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공현 대축일

 

공현(公現, Epiphania)란 “드러내 보임”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드러내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정체를 동방박사들을 통하여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약속된 메시아임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의 몇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시각이 서로다른 두 부류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이들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이 드러납니다. 세째로 구원의 보편성에 대한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넷째로 참된 봉헌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복음에서 보면 상반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동방에서 별을 보고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분을 경배하기 위해서 찾아온 동방박사들과,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예수님을 찾는 헤로데입니다. 그런데 헤로데는 누구이며 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을까요?


  헤로데는 순수 유대인이 아닌 이두메아인이었습니다. 그는 왕이 될 자격이 없었으나 매우 복잡하게 얽힌 상황으로 인해 왕이 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 당시 유대인들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인들에 대해 매우 협조적이었고 로마의 황제 카이사르는 그런 상황에서 유다의 행정장관으로 헤로데의 아버지(안티파터)를 임명하였습니다. 또한 카이사르는 안티파터의 두 아들을 하나는(파사엘) 예루살렘의 총독으로, 다른 하나 즉 헤로데는 갈릴래아의 총독으로 세웠습니다. 헤로데는 반대자들과 강도들을 제거하고 갈릴래아에서 모든 반란을 진압하였습니다. 빈틈없는 외교관이며, 용감한 군인이고 훌륭한 행정가였던 헤로데는 세속적으로 대단히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반대자들을 처형했습니다. 그는 권력앞에서 자신의 가족들과도 끊임없이 투쟁하였습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심지어 자신의 가족들도 죽였고, 자살하기 며칠 전에 그의 후계자 마저 죽여버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했으며, 심지어 자신의 가족들까지도 죽여버린 사람입니다. 로마의 통치하에서 강한 절대권력을 갈망하던 유대인들 중에는 이런 헤로데를 메시아로 생각하고 추종한 어리석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유대인들은 헤로데를 이방인 지배자로 간주하였습니다. 로마 황제에 비해 헤로데의 권력은 미약했지만 그는 로마인들이 허락해 준 “왕”이란 칭호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헤로데를 부르는 왕이라는 칭호는 동방 박사들이 찾고 있는 왕과 대조를 이루며 여기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참된 왕 즉 예수님께서 나약한 어린아이로 오시는 동안 왕좌에 앉아 떨고 있는 표면상의 유대인의 왕 즉 헤로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헤로데가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경배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헤로데의 모습이냐? 아니면 동방박사의 모습이냐 하는 것입니다.


  현대 신앙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신앙과 삶의 불일치라고 합니다. 즉 믿는 것 따로 행동하는 것 따로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삶 안에서 헤로데의 모습을 발견해서 고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즉 자신의 이익과 편안함을 위해서는 다른이들을 이용하는 모습이 헤로데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들면 품앗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아니면 혼인이나 기타 모임, 직장에서의 일등을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품앗이는 좋은 전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순간 품앗이가 아주 나쁜 쪽으로 바뀌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일손이 귀한지라 지금은 품값을 돈으로는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번 데려다 일을 했으면 다음에 꼭 일로 해주어야 합니다. 물론 다른 사람을 사서 대신 보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을 주일에도 한다는 것입니다. 주일날 성당에 가려고 오래간 만에 머리도 감고 화장도 할라치면 전화가 옵니다. “오늘 일좀 해줘!” 그러면 그날은 성당에 가지 못하고 일을 가야 합니다. 아마 “나 오늘 성당가야 하는디!” 하면 “품앗이니까 해줘야 해”라고 말을 합니다. 신자이면서도 주일날 다른 신자를 불러서 함께 일한다는 것은 비신자들에게도 악표양이 될 수 있고, 어쩌면 그것이 헤로데의 모습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일에 다른 이들이 성당에 가는것을 막는 행위, 방해하는 행위…그 모습이 바로 헤로데의 모습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예수님을 죽이려하는 헤로데의 모습은 오늘 우리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의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을 자신에게 둔다면 헤로데 처럼 할 것이고, 삶의 중심을 하느님께 둔다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하느님의 뜻에 따르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둘째로 이들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이 드러납니다.


