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주일(연중 29주일) 마태오 28,16-20
갈릴래아에서 열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다.
(전태준 신부)
현대를 선전 광고의 시대라 한다. 사람도, 일도, 물건도 너무 많아서 정신을 차릴 수 없고 도대체 뭔지도 분간할 수도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의 것을 억지로라도 알게 하려고, 또 기억하게 하려고 선전을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가짜가 진짜가 되고 진짜가 가짜가 되기도 한다. 정말 천박하고 복잡한 시대에 살고 있다. 좋은 것은 자연히 알게 되고 진리는 자연히 드러난다는 안일한 생각은 이제 통하지 않는 것 같다.
2000년의 역사 속에서 굳건히 살아왔고, 거룩하고, 하나이고,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가장 유일하고 확실한 교회라는 안일한 생각 속에서 머리는 하늘에 두고 발은 땅을 딛고 있지만 몸둥이는 허공을 맴도는 우리들은 과연 무엇을 오늘날의 사회 속에 심어 줄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이 마음으로부터 주님의 부르심을 느끼어 성당의 문을 두드렸다. 성당에서는 아무도 그를 아는 체 해 주지 않았고 따뜻한 인사 한마디 건네주는 이도 없었다. 거의 일년을 성당에 나갔건만 그 사람은 언제나 이방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사람은 여전히 미사에 나왔다. 그런데 마침 그때 비가 내렸다. 미리 우산을 준비해 온 신자들은 모두 우산을 펴 들고 빗속으로 사라졌고 성당은 곧 텅비어 버렸다.
이 사람 혼자 우두커니 쏟아지는 비를 쳐다보고 서 있는데, 마침 그때 마지막으로 성당을 나서던 한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이 남자를 보더니 우산을 받쳐주며 같이 차 타는 곳까지 가자고 했다. 이 남자는 감격하여 “실은 저는 이 성당 신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신자가 되려고 근 1년을 열심히 교회에 나왔지만 그 누구도 말 한마디 건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아가씨의 친절을 대하고 나니 참 기쁩니다. 저도 이제 영세를 받을 용기가 생겼습니다.”우산을 받쳐 준 여자는 깜짝 놀라며 이렇게 말했다. ‘저도 예비자예요. 지난 1년 전부터 이 성당에 나왔지만 아무도 말을 붙여주지 않더군요.“
이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고 말했으면 좋겠다. 우리는 하느님의 근본 진리를 너무 왜곡해서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겨난다. 이런 상태에서는 절대로 하느님의 기쁨의 소식을 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그 기쁨의 메시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기쁨의 메시지를 알고 자기 우상화를 근절시키지 않고서는 이웃 사랑도 못하고, 더 더군다나 그 기쁨의 소식을 전하지 못한다.
우리 신앙이 직접 행동으로 드러나야 하는 첫째 동기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대한 감사이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어떤 계명이나 상이 필요한 사람은 아직 하느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못 깨달은 사람이다. 세계와 인간은 모든 것을 구원하고 죽음도 극복하신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서 보존된다는 데에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핵심이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사람은 희망과 신뢰를 가지고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것이다.
구원에 대한 우리의 신앙은 구원에 합당한 행위인 사랑을 통해서만 그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으로 완전히 지배되는 세계야말로 하느님의 선물로 선포되는 구원인 것이다.
불란서의 어떤 영성가가 있었다. 그 분은 어느 날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로 신비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 후 그 사람은 “신비체험을 했어도 나에게는 여러 가지 모자람이나 더러움이나 나의 죄나 연약함이나 그 모든 것이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기쁘다. 하느님의 사랑이 이런 나를 감싸주고 계속 나를 지켜주고 항상 내 곁에 계셔 주시기 때문에 더 기쁜 것이다” 하고 말했다. 이 사람은 벌써 구원을 체험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자신을 구원한 것이다.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했고 그러기에 기뻐하고 더 열심히 생활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우상화의 뿌리를 근절시키게 된다. 우리는 스스로를 우상화하여 가장 완전하고 훌륭한 인물이 되기를 갈망한다. 우리의 고통이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자연 발생적인 욕심, 자신의 기호를 충족시키려는 열망, 등은 자신의 내적인 자유를 억압한다.
