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대림 제 2주일 강론 모음

 

대림 제2주일


10. 유재국 신부(나) / 18


11. 강길웅 신부(나) / 21             12. 김영진 신부(나) / 23


13. 김평겸 신부(나) / 25             14. 노영찬 신부(나) / 26


15. 정양현 신부(나) / 27             16. 창조가 제 모습을(나)/ 28


17. 교구주보 (나) / 30               18. 최인호 작가(나)/ 31




1.        대림 제2주일 마태 3,1-12 (가) 회개하고 변화되어, 좋은 열매 맺자.


                                                               조순창 신부




구세주 대림 제2주일을 맞이했습니다. 대림시기는 첫째로 예수 성탄 대축일을 우리 모두 즐겁게 맞이하고, 구세주의 성탄이 온 인류에게 참 평화와 구원의 때가 되도록 기다리며 준비하는 때요, 둘째로 그 어느 때인가 꼭 오고야 말 이 세상의 종말에, 구세주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 영광되이 오른편에 서서 축복의 선언을 듣게 되도록 준비하는 때입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구세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공적으로 그 활동을 시작하시기 바로 전에, 구세주 오실 길을 닦고, 구세주를 맞이할 채비를 하도록 나타난 선구자 세례자 요한의 힘찬 설교를 다시 듣고, 예수 성탄과 구세주 재림을 준비하는 자세를 갖추고,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시기인 대림절을 더욱 보람 되이 보내도록 해야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기도와 단식으로 구세주의 선구자로서의 덕을 닦으며 광야에 나타나,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외쳤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에게는  “이 독사의 족속들아!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알곡은 모두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첫째, 대림 시기에 회개합시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하느님과 가족과 이웃 앞에 나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함으로써 죄를 지었습니다. 교만과 탐욕과 무관심과 게으름으로 스스로 범죄하며, 사회 환경에 물들고 동화되어, 죄를 짓기도 합니다. 죄를 짓고도 깨닫지 못하며, 변명하거나 회개할 날을 미루어 가는 일은, 은총의 때요 구원의 때인 대림 시기에는 떨쳐 버려야 할 일이며, 자신을 깊이 반성할 때입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깊이 느낄 뿐만 아니라, 겉으로 고백할 수 있는 겸손과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제1독서의 말씀과 같이 ‘싸움이 없는 평화로운 이웃’이 되고, 오늘 제2독서의 가르침과 같이 ‘서로 진정으로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둘째,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 보여야 합니다.


참된 회개는 말이나 마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활에 변화가 있어야 하며, 생활 자체에 구체적이고도 결단성 있는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어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마태 7,21)




교만을 버리고 겸손을 찾으며, 현실과 재물과 명예의 지나친 애착에서 벗어나 충실히 살되, 영생을 위한 공부와 선공에 힘쓰며, 기도와 미사와 성사에 열심히 참여하며, 자신의 지금의 생활을 살펴 반성하며, 새로운 마음의 결심으로 쇄신된 새 생활을 시작할 때입니다.



셋째, 좋은 열매를 푸짐히 맺는 생활을 합시다.


우리의 죽음의 날, 구세주 재림의 날, 우리 심판의 날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 하루를 죄 중에 의미없이 살아갈 때 쭉정이 인생이 되는 것이며, 하루 하루를 착실히 살아갈 때에 알곡이 될 것입니다. 정의를 실천하고, 사랑을 베풀며, 불쌍한 이웃에 자선하고, 정직하게 살며, 분수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회개한 이의 삶이며, 회개를 행실로 증거하는 것이요, 좋은 열매를 풍성히 맺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 대림 2주일에 주의 제단 앞에 모여 참회하는 당신 백성을 살피시어, 하느님께 결심한 대로 하느님 자녀답게 부지런하고 충실히 살아가도록 일깨워 주시고,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여, 당신 은혜 중에 푸짐한 인생의 열매를 맺게 하여 주시며, 오늘의 삶에 필요한 복을 내려 주시고, 또한 하느님을 만나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












2.              대림 제2주일 마태 3,1-12 (가) 회개의 증거를 행실로 보여라.


                                                           김정진 신부




신자 여러분! 오늘로 대림절 제 2주일을 맞게 됩니다. 참회하는 정신과 회개하는 생활은 교회가 절대적으로 요구하는 마음의 자세이며 생활 양식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 명심하며 반성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성탄날 밤에 많은 축복과 평화를 주시러 오시는 예수님을 기꺼이 맞이하기 위해서는 참회하고 회개하고 죄의 용서를 받아야 됨을 명백히 가르쳐 주십니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마태 3,2)하고 외쳤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확실히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길잡이요, 선구자이십니다. 그이가 가르친 교훈은 오늘의 대림절의 정신이며 우리가 취해야 할 생활 방식입니다.



그 당시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에 많은 사람들이 따랐고 또 그들 중에 자기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친 사람들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무심으로 혹은 무관심으로 지내면서 자기네 생활에 아무런 변화도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 요한으 “이 독사의 족속들아, 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마태 3,8)고 힐책하였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교회의 가르침에 순종하며 빈틈없이 교회의 계명을 철저히 준수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이와는 반대로 주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하느님을 외면하고 그들은 마치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행동하고 하느님을 계산에 넣지 않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들 중에는 참회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 대림절에는 단식이나 금육의 고행이 의무는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는 극기와 고행의 필요성마저 부인해서는 안됩니다. 죄악이란 우리의 안일하고 방종한 생활에서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좀 엄격한 생활을 하고 언동에 있어 삼가고 근심하며 의식적으로 매일 미사 참례나 기도 생활 같은 어려운 일을 하고 과거에 떨어졌던 악습과 온갖 유혹을 물리치고 덕행을 실천함으로써 우리 안에서 죄악을 몰아내야 하겠습니다.



대림절에 사는 우리는 주님을 기꺼이 맞이하기 위해서는 주님을 위하여 많은 시간을 할당해야 하겠습니다. 주일 미사는 물론이려니와 매일 미사도 열심히 참례합시다. 날씨가 다소 차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열성과 충성심만 있다면 아침 추위나 아침잠이 문제가 안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외침을 잘 듣고 사랑에 넘치는 마음과 기쁜 마음으로 예수 성탄 축일을 준비합시다. 가정에서의 기도 생활을 충실히 하고 습관적으로 떨어지는 악습과 온갖 유혹을 물리치고 우리 안에서 죄악을 몰아내야 합니다. 온 가족이 나란히 성당에 와서 성탄 판공성사를 받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하겠고 또한 덕을 닦고 남에게 사랑을 실천하는데 적극적이어야 하고 용감해야 하겠습니다.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으로서 가족이나 이웃 사람을 권장하여 제때에 판공성사의 의무를 이행하도록 주선하고 교회와 거리를 멀리하고 있는 냉담자, 미신자들의 회두를 위하여 극력 수고하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다음은 우리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의미에서 불우하고 버림받은 동포들에게 온정을 베풀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본당에서는 성미 모으는 운동을 벌여 조금이라도 성탄의 기쁨과 행복을 나누어주려 하고 있습니다.




사회의 모모한 단체들은 이런 이웃돕기 운동에 적극적으로 호응할 뿐만 아니라 선봉에 나서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자라야 들어갈 수 있다”(마태 7,21)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명심합시다. 아버지의 뜻이란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며 이웃을 돕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쁨의 성탄, 은총과 평화의 성탄이 되기 위해서는 이상 몇 가지를 꼭 명심불망하고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끝으로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어 봅시다. “그 날에는 많은 사람이 나를 보고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하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 나는 분명히 그들에게 ‘악을 일삼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거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할 것입니다“(마태 7,22-23). 아멘.












3.                대림 제2주일 마태 3,1-12 (가) 기다림.


                                              염봉덕 신부




교형 자매 여러분!


오늘은 대림 2주일입니다. 대림이란 말의 뜻은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다보면 여러 가지 기다림 속에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언제나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겨울에는 봄을 기다리고, 비가 계속 오는 장마철에는 맑은 태양을 기다립니다. 그뿐 아닙니다. 우리는 식사나 하루 노동의 끝이나 저녁이 오거나 기분 좋은 밤의 휴식을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병자는 퇴원하는 날을 기다리고 직장인은 주말을 기다리고 도시인들은 도시의 소음을 피해 일시적이나마 교외에 나가는 기쁨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욱 누군가를 기다립니다. 기쁜 소식을 가져오는 우편 배달부를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가까운 친구를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약속한 시간에 약혼녀를, 아내는 여행 중에 있는 남편에 돌아오기를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대림절을 맞이하여 이상의 여러 가지 기다림을 초월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된 오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림! 우리는 어떤 기다림에도 마음 속의 준비가 있음을 알 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 예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는 맹목적으로 아무 준비 없이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2천년 전의 유대 광야에서 외치던 요한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천년 전의 요한의 외침은 오늘 대림절을 맞는 우리들 자신에게 외치는 소리입니다.


