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제 1독서 : 창세 14,18-20




제 2독서 : 1고린 11,23-26




복음 : 루가 9,11b-17




해설


성체성사에 관해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토마스 아퀴나스의 학설에 따라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 “지극히 거룩한 성체 안에 교회의 영적 전(全)재산이 내포되어 있다. 즉 우리의 ‘빠스카’이시며 생명을 주는 빵이신 그리스도 자신이 그 안에 계신다”(Summa Theol., Ⅲ, q, 65, a; 1 ad 1). 바로 이런 까닭에 성체성사는 “선교활동 전체의 원천이요 정점”이기도 하다(「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 5항). 이것은 성체성사가 우리 신앙의 ‘종합’일 뿐만 아니라 우리 크리스찬 생활의 근원적 힘이요, 또한 표현양식이기도 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오늘 우리가 거행하고 있는 축일의 장엄성과 중요성을 말해주며 또한 우리가 전례 중 거양성체 후에 즉시 큰소리로 외치듯이 탁월하게 성체성사의 ‘신앙의 신비’를 이루고 있는 여러 가지 관점과 요소를 전제해 볼 때 그 모든 내용에 대해 명백하게 다 이야기하기는 어렵다는 점도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독서들을 통해 뚜렷이 제시되고 있는 신학적 직관의 내용들 가운데 몇 가지를 파악해 보고자 한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손에 드시고…”




우선 제 2독서(1고린 11,21-26)부터 살펴보자. 제 2독서는 다른 도서들에 비해 성체성사에 관한 신학을 가장 풍부하게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제 2독서만이 성체성사의 신비에 대해 직접 이야기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성세성사 설정에 관한 비문체 형식의 그 이야기가 주어졌던 상황을 짤막하게나마 되짚어 보는 것이 좋겠다.


고린토의 신자 공동체에는 성찬의 전례를 거행하기에 앞서 연회(àgape)를 벌이는 관습이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기리는 보다 중요한 ‘기념제’를 거행하기 위한 형제적 사랑의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모든 행위가 공동체의 건설에 이바지하기는커녕 굴욕감을 주었다. 이런 까닭에 바울로는 성체성사의 참된 의미를 보다 잘 깨닫게 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했던 그러한 전례관습을 비난하여 중단시켰다. 성체성사의 참된 의미는 그런 분위기와는 반대로 성체성사가 세워졌던 엄숙하고도 극적인 분위기가 조성될 때 더 쉽게 이해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로는 자신이 주장하고 있는 바를 더 권위 있게 전하기 위해 그것을 그 자신이 그리스도께로부터 직접 비롯되는 전승을 통해 받았다는 점을 강조한다(23절) :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식후에 잔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23b-25절).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에 따르면, 이 부분은 바울로가 직접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그가 안티오키아의 교회에서 습득했을 전례 관습에서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바울로의 제자인 루가에 의한 성체성사에 관한 이야기(루가 22,14-20)가 지금 우리가 접하고 있는 내용과 아주 비슷하다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바울로는 거기에다 독자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함축시킨 머리말 즉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라는 말을 덧붙여, 최고의 봉헌을 나타내는 예수의 행동과 말씀들을 유다의 배반과 비교시키고 있다.


이것은 고린토 신자들에게 과거의 사실을 상기시킬 뿐만 아니라 그와 똑같은 일이 그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 아니 이미 일어나고 있다 – 사실을 경고하기 위해서이다. 즉 그들이 주님의 몸을 더 이상 사랑과 형제애의 표지로서 깨닫지 못하게 하는 (1고린 11,29) 행동을 드러냈던 그때부터 이미 몰이해와 적대감과 배반의 ‘밤’이 그들의 공동체를 엄습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경고하기 위해서이다.


