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다해 연중 제 31주일 주일 강론 모음..자캐오의 회심과 구원

 

연중 제 31 주일




자캐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제 1독서 : 지혜 11,22-12,2




제 2독서 : 2데살 1,11-2,2




복음 : 루가 19,1-10




해설


지혜서는 하느님을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11,26)이라고 훌륭하게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생명’이란 하느님께서 당신의 피조물들에 불어넣어 주시는 생명의 ‘입김’에 의해 창조되는(창세 2,7 ; 6,3 ; 시편 104,29-30 참조) 육체적 의미에서의 생명을 뜻하는 것이 분명하다 : “주님의 불멸의 정기는 만물 안에 들어 있다”(지혜 12,1).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비와 사랑에 달아드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실 수 있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영신적 의미에서의 생명으로도 이해된다. 그분의 자비와 사랑은 무엇보다도 특히 죄의 용서를 통해 드러난다. 그리고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그분은 출애굽 때에 이집트인들에게 하신 것처럼 ‘참으시고’ 또한 당신의 분노를 ‘억제하시며 달래신다’(11,15-21). 그분의 기쁨은 비록 ‘악마의 시기 때문에 이 세사에 들어온’(지혜 2,24) ‘죽음’을 지배할 능력을 가지고 계시지만 ‘생명’을 널리 베풀어주시는데 있다. 이러한 모든 내용이 죄인들에 대한 하느님 자비의 보편성과 피조물들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데 쏟으시는 그분의 결정적인 ‘사랑’의 역할을 아주 효과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오늘 독서를 통해 놀랍게 표현되고 있다.


그러므로 삼라만상은 하느님이 ‘생명을 사랑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원초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그렇지 않으면 창조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현실적으로 생명을 부지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11,24-25). 바로 그분은 ‘생명을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죄인들을 벌하고자 하지 않으신다. 사실 ‘생명’은 무엇보다도 특히 죄인들에게 ‘악에서 벗어나 주님을 믿게 할’(12,2) 시간과 기회를 제공할 때에 드러난다.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




회개하고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시는 자캐오의 이야기는 이러한 ‘생명’ –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신’(골로 1,5) 그리스도의 심장으로부터 인간의 심장에 부어져 인간을 새롭게 살게 하는 – 의 풍요로움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예리고는 북쪽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여행자들이 거의 반드시 쉬어 가는 그런 곳이었다. 동시에 그곳은 팔레스티나 남동쪽에 위치한 나라들과 인접해 있은 국경 도시였다. 이런 까닭에 그곳에서는 세관원들이 잘 살 수 있었다. 자캐오는 분명히 복음 내용이 말해 주고 있듯이(돈 많은 세관장 :2절)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당연한 듯이 덧붙여지고 있는 이 ‘돈 많은 세관장’이라는 표현이 흥미롭다 세관장은 부자일 수밖에 없단 말인가!


그러면 어째서 루가복음사가는 그 점을 강조하고 있는가? 의심할 여지도 없이 이보다 조금 앞서 ‘부자 청년’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재물에 매달렸기 때문에 예수를 따르기를 거절했다(18,18-23).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냉정한 말씀을 하셨다 :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18,25). 이와 같은 사실로 인하여 자캐오도 ‘어려운’ 입장에 처하게 되었고 또한 그러한 말씀을 하신 후 분명히 부자에게는 아주 관대한 태도를 보일 수 없으셨던 예수께서도 ‘어려운’ 입장에 처하게 되셨다. 그러나 ‘어려운 일’ 아니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18,27 참조)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바꾸기만 하면, 다시말해 ‘회개하기만 하면’ 가난한 사람이든 부자이든 모든 이에게 베풀어진 당신의 나라에서 아무도 제외시키지 않으신다.


이 ‘회개’의 과정이 그리스도의 적극적인 사랑의 행위에 의해 자캐오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 예수를 뵙고 싶은 마음, 자신이 ‘키가 작다’(3절)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를 보려고 돌무화과나무에 기어올라간 행위 등은 그가 나자렛의 예언자 예수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음을 말해 준다. 또한 군중들 틈에 같이 끼어 있다든가, 이상한 행동 때문에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었던 자신이 품위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든가 하는 행위는 사회적 계급적 편견으로부터 거의 완전히 해방되어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은 사람은 누가 조금만 도와주면 훨씬 더 완전하게 자기 쇄신의 길을 갈 수 있다.


그런데 그 도움이 예기치 않게 바로 이미 부분적으로 그 세리의 마음속에 호기심과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예수께로부터 주어졌다. 사람들이 혹시 그가 그 예언자가 아닐까 하던 것이 사실로 드러날 때 예수께서는 자캐오의 원의를 아시고 그를 내려오라고 하시며 그의 집에 머물겠노라고 하신다. 그러자 그 세리는 “얼른 나무에서 내려와 기쁜 마음으로 예수를 자기 집에 모셨다”(6절).


이 ‘기쁜 마음’은 증오의 대상이었던 그 세리에 대한 군중들의 메마른 마음 아니 더 나아가 적개심이 담긴 그런 마음과 대조를 이룬다. 사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모두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구나’ 하며 못마땅해하였다”(7절).


