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2주일
제 1 독서 : 지혜 6, 12-16
제 2 독서 : 1데살 4, 13-18
복 음 : 마태 25, 1-13
제 1 독서 : 지혜서는 기원전 1세기 중엽 헬레니즘의 용어로 유대교의 신앙을 고백한 책이다. 6장 1절에서 11장 3절은 지혜에 대한 찬미이다. 오늘 제1독서는 찾는 사람에게 지혜가 스스로를 나타내 보인다는 내용이다. 인간의 내면에 이미 존재하는 지혜는 열심히 찾고 갈구하는 사람에게 주어질 것이다.
이러한 지혜는 7장과 8장에서 의인화된다. 그리스인들에게 지혜는 신적인 것에 대한 지식과 묵상에 이르는 방법이었다. 지혜서의 저자에게 지혜는 하느님의 계시이다. 지혜는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드러내기 때문이다(9, 13.17).
제 2 독서 : 데살로니카 신자들 생각에는 자신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리라고 믿었다. 이는 데살로니카 신자들에게만 국한된 생각이 아니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주님께서 곧 돌아오시리라는 기대 속에 살았다.
주님께서 돌아오심을 표현하는 단어로 데살로니카 전서 4장 15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Parousia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Parousia는 원래 그리스 문화권에서 군주의 공식 방문(개선의 의미를 포함)을 뜻했다. 이 단어는 신약성서에서 모두 16번이나 사용되었고 그중 데살로니카 전서에만 4번 나온다(2, 19; 3, 13; 4, 15; 5, 23). 후에 사목서간의 저자들은 예수의 재림을 표현하기 위하여 Epiphaneia라는 용어를 썼다. Epiphaneia는 그리스 문화권에서 군주가 공식 방문할 때 군중 앞에서의 공식 출현을 뜻했다. Parousia에서 Epiphaneia로 용어가 교체된 것은 주님의 임박한 도래에 관한 열망이 식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데살로니카 신자들의 주님의 도래에 대한 기대는 함께 주님을 믿다가 먼저 죽은 신자들 때문에 흔들렸다. 이미 죽은 사람들은 주님의 개선(Parousia)을 못 본다는 말인가?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미 죽은 자들이 주님의 개선을 놓치지 않을 것이라고 위로한다. 주님께서 돌아오실 때 이미 죽은 사람들이 오히려 먼저 부활하여, 살아 남아있는 사람들과 함께 주님을 마중 나갈 것이기 때문에 슬퍼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는 사나 죽으나 항상 주님과 함께 있으리라는 신앙 고백이다(4, 18).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주님께서 몰래 재림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광 속에 공적으로 돌아오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도래는 역사와 사회 속에서 이루어지는 공적인 사건이라는 뜻이고 인류 연대성이 있는 사건이라는 뜻이다. 둘째는 살리는 하느님, 모으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 고백이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사람들을 부활시키는 분이라는 고백,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을 함께 모으는 분이라는 고백이 초대 교회의 종말론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복 음 : 앞의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24, 45-51)와 마찬가지로 이 비유는 주님의 오심이 늦어지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24, 48; 25, 5 참조). 비유의 요점은 항상 준비해야 하는 태도임이 분명하다.
이 비유에서 열 처녀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교회를 뜻하고 신랑은 그리스도를 뜻한다. 슬기로운 처녀들이 등잔 기름을 나누어주기를 거절(9절)한 것은 빈정댐이나 이기주의 때문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직시의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비록 신랑이 늦게 오더라도 등잔에 기름은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등잔은 신앙을 뜻하고 기름은 애덕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 신자들은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그 구원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주님께서 오실 때에야 비로소 구원은 완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며 안주하는 태도의 허구성을 열 처녀의 비유가 지적하고 있다. 마지막 때를 말씀하실 때 예수께서 항상 제자들에게 깨어 준비하라고 지적(마르 13, 32-37; 루가 12, 36-40)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연중 제32주일로서 전례력의 마지막 시기에 와있습니다. 11월 위령성월을 보내는 이때에 주어지는 오늘의 말씀은 “깨어 기다림”입니다.
우리는 삶과 죽음의 의미를 묵상하면서 죽음에 대비한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가 무엇인가를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뒹구는 낙엽과 앙상한 나뭇가지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삶도 언젠가는 그렇게 되리라는 상념에 젖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구약성서의 마지막 작품인 지혜서는 그리스 등, 이방 문화권에서 강조된 지혜와 하느님을 최고의 가치로 고백했던 히브리인들의 지혜를 비교하면서 하느님께 기초하고 하느님께 목적을 둔 지혜만이 참되고 영원한 것임을 재삼 확인하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혜의 내용은 선언이며, 외침이요, 신앙 고백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실상 참된 지혜는 “하늘을 스스로 돕는 자를 도와주신다.”는 말씀처럼 그 지혜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자에게만 터득되는 법입니다. 지혜를 얻으려고 깨어있는 사람에게는 모든 근심이 떠날 것이며, 지혜에 상응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그 지혜가 그 사람에게서 본 모습을 드러내는 법입니다. 아울러 하느님의 지혜는 결코 세상의 부귀영화와 권력과 재물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없는 지혜롭고 깨끗한 삶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지혜로운 삶을 마태오복음 25장 1-13절의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 쉽게 풀어서 말씀하십니다. 결국 우리의 인생이란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혼인으로서 신부인 교회나 우리 각자가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맞이할 채비를 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랑이 온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단지 어느 시간에 올 지를 알지 못할 뿐입니다. 신랑이 밤중에 올 것에 대비하여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등잔에다 기름까지 마련했으나 나머지 미련한 다섯 처녀는 등잔만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등잔이란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등잔에다 기름을 부어 어둠을 밝혔을 때 그 본래의 기능을 다하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의 자녀가 된 우리로서 채워 넣어야 할 기름은 그리스도의 계명을 따르는 복음적인 삶과 선행 그리고 주님이신 신랑을 깨어 기다리는 끊임없는 기도생활인 것입니다.