회개하시오!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예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는 그 기다림 속에서 진정한 회개로 알찬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준비란 말이 나오니 재미있는 비유가 생각납니다. 한여름 무더운 날씨에 땀을 흘리면서 일하는 개미와 시원한 나무그늘에서 콧노래를 부르는 게으른 배짱이의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개미에게 배짱이가 왜 그렇게 땀을 흘리면서 일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개미는 묵묵히 일하다가 겨울을 나기 위해서 월동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배짱이는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무슨 고생을 그렇게 하느냐고 코웃음을 치면서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더운 한여름도 어느덧 지나가고 추운 겨울이 닥쳐왔습니다. 게으른 배짱이는 이때서야 자신의 게으름을 한탄했습니다. 더운 여름부터 조금씩 월동 준비를 해 놓았으면 이 추운 겨울에 고생하지 않을 것인데 하고 말입니다.




기다림! 부지런한 개미가 더운 여름부터 월동 준비를 하듯 구세주 오심을 기다리는 시기인 이 대림절에 우리는 신앙적인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그런데 신앙적인 준비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준비보다도 오늘 복음 말씀과 같이 진정한 회개로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나의 신앙은 왜 발전이 없는가? 내 영혼 속에서 고통이 가득하며 마음이 불안하고 생활에 승리가 없는가?’라는 의문을 가지며 그 까닭을 묻습니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수많은 신자들이 진정한 회개 없이 신앙 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즉 한 손은 앞으로 내밀어 이미 절망과 죄의 질병과 저주와 마귀의 종이 되었던 지난날의 자기와 손을 잡고, 또 한 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잡으면서, 새 사람은 앞을 당기고 옛 사람은 뒤로 당기는 이중혼으로 조화있게 살려고 애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이중적인 신앙생활은 향상이 없고 고뇌 속에 빠지며 불안에 떨게 마련입니다. 



교형 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대림절을 맞이하여 자신의 신앙생활에 진정한 향상이 있기를 원하십니까? 신앙 향상을 원하는 사람은 그 무엇보다도 세례자 요한의 광야의 외침을 나 자신에 대한 외침이라는 것을 가슴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당신들은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 보이십시오!’




따라서 우리는 이 미사 중에 특별히 우리의 신앙생활을 반성하고 진정한 회개를 통하여 세속적인 나를 버리고 진정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아름다운 성도가 되기를 기도합시다.












4.        대림 제2주일 (가해)   거지 습성을 버리자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이사 11,1~10 (그는 가난한 자들의 재판을 정당하게 해 주리라)


제2독서 로마 15,4~9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여 주십니다)


복 음 마태 3,1~12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




오늘 1독서에서는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새 순이 돋아날 것임을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루터기란 나무를 베고 난 뒤의 남은 뿌리 부분을 말합니다.




가끔 밑동에서 새순이 돋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 해가 지난 죽은 뿌리에서는 새싹이 돋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사야는 바로 그와 같은 이새의 죽은 뿌리에서 새순이 돋는다는 것입니다. 이새는 다윗 임금의 아버지입니다.




다윗은 위대한 왕이었으며 하느님의 마음에 꼭 드는 임금이었지만 그러나 후대의 왕들은 거의가 타락하여 우상을 숭배하는 등 하느님 눈에 벗어난 짓을 많이 했으며 그래서 결국 나라는 둘로 갈라졌고 두 나라가 모두 차례로 망했습니다. 그리고 망한 지 수백 년이나 되었습니다. 바빌론에게 망하고 페르샤에게 망했으며 또 희랍에게 망하고 로마에게 망했습니다.




그런데 예언자 이사야는, 이처럼 죽은 나라에서 새 왕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 왕은 하느님의 온갖 영을 다 받은 자로서 세상을 변화시키게 됩니다. 독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어울리며 사자가 송아지와 놀고 곰이 암소와 친구가 됩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이냐?




사자나 늑대는 사나운 이빨과 발톱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제 본능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난폭한 습성을 버리고 오히려 양순하고 친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수백 년이 지나 예수님이 오셨을 때 실제로 그 모든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몸을 파는 창녀가 제 습성대로 살지 않고 깨끗하고 거룩하게 됩니다. 사납게 굴던 정신병자가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로 온순하게 됩니다. 남을 등쳐먹던 세리가 자기 습성이나 본능을 버리고 자기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줍니다. 서로 미워서 이를 갈던 사람들이 사랑하게 되며 심지어는 죽은 사람이 살아납니다.




모든 민족이 예수님께 모여들고 있으며 그리고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 영광이 빛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세상은 제 본능이나 습성대로 살지 않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자 요한은 하늘나라가 다가왔으니 회개하라고 유다 광야에서 외쳤습니다.




요한이 말하는 회개가 뭐냐? 그것은 자기 본능대로 살고 자기 습성대로 살던 자들이 자신들의 잘못된 것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테면, 말하고 싶은 대로 다 말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이야 상처를 받건 말건, 그것이 또 사실이건 거짓이건 자기 본능대로 자기 습성대로 있는 말, 없는 말 다 떠벌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정말 주님을 영접하고자 한다면 입을 다물 수 있어야 합니다. 사자나 늑대가 입을 다물듯이 사나운 자신의 입을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쓰고 싶은 대로 다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시고 싶은 대로 다 마시며, 탐욕을 부리고 싶은 대로 다 부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자들은 그 습성을 버리고 생활태도를 고쳐야 합니다. 그리고 미워하던 사람들은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며 시기와 질투를 일삼던 사람들은 그 마음을 버리고 존경해 주어야 합니다.




얼마 전에 폭음과 폭식은 먹는 습관이 잘못된 거지 습성에서 온다는 내용의 책을 읽고는 크게 공감한 일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부끄럽게도 제가 바로 그 거지 습성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거지는 어디다 내놔도 거지입니다. 특히 자신이 거지라는 것을 모르는 거지는 평생 거지가 됩니다. 거지 뿐만도 아닙니다. 알콜환자가 자신이 알콜환자라는 것을 모르면 평생 환자가 되며 도박꾼도 그렇고 습관적인 죄를 짓는 거의 모든 분들이 그렇습니다.




대림절은 하늘나라가 가까이 오는 때요 또한 회개를 통해서 그 나라를 차지하는 때입니다. 오늘 요한은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닿았다는 절박함을 보여 주면서 미루지 말고 서둘러서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 서둘러 회개해야 하느냐? 회개는 행실로써 보여 줘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필요합니다. 만일에 회개한다 해놓고 행실로써 보여 주지 못하다면 그는 하느님을 기만하고 있는 것이며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탄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부터라도 마음을 먹으면 무슨 일이고 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다른 곳에서 태어나시지 않습니다. 바로 여러분 마음 안에서, 그리고 그 마음이 있는 가정과 직장 안에서 태어나십니다.




따라서 잘못을 뉘우치고 행실을 뜯어고침으로써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영접하여 모시도록 합시다.











5.                대림 제2주일 <마태 3,1-12>(가)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변희선 신부




  내가 예수회 신학생으로 철학과정을 마치고 실습기를 시작하면서 연레피정을 하던 때였다. 당시의 나는 수도생활의 의미와 기쁨도 잘 느끼지 못하고, 여러 가지의 내적 갈등으로 고심하고 있었다. 예수회원으로서 1년에 한 번은 의무적으로 해야하는 피정이기에 시작했지만 자발적으로 열심히 기도에 임하기에는 내 마음이 잘 움직이지 않는 상태였다.




  약 일주일 동안 침묵 안에서 영적 지도신부님의 지도를 받으면서 열심히 기도하려했지만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지는 듯 했다. 이제 3일 후면 피정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 날 오후 산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 순간의 내 마음은 매우 무거웠고, 세상 만사가 절망적인 것으로 가득한 것처럼 여겨졌다.




  이러한 느낌이 시작된 것은 아버지에대한 나의 미움을 발견한 이후로 급격히 강해졌다. 나의 어린 시절 아버님은 나와 동생들보다는 유난히도 형님을 편애하셨다는 게 나의 불만과 미움의 이유였다.




  아버님에 대한 불만과 미움을 상당히 오래 동안 마음속에 억누르고 감추며 살아온 내가 그 미운 마음을 제대로 인식하면서 절망감에 빠진 것이었다. 좌절감과 절망감에 빠진 나는 순간적으로 세상만사가 싫었고 수도생활도 포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가야할 곳은 아무 데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어디로 가야하나? 절망감과 미움의 감정이 극에 달하는 순간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아버지를 망신시키고자 수도원을 떠나자!」 그러자 나의 마음은 더욱 더 고통스러웠다. 온 몸이 일시적으로 맥이 풀리고 아파 왔다. 바로 그 순간 마음 속 깊이에서 주님의 말씀이 들려왔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이들에게 해방의 기쁜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이상하게도 이 말씀을 들은 나는 하염없이 울기 시작하였다. 알 수도 없는 감동과 감사의 마음이 용솟음쳐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나는 분명히 깨달았다. 그분께서 죄인인 나를 이미 구원하셨다는 현실을 어쩔 수없이 받아들인 것이다.


이 현실을 받아들이자 아버님에서 그 동안 내게 해주신 모든 인내와 사랑이 마구잡이처럼 떠올랐다. 겉잡을 수 없는 눈물 속에서 나는 거듭나고 있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미운 마음의 속박을 받는 노예가 아니며, 참된 회개가 무엇인지도 실감하게 된 것이었다.



