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연중 제 29주간 평일 강론(월-토)

 

네가 쌓아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월)




군중 가운데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선생님, 제 동기더러 저와 함께 유산을 나누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청하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의 상속법은 모세법에 근거하고 있었습니다. 이 법은 농업 사회에 기초하고 있었고 맏아들은 토지와 동산의 삼분의 이를 유산으로 차지하도록 규정하고 있었습니다(신명21,17). 그런데 이 청년의 형은 동생에게 아무것도 나눠주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상속법은 모세법에 지배를 받기 때문에 율법 교사들은 조언과 결정을 내려 주는 일을 외뢰 받는 것에 대해 언제나 기뻐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율법교사로 보았습니다. 그는 자기 유산에 관한 문제에 결정을 내려 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자기 형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주시리라고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14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에게 “이 사람아, 누가 나를 그대들의 재판관이나 재산 분배자로 세웠단 말인가?” 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잡다한 일들에 개입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이러저러한 특정 사회 질서나 체제를 옹호하는 결정에 사용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런 문제는 세상의 재판관들이 해야 할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직무 시초에 나자렛에서 당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히 밝혀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에게도 당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죄인들을 부르며 잃은 자들을 구원하고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며 세상에 하느님의 생명을 주시고자 파견되셨습니다.




형제의 상속 재산을 둘러싼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 탐욕과 이 세상의 선에 대한, 도가 지나친 집착을 타이르실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여러분은 온갖 탐욕을 주의하고 조심하시오. 사실 제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사람이 자기 재산으로 자기 생명을 보장받지는 못합니다.”


탐욕은 인간이 재산으로, 또는 필요 이상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안전하게 할 수 있다는 그릇된 생각에 말려들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생명은 하느님께로부터 온 선물입니다. 생명은 지상의 재물이나 넘치는 부와 재산의 산물이 아닙니다. 생명을 안배하시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어 가르치십니다.


이 비유는 재산을 늘리고 혹은 보존하기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 해야 하는가? 또 그 재산이 생명을 하루도 연장시켜 줄 수 없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이 부유한 사람은 자신의 광대한 밭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내 소출을 모아들일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할까?’  내 곳간들을 헐어 버리고 더 큰 것을 지어 거기에다 나의 밀과 재물을 다 모아 두어야지.


필요 이상의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마듭니다. 이 부자는 끝까지 재산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는 재산을 어떻게 유익하게 쓸까를 생각하지는 않고 오로지 그 보관 방법만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의 손도 그의 곡식 창고가 될 수 있었으나 그의 머리에는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나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가지게 되면 그것을 어떻게 보존할까에만 신경을 씁니다. 어떻게 다른 사람과 같이 이용할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19  그러고서 내 영혼에게 말하리라. 영혼아, 너는 여러 해 동안 (사용할) 많은 재물을 쌓아 두었으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


부자는 자기가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놀면서 마시고 먹고 즐기는 것의 그의 생활의 전부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영혼은 내가 쌓아둔 재물을 먹고 마시지 않습니다. 영혼의 음식은 기도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어리석은 자야, 이 밤에 너에게서 네 영혼을 되찾아 가리라.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이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이 부자의 아내는 화장실에 가서 울면서 남편의 사진을 꺼내놓고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자기! 멋쟁이”


하느님께서는 이 부자에게 지금껏 해 온 사고방식과 생활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일러 주십니다. 재산을 보존하려고 헛된 계획에 골몰하고 있던 그날 밤에 그는 죽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 재산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습니까? 죽어서까지 그것을 가지고 저승에 가지고 갈 수 없으니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죽어서 가지고 가지도 못하는 재산에 집착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가지고 갈 수 있는 재산에 집착하시겠습니까?




