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설 강론

 

설(음 1월 1일)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오늘은 우리 명절의 최대 축제인 설입니다. 동시에 오늘은 여성들이 최고로 고통스러워 하는 날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어떤 분이 자신의 친구에게 자신의 아들과 딸에 대해서 자랑과 한탄을 했다고 합니다. “글세 내 아들은 여자를 잘못 만나서 얼마나 고생하는지 몰라. 며느리라는 애는 늘어지도록 잠을 자고 내 아들은 아침도 자기가 손수 해먹고 출근한다지 뭔가…. 역시 며느리는 잘 얻어야 해. 그런데 내 딸은 아주 좋은 곳으로 시집을 갔지뭔가? 글세 내 딸은 아침에는 자기가 자고 싶은 만큼 잠을 잔다네. 그러면 내 사위는 아침은 손수 차려 먹고서 내 딸의 아침까지 상에 차려 놓고서 출근을 한다네. 내 딸은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하게 창조된 피조물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가 가부장적, 남성중심적 사회이기에 여성들이 열등하게 인식되는 것 뿐입니다. 그리고 남성들이 열등하게 생각하는 여성들이 바로 우리의 어머니요 누이요, 딸들이라는 것을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명절 때가 되면 여성들의 수난은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기쁨의 축제가 되어야 할 명절이 고통의 축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그 위에서 선두 지휘하시는 분은 남성이 아닌 여성 즉 시어머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고생하는 며느리들에게 “나는 예전에 더했다. 이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시어머니는 자신이 당한 과거를 다시 며느리들에게 물려주고, 그 며느리들은 다시 그것을 그들의 며느리들에게 물려주기에 여성의 지위는 아무리 외쳐도 높아질 수 없습니다. 여성의 지위는 가정에서부터 회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1독서는 축복에 대해서 나옵니다. 축복은 하느님이 당신 백성 가운데 생생하게 현존하여 그들을 보호하신다는 표지입니다. 이런 축복은 백성이 하느님께 속하고 하느님은 백성을 평화로써, 다시 말해서 온전한 생명으로써 축복하신다는 것입니다. 성서에서는 평화를 온전한 생명 온전한  삶으로 보고 있습니다. 2독서에서 야고보사도는 우리는 내일을 알지 못하니 내일을 당연히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고, 오늘을 충실히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항상 준비하고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독서와 복음을 통해서 종말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 명절의 최대 축제인 설이며, 한해의 첫날입니다. 한해가 시작하는 첫날에 종말을 생각하게 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 일까요?


  우리는 누구나 내일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오늘은 건강하기에 내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내일을 기약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발전이 없을수도 있습니다. 내일이 없다면 실컷 쓰고나 죽자 하는 향락주의가 판을 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2독서와 복음에서 말씀하시고 하는 것은 종말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말은 두려움으로 뭉쳐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신앙인들에게 종말은 희망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심판하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 놓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자신을 십자가위에서 봉헌하신 분이 우리를 심판하러 오시기에 우리는 희망을 가지고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운전을 할 때는 어디서 차나 사람이 뛰어 나올지 모르니 항상 조심해서 운전을 합니다. 그리고 도로에서는 항상 방어운전을 합니다. 학생들은 시험에 대비해서 시험기간이 되기 훨씬 전부터 시험공부를 합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서 어릴때부터 피아노 학원이나 미술학원, 속셈학원에 애들의 등을 떠 밉니다. 어른들은 편안한 노후를 위해서 젊을 때 열심히 일하고 저축을 합니다. 그렇다면 신앙인들은 종말에 대비해서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예전에 휴거 소동때 어떤 임산부는 자신의 몸이 무거워서 하늘에 못올라갈까봐 뱃속의 아이를 낙태 했다고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보기에는 무척 바고 같은 행동이고, 그렇게 하실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의 천국에 가고 싶어하는 마음만은 볼 수가 있습니다. 누구나 다 천국에 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몸이 무거워서 하늘에 못올라갈까봐 자신의 아이까지 죽이는 그런 바보같은 준비가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 딸로서, 하느님 마음에 드는 신앙인으로서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하고 담 쌓은 사람이 천국에 가겠습니까? 사기꾼의 사기 행각이 천국에서도 통하겠습니까?


  우리는 성서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부자가 농사지어 많은 소출을 얻었는데, 크게 만족하며서 큰 창고를 지어 가득 채우고는 자기 영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혼아,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이제 몇 년동안 걱정할 것 없다. 그러니 싫컷 쉬고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밤 너의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 가리라”.




  천상의 것 추구하거나 이웃 사랑, 나눔엔 관심두지 않고, 자신이 소유한 재화만이 유일하고 최고의 가치를 지녔다고 여기며 자기 편이만 생각하는 그 부자의 이기심은 그와같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그가 가진 그 많은 재산은 그를 하루라도 더 살게 하는데는 아무런 도움도 못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어리석은 부자는 재물을 관리하고 보관하며 지키기 위해 이웃을 경계의 눈으로 바라보고 근심걱정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오로지 전념하면서 수고하며 모은 돈을(재물) 사용하지도 못하고 어느날 아깝고 안타까워하며 죽게 된 것입니다. 결국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성서에서 “어리석다”라는 개념은 하느님을 모르거나 혹은 모르는체 하고(시편 14/1) 불확실한 것(영원한 삶 보증 못되는 것- 돈, 재물, 명예, 쾌락 등)에 자신을 맡기거나 잘못된 것에다가 신뢰를 두는 행위를 뜻합니다.  이렇게 어리석을 경우, 즉 자신의 재물에만 마음을 두고, 하느님 사업에 인색한 경우에는,  죽음 앞에서, 하느님의 심판대전에서,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뒤늦게, 너무늦게 깨달으며 안타까워 할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당신들은 내일 당신들의 생명이 어떻게 될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만일 주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우리는 살아가며 이런 일 저런 일을 해보겠다 말해야 할 것입니다.” 본당 신부님께서도 항상 말씀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있지만 내년에 우리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다고 장담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파란불이 켜졌을 때 건너가야 합니다. 빨간불이 켜졌을 때 발을 동동 구르며 아까 건너갔어야 했는데 하면서 후회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이 파란불이 켜졌을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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