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 2 주일
토마가 대답했다 :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제 1 독서 : 사도 5,12-16
제 2 독서 : 묵시 1,9-13. 17-19
복 음 : 요한 20,19-31
해설
사도행전에 의한 오늘의 제 1 독서(5,12-16) 내용이 빠스카 축제후의 전례 분위기에 별로 잘 맞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사실상, 다른 두 개의 독서(제 2 독서와 복음)를 통해 젖어 들 수 있는 빠스카적 분위기를 되살릴 만한 내용이 제 1 독서에는 전혀 없는 것같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여기에도 빠스카적 차원의 내용이 분명히 나타나고 잇다 사실 루가는 죽으시고 부호라하신 그리스도께서 마련해주신(사도 2,33참조) 성령의 활동이 현존해 있는 초기 예루살렘 공동체의 구체적 생활을 알려주고자 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해 신자들 가운데 활동하심으로써 그들을 한 덩어리로 결속시키시어 더욱더 확장케 하시며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분되는 공동체를 이루게 하신다. :“모든 신도는 한 덩어리가 되어 솔로몬 행각에 모여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신도들의 모임에 끼어들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하였다. 그러면서도 백성들은 그들을 칭찬하였으며 주를 믿는 남녀의 수효는 날로 늘어났다. 사람들은 심지어 병자들을 길거리에 메고 나가 들것이나 요에 눕혀 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 행여나 그 그림자만이라도 그 몇 사람에게 스쳐갔으면 하였다”(사도 5,12-15).
그러므로 사도들 특히 베드로를 머리로 하는 그 공동체 안에 작용하는 것은 부활의 능력이다. 그들의 ‘활동’으로 일어나는 ‘많은 기적들과 놀라운 일들’(12절)은 예수께서 그들 안에 활동하시며 그들에게 약속하신 바를 이루신다는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일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이제 아버지께서 가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주겠기 때문이다”(요한 14,12-13). 베드로의 그림자까지도 치유의 능력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당신 현존의 모습을 바꾸시어 활동하고 계시는 교회 공동체는 ‘새 생명’의 실체를 온 세상에 증거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 부활한 사람들이 오늘날도 형제들에게 전하라고 부르심을 받고 있는 가장 위대한 ‘기적’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부활로써 영원한 ‘주님’이 되셨다(사도 2,36참조). 그러나 그분의 ‘통치’는 그분께서 당신 제자들로 하여금 성부의 영광 안에 새로이 거하시는 당신 현존의 모습에 대한 ‘징표’를 행하게 하시는 능력을 통해서만 감지될 수 있고 또한 이루어질 수 있다.
“나는 죽었지만 이렇게 살아 있고 영원무궁토록 살 것이다…”
묵시록의 장엄한 서장의 일부만을 전해주고 있는 오늘 제 2 독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당신 교회를 통치하심에 관한 주제를 보다 더 예리하게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그분의 교회는 인자가 서 계신 ‘일곱 개의 황금 등경’으로 상징되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의해 상징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나는 주님의 날에 성령의 감동을 받고 내 뒤에서 울려오는 나팔소리같은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음성은 나에게 ‘네가 보는 것을 책으로 기록하여 일곱 교회에 보내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누가 나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알아보려고 돌아섰습니다. 돌아서서 보았더니 황금등경이 일곱 개 있었고 그 일곱 등경 가운데서 사람같이 생긴 분이 서 계셨습니다. 그분은 발끝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띠고 계셨습니다”(묵시 1,10-13).
이 매혹적인 천상광경은 우리가 그 메시지의 총체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몇가지 특징적인 요소들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들 수 있는 것은 그 광경이 ‘주님의 날’(10절) 즉 주일에 일어난다는 점이다. 그 다음으로는, 이미 다니엘(7,13-14)이 묘사하고 있는 ‘인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그리스도께서 사제권(발끝까지 내려오는 긴 옷 : 출애 28,4 ; 즈가 3,4 참조)과 왕권(금띠 : 1마카 10,89 ; 11,58 참조)의 징표를 동시에 갖고 계시다는 점이다. 황금등경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거행되었던 찬란한 전례행위를 상기시켜준다.