대림절은 우리의 모든 세상사를 떠나서 주님을 맞이하러 떠나는 때이다. 우선 우리의 탐욕으로부터 잠시 벗어나는 때이다.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소비해야 한다는 탐욕의 굴레에 빠진 우리가 삶의 목적은 탐욕이 아니라 해방임을 깨달아야 하는 때이다-




  둘째로 대림절은 미움과 증오에서 벗어나는 때이다. 우리의 마음 속 깊이 새겨진 이웃에 대한 미움과 증오의 감정들을 훌훌 털어 버리는 때인 것이다. 과연 누가 누구를 미워할 자격조차 있는가? 하고 자문자답해보자. 우리는 나름대로의 미움의 이유와 핑계를 제시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누구를 미워하고 있다면, 그 상대도 나를 미워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으리라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셋째로 진정한 사랑은 고통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한다. 대림절은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실감하는 때이다. 나의 아픔들, 고통들, 희생들 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발견하는 때이다. 사랑은 단순히 내가 누구를 좋아하는 것 그 이상이다. 주님의 사랑은 희생과 고통에도 불구하고조건 없이 자신을 내어주는 행위이다.




  마지막으로 대림절은 무지와 편견에서 벗어나는 때이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왜곡된 지식과 아집에 사로잡혀서 진실과 진리를 외면하며 살아가고 있다. 대림절은 진리의 빛을 찾는 구도자의 마음으로 자신의 편협한 사고방식들을 과감히 버리는 때이다. 탐욕과 미움과 무지에서 벗어나는 것을 예수님은 회개라고 말씀하신다.




  「회개하시오. 하느님의 때, 대림절이 가까이 왔습니다」












6.           대림 제2주일 <마태 3, 1-12> (가)   회개하라, 회개하라!




  광야에 나타난 세례자 요한! 그의 차림새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낙타 털옷을 입고 가죽띠을 둘렀으니, 호기심 때문에라도 사람들은 그에게 다가갔을 것이다. 더구나 광야에서 야인으로 살았으니, 수염은 얼마나 길었겠는가! 만일 그가 바리사이파나 사두가이파 사람의 옷을 입었더라면 그들에게 구역질나도록 질린 민중들은 등을 돌렸을 것이다.




괴짜 요한의 출현 




  세례자 요한은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다, 그는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마치 짐승처럼 산 야인이었다. 왜 그렇게 살았을까? 하느님과 친해지기 위해서였다. 말하자면 회개하기 위한 준비의 삶이었다. 그는 하느님과 가까운 사람이었다. 모세가 하느님과 마주보고 대화했듯이 그도 하느님과 그렇게 마주보듯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는 내적으로 꽉 찬 사람이었다.



  그가 광야에 나타나서 지른 일성은 ‘회개하라’였다. 구세주께서 이 질곡의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주시려고 오실 때가 되었으니 회개하라는 것이었다. 생활 태도를 뜯어고치라는 분부였다. 만일 회개했으면 그 표시로 세례를 받으라고 했다.




  그의 외침은 효과가 있었다. 사람들은 몰려들었다. 그리고 세례를 받았다. 물론 당시의 종교지도자들도 ‘회개하라’를 외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외침은 맥빠진 외침이었다. 설득력이 없었다. 왜 그랬을까?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 여기에서 세례자 요한처럼 회개를 외쳐야 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두말할 것도 없이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인 우리 모두다, 왜냐하면 우리가 세례로 그리스도의 사제직, 예언직, 왕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비신자들에게 회개를 외치기 위해서는 우리 먼저 회개한 사람이어야 한다. 회개하지 못한 사람의 외침은 힘이 없으며 호소력도 있을 수 없다.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사두가이파 사람의 외침이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물론 그 결과도 뻔하다.




  오늘 복음의 메시지




구세주께서 가까이 오셨으니 회개하라는 것이 오늘 복음의 핵심이다. ‘회개하라, 회개하라.’ 무엇을 회개하라는 말인가? 신앙인의 이중성은 어느 시대나 큰 골칫거리다. 예배를 위해 성전에 나가서는 손을 합장하고 “주님, 주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를 연신 외치면서도, 정작 가슴속에 응어리진 마음과 시기는 곱게 싸서 가슴깊이 고이 간직한 채 사는 신앙인들이 있다. 회개한 사람들만이 모실 수 있는 성체를 감격한 모습으로 눈을 사르르 감은 채 모시면서도, 일단 성당만 벗어나면 눈빛이 달라지고, 가정으로 돌아가서는 가족이나 형제들을 죽도록 미워하는 신앙인들이 없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회개는 겉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행실로 내보여야 한다. 우리는 지금 경제위기를 맞고 있다. 과연 우리는 나누고 있는가? 회개하고 있는가?




  회개한 사람은 세례를 받으라고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회개하지 않으면서도 세례받은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교회도 부패한 냄새간 나는 것이다. 세례 받기 전의 못된 버릇은 하나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계속하면서, 성당에는 잘 나가는 경우가 있어 세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세례받은 사람들은 인생관, 가치관, 우주관도 바꿔어야 한다. 사일록 같은 사람이 사회복지단체에 많은 돈을 헌납하는 기적, 남을 사기치고 살아가던 사람이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으로 변화된 기적이 일어나야 한다. 난잡한 성생활로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사람이라면, 회개하여 오로지 아내만을 사랑하는 새 사람이 돼야 한다.


또한 단지, 별을 천문학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위대하신 능력의 표현으로도 볼 수 있어야 한다.




  성령으로 부정 씻어내자




  얼마나 많은 신앙인들이 부정과 연루되어있는가? 세례받기 전의 부정과 부패로 더럽게 물들여진 나의 존재를 회개로 세례의 물로, 성령으로 말끔히 씻어냈다면 아름다운 새 인생은 시작됐을 것이다.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우리는 지금 너무나 큰 시련 앞에 서 있다. 남쪽도 북쪽도 모두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교회 전체가 회개하지 않으면, 즉 거듭나지 않으면 이번 성탄에 예수님은 오시기가 너무 힘드실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기우일까? 그분 오시는 길에 배고픈 사람들이 수없이 쓰러져 있다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시기 전에 우선 그들을 일으켜 세우실 것이다.




  우리가 먼저 그들을 튼튼하게 하고 그분 오시는데 장애 되는 것들을 말끔히 치워놓아야 할 것이다. 이 일이 회개다. 각자가 서있는 곳에서 그분 오시는 길을 말끔히 청소해야겠다.










7.         대림 제2주일 <마태 3,1-12> (가) 대림절의 사나이 


                                                      김현준 신부 




사진을 취미로 찍는 나의 동료 신부가 나에게 준 사진선물은 회색 빛 바다에 배 한 척 떠 있는 것이었다. 그가 찍은 많은 사진 중에서 왜 그 사진을 나에게 주었는지, 주면서 아무 말도 없었으니 그 속을 모르지만, 나는 그 사진을 볼 때마다 시선을 뱃머리 쪽에 두고 있다. 이 배가 항구로 들어가는 배인지 아니면 깊은 바다로 나가고 있는지, 그도 저도 아닌 그냥 바다에 떠 있는지?



사진 속의 통통배는 뱃머리가 왼쪽으로 되어 있지만, 동서남북을 가릴 수 없는 바다 한복판이고, 좌우에 좌표가 될만한 무엇도 없기에,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그 방향을 알 수가 없다. 그래도 나는 저 배는 항구로 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며 바라본다.


 


대림절이 오면 우리 삶의 바다에 어김없이 나타나는 한사람이 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세례자 요한이다. 사순절은 요한이 잡히어 퇴장한 후(마르 1,14) 예수의 등장과 활동상을 그리고 있다면, 대림절은 어김없이 요한을 등장시키고 그로 하여금 회개를 외치고 뒤에 올 예수를 증언하게 한다.


 


요한은 광야, 그 모래의 바다, “모래의 살에 부는 바람” 속에서 ‘회개하라’는 외침으로 사람들 마음을 일깨우며, 그리스도 오심을 알리고 그 길을 닦는다.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는 ’회개(Metanoia)’는 온전히 새 사람이 되라는 권고이다. 잘못했으니 이젠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하는 정도가 아니다. 새 사람이 되는 것,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완전히 새롭게 달라지는 것이다. 바다에 떠 있는 배는 뱃머리를 어디로 향하느냐에 따라 항구로 들어오는지, 더 깊은 바다로 나아가는지, 그 방향이 정해지듯이 우리 삶의 방향을 어디로’향할 것인지, 우리 삶의 주관자가 누구인지를 알아 방향 전환을 하는 것이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15년 전 본당 주임 신부로 첫 발령을 받고, 4개월 후 맞이하는 첫 성탄 때에 내가 먼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새롭게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 속에 잠겨 있었다. 서양 신부들이 15년 계신 곳에 한국인 신부로 첫발을 내디디면서, 본당의 변화를 모색할 때였다, 아주 우연한 기회로 머리가 흘러내려 눈을 덮는 것을(그때는 머리를 길게 기를 때였다) 안내려 오게 하려는 마음에 끌려,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핀컬 퍼머(?)라는 것을 했다.