다른 곳에서도 사람들은, 예수께서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신다’고 비난한다(루가 5,30 ; 15,2 참조). 그런데 그 경우에 예수를 비난했던 사람들은 모두가 다 예수께서 자기들이 ‘죄인’으로 취급했던 사람들과 친하셨기 때문에 못마땅해하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라들이었다. 반면에 지금 이 경우에는 일반 군중들이 ‘돈 많은 세관장’ 자캐오에 대한 예수의 자비로운 태도를 보고 불평을 한다. 아마도 그를 싫어하고 더 나아가 증오와 원한의 대상이 되게 한 것은 무엇보다도 특히 그가 부자였다는 사실일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독점하려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과 적대적 관계를 이룬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결코 승부의 대상이 아니시다. 그분은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만큼 부자들도 사랑하신다. 단 그들이 재물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재물을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또한 그것을 모든 사람들 특히 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쓴다는 조건하에서 그들을 사랑하신다. 이렇게 될 때 재물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사랑을 확장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앞서 베풀어주시는 자비의 행위로 인하여 자캐오의 마음속에는 기적적인 내적 변화가 일어난다. 그래서 그는 일어서서 다음과 같이 예수께 말씀드린다 : “주님, 저는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을 속여먹은 것이 있다면 그 네 갑절은 갚아 주겠습니다”(8절).


그는 자기 쇄신의 의지와 부정했던 과거의 행위를 기워 갚고자 하는 의지를 통해 율법이 규정하고 있거나 단지 권고하고 있는 바를 훨씬 넘어서고 있다. 사실, 율법은 가축을 훔쳐다가 잡아먹었거나 팔았을 경우에만 네 배로 배상하고(출애 21,37), 통상적으로는 두 배로 배상할 것을 규정하고 있었다(출애 22,3. 6). 로마법에 있어서도 ‘명백한 도둑질’일 경우에만 네 배로 갚도록 되어 있었다. 유다 전승에 있어서는 자기의 재산과 소득의 오분의 일 정도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권고했다.


보다시피, 우리는 지금 아주 뒤바뀌어진 상황에 접하고 있다. 인색하고 이기주의적이고 착취자였던 한 인간이 일순간 돈과 자기 자신을 떠난다. 지금 그의 생활 속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은‘다른 사람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는 참으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다. 실제로 예수께서 몸소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엄숙하게 선언하신다 :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9절).


어느 누구도 제외시켜서는 안 된다. 자캐오와 같이 부당하게 돈을 벌어 부자가 된 세리라도 계속해서 ‘아브라함의 자손’ 즉 하느님의 사랑과 부르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성조 아브라함과 같이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온전히 신뢰하면 하는 만큼 그만큼 더 훌륭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 :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었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다”(창세 15,6 ; 로마 4,3 ; 갈라 3,6 참조).


자캐오는 바로 예수께 대한 믿음 때문에 그리고 새롭게 변모되고자 한 확고한 의지 때문에 그를 ‘죄인’이라고 배척한, 그리고 예수께서 그의 집에 머무르시는 것을 못마땅해하던 그 모든 사람들보다 훌륭한 ‘아브라함의 자손’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된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이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이다 : 10절)은 전형적인 루가1복음사가의 표현이다 이와 다소 유사한 내용이 ‘자비에 대한 비유들’에서 네 번씩이나 나온다(15,6. 9. 24. 32). 이 구절은 예수의 반순응적 태도를 정당화시키고 있으며, 이로써 자칫하면 보다 순박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예수로부터 소외시킬 위험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어떤 체계를 미리 세워 놓으시고 사람들을 종교적, 사회적 범주에 따라 구분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에게 있어서는 바리사이파 사람이든 세리든, 가난한 이든 부자이든, 히브리 사람이든 로마인이든 상관없이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크리스찬들 중에도 예수 시대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여러 계층으로 나누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즉 착취를 당하는 자와 착취자, 억압을 받은 자와 억압하는 자, 선한 이와 악한 이 등을 사람들을 갈라놓으려 한다. 그래서 보음을 들먹이며 서로를 거스르는 싸움을 조장시킨다. 필요하다면 폭력의 힘을 빌어서라도 인간 상호간에 정의를 회복시키는 놀라운 일을 행하려 한다.


자캐오에 관한 이야기는 추구해야 할 길이 그런 것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다. 즉 물론 매우 느리고 고달픈 길이긴 하지만 ‘내적 회개’의 길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오직 이 길을 통해서만이 압박자는 압박자이기를 그치게 되고 또한 피압박자도 그 증오의 대상인 압박자의 위치에 서게 되는 불행을 겪지 않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최근에도 세계 여러 곳 – 동쪽이든 서쪽이든, 멀건 가깝건 상관없이 -에서 입증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불의한 상황에 운명적으로 굴복하라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복음으로부터 주어지는 사랑의 힘에 의해 그 불의한 상황을 쳐부수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교황 바오로 6세는 다음과 같이 단언하신다 : “현재의 상황을 용기있게 대처해 나감으로써 모든 불의와 싸워 이겨나가야 한다. 발전은 깊이 쇄신시키는 대담한 변화를 필요로 한다. 긴급히 요청되는 변혁은 조금도 지체하지 말고 시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각자는 자기가 맡은 바를 용감하게 수행해 나가야 한다”(Populorum Progressio).


그리스도교 신자가 ‘종말론적’ 기다림의 분위기 속에 살게 된다면, 인간 사이에 보다 더 큰 정의와 형제애를 증진시켜야 할 이와 같은 의무는 더욱더 요청될 것이다. 사도 바울로는 오늘 제 2독서에서 비록 잘못된 점을 바로잡아 주는 내용이긴 하지만 그 ‘종말론적’ 기다림의 분위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실, 그리스도교 신자가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살게 되면 최고의 사랑과 자기쇄신의 의지를 실현시켜야 할 긴박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여러분에게서 영광을 바고 여러분도 주님에게서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2데살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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