이 모든 요소는 사랑의 장애물이 된다. 이것을 근절시키지 않고서는 사랑이신 하느님을 체험할 수 없다. 자기 자신의 욕구와 기호와 편함에 모든 것이 양보된다면, 자기 자신의 의지는 자기 생활의 율법이 된다. 우리 생활 속에 나타나는 고통이란 것도 다 이런 것이다. 하느님이 왜 이런 고통을 주셨는가를 원망하는 행위는 그 고통의 진가를 모르는 것이다.
고통은 괴롭기만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적절히 긴장을 풀어주고 신자로서의 정규적 생활을 하기에 정확한 판단을 내리게 해 준다. 언제나 긴장 상태에서 안간힘을 다 하는 사람, 늘 끝가지 자기 자신을 조정하려는 사람, 자신에게만 의지하고 자만하는 사람, 스스로 외롭다고 여기는 사람은 극도의 위기에 빠진다. 옛 성인들의 고행이란 세상 도피가 아니다. 자기 만족의 노예화에 신앙으로 항거하는 것이다. 현세의 삶을 그리스도께로 이끌자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이를 전하자.
7. 전교주일(연중 29주일) 마태오 28,16-20
갈릴래아에서 열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다.
(조순창 신부)
예수님께서 구세주로서의 사명을 마치시고 승천하시면서,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에 필요한 교회를 창립하시고, 사도들에게 복음 전파의 사명을 주시며 유훈을 남기셨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나는 세상 끝날 때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제자들은 성령을 받은 후, 목숨을 내걸고 헌신적으로 복음을 전하였고, 신자의 수는 날로 증가하였습니다. 성 바울로는 디모테오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전하고,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사람들을 훈계하고 격려하시오.”(디모II : 4,2) 라고 말했습니다.
‘선교 교령’ 2항에서는 “나그네길을 가고 있는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니, 이것은 성부의 계획을 따라서 교회가 상자의 파견과 성령의 파견에서 그 기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교황 요한 바울로 2세의 ‘전교주일’ 메시지에서도 교회는 ‘선교의 화신’이라고 하시며, 교회측에서 선교를 포기하는 태도는 교회에 위임된 사명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복음 선포자이지만, 교회 자체가 복음화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교회가 참으로 우리 민족을 복음화하고, 전 세계를 복음화하려면, 끊임없는 회개와 쇄신으로 복음적 교회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인 하느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선포하고, 또 동시에 교회가 먼저 하느님 나라의 표지를 드러내는 성사적 구실을 다해야 합니다.
‘전교 주일’을 맞는 오늘, 우리는 ‘나의 신앙 생활이 알차고 열성적인가?’, ‘우리 교회가 구원을 주는 희망의 교회인가?’ 반성하고, 전교의 열성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 한국 천주교회는 선교 200주년을 앞둔 오늘, 120만의 교세(1979.12.31.현재)밖에 이루지 못하엿으나, 개신교는 선교 100주년에 교세 700만에 달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숫자로만 비교할 수는 없어도, 문제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1984년 선교 200주년을 계기로 하여, 신자 200만 돌파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만, 현재대로의 추세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지난 해(1979)의 증가수는 56,405명이었으나, 냉담자의 수가 16만 명이나 되는 것도 걱정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각오와 방법의 모색이 필요하며, 수만 늘리는 데에 신경을 쓰다가 내실화하지 못하면 그것도 문제입니다.