면소재지의 좁은 동네라, 내가 성당에 들어가기도 전에 벌써 그 소문은 성당내에 퍼졌다. 결국 한번 쳐다보는 데 5백원이라고 일방적으로 선포하고, 그것은 그 날 밤 구유에 나신아기 예수님이 다 차지하셨지만, 나는 발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내 두 발을 그분 앞으로 내어밀며 발톱을 깎았다.


 


시인 마종기는 ‘층청도의 구름’이라는 시에서 충청도를 여행하며 찍은 사진을 한참 보다가 사진에서 내가 지워지고, 너도 지워지고, 주위도 지워지고, 충청도 구름만 사진에 가득 차는, 그러다 그 구름도 안보이는‥‥ 나중에는 그 구름이 많이 울었을 충청도 사람의 짭짤한 눈물이 되고, 고국을 떠나 있는 자신의 입에 그 충청도 구름 맛이 흘러드는 경험을 노래한다.




참된 회개, 상등 통회, 때는 나는 안보이고 그분의 – 때로는 손에 키를 드시고 타작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불에 태우는(마태 13,37) – 신발 끈이 보인다. 그 신발끈을 잡고 머리 들어 쳐다보면, 십자가에서 두 팔을 벌리고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루가 23,34)라고 하는 그분의 얼굴을 만난다.       




        광야에 선 요한의 외침         




‘회개, 회개’하다 보면, 계산대에 앉아서 나가고 들어오는 돈을 잘 따져 셈하는 ’회계(會計)’로도 들리는 ‘회개(悔改)’보다는 머리를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리는 뜻으로의 회두(回頭)라는 옛말이 더 내 마음에 와 닿는 ‘회개’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인 요한의 설교 첫머리이자 중심 내용이다.


 


대림절이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대림절의 사나이 요한의 ‘회개하라’는 그 쉰 목소리에 귀기울이며,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이도록 우리를 일깨우는 요한의 삶의 방향에 시선을 두면서, 곧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키워나가야겠다.










 




8.        대림 제2주일 마르 1,1-8 (나)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시오.


                                                 박성팔 신부




회개하는 사람은 겸손과 용기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이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대림 제 2주일을 맞이하면서 구세주 오심을 예비하기 위해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하고 외치는 세례자 요한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메말라 가는 세상에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하고 외친 세례자 요한의 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청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말과 행실로써 회개의 필요성을 보여주고, 가까이 오시는 구세주가 바로 영원한 심판자이심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보다 더 강하고 훌륭한 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역사상의 예수님은 이미 우리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이제 그분은 부활하여 우리 안에 계시고, 아직도 어두움 속에서 방황하는 우리에게 당신의 한없는 사랑과 은총으로 구원을 주시기 위해 회개할 것을 바라십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완성될 하느님 나라,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그 날을 학수고대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어떠한 삶이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회개로 점철된 삶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믿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있을 수 없듯이, 회개하지 않는, 자기 생활에 대해 참회하지 않는 신앙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우리 모두는 구원받았고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완성될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기 위해서는 매순간 회개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죄녀였던 막달레나와 같이 그리스만이 생의 전부이어야 합니다. 적어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진정한 회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관료적인 눈물도 아니고 힘없고 가난한 이의 하소연 같은 것도 아니며, 더욱이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직면했을 때 흘리는 눈물도 아닙니다. 회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목말라하는, 하느님께 신뢰하는, 하느님께 전적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회개하는 사람은 자신이 마음으로부터 죄인임을 인정할 뿐 아니라 겉으로도 고백할 수 있는 겸손과 용기를 가진 사람입니다.



이를테면 사도 베드로와 같이 말입니다. 우리는 우직하고 고집 불통이처럼 보이는 베드로 사도에게서 참된 회개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잡히시자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지만 용기를 내어 예수님의 뒤를 따라 나섰던 베드로…, 그러나 베드로도 어느 여종의 질문에 아예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예수님을 배반했음을 알았을 때 얼마나 마음 아파하며 울었습니까?


아마 예수님께 대한 깊은 사랑 때문에 더욱 마음이 괴로웠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비록 죄인이었지만 좌절하지 않고 하느님께 매달렸습니다. 하느님께 돌아와 자신을 송두리째 바친 것입니다. 그러기에 베드로 사도는 어느 제자보다도 겸손하고 용기있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비해 계산적이고 약삭빠른 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지만 모든 것을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고 판단하여 스스로 자멸했습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사랑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2,000년 전에 회개하라고 외치던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도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요한 세자나 예수님이 지금 예기에 계신다면, 온갖 죄악과 불의가 난무하고 이기심과 무관심 속에 허덕이는 우리를 보신다면 분명히 이렇게 외치실 것입니다. 지금은 회개의 때이니 온갖 죄악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고 어두움에서 광명에로 나오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회개하여 하느님이 어떠한 형태로 오시든 기꺼이 맞이할 준비를 기꺼이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삶으로써 이 세상에 하느님의 사랑을 심어야 합니다. 뭇 사람들의 표적이었던 세례자 요한과 베드로와 같이 회개의 열매인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고, 정직하고 분수에 맞는 생활을 하여 그의 길을 고르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 때, 주님 오시는 그날 우리의 아픔과 갈등은 영원한 기쁨으로 변할 것입니다. 아멘.










9.       대림 제2주일 마르 1,1-8 (나)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입니까?


                                                          이정운 신부



오신다던 분이 오시지 않을 때 기다림은 점점 높아만 갑니다.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시간이 지루하면 할수록 커지는 것입니다. 낭군을 맞을 준비를 하는 낭자의 심정을 생각하면 알 일입니다. 낭자가 낭군을 그처럼 그립고 보고 싶어하는 까닭은 낭군은 낭자를 사랑해 주고 돌보아주며 온갖 힘을 다해서 낭자를 위하여 심려를 아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실 낭군을 기다리는 낭자의 마음이 이렇고 또한 “누가 나의 낭군이 될지?”를 모르는 그 어느 낭자들에게는 “당신이 바로(내게)오실 그분이십니까?(마태 11,3)”하고 입속말을 하며, 지나는 그 알 수 없는 낭군에게 물으며 멀리서 뒤를 따라가 보기도 합니다. 낭군이 오신다는 소식이 들리니 낭군을 사모하던 그들은 저마다 문을 박차고 뛰쳐나와 낭군의 소식을 가진 분에게 가까이 하게 됩니다.




이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도 아니고 ‘화려하게 옷을 입은 왕궁에 있는 사람’이 지나는 것을 구경하려고 뛰쳐나간 자들이 아니었고(마태 11,7-9) 더구나 하릴없이 서성대는 방랑객은 더구나 아닙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낭군의 소식만이 유일한 것이요, 그 소식만이 그 낭자들에게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낭군이 오시면 지금까지 듣지 못하던 소식을 듣게 되어 귀가 즐겁게 되고, 보지 못했던 모습을 보게 되어 두 눈이 밝아져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게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될 터이고, 낭군을 맞으러 가지 못할 때에 무겁던 두 다리는 낭군을 맞을 때면 가벼워질 것이고, 입속으로만 부르던 입이 열려 「여보」의 고함소리로 지금까지 입다물고 말못하던 벙어리 신세를 면하게 되며, 기다리던 맘의 깊은 상처를 모두 깨끗이 낫게 하여 주실 것이니(이사 26,19;29,18이하;35,5이하; 말라 3,1; 마태 11,9; 요한 6,61 참조), 낭군의 소식을 들은 사람은 낭군이 오시는 실에 마중나아가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입니까?(마태 11,3)하고 인사를 전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인류는 이처럼 낭군을 기다렸고, 인류를 사랑하고 돌보아주실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인류를 사랑하시는 메시아는 당신의 소식을 미리 사신을 보내어 알려주셔야 했으니 그 까닭은 낭군을 맞이할 낭자를 미리 준비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낭자의 모습이 더욱 낭군 앞에 기쁘게 드러나기 위해서 미리 세밀한 데까지 심려를 기울이는 그 사랑이 하실 일이었습니다. 인류의 낭군은 이미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눈을 밝게 해주셨고 우리의 무거운 다리를 가볍게 해주셨으며, 낭군의 소식을 밤새도록 들었습니다. 또 낭군을 본 기쁨을 말할 수 있게 우리는 벙어리 신세를 면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다시 떠나신 것은 우리를 데려가시기 위한 꽃가마를 갖고 오시려는 뜻에서였습니다(사도 1,11; 마태 24,29-30; 마르 13,24-27; 루가 21,25-28; 1데살 4,13 참조).주님이 언제 오시겠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이르지 않으셨지만(마태 24,36-44; 마르 13,32-37; 루가 17,26-30.34-36; 마태 25,2-13; 1데살 5,1-3), 우릴 보고 가셨으니, 금방 오실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촛불을 밝히고 자정이 지나고 새벽이 되더라도 깨어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마태 24,42-44;25,6; 마르 13,35; 루가 11,2;21,36; 1데살 5,6-7; 마태 26,38.41).



우리는 그 옛날 주님을 뵈오며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입니까?”하고 기쁨의 인사를 드리던 추억을 더듬으며, 해마다 이때가 되면 옛날 즐거움을 되새기고 다시 오실 낭군의 때가 멀지 아니했음을 의식하며 바쁜 준비를 하는 가운데 예전 기억을 더듬어 입속말로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입니까?”하는 인사말을 되풀이합니다. 그것은 낭군을 대할 기쁨이 설레이도록 우리를 못 견디게 하기 때문입니다.