21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보물을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 부요하지 못한 사람은 이와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돈 버는 일에만 골몰하는 사람은 하느님께 인색한, 곧 착한 행실로 하느님 앞에 덕을 쌓으려 애쓰지 않는 사람입니다. 재산의 노예가 되면 영원한 삶을 잃을 것입니다. 진정 재산이란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실천의 수단이 될 때에만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첫째, 직장 생활이 바쁘다고 성당에 안 다니는 사람, 시험 때라고 성당에 안다니는 학생들과 오늘 이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둘째,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들 중에, 그리고 내가 가지려고 하는 것들 중에 죽어서 하느님 나라에 가지고 갈 수 있는 것들은 어떤 것이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화)




긴 기다림. 우리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입니다.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분께서 더디 오시는 것은 지금 나에게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깨어서 그분을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5  “여러분의 허리는 동여매고 등불은 켜놓고 있어야 합니다.


허리에 띠를 띠라는 이야기는 소아시아의 옷을 만드는 법과 입는 법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들의 옷은 길었기 때문에 여행을 할 때나 활동을 할 때에 옷자락을 들어 허리에 띠를 매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허리에 띠를 띤다는 것은 일을 하기 위한 준비 혹은 일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뜻합니다.


등불을 켜 놓는 것은 밝은 데서 잘 보며 경계하라는 뜻입니다. 언제 올지 모르는 주인을 항상 기다리고 있는 종들처럼 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이 세상 사물에서 이탈해야 할 것이며, 모든 소망을 하늘나라에 기울여야 한다고 가르치신 후, 지금은 착한 뜻을 가지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잘 맞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를 해야 한다고 덧붙이십니다.




36  여러분은 자기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과 같아야 합니다. 주인이 언제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든지, 와서 (문을) 두드리면 즉시 열어 주려고 말입니다.


히브리인은 밤늦게 혼인잔치를 벌이는(마태25,1) 습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인을 영접하기 위해 종들을 등불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주인이 집을 비우고 있을지라도 돌아오는 주인을 맞아들이기 위해 모두 밤을 새워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요, 심판하러 오시는 예수님을 깨어서 영접해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은 오실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아무도 그분이 언제 오실지는 알지 못합니다.  예전에 부모님이 장에 가시면 아이들은 부모님을 기다리곤 했습니다. 부모님께서 장에서 맛있는 것을 사오시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부모님들이 혼인집에 가시면 꼭 주머니에 사탕이며 떡 등을 싸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님이 언제 오시나 졸면서 기다리곤 했습니다.


깨어 기다린 아이들이 사탕과 떡 등을 받아먹는 것처럼, 예수님을 깨어서 기다린 제자들도 주님께로부터 축복을 받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그 축복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식사 시중을 들어 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 생각이랑 전혀 다릅니다. 종이 주인을 맞이하고 대접해야 하는데 오히려 주인이 종을 대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깨어 기다린 이들에게 당신 영광의 혼 몫을 부여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을 영예롭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37  복되도다,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기다리고) 있는 그 종들은! 진실히 여러분에게 이르거니와, 주인이 (허리를) 동여매고는 그들을 (식탁에) 자리잡게 하고 다가와서 그들에게 시중을 들어 줄 것입니다. 38  주인이 밤 이경이든 삼경이든 와서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 종들을) 보게 되면 그들은 복됩니다!”


깨어 기다리는 종들은 행복합니다. 그들이 받을 상이 더 할 나위 없이 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주인은 그의 식사 시중을 들어 줄 것입니다. 우리가 예상하는 바와는 정 반대의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종이 주인처럼 대접받으며 주님이 그의 종처럼 처신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깨어 있는 이들에게 당신 영광의 한 몫을 부여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영광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나라에 환영하여 맞아들이는 이들을 위한 잔치에 비유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깨어 기다렸던 자녀들에게 시중을 들어 주심으로써 그들을 영예롭게 하실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처음의 그 아름다운 마음이 무뎌집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조차 모르게 되고, 누가 열심히 하려하면 비웃거나 방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찰과 통회를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늘 새롭게 하고 언제나 처음처럼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바로 주인을 깨어 기다리는 자세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마지막 날에 큰 축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또한 축복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당연히 해야 될 몫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분을 찬미하고 그분께 영광을 드리며 살아가는 것은 당연한 나의 삶이어야 합니다.