사랑에 대한 이와 같은 명백한 강조는 그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바울로에 의해 전승되고 있거나 또는 재구성된 전례적 전승의 다른 특성들에 의해서도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서 바울로만이 ‘너희들을 위하여’(루가는 ‘너희들을 위하여 내어준다’라고 보충한다) 즉 사람들을 위해 죽음에 넘겨진다는 의미의 표현을 쓰고 있다. 그러므로 성체성사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현존’의 신비를 재생시키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들을 위해 당신의 최고의 사랑을 쏟으시는 순간에 ‘봉헌’하신 생명의 신비를 재현시키는 것이다. ‘피’에 대해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아니 오히려 그러한 사실이 더 명백하게 드러난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바울로는 루가(22,20)나 마태오(26,28)나 마르코 14,24) 복음에서 표현되고 있는 ‘너희를 위하여 흘린다’라는 말마디를 빼고 있는 것 같다.




주님에 대한 ‘기념’으로서의 성체성사




그 다음 특별히 지적할 수 있는 내용은 바울로만이 두 번씩이나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24,25절)라는 예수의 명령을 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루가도 같은 형태의 표현을 전해주고 있긴 하지만(루가 22,19) ‘몸’에 대해서만 쓰고 있다. 유독 바울로가 고집하고 있는 듯한 이 표현은 과연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 순간에 행하신 바를 그분께서 부여하시는 의미와 더불어 – 예를 들어, 빵을 쪼개어 그것을 죽음에 처해질 당신 ‘몸’을 대신하여 봉헌하시는 행위 등등 – 그분이 다시 오실 때까지 제자들이 반복해서 행해야 한다는 그분의 원의를 명백히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그분의 행위를 반복해서 되풀이하는 일이 단순히 ‘회상하는 행위’ 정도에 그쳐서는 안될 것이다. 사실, 만일에 예수께서 그 순간에 실현시키시고자 하셨던 바가 지닌 모든 구원적 ‘능력’이 제대로 제시되지 못한다면 그때 당시 그분께서 이루셨던 행위의 의미는 상실되고 말 것이다. 또 만일에 그분께 대한 ‘기념’이 오늘날에도 완전히 효과를 낼 수 있는 조건하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기념’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로가 이야기하고 있는 기념(anamnesis)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성체성사적 행위를 그분께서 부여하셨던 충만한 의미와 더불어 현재에 재생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식탁을 주관하고 말씀을 반복하시는 분은 여전히 그리스도시라는 점을 전제한다. 따라서 제사를 거행하는 사제는 다만 그분의 투영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더욱이 모든 학자들은 바울로의 표현의 출처로서 구약시대의 과월절 예식에 관련된 히브리적 표현을 들고 있다. 실제로 과월절 설정에 관한 내용에서 다음과 같은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 “이 날이야말로 너희가 ‘기념’해야 할 날이니 이 날을 야훼께 올리는 축제일로 삼아 대대로 길이 지키도록 하여라”(출애 12,14 ; 13,9 ; 신명 16,3 참조). 이 표현 내용은 아주 빨리 과월절 전례 – 예수께서 최후 만찬 석상에서 그 형식을 따르고 계시는 것이 확실한 -에 옮겨진다 : “기뻐하고 ‘기념’해야 할 이 축제의 시기를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 주신 우리의 하느님이시며 이 땅의 임금이신 주여, 당신은 찬미 받으소서”.


빠스카 잔치의 신비에서는 이처럼 역사의 두 시기 즉 현재와 그리고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나온 그 먼 과거가 한데 어우러져 재현된다. 즉 과거 사건이 현재의 사건이 되며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이 과거 사건과 동시대의 인물이 된다. “그러므로 이 전례예식은 주님의구원적 행위의 단일성을 입증해준다. 그리스도 교회는 단 한 번 이루어졌으나 항상 새롭게 그리고 현실적으로 이루어지는 구속활동의 단일성의 이 신비를 mystérion 또는 sacramentum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 성사적 신비는 유다교적, 그리스도교적 전승에 속하며, 단 한 번 이루어졌으나 말씀과 성사를 통해 모든 시대에 똑같이 현존하는 구원의 역사가 지니고 있는 성서적 의미를 드러내 보여준다”(M. Thurian, L’Eucarestia. Memoriale del Signore. Ed. AVE, Roma 1967, p.27)


