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성탄 대축일 강론 모음

 

  예수 성탄 대축일








1.  김수환 추기경 메시지(1981년)/ 2    2.  김수환 추기경 메시지(1982)/ 5


3.  김수환 추기경 메시지(1985)/ 8       4.  김수환 추기경 메시지(1989)/ 10


5.  김수환 추기경 메시지(1990)/ 13     6.  김수환 추기경 메시지(1991)/ 16


7.  김수환 추기경 메시지(1993)/ 20     8.  김수환 추기경 메시지(1994)/ 22


9.  김수환 추기경 메시지(1995)/ 25     10. 김수환 추기경 메시지(1997)/ 28


11. 정진석 대주교 메시지(1998)/ 31     12. 정진석 대주교 메시지(1999)/ 34


13. 정진석 대주교 메시지(2000)/ 37     14. 정명조 주교 메시지(2000)/ 40


15. 강길웅 신부(가)/ 42                 16. 김영진 신부(나)/ 44


17. 강길웅 신부(나)/ 46                 18. 유영봉 신부(나)/ 48


19. 변희선 신부(나)/ 50                 20. 강길웅 신부(다)/ 52


21. 함세웅 신부(다)/54                  22. 신은근 신부(다)/ 57


23. 거룩한 사랑(사설)/ 58               24. 그리스도의 족보(전야)/ 60


25. 김정수 신부(나)/ 61                 26. 이제민 신부(나)/ 63


27. 김영환 신부(밤) / 66                28. 김정진 신부/ 68


29. 봉준석 신부/ 70                      30. 변기영 신부/ 72


31. 김기수 신부/ 73                      32. 목동들의 조배/ 75


33. 김기수 신부/ 76                      34. 김몽은 신부/ 78


35. 조창래 신부/ 79                      36. 전재국 신부/ 83


37. 성탄은 왜 기쁜가/ 85




1.                 1981년          성탄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구세주의 성탄을 맞이하여 여러분 모두에게. 우라 나라와 온 겨레 위에. 주님의 은총이 풍성하기를 빕니다.




성서상 구세주는 왕이신 분이요,「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가 1.33)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탄생하신 후 동방에서 별을 따라 잦아온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마태 2,2).하고 물었고, 질투심이 강한 헤로데는 훗날의 경쟁자를 미리 없애기 위해, 두 살 이하의 사내  아이들을 모조리 죽여버렸습니다.. (마태 2,17).


과연 예수에 대해서는 구약에서, 이미 오실 임금으로 자주 예언되었고, 예수님 스스로도 부인하지는 않았습니다 (요한1.49)


 


그러나 예수님은 세속의 권력을 잡기 위해서나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탄생부터 가난하였고, 종말에는 버림받고 비천한 죄인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뿐더러 가난하고 약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들을 “나의 형제”라고 부르고. 그들과 자신을 일체화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최후 심판날 왕좌에 앉으실 때에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내가 헐벗었을 때에‥‥ 내가 옥에 갇혔을 때에‥‥」라고 말하리라 하셨습니다.(마태 25,31이하」


 


우리는 이런 왕을 본 일이 있습니까? 굶주리고, 헐벗은 왕을, 본 일이 있습니까?


또한 그는 죄인들과도 곧잘 어울렸습니다. 그래서 의인으로 자처하는 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습니다.(마르 2,16)




우리는 죄인들과도 다정한 왕을 본 일이 있습니까? 왕치고는 참으로. 괴상한 왕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미쳤다는 말까지 들었습니다.(마르 3,21).


그리스도가 세상에 강생한 것은, 오직 인간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그에게 있어서 세상 모든 것 위에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안식일같이 중대한 율법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인간이었습니다.(마르 3.27). 이 인간을 하느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모습인 존엄한 인간으로 구원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는 몸과 마음을 모두 바쳤고, 드디어는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쓸모 없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간음한 여인, 세리. 탕아 등 세상에서는 폐물처럼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로 인해 새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고, 거룩하고 태양같이 빛나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그리스도는 보았습니다. 뿐더러 자신은 바로, 먼저 이런 사람들을 위해 왔다고 하셨습니다.(마르 2.17) .



그거기에 그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았습니다.」(마태 12,20). 세상은 이들을 천대하고 버리지만 그리스도는 품에 안고 감싸주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성탄에 구세주로 나신 분이 이같이 자비롭고, 사랑에 가득 찬 분임을 깊이 인식해야하겠습니다. 그는 참으로 모든 인간, 특히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과 .죄에 울고. 실의(失意)에 젖은 사람들의 위로요, 희망이요, 구원의 빛입니다. 그는 실로 하느님의 백성에게 기쁨과 승리. 정의와 평화를 안겨주는 사랑의 왕이십니다(이사야 9,1-6) .




오늘 날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은 확실히 잘못되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은 더욱 험악해지고 비인간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사회와 오늘의 세계에서는 가난한 자. 약한 자들의 설 땅은 날로 더욱 좁아듭니다. 그들은 밀쳐나고 짓눌리고 있습니다. 그 대신에 금력과 권력 등, 힘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이들은 바로 그 가난하고 약한 자들의 희생 위에 자신들의 발판을 굳히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약육강식이 현세를 지배하는 원리처럼 되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누가 살아남을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현대 물질문명은 분명히 이같이 세계를 멸망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럼 왜 이렇게 오늘의 세계는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길로 치닫고 있습니까?  근본적으로는 하느님을 배제한 물질 위주의 문명을 쌓아올렸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근원입니다. 그의 존엄성, 그의 자유, 그의 능력, 그의 미래,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옵니다. 또한 이간은 하느님 창조의 뜻에 따를 때에 비로소 자신의 정체를 찾을 수 있습니다. 무신론 유물론에서는 안간이 존엄할 이유도, 평등할 이유도 없습니다. 양심의 근거도 없고, 따라서 인간이 윤리적인 존재일 필요도 없습니다. 단지 싫든 좋든 함께 살아가야 하기에 협력관계에 있는 것이 낫다는 현실성 외에 다른 윤리적 필요성은 없습니다.


 


그런데 공산세계뿐 아니라. 이른바 자유세계도 바로 이같은 무신론. 유물론을 바탕으로 전적으로 “세속적”인 사회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얼핏 보기에 인간이 자율적이요, 절대적인 규범으로 숭상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神이 없기에, 먼저 인간존엄의 바탕이 무너집니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와 평등의 바탕, 양심과 윤리의 바탕도 무너집니다. 오늘날 세계도처에서 목격되는 인권유린과 자유의 속박, 낙태와 폭력행위 등 인명(人命) 경시의 모든 죄악의 원인은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오늘의 세계는 약육강식의 원리에 따라, 스스로 종말을 재촉하는 세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과 세계의 구원은 하느님이라는 근원에로 인간이 돌아가는데 있습니다. 그래야만 인간은 자신의 존재의미. 삶의 의미를 깨닫고. 자멸의 역사를 구원의 역사로 전환시킬 수 있습니다.


  구세주 그리스도는 바로 이같은 전환을 인간과 세계 안에 이룩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말씀과 삶 전체를 통해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크신 뜻과. 사랑을 드러내 보이심으로 인간의 신비를 가장 깊이 밝히셨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이 당신 모습에 따라 사랑으로 창조하셨고, 하느님의 생명과 영광에 참여하는 부르심을 받고 있기에, 존엄하고 평등하며, 또한 그 때문에 모든 인간은 서로를 존경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스도는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서 밝히셨습니다. 인간 존엄성의 신비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 그리스도의 강생과 수난과 부활을 통하여 더욱 깊어지고 더욱 높아졌습니다.


  그리스도는 참으로, 인간이 진정 거룩하고 지존하신 하느님의 자녀로 구원되기 위해서,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남김없이 사시고 드러내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요한 13.34)라고 거듭 간곡히 당부하셨고, 모두가 사랑 안에 하나되기를 기원하셨습니다(요한 17,11). 그가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이 신적인 사랑에서였고, 이 사랑 안에 온 인류를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성탄에 오신 구세주 그리스도는 과연 왕이십니다. 그러나 그는 「백성을 강제고 지배하고, 권력으로 내리누르는」(마태 20,25) 왕이 아니라, 사랑으로 봉사하는 왕이십니다. 그래서 그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모든 이를 위해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왔다”(마태 20,28)고 말하였습니다. 자기 백성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치고, 몸값을 치루기 위해 오신 왕, 그가 이 밤에 강생하신 구세주 그리스도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살길, 세계의 살길은 바로 이 그리스도를 우라 모두 따르는데 있습니다. 우리들 하나하나가 이 사랑과 봉사의 길을 갈 때에, 우리는 해방되고 구원됩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길이 여기 있습니다. 현 교황 바오로 2세는 회칙 <인간의 구원자>에서 “인간이야말로 교회의 길이다”라고 천명했습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간을 사랑하시고, 특히 가난하고 허약한 자들, 버림받은 자들과 자신을 일체화시켰듯이, 그의 몸인 교회도 같은 사랑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세자라면 우리도 이 불행한 사람들을 “우리의 형제”라고 부를 수 있어야하고, 그들과 함께 있고,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눌 줄 알아야 맙니다. 그럴 때에 구세주 그리스도의 성탄은 오늘 이 시간. 우리의 현실 속에서 구체적인 의미를 갖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오신 구세주 그리스도의 사랑과 기쁨, 평화가 가득하기를 다시금 빕니다.


2.                  1982년        성탄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구세주의 성탄을 맞이하여, 여러분 모두에게 그분의 은총이 충만하기를 빕니다. 특히 가난하고 약한 이에게, 고통에 신음하고 우는 이들에게 구세주의 위로와 평화가 가득하기를 빕니다.


 


오늘날 우리의 세대는 어느 때보다도 상처를 치유해 주시는 분, 어두움을 밝혀 주실 분을 갈구하고 있습니다.


지난 1982년은 인류가. 또 우리 겨레가 많은 상처를 입고 괴로워한 해였습니다. 국제적으로는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전쟁, 장기화된 이란과 이락의 전쟁, 구세주 예수께서 탄생하신 곳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난 레바논 사태의 엄청난 참상, 중미 지역의 격화되는 내란과 분쟁, 아프리카 내륙의 내전과 기아 상태 등, 너무나 자주 일어난 비극적인 사태로 인하여, 인류는 아물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전신에 입어 왔습니다. 인류는 왜 이렇게 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하염없이 빠져들어 가는 것입니까?


 


세상은 힘을 숭상하고 있습니다. 개인이나 국가를 막론하고 모두가 힘을 얻음으로써 성공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힘을 얻고 더 쌓기 위하여 지식, 돈, 지위, 권력을 이용하려고 실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때문에 개인이나 국가들 모두가 소유의 노예가 되고, 인간성은 갈수록 상실되어 가고 있습니다. 힘이 축적될수록 사람과 사람사이에, 나라와 나라 사이에 빈부의 격차가 커지고, 힘없는 자들은 힘있는 자들의 희생물이 되고 있습니다.


 


온갖 불의와 부정도, 억압과 탄압도 일단 힘을 얻으면 그것으로 정당화되고, 기정 사실로 묵인됩니다. 그리하여 개인도 국가도 우선 힘을 확보하여 우세한 고지를 점령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힘의 우세한 고지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현대 세계가, 지식과 자원을 총동원하여 축적한 힘의 상징은 무엇입니까? 이른 바 강대국들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입니다. 수많은 핵무기를 저장하고 준비함으로써, 인류는 무엇을 달성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인류에게 구원을 가져오겠습니까? 무제한으로 보급된 핵무기 체제에서 파멸밖에 더 기대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스스로에게 눈을 돌려 우리나라의 지난해를 살펴보아도, 힘이라는 우상이 판을 쳐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전쟁이 직접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제가 아주 적은 사람들의 손에 뿌리 채 흔들리고, 수많은 이들이 크게 타격 받은 모습을 역력히 볼 수 있었습니다. 이도 결국은 힘을 추구한 소수 사람들의 과욕이 빚어낸 비극인 것입니다.


 


우리나라와 우리 교회에 충격과 시련을 안겨 준 미국 문화원 방화사건은, 지금도 해결을 보지 못한 채 우리 모두의 가슴을 아프게 해 주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이러한 극한 상황을 초래하였습니까?. 우리는 결코 그 원인을 사건에 관련된 몇몇 사람들의 책임으로 돌리고 그들만 심판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보다 많은 이들이 힘을 믿고 힘을 추구하다가, 힘의 대결을 벌인 결과였던 것입니다.




우리 구세주 예수는, 힘에 마력에 사로잡혀있는 우리 모두를 해방시키려고 오셨습니다. 힘은 인간을 결코 구원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정반대로 이끕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 하느님과 본질을 같이 하시는 분이지만, 가장 무력한 인간, 명예도 지식도 재산도 없는 무력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베들레헴에 탄생한 아기 예수를 보면, 그에게는 아무런 위엄도 권능도 없습니다. 오히려 가난과 허약 뿐입니다. 그 허약함과 무력함으로, 어떻게 이 세상 전체를 구할 수 있단 말인가? 이에 대한 답을 우리는 쉽게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분은 뺨 맞고 침 뱉음을 당하며, 끝까지 힘없는 이의 모습을 지켜 나가셨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힘있는 자보다도 위대한 일을 해내신 것입니다.




그분은 나실 때부터 약하고 가난하셨을 뿐 아니라 가난한 자로 나셨고, 죽으실 때도 무력하게 버림받은 자 되어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까지 당신을 비우시고 낮추셨기에, 모든 낮은 자, 힘없는 자의 벗이 되셨습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힘없는 자들뿐 아니라 윤리적, 종교적으로도 자격 없는 이들까지 돌보고 아끼셨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사랑이셨기 때문입니다.


참 사랑은 한편 무력합니다.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거절할 수 없을 만큼 무력합니다. 어떠한 고통도, 죽음까지도 받아들입니다.  그때문에 사랑은 가장 무력하면서도 가장 강인합니다. 그러기에 사랑은 온 세상을 분쟁과 갈등과 파멸로부터 구할 수 있는 구원의 첩경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사랑 때문에 아무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무력하셨지만 당신께 다가오는, 수고하고 짐진 자에게 당신 자신을 전부 내 주시고, 풀어 주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소경의 눈이 뜨고, 절를발이가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루가 7,22)




그 사랑으로 좌절과 실의에 넘어진 사람들의 가슴에 희망이 가득 찼고, 미움과 저주에 오그라든 사람들이 용서와 화해의 기쁨을 알며, 오만과 독선에 오염된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알았습니다. 한 마디로 죄의 굴레에 겹겹이 둘러싸였던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에 닮은 참 인간다웁게 새로이 구원되었습니다.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을 철두철미 무(無)로 비우신 몰아적 사랑이, 이같이 큰 구원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도 이 같은 구세주의 길을 함께 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 수가 날로 팽창하고, 십자가와 종탑이 도처에 솟아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땅에 참된 의미의 구원의 기미는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직도 교회가 부족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신자라고 하면서, 그리스도께서 가신 그 길을 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우리 역시 세속과 같이 힘과 영광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를 불문하고 많은 이들이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성당을 짓고 시설을 확장하고 각종 행사와 교육을 실시하여 교회 전체가 대단히 바쁘게 돌아갑니다.


 


그러나 이렇게 눈부신 교세 신장을 이룩하면서, 우리는 과연 얼마나 우리 스스로를 비워 가난하고 약한 이들과 함께 나누고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 교회는, 스스로를 아름답게 꾸미고, 스스로를 능률적으로 조직하고, 스스로를 풍요롭게 발전시키기 위해 놀랄만한 행동력을 구사합니다. 그러나 베들레헴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무력하게 드러내고, 무거운 짐진 이들의 짐을 대신 지는 것은 잊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힘을 축적하는 것에 열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마저 세속을 닳아 함께 행동한다면 무력한 이들의 갈 곳은 어디입니까?


 


우리는 선교 200주년을 바라보면서 이같은 반성과 쇄신을 무엇보다 소중히 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선교 200주년을 기리기 위해 여러가지 기념사업과 행사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 자체 좋은 것이요,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진정 그리스도의 무력한 모습을 닮지 않은 때에는, 이 모든 것은 헛되고 소란을 피우는 것으로 그치고 말 것입니다.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있고, 땅에서는 아기 예수 닳은 이들에게 평화 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성탄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새로운 삶을 다짐해 봅시다. 주께서 평화와 기쁨을 이 땅에, 그리고 북한의 동포들에게도 새롭게 드리워 주시기를 거듭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구세주 예수의 위로와 축복, 사랑과 평화가 가득하기를 빕니다.








3.              1985년           성탄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어둠 속에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입니다.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추어 올 것입니다”(이사 9,1)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구세주 오심을 이렇게 예언한 이사야 선지경의 말씀이 성탄을 맞이한 오늘 우리에게, 마음 속 깊이 메아리치기를 기원합니다. 왜냐하면 오신 메시아는 참으로 우리를 모든 어두움, 모든 죄의 질곡과, 불의와 부정의 속박에서 건져주실 분이시오, 우리를 참 인간으로 다시 나게 하고, 영원히 살게 하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보면 정말 암담합니다. 우리나라는 분단된 상태 그대로인데, 우리 사회는 갈기갈기 찢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사이에는 믿음이 없고, 사랑이 없고, 용서가 없고, 화해가 없습니다.


지금은 “한강의 기적”을, 또는 “선진조국”을 구가할 때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정치부재, 진리부재, 정의부재, 드디어는 인간부재의 어둠 속에 갇혀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분명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이 어둠을 깨고 빛을 향하여 새 날을 밝힐 것이냐, 아니면 이 어둠 속에서 서로 물고 뜯고 비방하는 시행착오를 계속할 것이냐 하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혁명이나 반혁명이 아닙니다. 강권발동의 무제한의 탄압도, 이에 대한 무기한의 투쟁도 아닙니다. 그러면 다 망한다는 것을, 정부도 그 반대편도 알아야 합니다. 정치현실, 경제현실, 가치관 전도의 사회현실을 생각할 때, 참으로 국난을 겪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난국을 극복하는데 요청되는 것은, 국민 모두의 화합입니다. 모두가 참으로 사리사욕을 버리고 먼저 이웃을 위하고. 나라와 사회를 위하는 홍익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이같은 국민적 화합과 모든 국민의 홍익인간으로서의 변화와 적극적 참여를 얻기 위하여 절대적으로 또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정치 지도자들의 회심입니다. 그들은 참으로, 누구보다도 오늘의 현실이 일차적으로 그들 자신에 의해 빚어졌다는 책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동시에 일체의 욕심을 버리고 빈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들은 자신을 살리고. 나라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 지도자들 모두가 힘을 모아, 이 나라를 참된 의미의 민주주의 나라로 만드는 일입니다. 진리와 정의를 바탕으로 국민을 화해로 이끄는 민주화, 모든 국민의 인권을 존중하고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민주화, 이것은 오늘날 국난 극복의 요체요, 어둠을 뚫고 빛의 새날을 밝히는 길입니다. 오늘의 민의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의 젊은이, 특히 학생들의 부르짖음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기에 민주화는 오늘의 문제에 대한 너무나 명백한 답입니다.


만일 여야 정치 지도자들이 이 명백한 답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멸망을 자초할 뿐 아니라 나라의 운명까지도 불행하게 만들어 역사의 심판을 받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 때문에 본인은, 위정자를 비롯한 정치 지도자들이 대오각성하여 유신 말기의 전철을 결코 밟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동시에 민의를 참으로 존중하여, 민주화의 역사적인 과업을 이룩함으로 이 시대에 이 나라를 어둠에서 빛으로 구출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기기를 간절히 호소합니다.




빛의 자녀답게 평화의 도구로 헌신한다면!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놓인 상태가 아무리 어둡다 할지라도 실망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모든 어두움에서 구원해주실 빛이신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강생하셨슴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말씀이시오, 생명이시며 빛이십니다(요한1). 우리가 그분 안에 사는 한 우리는 결코 어두움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입니다(요한 8,12;12.46).


 


그리스도는 잠시 암흑의 세계가 판을 치는 가운데 죽음을 겪어야 했습니다(루가 22,53). 그러나 이는 죽은 모든 것을 다시 살리는 부활 생명의 빛이 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고난을 더 겪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새 날을 반드시 맞이할 것입니다.


 


오늘 성탄은, 이 부활의 생명이요 빛이신 주께서 우리 가운데 임하셨다는 것을 기리는 것입니다. 빛이신 주께서는 어두운데서 우리를 불러내시어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해 주셨습니다(1베드 2,9참조). 우리는 이미 세례 성사로써 이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빛은 모든 선과 정의와 진실을 열매 맺습니다”(에페소 5,8).


그러므로 우리 믿는 모든 이가  한국의 크리스천  모두가 이 성탄에 이 진리를 깊이 깨닫고, 입으로만 주를 섬길 것이 아니라, 새롭게 분발하여 빛의 자녀로써 우리 생활의 모든 영역, 정치, 경제, 교육, 문화, 가정과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그리스도의 진리, 정의, 사랑, 자비, 평화의 도구로 헌신한다면, 우리는 우리나라를 분명히 이 어두움에서 빛으로 인도해낼 것이고, 더욱 빛나는 장래를 바라볼 수 있게 할 것입니다. 


 


교회는 하느님과의 일치, 또한 모든 인간 상호간의 일치의 성사요, “표지요, 도구입니다(교회헌장 1). 그렇다면 한국 사회 속의 교회는 오신 구세주의 생명과 사랑의 빛, 진리와 정의의 빛으로 새롭게 가다듬어 – 자신을 완전히 비워가면서 – 이 겨레의 화해와 단결, 더 나아가 통일의 원동력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성체와 가정”을 우리 신앙생활과 사목의 목표로 정한 1986년도에는, 이 사명을 더욱 깊이 명심해야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모든 이를, 당신 생명으로 살리고 하나로 만들기 위하여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삶으로써, 우리 가정의 일치, 우리 본당 공동체의 일치, 우리 사회와 나라의 일치와 평화를 위해 예수님과 함께 우리 자신도 아낌없이 제물로 내놓읍시다. 특히 예수님처럼 우리 자신도 주변의 가난한 이, 고통받는 이, 병자, 소외된 이를 위하여, 또한 노동자, 농어민, 도시빈민을 위하여,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을 주고 나눌 수 있는 것을 나눔으로 그들과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 (사목헌장 1)를 함께 합시다. 그러면 주님은 확실히 우리 겨레를 암흑에서 광명으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다시금 성탄엔 오신 구세주의 은총이 풍성하기를 간구합니다.














4.                           1989년      성탄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구세주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그분의 은총과 평화가 모든 이에게 가득하기를 빕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이 사회는 모든 이에게 진실로 마음의 평화를 주는 메시아, 모든 이를 사랑과 용서, 화해와 일치로 이끄는 메시아가 필요합니다. 특히 이 시기는 한해가 가고 새해를 맞이하는 때이며, 80년대를 마치고 90년대를 맞이하는 중요한 때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바로 이런 때에 그동안 너무나 국민 모두에게 실망을 주어왔던 이른바 ‘5공청산’ 문제에 있어 영수회담을 통하여, 여야 간에 큰 타협으로 합의를 보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간에 우리나라 정치는 너무나 이 과거 청산에 얽매여 미래 건설을 어둡게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미래 건설을 위해 정치 지도자들은, 뜻과 힘을 모아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큰 정지를 펴나가기를 기대합니다. 또한 이런 합의를 바탕으로 우리 사회의 현안인 지역감정, 빈부격차, 이념대립도 해결되고, 각종 사회악도 근절되며, 국민 모두 서로 믿고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여 의롭고 평화롭고 인간다운 사회, 안정된 사회가 이룩되고 민족통일의 날이 하루 빨리 밝아오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진리와 정의의 주이시고, 사랑과 용서, 일치와 평화의 주이신 구세주 오심을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가 2,14)라는, 천사들의 노래 소리가 오늘 이 땅 모든 이에게도 울려 퍼질 수 있기를 빕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시는 구세주를 아무런 준비 없이 맞이할 수는 없습니다. 구세주는 분명히 오십니다. 그분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십니다. 이천년 전 하느님의 외아들,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심으로, 그분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임마누엘이십니다(마태 1,2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우리 가운데 계심을 우리는 깨닫지 못하고, 느끼지도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그분을 향하여 열려 있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그분께로 돌려야 합니다. 곧 ‘회개’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옛날 메시아의 앞길을 닦으며 하느님 나라를 맞이하기 위하여 회개하라고 외치신 세자 요한의 말씀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요한은 “속옷 두 벌을 가진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사람에게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도 이와 같이 남과 나누어 먹어야 한다”(루가 2,11)고 하시면서, 세리와 군인을 비롯하여 당대의 모든 사람에게 각각 자신의 직분에 따라 해야 할 일들을 가르치시고, 모두에게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 그러면 죄의 용서를 받을 것이다”(동상 4)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든 이에게 해당됩니다. 정지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돈이나 힘을 가진 사람들에게, 특히 더 해당됩니다. 참으로 우리 사회의 가진 사람들은 자기 것을 남과 나눌 줄 알아야 합니다. 정치인들은 이런 분배의 원리를 제도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강구하고 성실하게 이를 추진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누구나 공감하듯이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안정이 필요합니다. 이를 얻지 못하면 우리는 이미 그 징후를 보는 바대로 경제는 낙후하고, 국민이 바라는 민주화도 후퇴하며, 민족의 염원인 통일도 더욱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안정 위에 발전을 기하기 위해 노사분규와 학원소요가 없기를 바라며, 모든 문제가 당사자들간의 격의 없는 대화로써 해결될 수 있도록 모두가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참된 대화를 위해서는 강자가 약자를 존중하고, 마주 앉을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떤 형태로든 폭력을 쓰는 극한투쟁이나 강경대응은 되풀이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호소하는 바입니다.