하여튼 복음 전도는 나의 의무요, 우리의 사명이고, 교회의 임무임을 절실히 깨닫고, 적극적 자세를 가져야겠으며, 신앙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먼저 함께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민족 복음화를 위한 염원과 간절한 기도는 하느님의 뜻이기에, 꼭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늘 특별히 기도합시다. 우리 모두는 교리 공부와 성경 공부를 더 착실히 해서, 신앙을 알차게 다지고, 자신있는 믿음과 신앙인으로서의 긍지를 가지면서, 이를 토대로 전교의 열성에 불타야 합니다. 우선, 가까운 가족의 입교와, 외짝 교우의 해소에 노력하고, 이웃 친지 중 한 사람 인도 등의 책임을 지면, 목적이 달성될 것입니다. 그리고,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교회가 복음적 교회로 쇄신되고, 민족을 구원하는 종교로서 모든 인가 희망의 등대로 믿고 찾을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또 ‘통신 교리’와 ‘구역 모임’의 활용 등도 좀더 구체적으로 연구되어야겠지요.
끝으로, 전교 사업 후원을 위한 ‘2차 헌금’을 성의껏 봉헌해 주시고, 전교회에 가입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전교회 가입은 선교 의무의 일부를 지는 것입니다. 회비는 어린이는 1년에 200원 이상, 성인은 1000원이며, 매일 주의기도, 성모송을 바치시고,
“성 프란치시꼬 사베리오여! 우리를 위하여 비옵소서.”
를 한 번씩 외는데, 전교회원으로서의 은사를 아울러 받게 됩니다.
8. 전교주일
유근복 빅토리노 신부
1. 예수님의 말씀
오늘 마태오 복음(28,16-20)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제자들에게 하신 것이지만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백성이 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하신 말씀이기도 하다.
2. 복음선포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복음선포는 교회와 하느님의 백성에게 맡겨진 가장 중요한 임무이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선교하기 위해서 모인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교회가 선교하지 않는다면 교회의 생명력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세상에 복음을 전한다는 것을 단순히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입교 권면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복음화의 의미를 축소하는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복음화란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죄악의 어둠으로부터의 해방과 함께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인간으로의 품위를 지니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복음선포의 주역은 언제나 하느님 자신이다. 성령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
심에 따라 복음선포를 하는 협조자인 셈이다. 복음을 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증거의 삶일 것이다. 교회에 속한 우리들이 먼저 복음화되어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말씀에 따 라 진실되고 정의롭게 살아간다면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교회를 찾을 것이다. 또한 이웃 에게 직접 다가가는 적극적인 선교와 함께 다양한 홍보매체를 통하여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데 서슴지 않아야겠다.
3. 사랑의 사람들
아울러 전교주일을 맞이하여 지금 이 시간에도 세계 도처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선교사제와 수도자, 평신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관심과 함께 물질적인 지원을 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하나의 지구촌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 복음선포는 각 본당과 교구, 지역과 나라의 경계를 뛰어넘어 복음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현재 약 400명의 선교사를 아시아와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지에 파견하고 있다. 선교사들은 사랑의 사람들이며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보편적 형제들이다. 세례성사를 받은 우리들 역시 삶의 현장에서 선교사로 불렸다는 것을 자각하여 가정과 교회, 사회에서 먼저 복음을 살고, 산 복음을 전하는 데 더욱 열과 성을 다해야 할 것이다.
(아프리카 잠비아 성 김대건 안드레아 땀부미션 성당 주임신부)
9.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전교주일) (나) 아저씨(아줌마)도 성당 다닌대요?
양경배 신부
오늘은 전교주일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복음전파를 위하여 수고하는 사람들을 위해 특별히 기도하는 날이다. ꡒ하느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라ꡓ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언이다.
요사이 이 말씀을 실천하기 위한 우리 교회의 모습도 참으로 많이 변해가고 있음을 본다. 버스터미널이나 기차역, 큰길에서 한 손에는 피켓을, 다른 한 손에는 휴대용 마이크를 들고 ꡒ예수 천당, 예수 천당ꡓ을 외치고 다니는 개신교 사람들, 그들을 보는 우리들의 시각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광신도 혹은 미친 사람들이라는 말로 평가절하를 했었다.
