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의 모친 성마리아 대축일(1월 1일 : 성탄 후 제 8 일)

 

천주의 모친 성마리아 대축일(1월 1일 : 성탄 후 제 8 일)


때가 찼을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셨다.


제 1 독서 : 민수 6,22-27


제 2 독서 : 갈라 4,4-7


복 음 : 루가 2,16-21




해설


오늘의 전례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종교적 메시지를 완전히 알아듣기 위해서는 이 축일에 충만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세 가지 요인을 생각해야 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 첫째는 이 축일이 주님의 탄생의 신비를 더욱 고양시키는 내면적 요소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의 성탄으로부터 공현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전례의 중심은 바로 주님이시다. 하지만 ‘아들’을 기억할 때는 그 ‘어머니’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지 않는가! 두 번째 요인은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이 축일이 새해의 시작과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현존은 마치 새해와 더불어 시작될 기쁘거나 슬픈 미지의 모든 사건에 대한 축복과 기원의 미소와도 같이 우리의 새로운 모든 날에 함께 펼쳐지게 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끝으로 세번째 요인은 바오로 6세께서 1968년 바로 이날에 제의하시어 1978년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추인하신 ‘세계 평화의 날’이 거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 평화의 날’은 신자이건 비신자이건 모든 사람이 최고선의 증진에 이바지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최고선에 대한 촉구가 없이는 현대인이 열렬하게 추구하는 것들이 모두 달성될 경우 인류를 보다 큰 파멸에로 이끌어 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흥미로운 사실은 마리아가 ‘평화’와 관계가 깊다는 것 뿐만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분’의 최고의 선물로서의 그 ‘평화’가 바로 그녀의 태중에서 꽃봉오리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의 평화’이시며 유다인들과 이방인들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 상호간에 또한 인간들과 하느님과의 사이를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신”(에페 2,14)그리스도께서 바로 그녀를 통해 오셨다. 그러므로 제 1 독서에서 최고 사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천상의 복을 내려주시기를 간청했던 축복의 기원 내용-“야훼께서 너희를 고이 보시어 평화를 주시기를 빈다”(26절)-을 이해한다면, 평화가 마리아를 통해서도 온다고 하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요인에 비추어 볼 때 마리아의 신적 모상을 기념하는 오늘 축제의 의미는 참으로 보편적 차원에서 더 깊이 더 밝게 드러난다.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인류의 역사 한가운데 들어오시어 우리의 영신적 성장뿐만 아니라 단순한 인간적 성장의 여정까지도 이끌어주신다.


오늘의 제 2 독서와 복음의 내용은 이런 내용을 특히 웅변적으로 전해준다.




우리를 감싸주시는 마리아의 ‘모성’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의한 제 2 독서의 내용부터 살펴보자. 거기서 성바울로는 그리스도의 육화를 통해 이 세상에 일어나게 된 놀랍고도 새로운 사실을 간결하게 서술하고 있다(제 2 독서 참조). 무엇보다도 먼저 ‘때가 찼다’는 표현을 주목해 보자. 그 표현은 메시아의 때-수세기 동안의 오랜 기다림을 통해 마침내 충만하게 되는-가 성취됨을 지적하기 위해 쓰는 특별한 표현양식이다(마르1,15; 사도 1,7; 1고린 10,11; 히브1,2등 참조).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서언에서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가 되게 할”하느님의 계획이 “때가 차면”(에페 1,10)실현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육화와 더불어 ‘때’-연대기적 의미에서보다는 구원의 역사적 의미에서-가 충만하게 된다. 즉 그리스도를 통해 전체적이며 결정적인 구원이 모든 인간에게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 ‘때’는 하느님의 행위를 역사 안에서 명백히 드러내는 표지가 됨으로써 역사를 하느님의 마지막 ‘왕국’의 상징적 예표가 되게 한다. 그 ‘때’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신적 존재의 ‘충만함’으로써 채워주셨기 때문에 가득차게 된다(골로 2,9; 1,19참조). 그러므로 때가 ‘차서’ 한 인물이 자유롭게 온다고 한다. 사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당신이 원하실 때 그리고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에게 주시는 티없는 선물이다.