그러면서 이에 앞서 우리 사회의 지도층, 정치적으로 힘이 있는 사람들과, 이른바 부유층은 정말로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나 우리 사회 전체의 안녕과 발전을 위하여, 마음을 바꾸고 삶을 바꾸어야 하며, 가난한 이웃과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가진 사람들이 과소비로 즐기기에는 아직도 우리 사회 안에는 가난에 울어야 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나눈다는 것은 쓰고 남은 것을 이른바 ‘자선’을 위해 내어놓는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토지 공개념에서 볼 수 있듯이, 땅이나 재산 모든 것이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모든 이를 위해 있다는 근본 인식과 함께, 이를 사회와 이웃의 선익을 위하여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진 사람들의 마음에 이런 변화가 없고, 돈이든 권력이든 여전히 자기 욕심만을 추구하는 한, 빈부의 격차는 날로 심화되고, 가난한 이들의 고충은 가중되며, 사회의 불안, 정지와 경제의 혼미는 계속될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가 아무리 성탄카드와 선물을 나누고, 크리스마스 츄리를 화려하게 장식한다 해도, 우리는 오신 구세주를 절대로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뿐더러 우리가 바라는 안정도, 평화도, 번영도 오지 않을 것입니다.




메시아는 마음이 가난한 곳에 탄생하십니다. 자비를 베풀고,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그분을 뵈옵게 될 것입니다(마태 5,7-8 참조). 복음은 분명하게 “하느님과 재물,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마태 6,24)고 하였고,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빠져나가는 것보다 더 힘들다”(마태 19,24)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정 우리 마음이 회개하여, 모든 욕심을 떠난 빈 마음이 될 때, 우리는 메시아를 뵈올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가진 것을 나눌 뿐 아니라 이웃의 아픔, 고통도 나눌 줄 알고,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도 나눌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나누는 공동체가 되어야 이 난국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5공비리의 청산과 함께, 우리 마음의 비리도 청산되어야 합니다. 우리 한국인의 병폐와 같은 한탕주의나 돈을 벌기 위하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기주의적 탐욕과 물질주의, 정지인들의 당리당략과 지금 이 사회에 미만된 도덕적 불감증이 청산되지 않는 한, 우리는 절대 새로운 미래를 건설할 수 없습니다.




국민 모두가 이 같은 자신의 과거의 비리, 스스로의 부정과 불의를 청산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정직과 성실이 우리 사회의 정신 풍토의 기틀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양심과 도덕의 회복, 신뢰회복이 우리 안에 이룩되어야 합니다. 지금이 과거를 청산하고 90년대라는 역사의 새 장을 열어야 하는 시점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이렇게 다시 태어남에는, 모든 종교인,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누구보다도 솔선수범해야 하겠습니다. 특히 우리 교회는 세계 성체대회를 통하여 체험한 성찬의 신비를 삶으로써, 이를 구체적으로 증거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곧 성찬의 신비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그 한없는 사랑을,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다짐으로 사는 것입니다. ‘한마음 한몸’운동의 정신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는 곧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를 닳고 그리스도와 한마음 한몸이 되고, 우리 자신이 성체가 되어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사랑과 희생의 운동입니다.


 


우리 마음이 이렇게 모든 이를 향하여 열릴 때, 특히 가난한 이웃 ,고통받는 이웃을 비롯하여 모든 인간을 진실된 사랑으로 껴안을 수 있을 때, 바로 거기에서 우리는 오신 메시아, 구세주를 만날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우리가 “오늘 주님의 이 말씀을 듣게 되면”(시편 95, 8 참조) 누군가가 말했듯이, “주님은 오십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내년이 아니라 금년에, 우리의 불행이 지나간 다음이 아니라, 그 한가운데로, 다른 어떤 장소가 아니라 우리가 서 있는 이곳으로, 주님은 오십니다.


“다시금 오신 구세주의 평화가 여러분과 우리나라에 가득하기를 빕니다.














5.                  1990년            성탄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성탄을 맞이하여 강생하신 구세주의 은총콰 평화가 이 땅과 은 누리에 가득하기를 빕니다. 성탄은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어 오신 날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요한 3, 10)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극진히 사랑하신 세상이란, 바로 우리 인간 세상입니다. 인간의 죄로써 더럽혀지고 썩은 세상, 가난과 병고, 고통과 비참으로 가득 찬 세상, 죽음의 절망에 놓인 바로 이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을 하느님은 극진히 사랑하십니다. 세상이 잘나서는 물론 아니고, 세상의 죄나 인간의 비참을 좋아해서는 더더욱 아닙니다.




오직 그런 가운데 죽어 가는 인간, 고통으로 신음하는 인간을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은 도저히 그냥 버려둘 수 없을 만큼 자비로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 인간과 인간 세상을 구하시기 위해 하느님은 외아들을 보내셨고, 외아들이신 분은 본시 하느님과 본질을 같이 하시면서도 당신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필립 2,6-7 참조).




이것이 곧 예수 성탄입니다. 그러기에 성탄은 진정 우리 인간을 위해 말할 수 없이 큰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우리를 위하여 사람이 되어 오셨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주님은 오로지 우리 인간을 죄와 죽음의 구렁에서 건져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주님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 13) 하셨고,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고,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태 20,28)라고 하셨습니다. 때문에 이사야는 이미 오래 전에 “그분은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셨다”라고 예언하였습니다(이사 53,4; 마태 8,17).




오신 메시아는 참으로 이렇게 한없이 좋으신 분이십니다. 복음의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하늘나라의 기른 소식을 선포하셨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셨습니다(마태 9,37). 모든 인간을 사랑하시고 그 중에서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가난하고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 죄인들, 소외된 사람들, 절망적인 존재까지도 지극한 사랑으로 받아주시고, 그들과 고통을 나누실 뿐 아니라, 그 고통을 대신 지시고 그들을 구하기 위하여 당신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내놓으십니다. 그분은 정녕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셨습니다”(이사 42,3: 마태 12,20 참조).




그분 앞에 쓸모없는 존재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 메시아는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오늘도 우리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당신의 사랑을 펴시고, 당신의 구원사업을 이어가고 계십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참으로 어둡습니다. 정치는 너무나 큰 실망을 안겨주고, 경제도 침체를 면치 못하고 있으며, 이기주의와 물질주의가 이 사회에 만연해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윤리 도덕은 땅에 떨어졌고, 반인륜적 범죄는 날이 갈수록 더욱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온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인간생명의 존엄성마저 너무나 무시되어 가고 있습니다. 도대체 우리 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를 만큼 암담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좀처럼 우리의 생각도 삶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메시아는 바로 이런 세상에 탄생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실망과 좌절 한가운데, 우리의 죄와 죽음의 바로 그 구렁텅이에 오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탄생하신 그 시대 그 사회도, 우리보다 더 낫지는 못했습니다. 세상을 지배한 것은 오늘과 같이 돈과 권세였고, 불의와 부정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통치자들은 강제로 백성을 지배하고 권력으로 내리 눌렀습니다(마르 10,42 참조).




예수 탄생 후 아기 예수를 자신의 왕권에 도전하는 것으로 오인하여, 그를 없애기 위해 베들레헴과 그 일대의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인 헤로데 왕의 작태에서(마태 2,10 참조), 우리는 그 시대상을 잘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리사이파나 율법학자 또는 대사제들에서 보듯이, 당시의 지도층은 거짓과 위선으로 깊이 병들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들 역시 예수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예수를 오히려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이단자로 몰아 죽였습니다.




이처럼 그 시대는 세상을 구하러 오신 메시아, 생명의 주를 못 알아보고 죽일 만큼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또한 종교적으로까지 타락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바로 그런 세상 한가운데에 그런 세상을 구하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어 탄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의 우리 사회가 아무리 어둡고 절망적으로 보일지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구원할 구세주가 탄생하셨고,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둠 속을 헤메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입니다.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 올 것입니다”(이사 9, 1)라고 하신 이사야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이 성탄에 우리를 덮고 있는 것은 결코 밤의 어둠만이 아닙니다. 그 어둠 속에 새 날의 빛이 보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 성탄에 오신 구세주께로 향해 있고, 우리 영혼의 눈이 그분을 보고 있는 한, 우리는 결코 죽음의 절망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과 생명이 우리 앞에, 우리 옆에,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그 증거로 오늘과 같이 삭막하고 인정이 메마른 세태 속에서, 많은 이들이 가난하면서도 정직하게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며, 많은 이들이 불우한 이웃들을 위하여 자기 시간과 돈을 써가며 묵묵히 봉사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불치의 병과 지체장애의 시련 속에서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신앙을 깊이 살고 사랑을 실천함으로, 이웃에게 참된 삶의 모습과 함께 하느님의 현존과 평화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들이야말로 성서에서 말하는 야훼의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이들이 받는 고통의 세례를 통하여 비로소 구원될 것입니다. 또한 흉악범일지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 접함으로써 완전히 새 사람이 된 경우를, 우리는 적지 않게 목격합니다. 이렇게 우리 안에는 어둠 속에 등불을 밝히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강생하신 그리스도의 빛입니다.




매문에 우리의 내일, 우리의 앞길은 결코 막혀 있지 않습니다. 구세주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러 와 계십니다. 아니 그분 자신이 당신 몸을 십자가에 눕히시어 우리 구원의 길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길이신 그분, 그리스도를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를 가두고 있는 이 실망과 좌절, 고통과 비참으로 가득 찬 죽음의 터널을 반드시 뚫고, 생명과 빛으로 충만한 그 나라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91년 새해는 기필코 희망찬 내일로 우리 앞에 동터 올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2천 년대도 밝은 얼굴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그것은 결국 그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지극한 사랑으로 사랑하셨듯이, 우리 서로 참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서로 위하고, 서로 돕는 것입니다.


서로 잘못을 용서하고 서로의 짐과 서로 가진 것을 나누며, 그분처럼 서로를 형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자기 희생의 고통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좋은 일에는 고통과 희생이 반드시 전제됩니다. 그리스도는 세상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길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고통과 희생을 무릅쓰고 그리스도를 따라 사랑의 길을 갈 때,  우리 자신은 구원되고 또한 오늘날 우리 사회와 나라, 우리 겨레를 갈라놓는 모든 분열과 단절의 벽은 무너질 것입니다. 너무나 골이 깊은 빈부의 격차도 없어지고, 지역간, 계층간, 세대간의 벽도 사라질 것입니다. 마침내 도저히 넘을 수 없게만 보이는 남북분단의 장벽도 무너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온 겨레가 손에 손잡고, 서로 부등켜 안으며 우리는 한겨레, 한핏줄 임을 뜨겁게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구세주는 이처럼 인간과 세상을 모든 죄와 단절, 모든 분열에서 구원하여 당신 안에 하나로 모으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분은 실로 이를 위해 당신 목숨까지 사랑으로 남김없이 바치신 분이십니다. 이와 같이 우리를 위해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 빛과 생명이 이 성탄에 여러분 안에 가득하기를 다시금 빕니다. 


                                            












6.                      1991년               성탄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1. 구세주의 성탄을 맞이하여 그분의 은총과 평화가 온 누리에 가득하기를 빕니다. 특히 이 땅 우리 조국, 갈라진 한반도에, 그분은 오시어, 당신 빛으로 우리 모두의 마음에서 어둠을 물아내시고, 미움과 원한과 일체의 적대감을 없이하여 하나되게 하시며, 또한 많은 죄로 오염된 우리의 몸과 마음, 사회와 자연환경까지도 다시 깨끗하게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싶습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런 은혜가 너무나 갈구됩니다. 오늘 우리의 처지는 참으로 어둡습니다. 정치는 중병에 걸려 있고, 경제는 날로 침체 일로 입니다. 가치관 부재에다 윤리 도덕은 완전히 땅에 떨어졌습니다. 낙태의 성행을 비롯하여, 인명 경시와 인신 매매, 성폭행, 각종 사기 행위 등 반인륜적이요, 파렴치한 범죄가 다반사가 되어 있습니다. 뿐더러 우리에게는 질서 존중과 기본적 시민 의식과 상부 상조의 공동체 의식이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특히 내년에 있을 4대 선거와 쌀 개방과 연결된 우루과이라운드 타결 문제는, 그런 것이 일으킬 정치적 및 사회적 파급을 생각할 때, 우리는 다시 한번 중대한 시련 앞에 서있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도충으로부터 시작하여, 국민 모두가 진실로 각자 자신의 삶을 깊이 성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잘못, 특히 오늘의 모든 문제의 뿌리라고 볼 수 있는 개인적 집단적 이기심과 물욕, 이로 말미암아 저지른 모든 잘못과 사회에 입힌 모든 해악을 마음 깊이에서 뉘우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하여라”는 메시아의 앞길을 닦은 세레자 요한이 광야에서 외친 첫 소리였고(마태 3,2), 또한 예수님 자신이 하신 첫 말씀입니다(마르 1,15).


그보다 앞서 이사야는 구세주를 맞을 준비를 하라면서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모든 골짜기는 메워지고 높은 산과 작은 언덕은 눕혀져 굽은 길이 곧아지며, 험한 길이 고르게 되는 날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가 3,4-6)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회개함으로써 이 길을 닦아야 합니다. 진리와 정의와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이 길을 닦아야 합니다. 지역간, 계충간에 빈부의 격차로 생긴 골을 메움으로써 화해와 일치의 길을 닦아야 합니다. 남북분단의 이념과 체제의 높은 벽을 무너뜨림으로써, 민족 통일의 길을 닦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구원’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다행히도 제5차 남북 고위급 회담에서 남과 북은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의 기본 원칙에 합의를 보았습니다. 이 합의는 참으로 민족의 밝은 내일을 기약하는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는 이 합의가 이 땅의 평화 정착과 통일을 위해 반드시 실현되기를 간절히 빕니다. 이는 또한 성탄에 오는 구세주의 정신에도 부합합니다.


성탄의 메시지는 평화입니다. 온 세상 모든 이가 모든 분열과 단절의 벽을 넘어 하나되는 평화입니다. 그리스도는 이를 위해 오셨습니다. 그분은 이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내놓으셨고, 생명까지 바치셨습니다.




2. 성탄은 실로 하느님의 아들이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온전히 주시려 당신의 모든 영광, 모든 위엄, 모든 권능까지 버리시고 가난하고, 약한 한 아기로 우리 안에 탄생하신 사건입니다. 실로 인간의 모든 지식과 상상을 초월하는 사건입니다. 그분은 본래 하느님과 본질을 같이 하시는 분이신 데, 우리를 위하여 당신을 비우고 낮추시어,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필립 2,6-7). 우리는 참으로 여기서,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담 이래 인류의 역사는 죄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만큼 인간은 하느님을 거스려 거듭거듭 죄를 지었습니다. 생명의 주(主)를 거스리는 죄는, 결국 인간의 죽음을 불러왔습니다. 죽음은 모든 인간이 타고난 피할 수 없는 운명의 굴레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이런 인간과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인간을 그 죄와 죽음에서 구하시기 위하여 당신 외아들을 보내셨습니다(요한 3,16). 인간이 깊이 빠져 있는 죄와 죽음의 구렁의 밑바닥에까지 보내셨습니다. 얼마나 큰 기쁜 소식입니까?




참으로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죄가 많은 곳에 은총이 풍부히 내렸습니다(로마 5,20). 그리스도는 부유하셨지만 우리를 위하여 이처럼 가난한 자 되셨고(2고린 8,9), “우리 죄 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로마 5,6) 우리 구원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이렇게까지 당신을 아낌없이 비우고 낮추신 예수님, 무(無)가 되다시피 하신 하느님을 우리는 베틀레헴에 탄생한 아기 예수 안에 볼 줄 알아야 합니다.




3. 이제 이렇게 당신을 비우신 하느님 앞에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분의 사랑 앞에(에페 3,19) 우리는, 우리가 가진 재산이나 권력을 자랑할 것입니까? 우리의 지식, 우리의 문명을 과시할 것입니까? 말구유의 예수님은 우리의 인간됨을 소유에 있지 않고, 존재에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정녕 물욕이든, 권세욕이든 자신도 망치길 나라도 망치는 그 지나친 탐욕으로부터 해방되어, 우리 존재의 근원이신 하느님께로 돌아갈 때, 진실로 인간으로서 해방되고 참된 자유와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사실 권력의 자리를 탐내는 사람은 수없이 많아도, 겨레와 나라를 위해 마음을 비운 사람은 거의 볼 수 없습니다. 이런 이들은 모두 베를레헴으로 가 보아야 합니다. 거기 말구유 위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와 만나야 합니다. 그분은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입니다. 죄와 죽음의 역사를 구원과 생명의 역사로 바꾸려 오신 분이십니다.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돈이나 권력 등 세상에서 힘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무엇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는 가난하고 약한 어린 아기에 불과합니다. 몇 억 또는 몇 십억의 돈을 써서 국회의원이 되고, 자치 단체장이 되고자 하는 이들이나 그보다 더 많은 돈을 써서 대권을 잡으려는 이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고 나는 단지 인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 어떤 이는 말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확신합니다. 우리 사회의 정치 풍토가 참으로 깨끗하여지고 공직 사회가 청렴결백하여진다면, 우리의 고질적 병폐인 불의와 부정, 정치의 타락, 윤리 도덕의 타락 그 밖의 모든 사회적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정치는 신뢰를 얻고 경제는 발전할 것입니다. 나아가 빈부의 격차도 사라지고 지역 감정도 해소될 것입니다. 뿐더러 민족의 화해와 통일의 길도 넘게 열릴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 성탄에 말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로부터 이 청빈, 그 마음의 가난을 뼈 속 깊이 와 닿도록 배워야 합니다. 마음의 가난이 우리 사회가 오늘날 간절히 찾고 있는 구원의 길이요, 희망의 등블임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4. 말구유의 정신으로 누구보다 앞서 돌아가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 믿는 이들이요, 교회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수적으로는 눈부시게 발전하였습니다. 지난 10년 동안의 신자 수에 있어 배가 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참으로 빛과 소금의 구실을 하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신자들 중에 열심한 분이 많고, 희생과 봉사를 아끼지 않는 분들이 분명히 전보다 많은데도 불구하고, 교회로서는 사랑과 청빈의 복음적 가치를 증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분명히 부유해졌고 그만큼 가난한 이들로부터 멀어져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의 삶 속에는 말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런 우리를 보시고,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실지 의문입니다. 예컨대 마태오 복음 25장31-40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의 말씀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과연 저주받을 염소가 아닌 구원받을 양(羊)들로 예수님 오른편에 서게 될지 자신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예수님이 당신과 같다고 하신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사랑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가난한 이의 자리가 없다는 것은, 우리 마음에 예수님의 자리가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는 성장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복음 정신에서 우리가 이토록 멀어져 있다는 것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오늘의 교회인 우리는 말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 앞에서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그분이 왜 하필이면 가난한 자로 태어나셨는지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이 성찰과 묵상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가 쇄신될 때에 우리는 진실히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가득한 교회, 세상 모든 이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힘차게 전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2000년대를 바라보며 절실히 요망되는 우리 자신과 교회의 복음화 과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강생하신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다시금 빕니다.




7.                         성탄 메시지 (1993)


                                                              김수환 추기경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1. 구세주 그리스도의 성탄 대축일을 맞이하여 진심으로 오신 구세주의 은총과 평화가 모든 이에게 가득하기를 팁니다. 가난한 이, 우는 이, 고통 중에 신음하는 이, 외로움 속에 버려진 모든 이에게 오신 주님의 위로가 가득하고, 찢어진 우리 사회와 분단의 상처를 깊이 안고 있는 이 땅 한반도에, 구세주께서 당신 평화를 베풀어주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특히 쌀 개방으로 실의에 젖은 우리 농민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시고, 동시에 북한


핵 문제가 주님의 도우심으로 조속히 해결되도록 빌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 3,16). 예수님 친히 하신 이 말씀은 구세주 탄생의 의미와 동기, 그 이유와 목적을 여실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탄은 하느님이 인류구원을 위해 직접 역사 안에 결정적으로 개입하신 사건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거스려 수없이 맡은 죄를 범하였고, 하느님 아닌 우상과 재물을 더 섬기며, 욕망을 따라 마음대로 살아왔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을 죄악의 바다로 만들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죽음의 늪에 빠졌고, 스스로 인생도 역사도 무의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은, 이런 인간을 지극한 사랑으로 불쌍히 여기십니다. 당신 백성 이스라엘의 선조들에게 하신 그 약속을 잊지 못하시고, 영원히 자비를 베푸십니다(루가 1,55참조). 당신 친히 인간을 구하시러 나섰고, 외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외아들이면 아버지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 보다도 더 소중한 존재입니다.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분부를 받았을 때(창세 22,2), 그는 차라리 자기 자신을 바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목숨 보다 더 소중한 것이 외아들입니다. 그런 아들을 하느님은 이 세상을 위해 내놓으셨습니다. 그것도 당신을 거스려 지은 죄가 충천하리 만큼 많은 그 인간 세상을 구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이 지극한 사랑, 어리석게까지 보이는 이 사랑을 깊이 깨달은 나머지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 없이 내어주신 하느님께서 그 아들과 함에 무엇이든지 다 주시지 않겠습니까?”(로마 8,32)라고 경탄해 마지않습니다.




하느님은 참으로 우리를 위해 당신의 아들뿐 아니라 당신 자신의 모든 것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우리를 구하여 당신의 자녀로 삼아 그리스도와 함께 당신의 모든 것, 당신의 생명과 영광과 행복을 물려받을 상속자로 삼고자 하십니다(로마 8,17). 이것이 영원하시고 진실하신 하느님이 지니신 뜻이요, 구원 계획입니다.




결국 하느님은 우리 인간을 하늘 높이 올리시어 당신과 하나로 결합시키시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여기에 인간 존엄성의 근본적이요 숭고한 이유가 있습니다(사목헌장 19참조).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 성탄에 오신 구세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은 이처럼 높고 깊고 절대적이요 조건이 없습니다.




   2. 이제 그 사랑에서 오신 구세주 그리스도는 본래 “하느님과 본질을 같이 하시는 분이셨지만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필립 2,7). 하느님이시면서 사람이신 그리스도는 당신의 전 생애를 모든 인간을 위해 바치셨습니다.




그분은 당신 스스로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고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르 10,45)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섬긴다는 것은 단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봉사활동이 아닙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실 만큼 당신을 비우시고 낮추시어, 모든 사람의 종이 된다는 뜻입니다. 사실 그분은 머리 둘 곳도 없으실 만큼(루가 9,58) 안일을 구하지 않으시고, 모든 이에게 특히 가장 보잘것없고 버림받은 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분이 가시는 곳 어디든지 수많은 병자들이 에워싸고 그분은 그들 하나하나를 측은히 여기시고, 사랑으로 고쳐주셨습니다(마르 6,56/ 마태14, 36). 소경이 눈을 뜨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는 깨끗하여지고, 귀머거리는 들으며,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하여졌습니다(마태 11,5).




그분은 실로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셨습니다”(이사 53,4/ 마태 8,17). 마침내 구세주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을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속죄의 제물로 십자가에 바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하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이 성탄에 오신 구세주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참으로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내는” (1고린 13,7) 그 사랑 자체이십니다.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이렇듯이 지극할 때, 우리의 죄와 우리의 못남, 우리의 부족까지도 받아주실 만큼 가이없을 때, 인생에 비록 시련이 있고 고통이 크다 하여도, 또 어느 날 우리 육신은 죽을 수밖에 없다 하여도,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로의 말처럼, 시련도 고통도 죽음도 우리를 그분의 사랑에서, 그분을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로마 8,35-39 참조).


이 그리스도가 성탄에, 베들레쳄 한 촌에서 말구유에 한 가난한 어린이로 탄생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아기 앞에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진심으로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겸손되이 경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시에 우리의 교만, 우리의 이기심, 우리의 거짓과 위선 등 모든 추악한 죄를 뉘우치고, 참회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3. 오늘날 우리 시대에 이같은 회개가 정말로 요구됩니다. 아울러 우리는 이 예수님을 본받아 사랑을 살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참 인간으로 다시 나기 위하여, 우리 사회가 지역간, 계층간의 모든 격차와 모든 감정을 넘어 참으로 하나되기 위하여, UR의 거센 파고를 이겨내고, 쌀 개방으로 말미암아 시름에 잠긴 농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기 위하여, 마침내 남북이 분단의 벽을 허물고, 한겨레로써 평화 통일을 이룩하기 위하여, 우리는 모두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어 오시고 죽기까지 하신, 그 예수님을 본받고, 그 사랑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은, 지금 우리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서도 필요불가결의 것입니다. 성탄에 나신 예수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오늘도 간절히 우리에게 호소하십니다(요한 13,34).