예전에 신문에 자신의 개를 위해서 막대한 수술비를 지출한 남자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 개는 좋은 애완용 개도 아니었지만 그가 퇴근을 해서 대문을 열면 항상 그 개가 반겨 줬다고 합니다. 주인의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그쪽을 향해서 고개를 돌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가족들은 그 개처럼 그를 맞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공부하기에 바쁘고, 아내는 텔레비전이나 모임에 바쁘고, 그리고 더러는 피곤해서 먼저 잠자리에 누워 있고…


그래서 언제나 변함없이 그를 맞아 주던 존재가 개였기에 그 개가 아팠을 때 막대한 돈을 들여서 그 개를 고쳐 주었다는 것입니다. 주인을 향했던 그 마음이 보상을 받았던 것입니다…




신앙인들은 그렇게 늘 늘 깨어서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40  여러분도 준비하고 있으시오. 사실 여러분이 생각지도 않은 시간에 인자는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둑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것을 깨우쳐 주십니다. 도둑은 기초 없이 맨땅에 세워진 집의 담 밑에 구멍을 파고 들어오려 할 때, 집주인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면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를 정확히 안다면 틀림없이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오시리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가 언제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늘 깨어서 기다리는 일뿐입니다.




오늘 하루 이 복음을 묵상하면서


첫째, 만일 지금의 상황에서 주님께서 오신다면 나는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내일 주님께서 오시겠다고 하신다면 나는 주님께 어떤 말씀을 드릴 수 있을지 생각해 봅시다


둘째, 깨어있는 삶, 늘 준비하고 있는 삶은 어떤 삶이며, 내가 주님께 바라고 있는 것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봅시다.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은 것을 돌려주어야 한다(수)


오늘 복음은 사도들에게 요청되는 태도가 비유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집주인이 집을 멀리 떠나게 되었습니다. 주인은 자기가 없는 동안을 대비하여 관리인에게 집안을 제대로 보살피도록 책임을 맡겼습니다. 관리인은 주인이 아니라 다만 관리하는 사람일 뿐이고 따라서 주인이 바라는 대로 행동해야 하기 때문에 충성스럽고 슬기로워야 합니다. 또한 관리인은 주인이 예고 없이 돌아와 관리보고를 요구하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슬기로운 사람의 모습입니다. 관리인이 양심적으로 일한다면 주인은 그에게 자신의 모든 재산을 맡길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부당하고 사악하게 일을 하여 집안사람들을 못살게 굴고 자신의 지위를 이기적으로 남용하여 멋대로 먹고 마신다면, 주인은 그에게 엄한 벌을 내릴 것입니다. 페르시아의 풍습에 의하면 칼로 전신을 동강을 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책임을 맡기셨습니다. 나는 관리인입니다. 어떻게 관리하고 있습니까? 나는 슬기롭고 충성스러운 관리인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슬기롭고 충성스러운 관리인이 되기 위해 늘 깨어있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여러분도 준비하고 있으시오. 사실 여러분이 생각지도 않은 시간에 인자는 옵니다.”


슬기로운 종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을 들은 베드로 사도가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십니까, 혹은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십니까?”


즉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는 엄한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그것이 자신들에게만 해당되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지에 대해서 예수님께 묻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당연히 그렇게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의 할 일은 자신들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깨어 있을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포함될 것입니다.


나를 위해 기도하는 이가 있습니다. 나를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이끌어줌에 거절하지 말고 “예”하고 응답할 때 나는 깨어서 주님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42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이 자기가 돌봐야 할 아랫것들을 청지기에게 맡겨 제때에 밀을 나누어 주게 한다면 어떻게 하는 사람이 과연 충실하고 슬기로운 청지기이겠습니까? 43  복되도다, 제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그렇게 하고 있는 그 종은! 44  참으로 여러분에게 말하거니와, 주인은 그에게 자기 재산을 모두 (관리하도록) 맡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직접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되물으십니다. 그 물음은 명백히 답을 해 주고 있습니다. 곧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 모든 제자의 의무라면, 교회를 지도하고 다스려야 할 자리에 앉아 있는 이에겐 말할 나위가 없다는 것입니다.


