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부활 대축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과월절 양으로서 희생되셨다.
제 1 독서 : 사도 10,34a. 37-43
제 2 독서 : 1고린 5,6b-8(혹 골로 3,1-4)
복 음 : 요한 20,1-9
해설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매주일 의례적으로 하시는 삼종기도 때에 신자들에게 이미 다가온 부활 축일을 준비하라고 권고하시면서 다름고 같이 말씀하셨다 :“예수 부활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건입니다. 우리는 매년 부활 축일을 거행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에 깊이 참여하게 됩니다. 그 신비의 빛은 온 인류 위에 비치고 있으며 또한 온 인류의 미지의 운명을 꿰뚫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알든 모르든, 원하든 원치 않든 각자에게 개별적으로 반영되고 있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확히 기념되고 있는 그 신비는 적어도 이 지상의 철학에는 어떤 척도가 되고 있으며 또한 믿는 우리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인간 역사에 관한 신학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1977. 3. 20).
참으로 예수 부활은 잘 음미해 보면 인생의 모든 의미와 인간의 역사적 갈망을 함축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즉 목적지는 멀지만 죽음을 영원히 쳐이기고 또한 악과 불의까지도 하느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통해 해방시킬 그 감추어진 힘을 이미 펴나가고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죽음과 죽음으로 이끄는 죄에 대한 이와 같은 근본적 승리를 달성한 ‘첫 사람’(1고린 15,20-23참조)이시다. 다시 말해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심으로써 사람들이 그분을 ‘죄인’으로 처형한 반면(요한 18,30 참조). 그분을 무죄하고 거룩한 이로 선포하심으로 온 세상이 그분을 믿게 하셨다(1 디모 3,16참조).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압박받는 이들, 고통받는 이들, 무지한 이들, 박해받는 이들, 인간성 전체를 멸시당하거나 침해받는 이들을 일으켜세워주는 정의와 선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을 적극적으로 성취시켜 준다. 하느님은 결코 인간의 희망을 좌절시키시지 않으신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예수 부활은 신앙을 갖지 않은 이들에게 있어서도 적어도 그들 마음의 원의와 이상을 대신할 수 있다. 즉 바오로 6세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 지상의 철학에 어떤 척도를 부여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분명 인간 역사에 관한 신학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여러분은 낡은 누룩을 깨끗이 없애버리고…”
그러므로 이제 성대한 부활 전례의 독서에 담겨 있는 몇몇 놀라운 신학 경향을 파악해 보고자 한다. 오늘 독서는 선택의 여지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골로 3,1-4 대신에 1고린 5,6b-8을 제 2 독서로 택했는데, 그 이유는 후자가 전자보다 우리리가 의도하는 방향에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로는 우리가 택한 제 2 독성의 지극히 짧은 내용을 통해 그리스도교 빠스카 축제를 유다인들의 빠스카 축제의 요소들을 중심으로 이해하면서 그 의미를 자기의 섬세하고도 간결한 일상적 문체로써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는 바로 앞의 문맥에서 고린토의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체 안에 낡은 ‘누룩’과 같은 형태로 극단적인 도덕 완화주의를 확산시킬 위험을 갖고 있었던 근친상간과 같은 경우를 단죄하거나 배제하지 않고 관대히 처림함을 비난하였다. 여기서 사도 바울로가 그들에게 하는 권고의 내용을 들어보자 :“ 여러분은 낡은 누룩을 깨끗이 없애버리고 다시 순수한 반죽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과월절 양으로서 희생되셨으므로 이제 여러분은 누룩없는 반죽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악과 음행이라는 묵은 누룩을 가지고 과월절을 지내지 말고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없는 빵을 가지고 과월절을 지냅시다”(1고린 5,7-8).
빠스카(과월절) 축제에 관해 언급되고 있는 것은 그 편지가 거의 확실히 빠스카 축제가 임박한 때(56년이나 57년 봄쯤)에 씌여졌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빠스카 축제 기간 동안 히브리인들은 에집트의 노예생활로부터의 탈출 기념으로 누룩없는 빵만을 먹어야 했다 :“너희는 칠일간 누룩없는 빵을 먹어야 한다. 아예 첫날에 집안에서 누룩을 말끔히 치워버려야 한다. 첫날부터 이렛날까지 누룩 든 빵을 먹는 자는 누구든지 이스라엘에서 제명된다”(출애 12,15).
사도 바울로는 이러한 전례 관습을 윤리 중심으로 해석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생활과 생각과 감정 속에 들어 있는 모든 묵은 것을 제거해버리고 내적으로 새로워지라고 권고한다 :“여러분은 낡은 누룩을 깨끗이 없애버리고 다시 순수한 반죽이 되어야 합니다”(7절).
보다시피, 누룩은 여기서 항상 정신의 부패와 타락의 원인이 되고 있는 악을 상징하고 있다. 그 반면에 누룩없는 빵은 마음의 ‘순결과 진실’(8절), 봄과 같은 인생의 새로움 등을 상징한다. 빠스카가 봄의 축제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로적 윤리의 전형적인 예를 본다 :‘순수하게 되라!’ 너희가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새롭게 변화시키신 그 순간부터 순수함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항상 ‘새 생명’(로마 6,4)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과월절 양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새롭게 변모시키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과월절 양으로서 희생되셨다”(7절). 이 강한 표현으로써 사도 바울로는 예수께서 에집트의 종살이로부터의 해방,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맺으시는 사랑의 새 계약, 약속된 땅에로의 이주 등등 히브리인들의 옛 빠스카에 담긴 모든 신학적 의미를 당신 자신 안에 함축적으로 요약하신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더 나아가 당신 스스로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을 위한 새로운 빠스카가 되심으로써 옛 빠스카를 대신하시며 또한 능가하신다.