     
















8.                     1994년            성탄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구세주께서 오신 성탄을 다시 맞이하였습니다. 진심으로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축복 가득하시기를 빕니다. 주님의 성탄은 그 자체가 참으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둠에 잠긴 세상을 밝히시며, 온 세상을 생명의 빛으로 구하시는 구세주의 탄생에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마태 11,28) 하시며 가난한 이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시고, 온갖 고통에 신음하는 이들의 짐을 덜어주시려 구세주께서 오셨습니다.


 


이사야는 이분에 관하여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억눌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라. 찢긴 마음을 싸매주고 포로들에게 해방을 알려라. 옥에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야훼께서 반겨주실 해, 우리 하느님께서 원수 갚으실 날이 이르렀다고 선포하여라. 슬퍼하는 모든 사람을 위로하여라”(이사 61, 1-3). 이렇게 우리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자유와 해방, 위로를 주실 주님이 오셨습니다. 참으로 크고 놀라운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분은 본래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늘과 같이 높으시고 거룩하신 어른이십니다. 그러신데도 우리를 위하여 하늘의 모든 존귀와 영광, 능력과 거룩함을 비우시고 낮추시어 우리와 같이 비천한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필립 2,7). 세상 재물 아무 것도 지니신 것 없고, 머리 둘 곳도 없는 가난한 자로 나그네로 오셨습니다. 베들레헴 한 촌에서 말구유에 태어나셨습니다. 가난한 우리 모두를 부요하게 만들고(2고린 8, 9b), 우리 모두와 하나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실 그분은 언제 어디서나 모든 이의 벗이 되시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십니다. 그분은 가난할수록 더욱 감싸주시고 죄인일수록 더욱 자비와 사랑을 베푸십니다. 이런 당신의 마음을 확인시켜 주시고자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2,17)라고 하셨습니다. 뿐더러 바리사이파들의 위선을 나무라시면서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늘 나라에 들 것이다”(마태 21,31)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하심으로써 굶주리고 헐벗고 병든 이 등, 가장 고통 중에 버림받은 이들과 당신을 동일화시키셨습니다. 그들 안에 그리스도는 현존하십니다. 그러기에 누구도 이들을 외면하고 그리스도를 볼 수 없습니다. 이들을 사랑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이처럼 모든 인간의 내면 깊이 그들의 고독과 고통 한가운데 그들과 함께 계십니다. 절망에 놓인 인간과 함께 계시고, 그를 절망에서 구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죄 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때가 이르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로마 5,6)라고 바울로 사도는 말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참으로 우리의 구세주시요, 우리의 길, 우리의 진리, 우리의 생명이십니다(요한 14,6).


 


이렇듯이 좋으신 주님-그분은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곧 ‘임마누엘’이시기에(마태 1,23)-우리는 이제 어떤 처지에 놓일지라도 실망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존재와 생명의 원천이신 전능하신 하느님이 우리와 함에 계시면서 우리를 절대적이요 조건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시는데 무엇이 염려되고 무엇이 두렵습니까? 정녕 사도 바울로의 말씀대로 이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어떤 환난도, 역경이나 박해도, 굶주림이나 헐벗음도‥‥ 그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1-39 참조).




이제 이렇게 좋으신 주님의 성탄을 맞으면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루가 3,10)라고 그 옛날 유다인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물었듯이, 우리 역시 진지하게 물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 당시 세례자 요한은 “회개하라”라고 광야에서 외치셨습니다. 요한은 오늘도 우리에게 같은 말을 외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어느 시대나 요청되는 것이지만, 오늘 우리에게, 우리 사회에 가장 절실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한마디로 가치의 전도, 가치의 부재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세금횡령과 성수대교 붕괴, 도시가스 폭발, 각종 비리와 부정, 흉악범죄 등이 우리 사회의 오늘의 이같은 현 주소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즉 그 모든 것은 우리가 얼마나 도덕적 가치관 없이, 텅 빈 인간으로 살고 있는지를 잘 말합니다.


 


그 결과 정치도 부실하고, 나라의 모든 것이 부실할 수밖에 없고, 날림공사와 인재에 의한 대형사고가 연이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참으로 정직하지도 성실하지도 못한 한국인, 교통질서 하나도 지킬 줄 모르는, 우리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깊이 반성해 보아야합니다.




우리에게는 가장 기본적인 무엇이 빠져 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진실입니다. 진정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물질보다는 인간을, 자신보다는 이웃과 나라를 더 생각할 줄 아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의 재난을 다시 태어나고 새로이 출발하는 전화위복의 기회로 잡아야 합니다. 광복 50주년이면서 세계무역기구(WTO)의 출범과 함께 세계화와 국제화의 문이 열리는 1995년은 우리에게 이같은 변화를 절실히 요구합니다.




진실한 인간성과 이타적 정신을 모든 정치인, 경제인이 지니고 있다면, 또한 우리 국민 모두가 이 진실된 인간성을 마음의 근본으로 삼고 있다면, 우리나라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살기 좋은 나라, 세계에서 모든 면에 으뜸가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계화 속에서 어떤 경쟁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남북분단의 벽을 헐고 통일의 길을 여는 가장 확실한 힘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이상입니다. 이상은 언제나 닿기 힘들만큼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상을 향하여, 고난을 무릅쓰고 한 발자국이라도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무엇보다도 우리는 먼저 참 인간이 될 것이고 구원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인류의 번영과 세계의 펑화에도 이바지하는 한국인이 될 수 있습니다.




메시아이신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우리 모두를 이런 인간으로 새롭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즉 죄로 물든 묵은 인간을 벗고, 사랑의 새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분은 이를 위해 당신 자신의 모든 것을-당신의 생명과 존재 자체를 바치셨습니다.


그만큼 전적인 사랑, 조건 없는 사랑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 안에 이 사랑으로 현존하십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이분이 지니셨던 그 마음을, 우리 마음으로 간직


하는 것입니다(필립 2,5). 그럴 때 탄생하신 그리스도는 당신의 축복과 평화로 우리를 가득 채워주시고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마․음이 착한 이에게 평화”라고 하신 천사들의 노래가 우리 가슴과 온 누리에 메아리 칠 것입니다.












9.                     1995년          성탄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성탄 대축일을 맞이하여 오신 구세주의 구원의 은총과 그분의 사랑과 평화가 여러분과 이 땅과 온 누리에 가득하기를 빕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요한 3,16). 이 말들이 성탄의 신비의 그 깊은 의미를 말한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 바로 우리 인간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분을 믿는 모든 이가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인간 세상이란,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의 모습을 봄으로써 알 수 있듯이, 죄 많은 세상입니다. 하느님은 어찌하여 이런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외아들까지 보내시는 것입니까? 외아들이면 아버지에게 있어서 자신보다도 더 소중한 존재입니다. 외아들을 위해서라면 누구든지 자기 목숨까지도 내놓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외아들을, 하느님은 우리를 위하여, 죄 많은 우리를 위하여, 내놓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이 지극한 사랑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습니까? 아무런 자격도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느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이든지 다 주시지 않겠습니까?”(로마 8,32)라고 하신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탄의 신비를 통해 드러나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조건 없고, 참으로 절대적입니다. 이 얼마나 큰 기쁜소식입니까!




이제 그 외아들 그리스도는 역시 우리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하느님과 본질을 같이 하시는 분이신 데 ,당신을 비우시고 낮추시어 당신의 피조물인 우리 인간과 같이 되어, 역사 속에 들어오셨습니다(필립 2.7참조). 그분은 이렇게 “사람이 되어 오심으로 당신을 모든 사람과 일치시키셨습니다. 인간의 손으로 일하시고, 인간의 지력으로 생각하시고, 인간의 의지로 행동하시고, 인간의 마음으로 사랑하시었습니다”(사목 헌장 22 참조).


 


그분은 사랑으로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셨습니다. 주님이 인간으로 오시어 우리 가운데 사실 때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어디서나 하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또한 수많은 병자들과 고통으로 신음하는 이들이, 그분께 하소하며 밀어닥쳤을 때, 언제나 주님은 그 모든 이를 다 고쳐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벙어리는 말을 하고, 곰배팔이는 성해지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걷고, 소경이 눈을 떴습니다”(마태 15, 31),


또한 빵을 많이 먹게 하는 기적으로 굶주리던 수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마태 15,37),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여주고(마르 2,41), 죽은 나자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요한 11).


 


이 모든 기적의 힘이 어디서 오는 것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의 힘이었습니다. 아낌없이 내어주시는 주님은, 당신을 아낌없이 내어주시면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내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마태 11,28)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사실 인생고에 시달리는 모든 사람의 쉼터로 당신 자신을 내놓으셨습니다. 또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요한 7,38)하시며 당신 자신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이심을 밝히셨습니다(요한 4, 13-14).




그분은 사실 모든 이를 살리는 생명 자체이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되신 이 하7님은 집도 없이 여행 중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가난한 자였고, 피난민이었을 뿐 아니라(마태 2, 3) ‘반대의 표적'(루가 2,35)이 되기까지 하셨습니다.




공생활 때에는 머리 둘 곳도 없는(루가 9,58) 행려자였고,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고”(요한 1, 10),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주지 않았습니다”(요한 1,11). 마침내 “우리 죄 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로마 5,6).


 


그분은 모든 인간의 모든 죄와 그 벌을 홀로 당신 한 몸에 대신 지셨습니다. 성탄은 바로 이처럼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주님의 탄생을 기리는 날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성탄에 오시는 주님을 잘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세례자 요한은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다가 왔다”(마태 3,2) 하셨고, 사도 바오로는 “밤이 거의 새어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로마 13, 12)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오늘 우리의 현실에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큰 시련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두 전직 대통령의 구속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는 지난 6월의 많은 인명을 희생시킨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에 이어 참으로 불행한 일이오, 세계 앞에 더 할 수 없이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런 엄청난 사고와 사건의 주인공인 한국인은 누구이며, 한국은 어떤 나라인가? 라고 누구나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불행한 사건들은 동시에 우리 자신의 잘못된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고 빛나는 미래를 향하여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대단히 뜻깊은 기회이기도 합니다.


 


이 때가 오기를 많은 이들이 갈구하며 기다렸습니다. 그 중에서도 5․18의 가장 끈 희생자인 광주 시민들은, 1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온갖 위험과 시련, 실망과 좌절과 싸우면서 이때를 고대하였습니다.


생각해 보면 역사적 의미를 지닌 이 기회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기 보다, 하늘이 주신 기회입니다. 진실이 밝혀지고, 정의가 바로 섬으로써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하늘이 주신 기회입니다.




지금의 문제는 원수를 갚거나, 누구를 벌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좌우(左右)의 문제도 아닙니다. 우리의 미래가 달린 문제입니다. 우리나라는 과연 참으로 인간 존중의 가치관과 함께, 법과 정의 위에 선 민주주의 국가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정부는 이 사건을 일체의 사심을 떠나서  법의 원칙에 따라 공정하게 처리함으로써, 진실은 반드시 밝혀지고 정의는 반드시 이룩된다는 것을 확증해야 합니다.


 


모든 정치인과 정당도 같은 정신으로 임해야 합니다. 현재의 당리당략에 의한 이전투구를 끝내야합니다. 또한 피소된 이들과 관련된 모든 이들도, 이제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진실 규명에 동참할 권리와 의무를 지니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아가 국민 모두는 진실로 겸허한 마음, 각자 스스로도 과거를 뉘우치고 속죄하는 마음, 어떤 미움도 복수심도 없이 오직 정의와 사랑 자체이신 주님의 뜻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마음으로 임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 모두는 성탄에 오신 구세주 예수의 마음, 진리와 정의를 추구하되 겸손과 온유로, 사랑과 용서를 베푸는 마음으로 오늘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정신으로 우리가 뜻을 모으고 힘을 모을 때, 이번 기회는 참으로 잘못된 과거를 바로 잡음과 동시에 우리 사회의 구조악인 부정 부패, 정경 유착, 뇌물 수수, 공직자 비리 등을 척결하고, 우리로 하여금 물신주의와 황금만능주의를 씻고 참된 가치관 확립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은총의 때, 구원의 때가 될 것입니다.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입니다.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 올 것입니다”(이사 9,1). 빛으로 오시는 메시아를 예언한 이사야의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현실로 성취되기를 기원해 마지않습니다.


10.                    1997년        성탄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2000년 대희년을 준비하기 위해 마련된 성령의 해에 구세주 탄생을 기리는 성탄 대축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를 드리며 오신 구세주의 은총과 사랑이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히 부어지기를 빕니다. 동시에 남북으로 갈라진 이 땅, 우리 온 겨레에게, 그 중에서도 가난한 이, 병든 이,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버림받고 소외된 모든 이에게 구세주의 자비와 평화가 충만하기를 빕니다.


 


참으로 어느 때보다도 우리는 구세주의 은총과 사랑, 자비와 평화를 필요로 합니다. 그분의 진리와 사랑의 빛이 우리 마음의 어둠을 밝혀주시기를 빌고 싶습니다. 우리 겨레는 지금 중대한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남쪽은 지금 경제의 주권이 국제통화기금 IMF로 넘어갈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철의 장막 넘어 북쪽에서는 수없이 많은 동포들이 아사지경에 이르러 외부로부터의 구호식량을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많은 병자들, 어린이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도 자주 들립니다. 어쩌다 우리 민족은 이렇게 남북한 모두 -비록 질적 차이는 있다 할지라도- 남에게 돈과 식량을 구걸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는지, 진정 참담한 심경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겨레를 남과 북 합하여 다같이 이 난국에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우리 남쪽도 지금 심각한 경제난으로 말미암아 매일 들려오는 소식은 기업들의 부도, 도산, 감원, 대량 실업의 염려 등의 절박하고 우울한 소식뿐입니다. 이런 처지에서는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자기 살길만을 찾게 되고 남을 생각할 여유가 없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이렇게 이기주의에 빠진다면, 그것은 결코 자기를 살리는 길도 아니요, 나라를 오늘의 궁지에서 구해내는 길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늘 우리 경제의 위기의 원인은 정부가 경제 운영을 잘못한 데 중요한 이유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더 깊은 이유는 우리 자신, 위로는 정치인, 경제인들을 비롯하여 상당수 국민이 근본적으로 정직과 성실을 벗어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가진 자들 중 어떤 이들은 잘살게 되었다고 황금만능주의에 빠져, 나라나 이웃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향락을 추구하고 사치에 흘렀기 때문입니다. 이런 물질주의와 이기주의, 그리고 이것이 낳은 부정부패가 오늘의 경제난국을 초래하였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깊이 반성해보아야 합니다. 먼저, 물론 정부의 경제 실정(失政)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고 법대로 이를 밝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오늘의 경제 위기의 탓과 책임을 정부께만 묻고,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사회 전반에 걸친 이기주의와 물질주의 및 한국적 고질병인 부정부패에 대한 보다 깊은 반성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매우 어둡습니다.


 


현재의 경제적 위기 극복도 이런 반성과 함께 인간존중과 이웃사랑 및 나라와 겨레의 이익을 앞세우는 가치관을 확실히 지닐 때 가능합니다. 이것이 또한 미래의 발전과 번영의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국제통화기금 IMF로부터의 돈만이 아닙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빌려와도, 우리 마음 자세에 나라와 겨레를 위한 사랑과 희생정신이 없고, 정직과 성실, 근검절약 정신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더 큰 부채로, 그리고 더 큰 수치로 남을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의 위기를 반드시 극복해야 합니다. 이 난국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정녕 다시 나야 합니다. 이기주의적인 우리 생각을 바꾸고 삶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국민 모두가 뜻을 같이하고, 힘을 합치면 이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저력이 있습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입니다. 결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동시에 이웃과 나라를 함께 생각할 줄 아는 가치관을 확립해야 합니다. 이리하여 정부를 비롯하여 노사가 진실히 힘을 모으고, 국민 모두가 운명공동체로서 힘을 모아야 합니다. 나라를 위해, 민족을 위해, 통일을 위해 자기 것을 내놓을 만큼 희생정신을 지녀야 합니다




이웃을 위하고 겨레를 구하기 위한 이런 자기 희생정신은 성탄에 오신 구세주의 정신입니다. 그분은 본래 하느님과 본질을 같이하시는 분이신 데,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죄 많은 우리인간을 그 죄와 죽음에서 구하기 위해서 당신을 비우시고 낮추시어,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습니다(필립 2,6-7).


그분은 사실 베들레헴 한촌(寒村)의 집도 아닌 마구간에서, 가난한 이의 아들로, 힘없는 아기로 태어났습니다. 세상을 구하러 오신 분이 이렇게 돈도 권세도, 현세적 힘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이 무력한 자로 오셨습니다


 


우리 모두의 형제, 특히 가난한 자들의 형제요 벗이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우리를 위해 가난한 자 되셨습니다(2고린 8,9참조). 뿐더러 끝내는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분은 실로 이사야의 예언대로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셨습니다”(마태 8,17: 이사 53,4).


 


이 그리스도는 당신 스스로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고, 섬기러 왔다.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참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이처럼 전적으로 남을 위해서 당신을 비우시고, 낮추시고 죽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는 이 성탄에 깊이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이 예수님은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마태 16,25)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오늘 우리 자신에게 그대로 해당됩니다. 우리가 만일 모두 각자 자기만을 위하여, 개인이든 단체나 기업이든 자신만을 살리기에 몰두하여, 이웃과 나라를 생각 않는다면, 결국 자신도 죽고 나라도 망하게 만드는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한다면 각자 자신의 이기심을 죽여야 합니다.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사재기 같은 짓은 참으로 세계 앞에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자기 가진 것, 돈이든 기타 자산이든 남는 것은 숨기지 말고, 나라를 위해 내놓아야 합니다. 나라가 살아야 내가 산다는 사실, 제 목숨을 잃는 사람만이 제 목숨을 참으로 살린다는 이 진리를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타정신(利他精神), 남을 위하는 전적인 사랑에서 우리의 살길을, 오늘의 우리 사회와 나라의 구원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사실 오늘의 인간과 우리 사회, 더 나아가 세상을 구하는 길은, 결코 돈도 권력도 아닙니다. 우리 서로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신을 비우고 사랑할 줄 알 때, 고통을 분담하고 가진 것을 나눌 줄 알 때, 청빈과 겸손의 정신으로 봉사할 줄 알 때에, 거기에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를 구하고, 세계를 구하는 길이 있습니다. 이것이 또한 미래의 발전과 번영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지금 이 나라에는 이전투구의 치열한 공방전이었으나, 비교적 공정한 선거전을 통해서 새 대통령이 선출되었습니다. 저는 새 대통령에게 그리스도를 그대로 닳으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국민을 위하고,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대통령, 국민을 오늘의 실의에서 일으키는 힘찬 대통령, 지역이나 계층으로 갈라지고 흩어진 국민의 마음을, 관용과 화해의 정신으로 하나로 모을 줄 아는 대통령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참으로 나라와 국민을 위해 일체의 사심을 버리고, 자기를 희생하고, 봉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와 함께 새 대통령을 보필하는 모든 이들, 모든 정치인과, 경제인들 역시 같은 정신으로 철두철미 국민을 위해 봉사하고 솔선하여, 검소한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 우리 국민 모두도 정부를 믿고 따르며 마음을 하나로 모을 것입니다.




성령의 해에 성령께서 당신의 은총으로 이렇게 우리 자신과 우리나라를 새롭게 만들어주시기를 빌며, 특히 믿는 이들 모두를 그리스도 안에 새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여주시도록 기도드려야 하겠습니다.


다시금 여러분 모두에게 오신 구세주의 은총과 평화, 사랑이 가득하기를 빕니다.


11.                        1998년         성탄 메시지              


                                                         정진석 대주교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치는 사람들에게 평화”(루가 2,14).


구세주의 성탄을 맞이하여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축복과 평화를 풍성히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주님께서는 어둡고 힘들고 차가운 이 세상에 구원과 평화를 주시려 한 인간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지난 1년 동안 사회불안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끈 시련을 겪어온 우리 모두가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로 위로를 받고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한 인간으로 태어나심에 대해 묵상해봅시다. 그것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주십니까? 그를 하느님 다음가는 자리에 앉히시고,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워주셨습니다”(시편 8,4-5)는 시편의 노래처럼, 인간은 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늘 자신의 잣대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고 행하다보니, 하느님과의 관계가 어긋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다른 인간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하느님께서 관리하라고 맡기신 자연과의 관계마저 어긋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창조된 목적대로 살아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인간은 평등한 존재에서 불평등한 존재가 되고, 심지어 노예로마저 전락하게 되고 스스로 자신이 고귀한 인간임을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절망과 억압, 슬픔과 분노에 가득찬 이들에게 희망과 해방, 기쁨과 평화를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로써 삶의 의미를 잃었던 이들은, 새로이 삶의 의미를 찾게 되며, 인간다움을 잃었던 이들도 자신의 고귀한 인간 존엄성을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인간다운 삶을 살고 있는지 반성해보아야 하겠습니다.


 


베들레헴의 한적한 곳에 천사들의 노래가 들려오고, 갓 태어난 한 아기가 강보에 싸여 누워있는 모습을 상상할 때, 이 세상 누구라도 마음으로부터 평화를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갓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은 보잘것없는 구유에 뉘어졌습니다. 인류의 구세주께서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계셨던 것은, 아무도 그분을 알아 뵙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마태 8,20) 하신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 뵙고 있는지, 그분이 머무실 자리를 마련해드리고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그 무엇이 갓 태어난 아기보다 더 연약하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누가 구유에 누워있는 것보다 더 비참하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이 길을 택하셨습니다. 이로써 우리 인간의 논리를 역전시키기 위한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부귀와 명예, 권력을 최고의 가치로만 생각하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갓난아기로 태어나 구유에 뉘어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해마다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시 오십니다. 주님께서는 매년 우리에게 희망과 평화를 주시지만, 우리가 이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어쩌면 받으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에, 매번 가장 겸손하신 모습으로 먼저 손을 내미십니다. 우리 각자에게 희망과 평화의 메시지를 주시며 참된 회개를 촉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어두움 속에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한편으로는 빛과 평화를 추구하면서도, 다른 편으로는 절망과 어두움에 빠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와 희망의 메시지를 읽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어느 사이엔 가, 서로 마음을 닫고 지내고 있습니다. 핏줄로 이어진 가정에서조차 가족들간에 대화가 단절되어 가고, 직장에서도 서로가 퇴출당하지 않으려 두려워하는 까닭에 동료애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사회 전체의 측면에서도 우리의 전통과 가치관이 없어지고, 이를 대신할 새롭고 참된 가치관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이들이, 모든 분야에서 혼란에 빠져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특히 최근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하여 국민 대다수가 사회현상에 대한 불안,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심각한 좌절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번 겨울은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의 몸과 마음이 추우리라고 예상됩니다. 물질적 부족 때문만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의 가족 사랑, 인류 공동체의 형제적 사랑이 무너져가고 있기에, 더욱 심각한 것입니다. 이처럼 경제적 위기보다 더 근본적인 정신적 붕괴의 위기가, 우리가 최우선적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입니다. 이러한 인식을 가지고 이를 각성하지 않는 한, 우리는 진정 위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아기 예수님을 낳아주신 성모 마리아의 자세를 본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모님은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아기 예수를 낳으리라는 소식에 그저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되는 것이 없다'(루가 1,37)는 이 한마디에, 자신의 미래가 어찌될 것인지도 모르고, 처녀의 신분으로 아기를 낳으면 어떤 수모를 당할지도 뻔히 알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르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겸손과 순종의 자세가 오늘 구세주를 이 땅에 태어나시게 한 힘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철저히 신뢰하는, 이런 마리아의 자세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제시해줍니다.


 


아기 예수님은 마리아, 요셉의 한 가정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왜 한 가정을 택하여 그 안에 오셨습니까? 가정에서부터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요즈음처럼 점점 더 개인주의화, 비인간화 되어가는 사회에서는 가정의 중요성이 더욱 절실해지기만 합니다.


가정은 인간성숙과 인격성립의 기초가 되며, 인간관계의 살아있는 실천의 장입니다. 우리가 어떤 어려움에 직면하더라도, 가정이 건전하게 지켜진다면, 사회의 위기는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극복이 될 한시적인 현상입니다. 이제 우리는 가정의 일원으로서 가족 간의 대화를 통해서 서로에게 더욱 충실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신뢰하면 인간을 신뢰하게 됩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의 어두운 현실을 헤쳐나갈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신뢰하고 인간을 신뢰하는 것이, 마음을 바로잡는 회개이고, 회개가 곧 화해의 첫걸음입니다. 하느님과 화해하고 이웃과 화해할 때만이, 우리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질서를 회복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대희년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늘 탄생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서로가 마음의 담을 쌓고 사는 우리를 하나되게 해주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시고, 그들을 하나로 만드셨습니다”(에페 2,14). 우리는 주님의 성탄을 맞으면서 지난날에 본의 아니게 외면하고 소홀히 대했던 이들을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방황과 좌절과 체념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들을 외면한 데 대해, 그들에게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게 생각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직장을 잃은 실직자들과 그 가족들, 집을 나와야 했던 노숙자들, 그리고 북한 동포, 중국의 조선족 및 해외 동포, 외국인 노동자들, 이 모든 분들께 우리는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야 하겠습니다.