그러므로 이 모든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오늘날 학자들이 묵시록의 전체 구조를 통해 널리 인식하고 있듯이 열정적인 전례행위의 장면을 되살려 주고 있는 듯하다. 이와 같은 사실은 믿는 이들의 공동체가 어떤 전례를 겅행하든지간에-성체성사를 비롯한 다른 모든 성사와 주님을 찬미하는 노래에 이르기까지-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통치’가 그 안에서 특권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우리의 구원사업’이 모두 전례행위를 통해 항상 새롭게 성취되기 때문이다. 성취되거나 또는 새롭게 이루어지는 ‘구속사업’은 그리스도의 ‘통치’의 확장을 의미하며, 또한 예수께서 죽으신 지 사흘 만에 육신을 되찾으신 후 당신을 믿는 이들 개개인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어주심을 의미한다.
이에 관해 우리는 다음에 이어지는 광경에서 더 명백히 표현되고 있음을 본다 :“나는 그분을 뵙자마자 마치 죽은 사람처럼 그분의 발앞에 쓰러졌습니다. 그분은 나에게 오른손을 얹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처음과 마지막이고 살아 있는 존재이다. 나는 죽었지만 이렇게 살아 있고 영원무궁토록 살 것이다. 그리고 죽음과 지옥의 열쇠를 내 손에 쥐고 있다. 그러므로 너는 네가 이미 본 것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기록하여라’”(17-19절).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셨기 때문에 ‘영원무궁토록 사시며 죽음의 열쇠를 손에 쥐고 계시다’(18절). 그분은 ‘살아 있는 존재’로서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들의 운명을 손에 쥐고 계시다. 부활이 그분에게 모든 만물에 대한 지배권을 부여했다 : 그분은 ‘처음과 마지막이시다.’ 그래서 모든 만물은 그분과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교회는 요한과 다른 사도들의 전교사명을 이어받아 실행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그분을 증거하는 예언자적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너는 네가 이미 본 것과…기록하여라”(19절).
부활한 자들이 없이 어떻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지 않고서 어떻게 그분을 ‘주님’이라고 선포할 수 있는가?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이제, 그리스도의 ‘통치’에 관한 이와 같은 관점을 실제적으로 요한 복음을 끝맺어주고 있는 오늘 복음(20,19-31)의 밀도있는 내용을 통해 더 명백히 밝혀보자.
오늘 복음은 뚜렷이 구분되는 두 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 첫째 장면은 ‘전교사명’에 관한 것으로서 성령의 선물을 통해 사도들에게 ‘죄를 사할’권한이 부여되는 장면이고(19-23절) ; 둘째 장면은 마침내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감격에 찬 신앙고백을 하게 되는 토마가 처음에 가졌던 불신앙에 집중되고 있다(24-29절).
30-31절은 제 4 복음의 결론을 담고 있다. 즉 요한이 복음을 쓰면서 달성하고자 한 목적을 밝혀주고 있다.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그러므로 요한 복음사가가 볼 때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사건은 만일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으나 현재에도 영우너히 사시는 분-토마가 자기 손으로 만져 보고 자기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수난의 상처를 간직한 채로-이라는 사실을 참으로 믿는다면 그들도 참여하게 될 그 ‘생명’을 통해 계속되는 사건이다.
모든 대목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한 표징과 증거로 충만해 있다. 잠시 후에 보게 될 토마의 신앙고백을 따로 떼어놓고 보면 이와같은 관점을 내세우는 적절한 형태의 표현을 대하게 된다. 예를 들어, 사도들은 기쁨에 차서 그 자리에 없었던 토마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25절). 복음사가는,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너무 기뻐서 어쩔줄을 몰랐다”(20절)고 자신의 입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잠겨 있는 문으로 들어가시고 또한 나가심으로써 당신께서 시공의 자연적 이치를 초월해 계심을 확인시키신다. 즉 예수께서는 이미 새로운 창조적 세계에서 활동하고 계시다!