관리인은 보통 노예들보다는 좀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지만 노예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로 집안 살림을 맡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충성스럽고 슬기로운 관리인을 말씀하십니다. 주인의 재산을 지키기 위한 성실과 그것을 관리하기 위한 현명한 관리인. 그런 관리인에게 주인은 모든 것을 맡길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도들을 포함한 모든 이들은 충성스럽고 슬기로워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관리인으로서 셈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45  그러나 만일 그 종이 마음 속으로 ‘내 주인은 늦게 오시는구나’ 하면서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술에 취하기 시작한다면 46  예기치 않은 날, 짐작도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들이닥쳐서 그를 처단하고 그에게 불충한 자들이 받을 몫을 줄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언제나 유혹이 있습니다. 관리인에게 유혹은 바로 “주님이 더디 오시겠지”라는 것입니다. 그 유혹에 넘어가게 되면 불충한 종의 모습으로 변신하게 됩니다. 오늘날의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주님의 다시오심을 기다리고 있으면서도 전혀 기다리는 사람처럼 행동하지도 않고, 준비하지도 않고, 안 오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엄한 벌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처단은 두 동강을 낸다는 말인데 여러 가지로 번역되었습니다. 예로니모는 비유적인 뜻으로 “거룩한 사회에서 쫓겨난다”, 곧 파문된다고 해석하였고, 어떤 이는 채찍질을 당한다고 하였고, 혹은 베어 버린다고 풀이한 이들도 있습니다. 요컨대 사형에 처한다는 뜻인데, 비유의 전체적인 뜻으로 보면 영원한 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 언젠가는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상을 받을 사람도 있겠고, 벌을 받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 기준은 받은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였느냐? 그렇지 못하였느냐로 결정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우리들은 누구나 다 항상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이 할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47  자기 주인의 뜻을 알고도 그 뜻대로 준비하지도 않고 행하지도 않은 그런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 있으면서도 따르지 않은 종은 엄한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이 더 큰 벌을 받는 것 또한 당연한 것입니다. 매를 맞는 다는 것은 보통 종들이 받는 벌인데 여기서는 내세의 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생각과 계획을 전혀 전해 받지 못한 사람은 벌을 좀 덜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벌을 맏는 것은 마찬가지 입니다. 왜냐하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많이 알고 있으면서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더 풍부한 지식을 받았기에 그들에게는 더 많은 것이 요구될 것이고, 더 큰 축복이 따를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잘못을 저지른다면 더 큰 벌을 받은 것은 당연합니다.


성서에 대해서 마땅히 공부해야 하고, 교리에 대해서 마땅히 공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공부하지 않는 사람, 그래서 지키지 못한 사람도 벌을 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아서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알면서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당연히 더 큰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공부할 기회를 미루지 맙시다. 함께 공부하고 실천하여 하느님나라에서 큰 복을 함께 누려야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 이 복음을 묵상하면서


첫째. 나는 슬기로운 자녀인지 어리석은 자녀인지 생각해 봅시다


둘째, 하느님께서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어떻게 무엇을 실천하기를 바라고 계시는지 생각해 봅시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습니다(목)


이 말씀을 이해하기 전에 먼저 앞에서 어떤 말씀이 나왔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충실하지 못한 종의 이야기가 나오고 그 앞에는 기다리는 이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다시오심을 기다리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의 다시오심에 대해서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이 시작되었습니다. 구원의 때는 바로 평화의 때이고, 메시아는 평화를 주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메시아에게 이것을 기대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탄생은 세상에 평화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러나 평화와 구원의 시대가 밝아 오기 전엔 다툼과 분열과 불화의 시기가 있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언자 미가는 구원의 때에 앞서 오게 될 이 재난과 분쟁의 시기를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아들이 아비를 우습게보고 딸이 어미를 거역하며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맞서는 세상, 식구끼리 원수가 되었다. 그러나 나만은 야훼를 우러르고 하느님께서 구해 주시기를 기다리리라. 나의 하느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주시기 바라면서”(미가 7,6-7)


그 말씀을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십니다.