2000년 대희년이 이제 꼭 1년 남았습니다. 내년 성탄절부터 시작되는 대희년을 맞을 준비를 철저히 합시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벅찬 희망을 가지고 대희년을 맞아, 그 동안의 어둠에서 벗어나 평화와 기쁨을 맘껏 누릴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오늘 탄생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친애하는 우리 국민 모두에게 가득히 내리시기를 다시 한번 기원합니다.






                                    










12.              성탄 메시지   1999년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분


                                                정진석 대주교






           1. 영원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2000년 대희년을 맞이하여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풍성히 내리기를 빕니다. 특별히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사회에서 고통받고 소외된 사람에게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아울러 한 민족이면서도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국으로 남아 고통받는 우리 민족의 통일을 위하여 하느님께 자비를 청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인류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인간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 의지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입니다. 이 천년 전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에페 2,14).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평화와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필립 2,7).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셨고,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습니다”(요한 3,16). “그분은 부유하셨지만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고, 그분이 가난해짐으로써 우리는 오히려 부유하게 되었습니다”(2고린 8,9). 그러므로 우리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예수님”(히브 13,8)의 탄생을 기뻐하며 경축하는 것입니다.




            2. 은총과 평화의 2000년 대희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오늘 성탄 대축일부터 2001년 1월 7일 주님 공현 대축일까지를 은총과 평화의 대희년 기간으로 선포하셨습니다. “그리스도 탄생 후 2000년은 그리스도인뿐 아니라 온 인류에게도 특별한 대희년입니다”(「제삼천년기」15항). 교황께서는 대희년 교서 를 통해 “이번 성탄시기는 새로운 복음화를 위한 성령의 풍성한 선물을 교회의 삶에 불어넣 는 생동하는 심장과도 같으며, 모든 이에게 빛으로 충만한 축제”(「강생의신비」 6항 )가 되 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희년의 정신인 자유와 해방을 구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 4,18-19).


오늘 교회가 대희년을 선포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시작된 은총의 해를 지금 여기에 구현하여 생명의 빛을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 보편 교회는 구세주 강생 2000년을 맞아 하느님 나라 선포의 새 지평을 열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도 대희년을 합당하게 맞이하기 위해서 ‘새날 새삶 운동’을 통하여 모든 사람이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운동을 펼쳐 왔고 우리 교구에서도 다양한 교육과 함께 기도를 바쳐 왔습니다.




              3. 우리의 현실과 그 안에 있는 사람들




그러나 성탄과 2000년 대희년을 맞이하는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이 말씀을 통해서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아직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요한 1,10).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질만능주의에 사로잡혀 정신적 가치의 소중함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는 생명 경시와 환경 파괴, 물질만능주의와 이기주의, 부정과 부패, 불의와 거짓, 허영과 사치 등이 만연해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은 자주 침해당하고, 우리 삶의 보금자리인 가정 공동체마저 급속히 와해되면서 사회의 안정 기반을 흔들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끊임없이 발생되는 비인간적인 사건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신앙인은 물론 정치인, 공직자, 기업인, 교육자, 언론인 등 그 누구도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발생되고 있는 부정적인 사건의 모든 책임을 지도자들에게만 돌릴 수는 없지만 그 들은 공인으로서 누구보다도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여 더욱 올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4.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인 사랑




정부에서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긴 터널을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직장을 잃어버린 채 거리를 헤매는 실업자들과 그 가족들, 병고와 장애에 시달리는 사람들, 하루의 끼니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절대 빈곤층에 속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즐기며 사는 데에는 큰 관심을 갖고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과 가진 것을 나누며 사는 데에는 관심이 부족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더욱 깊어져 가는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 간의 격차를 좁히며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해서, 새로운 연대성의 용기를 갖고 사고방식과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여”(「아시아 교회」32항) 진정한 인간발전을 이룩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나약한 인간으로 태어나셨음을 기억하며 가정과 사회 안에서 소외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끌어안아야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우선적인 사랑은 교회에 맡겨진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지상의 교회는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성을 통하여”(「아시아 교회」34항) 고통받고 상처 입은 사람들의 공동체가 되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이 시대에 소외된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가난한 인간으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을 외면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마태 25,41-46 참조). 




              5.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용서를 믿고




먼저 우리는 구세주의 성탄과 2000년 대희년을 큰 기쁨의 해로 맞이하기 위해서 교회의 여러 성사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용서를 믿고 개인 차원의 회개와 함께 공동체 차원의 회개를 통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남에게 탓을 돌리기 전에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이 지난날 올바로 살지 못한 점에 대하여 하느님 앞에서 겸손되이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했다면 세상의 모습은 지금보다 훨씬 더 구원된 모습으로 변화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옷만 찢지 말고 심장을 찢고”(요엘 2,13), “옛 생활을 청산하여 낡은 인간을 벗어버리고, 새 인간으로 갈아입는”(골로 3,9-10)다면 우리에게 희망의 빛이 비칠 것입니다. 밤에도 깨어 양들을 지키다 아기 예수님을 만난 평범한 목동들처럼 정직하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구세주의 기쁜 탄생을 알리는 또 다른 증인들입니다. 새 천년의 우리 교회는 이 땅에서 순교한 수많은 신앙 선조들의 모범을 따라 이 시대에 온 몸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들의 공동체’(「아시아 교회」17항)로 새롭게 태어나야 할 것입니다. 




             6. 대희년의 기쁨이 북한의 형제 자매에게도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성탄과 2000년 대희년의 기쁨이 북한의 모든 형제 자매에게도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서울대교구장이면서 평양교구장 서리이기도 한 저는 북한 교회와 그곳의 형제 자매를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 드립니다. 특별히 침묵의 교회에서 목자 없이 내적으로만 하느님을 믿으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교우 여러분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 동안 우리 교구에서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지속적인 기도와 함께 ‘민족화해위원회’ 등을 통하여 고통받는 북한의 동포에게 긴급한 구호활동을 펼쳐왔습니다.




“보편 교회도 한국 교회의 북한 동포 돕기와 민족화해를 위한 노력에 연대감”(「아시아 교회」28항)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정부 차원의 대북 햇볕 정책 못지않게 종교인 및 민간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활발한 교류와 나눔은 우리 민족의 통일을 앞당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민족의 최대 과제인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하고 사랑을 나누는데 더욱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남북으로 분단된 우리 나라가 하느님의 은총과 구세주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의 전구로 하루 빨리 하나될 수 있기를 청하며 간절히 기도합시다. 다시 한번 아기 예수님의 성탄과 대희년을 맞이하여 하느님의 축복이 우리 민족과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13.         성탄 메시지        2000년 12월 25일     


                                                    교구장    정 진 석 대주교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 3,16)



        1. 대희년에 맞이한 주님의 성탄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탄생하셨습니다.


2000년 대희년의 뜻깊은 해에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 한마음으로 기뻐하며 이사야 예언자가 불렀던 기쁨의 노래를 함께 부르고 싶습니다.


“반가워라, 기쁜 소식을 안고 산등성이를 달려오는 저 발길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희소식을 전하는구나”(이사 52,7).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축복이 여러분과 우리 민족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특히 가정과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고통 당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자비가 함께 하시기를 청합니다. 아울러 남북으로 갈라진 우리 민족이 주님의 은총으로 불신과 대립에서 벗어나 화해와 협력을 통해 새롭게 민족의 앞날을 열어 갈 수 있기를 간청합니다.



        2. 사랑 때문에 사람이 되신 하느님




   성탄은 천주 성자 예수께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태어나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가장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서 비천한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가 있는 동안 마리아는 달이 차서 드디어 첫아들을 낳았다. 여관에는 그들이 머무를 방이 없었기 때문에 아기는 포대에 싸서 말구유에 눕혔다”(루가 2,6-7).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어 오신 모습은 마땅히 머물 곳조차 없을 정도로 초라하고 비참했습니다.


  예수께서 이처럼 초라한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나신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크신 사랑 때문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시기 위하여 가장 소외된 장소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골고타에서 죽기까지 하느님 사랑과 인간 사랑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몸과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아끼면 유한한 삶을 뛰어 넘어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수 있다는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까지 모든 사람들을 한결같이 사랑하셨지만 그 가운데서도 병들고 고통 당하는 사람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3. 어려움 속에서의 불안한 삶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지금 우리는 새로운 천년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지난 세기에 인류는 과학과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큰 진보를 이룩하였으며 그로 인해 우리의 전반적인 삶은 풍요로워졌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물질을 우상처럼 숭배하며 극심한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도덕적 가치와 정신적 가치의 소중함을 점점 잃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는 생명경시 풍조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의 존엄성을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고 있습니다. 또 오늘날 지구촌은 신자유주의 물결에 휩쓸리면서 무한 경쟁을 일삼아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간의 격차가 더욱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2000년 대희년에 하느님의 은총으로 분단 이후 최초로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열렸습니다. 그 결과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한 긴장완화 정책과 이산 가족들의 감동적인 만남 등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북관계의 큰 진전에도 불구하고 국내적으로는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많은 국민이 불안해하고 있으며 노동자들과 서민들이 맞이하는 이 겨울은 춥기만 합니다.


구조조정으로 말미암아 거리를 배회하는 실업자의 수가 나날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도 갈곳 없는 많은 노숙자들은 낮이면 공원의 벤치에서 시름을 달래고 밤이면 보호시설이나 지하도에서 차가운 겨울밤을 보내고 있습니다.




        4.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삶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이처럼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사회에서 큰 책임을 맡고 있는 정치인이나 지도층 인사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은 민생문제보다는 당리당략에 사로잡혀 국민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지 못하고 실망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연이어 발생하고 있는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각종 부정과 부패 사건들은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고 있는 대다수의 국민에게 불신을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총체적인 위기 속에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을 듣고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군중은 요한에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하고 물었다. 요한은 ‘속옷 두 벌을 가진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사람에게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도 이와 같이 남과 나누어 먹어야 한다’하고 대답하였다. 세리들도 와서 세례를 받고 ‘선생님, 우리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하고 물었다. 요한은 ‘정한대로만 받고 그 이상은 받아내지 말라’하였다. 군인들도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물었다. 요한은 ‘협박하거나 속임수를 써서 남의 물건을 착취하지 말고 자기가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여라’하고 일러 주었다”(루가 3,10-14).  


이제 우리들 앞에 놓여 있는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 사이에서 우리가 살길은 야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그 분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신명 30,20 참조).




무엇보다도 정부는 출범 초기에 간직했던 정신을 되찾아 실천함으로써 국민으로부터 실추된 신뢰를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정치인들은 사리사욕이나 당리당략에서 벗어나 민심에 귀를 기울이고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큰 정치를 펼쳐 보여야 할 것입니다. 사회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 역시 윤리적․도덕적으로 모범을 보여야만 국민으로부터 존경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국민들도 오늘의 모든 문제를 남의 탓으로만 돌리지 말고 잘못된 삶을 회개하여 새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무심히 저지르는 부정과 부패, 사치와 과소비, 투기와 향락 같은 죄악과 죽음의 문화를 지양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가진 것을 나누고 고통을 나눔으로써 함께 사는 사랑과 생명의 문화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훼손하는 구조적인 악과 제도에 대해서도 선의의 사람들과 연대하여 개선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모든 종교인이 본연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라 살고 있는지 회개하면서 나눔과 섬김을 통해서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마태 5,13-16 참조).




        5.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




   오늘 우리가 기리는 성탄은 예수님의 탄생을 경축하는 축일일 뿐 아니라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주님을 깊이 느끼고 그분을 더욱 닮고자 노력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본당차원에서 교우들은 지역의 결손가정 아이들, 독거 노인들, 병든 이들과 노숙자들을 돌보면서 성탄을 뜻깊게 보내기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이런 삶을 살지 못한다면 2000년 전 아기 예수님께 머무를 방조차 내어주지 않은 사람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일찍이 예수께서 수행하셨던 인류 구원 사업을 우리 자신이 실천하여 이 사회를 더욱 완성된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야말로 우리들이 성탄을 뜻깊게 보내는 길이 될 것입니다.




   다시 한번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탄생하신 예수님의 은총과 축복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우리 민족과 한반도에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특히 같은 민족이면서도 반세기 동안 분단된 채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이 오늘 태어나신 예수님의 축복과 구세주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의 전구로 하나될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도래하기를 간구합니다.


14.             성탄 메시지 (부산 교구장)         2000년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밤에 탄생하시는 구세주 예수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가정, 그리고 온 누리에 가득하시기를 빌며 성탄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 밤 구세주 탄생의 소식을 천사는 이렇게 전합니다. ꡒ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너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왔다. 모든 백성들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이다. 오늘 밤 너희의 구세주께서 다윗의 고을에 나셨다. 그분은 바로 주님이신 그리스도이시다ꡓ(루가 2,10-11). 이 기쁜 소식은 2000년 전 베들레헴에 있었던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전해지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구세주께서 오신다는 복음을 충만한 기쁨으로 느끼지 못합니까? 사실 우리는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시기에 살고 있으며, 안타깝게도 사회 구석구석에서 반목과 불신의 골이 더욱 깊어져 감을 느낍니다. 이미 전 세계의 통계상 우리나라가 낙태천국이라고 불리운 지가 근간이 아니고(매년 백오십 만 명에 이르는 생명이 어머니 태내에서 죽어 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30%가 넘는 이혼율로 가정이 파괴되고 있으며, 정쟁만 일삼는 집단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로 인해 대화가 단절된 정치 현실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2001년에는 경제 성장과 소득이 위축되고, 물가는 오르면서 국제수지는 크게 악화되는 삼중고에 직면할지 모른다고 합니다. 매일 보도되는 또 다른 구조조정, 기업 퇴출, 금융기관의 부실․도산, 대형기업들의 파산과 연쇄부도, 실직자가 자칫 백만 명에 이를 것이라는 소식을 접하면서 이른바 IMF가 또 다시 시작되는 것은 아닌가 하여 더욱 불안합니다. 또한 나라의 미래를 좌우할 청소년 교육도 지나친 입시위주로 대다수의 국민들이 우려하는 수준에 도달했음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소위 인구에 회자하듯 우리는 총체적인 위기를 맞아 우리 앞에는 절망만 있는 듯 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하느님 안에 희망과 구원이 있음을 믿는 우리조차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움 속에서 절망하고 있어야 합니까? 바로 이러한 어두운 현실에 처한 우리에게 오늘 밤 구세주의 탄생은 큰 희망을 가져다 줍니다.




  보십시오, 탄생하신 구세주 예수님을! 그분은 당신이 탄생하신 말구유 곁으로 오늘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 말구유에서 구세주를 만나 뵈올 수 있습니다. ꡒ너희는 한 갓난아이가 포대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것을 볼 터인데 그것이 바로 그분을 알아보는 표이다ꡓ(루가 2,12). 마굿간이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탄생하신 요람입니다.




  또 사도 바오로는 구세주 탄생을 이렇게 말합니다. ꡒ하느님께서는 자신을 비우시고 종의 신분을 취하시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다ꡓ(필립 2,7)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유에 누워 계신 분을 구세주로 알아 뵈올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철저하게 당신을 비우시고 낮추신 그분의 강생의 신비를 깨달아 그 신비로 우리의 삶을 옮길 때 구세주를 알아 뵈올 수 있는 눈을 뜨게 될 것이며, 구세주 탄생은 우리에게 기쁨이 되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의 모든 이웃에게 큰 희망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신을 낮추고 비우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권력, 명예, 물질에 대한 욕심과 이기주의, 개인주의, 자기 중심주의 등의 집착에서 벗어날 때 가능합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우리가 조금만 더 욕심을 버리고 우리 자신을 비워 구세주 예수님의 마음으로 채운다면 오늘 우리 사회의 문제에 대한 해법을 아주 가까이, 바로 우리 곁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며 바로 그 때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비출 것입니다. ꡒ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입니다.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 올 것입니다ꡓ(이사 9,1). 이렇게 예언자의 말씀은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우리에게 큰 희망과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구유에 탄생하신 그분이 바로 구세주이심을 믿는 우리들은 대단히 큰 축복을 받은 동시에 큰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세속을 거슬러 청빈해지고 작아지며 낮아집시다. 이 강생의 신비를 시대적 징표로 삼아 구유를 바라봅시다. 그리하여 이 구유의 영성으로 새롭게 태어나서 구세주를 알아보는 눈을 뜨고 우리에게 비추는 그 빛을 봅시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 빛을 통해서 기쁨의 삶, 복음적 삶을 살아 이 기쁘고 복된 소식을 이웃에게 전합시다.




        오늘 다시 우리 모두에게 오시는 구세주 예수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2000년 성탄절       천주교 부산교구교구장   주교  정명조







15.            예수 성탄 대축일 (가해)    세상에 오신 하느님      


                                                       강길웅 신부






“오늘 밤 너희의 구세주께서 다윗의 고을에 나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수백 년 동안 기다렸던 메시아가 드디어 다윗의 고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다윗의 고을은 베들레헴으로서, 베들레헴은 다윗의 출생지이며 고향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임금이었습니다. 유다는 본래 약소국의 미미한 존재였지만 다윗에 의해서 주위의 여러 나라를 제압하여 통일 국가를 이룩하였고 그래서 만방에 그 위세를 떨쳤던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또 신앙심도 깊었던 왕이었으며 진정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알았던 겸손한 왕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런 의미에서 뛰어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후대 임금들은 하나같이 무능하거나 부패한 왕이었습니다. 그 유명한 솔로몬도 타락된 삶 때문에 자식의 대에 이르러서는 나라가 두 동강이 나 버렸고 그리고 차례로 멸망하게 됩니다. 백성들은 그래서 못난 왕들 때문에 실망하고 또 실망했으며 망조가 든 나라 꼴을 보면서 백성들은 다윗과 같은 새 왕을 기다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메시아 신앙의 시초가 됩니다.




그 후 여러 예언자가 등장하여 메시아 시대를 예고하였습니다. 그는 베들레헴에서 처녀의 몸을 빌어 오신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수백 년 동안 기다려도 다윗처럼 강력하고 힘있는 왕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오셨습니다. 아 무도 예기치 못했을 때 그분은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으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메시아를 알아본 자들이 없었습니다.




오늘 천사가 목동들에게 그랬습니다. “오늘 밤 너희의 구세주께 서 다윗의 고을에 나셨다.”




아, 얼마나 듣고 싶었던 목소리였습니까. 드디어 구세주께서 오셨고, 드디어 메시아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위대한 왕이 마구간으로 오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사실 때문에 속았으며 그러기 때문에 아직도 자신들 안에 그리스도를 영접치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아이러니였습니다. 하느님을 믿으면 서도 하느님을 배척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현세적인 의미에서의 왕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강력한 힘을 가진 자로만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전히 눈이 닫힌 채 엉뚱한 메시아를 지금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로 오셨지만 안 믿습니다. 오히려 무시하고 깔봤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우리 마음을 다윗의 고을로 만들고, 또한 베들레헴의 마구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탄생하시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작고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수백번 오신다 해도 그 인생 안에 탄생하시지 않습니다. 성탄이 와도 성탄인 줄을 모르고 새 날이 와도 새 날인 줄을 모릅니다.




어떤 노름꾼이 노름에서 해방되어 완전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가 지난날의 잘못된 삶을 고백하면서 웃다가 울다가 하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순수하고 아름다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마지막에 한 말은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구해 주셨습니다.” 그는 정말 다시 태어났으며 예수님이 그 사람 안에서 탄생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탄생하시지 않고 그래서 우리가 변화되지 않는다면 신앙은 무슨 의미가 있으며 또 성탄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 걸 보면 우리가 얼마나 많이 기도를 하고 또 얼마나 많이 봉사를 했느냐 하는 것은 이차적인 문제입니다. 보다 일차적인 문제는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할 수 있는 겸손과 그리고 회개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겸손과 회개가 있다면 어떤 살인 강도도 구원받습니다. 십자가 옆의 강도처럼 그야말로 논스톱으로 천당에 갑니다. 그러나 아무리 공로가 많고 또 열심히 살았다 해도 주님을 모실 수 있는 그 겸손과 회개가 없다면 주님이 들어오라고 해도 안 들어갑니다. 막말로 아니꼬워서 안 들어갑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셨듯이 우리도 그처럼 내려가야 합니다.




오늘 주님은, 자신을 겸손하게 낮춰서 회개하는 자 안에서 특별 한 의미로 태어나십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세상을 구하러 오셨다 해 도 그가 진정 작은 마구간이 되지 못한다면 주님은 올해도 그 안에 탄생하시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는 불행합니다. 믿음의 기쁨과 수고가 물거품이 됩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 작은 자(베들레헴)가 되고, 또 우리 모 두 낮은 자(마구간)가 되도록 합시다. 그때 우리는 아기 예수님으로 오시는 하느님을 참되게 영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복된 새해를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16.              예수 성탄 대축일 <요한 1,1-18> (나) 빈 구유로 살게 하소서 


                                                                김영진 신부






교우들과 함께 성당 마당 가운데 예수님이 태어나실 외양간을 만들었다, 외양간에는 해마다 새끼를 밴 커다란 암소를 3일 동안 매어 놓았는데, 요즘엔 이 시골에도 소를 끌어다 며칠씩 매어 놓는 것이 쉽지 않아, 지난해부터는 그 큰 외양간에 까만 염소를 갖다 놓았다.




옛날 시골 농가에서 소의 밥그릇으로 사용하던 크고 긴 구유를 갖다놓으니, 보는 교우들마다 좋아한다. 외양간 짚더미 속에서 첫 울음을 터뜨리신 예수님, 한움큼의 바람이라도 막아볼까 하여 요셉은 예수님을 덜렁 들어 소의 밥그릇인 저 구유 속에 넣었을 테고, 피와 땀을 쏟으며 아기 예수를 낳으신 성모님은 아프고 지치고 피골이 상접하신 모습으로, 막 태어나신 아들 예수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이해하기 힘든 하느님의 계획, 즉 구원의 신비를 생각했으리라, “세상을 구원하실 구세주를 외양간에서 낳게 하시다니”하면서 말이다.


 


사실 솔직히 고백하건대 신부인 나 자신도, 성탄이면 판공, 방문, 피정에다 영세준비로 바쁘게 지내기 일수였을 뿐, 그리고 성탄이 끝나기 무섭게 휴가를 떠나는 계획을 가졌을 뿐, 나 자신을 저 구유에 눕혀보려 하지 않았다. 옛말에 무감어수(無鑑於水), 즉 물에다 자신을 비추어 보지말고 감어인(鑑於人), 즉 사람에다 자신을 비추어 보라 하였거늘, 나는 오늘 물도 사람도 아닌 예수님이 누우셨던 저 구유에다 나를 비추어 보고 싶다.



차디찬 외양간에서 태어나, 구유 속에 눕혀져 지푸라기들을 이불로 삼으셨을 예수님에 비하여 따뜻한 안방 아랫목에서 태어나 포근한 이불로 감싸였던 나, 머리 둘 곳조차 없이 적빈으로 사셨던 예수님에 비하여, 자동차도 있고, 사제관도 있으며, 밥해주는 아주머니에다 일을 도와주는 사무장도 있는 나, 두벌 옷도 없이 사셨던 예수님에 비하여, 옷장에는 옷이 가득, 이불장에는 이불이 가득한 나, 낮은 곳으로 낮은 사람들을 찾아,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셨던 예수님에 비하여, 높은 자리로 높은 사람을 좋아하며 더 높게 더 크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나, 생각이 깊어질수록 부끄럽고 죄스러운 마음뿐이다.




그냥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주는 선물 받고, 판공성사와 영세식, 성탄 미사 잘 드리고 카드 몇 장 사다가 대충 적어서 여기저기 인사하면 될 일인데, 올 해 따라 왜 다 썩어빠진 구유를 들여다보며 침울한 표정으로 청승을 떨고 있는가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비어있는 구유가 내 마음을 쉽게 놓아주지를 않는 듯, 나는 그냥 구유 앞에 서 있다.




나는 무엇을 담고있는 구유인가




나라고 하는 구유는 어떤 구유인가! 자존심과 교만이 가득 차 있는 구유요, 죄악과 욕망이 가득 차 있는 구유이며, 재물욕과 명예욕으로 가득 차 있는 구유는 아닌가! 빈 구유 속에 예수님이 임하셨듯, 빈 마음에라야 예수님이 임하시는 것이거늘, 나는 어쩌다 아기 예수님 울음소리 한가닥 담을 수조차 없는 교만과 욕망으로 가득 찬 병든 구유가 되었는가,


 


옛날 어느 수도원에 한 방문객이 찾아와서 자신의 고민과 미래에 대한 상담을 하고 있었다, 상담을 들어주던 수사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방문객의 찻잔에 차만 계속 따르고 있었다. 차는 찻잔을 넘쳐흘러 방바닥까지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스스로의 이야기에 도취되어 떠들어대던 방문객은 방바닥이 젖어가도록 찻잔에 차를 계속 따르고 있는 수사님의 손을 덥석 잡으며, “잔이 넘쳐흐르는데 왜 계속하여 따르십니까?”라고 말했다.




그러자 수사님은 “이 찻잔과 마찬가지로 당신의 마음은 너무 많은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마음의 잔을 비우지 않으면, 나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가르쳐 드릴 수가 없습니다”고 말했다.  사실인즉 자기라는 구유 속에 돈이 가득하여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많고, 지식이 가득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못 듣는 이가 많으며, 명예가 가득하여 겸손되이 봉사하기 힘들어하는 이들이 많다.