이와 같은 일은 예수께서 ‘귀한 피로’ 우리를 구원하신 ‘흠도 티도 없는’(1베드 1,19)어린양이 되시는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일어난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볼 때, 히브리인들의 축제의 절정과 핵심을 이루는 행위였던 과월절 어린양을 희생제물로 바치고 서로 나누어 먹음음(출애 12,1-14참조)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는 보다 위대한 어떤 실재를 알려주고자 했던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요한은 예수께서 히브리인들이 과월절 어린양을 희생제물로 바치려 했던 바로 그때 돌아가신다고 전한다(요한 19,31).
사도 바울로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과월절 양’(7절)이라고 말함으로써 장엄한 빠스카 축제가 어떤 형식주의ㄹ로 전락하지 않도록 하고자 한다. 즉 우리가 과월절 양을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동일시하면서도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 자체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 축제를 합당하게 거행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고 본다. 이에 관해 그는 로마 6,4-7에서 세례를 빠스카 신비에 참여하는 성사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가르쳐주고 있다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예전의 우리는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서 죄에 물든 육체는 죽어버리고 이제는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은 죄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성아타나시오도 자기의 빠스카 기념 서간에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주님의 축제를 말로써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으로 지내라고 권고하였다(Epist. 14,2 : PG. 26,1420 참조).
“두 사람이 같이 달음질쳐 갔지만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갔다”
분명, 빠스카의 쇄신과 변모의 힘을 자신에게 철저히 동화시키기 위해서는 결코 쉽지 않은 신앙의 길을 달려가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요한복음(20,1-9)이 우리에게 던져주고자 하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복음은 서로 혼합되어 있는 부활에 관한 두 개의 에피소드를 전해주고 있다.
첫 번째 장면에서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이른 아침 무덤에 갔다가 목격한 사실을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에게 알리러 즉시 예루살렘으로 가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누군가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갔습니다. 어디에다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2절).
두 번째 에피소드는 두 사도가 일어난 일을 확인하러 무덤으로 가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두 사람이 같이 달음질쳐 갔지만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 먼저 무덤에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수의가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으나 안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곧 뒤따라 온 시몬 베드로가 무덤 안에 들어가 그도 역시 수의가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는데 예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수의와 함께 흩어져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잘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 그들은 그때까지도 예수께서 죽었다가 반드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성서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4-9절).
이 두 에피소드를 통해 고찰해야 할 첫째 내용은 모두가 다같이 주님의 부활을 믿기 어려워한다는 사실이다. 즉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무덤을 막았던 돌이 이미 치워진 것을”(1절)알아채자마자 즉시 누군가가 주님의 시신을 도둑질해갔다고 생각했고, 그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간 두 사도들도 같은 염려를 한다. 아무도 그리스도께서 반복해서 예고하신 대로 죽은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또한 잠시 후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무덤 앞에서 울고 있을 때 나타나신 예수를 보았지만 그를 동산지기인 줄 알고 그에게 다음과 같이 요청한다 :“여보셔요, 당신이 그분을 옮겨갔거든 어디에다 모셨는지 알려주세요. 내가 모셔가겠습니다”(15절).
이 모든 내용은 ㅇ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이 예수께 대해 가졌던 크나큰 애착심을 말해주고 있다. 즉 그들은 예수께 대한 기억을 어떻게 해서든 되사리고자 한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서 죽으시어 무덤에 묻히심으로써 모든 것이 끝났다고 확신한다.
고찰해야 할 두 번째 내용은 요한 복음사가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2절)라고 완곡한 표현을 쓰고 있는 그 익명의 제자에 관해 갖는 관심이다. 그 제자는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 먼저 무덤에 다다랐으나 들어가지 않다가 나중에야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8절). 그러므로 그는 무덤에 들어가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확인한 일을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일에 있어서 베드로를 앞서고 있다. 이와같은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라고 거의 명백히 추정되는 요한과 베드로 사잉에 있을 법한 일종의 경쟁심같은 것을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좀더 단순하게 생각해 보면, 요한이 바로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바로 그 제자였기 때문에(요한 13,23참조) ‘사랑의 투시력’(D. Mollat)을 통해 베드로보다 앞서고 있다는 사실을 비유적으로 묘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 베드로는 신앙의 조건들을 입증해주고 있다. 비록 무덤에 늦게 도착했지만 먼저 무덤에 들어가 수의와 함께 수건이 흩어져 있지 않은 것을 보고 예수의 시신이 도둑맞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햇다. 이때에 다른 제자도 무덤에 ‘들어가서 보고 믿는다’(8절).
베드로와 요한은 이렇게 해서 다같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첫 증인들이 된다. 그들은 신앙의 길을 달려가는 데 있어서 서로 도와주고 있다. 즉 베드로는 보다 밝은 지력을 지니고 있었고, 요한은 보다 열렬한 사랑을 지니고 있엇다. 바로 이 두가지 요소 즉 직관하는 능력과 사랑하는 능력의 종합을 통해 완전한 그리시도교 신자가 된다.
이와 같은 지성과 사랑의 종합은 특히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받아들이는데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가 이 세상 전체를 위한 부활의 효소가 되기 위해서는 기쁨과 안도감만을 주는 단조로운 신앙고백에 그치지 말고 빠스카 사건의 ‘생명을 주는’(1고린 15,45)힘에 의해 우리 자신을 변모케 함으로써 본질적으로 그 신비에 참여해야 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