“여러분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이르거니와,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사람들은 분열이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저분은 메시아다”“저분은 그냥 예언자다”“저분은 사기꾼이다.”“저분은 죄인이다”“저분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각자의 선택은 서로를 갈라놓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열과 불화는 마지막 때를 특징짓는 사건들, 각각의 모든 사람들에게 선택을 요구하는 그러한 사건들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표징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 분열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실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다면, 이제부터 세 사람이 두 사람을 반대하고 두 사람이 세 사람을 반대하여 갈라질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반대하고 아들은 아버지를 반대하며 어머니가 딸을 반대하고 딸은 어머니를 반대하며 시어머니가 자기 며느리를 반대하고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반대하며 갈라지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과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생각하는 것도 다르고, 행동하는 것도 다릅니다. 신앙인들은 결코 불의에 동조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가족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옳지 못한 것은 옳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우리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가정 안에서 믿지 않는 이들이 있으면 그들에게 전교하기는 하늘의 별따기 보다 힘이 듭니다. 왜냐하면 내가 신앙생활 하는 것을 다 보았기 때문에 “우리 성당가요”하면 “야! 너나 잘해!”“나는 성당 안다녀도 너 만큼은 해!”… 뭐 이런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는 포기하게 되고 “그래! 언젠가는 때가 오겠지?”하면서 기다리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가족들에게 당당하게 이렇게 말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성당을 다녔으니까 이정도라도 하지, 내가 성당을 안다녔으면 당신 정말 어려웠을꺼야! 그러니 함께 성당 다니자.”


싸움이 싫다고 하여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옳지 못합니다. 절이나 개신교에 다니는 시어머니의 반대로 성당에 다지니 않던 며느리가 다짐한 것은 시어머니 돌아가신 다음에는 꼭 성당에 가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성당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내가 내 신앙을 포기하면 결코 안됩니다. 줄 것은 주고, 챙길 것은 꼭 챙겨야 합니다. 하지만 나의 신앙은 너무도 약하여 성호도 제대로 못 긋고 있는 실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향한 불이 타오르지 않았기에 그 불을 타오르게 하기 위해 당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불은 자신뿐 아니라 당신의 제자들을 통해서 계속 번져 나가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올리브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얼마나 어려우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습니다. 불이 이미 타오른다면야 내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내가 받을 세례가 있습니다. 그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나는 얼마나 마음 죄일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그 불은 조금씩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하느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드리는 것이 바로 사랑과 믿음의 불입니다. 그런데 그 불이 아직 활활 타오르지 않기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휘발유나 석유가 되어 그들을 타오르게 하려 하십니다. 그  휘발유나 석유는 바로 당신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받으실 고통의 세례인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습니다. 불이 이미 타오른다면야 내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이 불은 이제 나를 통해서 활활 타 올라야 합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신앙인처럼 살지 않고,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산다 할지라도, 나는 그 삶에 동조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예수님께서 무엇을 원하고 계신지를 알려 주어야 하고,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제는 내가 타 올라야 할 때입니다.




오늘 하루 이 복음을 묵상하면서


첫째, 내가 하루 하루를 살면서 신앙인처럼 살았는지를. 혹시 신앙인들의 반대편에 서서 신앙인들을 박해하고 있지 않았는지 생각해 봅시다.


둘째, 내가 하느님의 사랑에로 불타오르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어떻게 이 시대는 살펴서 알아보지 않습니까?(금)


정치나 경제 연예계 이야기라면 입에 거품을 물고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통령이 재신임 투표를 하는 것에 대해서, 그것을 통해 노리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국민들의 반응에 대해서 훤히 들여다 보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의 문제는 참 잘 이해하고 잘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 자신도 그렇게 잘 보면서, 내 행동의 결과에 대해서도 예견하면서 살아가고 있을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세상일에는 말 많고, 아는 체 많이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들에게 단호한 말씀을 하십니다.