 


성탄은, 자신의 마음에 빈 구유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공과 인기를 위하여 수십년간  오르막 길로 추구하던 발길을 돌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어 남을 섬기며, 사랑하고 봉사하는 내리막 길로 향할 때, 빈 구유는 가능하다.


위대하신 하느님이 초라한 인간의 모습으로 자신을 낮추어 내려오시는 모습, 그것이 바로 빈 구유의 신비인 성탄이다. 초라한 인간의 모습으로 빈 구유 안에 오신 하느님은, 인간이란 초라하면서도 동시에 하느님의 품위를 지닌 존재임을 빈 구유 안에서 가르쳐주셨다.




이번 성탄에는 하느님을 담을 수 있는 빈 구유를 만들어보자. 나라고하는 구유 안에 재물욕과 명예욕으로 가득 찬 오물을 쏟아버리고, 하느님을 담을 수 있는 사랑과 용서와 겸손과 봉사의 구유, 은총과 진리를 담을 수 있는 구유를 만들어 보자.




메리 크리스마스 외칠 자격 있나




성탄이 되었다고 아무나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칠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성당에 나오는 유치부 어린 아이 하나가 “신부님, 예수님은 왜 1년마다 한번씩 계속 태어나세요?”하고 묻길래, “야고보야, 예수님은 사랑하고 용서할 때마다 우리마음 속에 태어나시는 거야, 크리스마스가 되어도 사랑하고 용서하는 마음이 없으면 예수님은 안 태어나시는 거야”라고 말해 주었더니, “신부님, 그러면 날마다 아침에도 저년에도 태어나실 수 있겠네요. 나는 어제 아침에 내 동생이 까분 것을 용서해주고 사랑해주었으니까요.”



그렇다, 성탄이라고, 아무나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칠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과 용서, 희망과 겸손을 가진 자만이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칠 자격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미움과 증오를 털어버린 빈 구유엔, 절망과 좌절을 털어버린 빈 구유에, 교만과 위선을 털어버린 빈 구유에, 예수님은 태어나실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을 담고 있는 구유인가! 세상의 온갖 오물을 가득 담고 있는 구유인가, 아니면 사랑이요 용서이며 희망이요 겸손이신 예수님을 담고 있는 구유인가! 예수님, 당신을 담을 수 있는 빈 구유로 살게 하소서.














17.            예수성탄 대축일 (나해)    빛으로 오신 예수님          


                                                     강길웅 신부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이 여러분 모두에게 빛과 희망과 구원이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특히 어렵고 힘들었던 분들, 슬픔과 걱정에 짓눌리셨던 분들에게 참 기쁨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1독서에서 이사야는 외칩니다.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은 어둠 속을 고통스럽게 걸었던 분들에게 참 빛으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가난으로 고생하셨던 분들, 온갖 질병으로 신음하셨던 분들, 또한 온갖 죄의 불행 속에서 몸부림쳤던 분들에게 예수님은 빛으로서 찾아 오셨습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제가 청소년 시절에 가출했을 때의 일입니다. 철없는 마음으로 불쑥 집을 나서기는 했지만 막상 갈 곳이 없었습니다. 친구들을 생각해 봤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 내 마음을 이해해 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고 또 아무나 붙들고 속없는 불만을 털어놓을 수도 없었습니다. 세상이 넓어도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갈 곳이 있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성당으로 갔을 때 거기서 나를 받아 주신 그때의 예수님을 저는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동행’이라는 대중가요가 있습니다. 그 가사 중에는 ‘누가 나와 같이 함께 울어 줄 사람 있나요.’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저는 그 노래를 부를 때마다 예수님을 생각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릴 때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천지가 아무리 넓어도 우리가 어려울 때 찾을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답답하며 고생스럽다 해도 예수님을 붙잡고 매달리면 거기에 바로 희망이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인생의 진정한 빛의 인도자요 동행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천사가 외쳤습니다. “오늘 밤 너희 구세주께서 다윗의 고을에 나셨다. 그분은 바로 주님이신 그리스도이시다.” 이 말은 또 이렇게 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 밤 너희 인생 안에 예수님이 나셨다. 그분은 바로 주님이신 그리스도이시다.” 맞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꼭 탄생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성탄의 의미가 우리 인 생을 환하게 밝혀 줍니다.




우리는 지금 아기 예수님으로 오시는 주님을 가슴 뜨겁게 영접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요, 그분이 구세주요, 그분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서 인류를 찾아오셨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의 상당수도 참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는 모순이 생기게 됩니다. 열심히 기다렸는데 만나지 못합니다. 메시아를 수백 년 동안 학수고대했으면서도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분을 만나 지 못했던 유대인들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주님의 성탄을 기뻐하면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다시 태어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수백 번 탄생하신다 해도 바로 내 안에 탄생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는 것이며 예수님이 수천 번 오신다 해도 내가 그분 때문에 변화되지 않는다면 주님 강생의 의미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탄생을 마음으로부터 기뻐하고 축하하면서 내 자신의 새로운 변화를 꾀해야 합니다.




어떤 형제가 수십 년 동안 화투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렇게 안하려 해도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면 노름을 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가정 에 많은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 마누라 반지까지도 몰래 팔아먹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도박도 병이라는 사실을 알고나서는 화투에서 손을 완전히 끊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정말 노름에서 해방되었으며 가정에 진정한 평화와 기쁨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가 성탄 때 그랬습니다. “저도 예수님과 함께 다시 태어났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다시 말해 우리 자신의 새로운 변화를 말합니다. 아기 예수님을 우리 안에 모시면 우리가 변화됩니다. 우리가 다시 태어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변화되면 주님이 우리 안에 언제고 다시 태어나십니다. 따라서 주님 탄생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님의 강생으로 세상에 구원이 왔고 은총의 세계가 활짝 열렸듯이 우리 자신에게도 바로 그와 똑같은 구원과 은총의 세계가 활짝 열려야 한 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마음먹기에 달려 있습니다.




대단히 어폐있는 말 같지만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어 오실 때 우 리 자신도 하느님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많은 인생이 하느님이 된다는 말 자체가 뚱딴지같지만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오셨다는 것은 우리가 또한 그분 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 어 주신 것입니다. 특히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하느님을 목말라 했던 사람들, 그들은 진정 하느님의 큰 빛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번 성탄을 축하드리며 은총의 새해를 여시기 바랍니다.












18.             예수성탄 대축일 <요한 1,1-18> ‘말씀’은 지금도 사람이 되어오신다


                                                                유영봉 신부




묵상 : 하늘과 땅의 입마춤은 땅이 하늘로 올라감으로가 아니라, 하늘이 땅에 내려오심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에 하늘의 땅에 대한 사랑이 드러난다. 지금도 우리가 그분께 마음을 열기만 하면, 영원하신 ‘말씀’은 우리 안에 태어나신다,




        1.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




우리는 주님의 성탄 축일을 맞았다. 어떤 시인은 성탄의 신비를 일컬어 ‘하늘과 땅의 입맞춤, 영원과 시간의 만남’이라고 노래하였다. 그렇다. 어찌 인간의 생각으로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하느님께서 죄 많은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당신의 아들을 보내신다는 것을,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은 하늘과 땅의 입맞춤은 인간이 하느님께로 올라가서 된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낮추어 오심으로 되었다는 사실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강생의 신비를 설명하면서 ‘인간으로 하여금 신(神)이 되게 하기 위하여, 신이 인간이 되어 오셨다’고 하였다, 여기에 하느님일 인간에 대한 사랑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2. 초월자(超越者)이면서 임마누엘이신 하느님


 


오늘 복음에서 요한 사도는「‘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고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영원한 침묵 가운데 인간에게 건네신 ‘말씀’이시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세상을 창조하시고, 피조물을 무한히 초월하시어, 영원에서 영원에까지 계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중의 하나가 되심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다. 그리하여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 ‘임마누엘’이 되셨다.




이제 인간의 역사는 인간들만의 역사가 아니라,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의 역사 안에 뛰어드신 주님과 함께 뛰어 가는 역사가 되었다. 왕자와 결혼한 거지는 왕비가 되듯이, 그분이 우리 인간의 역사에 뛰어드심으로, 인간과 인간세계의 모든 것이,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이 구원받게 된 것이다.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된 것이다.




이 세상은 더 이상 죽음의 골짜기일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사랑하신 사람이고, 친히 사신 세상이기 때문이다. 주님 안에, 주님과 함께 할 때 세상만사는 전혀 새로운 뜻과 모습과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탄은 구원의 축일이다.



         3. 강생(降生)의 신비 역사속 계속




성탄 판공성사를 주기 위해 5~6시간씩 고백소에 앉아있다 보면, 참으로 온 몸이 뒤틀리는 때가 많다. 신부들은 성탄과 부활 판공성사를 주면서 평소의 모든 허물에 대한 보속을 다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예배당에서는 일찌감치 높은 종각에서 땅에까지 닿는 성탄 트리에 점화를 하고는 판공성사 없이도 성탄을 잘 맞는 듯하다. ‘목사님들은 판공성사가 없어서 좋겠다’고 하던 보좌신부의 말이 생각난다,




그러나 성탄은 주님께서 우리 안에 새롭게 태어나셔야 참 성탄이 아닐까? 영원하신 ‘말씀’이 사람이 되시는 강생의 신비는 우리 안에서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낮은데로 임하시는 그분이 우리 안에 태어나시도록 해야한다. 그런데 성탄트리, 송년파티, 친구에게 줄 선물을 위해서는 많은 돈과 시간을 쓰면서도, 기도나 판공성사나 불우한 이웃을 위해서는 인색한 성탄은 아닌가? 본당이나 개인적인 차원에서 반성해볼 일이다.




        4. 말씀이 우리 안에 계시도록 




‘너 없이 너를 창조하신 주님께서는, 너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다’고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안에 오시고자 하시고 우리를 통해 당신의 구원역사를 계속하고자 하신다. 그 길은 어디에 있는가?



예수께서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고 하셨다. 성서 말씀을 맘에 모시고 살 때, ’말씀’은 우리 안에 태어나신다.




주님께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요한 6,56)고 하셨다. 성체를 모시고 내 안에 오신 그분과 함께 의논하며 살 때, ’말씀’은 새롭게 우리 안에 태어나며, 그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불우한 이웃 안에 사랑으로 내려갈 때, ‘말씀’은 우리 안에 태어나신다. ‘말씀’을 모시면 우리는 성전이 되고 작은 예수가 된다. 성탄시기는 특별히 강생의 신비를 사는 기간이다.


      


















19.        예수성탄 대축일 <요한 1,1-18>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다.


                                                           변희선 신부




나는 며칠 전 서울 정능동 성당에서 대림절 특별 강론을 마치고, 나의 초등학교 4학년 담임이셨던 허영회 선생님을 30여년 만에 만나 뵈었다. 이날 나에게 해주신 허선생님의 체험담을 들어보자.


 


1962년 3월 5일 교육대학을 갓 졸업한 허 선생님은 강원도 홍천군 내면 광원초등학교에 부임하였다. 험하고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한 여름에도 물에 들어가기 어려운이 곳의 사람들은 주로 화전민이었다.


부임한지 삼일째 되는 날, 교장실에 불려간 허 선생님은 황당무계한 일 겪었다. 3명의 학부모들이 교장선생님에게 항의하기를, 「이 사람이 당신이 데려온 새 선생이요. 지난 번 선생은 하루에 수업을 4시간만 했는데, 어째서 이 새파란 선생은 6시간을 하나요? 우리 애들이 일찍 집으로 돌아와야, 농사일을 시킬 수 있잖소」


 


험악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허선생님은 나라의 법도를 어길 수 없다면서 학부모들을 간곡하게 설득하여 돌려보냈다.


같은 해 12월 1일 새벽 허 선생님은 새로이 개교하는 홍천읍의 석화초등학교로 전근하기 위하여 하숙집 문을 나섰다. 집 앞에는 하얗게 흰옷을 입은 온 동네사람들과 전교생이 모여있었다. 두 학기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6시간의 수업을 엄격히 해주신 것에 감사하는 순박한 마음들이 모인 것이다.


 


지금도 허 선생님에게 가슴이 아픈 일은, 점심 도시락을 준비 못해서 굶는 어린이들과 아니면 구운 옥수수나 도토리 밥을 먹는 학생들이, 멀어져 가는 버스 뒤를 수 백미터나 뜀박질로 자신을 배웅하던 장면이다. 이 말씀을 내게 해주시는 허선생님의 눈시울에 이슬이 맺혔다. 그 순간 나는 선생님의 눈물 속에서 진리와 사랑의 빛을 보았다.




지금 우리는 그야말로 눈감으면 코 베어 가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몇 일 전에는 3억원 정도의 빚이 있는 슈퍼의 주인이, 술에 취해 자다가 두 발목을 절단 당했고, 지나 9월에는1,500만원의 보험금을 노린 아버지가 초등하교에 다니는 아들의 손가락을 자르고 강도극을 꾸몄으며, 지난달에는 경남 진주의 한 초등학생이 「선생님들! 왜 생사람 잡으세요」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였다.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인 우리에게 정말 큰 빛이 간절히 필요하다. 거짓과 탐욕과 불의와 미움이 판을 치는 어둠 속에서,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그 빛이 이미 오셨지만 그 빛을 알아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게 슬픈 현실이다. 또 다른 이야기를 들어보자.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영국 와링턴 근처의 한 성당은, 예수성탄전야 미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적군의 공습 때문에 밤에는 소등을 해야 했으므로, 어둠 속에서 미사를 드려야 했다. 이날 성당의 앞자리는 특별히 독일문과 이태리군의 포로신자들이 미사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성당의 유일한 오르간 연주자가 몸이 아파서 음악이 없는 미사가 될 지경이 되고 말았다. 미사 주례자 로치훠드 신부님께서 이 소식을 알리자, 한 독일군 포로가 반주를 자원하였고 로치훠드 신부님은 이 것을 허락하셨다.




그 독일군 포로가 조용히 그리고 거룩하게 성탄 성가를 연주하자, 성당 안은 감격과 기쁨의 눈물로 가득하게 되었다. 이 날밤 성당 안의 신자들은 어둠 속에서 주님의 거룩한 진리와 사랑의 큰 빛을 보았다. 비록 길가와 창가는 소등으로 어두웠지만 와링턴 마을에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성탄의 빛이 켜졌다.


 


이 세상이 아무리 어둡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을 가다듬고 주님께로 향하면, 누구든지 결코 꺼지지 높는 진리와 사랑의 빛을 볼 수 있다. 수많은 허영회 선생님이 우리 곁에 계시며, 수많은 독일군 포로가 우리에게 감동의 빛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리고 우리도 두려움을 버리고, 진리와 사랑의 빛이신 예수 아기께로 달려가서 경배를 드리자!

















20.              예수  성탄 대축일 (다해)  예수 성탄, 우리의 성탄    


                                                              강길웅 신부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입니다ꡓ(이사 9,1).


오늘 이사야가 외친 놀라운 말씀이 우리 가운데 크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해서 세상은 참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탄생은 바로 우리 자신의 탄생(?)입니다. 어폐있는 말 같지만 그것은 사실입니다.




어떤 부부가 결혼한 지 10년이 넘었건만 아기가 없었습니다. 아기가 없으니까 부부뿐만 아니라 시부모님에게도 낙이 없었습니다. 집안이 그렇게 쓸쓸하고 허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결혼 13 년째 되던 해에 부인이 임신을 하더니 드디어 옥동자를 낳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대단한 경사였습니다.




우선 부부가 기뻤습니다. 이제 남편은 아버지가 되었고 아내는 비로소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아기가 태어남으로 인해서 그 부부가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되었고 시어머니는 할머니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아기 하나로 인해서 온 가족이 모두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그보다 더 위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탄생은 바로 우리 자신의 탄생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태어나시기 때문에 우리 인생이 새로워지며 또한 우 리 인생이 그분 안에 새로워지기 때문에 그분의 탄생이 빛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탄은 하느님의 것이요 또한 인간의 것입니다. 인간 은 실로 예수님 때문에 인간다워지는데 그것이 바로 성탄이 주는 의미입니다.




오늘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구원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다고 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믿는 이에게나 믿지 않는 이에게나 모두에게 골고루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믿는 이에게만이 그 은총이 살아서 빛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은총의 빛이 환하게 빛나도 눈을 감아 버리면 빛은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옛날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세상에 수없이 많은 민족이 있었지만 유독 그들만이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막상 메시아가 오자 그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아를 죽였습니다. 이게 바로 신앙의 모순입니다. 얼마나 많은 모순이 오늘의 우리 사회에도 존재하는지 모릅니다.




오늘의 시대에도 주님을 찾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러나 정작으로 주님을 만나는 사람은 실로 얼마되지 않습니다. 믿음 안에 서 눈을 다른 곳으로 뜨고 있기 때문에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 서도 주님을 바라보지는 못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그 안에 탄생하실 자리가 없습니다. 설혹 주님이 그 인생 안에 태어나셔도 그 사실 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변화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태어나실 자리가 없습니다. 베들레헴의 모든 방들은 만원이었습니다. 아무리 사정해도 예수님이 태어나 실 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택하신 곳이 마구간이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이 오늘의 시대에도 재현되고 있습니다. 세상에 방이 많지만 정작 예수님이 탄생하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진정 가난한 사람은 그분의 구유가 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부인이 찾아와서 자신의 사업이 실패한 얘기를 하면서 울었습니다. 듣고 보니 딱했습니다. 처음에 화장품 장사를 했지만 손해만 봤고 나중엔 음식 장사를 했으나 빚만 몽땅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남편도 없이 혼자 자식들과 함께 살자는 일이 다 그르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절망의 시기에서 구원의 빛이 왔습니다. 예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한번은 거리를 헤매다가 우연히 성당에 들어갔는데 마당 한쪽에 모셔진 성모상이 그렇게 편안했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오랫동안 위로를 받고 수녀님을 찾았더니 수녀님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 당신을 부르셨다고. 그리고 수녀님의 말씀 한마디가 그녀를 살려 주었습니다.




그 날부터 그 자매는 가슴 안에 예수님을 모셨으며 예수님을 모 신 날부터 그녀는 새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녀 안에 태어나시자 자매가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그녀는 다시 일어섰으며 한동안 파출부로 나가다가 지금은 동네에서 작은 가게를 하는데 그냥 먹고 살 만은 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 안에 탄생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특히 힘들고 어려웠던 분들, 가난하고 외로웠던 분들, 그리고 병들어 고생했던 분들에게서 그분은 태어나시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밤 천사가 그랬습니다. “오늘 밤 너희의 구세주께서 다윗의 고을에 나셨다”(루가 2,11). 여러분이 바로 다윗의 고을입니다.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21.            예수 성탄 대축일 <루가 2,15-20>  그리스도께 탄생할 자리를 드린다는 것


                                                           함세웅 신부




한 아기가 세상에 탄생하였습니다. 복음사가 루가는 서론에서 이 탄생 시기를 로마제국의 아구스또 황제 때라고 기록했습니다. 팔레스틴이 아니고 세상이라고 기록한 것, 유다 총독 헤로데가 아니고 로마 제국의 아구스또라고 기록한 것은, 바로 이 아기의 보편적 사명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이 아기의 무대는 팔레스틴의 제한된 지역이 아니라, 우리나라까지를 포함한 이 세상이라는 구세주 구원의 보편성을 일깨워 주기 위한 의식적인 기록입니다.


 


그러나 이 아기의 탄생을 기뻐하는 무리는 제한되어 있습니다. 로마의 제국이나 온 세상이 이 기쁨을 맛본 것은 아닙니다. 목자들만이 이 기쁨을 알았고,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목자는 당시 유다 지방에서 가장 비천한 지위의, 신분이 낮은 사람들입니다.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었으나 마음이 착하고 순진한 사람들이었기에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뻐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탄생하신 예수 아기, 그러나 그 아기는 왕궁에서가 아니라 마음 착한 목자들의 모임인 마구간에서 인간의 첫 발을 딛으셨던 것입니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가 머물러 있는 동안, 마리아는 아기를 낳을 때가 되어 드디어 첫아들을 낳아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혔습니다. 여관에는 그들이 머무를 방이 없었던 것입니다”(루가 2,6-7) 이 몇 줄 안되는 기록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하느님 +인간)의 탄생 기록 전부입니다.


 


이 아기 예수의 탄생에 대한 구약의 예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만상은 고요 속에 잠기고 밤은 달려서 그 한 허리에 다다랐을 때, 주여, 전능하신 말씀이 하늘의 어좌에서 내리셨나이다”(지혜 18, 14-15) 밤입니다.


고요한 밤 그리고 침묵의 밤입니다. 침묵은 그리스도의탄생, 그분이 하늘에서 세상에 내려오시기 위한 첫 조건입니다. 조용함 가운데 인간은 자신을 되찾으며, 반성해서 자아를 의식하니, 이것은 곧 하느님과 만날 수 있는 방법이며 길입니다. 모든 사람의 잔꾀, 표정, 행동, 또는 변명, 이 모든 것은 조용함과 침묵 속에서 다 눌려지며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침묵 ! 이것은 하느님과 대화하고 통할 수 있는 인간이 지닌 유일한 언어이며 동작입니다. 침묵, 그것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생각한다는 것, 그것이 곧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인간적으로 보아 참으로 섭섭하고 슬픈 일, 즉 그리스도께서 탄생할 자리가 여관에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도시 밖의 마구간에서 탄생하신 그 아기 예수는 또다시 도시 밖에서 십자가상에 달리실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른 상징적 의미를 하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찾고 원하신, 탄생할 자리나 숙소는 바로 인간의 마음인 것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습니다”(마태오 8,20)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 그분은 아마 지금도 우리 마음 안에 거처할 자리가 없어서 항상 찾고 계실지 모릅니다.


 


그리스도께 탄생할 자리를 드린다는 것, 그것은 바로 우리 옆에 앉아 있는 형제, 자매, 나의 가족, 나와 늘 만나는 사람, 아니 나와 뜻이 맞지 않는 그분께 자리를 내어 주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 불쌍한 사람, 외로운 사람에게 따뜻한 사랑의 선물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일년에 한 번 지내는 이 아기 예수의 성탄 축일이, 전례적인 이 기억이 바로 매일매일 내 안에서 반복될 것이며 새로워 질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만민의 빛이라 했습니다. 어두움을 없애는 빛, 그림자가 자취를 감추게 되는 것, 그러나 그림자는 어떤 존재가 아닙니다. 빛이 이르지 못하는 장애물 때문에 생겨나는 결과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만천하에 환하게 드러나게 하십니다. 다만 우리가 눈을 감고 우리 두 손으로 또 눈을 가려 그리스도의 빛을 막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눈을 뜬다는 것, 그것은 하나의 결정이며 실천입니다. 신앙인의 내적 투쟁, 장애물은 곧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기쁨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는 하느님으로서 우리 인간과 동행하기 위해서, 반려자, 벗으로 오신 것입니다. 동고동락한다는 의미, 그리스도가 인간이었기에 그의 언행이 우리에게 힘과 보증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온 기쁨, 그것을 우리는 선물이


라고 합니다. 이 선물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집어 주는 제 3의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선물은 그렇다고 그리스도 자신이나 또는 하느님도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진하고 짙은 것, 즉 ‘하느님이 인간인 나’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주고받는 그런 선물보다 훨씬 고귀한 하느님 +사람, 곧 일치이며 변화입니다.




여기서 자연 하느님께 대한 우리 인간의 보답이 주어집니다.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바친다는 봉헌의식보다 더 강한, 자신이 하느님으로 변해야 한다는 사명의식을 자각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제 나머지 과정은 사람이 하느님으로 되는 일입니다. 이 보증을 바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찾고 얻으며 또 확신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전 신앙인의 중심 과제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 신학자들의 설명 방법이 달랐지만, 도표로 표시할 때 하느님께로부터 나온 사람이 다시’하느님께로 가기 위한 과정’에 다 포함되며, 성 아우구스띠노의 고백록 첫 장에 나오는 ‘주여, 님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착잡하지 않습나이다’라는 표현은, 바로 이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웃에 대한 사랑은 생각, 행위, 말 뿐만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이 바로 이웃으로 변해서 동화해야 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신비적인 일치, 변화에서 우리는 하느님, 나, 이웃이라는 삼각관계의 또 다른 성삼의 체험을 맛보는 것입니다. 




새 사람으로의 탄생




지금 이렇게 완성된 성전에서 맞이하는 성탄은 우리에게 깊은 감회를 줍니다. 이 날이 있기까지 우리는 어려운 시간을 지내면서도 은총의 기적이 아니면 이룩될 수 없는 성전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이 우리는 이 은총과 이 은총이 주는 빛과 위로가 아쉽습니다. 더구나 이 시대가 요구하는 현실은 어두움이 짙어 참된 길을 찾기가 어려우며, 인류에게 참된 자유와 구원을 주시는 구세주의 참 빛은 더욱 아쉽기만 합니다.


 


구세주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묶이고 억압받는 이들에게는 해방을 주시고자 오늘 이 자리에 오셨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구세주의 탄생을 기뻐하면서, 가난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죄인들의 친구이시며 그들의 불행을 함께 나누셨던 생활을 배워야겠습니다.