  완전히 망해버린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비참한 운명은 예언자들이 지적하듯이 유대왕들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왕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및 윤리적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지 못했기에 망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종교적,윤리적 으로 완전성을 가진 메시아를 기다렸고, 따라서 자신의 임무를 완전하게 수행한 다윗의 새로운 출현에 대한 갈망이 존속해 왔습니다(이사야 9,1-6:11,1-16참조).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기원전 587년에 예루살렘의 멸망과 함께 다윗왕조가 종말을 고했으며,바빌론 유배 이후의 재건시기에 다윗왕조의 복건에 대한 기대감이 팽배했습니다.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종교 박해와 정치적 압박속에서 국가적, 정치적 복건에 희망을 걸었으며, 그 모델은 다윗왕조였습니다. 즉 현실적인 억압에서 힘있는 해방자를 기다린 것입니다. 이러한 메시아에 대한 틀을 가지고 있었기에 예수님의 탄생부터 돌아가실때까지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몰라보고 박해하며 더 나아가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이스라엘 민족 중에 어느 누구도 우리를 위하여 태어난 한 아기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알고 찾아온 사람이 없고, 오히려 진리에 눈을 뜨고 참된 가치를 쫓아 살던 수만리 이방의 박사들이 그 별빛 하나를 보고 자신들을 구원해줄 구세주를 알아보고 찾아와서 경배했습니다.


  따라서 우리 신앙인들의 삶의 목표가 바로 “하느님을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함”이니 먼저 하느님을 알아뵈올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내옆에 계신, 나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알아보아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방박사들이 끊임없이 하늘의 별을 관찰하였듯이 우리도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며 형제, 자매들 안에서 그들과 함께 하느님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셋째로, 구원의 보편성, 즉 이방인들에 대한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의 생각에는 구원에서 제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유다인들은 이방인들을 거의 개, 돼지 취급을 했습니다. 그들만이 오직 선택된 민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독서와 복음은 모든 민족들에 대한 구원의 보편성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이방인이지만 구원에 대한 갈망의 표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2독서에서 사도 바울로는 하느님의 심오한 계획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즉 그 심오한 계획이란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면서 유다인들과 함께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한 몸의 지체가 되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 즉 구원을 함께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복음은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넷째로 참된 봉헌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그 먼길에서 예수님을 찾아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수님께 선물로 드렸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께 드린 것은 요즘 유행하는 “잘 좀 봐주십쇼” 하는 댓가성 뇌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 먼길에서 찾아와서 경배했어도 뭘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바라는 것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 무엇을 드리고 있습니까?


먼저 우리는 내가 가지고 있는 재물은 무조건 다 내것이고, 내 맘대로 쓸 수 있는 것이라는 잘못된 이기적 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나의 모든 소유물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깊이 깨닫고, 내가 소유한 것에는 내가 쓸 수 있는 몫 뿐 아니라, 하느님의 몫, 도움 필요한 이웃의 몫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음을 복음적 사랑 안에서 솔찍이 인정하고 나눔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눔엔 언제나 아픔과 희생 따릅니다.


  아빌라의 성녀 대 데레사는 하느님사랑의 척도는 이웃사랑의 척도와 같다고 말을 했습니다. 즉 내가 하느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는 이웃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를 보면 알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과 나눌 수 있는 것은 물질과 돈만이 아닙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웃에 대한 관심, 사랑, 친절, 우리의 시간, 기도, 복음전달등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리고 많이 그러한 사랑실천에 인색한가?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이웃사랑의 실천은 거창한 것으로 하는 것 아닙니다. 일상에서의 비상한 사랑, 즉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은 사랑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께 드릴수 있는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 주일날의 봉헌금이나 교무금만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드릴 수 있는 것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고 나누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마지막날 예수님께서는 “너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으며, 내가 외로울 때 나를 찾아주었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에게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나에게 주었다. 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공현축일을 맞이하여 우리 삶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내가 믿는 하느님께 나의 행동으로 사랑을 고백하는지,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보는 한주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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