“여러분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대뜸 ‘비가 오겠구나’ 하는데 과연 그렇게 됩니다. 또 남풍이 불면 ‘무더워지겠구나’ 하는데 과연 (그렇게) 됩니다.”


사람들은 정치나 경제, 기타 날씨나 그 밖의 다른 것들을 풀이할 때에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름이 서쪽에서 나타나면 비가 올 것이라는 것을 팔레스티나 사람들은 알았습니다. 그 구름은 서풍을 타고 오게 되면 지중해의 습기를 가지고 오고, 그 습기는 비가 되어 내리기 때문입니다. 또한 남풍(‘보토스’라는 단어는 남풍을 의미하지만 남동풍에도 사용됩니다.)이 불어오면 더워질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팔레스티나에서는 실제로 더위를 몰고 오는 것이 바로 남동풍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따끔한 경고를 하십니다.


“위선자들이여, 땅과 하늘의 징조는 살피어 알아보면서 어떻게 이 시대는 살펴서 알아보지 않습니까?”


하늘과 땅의 징조, 즉 자연현상은 잘 관찰하고 틀림없이 일기를 알아 맞추고 있는 것에 비해서 메시아의 때도 이미 왔는데 그들은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징표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마치 소경이라도 된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에 한해서는 소경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비판만을 하고 있었습니다.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느니, 군중을 선동하고 있다느니, 특별한 기적을 보여주면 믿겠다느니…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위선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위선자는 “양의 탈을 쓴 늑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군중들이 예수님께로부터 느껴지는 느낌과 감동 등에도 불구하고 아직 태도를 정하지 않는, 즉 그분을 메시아로 믿을 것인지 믿지 않을 것인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는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충분히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검토하여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체 하는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그 징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를 꺼려하는 이유는 자기들의 옛 생활 방식을 유지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의 뜻이 그들의 올바른 판단에 방해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여러분은 스스로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합니까?”


이 말씀은 만일 이들이 편견 없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바라보았다면 즉시 회개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였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기회가 있을 때 회개하라고 주의를 주시면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십니다.


“당신이 (송사) 적수와 함께 관장에게 가게 되거든 길을 가는 동안에 그로부터 풀려나도록 힘쓰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당신을 재판관에게 끌고 가고, 재판관은 당신을 형리에게 넘기고, 형리는 당신을 감옥에 가둘 것입니다. 당신에게 말하거니와, 마지막 렙톤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로마인들의 법적 절차를 고려하고 있습니다. 행정관리에게 고발당한 사람은 재판관 앞에 나서게 되고, 그는 재판관으로부터 형리에게 넘겨지고, 형리는 그를 감옥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극소량의 금액까지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감옥에서 풀려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합당한 일은 법정으로 오기 전에 고소한 사람과 합의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요즘도 교통사고라든지 기타 작은 일들은 합의를 통해서 해결하고 있지 않습니까?




빚을 진 사람들은 지금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고 빌려준 사람은 하느님이십니다. 만일 판사이신 주님의 엄한 벌을 면하려면 지금 회개하고 하느님과 화해해야 한다는 것을 세상에 통용되는 법을 통해서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직 시간이 있을 때 빨리 하느님과 화해하라고. 즉 회개하고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 하루 이 복음을 묵상하면서


첫째, 예수님께서는 세상일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처럼 하느님과 자신의 일에도 관심을 기울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만나면 주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정치, 경제, 사회”이런 이야기 외에 신앙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고 있는지 나를 살펴 봅시다.




둘째, 지금 내가 하느님 앞에 간다면 어떤 판결을 받을 것 같습니까? 내가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고 기워 갚아야 할 것이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와 같이 멸망할 것입니다(토)


예수님께서 하느님에 의해 지정된 결단의 시기로서의 이 시대에 대한 의미를 말씀하고 계실 때에, 갈릴래아 사람인 듯한 어떤 사람들이 로마인 총독 빌라도의 학살소식을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빌라도가 성전 뜰에서 희생물을 드리던 갈릴래아 사람들을 학살하여 그 흘린 피가 제물에 물들었다는 것입니다.