그 길은 묵은 나의 생활 전체를 예수 아기에게 맡김이며, 새로운 ‘나’로 시작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낡은 나의 생활 방식을 따르면서 그릇된 안전을 느끼거나 또는 새로운 탄생, 새 생활이 가져다주는 변화가 두려워 현상 유지를 바라거나 임시 방편으로 새로운 생활로의 탄생을 막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이웃과의 만남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사랑하심과 같이 생활하고 나 자신의 생황을 돌이켜 보면서 새로운 나로 시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탄생의 의미는, 자칫 인간들이 만들어 놓는 규범에 의해 짓밟힐 수 있으나, 인간 내면의 양심의 소리는, 눈먼 사람에게 시력을 주고, 억눌린 사람들을 놓아주며, 우리는 다시 새로운 탄생의 신비를 따릅니다.


 


예수 아기 탄생의 기쁨을 전합니다. 여러분 가정에 강생하신 구세주의 은총이 가득하시길 빕니다. 동시에 다시 태어남의 의미가 우리 자신에게 가득하여 사랑으로 불타야겠습니다. 불은 모든 것을 태웁니다.


 


구세주께서 사랑 자체이시며 모든 인류를 뜨겁게 사랑하셨듯이 사랑은 불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 불이 되어야 합니다. 그 불은 모든 주위를 밝게 비추며 태울 것입니다. 그 불은 우리에게 참 탄생을 안겨 줄 것입니다. 










22.              성탄절 강론   (다)  희망의 성탄                신은근 신부






사람들은 모이면 누구랄 것도 없이 걱정과 개탄을 쏟아낸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그 많은 돈들은 어디로 갔는지 한다는 사람들은 무얼하고 있는지 불만의 소리는 끝이 없다. 사회전반에 걸쳐 불안이 깊게 자리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내년을 생각하면 누구나 답답하고 숨이 막힌다. 이런 와중에서 우리는 성탄절을 맞고 있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길목에서 주님의 오심을 기념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은 오셔서 무얼하실 것인가. 다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시는 그분께 우리는 무엇을 희망하며 청해야할 것인가. 새천년을 넘기면서 우리가 해야 할 과제다.




첫째는 믿고 신뢰하는 마음이다. 역사 안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권능을 보여주셨다. 장님의 눈을 뜨게 하셨고 반신 불수를 일으키셨다. 사탄을 몰아내셨고 문둥병자에게 새 삶을 되찾아 주셨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힘을 지니고 계셨던 것이다. 이제 그 하느님의 힘과 권능을 다시 우리 안에 심어주시길 청해야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힘으로 이 어려운 시대를 살아갈 수 있음을 드러내야 한다. 불평을 넘어 신뢰하는 마음으로 살 수 있음을 드러내야 한다.




둘째는 희망이다. 우리는 아기 예수님의 모습에서 희망을 볼 수 있다. 어린이는 그 자체가 희망이며 기쁨이다. 어린이는 누구나 믿고 신뢰한다. 어떤 가능성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다. 당신께 희망을 두는 사람을 돕기 위해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어린이의 모습을 지닌다면 희망은 우리 안에서 자란다. 그러니 몸은 어른이더라도 어린이의 마음을 지닌다는 것은 은총이다. 그런 사람은 세상을 보는 눈을 희망의 눈으로 바꿀 수 있다.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나는 여러분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모든 백성들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입니다. 오늘 밤 구세주께서 이 고을에 태어나셨습니다. 복음에서 천사는 목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밤을 새우며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나타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목자들은 누군가. 신앙을 지키며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그러니 두려워 말라는 천사의 말씀은 우리를 향한 말씀이다. 그리고 두려움을 떨쳐버릴 이유는 구세주께서 오셨기 때문이라 했다. 그러니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일상사 안에서 드러내며 살아야 한다. 그것은 또한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며 사는 모습이기도 하다.




메리 크리스마스는 기쁜 성탄절이란 뜻이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이렇게 성탄절엔 기쁨을 나누었다. 그런데 올해는 이 말에 힘이 없다. 나눌 기쁨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탄절이 기쁜 이유는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올해도 진정 기쁜 성탄절임을 깨달아야 한다. 내가 기쁘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기쁜 것이다. 나는 기뻐하지 않으면서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기에 힘이 없는 것이다. 다시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고 희망을 주시길 오시는 예수님께 청해야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힘이 우리 안에 있음을 깨닫는 성탄절이 되어야 한다. 현실 자체는 불안하지 않다. 시련을 견딜 수 있는 힘이 없기에 불안을 느낄 뿐이다.




아기 예수님처럼 다시 태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은총을 성탄절에 청하자.













23.          예수성탄 대축일 : <사설> 거룩한 사랑, 거룩한 변모






영광의 성탄 대축일이 왔다, 죄악에 물들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사랑하시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느님은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 그리하여 인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우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맞는다. 지금 온 누리에 구세주의 구원의 은총과 평화가 넘쳐흐르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가 있으셨기에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 멸망의 늪을 헤치고 영원한 생명의 문으로 들어섰다. 예수 그리스도는 강렬한 생명의 빛을 죄인인 우리들에게 비춰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후에 우리는 슬픔도, 절망도, 증오도, 탐욕도 분쟁도 극복하고 하느님의 충실한 종이 될 것을 다짐해야 한다.




  첫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을 수 있어야 하겠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시지만 피조물인 우리들 인간으로 오셨다. 그분은 인간 위에 군림하지 않고 연약한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셨다. 그 분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8-29)라고 말씀하셨다.


 


과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가. 그분의 멍에를 메고 배우고 있는가.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들의 부담을 얼마나 덜어주고 있는가. 가난과 질병과 억압 속에 허덕이는 우리들의 소외된 이웃과 사랑으로 하나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일치하지 못한 채 미사 예절 속에서만 그분을 만나는 형식적인 신앙인이 되고 말 것이다,




둘째, 우리는 성탄 대축일을 맞아 낮은 곳으로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야 한다.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신 베들레헴의 초라한 말구유는 그분의 지존하신 신분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그분은 공생활 때에는 머리 둘 곳도 없는(루가 9,58) 나그네셨다. 오늘날 일부 신앙인들이 편안하게 살며, 고급 승용차를 타고 미사에 참례하는 것과는 사뭇 동떨어진 삶을 예수 그리스도는 사셨다. 스승은 온유하고 가난한데 제자들은 거만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가.


 


특히 요즘 우리 사회는 권력을 쥔 사람,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들의 위선적 행각이 폭로되면서 많은 국민이 경악하며 허탈 상태에 빠져 있다.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는 참극을 빚었고, 불법으로 비자금을 조성하여 부정한 방법으로 그것을 썼으며, 권력자에게 돈을 대준 대가로 거액의 이권을 챙긴 사람들이 법의 심판을 받는 것은 하느님의 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그런데 범법자들이 다수 서민들의 진실한 삶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행위를 했기 때문에, 그 충격파가 전국을 휩쓸고 있다,


 


우리 신앙인들은 전직 대통령이 2명이나 구속되고, 검은 돈과 관련된 정치인들의 가면이 벗겨지는 충격 속에서, 분노와 탄식을 금하지 못하는 선량한 국민들을 위로해야한다. 이 스산하고 캄캄한 비자금 정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둠을 몰아내는 빛으로 오신 것처럼, 이 땅에 법과 정의와 양심을 되살리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다. 우리는 희망을 가지고 난국을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도록 위정자들을 독려하고 국민들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줄 수 있어야 하겠다.




  셋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맞기 전에 참회해야 한다.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은 성탄 메시지에서 전직 대통령의 구속사건을 거론하면서 “밤이 거의 새어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로마 13, 12)라는 말씀을 인용한 후 “생각해보면, 역사적 의미를 지닌 이 기회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기보다 하늘이 주신 기회”라고 지적했다.


김 추기경은 이를 부연하여 “진실이 밝혀지고 정의가 바로 섬으로써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해 하늘이 주신 기회”라고 해석했다,


 


우리는 큰 시련이나 재앙을 겪을 때마다 우리 죄를 뉘우치고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하느님께 빈다. 우리는 구속된 전직 대통령들이나, 떳떳하지 못한 정치자금을 받은 정치인들에게 무한정 돌을 던질 수는 없다, 그들은 권력에 눈이 어두워지기 쉽고, 돈에 약한 우리들 인간의 약점을 좀더 많이 가졌을 뿐이다, 우리는 그들을 보복과 단죄의 차원에서 응징하기보다는 법과 양심에 따라 처리되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악 속에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성탄 대축일을 맞아, 우리들은 그분처럼 사랑하고, 그분처럼 낮은 곳으로 임하면서, 그분을 맞기 전에 참회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오셨다. “여러분은 전에는 어둠의 세계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주님을 믿고 빛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빛은 모든 선과 정의와 진실을 열매 맺습니다.”(에페 5,7-9)












24.             예수 성탄 대축일 전야미사 마태 1, 1-25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택시 기사들을 보면 “시간이 금”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그러나 요즈음은 “시간은 생명이다”로 바뀌게 되었다. 의사의 왕진이 늦어서 응급치료를 못 받으면 곧 죽게되는 일이 많으니 어찌 시간이 화급하지 않은가?




우리는 곧잘 시작이 없다, 촉박하다, 지루하다고 한다. 뚜렷한 개념도 없으면서 시간에 대한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다. 시간은 쉬지 않고 계속 흘러 그야말로 인정사정 없이 가고 움직이고 변하고 있다. 이래서 우리는 흐르지도 변하지도 않는 시간을 생각하게 되고 갈망한다. 그래서 젊음이, 사랑이, 행복이 한도 끝도 없이 계속되기를 갈구한다.




영원에 대한 갈구인 것이다. 영원은 시간처럼 가고 오는 그런 과거나 미래, 장단이나 변화가 없다. 오직 오늘만이 있을 뿐, 항존(恒存)하는 것이다. 시간은 영원의 한 부분도 영장도, 더구나 단위도 아니다. 시간은 동적이고 다수이고 찰나적인데 비해, 영원은 정적이고 단수이고 영구적이다. 따라서 불변하다. 시간은 끝도 있고, 매듭으로 이어지는데, 영원은 한도 끝도 매듭도 없다. 시간을 아무리 합쳐도 영원이 될 수는 없다. 또 시간은 나눌 수 있지만 영원은 하나라서 시간으로 재거나 산출이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오늘 살다가 내일 없어질 순간의 삶을 사는 이른바 촌각충(寸刻虫)이다. 영원을 바다라고 하면 시간은 그 바다 위에 뜬 배와 같다. 이제 영원이 시간 안에 들어오는 불가능한 일이 놀랍게도 성사되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이신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사람들 가운데 거하시는 강생이다.


하느님의 지혜와 전능을 가지고도 할 수 없는 일을 이룩해 놓으신 비사(秘事)다. 이처럼 하느님에게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고 성사시킨 데에는 꼭 한가지가 작동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어린 것에 대한 엄마의 거동을 보면 꼭 바보처럼 되어 보이듯이 하느님의 사랑도 전화력을 갖는다.




사랑하는 이는 그 사랑의 대상 앞에서 강하되고 무능해진다. 그 대상이 되지 못해 죽고, 되어서도 죽는다. 끝까지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사람이 되시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사람을 끝가지 사랑하다 못해, 또 그렇게 사랑하느라 죽으신 것이다.


오! 하느님의 죽음이여! 사랑의 극한이요, 극치가 아닌가?


그렇게 때문에 하느님을 “사랑”이라 한다. 이런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를 믿고 사랑하겠는가!












25.          사랑의 메시지 (김정수 신부 강론집 「나해」)에서




아기 예수님의 눈길


오늘 밤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련한 우리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시려고 이 세상에 태어나신 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류를 창조하신 이래 예언자를 통해 단신의 구원의지를 펴 오셨으나, 당신의 성자를 직접 보내시어 전 인류 구원이라는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여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몸소 개입하시어 죄악의 그림자로 그늘진 인간의 생애를 완전한 당신의 창조물로 만드시기 위해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다!


온 천하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이, 그것도 고대광실(高大廣室) 드높은 궁전이 아니라 동물 우리 속에서 태어나신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로써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일입니다. 하늘에서 단 한마디만 말씀하시면, 모든 인류가 넉넉히 구원되고도 남을 일을 직접 당신 아드님을 우리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이 세상에 내려보내신 하느님의 뜻하심을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인류를 창조하신 이래 인간들의 행위가 죄로 타락할 때면, 참다 못하시어 응징을 하시면서도 구원을 약속하신 자비의 하느님께서 직접 우리 가운데 오시는 이유는 단 한 마디 표현해서 사랑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말로만 사랑을 말씀하시지 않고 우리 인간에게 몸소 사랑의 실천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실천이 없는 사랑은 허구이며 위선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확연히 심어주시려고 오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택하신 곳은 권력과 부를 거머쥔 지배층이 아니라 권력이나 부와 거리가 먼 빈곤하고 소외된 계층이었습니다.


구유 위에 누우시어 맑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주님을 묵상하며, 우리 사회에서 버림받고 소외된 이웃과 굴절된 사회 정의 때문에 억울한 희생을 강요당하는 사람들, 당장 의식주도 해결할 수 없어 거리를 헤메는 이들을 대하는 우리들의 메마른 인정과, 입으로만 사랑을 떠벌리는 우리의 위선을 보시는 아기 예수님의 눈동자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신 이 밤은 흥정망청 먹고 마시는 밤이 아니며 고성방가로 거리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밤은 결코 아닙니다. 차분히 우리 마음을 정돈하여 우리에게 오신 사랑의 아기 예수님께 감사의 예를 드리고, 불행을 당하고 있는 우리 이웃에게 무관심했던 우리 자신을 자성하며,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평화와 가호를 비는 밤이 되어야 합니다.




I.M.F라는 경제적 한파를 겪으면서 많은 부모들이 양육을 포기하여 거리를 헤메고 있는 어린아이들과 부모의 사랑 없이 보호 시설에서 외롭게 이 밤을 보내고 있는 아기 예수 또래의 아기와 어린이들의 슬픈 눈망울을 떠올리며, 그들의 눈동자에서 아기 예수의 눈동자를 발견할 수 아는 사랑과 신앙의 안목이 과연 우리에게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우리 마음에 사랑을 심어주러 오신 주님의 모습을 보려면 먼저 고통받는 우리의 이웃과 버림받고 눈물이 맺혀있는 아이들의 얼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정의를 이 땅 위에서 펴시려고 오신 아기 예수 앞에서는 권력과 경제적인 부가 우선하는 인위적인 사회 정의는 한낱 물거품에 불과한 것입니다. 실천하는 사랑을 몸소 보여 주려고 오시는 주님을 본받고 우리 이웃에게 주님 사랑과 평화를 심는 새로운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기 예수님, 저희는 당신께서 이 세상에 사랑과 평화를 심어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으며, 죄악에 오염된 저희를 깨끗하게 하시어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음을 잘 알고 있나이다. 오늘 밤에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의 티없이 맑으신 마음이 보잘 것 없는 저희들의 거울이 되시어 저희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게 해 주시며, 저희 이웃에게 당신의 사랑과 평화를 전파하는 참다운 일꾼이 되게 하소서.


사랑이 깊으신 성모 마리아님,


구세주이신 아기 예수를 낳아주셔서 감사드리나이다.


저희도 성모의 자녀가 되도록 허락하여 주시옵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날 수 있게 도와주시고,


하느님께 저희를 위해 빌어주소서. 아멘.


















26.         선포와 봉사 (강론길잡이1 「나해 대림절·성탄시기」)에서 


                                              이제민 신부 




        1. 인간의 탄생 – 어른들에게 전하는 아기의 메시지




인류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행복과 구원을 갈망하고 있다. 지금의 처지가 어떠하기에 인간은 거기서 벗어나 구원되기를 원하는 것일까? 구원을 갈망하면서 인간은 어떤 처지에 놓여지기를 바라는 것일까? 새로운 처지에 도달한 인간의 구원된 모습은 어떤 모양을 띠고 있을까? 성탄은 이런 물음에 대하여 답변을 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경축하는 성탄 날, 그리스도인은 인류가 갈망해 오던 구세주께서 오셨다고 기뻐한다. 아기 예수는 구원된 인간의 원형인 ‘새 인간’이다.




그런데 구원의 이 기쁨을 해마다 노래해왔건만 세상은 나아진 것 같지가 않다. 성탄을 축하하는 민족의 수는 해마다 늘어만 가는데, 축배의 잔에는 구원을 체험한 인간의 기쁨이 아니라 인생을 즐기려는 인간들의 탐욕이 가득하다. 범죄는 늘어만 가고 인간의 마음은 온갖 고민으로 속박당하는 것 같다. 이 세상 어디서 구세주의 따뜻한 손길을 느낄 수 있을까? 어디서 우리는 가난이 되어오신 아기 예수의 숨결을 들을 수 있을까?




        2. 아기와 어른




세상이 참 기쁨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어쩌면 구세주가 찬란한 옥좌에 앉은 대왕의 모습이 아니라, 초라한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탄생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구세주라면 어쩌면 막강한 왕으로 왔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들었을 것이다. 인간은 강한 것(강력한 정부, 강력한 교회)으로부터의 지배는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약한 존재를 무시하고 지배하려는 힘의 논리에 젖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세주가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다. 인류가 갈망하던 구원이 이 아기에 달렸다고 믿기에는 그분의 모습이 너무 초라하고 보잘 것 없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구원의 신비가 주어져 있다.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인생이 존중받는 날, 인류는 구원을 체험할 것이다. 화려함과 강함이 인간의 행복을 보장할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닫는 날, 인류는 구원을 피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인류는 구세주 아기의 비참함과 무력함에는 아랑곳 없이 비정할 정도로 능력 있는 어른의 눈으로만 주님의 탄생을 바라보았다. 돈과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는 어른들의 눈에는 성모님의 난처한 처지나 가난한 요셉의 입장, 아기 예수의 처량함은 보이지 않고 다만 그 아기 예수가 그들의 구세주라는 것만이 보였다. 하느님이 무력한 아기 예수로 오셨다는 사실에는 눈도 돌리지 않고, 다만 그들을 구원해 줄 구세주가 오셨다는 도그마만을 보았다. 그리고는 자신들의 직업과 힘을 뽐낼 수 있는 화려한 잔칫상을 차려놓고 그 앞에서 성모님도 요셉도 흥겹게 즐기며 낭만적인 밤을 함께 지새우기를 바랐다. 구세주 탄생의 노래를 부르면서도 구원을 체험하지는 못했다.




이리하여 2천년이 넘도록 인류가 성탄을 기념해왔지만 세상은 으레 능력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베풀어지고 있다. 날이 갈수록 돈과 직업 가진 자들로 세상은 다스려지고, 실업자나 무능력한 자들은 기를 펴지 못하고 사람 대접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직업과 직무를 장악한 능력 있는 자들이(교회 안에서도 돈 없는 자는 회장직을 맡기가 어렵다) 무력하고 없는 자들 위에 군림한다. 노인, 어린이, 청소년, 실업자 등 무능한 사람들의 운명은 힘있는 자들의 손에 달려있다.




인류의 미래도 마치 그들의 손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계평화의 유지는 그들의 손에 달려있으며, 그들은 전쟁을 일으켜 인류를 파멸로 몰 수도 있다. 지구촌 곳곳에서 매일 수만 명의 어린 생명들이 기아로 숨져가는 사이에 권력을 쥔 어른들은 어마어마한 금액(일분에 거의 2백만 달러)을 무기구입에 퍼붓는다. 경제논리로 무장한 어른들은 바다를 오염시켜 온갖 물고기를 떼죽음당하게 할 수도 있고, 환경을 오염시켜 지구를 사람이 살 수 없는 죽음의 별로 만들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지구의 자원과 에너지원을 마구 써 고갈시킴으로써 후손들에게 막중한 빚을 넘겨 줄 수도 있다. 어른들의 횡포로 마구 잠식당하는 세상, 이런 세상에서는 어른들이 바로 신이다.




능력 있는 어른들은 인간의 삶을 돈으로 환산하려 한다. 직업과 수입이 없는 무력한 사람은 아예 사람 구실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 구실을 하기 위해, 사람 대접을 받기 위해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소유하려고 기를 쓴다. 그렇게 차지한 재물은 좀처럼 내어놓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든 지키려 한다. 그리하여 힘과 권력을 쌓는다. 역사적 교훈을 통해 자기만을 위한 소유가 결코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으련만, 역사적 교훈을 외면한 채 사람들은 소유로써 남으로부터 인정받고 위신과 체면을 세우고자 한다. 그리고 돈과 권력으로 포장한 명예를 내세운다.




부와 권력과 명예가 지배하고 경력이 우선시 되는 세상에서 작고 힘없는 어린이는 돈만 드는 짐이다. 어린이는 권력을 향하여 나가는데 방해가 된다. 그리하여 어린이는 어른들로부터 마땅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때로는 학대받고 생명의 존엄성에 상처를 받는다. 어린이는 어른들에 의해 어린이가 아니라 ‘작은 어른’이 되도록 강요받는다. 어른들의 눈에 어린이들은 소비자일 뿐이다.




어린이들을 위한다는 옷과 장난감도 어린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어른들의 돈벌이용 도구일 뿐이다. 유명 메이커의 옷을 입은 어린이들은 더 이상 어린이로서가 아니라 작은 어른, 애어른으로서 행동한다. 어린이를 어른을 닮은 어릿광대로 만드는 세상에서 어린이의 순수성을 어디서 발견할 것인가? 어린이의 순수가 되찾아지는 날, 그 순수가 존중되는 날, 인간성이 회복될 것이다.




        3. 인간성 회복




성탄은 바로 이 어른들의 힘의 신화에 종지부를 찍고자 한다. 성탄은 어른들의 이 폭력적인 주권을 경축하는 행사가 아니다. 성탄은 새로 태어난 아기의 무력함을 축하한다. 그 무력한 아기가 세상의 구세주임을 경축한다. 성탄은 아기의 축일이다. 이는 커다란 변화이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맺어주는 의미를 지닌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어른의 세계에 새 시작을 알리는 시간이다. 어린이를 통해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시간이다.




새로 태어난 아기 예수와의 만남은 모든 인간들로 하여금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기 좋아하는 어른됨을 극복하고 어린이의 순수성을 회복하여 인간이 되도록 한다. 아기 예수와의 만남은 사람들이 모든 형태의 계급주의(위계질서)를 아기로 오신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관조하고 이를 통해서 파국을 극복하고 인간화의 길을 걷게 한다.




성탄은 어린이의 순수성을 잃어버린 인류에게 어린이의 순수성과 천진난만함을 되찾아준다. 아기 예수는 어른을 인간되게 한다. 우리 모두는 자기 안에서 이 아기를 찾아 인간이 되어야 한다. 여관집의 주인도, 초원의 목동도, 궁중의 헤로데도, 동방의 박사들도, 구유의 마리아와 요셉도 발가벗은 이 아기를 통해 인간이 누구인지 배워야 한다.




성탄은 어른들에게 주는 메시지이다. 어른주의에 사로잡히지 말아라. 삶의 원천으로 다시 돌아 오라. 하느님의 순수와 젊음을 만끽하라. 어린아이를 애어른으로 만들지 말라. 하느님의 젊음과 어린 아이의 순수를 발견하라.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아들 딸들이며, 예수의 형제 자매들이며, 모든 인간들을 공동체로 부르고 새 하늘 새 땅을 창조하실 성령의 담지자이다.




        4. 새 역사의 시작




아기 예수의 탄생과 함께 인류의 역사가 새롭게 쓰여지고 있다. 마태오는 예수의 족보를 밝히면서 새 인간의 가문을 빛내기에는 너무 많은 죄로 얼룩져 있는 부끄러운 인물들까지 나열한다. 부끄러움을 드러낸다는 것은 인간의 힘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오가 이런 부끄러움을 숨기지 않은 것은 예수의 탄생이 하느님의 섭리에 의한 것임을 암시하려는 의도에서였을 것이다. 처녀잉태도 예수의 출생이 성령에 의한 것임을 말해준다. 구원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힘을 가진자를 중심으로 전개되던 인류의 역사가 말구유에서 탄생한 보잘 것 없는 아기를 중심으로 새롭게 쓰여지고 있다. 아기로 태어나신 구세주 예수는 어른의 힘을 무력하게 만든 새 인간, 성령의 인간이다. 성령의 인간은 남자와 어른의 힘으로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야훼께서 구원하시다’라는 뜻인 예수는 새 인간의 이름이다. 이 이름에는 인간과 하느님의 모든 원수를 굴복시킨 완전한 승리의 의미가 담겨 있다. 예수는 새 인간으로서 임마누엘(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다.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말은 성령을 통한 하느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말이다.




성탄, 온 세상이 그리스도의 탄생을 경축한다. 그리스도는 이미 탄생하셨다. 탄생을 축하하는 인류의 마음 안에 그리스도는 이미 오셨다. 구세주는 우리들 마음 안에 아기로 이미 탄생하셨다. 문제는 이미 우리 마음 안에 탄생하신 그분의 마음을  느끼는 것이다. 성탄의 기쁨과 구원을 느끼기 위해 인간은 단순히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기만 하는 존재에서 벗어나 스스로 성령의 인간, 새 인간이 되어야 한다.