이와 같이 생각해 볼 때, 바울로가 성체성사 설정에 관한 내용을 주석 하는 식으로 덧붙이고 있는 제 2독서의 결어는 훨씬 쉽게 이해가 된다 :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고, 이것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십시오”(26절). 여기서 ‘선포하라’는 말마디의 시제가 현재로 사용되고 있음에 대해 유의해야 할 것이다. 성체성사의 거행은 충만한 사랑으로 역사 전체를 뒤덮는 죽음의 신비를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랑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변모시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대로 하느님과 형제들을 위해 죽기까지 온전히 자신을 봉헌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단지 과거에 대한 ‘기억’에 불과하고 따라서 항상 새롭고 신선한 분위기를 창조해주는 ‘기념’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로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라는 표현으로써 이러한 신선한 생활체험을 계속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성체성사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걸쳐 있으며, ‘기억’인 동시에 ‘예언’이다. 이것은 성체성사가 사랑의 마지막 표현이 아님을 뜻한다. 그 사랑의 마지막 표현은 오로지 우리도 그리스도와 더불어 장차 충만함 속에서 다시 임하게 될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마르 14,25 참조)를 마시게 될 때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루가에 의해 서술되고 있는 빵을 많게 한 기적의 내용을 전해주고 있는 오늘 복음(루가 9,11-17)은 비록 성체성사에 관한 직접적 이야기는 하지 않지만 복음사가 자신이 그 두 사건을 서로 연결시키고 있다는 의미에서 볼 때 우리로 하여금 성체성사의 신비를 보다 깊이 깨닫도록 도와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루가복음사가는 빵을 많게 하는 기적에서 예수께서 최후만찬 때 행하실 바로 그 행동들을 그분께 돌려 드리고 있다 : “그 때 예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뒤에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셨다”(9,16 ; 22,19도 참조). 또한 요한복음사가도 빵을 많게 한 기적에서 성체성사의 ‘징표’를 보고 있다(6,26).


그 다음,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내용은 사도들이 직접적으로 관여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서 기적을 통해 마련하신 음식을 사도들로 하여금 군중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심으로써 그들의 손을 비신다. 그리고 오늘날 성체성사의 거행을 주관하고 있는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일은 바로 이와 같은 일이다. 즉 그리스도의 선성(善性)과 사랑가 또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보증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우리 가운데 성체성사를 재현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분의 ‘말씀’ 뿐이다. 그러나 사도들의 참여는 이렇듯 뚜렷한 외적 행위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말하자면 어떤 모양으로든 성체성사를 통해 특별히 상징되는 모든 내용에 관여되고 있다.


만일 성체성사가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랑과 헌신에 대한 ‘기념’이라고 한다면 그 성체성사의 거행이 그리스도교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과연 어느 정도로 주님께서 모든 이를 위해 베풀어주신 무상적, 자비로운 사랑에 대한 생생한 ‘기억’이 되고 있는지를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성체성사를 ‘주의 수난에 대한 기념’(본기도)으로 성대히 선포하면서 믿고 있는 바를 확인할 수도 있고 또는 부인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현재에 있어서 생활한 것이 못되는 ‘기념’은 과거에 대한 ‘기억’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동방의 임금들을 거스려 싸움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아브람에게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와 ‘복을 빌어주었던’ ‘살렘 왕’이며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인 신비스러운 인물 멜기세덱(창세 14,18-20)의 그 옛날의 행동조차 현재의 사건이 된다.


그것이 전례적 행위인지 아니면 단순히 빵과 포도주와 같은 인간 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필요로 한 사람의 원기를 회복시켜주기 위한 인간적 행위에 지나지 않는지 하는 등의 문제들은 여기서 다룰 수 없는 문제들이고, 더 나아가 성서적 전승(시편 110, 4 ; 히브 7장)이나 교부들의 전승은 예언사상을 중심으로 해석해야 할 문제들이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성체성사는 오직 우리의 존재 그대로, 가진 바 그대로의 봉사와 참여와 형제애가 ‘봉헌’될 때에만 참되다는 것이다.


오로지 이렇게 할 때만이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왕국의 결정적 영광 속에 “다시 오실 때까지”(1고린 11, 26) 그분의 죽음에 대한 참된 ‘기념’과 ‘선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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