더 나아가 그런 선교방식은 오히려 잃는 것이 더 많다고 하면서 무시하였다. 그러나 요즘 우리 신자들도 그들만큼은 못하지만 교회 안에서 교회 밖으로 나가기 시작하였다. 예수 믿으면 천당 가고, 안 믿으면 지옥간다는 무시무시한 구호는 외치지 못하지만 ꡐ천주교를 알려 드립니다. 천주교회! 어떤 종교인가?ꡑ라는 제목으로 리플렛과 책자를 만들어 가두선교에 열을 올리고 있다. 참 좋은 일이다. 세상을 향한 복음의 외침은 신앙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도 각자에게 주어지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점도 있다.
가끔 병원에 입원해 있는 신자들을 찾아가 기도를 드린다. 보통은 6인실에 입원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다른 분들이 쳐다보는 가운데 신자에게 성체를 모셔드리며 기도를 드린다. 기도가 다 끝났을 때 많은 경우 옆에 있는 다른 환자나 보호자들이 ꡒ아저씨(아줌마)도 성당 다닌대요?ꡓ하고 신자 환자에게 묻는 말을 듣는다. 그런데 그 말의 의미가 나에게 두 가지 의미로 들려왔다.
첫째는 의외의 눈빛이다. 더 정확하게는 비아냥거림이다. 왜냐면 그 동안 병실에서 함께 지내면서 전혀 천주교신자라는 것을 알지 못했는데 신부와 수녀가 와서 기도를 하면서 본인의 종교가 드러난 것이다. 아울러 더 많게는 평소에 병실에서 보여준 그 사람의 모습이 하느님을 믿는 사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거나,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차이가 없는 모습을 보아 왔기 때문에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교회와 교회 다닌다는 사람에 대한 실망에서 나오는 질문이다.
둘째는, ꡐ역시 그렇구나ꡑ하는 느낌이다. 헌데 이런 느낌은 거의 드물다. 평소에도 같은 병실 안에서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나 이해심이 많은 것을 보면서 ꡐ뭔가 다른 사람이다ꡑ라는 것을 느꼈는데 천주교 신자임을 알고서는 ꡐ천주교신자는 뭔가 다르지ꡑ라는 느낌을 가지고 말하는 사람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반드시 전해야 한다. 모두가 해야한다. 그런데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은 타인에 대한 복음 선포도 중요하지만 먼저 그 복음이 나 자신에게 선포되고, 복음에 따라 내 삶이 차츰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변화된 사람이 아니더라도 변화되어 가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탕이 된 선교활동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 넘는 엄청난 복음의 결실을 가져오리라 생각한다.
오늘 전교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각자는 ꡒ아저씨(아줌마)도 성당 다닌대요?ꡓ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 사람이 어떤 느낌을 가지고 나에게 질문을 하는지 한 번 돌아 봐야 할 것이다.
10. <주님과의 약속>
최인호 베드로/작가
미국이 낳은 위대한 작가 윌리암 포크너(Faulkner 1897-1962)는 평생을 미국 남부의 사회적 변혁의 모습을 소설로 형상화시켰던 독특한 소설가입니다. 1949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그의 작품 중 단편 「에밀리에게 장미를」이란 걸작이 있습니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미국 남부 소도시에 에밀리라는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서른 살이 되도록 결혼을 못했던 에밀리는 어느 날 떠돌이 십장(什長) 베론과 사랑을 하게 됩니다. 마을 사람들은 에밀리와 같은 귀족이 베론과 같은 떠돌이 상놈과 어울려 다니는 것은 마을의 불명예라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런데 베론이 에밀리를 배신하고 도망쳐버리자 에밀리는 문을 걸어 잠그고 은둔생활을 합니다. 할머니가 된 에밀리가 죽자 마을사람들은 수십 년 동안 열리지 않던 그녀의 집에 가 문상하게 됩니다. 그때 사람들은 굳게 잠긴 방 하나를 발견하고는 그 방문을 부수고 들어갔습니다. 침대에는 30년 전에 죽은 베론의 시신이,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눴던 자세로 백골이 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에밀리는 자신을 배신하고 떠나려는 배론을 독살하고는 그의 시신을 침대에 눕혀놓고 평생동안 그의 베개 옆에서 사랑을 나누었던 것입니다.』
이 기괴한 단편은 사랑에 집착하는 에밀리라는 여인을 통해 인생의 허무함과 사랑의 헛된 맹세를 날카롭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가엾은 에밀리처럼 우리는 평생을 헛된 맹세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맹세하고 우정을 약속하고 계약을 맺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맹세와 약속은 한갓 들의 풀포기와 같은 것입니다.