27.               예수 성탄 대축일 밤미사 루가 2, 1-14 구세주 탄생


                                                           김영환 신부




        성탄의 참 뜻




오늘도 차거운 감방에서 살을 여이는 추위를 겪고 있는 수많은 죄수들이 있습니다. 또한 불을 때지 못해 싸늘한 방에서 감기에 누워있는 병들과 가난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자 여러분, 이러한 고통에 잠긴 사람들은 무엇을 기다리겠습니까? 이들이 기다리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감옥에서 해방되고, 병에서 건강을 바라고, 따뜻한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었으면 하는 것이 이 불행한 사람들의 소망일 것입니다. 만일 우리 중에 누가 이런 불행한 처지에 있는데 그를 구해줄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목마르게 그 사람을 기다리겠습니까? 또한 우리의 선조들은 일제하의 36년 동안 그 얼마나 쓰라린 체험을 했습니까? 그 중 우리 민족 자체를 말살하기 위해, 우리의 글과 말을 못하게 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다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또 외국으로 피신을 갔습니까? 이들은 무엇을 위해서 일을 했습니까? 오직 해방의 날을 맞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해방을 가져다 줄 사람이 온다면 그 사람을 얼마나 고대하며 기대렸겠습니까?


2천년전 이스라엘 자은 고을 베들레헴이라는 곳에서 이러한 인류의 고통과 불행을 구하기 위해 한 사람이 태어났으니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그분의 생일 바로 오늘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에덴 동산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해주셨으며 또한 영원히 죽지 않는 특은까지 주었습니다. 특은을 받은 인같은 행복에 겨운 나머지 자기의 처지를 생각 못하고 하느님과 같은 지위를 탐내고 불순명하여 모든 특은과 행복을 빼앗겼습니다.




우리가 지금 겪는 불행도 바로 우리 조상의 불순명의 대가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의 불행을 불쌍히 생각하시고 그 죄를 대신 보속할 분으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택했습니다. 성자는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 자기도 우리와 같은 죄인의 형상으로 인간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천주이면서 인간의 형태로 나신 예수는 참 하느님이시고 참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서 중계자 역할을 맡으셨고 인간의 잘못을 대신 속죄하여 주셧습니다. (중계자의 역할, 예수의 처지, 누군가는 하느님께 잘못한 큰 죄를 대신해서 용서받을 속죄자의 처지에서 고통받아야 한다는 것을 설명).




(불순명의 죄는 참된 수명으로 속죄해야······ 그래서 그리스도는 순명으로 속죄했다. 지위높은 사람에게 잘못했으면 그 지위높은 사람고 같은 정도의 높은 사람이 속죄해야 참된 속죄가 된다)


우리를 대신하여 속죄한다는 것은, 죄없는 분이 우리의 잘못을 자기의 잘못으로 여기고 속죄했기 때문에, 고통도 그만큼 컸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는 억울하다는 말이 잘 쓰입니다. 그것은 내가 당하지도 않아야할 고통을당했을 때나 죄없이 죄인 취급을 받았을 때 특히 잘 쓰입니다(억울한 경우의 예를 실감나게 말해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속죄는 억울한 것이 아닙니다. 인류를 불행에서 구하기 위해 스스로 죄인 취급을 자원했기 때문입니다. 받기 싫은 벌을 억지로 받은 것이 아니라 종의 잘못을 지체높은 주인이 스스로 짊어지고 고통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목저응로 예수님은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러기에 “하늘에는 천주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마음이 좋은 사람들에게 평화”라고 했습니다. 마음 좋기야 남의 죄를 대신 속죄할 만큼 좋은 분이 어디 있겠으며 그것도 지체 높은 분이 자기 종의 잘못을 위해서 생명까지 버렸다면 그것보다 더 큰 속죄가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날은 이기주의 세상에 친구를 위해 속죄해도 큰 일이 아닐 수 없는데 왕이 보잘것없는 종을 위해 생명을 버렸다면 인류 역사상 큰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느님인데도 인간의 죄를 위해 속죄하고 고통받고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바로 이 속죄를 위해 예수님은 세상에 태어났고 태어난 그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속죄한 분에게 보답해야 한다. 보답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분과 같이 내 이웃을 사랑해야하고 불우한 형제에게 사라을 베풀어야 한다. 예를 들어 말해주는 것이 좋다)


이런 복된 날을 맞아 우리는 어떻게 생활을 정리해야 할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오늘 날의 세상은 불의와 부정, 모든 거짓과 사기로 가득찼고 내가 잘 살기 위해서는 남의 불행도 생명도 무관심한 시대입니다. 또한 정서는 메마를대로 메말라 거리에 사람이 죽어가도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는 각박한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사는 우리는 어떠합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과연 크리스쳔답게 사는 것일까요(세상의 부정부패와 악을 말하며 나도 거기에 한 몫을 들고 있다는 것을 강조). 나도 만일 그러한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이라면 나는 과연 무엇 때문에 크리스쳔입니까? 메마른 가슴에 희망의 그리스도를 심어주어야 할 우리가······




신자 여러분, 그리스도가 악의 한가운데 태어났듯이 우리도 이 세상 한가운데 또 다른 그리스도로 태어납시다.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악이 있는 곳에 알을 제거하시고 불행이 있는 곳에 행복을 심어주시고 싸움이 있는 곳에 평화를 심어주십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는 2천년 전에 태어났지만 그에게 보답해야할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그리스도답게 살아야합니다(우리의 사명을 인식하고 철저히 살 것을 강조한다). 그러기 위해서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실천해야 합니다(불우한 이웃을 돋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보답하는 길이라는 것을 강조). 말로써만 아니라 행동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 성탄을 축하하지만 진정으로 축하와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나는 과연 이번 성탄을 맞이해서 무엇을 했나 반성해 보고 참 크리스쳔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성탄의 은총이 우리 가정에 풍성히 내리도록 이 미사 중에 열심히 기도합시다.
















28.              구세주 오시는 날 밤


                                                김정진 신부






전인류가 그처럼 애타게 기다리던 메시아 구세주께서는 드디어 천사들의 환호 속에서 목자들에게 기쁨을 안겨 주면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구세주께서는 마리아에게서 탄생하리라는 천사의 예고가 있은 후 나자렛에서 나시리라는 세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베들레헴 도시는 구약성서에서 여러분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듯이 다윗의 도시인데 이 곳에서 목자 다윗은 성소를 받았고 기름 발리움을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베들레헴에서 다윗의 참된 아들이며 주님의 양떼를 인도하는 참된 목자가 탄생하신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그런데 베들레힘에는 예수님을 맞을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느 마굿간에서 태어났습니다. 여관의 자리가 없었다는 것은 숙소가 없었다는 뜻이지만 또한 「여관」에는 예수 탄생이란 거룩한 신비를 맞을 의로운 자리가 없었다는 뜻도 됩니다. 말구유에 탄생하여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돌아가셔야 할 예수님에게는 화려한 꾸밈이나 장엄한 의식같은 것은 전혀 합당치 않은 것입니다. 이래서 예수님은 별만이 반작이는 고독과 적막 속에서 탄생하셨고 동물들이 음식을 먹는 돌로 되어 있는 말의 여물통이 예수님의 요람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맏아들, 즉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이 가난과 함께 인간의 비참과 연약함을 그대로 지닌 하나의 참된 인간이 되셨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또한 예수 탄생의 장면은 이렇게 비천하고 가난합니다. 더 뚜렷이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가난을 명료하게 드러내 줍니다. 비록 비천하고 겸손하고 가난한 티가 철철 흐르고 있지만 그분은 가난하고 불우한 자에게 풍요와 부를 나누어 주실 분이십니다.




신자 여러분! 이처럼 겸비하고 가난하게 태어나신 예수님은 제일 먼저 미미하고 가난하며 무식한 들판의 목자들에게 구세주 탄생의 기쁜 소식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 당시 쟁쟁하던 권력가들이나 헤로데왕이나 고관 대작들의 인사들은 이 기쁜 소식에 접하는 영광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허영과 교만으로 차 있으며 물욕과 탐욕으로 충만되어 있었으므로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었고 알 리가 없었습니다. 소란하고 야단법석하는 가운데 예수님이 오실 리가 만무합니다. 예수님은 정녕 고요한 한밤중에 오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순진하고 깨끗한 마음 가운데 조용히 내려오십니다. 매우 지치고 외롭고 가난하고 고달픈 우리들 인간에게 그 풍성한 축복과 함께 기쁨과 평화와 행복을 담뿍 안고 내려오십니다.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의 사랑받는 사람들에게 평화!>(루가 2,14)라는 천사들의 축하의 노래소리는 오늘의 축제의 분위기를 한층 더 돋우어 줍니다.




신자 여러분! 오늘은 정말 한없이 기쁘고 즐거운 날입니다.


예수 탄생의 예고 시에도 이미 (기뻐하십시오(하이레.)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자여!>(루가 1,28)할 적에 마리아는 메시아 시대가 도래함을 무척 기뻐하였으며 엘리사벳을 방문하고서도 <내 구세주를 생각하는 기쁨에 날뛰고 있다>(루가 1,47)고 읊었습니다. 오늘 예수 탄생시에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탄생을 고하는 일련의 천사들의 무리가 목자들에게 나타나서 <모든 백성들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전하노라>(루가 2,10)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진정 우리에게 완전한 큰 기쁨을 안겨 줍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은 하느님의 영원하고도 무한한 기쁨입니다. 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인간은 모두 하느님의 이같은 기쁨에 참여하며 기쁨에 젖어 있게 됩니다. 우리 신자들은 하느님의 기쁨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고백성사를 봄으로써 자기 허물과 티를 말끔히 씻고 천상 아기를 기꺼이 맞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면 얼마나 기쁨 속에 살게 되겠습니까! 우리 주변에는 신자들 중에서도 오늘의 참된 기쁨을 맛보지 못한 채 외면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구세주를 맞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으며 그들의 마음은 저 베들레헴의 마굿간보다도 더 차고 어지럽습니다. 예수님이 그런데 태어나실 리가 만무합니다. 여기서 안젤로 살레시오의 시 한 귀절을 소개합니다.


<그리스도 베들레헴에 천만 번 태어나셔도 그리스도 네 마음에 나시지 않는다면 네 영혼은 영영 버려진 것,> 아멘.












29.                                           봉준석 신부






“구세주 그리스도 강생하셨도다. 어서 가 경배하세”하고 온 세상의 교회가 찬미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 옛날 첫 번 크리스마스 밤에 있었던 일이 바로 이 미사에 재현되려 합니다.


이 성전에 모인 우리는 마리아와 요셉과 목자들이 누렸던 그 특전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에게 평화!”라는 천사의 노래는 바로 오늘의 기쁨을 알리는 인사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예수님과의 사랑 넘치는 친교입니다. 우리는 신앙으로써 과거 2천 년 전 예수님의 성탄을 지금 여기 우리에게로 끌어오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어려운 여행입니다. 근심과 걱정이 많습니다. 병들고 지치고 기진맥진하여 죽어갑니다. 우리 모두는 부정과 불신, 분노와 질투, 교만과 미움으로 범벅이 된 창피한 모습들입니다.




누구든지 간에, 우리의 현재(내적 외적)상태가 어떠하든지 간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밤 우리에게 탄생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을 대신 살아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십자가는 우리 각자가 짊어지고 걸어가야 합니다. 다만 죄악과 암흑 중에 버려졌던 우리가 이제는 주님과 함께 살아가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인생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세상에서 또 하나의 생명으로 꽃필 것을 확신하게 하여 주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착한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평화와 사랑과 은총으로, 정의와 진리와 빛으로 탄생하시는 그리스도의 성탄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우리 중에 화려하게 장식한 상점이나 백화점에서 혹은 환락가에서 사치와 허영, 향락과 난잡, 난동으로 성탄절을 더럽히는 태도가 있다면 삼가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가족과 함께 가정에서 교회에서 거룩하고 고요히 그리스도를 맞이하고 기뻐하는 밤이 되어야겠고 나의 기쁨을 다른 사람과 같이 나눌 수 있는 진정한 주님의 성탄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진정한 기쁨은 거짓이 없고 오만한 질투와 미움과 원한과 이기심이 없는 상태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허세와 외화(外華)에는 진정한 기쁨이 없습니다. 뇌물이나 착취로 얻은 물질적인 풍족에도 역시 기쁨이 없습니다. 크리스마스! 그리스도의 구원도리를 믿는 신자들에게는 가장 즐겁고 기쁜 날이니 신자라면 이날에 진정한 기쁨을 찾아야합니다.




경건한 분위기 속에 무엇인가 우리 각자가 등한한 생활과 냉담한 신앙생활로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날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옹고집과 교만에서 벗어나는 날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노령에 외롭게 지내시는 부모님을 찾아 함께 즐거워하는 일이나 사소한 일 때문에 멀어졌던 사람에게 먼저 한 장의 카드라도 보내며 새로운 우정을 계속할 뜻을 전하든가, 불우한 사람을 찾아 남모르게 나의 정성을 전하든가, 혹은 하느님의 사업에 무심했던 자신을 반성한다든가 해서 하느님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응답의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아무튼 평소에 알고 있으면서 또는 느끼면서도 하지 못하였던 일들을 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여 주는 행동으로 주님의 성탄절을 맞이함과 기뻐하는 날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성탄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좁아진 우리 마음에 넓은 터를 마련하시려 하십니다. 용서하는 마음, 고요한 마음, 후련해진 마음으로 웃음을 잃은 우리 이웃들을 이 기쁨에 초대하여 다 함께 노래하며 살아갑시다.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의 사랑받는 사람들에게 평화!”
















30.           만백성에게 이 기쁜 소식을


                                                            변기영 신부




오늘 밤 하느님이 우리에게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만일 하느님이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하느님 본래의 모습으로 오셨다면, 우리는 인식 능력이 부족한 까닭에 그를 도저히 알 수도, 볼 수도, 감당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사랑하셨으므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심판하거나 꾸중하거나 책망키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주시고, 진리의 길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은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하느님이십니다. 만일 신의 모습으로 오셨다면 우리는 그를 이해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고요한 밤, 갓난아기로 오신 하느님을 우리는 환영할 수 있으며 하느님의 왕림을 맞이하는 우리 인간 하나 하나가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가를 새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통치자라면 대다수의 사람의 생존과 복리를 위해 소수의 이익과 의사는 말살할 수 있겠지만, 하느님은 전 인류의 대다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 하나 하나를 사랑하시므로 착한 이나 악한이나, 살인하는 자나 살인 당하는 자나 하느님을 욕하는 자를 위해서까지도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왜 오셨을까요? 그것은 그분이 우리 인간을 몹시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은 후에 하늘나라로 올라가 그와 동거할 때까지 참고 기다리지 못하시고, 그 기간을 단축하러 빨리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후에 천사처럼 신화되어 그와 하나되기 전에 그는 인간화되어 내려오셔서 우리와 하나가 되신 것입니다.




이는 마치 아들이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먼저 아들을 만나러 오시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을 사랑하고 구원하며 신화시키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 즉 강생의 길을 따라가면 하느님다운 신화, 즉 구원을 얻게되는 것입니다.


이 길이 현세에서 훌륭한 학자나 정치가, 예술가가 되는 것보다 더 더욱 심원하고 궁극적인 완성방법입니다. 이 하늘나라의 길을 열어주시는 아기 예수께 뜨거운 환영과 감사와 찬미를 마음껏 드려야 하겠습니다.


또한 이 세상의 많은 이가 우리를 속입니다. 국회의원 출마자는 유권자에게 헛된 공약을 남발하는 경우도 있고, 의사도 환자를 속이고, 친구도 애인도 부부간에도 서로 속이지 않는 자가 몇이나 있습니까? 우리 자신도 우리를 속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늘 탄생하신 그리스도는 속을 수도 속일 수도 없는 진리 그 자체이십니다.




우리 모두가 이 밤에 촛불을 밝혀 들었습니다. 제 살과 뼈를 태워 어둠 속에 빛을 발하는 촛불처럼 그리스도는 이처럼 자기를 버리고 불태워 세상의 빛이 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뜨겁고 그으름 나는 물리적 초 대신 이 세상에는 희생과 봉사로 빛나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초가 있습니다. 바로 신자 개개인라는 초입니다.




가정과 직장과 길거리, 우리 각자가 처한 곳에서 우리는 초와 같이 살과 뼈를 바쳐 타야 하겠습니다. 명예욕, 물욕없이 자신을 다 바칠 때에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고 그리스도의 벗이 될 수 있으며 그와 한 형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영광스러운 성탄 밤에, 우리는 이제 남은 일생을 한 토막의 초로 태우겠다는 결심을 아기 예수께 성탄 선물로 바칩시다.


















31.             아기 예수의 탄생은 온 인류의 기쁨


                                                                   김기수 신부




탄생의 참 의의를 알려주고 우리의 책임은 이 기쁜 소식의 증인이 되는데 있다.




존경하올 교형 자매 여러분!


오늘 밤 구세주 아기 예수의 거룩하고 기쁜 성탄을 맞이하여 강생하신 아기 예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 각자 마음과 가정에 깃들이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2천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니 온 인류는 하느님의 구원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리고 있던 중 드디어 오늘 밤 베들레헴에서 천사들의 환호소리와 함께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멸망의 구렁 속에서 헤매이던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약속대로 이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우리는 이 밤에 아기 예수의 탄생을 진심으로 기뻐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여 미사성제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밤 이 미사에서, 다시 한 번 아기 예수가 왜 이 세상에 오셨으며 어찌하여 아기 예수의 오심이 온 인류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주는가 깊게 묵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들은 바와 같이 아기 예수는 탄생의 순간부터 인간의 권세에 귀속되어 강한 자의 뜻에 굴복하는 약자로서 가난과 함께 인간성의 비참과 연약함을 그대로 지닌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지만 천사들은 “하늘 높은 곳에는 천주께 영광, 땅에서는 그의 사랑받는 자에게는 평화”라고 찬미하면서 기쁜 소식을 전해 주셨습니다.


이는 비록 가난하고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셨지만 아기 예수의 탄생은 진정한 의의가 있기에 천사들의 환호소리가 울려 퍼졌던 것입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우리도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하느님의 외아들 독생 성자가 우리 죄 때문에 또 당신의 생명을 풍부히 주시기 위해서 우리와 같이 인성을 취하시고 비천한 몸으로 오셔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탄생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영광이 온 누리에 빛나고 모든 사람이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아기 예수의 탄생으로 인류는 하느님의 사랑과 죄의 사함을 받게 되었고 우리 모두가 아기 예수의 모습과 같게 되어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기 예수의 오심으로 천주성이 비참한 인간성과 결합되어 인간이 하느님의 영원한 영광과 행복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고 죄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이로써 하느님께서는 실지로 아기 예수를 통해서 당신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권리를 주신 것입니다.


즉 인간이 죄악에서 벗어나 천주성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기 예수의 탄생의 신비요, 참 뜻이요, 은혜입니다.




이러한 성탄의 참 뜻을 우리가 깊이 깨닫지 못한다면 성탄은 아무런 가치를 우리에게 주지 못하지만, 반대로 깨달을 때 어찌 아기 예수의 탄생이 인류에게 희열을 가져다주는 기쁜 소식이라 아니 하겠으며 우리는 참된 기쁨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제 진정으로 벅찬 기쁨을 마음에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먼저 이 기쁨을 모든 이에게 전파하는 증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증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들은 한 하느님의 자녀들이며 형제들로서 서로를 진심으로 도우며 용서하고 진실되이 회개하여 회개의 산 증거를 행동으로 드러내야할 것입니다.




지금 현 시대는 이 기쁨을 잘 알고 있지 못하는 이들이 많은 불행한 시대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들을 광명으로 인도할 메시아를 오시게 하기 위해서 진정으로 그의 진리와 사랑을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기 위해서 우리는 무사 안일주의와 타성과 자기 구령을 위해 사는 이기주의를 과감히 벗어 던지고 전 세계 사람들이 아기 예수의 오심의 참 뜻을 빨리 깨닫고 그 구속의 은혜를 입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어야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날 아기 예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책임이요, 우리는 깊이 마음 새겨야할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임을 깊이 통감하고 아기 예수의 적극적인 증인이 될 때 하느님 나라 건설의 역군이 될 것입니다.


끝으로 다시 한 번 아기 예수의 은총이 풍성히 우리들 안에 내리시길 빌면서 우리 모두 미사 중에 “하늘 높은 데서는 천주께 영광, 땅에서는 그의 사랑받는 자들에게 평화!”를 만방에 힘껏 외치도록 다짐합시다.








32.        예수 성탄 대축일 새벽미사 루가 2, 15-20 목동들의 조배






이 미사는 흔히 목동들의 미사라고 불리우고 있는데 오늘 복음을 들으면 왜 그렇게 부르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난 밤 미사의 복음에서 우리는 천사가 베들레헴 근처 들에 있던 목동들에게 나타난 구세주의 탄생하심을 알린 장면을 들었습니다. “너희는 이제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온 백성에게 큰 즐거움이 될 기쁜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니,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나셨다.” 천사의 이 말씀대로 목동들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인 구세주를 찾아뵙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아침 복음 말씀은, 이 기쁜 소식이 목동들에게서 어떠한 효과를 나타냈는지 알려 주십니다. 그들은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님이 알려 주신 이 사실을 알아보자”하고 소리치며 달려갔습니다. 성서에는 목동들이 어떻게 해서 아기 예수님을 찾았는지 아무 말씀도 없지만, 목동들에게 이 기쁨을 알려 주신 하느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셨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들이 아기 예수님을 뵈옵고 어떻게 하였는지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그들은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서는 무척 기뻐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께 무슨 선물을 갖다 드렸을 것입니다. 목동들이 늘 지니고 다니는 소박한 것이었겠지만 하여간 무슨 선물을 드렸을 것입니다.




잠시 동안 말없이 사랑에 넘치는 흠숭을 드린 후, 목동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목동들은 들에 천사들이 나타났던 사실을 마리아와 요셉에게 말씀드리고 즉시 읍내로 뛰어가서 이 소식을 알렸고, 이 소식을 들은 이들은 목동들의 말을 듣고 모두 놀랐습니다.




그런 다음 목동들은 그들의 생활 터전인 들로 돌아가 양 떼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듣고 본 바에 대해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목동들의 생활이 전혀 달라졌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목동들을 보셨습니다. 이 순박하고 가난하고 깨끗한 목동들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한 첫 사도들이었던 것입니다. 항상 그러하였고 또 항상 그러할 것입니다.




마리아로 말하면, 이 모든 것 – 이 놀라운 밤으로 끝난 지난 아홉 달 동안 일어났던 모든 일을 가슴에 간직하여 마음 속으로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우리도 목동들과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우리가 어떠한 종류의 사람인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목동들은 “이스라엘의 가난한 사람들” 즉 하느님을 깊이 사랑하고, 아울러 메시아를 고대하며 하느님께 충실함으로써 이 사랑을 표시할 줄 아는 진실하고 정직하며 겸손한 유다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야심가도 아니었고 교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사랑하시는 줄을 알았고 하느님께 의탁했습니다. 우리도 만일 그와 같다면 그들과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미사 때 목동들의 경험을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선 우리가 예수님을 뵈옵기를 고대하고 원해야 하며 그분의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물론 아기 예수님은 말로 우리에게 일러 주시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그분이 계시다는 그 자체로써, 곧 온전히 성부께 의탁하고 계시는 겸손하고 가냘픈 아기로 계시다는 그 자체로써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나를 보고 계십니다. 여러분도 회개하여 나처럼 어린이가 되지 않는 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 예수 아기는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 즉 아기 예수님을 그저 보고 사랑하기만 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 전체를 그분게 열어 드리십시오. 그러면 그분은 여러분 안에서 사시고 자라시며, 여러분을 아기 예수님과 같게 만들고자 여러분한테로 오실 것입니다. 보고 사랑하며 그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마리아께서 하신 것처럼 이 모든 것을 마음 속에 품고 묵상하십시오. 우리가 예수님께 대해서, 그 말씀과 표양과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생각하면 할수록 목동들이 행한 것을 우리도 행하기를 원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목동들처럼 생활의 터전으로 돌아가 우리가 듣고 본 바에 대해서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기를 원하게 될 것입니다.


“큰 빛이 오늘 우리들 위에 비치리니, 주님께서 우리 위해 나심이로다. 그 이름은 묘하신 분, 하느님, 평화의 임금, 영원의 아버지라 일컬을 것이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라”(입당송).














33.                 기쁜 소식은 가난한 자들의 것


                                                         김기수 신부






마음이 가난한 자만이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고 하느님께 사랑받을 수 있다.




우리는 몇 시간 전에 아기 예수님의 강생의 기쁜 소식을 기념하여 미사성제를 드렸고 이 밝아오는 새벽에 우리는 또 기쁜 소식에 환호하며 아기 예수 앞에서 정성되이 경배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 미사의 복음은 우리가 밤 미사 때 들은 복음에 바로 이어지는 복음으로써 천사가 목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한 후 목자들은 바로 이 기쁜 소식을 그대로 받아들여 아기 예수께 경배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찬미하였다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에서 아기 예수의 탄생의 기쁜 소식이 그 시대의 권력가나 고관들에게 전해지지 않고, 가장 가난하고 미소하고 무식한 들판의 목자들, 즉 멸시받고 영예도 존경도 받지 못하는 목자들에게 최초로 전해졌는가에 대해 묵상해 보도록 합시다.