낭군을 기다리는 만큼, 주님을 기다리는 만큼 알찬 준비로 기쁨을 나눌 수 있게 해야 할 것이고, 아무런 차림 없고 단정한 몸매 없이 얼룩진 용모로 주님 앞에 나갈 것입니까? 우릴 보고 가신 님은 우릴 보러 다시 오실 것이니(사도 1,11), 금방 오실 것입니다. 형제여! 지난번에 가졌던 그 마음 되새겨 이젠 더 빛나는 준비를 갖춥시다.


형제는 주님이 오시는 길에 나아가 초라하고 얼룩진 꼬락서니를 하고서 “당신이 (내게) 오시기로 된 분이시나이까?”하는 감격의 인사를 드리겠습니까?  그때 주님은 형제를 맞는 기쁨이 크겠습니까? 작겠습니까? 작다면 형제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 아름다운 가마에 형제의 용모가 더욱 아름다우려거든 곱게 곱게 차리고 어질고 바른 맘으로 다듬어 나가십시오. 형제의 요즈음의 생활은 금방 오실 주님을 맞는 준비로 분망합니까? 아니면 길거리 어느 주막에서 준비 없는 허송세월을 하고 있습니까? 형제가 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주님을 맞을 준비라는 것을 잊지는 아니했습니까?


그러고서도 주님이 오시는 길에 나아가 감히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입니까?”하고 철면피한 어조로 인사하시렵니까?










10.               대림 제2주일 마르 1,1-8 (나) 주님의 길.


                                                          유재국 신부




우리가 크리스천이라면 우리는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다. 물론 모든 인간이 길을 걷고 있지만, 많은 이들이 슬픔 속에서 길을 걷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생이 죽음으로 끝나며 이 죽음은 일생을 마치는 것 외에 아무 의미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에 모든 인간들과의 동반자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쁘게 인생의 길을 걷고 있다. 우리의 길은 주님의 길이며 주님은 당신의 죽음으로써 우리들에게 새 생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주님의 길”이 실제로 우리 앞에 열려 있다. 오늘 미사의 두 독서는 우리가 길을 걷도록 부르심을 받은 이 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첫 번째 독서는 위로의 책을 쓴 이사야 예언자의 둘째 부분의 책이다. 이 책은 하느님의 백성이 바빌로니아로 유배 갔을 때 기록한 책으로서, 죄를 인식하고 회개하도록 불충실한 백성을 선도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선도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용서해 주고, 복역기간을 끝내 주시는 은혜로운 책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이사야는 “사막에 길을 내어라. 우리의 하느님께서 오신다.”라고 외친다.


주님 당신이 당신 백성을 성지로 인도하기 위하여 유배자들의 선두에 서서 걸어가실 길이다. 이 성지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어 당신 백성 가운데 하느님 현존의 표지가 될 것이다. 주님의 길이란 바로 하느님께서 마치 당신 백성의 목자처럼 백성을 해방시키는 길인 것이다.



이 길에서 당신의 내림을 알리기 위해서 메신저들이 파견된 것이다. “우리의 하느님께서 오신다!”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이 기쁜 소식은 또 하나의 다른 기쁜 소식의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부르는 “복음, 기쁜소리”로서 가장 위대한 복음이며, 세례자 요한이 오늘 마르코 복음서 서두에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기쁜 소식”인 것이다.



과연 이 기쁜 소식은 어떤 것이며, 세례자 요한은 어떻게 이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마르코는 이 질문에 답변한다. 교회가 금년 한해동안 묵상케 하는 마르코 복음서는 이 복음의 대상이며, 요한이 사막에서 설교하기 시작한 사건의 의미를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기록한 것이다. 마르코에 의해서 소개된 요한의 설교는 그의 복음서의 첫 문장이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인 것이다.



요한은 어떻게 그의 사명을 수행하는가? 우리가 조금 전에 읽은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요한은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라고 외친다. 더욱이 요한은 인간의 마음의 길을 준비하기 위하여 회개의 세례를 받을 것을 제의한다. 달리 말하면 청중에게 결백의 예식으로 초대하며 세례를 통해서 죄인들이 용서받을 것이고 하느님의 용서를 받게 되리라고 선포한다. 회개할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길이 열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오실 것이며, 그들을 성화시켜 주실 것이다.



그런데 마르코 복음서에는 이사야서보다 새로운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기에 요한은 다른 예언자들과는 달리, 그의 메시지는 복음의 시작인 것이다. “주의 길을 닦으라”라고 외치면서 요한은 그 어떤 예언자보다 훌륭한 능력을 띠고 사명을 완수할 신비로운 인물의 내림을 준비한다. 그분은 하느님의 용서를 받기 위하여 회개하도록 인간들을 초대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즉 그분이 보내주실 하느님의 성령의 성화로 그들의 죄를 말끔히 씻어 주신다는 뜻이다.




이와같은 권능은 하느님의 능력이다. 이러한 능력을 가진 분의 내림을 요한은 선포했고,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주의 길을 닦으라”라는 새로운 의미가 무엇인지 묵상하자. 요한이 주님의 길을 준비한다. 마르코는 복음의 내용까지도 요약하여 서두에 기록하였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 사실 예수를 통해서 주님이 오신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그런 그리스도만은 아니다. 인간에 지나지 않는 메시아는 아니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주님이시며, 모든 인간들을 구원하고 그들을 성화시킬 권능을 가지고 당신 아버지로부터 파견된 주님이시다.



주님의 길은 바로 예수께서 인류구원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걸으신 길이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류를 구원하고 당신의 부활로써 당신 아버지의 영광에 들어가신 예수의 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길을 홀로 걸으시지 않는다. 그분이 오심으로써 죄인들을 회개시키고, 길을 바꾸게 하며, 당신 아버지께로 나아가도록 인도하신다. 주님의 길은 예수께서 회개한 죄인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드셔서 걸어가는 길이다. 이 길은 우리를 해방시키러 오신 그리스도를 따르게 하는 길이다. 이 길을 따른다는 것은 자유로와진다는 뜻이며, 그것은 예수에 의해 성취된 해방을 수락하는 것이다. 이 해방이란 보다 깊은 의미가 있는데 바빌로니아에서의 유대인들이나 현대 가난한 이들이 물질적으로 해방된다는 뜻과는 다르다. 이 해방은 다른 모든 해방의 원천이 되는 영적 해방을 말하며, 죄에서 해방된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들이 억압당하고 물건처럼 취급되는 그곳에 모든 죄악의 원천을 정신이 정복한다. 지상의 물질과 쾌락이 지배하는 탐욕의 정신을 영적으로 해방시켜 준다.



예수는 이와 같은 노예적 욕망으로부터 당신 제자들을 해방시켜 자유의 길을 열어 주시며, 성령을 받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자유롭게 걸어나가도록 길을 열어 주신다.



주님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에 따른다는 뜻이다. 이 성령이 우리가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그의 삶을 나누며 모든 인간이 우리와 함께 걸어가도록 우리 마음을 채워 주신다.   이 인생의 행로는 어렵고 오랜 시간을 요구한다. 베드로가 지적한 것처럼 하느님은 참는 분이기에 우리는 참고 기다려야 한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 같습니다.”




하느님이 참으신다는 것은 하느님은 인간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의 회개를 기다리신다는 것을 뜻한다. 하느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맡은바 직책에 충실하고, 인생체험을 하도록 내버려두신다. 다만 우리가 주님을 찾을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의 목소리를 우리 마음 안에서 듣게 될 것이며, 또 주님을 찾도록 우리를 부르실 것이다.



신자인 우리에게 질문은 다음과 같다. 내가 선택한 길이 과연 주님의 길인가? 우리의 삶이 희망과 사랑을 드러낸다면, 우리의 기쁨이 하느님 아버지가 지배하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간다는 확신이 서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형제애를 실천한다면 우리가 걷는 길은 분명히 주님의 길일 것이다. 이 길을 우리는 걸어야 하고, 다른 이들을 이 길로 인도해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조자로서 모든 이를 이 길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다.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습니다.” 시간을 선용했을 때 얼마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우리의 시간을 선용함으로써 영원한 나라로 향하여 참으면서 주님의 길을 걸어가자. 세례자 요한처럼 우리는 기쁜 소식을 모르는 사람들의 마음에 주님의 길을 준비시키는 일에 기쁘게 나서자.












   




11.       대림 제2주일 (나해)   사막에 길을 내어라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이사 40,1~5.9~11 (주의 길을 내어라) 


제2독서 Ⅱ베드 3,8~14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복 음 마르 1,1~8 (주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오늘 성서의 주제는 ‘회개’입니다.




우리는 대림절이라는 전례의 시기 안에서 오실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평생 기다리고 맞이해야 할 분이지만 그래도 교회에서는 특별한 시기를 정해 놓고 어떤 의식 안에서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과 가슴 안에 그분이 오시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그분을 모실 수 있는 최상의 준비가 되겠는가 하는 것이 오늘 말씀의 내용입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회개입니다. 세상 천지를 다 둘러봐도 주님을 찾아서 만날 수 있는 길은 자신의 회개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개선할 때 주님은 비로소 그 인생 안에 오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다 실제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주님을 기다리며 준비해야 합니다.