예언자 이사야가 “모든 인생은 한낱 풀포기, 그 영화는 들에 핀 꽃과 같다! 풀은 시들고 꽃은 진다. 풀은 시들고 꽃은 지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있으리라”(이사 40,6-8)라고 노래하였듯 사람들의 약속은 헛된 것입니다. 영원한 것은 오직 하느님의 말씀과 우리 주 그리스도뿐입니다.
주님께서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마태 5,34-36)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들 인생이 풀포기와 같으므로 맹세와 약속의 유한성을 경계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기십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네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마태 28,19-20). 그리고는 “내가 세상 끝날 때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고 우리에게 맹세하십니다.
주님의 이 맹세야말로 영원한 약속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현존(現存)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과거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미래에도 계실 살아있는 우리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의 이 약속이 「에밀리의 장미」처럼 헛된 사랑의 맹세라면 우리는 지금 침대 위에서 썩어가고 있는 죽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가엾은 에밀리와 같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자, 내가 곧 가겠다. 나는 처음과 마지막이며 시작과 끝이다”(계시 22,12).
11. 전교주일 (마태 28,16-20)(나) 복음을 전하자!
서울대교구 홍보실
1. 복음 이야기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갈릴래아에서 열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던 갈릴래아 발현사화입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갈릴래아 발현사화로써 끝이 납니다(28,16-20). 이 발현사화는 상황묘사(16-17절)와 예수님의 말씀(18-20절)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ㄱ. 상황묘사(16-17절)
예수께서는 전에 갈릴래아에서 전도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산에 올라가셔서 제자들에게 산상설교를 행하셨습니다(마태 5-7장). 이제 같은 땅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시켜 세계 만민을 상대로 한 전도를 시작합니다. 만민 중에는 이스라엘 백성도 들어 있지만 주로 이방인들을 향한 전도를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유다 지방과는 달리 갈릴래아 지방에는 소외된 이방인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ㄴ.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18-20절)
하늘과 땅의 권능을 받으신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고 내가 명한 것을 모두 다 지키도록 가르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세계 만민을 상대로 전도해서 예수님을 섬기는 교회 공동체를 만들라는 뜻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건설하는 구체적인 방편은 세례 수여와 계명 준수교육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사람은 세례를 받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부지런히 익히고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맨 마지막으로 교회 공동체를 돕고자 늘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야훼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시면서 선민을 돌보셨듯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도 새로운 이스라엘인 교회를 항상 돌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2. 우리의 이해
오늘은 민족의 복음화를 위한 전교주일입니다.
교회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사회 속에서 발생시키는 종말론적인 공동체라 하겠습니다. 복음은 글자 그대로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기쁜 소식이라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베푸시고 용서하시는 아빠 하느님을 알려주셨을 뿐 아니라 당신 스스로 그 하느님을 본받아 모든 사람들을 측은히 여기셨습니다. 또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사랑의 행위로써 우리의 구원을 이룩해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이 기쁜 소식이고 그분이 십자가에서 이룩하신 일이 구원임을 믿고 사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복음을 이웃에게 알리는 일이 전교일 것입니다. 이제 교회는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고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끊임없이 발생시킬 때 전교의 문은 저절로 열릴 것입니다.
12. 전교주일 (마태 28,16-20)(나) 위선의 가면
전옥주 가타리나 / 작가
한 화가가 절친한 친구인 유명 배우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이 화가의 그림 그리기 솜씨는 그 실력을 따라갈 만한 인재가 없을 정도로 대단한 실력가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화가가 아무리 친구의 얼굴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려 해도 그 친구(배우)의 참 모습을 화폭에 담을 수가 없어서 무척이나 갈등을 겪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고뇌하던 화가가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어 화를 왈칵 내며 친구를 향해 말했습니다.
