 것이라면 인간의 용서란 지극히 미소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은 용서도 베풀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주님의 말씀이요, 이 용서도 못하는 자는 하느님의 엄청난 용서를 받을 자격마저 없어서 내려진 용서의 은총도 다시 거둬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생각한다면 인간들 사이의 그 무엇도 용서하지 못할 것이 없는데 속 좁은 인간들이기에 서로 으르렁대며 살거나 앙심을 품은 채 인사도, 말도 않고 서로 오랜 원수인 양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큰 선심을, 사랑을 베푸는 것처럼 합니다.


일본의 나까무라 고오지가 그의 「청빈의 사상」에서 극구 찬양을 아끼지 않았던 양관화상이란 스님이 오홉암이란 산중의 작은 암자에서 지낼 때의 일입니다. 오홉암은 한 사람이 겨우 하루를 살아갈 수 있을 정도의 식량 다섯 홉씩을 매일 본사에서 공급해 준 데서 나온 이름입니다. 그런데 양관이 오홉암에서 지낼 때는 이 다섯 홉의 식량마저 여의치 않아 손수 산아래 마을로 내려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탁발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근근히 끼니를 이어가며 지내던 이 가난한 암자에 어느 날 도둑이 들었습니다. 그날도 양관 스님은 마땅히 덮고 잘 이불이 벗어 낮 동안 깔고 앉아 좌선을 하던 방석을 이불 대신 살짝 몸에 덮고 잠이 들었습니다. 도둑은 방안 이곳저곳을 살펴보았지만 어느 것 하나 가져갈 물건이 눈에 띄지 않자 스님이 덮고 자는 방석을 훔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도둑의 조심스런 몸놀림에 설핏 잠이 깬 스님은 누군가 방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곧 눈치챘지만 가만히 자는 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도둑이 스님의 방석을 집어들려고 손을 댄 순간 잠결에 살짝 몸을 뒤척이는 척하면서 방석을 가져가기 쉽게 모로 돌아누웠습니다. 도둑은 냉큼 방석을 집어들고 잽싸게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시간이 흘러 양관 스님은 방석을 도둑 맞은 일조차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어떤 사나이가 이불 한 채를 어깨에 둘러메고 오홉암을 찾아와 양관 스님 앞에 내려놓더니 털썩 무릎을 꿇었습니다. 깜짝 놀란 스님이 사나이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누구시기에 제 앞에 무릎을 꿇으시는지요.” 그러자 사나이가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습니다. “저는 몇 해 전에 스님께서 이불 대신 덮고 자는 방석을 훔쳐간 사람입니다. 그때 저는 스님께서 일부러 자는 체하시면서 방석을 쉽게 가져가도록 하신 일에 두고두고 양심에 가책을 느꼈습니다.” 사나이는 양관 스님의 그 말없는 너그러움과 청빈한 생활에 깊은 감동을 받고 몇 해 동안 자책하다가 아내와 의논하여 이불 한 채를 만들어 온 것입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용서가 없었다면 우리는 벌써 그분의 심판을 받아 이 세상에서 사라져 엄청난 벌을 받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분은 매순간순간마다 우리의 용서를 청하는 마음과 회개하는 마음을 보시어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고 화해의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시편 102장은 이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야훼님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안의 온갖 것도, 그 이름 찬양하라. 당신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말라. 네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낫게 하시니 죽음에서 네 생명 구하여 내시고, 은총과 자비로 관을 씌워주시는 분, 꾸짖음이 오래가지 않으시고, 앙심을 끝끝내 아니 품으시도다. 죄대로 우리를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악대로 갚지도 않으시니 저 하늘이 땅에서 높고 높은 것처럼, 우리가 지은 죄를 멀리하여 주시도다”(1-4. 9-12).


아무튼 우리는 먼저 자기 자신과 가족, 이웃을 용서하고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 자비를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용서란 결코 침묵이나 회피가 아니라 받아들임이요, 대화요, 사랑이요, 포용인 것입니다. 용서란 모든 냉랭한 것을 녹아들게 하는 따뜻함이요, 아량이요, 참사랑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 용서는 내가 내 힘으로 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나를 용서하셨으므로 나는 다만 하느님의 능력과 은총의 도움으로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을 전달해 주는 용서의 사신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죽을 때까지 용서해도 우리의 용서가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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