그리스도의 이 새롭고도 이미 실시되고 있는 ‘통치’에 대한 특별한 증거들이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평화’, 그들에게 맡기시는 ‘전교사명’, 그리고 죄를 파괴하는 성령의 선물 등이다.
여기서 세 번씩이나(19. 21. 26절)나오는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는 표현은 통속적인 인사형식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예수께서 고별사를 통해 제자들에게 하신 약속의 이행이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요한 14,27). 그러므로 그 평화는 자기 자신과 타인의 두려움에서, 그리고 생명과 죽음의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을 말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은 매순간 생명에 동반되는 온갖 불안에 대한 절대적 보증이 된다.
그 다음 증거는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맡기시는 ‘전교사명’이다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21절). 여기서 보다 놀라움을 주는 사실은 예수께서 당신 사도들을 파견하신다는 사실에서 보다는 오히려 전교사명의 계속적인 ‘일치성’을 확언하심에 있다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이것은 사도들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하느님의 구원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기를 계속할 것이며 또한 구원의 행위들을 채워나갈 것임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전교사명’은 계속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이 모든 점은 교회 안에서 활동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없이 교회 안에 하느님의 말씀의 선포와 구원에 대한 권한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 다음 증거는 성령의 ‘선물’이다. 그 선물은 특히-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죄를 사하거나 사하지 않는 권한을 통해 드러난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말씀을 계속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22-23절). ‘숨을 내쉬는’행위는 구약성서에서 널리 알려진 상징적 행위로서 맹렬한 바람의 힘과 같이 창조적이거나 새롭게 일으켜 세우는 힘(창세 2,7 ; 에제 37,9등 참조)의 개념을 갖고 있다. 생명의 능력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히 충만케 된다. 즉 그 능력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와 성령의 힘을 빌어 모든 믿는 이들과 교회로 흘러들어간다. 성령의 쇄신적 능력보다 더 확실한 징표는 죄로부터의 해방과 또한 그것에 대한 처벌에서 나타난다. 이런 까닭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교회에 죄를 사할 권한 즉 마음을 새롭게 해줄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신다. 만일 죄가 정복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의 통치도 이루어질 수 없다!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지 않고서는…”
우리는 이제 마지막으로 거의 불신하는 태도로 감각적인 증거를 요구한 후 발하게 되는 토마의 신앙고백을 접하게 된다.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보지 않고서는…결코 믿지 못하겠소”(25절). 아마도 옛 전례형태를 상기시켜주는 듯한 토마의 신앙고백-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28절)-에서 첫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절대주권’이다. 토마의 이 신앙고백은 신앙의본질적 형태가 아니라 개별화된 형태이다. 만일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먼저 모든 믿는 이들 개개인의 마음과 생명의 ‘주님’이 되지 못하신다면 결코 교회의 ‘주님’이 되지 못할실 것이다. 여기서 그 신앙고백은 일종의 전유화(專有化) 형태를 띠게 된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에 ‘부활의 자녀들’의 생명을 불어넣어 주실 것을 믿을 때 ‘온전히 그분께 우리를 의탁하게 된다’(계시헌장 5 참조)는 의미에서 볼 때 그분은 무엇보다도 신앙 안에서 우리의 ‘주님’이 되신다. 그리고 또한 ‘보지 않고도 믿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의 권능만이 아니라 우리안에 이루어질수 있을 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의미에서 보아도 그렇다. 이렇게 볼 때 예수께서 토마의 근본적 정신자세를 보다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가고자 하시는 말씀의 의미를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다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는냐? 나를 보지 않고서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이러한 조건하에서 우리 생명의 절대적 ‘주인’이 되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