이는 허영과 교만과 물질에 미쳐있는 세속적인 부유한 마음을 가진 자 보다는 진정으로 가난하고 버림받고 비천한 이들을 위해서 아기 예수께서  탄생하셨다는 것을 말하며 이 기쁜 소식은 가난한 자의 것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현 시대에 이 기쁜 소식을 전해들을 영광을 받을 수 있는 가난한 자들은 누구를 말하고 있는지요?




돈이 없어 궁핍한 자입니까? 아니면 판자촌에 사는 이들입니까? 아니면 거리의 거지들입니까? 아닐 것입니다. 이 가난한 자는 복음에서 주님이 친히 말씀하시는 “마음이 가난한 자”입니다. 즉 물질적으로 가난해도 정신적으로 부유한 자들이 아니라 물질적으로 풍부해도 마음이 가난한 자를 말합니다. 또한 재물에 근거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며 물질적 가난이 불행이 아니라는 진정한 마음으로써 재물의 쇠사슬에서, 즉 물질적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재물에 온 마음을 바치지 않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진정 가난한 자는 정신적으로 가난한 자로써 하느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견책하며 기꺼이 자신을 내어 맡기는 사람들, 자기의 관점을 재검토하는 사람들, 놀라움을 목자들처럼 순수히 받아들이는 사람들, 자기 정신의 진정한 변화를 일으킨 사람들,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겸손해 하며 주님께 의지하는 사람들, 당연한 일이란 없고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 있다는 현실을 직면하고 겸손과 순명의 정신으로 살며 가난의 산 모범인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마음이 가난한 자”인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진정으로 가난한 자가 될 수 있습니까?


이는 우리가 평온한 상태에 있기를 원하지 않고 책망을 듣고 고통을 참아 받으며 하느님의 음성으로 인해서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하느님께 여행을 떠날 때, 또 평화와 위안과 안정과 무사, 세련됨과 사회적 기쁨에 대한 열망과 아름다움과 물질주의와 황금만능주의에서 과감히 탈을 벗어 던지고 해방될 때, 또한 우리 안에서 나날이 자신의 고통에 대한 결단들을 기뻐할 수 있을 때 진정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참으로 태어나실 때부터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가장 비천하게 세상에 오셨고, 세상보다 자기를 낮추시고, 자기의 드높은 신분에 따라 생활하지 않고 살으신 가난한 자의 모형인 아기 예수의 길을 참으로 따를 수 있을 것이고, 우리는 그 대가로써 하느님께서 잔치를 베풀 때 먼저 초대받고 믿음이 부유한 사람이 되고 언약하신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고 하느님의 신비에 참여한 목자들처럼 천사의 기쁜 소식을 받는 영광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이 성탄 새벽미사를 봉헌하면서 진심으로 생각해 봅시다. 혹시라도 지금까지 어두운 마음 즉 재물에 너무 집착하는 부유한 마음이 있었다면 태양이 어두움을 물리치고 광명을 주는 것 같이 과감히 이 기회에 물리쳐 버리고 이 기쁜 소식은 언제나 가난한 자의 것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아 일상 생활 중에 언제나 가난한 자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아기 예수께 이 미사 중에 기도합시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34.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김몽은  신부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지존하신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시어 베들레헴 성밖 구유에서 태어나셨다. 왕자로서 궁궐에서, 부자로서 호화주택에서 태어나실 수도 있으셨지만,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서, 자기의 집 나자렛에서가 아닌, 객지인 베들레헴에서, 여관도 얻지 못해 양의 우리의 구유에서 태어나셨다.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시기 위해 스스로 가난한 자로 태어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나자렛에서 탄생치 않고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것은, 순전히 정치적인 사건 때문이었다. 그것은 곧 로마 황제 아우구스토가 자기의 대제국과 속국들에게 호구 조사의 칙령을 내려, 보다 효율적으로 세금을 징수하고 징병을 감행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이 사실은 이 지상의 권세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결국은 전능하신 하느님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편 예수님의 탄생은, 세계 역사 안에서 일어난 명백한 역사 사건임을 입증하는 현실이다. 즉, 이것은 전설이나 신화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 안에 정확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실제적인 사건임을 말해준다.




구유에 탄생하셨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도시의 여관에는,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거룩한 탄생을 맞이할 수 있는 의로운 자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비록 자리는 누추하지만, 추악한 인간의 탐욕에 물들지 않고, 정욕의 불로 오염되지 않은 곳을 하느님께서 미리 택하시어 예비하신 곳이다.


한편 예수님 탄생의 기쁜 소식을 최초로 전해들은 사람들도 역시 가난한 목동들이었다. 지식인이나 부유한 사람들은 이 기쁜 소식을 전해주어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비웃음과 모욕을 가했을지도 모르며, 더 나아가서는 박해를 가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헤로데 왕이 이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실재로 발해의 독수를 뻗쳐 애매하게도 무고한 어린이들을 무수히 학살했던 것이다. (마태 3,16-18 참조)




진정 하느님께서는 인간적인 외적 화려함이나 지위 따위를 조금도 필요로 하시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러한 것들은 하느님을 아는 데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의 생각과는 달리, 내면의 아름다움을 더욱 소중히 여기사, 외면적인 것에 조금도 개의치 않으셨음을 알 수 있다. 구유에서 탄생하사 십자가상에서 비참하게 돌아가실 예수님에게는 화려한 장식이나 장엄한 예식 따위는 전혀 합당치 않은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가난한 마음, 겸손한 인격, 소박한 인간성 안에서만 탄생하신다. 성탄을 맞이해서 우리는 지금 우리의 마음가짐을 재점검 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나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을 정도로 순수하고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마음의 가난이란 탐욕이나 교만, 불평이나 시기심이 없음을 뜻한다. 순수한 마음은 겸손, 사랑, 평화, 용서의 마음이다. 바로 그러한 마음의 소유자에게만 예수님은 강림하시는 것이다.












35.        예수 성탄 대축일 낮미사 요한 1,1-18 말씀이 사람이 되심


                                                             조창래 신부




가까이 오신 하느님


신자들로 하여금 결정적으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생활하게 한다.




교우 여러분, 먼저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지상에 나타난 오늘의 이 벅찬 기쁨이 여러분들의 가정에 충만하기를 빕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기쁨이 단순한 구경꾼으로서의, 혹은 주위의 분위기에서 오는 것만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와이 섬을 태평양의 낙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백여 년 전만 해도 하와이는 숱한 나환자들이 뒤끓는 더러운 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정부는 이들을 몰로카이라는 섬으로 이주시켜 버렸습니다. 그 때부터 몰로카이는 산 송장들이 썩어가는 생지옥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용감한 젊은 사제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그분이 바로 다미안 신부님이었습니다. 다미안 신부님은 몰로카이 외딴 섬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나환자들의 정신적, 도덕적, 경제적 지도자가 되셨던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풍족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인간적으로 윤택한 생활을 향유할 수 있었던 그였지만 수도원에 들어가 사제가 되었고 마침내는 세인들로부터 버림받은 병자들을 찾아, 고도에 들어가 사랑과 봉사의 생을 마쳤던 것입니다. 그는 쫓겨간 나환자들을 위해 헌신하다가 마침내 자신도 나병에 걸려 생을 마칠 때까지 진정으로 그들을 도왔던 것입니다. 그의 생애는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주는 사랑으로 자신을 온전히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들은 하느님의 말씀은 이보다 더 큰 사랑을 전해 줍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사랑하사 당신 아들을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사랑의 표시입니까!




요한 복음서의 서문은 2000년 전에 우리와 함께 사셨던 예수님의 탄생이 하느님에 의한 것이었음을 가르쳐 줍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간은 하느님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하느님과 동고동락할 수 있는 존재가 못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당신을 드러내시기 위해 창조의 계시를 해오셨고 마침내는 당신 아들을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이제 하느님은 멀리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강생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한 인간 안에 하느님이 계신다는 역설을 말씀이 강생하여 사람이 되셨다는 표현보다 더 극적으로 나타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느님에 대한 관념에서가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 하느님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00년 전에 탄생하신 예수님은 그분의 지상 생활의 역사적 환경, 지리적 환경, 그분의 조상, 그분의 가족, 그분의 직업, 그분의 육체로 우리와 꼭 같은 인간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분은 탄생하셨고 자랐으며, 노동하고, 고통받고, 죽으셨으니 우리와 다름없는 인간입니다. 한편, 그분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은 천상으로부터의 증거, 사도들과 제자들의 증거, 당신 자신의 증거, 기적과 예언들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한 위격 안에 계시는 두 본성에 대해 예전에는 많은 논란이 있기도 했지만 교회는 말씀이 육이 되셨다고 이 신비를 의심치 않고 믿어 왔습니다. 그분은 하느님께로부터 오셨으며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이셨습니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이 사랑은 하느님이 우리를 당신 독생 성자로 인하여 살리시고자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여기에 나타났습니다. 사랑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곧 우리가 하느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어 당신 아들을 우리 죄를 보상하기 위한 속제로 보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동등한 지위에 애착됨이 없이 오히려 자기를 비우고 비천한 종의 모습을 취하셨으며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처럼 세상에 대한 방관자로서가 아니라 우리와 밀접히 결합해 오시는 하느님을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영접해 드려야 합니다. 사랑에 보답하는 길은 사랑 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그토록 사랑하신 그분의 사랑을 우리도 닮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을 알아야 합니다. 그분은 하늘 위에 감추어져 계신 절대자가 아닙니다. 바로 나와 같은, 아니 나보다도 가난하고 찌든 형제들 속에 계시는 분입니다. 다미안 신부님이 병자들을 찾아간 것은 그들 속에 계시는 주님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일생은 자신을 깡그리 주는 것이었습니다. 참된 사랑은 언제나 자신을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 희생을 거절하고 남을 도울 수 있다고 아니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마굿간에서 탄생하신 예수님의 겸허한 자세는 이것을 잘 드러내 줍니다.




2000년 전에 이 세상에 오셨던 주님은 오늘 또 다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세주 탄생의 알림을 받고 조배하러 달려간 순직한 목자들 같이 겸허한 자세로 아기 예수님께 조배드립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탄생의 감격을 오래 간직하기 위해 매 순간의 어려움을 참고 견딤으로써 아기 예수님께 선물로 드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느끼는 따사로움을 헐벗고 굶주린 이웃에게 나누어주고 그들의 고통을 위로함으로 하느님의 위대한 사랑의 업적을 그들에게도 전달하는 오늘의 새로운 아기 예수가 됩시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바로 그분을 맞아들이는 것이고 우리 안에 오신 이 벅찬 기쁨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알아주지 않았다.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전을 주셨다”(요한 1, 13).]




          1. 성탄의 뜻




어제 밤 우리가 예수님의 성탄을 경축할 때 우리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성탄 축하가 무르익은 이제 성교회는 우리가 성탄의 뜻을 더 깊이 묵상하기를 원합니다.




이 미사의 복음 성경은, 어제 밤에 탄생한 아기 예수님은 마리아의 아드님이실 뿐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고,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시었으니, 말씀은 곧 하느님이시라.” 태초에 그러니까, 시간이 있기 전 영원으로부터 예수님은 항상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우리가 없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계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모든 것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조성되었고, 그분 없이는 아무 것도 조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모든 것의 주님이시요 창조주이십니다. 봉헌송에 있듯이 “하늘도 주님의 것, 땅도 주님의 것, 땅덩이와 그 안의 모든 것을 주님께서 내셨나이다.”




        2. 왜 말씀께서 사람이 되셨는가?




“이에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머물러 계시었다. 우리는 그 영광을 직접ㅈ 보았으니, 그 영광은 은총과 진리에 충만하여, 성부께로부터 오신 독생 성자의 영광이었다.” 그러면 그분이 왜 사람이 되셨습니까? 이 세상이 어둠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이신 그분이 인류의 빛이 되신 것입니다.


그분은 어두운 곳을 비추는 빛이시었고, 어두움이 그 빛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을 떠나 지향도 없이 갈팡질팡 헤매던 그 오랜 세월이 끝을 맺게 된 것입니다. 드디어 구세주께서 탄생하신 것입니다. “땅 끝마다 우리 주님의 구원하심을 보았으니, 땅이여 모두 다 주님께 노래 불러라. 그 구원을 드러내 보이시고, 만 백성 앞에 그 정의를 드러내 주셨도다”(화답송).




        3. 성탄이 우리에게 뜻하는 것




예수님의 성탄이 금년에 우리에게 무엇을 뜻합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 아기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나셨으며 살으셨고 가르치시며 교회를 세우셨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구원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확실히 구원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 삶이 끝날 때 우리는 영원한 기쁨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구원이 우리한테서 십자가와 고통과 슬픔과 죽음을 면제해 주는 것이 아님은 구태여 지적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부활 후 제4주일에 성교회는 성 바오로의 말씀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여 다시는 죽지 아니 하시니, 죽음이 다시는 그이를 지배하지 못하리라.” 만일 우리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시다면, 그분의 지체인 우리도 그러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것을 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가치있는 것이 되게 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것이 되게 하는 것은 바로 고통 뿐이기 때문입니다. 고통 안에서 그리고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오늘 탄생을 경축하는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을 구원하는 동료 구속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교우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크리스마스를 들뜬 기분으로 보내기만 하면 되는 줄로 여기는 교우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는, 충만한 기쁨이요 빛이며, 영원한 평화와 행복을 미리 맛보는 기쁨이지만 – 무섭게 심각한 것입니다. 성탄은 예수께서 우리 삶 속에 탄생하심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당신 땅에 오셨으되, 그 백성이 그분을 알아 뵙지 못하여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다는 말씀이 결단코 우리에게 해당되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4. 성탄은 우리의 축일


우리의 인생살이가 얼마나 어려운 지경에 있든지 간에 오늘은 우리의 축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그리스도이시요, 우리 구세주이시며, 우리 어두움 속에 빛을, 그리고 우리 마음 속에 평화를 가져다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그분을 모셔들이기를 원해야 합니다. 지금 여기 예수님이 계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아기가 태어나고, 우리를 위하여 아들이 주어졌으니, 그분은 주권을 어깨에 메시고 그분의 이름은 놀라운 의견의 사자라 일컬으리라. 너희는 새로운 노래를 불러 드려라. 묘한 일들을 하셨음이로다”(입당송). “거룩한 날이 우리 위에 밝았으니, 만 백성아, 어서 와 주님을 흠숭하라. 오늘날 큰 빛이 세상에 내려 오셨음이로다”(층계송).


그분은 그분을 영접하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들이 될 권리를 주실 것입니다.
















36.               영원한 의로움의 계시


                                                    전재국 신부






크리스마스인 오늘, 교회는 그리스도의 또 다른 양상을 묵상하도록 새로운 성체성사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리스도의 영원한 탄생과 당신 아버지의 생명에 일치하는 신비를 묵상하기로 하자.


새로운 성서 구절을 들으면서 세 번의 미사를 봉헌하는 오늘은 일년 주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이 중심을 이룬다면, 예수님의 성탄은 또 다른 역할을 한다. 지산의 탄생으로부터 언제나 새로운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는 탄생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요한 복음서의 서두에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이 말씀은 강생의 신비의 핵심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우리의 밤을 비추는 새로움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이 새로움이란 요한 복음서의 서두를 요약하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섭리와 그리스도를 통한 심혈을 우리에게 제시하기 위하여 복음사가는 하느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과정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이 과정은 구세주가 오시는 길을 우리에게 드러내는 서언의 세 단계로 표현된다. 사도 요한은 세례자 요한의 외침을 통하여 두 번째와 세 번째의 단계를 명백히 구분하고 있다. 요한은 첫 번째 단계에서 새로운 창조를 계시하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새로운 탄생을, 그리고 세 번째 단계에서는 새로운 계약을 계시한다.




매번 새로움이 새로운 모습으로 드러나는데 모든 새로움의 유일한 원천이 소개된다. 요한은 새로 태어난 아기의 때에 하느님의 영광은 우리의 밤을 비췄고,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셨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은 아버지이시며 당신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아기 예수의 탄생으로 계시한다.




세상의 빛이신 이 말씀을 묵상해 보자. 그리고 예수 탄생의 신비를 여러 각도록 묵상해 보자. 먼저 창세기 서두에 나오는 말씀을 즉 하느님은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을 묵상하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시작이 있었고, 이 세상에 우리는 태어나고 이 세상에서 자라난다. 그런데 하느님이 원천인 태초부터 그의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고 사도 요한은 말한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1, 3)




단순한 말씀이며 두 가지 기본적 신비를 우리에게 계시한다. 하느님의 생명과 세상의 기원이다. 이 세상은 창조되었기에 존재하며, 하느님이 이 세상의 영원한 원천임을 말한다. 그러나 유일한 하느님께는 시작이 없다. 모든 것이 시작되었을 때, 하느님은 이미 살아 계셨으며 홀로가 아니었다. 요한이 당신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한 아들이 있었다. 이 아들을 통해서 하느님은 완전히 드러나며, 이 외아들은 당신 아버지와 하나이시며, 이 아들은 하느님이시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아들의 영원한 탄생의 신비이다. 예수는 당신 아버지의 생명으로 사시는 분이며, 죄와 죽음의 어두움을 비추기 위하여 오늘 이 세상에 탄생하신 것이다. 이 신비는 두 번째 단계에서 명백해진다.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다.” 우리 가운데 오신 말씀은 사람으로 말구유에 태어나셨다. 하느님 아들은 당신의 생명을 인간들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인간적 생활을 시작하신다. 인간들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살기 시작할 수 있도록 예수는 인간이 되셨다. 따라서 예수 성탄은 새로운 창조의 시작인 것이다.




그런데 이 새 창조를 하느님께서는 시초부터 원하셨다.


인간이 그의 죄로 말미암아 생명을 잃었다면 하느님은 생명의 원천으로서 그 생명을 다시 주시기를 원하셨다. 이것이 구원 역사의 시작으로서 요한 복음서 서두의 세 번째 단계의 구약과 신약인 것이다.




구약의 계약에서 법이 주어졌고, 이 법은 인간들에게 길을 제시해 주었다. 그러나 이 법은 무력하였고, 인간들을 속박하였다. 신약의 계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들에게 은총과 진리를 주셨다. 은총이란 당신 아버지로부터 받은 생명이며, 진리는 당신 아버지로부터 받은 인식인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인간들에게 전달하면서, 예수는 당신이 사랑한 것처럼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고, 영원한 기쁨을 주는 아버지와 완전히 일치할 수 있도록 인간들을 인도하신다.




새로운 창조와 새로운 계약이 성탄날 예수가 사람이 되심으로써 시작된다. 역사가 끝날 때 당신 아버지의 영광 속에 다시 오실 때 완성될 것이다. 이 두 내림 사이는 새 탄생의 시기와 예수가 주신 은총을 받아들이는 신앙의 시기가 놓여 있다.




이 새로운 탄생이 요한 복음서의 서두에서 핵심을 이루고 있다. 예수는 빛으로 태어났고, 우리 모두가 빛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예수는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이며, 하느님의 외아들로서 당신 아버지의 영광을 우리에게 드러내신 분이다.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영원한 생명을 받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이 표시가 바로 새로 태어난 아기 예수이며, 당신 아버지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도록 우리를 초대하신다.


그의 일생을 통하여 이 사명을 수행할 것이며, 그 사랑을 위해서 희생하실 것이다.


우리에게 공자로 주어진 이 영원한 생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는가? 어린 아이의 절대적인 신뢰심을 가지고 받아야 한다. 이와 같은 신뢰심이 바로 우리의 신앙의 상징이다. 당신 아버지께 대한 하느님 아들의 영원한 사랑의 선물을 받아야 한다.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성탄의 신비는 우리에게 희망의 원천과 은혜의 충만함을 드러낸다. 한편 예수가 태어나신 밤은 구원 역사의 시작에 지나지 않지만 히브리서에 계시된 대로 중요한 계기인 것이다. 우리의 희망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구원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희망의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한편 영원한 생명의 완성이 새로 태어난 이 아기 예수를 통해서 드러난다.


우리가 지금부터 하느님의 자녀로서 영원한 생명을 원한다면 신앙으로써 예수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사야 예언자는 기쁜 마음으로 이 날을 축하하도록 권고한다. 예수 성탄의 신비를 깨닫고 희망의 생활을 하자. 기쁜 마음으로 성체를 영하면서 우리는 이미 영원한 생명을 약속 받았고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굳게 믿자. 그리고 그의 진리와 은총을 우리 형제 자매들에게 전파하자.






 








37.                예수 성탄 대축일 <루가 2,1-14> 성탄은 왜 기쁜가?




        성탄절에 생각나는 사람


 


성탄절만 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딸 다섯을 낳고, 아들을 고대하며 또 배불뚝이 아줌마가 되어 있던 체칠리아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녀는 3대 독자 집에 시집와서 내리 딸만 다섯을 낳았던 것이다. 아무리 딸을 많이 나으면 무슨 소용인가? 시어머니는 아들을 못 낳으면, 씨받이라도 들여서 대를 이어야 한다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다.




체칠리아야말로 시편의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파수꾼이 새벽을 그리워하듯” 그렇게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방문했을 때 이미 그녀는 만삭의 몸이었다. 그녀는 나를 잡고 울면서 “신부님, 아들 낳게 기도 좀 해주세요”라고 애걸하였다. 1970년대엔 아직 우리나라에 소위 양수검사라는 것이 보편화되지 않았던가 보다. 그때까지도 태중의 아기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러마고 대답하몄다. 그리고 그녀를 잡고 애절한 기도를 드렸다. 나의 기도는 간절하였다, “주님,  이 여인에게 아들을 하나 주십시오, 그리하여 지금껏 천대받던 생활을 청산하게 하여 주십시오!” 진실한 기도였다.


 


어느 날 새벽에 전화벨이 울렸다. 새벽에 전화가 오면 틀림없이 병자성사를 요청하는 것이든지, 아니면 누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날도 나는 좋진 않은 소식인가 싶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여보세요!”하자마자, “신부님, 저 아들 낳았어요”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체칠리아의 전화였다. 체칠리아는 울고 있었다, 아들이라는 의사의 말에 수년에 걸친 핍박과 수모가 다 사라졌던가 보다. 나는 축하한다고 말했다,




가슴에 맺혔던 한이 다 풀어지는 듯 그녀는 한없이 울고 또 울었다. 새 생명의 탄생이 모든 이에게 체칠리아처럼 그렇게 기쁘고 행복할까?


예수님의 탄생일을 맞아 과연 체칠리아처럼 그렇게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뻐할 수 있을까?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기였나를 생각해 보게 된다.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의 기쁨




예수님이 탄생하셨다. 원조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인간 모두가 그리도 그리워하고 기다리던 메시아가 탄생하셨다. 창세기 3장15절, 즉 인간에게 구세주를 보내주시겠다던 하느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날이다.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천대받고 버림받은 존재가 아니다, 소박데기라 불리지 않게 되었다. 이제 인간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임으로 부르게되었다.


 


예수님께서 왕궁의 황금빛 침대에서 탄생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 같은 사람이 과연 그분의 성탄을 기뻐할 수 있었을까? 나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흠숭하며 따르기에 너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나 먼, 너무나 높은 분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가난한 모습으로 비천하게 탄생하셨다.




이 세상의 어느 누가 마구간에서 탄생하는가? 그분의 탄생이 가난하셨기에, 가난하고 비천한 인간들의 친구가 되실 수 있으셨다. 그분의 족보를 보면, 그 누구의 것보다도 시원치 않다. 그분의 조상 중에는 창녀도 있고, 이방인도 있다. 더군다나 간통한 여인까지 있다.


예수님은 왜 이런 가문을 택하여 이 세상에 탄생하셨을까? 만일, 그분이 고상한 가문의 후손으로 오셨다면, 혹은 귀족이나 왕족의 후손으로 오셨다면, 많은 고상하지 못한 가문의 사람들은,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는데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어느 한 부류의 사람들만을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고 인류 전체,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위하여 오셨음이 그분의 가계에서도 드러난다.




        오늘 복음의 메시지




예수님은 이미 오셨다. 오늘은 그분의 오심을 축하하는 날이다, 그분은 인간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시려고 오셨다. 예수님은 악마를 내쫓기 위하여 애쓰고, 나병이나 반신불수 병을 없애시려고 노력하셨다. 그뿐아니라 죽은 자의 시체에 혼을 불어넣으시어 살리시는 기적도 행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가난이나 병고를 없애시려고만 오신 것이 아니다. 지금도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렇다면 그분은 왜, 이 세상에 오신 것일까?




그분은 인생의 해답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 그 해답이란 구원이다, 영원한 생명이다. 때로 우리는 예수님께 이 세상의 모든 고난들을 해결해달라고 애걸한다. 현세의 복을 갈구한다.


그러나 그분은 대답치 않으신다. 그래서 소원성취를 해준다는 신흥종교로 많은 신자들이 고개를 기웃거리고 있다, 예수님은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오셨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분은 영원한 평화, 영원한 안식, 영원한 생명, 영원한 복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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