“자네는 어떤 인물의 흉내도 잘 내었지. 도대체 자네의 진짜 얼굴이 어떤 건지 보여지지 않으니 자네의 초상화를 그릴 수가 없네…”
이 화가의 외침은 어쩌면 때와 장소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변하는 순수하지 못한 오늘날 우리들의 실상을 탓하는 것도 같아 한 번 묵상해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낄 때나 온당치 못한 일을 저지르게 되면, 곧잘 손으로 얼굴을 가리거나 고개를 돌려 자신의 잘못과 부끄러움을 감추려하기도 합니다.
자기 행실의 부끄러움 때문에 작은 손으로라도 얼굴을 감싸며 숨고 싶어한다면, 그 모습은 차라리 아름답게 보여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요즈음은 후안무치(厚顔無恥)하여 도리어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시키려고 아우성치는 행태를 자주 보게 되어, 너무나 혼란스러워 가끔은 두려워지기도 했습니다.
앞에서 말한 화가의 절규(?)가 우리들에게 돌아오지 않도록, 우리는 지금 우리들의 참 모습을 되찾을 용기가 필요한 때인 것 같습니다.
좀더 안락한 생활을 누리기 위한 방법으로 가면을 쓰고 살아야 한다면, 그 가면의 무게는 안락함의 무게보다 몇 배 더 무거운 짐이 됨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물의 가면은 버거우면 벗어버릴 수 있지만, 마음 깊숙이 자리 잡은 허욕과 위선의 가면은 좀처럼 떨쳐버리기가 어려워 끝내는 참된 삶의 가치를 뒤집어 놓는 비극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남에게 감추고 싶어하는 비밀 한두 개쯤은 가지고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밀은 언젠가는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비밀이란 밝은 곳으로 나타나기를 꺼려하기에 항상 사람들의 어둡고 혼탁한 마음 속에서 자라기 마련입니다.
드러내기 싫고 무언가 감추고 싶어서, 혹은 과장되게 포장하고 싶은 마음에 어느 순간 쓰게된 가면, 그러나 벗어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어려운 이 눈에 보이지 않는 가면을 우리들은 왜 쓰려하고 또 쉽게 벗어버리지 못하는 것일까요?
주님 앞에서 모든 비밀을 고백하고 사죄를 구하면 감추고자 했던 허물과 함께 가면은 사라지게 될 것이며, 나의 허물을 포장했던 가면이 사라지는 순간, 진정 마음의 평온함을 찾았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주님! 내 스스로 만들어서 쓴 이 가면을 벗어버릴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13. 전교주일(연중 29주일) 마태오 28,16-20
갈릴래아에서 열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다
전교주일을 맞이하여 오늘 교회는 만민에 대한 선교사명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마태 28, 16-20의 말씀을 복음 으로 듣는다.
이 대목은 마태오 복음서의 제일 끝자리에 놓여 있는데, 그 내용이 매우 집약적이다.
ꡐ선교사명’ 과 관련된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몇 가지 생각해 본다.ꡐ선교’ 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오늘 복음 말씀에서 제일 먼저 주목해야 할 점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파견되기 전의 상태’ 이다.
그 때 그들은 심한 패배감, 절망감 에 빠져 있던 상태였다. 그들은 스승을 배신하였다는 수치심과, 그분께서 십자가 위에서 처참하게 돌아가신 성금요일의 충격과 절망 속에 아직도 깊이 빠져 있던 상태였다. 그런 그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를 통해 갈릴래아로 가면 당신을 만날 것이라는 ‘기쁜 소식’ 을 보내 주셨다. 그들은 먼저 이ꡐ기쁜 소식’ 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따라야 했다.
제자들이 ꡐ파견되는 장소가 갈릴래아의 어느 산’ 이라는 점은 깊은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갈릴래아는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ꡐ처음 소명을 받은 곳’ 이었고,ꡐ제자로 양성 된 곳’ 이었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후 당신의 제자들을 새 출발시키시려는 예수께서는 그들을 당신과 그들 사이의 ‘첫 사랑’ 이 있었던 갈릴래아로 불러내신 것이다(참조: 호세 2, 16).