“야훼께서 오신다. 사막에 길을 내어라.”




이 말씀은 유대백성이 바빌론에서 귀양살이하며 고생할 때 이제 하느님께서 찾아 주시어 해방의 날을 맞게 되리니 그분이 오실 길을 닦아야 한다는 이사야 예언자의 기쁨과 희망에 찬 목소리입니다. 그리고 길을 닦으라는 말씀은 다시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에 담겨서 오늘 복음에서도 울리고 있습니다.




회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굉장히 어렵습니다.




저는 젊은 시절에 술로 인해서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나이 들어서도 여전했습니다. 고해성사도 수없이 보았지만 허사였습니다. 술로 인해 짓는 죄, 술을 끊지 않고는 다른 죄를 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술을 끊기까지는 3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습니다.




너무도 힘들고 어려운 작업이었습니다. 그러나 은총이었습니다. 어떤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필요없는 말을 너무 많이 하는 여자였습니다. 그러니까 거짓말도 많이 합니다. 물론 고의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는 결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데 말을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남을 속이면서 허풍을 떨고 거짓말을 합니다. 여자가 그랬습니다. 아주 죽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묘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탄 면접을 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마침 교무금 책정을 하는데 그 여자가 미리 죽는 소리를 했습니다. 그 의도는 어떻게 해서든지 적게 내 보자는 심사였습니다. 그때 제가 그랬습니다. 자매님은 왜 늘 거짓말 속에서만 살려고 하느냐, 교무금은 다 안 내도 좋으니 수입의 십분의 일이 도대체 얼마인지 정직하게 말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 여자가 얼굴이 파래지더니 자기가 고집하던 금액을 열 배로 늘려서 책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필요없는 거짓말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하는 얘기지만, 천주교 신자들은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에 너무도 인색합니다. 벌벌 떱니다. 개신교 신자들은 십분의 일을 안내면 죽는 줄 아는데 천주교 신자들은 거꾸로 십분의 일 을 내면 죽는 줄 압니다. 내지도 않는 사람들이 불평은 도맡아서 하며 그러면서도 점잖게 영성체하는 것을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때도 있습니다. 무엇이 잘못된 줄을 모릅니다.




성서를 많이 알고 있고 교리에 상식이 아무리 밝다 해도 그가 진정 자신의 삶 안에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는 위선자요 죄인입니다. 그래서 열심하다는 자들과 성직자 또는 수도자들이 회개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아는 것은 똑똑합니다. 그러면서도 듣지를 못하고 보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회개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특히 인권주일입니다. ‘사람 밑에 사람 없고 사람 위에 사람 없다.’라는 오랜 표어는 진정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사람 밑에 사람이 있으며 사람 위에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 밑에 있는 사람을 밟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죄인인 줄을 모르고 오히려 떳떳하고 양심 바른 체 합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도 그런 일이 없는지 각별히 살펴봐야 합니다.




주님은 진정 회개를 원하십니다. 그분이 오시는 길을 닦는 최고의 길은 자신의 삶을 개선하여 올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이제 성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새벽 찬송은 분명히 회개한 영혼 안에 메아리칠 것이며 바로 거기에서 아기 예수님은 놀라운 은총으로 탄생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12.             대림 제2주일 <마르 1,1-8> (나) 무기수와 대통령의 갈림길


                                                             김영진 신부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절친한 친구 두 사람이 늘 함께 붙어 다니며 노름도 하고, 술집도 드나들고 하는 등 좋지 못한 짓들을 저지르곤 했다 한다. 어느 주일날 저녁, 두 사람은 여느 때처럼 여자들이 기다리는 술집으로 가고 있었는데, 마침 교회 앞에 써놓은 강론 게시판에서 ‘죄의 값은 죽음 뿐’이라는 제목을 보게 되었다. 죄의 값은 죽음이라니, 지금 죄를 지으러 가는 길인데, 뭐 저런 제목이 붙어 있는가하는 생각에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두 친구는 망설이다가 한 친구는 계속 술집을 가자고 했고, 한 친구는 영 기분이 안 좋으니, 난 안가겠다고 했다. 이렇게 가자거니 말자거니 하다가 둘은 서로 갈라져서, 한 친구는 그대로 놀러가고, 한 친구는 돌아서서 가는 체 하다가 교회에 들어가, 맨 뒷좌석에서 강론을 듣고 자신의 삶에 대하여 깊이 뉘우치고 새로운, 계획을 세우며 살았다.


 


그리하여 열심히 공부도 하고 많은 것을 연구하였으며, 후일 미국의 대통령까지 되었다. 대통령이 된 후 신문에 그의 취임기사와 더불어 유년기, 청년기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그때 미국의 유명한 교도소에서는 한 늙은 죄수가 눈물을 흘리며 그 기사를 읽고 있었다. 그는 왜 눈물을 흘리면서 신문을 읽느냐고 묻는 다른 죄수들에게, “이 사람은 30년 전에 내 친구였는데, 이제 대통령이 되었고, 나는 이 교도소에서 내가 지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하는 종신형을 받았으니, 이런 원통하고 분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 말했다. 이 대통령이 바로 클리블랜드 대통령이었다 한다.       




             회개의 시작은 발길 돌리기




자신의 삶을 반성하며, 잘못된 삶을 뉘우치고, 새로운 계획하에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쉬운 듯 하나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인 것 같다. 회개는 발길을 돌리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술집으로 가던 발길을 교회로 돌리는 것처럼, 세상으로만 향하던 발길을 하느님께로 돌리는 것, 그리하여 재물과 명예를 찾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남을 생각지 않던 이기적인 마음에서 남을 나보다 먼저 배려하려는 이타적인 마음으로 돌리는 것, 남에게 상처를 입히던 자신의 알량한 자존심과 교만에서 부서져 남을 존경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겸손된 자가 되도록 마음의 발길을 돌리는 것, 그것을 우리는 회개라고 하지 않는가.


 


시골 유지들 여럿이 모여 있던 어느 자리에서, 성당에 다니던 한 형제가 신앙이 없는 한 친구에게 이런 말을 했다. “어이친구, 이제 세상살이하면서 죄도 지을 만큼 지었으니, 고집 부리지 말고 성당에 좀 나와 봐. 그러다가 그냥 죽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친구 쫓아서 강남도 간다는데, 내 소원 좀 들어주게나. “옆에서 그 말을 듣던 나는 좀 부끄러웠다. 나도 그 사람을 여러 번 만났는데 한번도 성당에 나오라는 이야기를 못했던 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교우형제의 말이 끝나자마자 신앙이 없는 그 친구는, “이 사람아, 자네나 잘 믿고 천당에 가게, 난 안믿고 내 멋대로 살다가 지옥에 가겠네, 나라도 지옥에 가야지, 다 예수 믿고 천당가면 지옥엔 누가 가겠나”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 지역사회에서 유지 노릇을 하고 지도자입녜 하는 이들이 다 그런 생각과 말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잘못된 자신의 삶을 반성조차 할 줄 모르고 실망과 좌절을 안겨주는 인사들이 하나 둘이 아님을 부정할 수 없다,



복음에서 세자 요한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회개’, 수없이 들어왔을 이 단어가, 지금 나의 마음에 얼마만큼 의미를 주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회개가 필요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나의 가족이나 친척중의 누구이며, 사회 구성원중의 누구라고 생각해 오지 않았는지. 그리고 설령 자신에게서 회개할 잘못을 생각해 낸다 하여도 그것은 부득이한 것이었으며, 지금 당장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가 없는 것으로 묻어두고 치부해 버리곤 하지 않았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세상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인간의 성숙은 끊임없는 회개의 삶을 자신에게 요구하는데 있는 것이거늘, 지나온 일에 대한 반성은 커녕 현재의 그릇된 삶에 안주하거나 육(肉)적인 만족과 욕망을 채우는 데만 자신의 정열을 쏟고 있다면, 회개란 단어가 영영 남의 단어가 되고 말지 않겠는가. 어서 일어나 보자. 게을렀던 마음에서, 믿지 못했던 불신앙의 마음에서 일어나 보자. 교만하고 이기적이며, 미움과 분열을 일으키던 마음에서 지난날의 먼지를 털어버리고 일어나 보자. 자신은 아무 죄도 지은 것이 없다고 하는 어리석은 고집에서 일어나 보자. 죄를 짓기는 지었으되 ,그것은 어쩔 수 업었던 것이었다 고 말하고 싶은 편견에서 일어나 보자,


 


그리하여 세상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의 삶, 자기 중심에서 타인 중심으로의 삶으로 변화해 보자, 청년 클리블랜드가 세상 중심으로 살았던 자신의 삶에서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모습과, 그냥 세상 중심으로 죄짓고 살다가 “나라도 지옥에 가 야지”하며 당당하게 말하던 그 시골 유지의 말이 자꾸만 내 머릿속을 맴도는 밤이다,


        












13.             대림 제2주일(자선주일)     (나)   진정한 자선


                                                      김평겸  신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사랑으로 내어놓으신 그리스도의 나눔이야말로 진정한 자선의 표양인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대림시기는 한편으로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을 재현하며 한편으로 세말에 오실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시기로 이 시기에는 회개와 보속으로 주님을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대림 3주는 이제 곧 다가올 성탄의 기쁨을 미리 맛보는 주일로 희망과 기쁨으로 지내는 주일입니다. 그래서 대림 3주를 가우데떼(기쁨의 주일)이라 부르기도 하고, 희망과 기쁨의 상징인 장미색 제의를 입기에 장미 주일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다가올 성탄을 기다리며, 우리에게 다가오는 주님의 탄생을 함께 기뻐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탄생을 함께 나누고자 이 주일을 자선주일로 정하였습니다.