갈릴래아 사람들, 특히 열성당원들은 투쟁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무력에 의한 정치적 혁명을 일으키고자 했습니다.  아마도 로마에 적대적이던 갈릴래아 사람들이 어느 축일을 이용하여 성전 안에서 폭동을 일으켰으나 빌라도에게 진압되고 그 곳에서 살해되었고, 그들의 피는 희생제물의 피에 섞이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빌라도는 가혹하고 난폭한 통치자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폭동 때문에 빌라도는 성전에서 가까운 안토니오성에 언제나 진압부대를 대기시키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 예수님께서 충격을 받으시고 또 어떤 말씀을 하실 줄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왜 하느님께서 희생 제사들 드리고 있던 그 사람들이 살해당하도록 허락하셨을까 하고 의아스러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저 갈릴래아 사람들이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들이라서 그런 변을 당한 줄로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말하거니와, 여러분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와 같이 멸망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는 벌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고통이 하느님의 벌이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인간이 덕의 길을 향해 씩씩하게 달려 갈 수 있도록 하려고, 착한 사람에게 주시는 시련의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가장 죄가 무거운 자를 징벌하신다는 그런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죄인은 당연히 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정의의 벌을 벗어나기 위한 단 하나의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기원 70년에 이루어지고 맙니다. 예루살람이 마지막으로 포위되고 공격받을 때, 많은 유대인이 성전 안으로 피난하였는데 그곳에서 로마인들의 칼에 쓰러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실로암에 있는 탑이 무너지면서 깔아 죽인 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빚을 진 이들이었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말하거니와, 여러분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남쪽 성벽은 실로암의 우물까지 뻗어있습니다. 아마 그 곳 성벽 안에 탑이 세워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수도 공사 도중에 이 탑이 무너졌으리라 추측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이 재난은 사람들의 마음에 생생히 남아 있었습니다. 이 사건에서 그 재난은 사람이 직접 개입하여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개입하셔서 그 사람들을 벌하셨다고 추측하는 것이 더욱 그럴 듯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이 벌이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이미 일어난 사건은 모든 사람에 대한 경고였음을 말씀하시면서 회개하라고 호소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의 비유를 들어서 또 말씀하신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원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습니다. 그 후 가서 그 나무에서 열매를 찾아 보았지만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포도원지기에게 말했습니다. ‘보다시피 삼 년째나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찾아 보지만 발견하지 못하니 이것을 잘라 버리시오. 무엇 때문에 땅만 썩이겠습니까?”


팔레스티나에서는 사람들이 포도원에 나무를 심기 좋아했습니다. 포도나무와 마찬가지로, 그 나무들을 가꾸는 일은 포도원 주인이 고용한 포도원지기에게 맡겨집니다. 포도원은 토양이 가장 좋았으며 특히 무화과 나무에 알맞았습니다. 따라서 그 포도원 주인이 자기가 심은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열리기를 기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인은 삼년이나 기다렸습니다. 삼년이면 무화과는 충분히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제 주인의 인내심에 한계가 왔고 드디어 쓸모없는 나무를 베어 버리라고 포도원지기에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포도원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아마 내년에는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주인께서 이것을 잘라 버리시지요.”


포도원지기는 이 나무에 정성을 들여 가꿀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 마지막 인내와 노력이 허사로 돌아간다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그 나무는 베어 버려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은혜로이 제공하신 마지막 유예 기간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포도밭이요, 포도원지기는 바로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은 포도원지기와 마찬가지로 하느님 백성을 회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이 열매를 맺도록 하게 하는 것입니다. 3년은 이스라엘이 회개하기를 기다려 주셨던 시기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 간청을 했습니다. 일년만 더 시간을 달라고…


어찌보면 오늘이 그 일년의 마지막 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하루 이 복음을 묵상하면서


첫째, 나는 의로운 사람이기에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의로운 사람이지만 하느님께서 주시는 시련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둘째, 무화과를 돌보는 사람처럼 내가 진정한 신앙인이 될 수 도록 나를 격려해주고 이끌어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그들의 마음에 어떻게 응답을 하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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