하여간, 이와 같이 ‘때가 차고’ 그 ‘때’가 새로운 의미로 가득차게 됨에 있어서 그리스도 옆에는 마리아도 계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녀를 통해 우리에게 오시기 때문이다:“때가 찼을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시고 율법의 지배를 받게 하셨다.” 이것은 바울로 사도가 구세주의 모친에 대해 유일하게 언급한 대목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바울로 사도가 마리아께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지 않다고는 하지만 무관심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즉 바울로 사도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만 연관시켰을 뿐 마리아는 전혀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사실, 바울로 사도가 유일하게 이 대목에서만 마리아께 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대목은 우연히 성립된 것도 아니며 신학적으로 내용이 빈약한 것도 아니다. 바울로 사도는 예수께서 인간들을 율법의 종살이에서뿐만 아니라 특히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갈라놓는 죄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실 목적으로 참으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여자의 몸에서 나셨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를 통해 우리의 역사 속에 들어오시어 우리의 구원을 실현시키실 수 있었다. 이렇게 볼 때 마리아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고리 역할을 하신 것이다.


다른 한편, 마태오(1,1-17)와 루가(3,23-38)에 의한 예수의 족보에 관한 내용에서 쉽게 볼 수 있듯이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자식의 법적 합법성을 보증해주는 것은 아버지인데 어째서 여기서는 어머니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고 아버지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는가? 이것이 사도 바울로도 마리아의 ‘동정녀로서의 모성’에 대한 복음적 전승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명백한 흔적이 아닐까? 예수를 성령의 도우심으로 잉태하신 사실은 오로지 그의 모친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여자의 몸에서 나셨다”고 하는 것이다.


사실이 이와 같다면 사도 바울로가 여기서 ‘여자’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다고 하는 사실은 아마도 메시아가 나게 될 창세 3,15(“나는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의 그 신비스러운 ‘여자’를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예수께서도 십자가상의 죽음의 순간에(요한 19,26; 2,4 참조) 당신의 모친을 단순히 ‘여인’이라고 부르신다. 말하자면 그의 모친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실현시키시기 위해 사용하시며 또한 당신 구원사업에 결합시키시는 관념상의 ‘여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것들이 사도 바울로의 근본적 사고의 방향이라고 한다면, 그가 마리아에게 대해 말하고 있는 내용은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더 나아가 바울로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롤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친자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문맥에서 이와 같은 내용을 더 확실히 말해주고 있다:“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상속자인 것입니다”(갈라 4,7). 그리스도께서 오로지 마리아를 통해 우리의 ‘형제’가 되시고 더 나아가 바울로 사도가 다른 곳에서 지칭하듯이 “많은 형제 중 맏아들”(로마 8,29)이 되셨다고 한다면 그분의 신적 ‘모성’ 가운데 우리에게 미치지 않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점에 관해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복되신 동정녀는 하느님의 모친이라는 은혜와 역할로써 아드님 구세주와 결합되신 그만큼 당신의 특수한 은총과 임무로써 교회와도 밀접히 결합되어 계시다. 성암브로시오의 말씀대로(Expositio in Lucam, 11,7 : P.L. 15,1555)신앙과 사랑과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일치에 있어서 천주의 모친은 교회의 전형이다. 교회 자체도 당연히 어머니라, 또는 동정녀라 불리느니만큼 교회의 신비 안에서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탁월하고 독자적인 어머니와 동정녀로서의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뛰어난 위치를 차지한다…”(교회 63항)




‘구원’과 ‘평화’는 마리아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온다




마리아의 신적 모성에 대한 고양은 예수께서 탄생하신 외양간을 목자들이 방문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오늘의 짧은 복음에서 더욱 강조되고 있다(오늘 복음 참조).


보다시피, 마리아가 자신의 어머니로서의 모습을 통해 장면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즉 그녀는 그 장면을 열고 닫고 있으며, 또한 다른 사람들이 방금 알게 된 그 신비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고 그 모든 사실을 마음속 깊이 새겨두고 있다:“마리아와 요셉이 있었고 과연 그 아기는 구유에 누워 있었다…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였다…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준 대로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마지막 말은 앞서 복음사가가 우리에게 전해준 천사의 예고를 상기시켜준다:“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루가 1,31).