자선이란 내가 가진 것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나눔의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것을 타인과 함께 나눈다는 것은 실지 쉬운 일이지만 한편으로 무엇보다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저 역시 제가 아는 사람들에게 제가 가진 것을 쉬이 나누기도 하고 그들의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간혹 제가 친절하고 욕심 없는 신부라고 하지만 실지 제 자신은 그들의 칭찬을 받을 만큼 착한 신부는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저는 상당히 위선적인 삶을 삽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것을 나누어 줄 때 상당한 계산을 합니다.




ꡒ내가 저 사람에게 이것을 준다면 그는 나에게 무엇을 줄까? 나의 이 행위를 신자들이 안다면 나를 어떻게 평가해 줄까? 나의 도움을 받는 이 사람은 얼마나 나를 고마워하며 나에게 충성을 바칠까?ꡓ하는 위선적인 생각을 먼저 합니다. 혹은 가난한 내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그 때에 대한 보상 심리로 할 때도 있고, 더러는 ꡒ너보다 내가 낫다.ꡓ는 나의 우월감을 과시함으로써 상대를 위축시키기 위해 자선을 베풀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실지 자선을 베풀고 나는 우월감에 젖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의 도움을 받은 사람이 내가 기대하는 만큼 부응하지 못할 때 나는 배신감을 느끼고, 마음의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나의 이러한 모습은 진정한 자선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자선은 물질적 보상을 바라는 것도, 나를 인정 받는 것도, 나의 삶에 대한 보상심리도, 나의 과시도 아니라 사랑으로 거저 나누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습을 그리스도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사랑으로 내어 놓으신 그리스도의 나눔이야말로 진정한 자선의 표양인 것입니다. 매일의 미사 성제를 통해 이 나눔을 재현하고 있지만 얼마나 깊이 체험하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그저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저 이제 곧 닥쳐올 성탄을 기다리며 다가올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이 자선주일이나마 반성하며 살고자 합니다.


14.             대림 제2주일 (나)   사람 대접을 받고 싶은 주님?


                                                   노영찬  신부




공부하러 학교가지, 맞으러 학교가나.ꡑ 얼마 전 서울의 모 여자중학교에서 한 학생이 동료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고 끝내 세상을 떠난 사건이 생긴 후에 열린 학교 폭력 추방 구호 중에 나온 말입니다. 대낮에 동네 놀이터에서 장시간에 걸쳐 여러 명의 여중생들이 친구를 때리는 장면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 이 땅에서 사람이 어떤 대접을 받는가에 대한 서글픈 상징처럼 여겨집니다.




사람들의 관계가 강자와 약자로 구분되고 강자의 횡포가 약자의 신음과 대비되는 현실은 어린 여학생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퇴출시대」라는 소설 제목이 등장할 만큼, 우리 사회는 개인들간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측면에서 영역을 가릴 것 없이 살벌한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싸움터가 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우려와 탄식, 분노를 감추기 어렵습니다. 오죽하면 이 땅을 빛낸 자랑스런 업적으로 국가 훈장을 받은 어떤 체육인이 유치원 여름 캠프에 보냈던 어린 자식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겪고 그 훈장을 반납하고 절망의 눈물을 흘리며 이 땅을 버리고 이민을 갔겠습니까?




보통 사람이 정당한 사람 대접을 받으며 작지만 행복한 삶을 꿈꾸기에는 너무나 많은 장애물이 겹겹이 존재하는 이 나라를 떠나는 사람들. 죽으나 사나 어쩔 수 없이 이 나라에 남아야 하는 사람들. 모두가 깨어지고 부서지고 짓밟힌ꡐ하느님의 모상ꡑ들입니다. 하긴 돈과 자리, 학교와 지역의 배경과 연줄이 하느님보다 더 실제적인 힘을 행사하는 세상인데 하느님의 모습을 닮았다는 사람이 대접을 못 받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여기에 또 다시 불어닥친 경제위기의 엄혹한 칼바람은 우리의 인권을 더 움츠리게 만듭니다.




세례자 요한이 활동했던 이천 년 전 팔레스티나의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도 오늘과 그 본질에서 별반 차이가 없었던가 봅니다. 사람 대접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골짜기, 산, 언덕으로 표현됩니다. 골짜기가 메워지고 산과 언덕이 낮아지고 굽은 데는 바르게 하고 험한 데는 평탄한 길이 되지 않고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없다는 요한의 준열한 경고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그리고 이 경고를 외면하고서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드러내는 말투, 몸짓, 생각이 과연 사람을 사람답게 대접하고 대접받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는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올바른 실천이 없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오시고 싶어도 오실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갖가지 형태의 폭력 때문에 인권에 깊은 상처를 입어 사람 대접을 못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5.       대림 제2주일(인권주일) (나) 주님이 오시는데 …


                                                     정양현 신부




천년을 마감하는 달력 한 장이 마지막 잎새처럼 벽에 걸려 있습니다. 이 한장이 우리의 삶으로 하나씩 지워져 나가면 우리는 새로운 천년의 시작을 알리는 대희년을 맞게 됩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지 천년을 두 번씩이나 겪으면서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또 맞이하였습니다. 주님은 늘 우리와 함께 생활하시는데도 우리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내 안에 이미 계시는 주님을 기다려야 하는 모순이 우리 신앙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불완전하다는 것과 끊임없이 회개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르코 복음사가는 그의 복음 첫마디를 이사야 예언자의 글로서 시작합니다. ꡒ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ꡓ 주님을 따르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신앙적 사명을 선포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지난주 우리는 대림 첫 주간을 시작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어두움과 오류의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허겁지겁 일어나 정신을 차리고 몸단장, 집안 정리와 함께 마음가짐을 가지런히 하였습니다. 이제 대문을 활짝 열어 제치고 주님을 맞이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대문을 활짝 열어 놓고 보니 대문 밖 먼길이 쓰레기와 자갈로 가득차 도저히 저 상태로는 주님을 맞이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특히 주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인권의 침해로 도로 곳곳에서 악취가 나고 있습니다.




씨랜드와 인천 호프집의 화재사고로 수많은 우리의 청소년들이 죽어갔습니다. 고문 기술자가 자수하면서 그동안 쉽게 의심하고 있었던 고문, 간첩조작 사건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국가기관에 의해 도, 감청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상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옷로비의 거짓증언들이 속속들이 파헤쳐지고 있습니다. 그런 일들이 우리 국민의 기본권을 최일선에서 보호해주고 지켜주어야 할 검찰과 경찰, 그것도 최고의 책임자에 의해서 조직적으로 저질러 졌다는 사실에 온 몸이 굳어집니다. ꡒ자녀하나 지켜주지 못하는 국가에 살고 싶지 않아 남은 자녀 하나를 지키기 위해 훈장을 반납하고 이민을 간다ꡓ는 운동선수 출신 주부의 말이 현 우리나라의 인권상황을 정확히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나라의 인권 부재 현상을 우리 정구사 신부님들은 분단의 죄악에 그 모든 원인이 있다고 보고 그를 상징하는 국가 보안법 철폐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국가 보안법은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합법화 해가면서까지 침해하고 있습니다. 그런줄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은채 자기만 편히 살아온 우리들의 무지와 무관심, 그리고 이기주의는 더욱더 주님의 오실길을 악취나게 만들고 더디 오시게 했음을 고백하고 회개합니다. 주님의 길을 닦고 주님이 오실 길을 고르게 하는 일은 인권을 회복하고, 그것을 스스로 지키고 보호하려는 우리의 부단한 노력입니다. 가난하고 고통받고 억눌려 사는 우리 이웃들과 함께 주님을 맞이하러 나갈때 우리의 대림은 구원의 기다림이 될 것입니다.


16.         대림 제2주일  <마르 1, 1-8> (나)


                        창조가 제 모습을 지니게 되는 재창조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살다가 한 세상을 끝내고 마는가? 아니다. 아니라고 하느님이 보장하신다. 이렇게 살다가 한 세상이 끝날 수는 없다. 또 그렇게 끝나서도 안된다.