‘산’도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큰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뵙고 그 분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던 것과 비슷하게, 마태오 복음서에 의하면 제자들은 ‘산’ 에서 ‘산상설교’ 라는 새롭게 해석된 ‘계명’ 을 예수님으로부터 받았다. 이렇게 보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갈릴래아의 그 산’으로 다시 부르셨다는 것은, 당신의 제자들을 ‘모든 민족들에게 파견’ 하시기에 앞서 그들에게 근본적인 가르침을 상기시켜주시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음은 ‘선교의 목표’ 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 을 갖고 계신 분, 즉 죽음까지도 그분의 권한 아래에 두고 계신 ‘주님’으로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시는 사명의 핵심은 “만민을 ‘예수님의’ 제자로 삼는 것” 이다. 언뜻 보면 매우 의아하게 생각될 수 있는 부분이다. 다른 사람들을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하는 것’ 이 핵심사명이라니 도대체 무슨 뜻인가? 이 점은 지상 생애 동안 예수께서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 제자들의 공동체를 형성’ 하려고 하셨는지를 생각해 보면 좀 더 이해가 될 수 있다. 무릇 제자란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의 사명은 복음선포를 듣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제자가 되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지금까지 열 한 제자는 ‘예수님의 제자’ 로만 남아 있었는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까지고 체험한 이제 그들은 만민에게 파견되어,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실 때에 하셨던 말씀대로 “사람 낚는 어부들이 되는” (마태 4,19)것이다.
마태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진복선언’으로부터 시작하여 ‘최후 심판 말씀’ 에 이르기까지 제자들을 줄곧 가르치셨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에 의하여 새롭게 출발되는 제자공동체는 예수님이 하셨던 ‘가르침’ 의 임무를 이어받는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제자들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 동안 예수님으로부터 배웠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의하면 넓게 볼 때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친교의 삶’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사람들은 성자 예수님과 결합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성자 예수님과 가장 깊은 사랑으로 결합되어 있는 성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데 이 때 성령은 이런 친교를 근본적으로 가능하게 해 준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 이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에 의해 새롭게 탄생되어, 계속 자라나야 할 예수님의 제자공동체인 교회에 주어진 가장 든든한 보증의 말씀이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면서 “세상의 빛과 소금” (마태 5,13-16)의 역할을 하려면, 제자들은 갖가지 어려움을 겪게 되겠지만, 그들의 공동체는 당신 자신이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 을 뜻하는 ‘임마누엘’ (참조: 마태 1,23)이신 주님께서 “그들과 늘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해 주신 공동체이다. 생각할수록 깊은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말씀이다.
모든 민족의 복음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오늘 우리는 복음 말씀으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기 전에, 그들을 당신께 대한 그들의 ‘첫 열정’이 타오르던 갈릴래아로 부르신 것을 들었다. 우리들도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신앙의 첫 시기’, ‘소명의 첫 시기’를 잊지 말아야 한다. 영세할 때의 ‘첫 마음’, 사제서품식 때나 서원 때의 ‘첫 마음’ 등, 하느님의 사랑에 감격하던 순간을 잊지 말고 때때로 회상해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 과 ‘그분께 대한 우리의 사랑’ 이야말로 선교활동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14. 민족들의 복음화 주일(전교주일) 마태 28,16-20: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라”
김영남 신부
(전교주일인 오늘의 복음은 지난 ‘삼위일체 대축일’ 때 들었던 복음과 같다. 그래서 이번 주의 ‘복음생각’은 지난 ‘삼위일체 대축일’의 것을 기초로 삼되, ‘선교’에 초점을 두었음을 미리 밝혀 둔다.)
전교주일을 맞이하여 오늘 교회는 만민에 대한 선교사명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마태 28,16-20의 말씀을 복음으로 듣는다. 이 대목은 마태오 복음서의 제일 끝자리에 놓여 있는데, 그 내용이 매우 집약적이다.