그러므로 루가복음에 의하면, 천사가 알려준 이름을 아들에게 지어준 사람은 마리아 자신이다. 그 이름, 즉 “주님은 구원이시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예수’(여호수아)라는 그 이름은 그가 맡게 될 사명의 전체적 의미를 예고해준다. 그래서 계속되는 복음의 내용은 어떠한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며, 어떻게 예수께서 당신의 생명을 희생하시기까지 그 구원을 실현시키는가를 말해준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우리가 해석하고 있는 복음의 내용, 즉 그 당시의 사회에서 비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로 취급되었던 목자들에게 특별한 사랑의 배려가 주어지고 있는 사실을 통해 그 구원사업의 내용을 예견케 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를 똑똑한 사람들이나 권세 있는 자들에게보다는 목자들과 같이 비천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계시하신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구원의 필요성을 더 느끼기 때문이다.


그 결과 ‘구원’은 모든 영역에서 모든 사람을 한 형제로 친교를 맺어주기 시작한다.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 사람들 가운데 처음 나타내 보이시는 순간부터 그들에게 사랑의 선물로서 주시는 것이다. 천사들이 베들레헴의 외양간 위에서 노래하기 시작했던 ‘평화’는 분명 이러한 선상에서 이루어진다.:“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가 2,14)그렇지만 그 평화는 하느님과의 관계하에서 인식되어지는 척도에 따라서만 실현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천사들은 보다 먼저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그러므로 마리아가 스스로 자유롭게 받아들여(루가 1,38참조) 목자들로 상징되고 있는 인간들에게 제공하신 자신의 신적 모성의 신비로써 우리의 ‘구원’과 ‘평화’에 이바지하신 것은 분명하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선물이 되지 못하는 ‘모성’은 없다. 만일 이와 같은 사실이 마리아를 통해 숭고하고도 상징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면 모든 여인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참된 사실일 것이다. 모성은 결코 개인적인 것일 수 없다. 이 때문에 낙태법이 실시되고 있는 이탈리아와 그 외 다른 나라에서처럼 태아를 살해하도록 합법화하거나 허락하는 행위는 근본적으로 평화를 파괴하는 전쟁의 행위와 다를 바가 없다. 어머니와 자녀, 더 나아가 아직 태어나지 않아서 더욱 보호가 필요한 자녀와의 사이에 평화가 없다면 과연 어디에 평화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바오로 6세께서는 1977년 ‘세계 평화의 날’의 주제로서 다음과 같은 아주 적절한 주제를 택하셨다:“당신이 진정 평화를 원한다면 생명을 보호하라. 생명은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누구에 의해서든지 또한 전쟁, 테러, 무죄하고 아무런 힘도 없는 태아에 대한 어머니나 의사들의 폭력 등 어떠한 방법에 의해서도 침해되지 않도록 항상 보호되어야 한다. 생명을 거스르는 모든 범죄는 평화를 침해하는 행위이다. 특히 낙태로써 태어나려는 생명을 없애는 것처럼 오늘날 무섭게 또 때로는 합법적으로 국민 대중의 습성을 부식시키는 행위는 더욱 그렇다…인간 생명은 잉태되는 순간부터 그 타고난 생을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신성한 것이다. ‘신성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곧 생명이 어떤 억압도 받지 않도록 되어 있으며,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모든 존경과 배려와 정당한 희생을 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1976. 12. 8.바오로 6세의 메시지).


마리아의 신적 모성은 우리로 하여금 그녀가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이 세상에 이루신 생명과 구원과 평화의 선물에 대해서 묵상하고 깊이 사색하도록 할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육화의 순간부터 그분의 생명과 밀접히 결합되어 변모된 모든 생명의 품위를 깨닫도록 촉구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지향으로 오늘의 본기도를 통해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잉태로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인류에게 베풀어주신 천주여, 성모 마리아를 통하여 우리가 생명의 근원이신 당신 성자를 맞아들이게 되었사오니, 우리로 하여금 성모 마리아는 또한 우리의 전구자이심을 항상 깨닫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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