밤일을 마치고 공장을 나서는 한 청년에게 사탄이 찾아왔습니다. 사탄은 청년에게 게임을 하자고 청했습니다. 사탄은 열 개의 병을 내보이며 말했습니다. “이 열 개의 병 가운데 하나에는 독약이 들어있네. 하지만 아홉 개의 병에는 아주 달콤한 꿀물이 들어있지. 자네가 꿀물이 들어있는 병을 고른다면 엄청난 돈을 줄 테니 한번 골라 보게나.” 청년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매력적인 제안이었지만 목숨을 담보로 게임을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사탄은 계속 유혹을 했습니다. “한 번의 선택으로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이네. 이런 기회가 어디 있겠나.” 청년은 마침내 한 병을 골라 마셨습니다. 죽음의 쓴 물이 목구멍을 타고 흘렀습니다. 그러나 청년은 곧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야호! 살았다. 살았어. 자, 어서 내게 약속한 돈을 주고 사라져!” 사탄은 약속대로 청년에게 엄청난 돈을 주며 말했습니다. “언제라도 돈이 필요하면 찾아오게. 다음엔 돈을 곱으로 주겠네.” 청년은 쉽게 많은 돈을 가지게 되자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집으로 가는 대신 곧장 술집으로 향했습니다. 그 후로 매일 술에 취했고 노름에도 손을 댔습니다. 흥청망청 돈을 쓰고 술을 마시며 불규칙한 생활을 하니 건강이 나빠졌고 한 살, 두 살 나이도 먹었습니다. 청년은 이제 돈이 필요할 때면 스스로 사탄을 찾아가서 게임을 하였습니다. 이제 청년은 노인이 되었고 병은 딱 두 개 남아있었습니다. 노인이 된 청년은 흔들리는 손으로 하나를 골라 마셨습니다. “와! 내가 이겼어. 나는 끝까지 살아남았다. 내놔라, 돈. 하하하——” 기뻐하는 그를 지켜보던 사탄은 마지막 남은 병을 들이마셨습니다. “자, 이래도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나? 처음부터 독약이란 없었다. 그러나 너는 내가 만든 독약을 먹고 이미 죽어가고 있어. 네 자신을 돌아봐라. 그 돈으로 인해 네 인생이 어떻게 되었는지. 난 돈으로 네 인생을 샀다. 하하하!”
자기도 모르게 몰락되어 가는 이 어리석은 사람의 이야기는 진정한 삶의 의미를 잊어버린 채 순간의 쾌락에 젖어 사는 현대인의 자화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열 처녀의 비유는 현대인의 자화상과 관련하여 참으로 지혜롭고 현명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게 해줍니다. 이 비유는 두 개의 다른 비유 즉 깨어있는 집주인의 비유(마태 24, 43-44)와 주인의 도착을 기다리는 충성스럽고 슬기로운 종의 비유(마태 24, 45-51)에 뒤이어 나오면서 깨어 기다린다는 것이 바로 곧 다가올 종말에 대비한 신앙인의 자세임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신랑이 온다는 사실만 알 뿐 우리는 언제 어느 때 온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진정한 슬기로움은 신랑이 늦게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예견하고 오랫동안 등불을 켤 수 있도록 필요한 기름을 준비하고 있음에서 그리고 또한 모든 이에게 부족하게 될 지 모른다는 타당한 이유를 들어 동료들에게 기름을 나누어주기를 거부함에서 드러납니다. 실제로 이익을 주는 대신에 우리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해를 끼치는 행위가 사랑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에서 슬기로운 처녀나 미련한 처녀나 모두 잠들어있다는 것은 방심을 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비록 불확실해서 등잔불 기름을 준비해야 하지만 곧 당도할 것 같지 않은 신랑을 평온한 상태에서 기다리는 것을 뜻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매일매일의 생활 속에서 사랑과 믿음을 실천하면서 그리스도이신 신랑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신랑이 갑자기 들이닥쳤을 때 사랑과 선행으로 평소에 기름을 잘 준비한 사람은 신랑을 기꺼이 맞이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허둥지둥대며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2독서인 바오로의 데살로니카 전서는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구원과 부활이라 언급,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는 사람은 예수와 함께 생명의 나라로 데려가실 것이라고 하면서 구원과 희망의 메시지로 위로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슬기로운 처녀처럼 깨어 주님을 기다리다가 그분과 함께 영원한 혼인잔치인 천국으로 들어가도록 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