‘선교사명’과 관련된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몇 가지 생각해 본다. ‘선교’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오늘 복음 말씀에서 제일 먼저 주목해야 할 점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파견되기 전의 상태’이다. 그 때 그들은 심한 패배감, 절망감에 빠져 있던 상태였다. 그들은 스승을 배신하였다는 수치심과, 그분께서 십자가 위에서 처참하게 돌아가신 성 금요일의 충격과 절망 속에 아직도 깊이 빠져 있던 상태였다. 그런 그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를 통해 갈릴래아로 가면 당신을 만날 것이라는 ‘기쁜 소식’을 보내주셨다. 그들은 먼저 이 ‘기쁜 소식’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따라야 했다.
제자들이 ‘파견되는 장소’가 ‘갈릴래아의 어느 산’이라는 점은 깊은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갈릴래아는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처음 소명을 받은 곳’이었고, ‘제자로 양성된 곳’이었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후 당신의 제자들을 새 출발시키시려는 예수께서는 그들을 당신과 그들 사이의 ‘첫 사랑’이 있었던 갈릴래아로 불러내신 것이다(참조: 호세 2,16).
‘산’도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큰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뵙고 그 분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던 것과 비슷하게, 마태오 복음서에 의하면 제자들은 ‘산’에서 ‘산상설교’라는 새롭게 해석된 “계명”을 예수님으로부터 받았다. 이렇게 보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갈릴래아의 그 산”으로 다시 부르셨다는 것은, 당신의 제자들을 ‘모든 민족들에게 파견’하시기에 앞서 그들에게 당신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상기시켜주시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음은 ‘선교의 목표’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갖고 계신 분, 즉 죽음까지도 그분의 권한 아래에 두고 계신 ‘주님’으로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시는 사명의 핵심은 “만민을 ‘예수님의’ 제자로 삼는 것”이다. 언뜻 보면 매우 의아하게 생각될 수 있는 부분이다. 다른 사람들을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하는 것’이 핵심사명이라니 도대체 무슨 뜻인가? 이 점은 지상 생애 동안 예수께서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제자들의 공동체를 형성”하려고 하셨는지를 생각해 보면 좀 더 이해가 될 수 있다. 무릇 제자란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의 사명은 복음선포를 듣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제자가 되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지금까지 열 한 제자는 ‘예수님의 제자’로만 남아 있었는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까지고 체험한 이제 그들은 만민에게 파견되어,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실 때에 하셨던 말씀대로 “사람 낚는 어부들이 되는”(마태 4,19)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진복선언’으로부터 시작하여 ‘최후심판 말씀’에 이르기까지 제자들을 줄곧 가르치셨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에 의하여 새롭게 출발되는 제자공동체는 예수님이 하셨던 ‘가르침’의 임무를 이어받는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제자들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동안 예수님으로부터 배웠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복음말씀에 의하면 넓게 볼 때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친교의 삶”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사람들은 성자 예수님과 결합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성자 예수님과 가장 깊은 사랑으로 결합되어 있는 성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데 이 때 성령은 이런 친교를 근본적으로 가능하게 해 준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에 의해 새롭게 탄생되어, 계속 자라나야 할 예수님의 제자공동체인 교회에 주어진 가장 든든한 보증의 말씀이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면서 “세상의 빛과 소금”(마태 5,13-16)의 역할을 하려면, 제자들은 갖가지 어려움을 겪게 되겠지만, 그들의 공동체는 당신 자신이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뜻하는 “임마누엘”(참조: 마태 1,23)이신 주님께서 “그들과 늘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해 주신 공동체이다. 생각할수록 깊은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말씀이다.
모든 민족의 복음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오늘 우리는 복음 말씀으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기 전에, 그들을 당신께 대한 그들의 “첫 열정”이 타오르던 갈릴래아로 부르신 것을 들었다. 우리들도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신앙의 첫 시기’, ‘소명의 첫 시기’를 잊지 말아야 한다. 영세할 때의 ‘첫 마음’, 사제서품식 때나 서원 때의 ‘첫 마음’ 등, 하느님의 사랑에 감격하던 순간을 잊지 말고 때때로 회상해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과 ‘그분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야말로 선교활동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