대림 첫주를 보내며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고통을 얼마나 깊이 마음으로 깨달았느냐에 따라 대림 재2주 때 들려오는 하느님의 위로의 말씀이 실제적인 도움이 된다. 그 말씀은 받아들이면 그 순간 결행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배가 고픈 소년소녀들의 호소(1999. 11.23,MBC TV‘PD수철’)와 지난 세기에 유랑의 길을 떠난 교포 3세들이, 6만원(50달러)이 없어서 러시아의 싸움터인 타지크에서 떠나지 못하고 극빈생활에 시달리며 전쟁 공포에 사로잡혀(1999. 11.21.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떠는 소리,


그리고 병고와 가난에 눌린 수많은 사람의 신음소리와 억울한 옥살이와 원인 모를 죽음 때문에 흐느끼는 울음에서 한이 묻어 나오는 소리를 듣지 못하면,


방향 없는 믿음․사랑․정의 ․교회․화해 ․조국․민족 평화․일치 등의 깃발 아래에서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외침을 외면하면,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교묘히 꾸며지고 엮어진 조직과 제도 때문에 인간 대접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거칠게 만들어 놓은 역사라는 물결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생의 울부짖음을 마음으로 듣지 못하면,


선의의 경쟁 때문에 짓밟히고 도태되는 청소년들의 아픔을 보지 못하면, 흑백논리로는 안된다는 흑백논리 때문에 생기는 인간성의 파괴에 무관심하면,


그래서 선과 악을 찾아 나서는 일을 포기하고 그 구별도 하기 전에 자비를 베푼다는 그릇된 하느님의 흉내를 떠는 데 지치고 실망한 마음을 거두어 들이지 못하면; 삶이 이렇게 끝나서는 안된다는 절규는 우러나올 수 없다.




대안에 대한 희망도 가질 수 없다. 아니 가질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 고통을 보고 울부짖음을 들으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절대적인 위로가 필요하다. 인간의 위로로는 안된다. 삶의 틀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세상이 뒤바뀌어야한다.


최초의 창조가 제 모습을 지니게 되는 재창조가 있어야 한다. 노아의 홍수와 구원이 그 좋은 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겪은 노예생활과 해방, 그들이 바빌론으로 간 귀양과 귀향은 불멸의 예증이다.


전체 주민 가운데 절반 가량이 죽어 나간 14새기 유럽의 흑사병과 거기에서 비롯된 인간성에 대한 관심의 발로는 점진이 시작되는 급진에로의 전환이다. 삶의 틀이 바뀐 본보기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오심은 세상이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하는 급진적이고 결정적이며, 경이적인 삶의 틀의 뒤바뀜을 이룩한다. 그것은 야훼의 영광의 나타남(이사 40,5)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야훼의 영광이 세상에 나타난다는 것은, 인간과 역사 속에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현실을 뜻한다. 감추어져 있는 하느님이 아니고 인간이 볼 수 있도록(이사 40,5) 오시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국빈이 오는 것보다도, 아니 창조이래 딱 한번 지구에 어떤 큰 별이 부딪쳐서 생기는 이변보다, 더 큰 사건이다. 그러니 세상이 그 전과 같을 수 없다.


예수님의 오심은 상상에 불과하지 않고 매우 구체적인 일이다. 이것은 커다란 위로다. 모든 선전 매체를 통하여 외쳐도 부족한 큰 사건이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신음이 끝남을 말한다. 이것을 마음속 깊숙한 곳에 전하는 것(이사 40,2) 자체가 위로다. 그 예수님은 하느님같이 전쟁에서 승리한 영웅(이사 40,17)의 모습으로 오시지만, 동시에 양들을 어질게 돌보는, 인자한 목자의 모습을 띠고(이사 40, 11) 오신다.




  이런 하느님의 모습 자체, 그리고 또 오신다는 사실이 지금까지의 통념을 깨는, 삶의 틀을 바꾸는 일이다.


  예수님의 오심이 결정적으로 새로운 하느님의 오심을 뜻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재림이 오심을 완성하는 것이다. 급진적 변화를 일으킨 예수님의 오심이 점진적 발전을 통하여 어떻게 그 완전한 모습에 이르렀는가를 보게해주는 것이 그분의 재림이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시작된 급진적 변화의 완성은 “갑자기 오고‥‥하늘이 사라지며 천체가 타서 녹아 버리고, 모든 것이 파괴되는”(2베드 3,10-11) 현상을 수반한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이 당신을 드러내셨듯이 세상도 그때까지 숨겨졌던,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데 예수님 재림의 특성이 있다.


(2베드 3,17의 끝 구절은, 세상이 다 없어짐을 말하는 것이 아닌, 하늘 천체가 다 없어지는데도 오히려 세상은 새로 발전된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첫번째 오셨을 때에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당신이 세사에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셨으나, 재림시에는 세상이 적나라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옳고 그른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어디를 향하여 달려가는지가 가려진다.




  이대로 좋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기다려지지 않는다. 관심조차 없다. 문제는 그 분을 기다리는 사람들 때문에 오실 수밖에 없는데, 오시기만 하면 이대로가 좋다는 사람들이 강하게 저항할 것이다. 세상을 뒤바꾸는 위로가 그들에게는 저주가 되기 때문이다.


  매년 성탄은 예수님께서 처음 오셨던 것에 대한 기억과 다시 오심에 대한 기다림이 현실화되는 기쁨을 누리는 축제다. 여기에 걸맞은 자세가 광야로 나가는 회개에 있다. (마르 1,4이하 참조)






17.        대림 제2주일 <마르 1,1-8>(나)  회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1. 세례자 요한의 활약


마르코가 복음서를 시작하면서 세례자 요한의 활약을 먼저 전한 것은 요한을 예수님의 선구자로 보았기 때문입니다(마르 1,1-8 참조). 세례는 인간이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는 도리를 드러내는 상징행위입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임박한 심판을 예상하여 백성을 회개시키려고 세례운동을 펼쳤습니다(마태 3,7-10).




마태오 복음서 3장 2절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은 유다 광야에서 “하늘나라가 다가왔으니 회개하라”고 선포했고, 이 외침은 유다인들에게는 충격적이고 도전적인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다인들은 스스로 의인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회개의 구체적인 사례가 루가 복음서(3,10-14)에 나타나 있습니다.




『군중은 요한에게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요한은 “속옷 두 벌 을 가진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사람에게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도 이와 같이 남과 나누어 먹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세리들도 와서 세례를 받고 “선생님, 우리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요한은 “정한 대로만 받고 그 이상은 받아내지 말라” 하였다. 군인들도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합니까?” 하고 물었다. 요한은 “협박하거나 속임수를 써서 남의 물건을 착취하지 말고 자기가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고 일러 주었다.』




         2. 회개의 생활을 실천한 고행자


요한은 사막의 유목민들처럼 낙타털옷을 입고허리에는 가죽띠를 둘렀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예언자 엘리야의 복장과 매우 비슷합니다


(2열왕 1,8 참조). 그리고 요한은 메뚜기와 들꿀을 먹었는데, 요한의 옷차림이나 음식은 당시 금욕적 삶을 사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것으로 이는 요한이 스스로 회개의 생활을 실천한 고행자임을 보여 줍니다. 이제 세례자 요한은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라고 선언합니다(마르 1,7.8절). 여기에는 예수님이 위대하신 메시아라는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3. 우리의 실천


  오늘은 대림 제2주일입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은 곧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먼저 회개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등지고 있다면, 하느님과 이웃에게 되돌아서는 방향전환이 회개입니다. 광야에서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들려오는 말씀은 무겁게 느껴지지만 이는 위로와 희망, 기쁨과 평화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오심은 기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과거 예수님이 오신 때를 기억하고, 지금도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동시에 다시 이 세상에 오실 주님을 희망하면서 회개의 삶을 통하여 그분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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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대림 제2주일 <마르 1,1-8>(나)         주님의 발




발은 사람의 몸 중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습니다. 그래서 발은 신체 중에서 가장 하찮은 부분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던 것은 그런 의미의 비유였던 것입니다.


성서에 보면 ‘주님과 발’에 관한 구절이 두 군데에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의 발을 차례로 씻어 주시는 장면입니다. 심지어 주님은 조금 있으면 배반할 가리옷 유다의 발까지 씻어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황송해서 ‘제 발만은 결코 씻지 못하십니다’ 하고 말하자 주님은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4-15)라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구절은 바로 마리아 막달레나가 “주님의 발에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를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닦아 드리는”(요한 12,3) 장면입니다. 요한조차 신발끈을 풀어 드릴 자격이 없다고 말한 주님의 발에 감히 창녀와 다름없던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붓고 그 발을 자신의 머리털로 닦


아 드린 것입니다. 얼핏 보면 위선적이며 관능적인 태도 때문에 가리옷 유다가 배신을 결심했던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는 분명히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마르 14,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마침내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마르 15,24). 마리아가 향유로 닦아 드린 주님의 발에 못이 박히고 주님은 돌아가시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리아의 일을 자신의 ‘장례일을 위하여 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사실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이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마태 11,11)는 평가를 받은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감히 신발끈조차 풀어 드릴 자격이 없다는 말을 들은 주님께서 직접 대야에 물을 떠서 우리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르셨던 수건으로 닦아 주심으로써(요한 13,5) 우리는 온몸이 깨끗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못에 박히고 그 발에서 흘러내린 붉은 피로 구원해 주셨으나, 그 발에 입을 맞추기는커녕 닦아 드린 적이 없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도 마리아의 열정을 허락하소서. 마리아가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듯이’ 우리도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 온 세상이 주님의 향기로 넘쳐나게 하소서. 이제는 우리가 당신 발을 씻어 드릴 때가 되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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