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주님 공현 대축일 강론 모음

 

  주님 공현 대축일




1.         주님 공현 대축일 <마태 2,1-12> (공통)       세 박사들의 조배


                                                        함세웅 신부 






초대 교회에 있어서 전통적인 축일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부활절뿐이었습니다. 다만 4세기에 와서 ‘성탄’과 ‘공현 축일’을 기념하게 되었으니, 그 이유는 당시 외교 사상의 중심이었던 태양신을 위하는 날이 로마에서는 12월 25일이었고, 이집트에서는 1월 6일이었기 때문에, 이 외교 사상의 축일을 그리스도 신자의 축일로 흡수하면서 그 모든 장엄성까지 그리스도교화 함에 따른, 이 축일의 기원이 있습니다.


 


성탄 축일 – 이 축일의 공식적인 기록은 354년에 비로소 처음 발견되었지만 당시의 기록 문헌을 종합해 보면 적어도 330년께로부터 이 축일을 지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티칸 대성전의 중앙에 자리 잡았던 초대 성당의 위치라든지, 또 태양신을 위하던 날짜를 택한 또 다른 신학적인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는 ‘정의의 태양’ (말라키아 4,2)이라는 의미와 또 ‘세상을 밝히는 이 빛’ (요한 8,12)임을 교회가 자각하고 이 축일을 설정한 것이었습니다.


 


공현 축일 – 이 축일은 태양신을 위하던 이집트와 아랍 지방에서부터 연유되었습니다. 그 동기와 신학적 의미는 성탄과 같습니다. 공현(Epiphania)의 뜻은 ‘나타나다’, ‘열어 보이다’의 뜻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인성을 취하여 사람이 되시어 하느님을 인간에게 나타내 보이시고, 또 탄생하신 그리스도께서 아기이지만, 이제 모든 사람에게 구세주로서 인정받고 공적으로 출현함을 뜻합니다. 그래서 바로 오늘의 전례는 동방에서부터 삼왕이 아기 예수께 조배왔다는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성탄 축일보다 공현 축일은, 그 의미에 있어서 더욱 깊고 연대로 보아도 훨씬 먼저 시작된 축일입니다.




‘축일의 의미’ – 바울로 사도께서 말씀하신 다음의 내용을 우리는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습니다”(디도 2,11).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실 그 복된 희망의 날을 기다리게 해 줍니다”(디도 2, 13)




이 공현 축일의 뜻은 바로 ‘나타남’에 있습니다. 이 축일은 이미 과거에 일어났던 한 사건, 즉 ‘나타나신 예수님’을 기념하는 축일이기도하지만, 더욱더 미래에 일어날 일, 즉 ‘나타나실 예수님’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갖게 해 주는 축일이기도 합니다. 기다리는 신앙인, 이것이 바로 초대 교회의 기본적 자세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이 축일의 신비는 바로 주님과 함께 있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 축일은 지나가는 한 축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생활 자체입니다. 우리 모두 저마다 그리스도를 실현하고 또 나타내


야 할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성소(聖召)입니 다.


 


우리는 잠시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가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며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 분인지를. 그리스도께의 공생활 중 학자들이나 바리사이 파 사람들은 예수는 보았지만 ‘구세주 예수’는 보지 못했습니다. 삼왕들은 멀리서 별빛을 보고 찾아왔건만 주위의 사람은 못 보았습니다.




어찌 보면 그리스도를, 예수를 제일 많이 외치는 우리 신자들은 참다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멀리서 진리의 빛만을 바라보고 사는 착한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고는 또 몰래 자기의 갈길로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삼왕은 유태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만났고, 알았고. 경배한 분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축일의 의미를 되새기며 1년 365일 매일이 ‘나타나신 예수’와 ‘나타나실 예수’의 재림을 기념하는 축일이 되어야 함을 깊이 새겨야 하겠습니다.












2.          주님 공현 대축일 / 마태 2,1-12       무릉도원을 찾아서


                                                    (허성학 신부)




주님 공현으로 천국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추우면 추울수록 우리 몸을 훈훈하게 녹여 줄 난로가 필요해지고 따뜻한 봄날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어둡고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일수록 모든 사람이 서로 믿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밝은 세상을 찾게 되고 더욱 이상적인 사회를 그리워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런 이상적인 세상을 흔히 ‘무릉도원’이라고 합니다. 무릉도원이란 말은 옛날 중국의 도 연맹이라는 사람이 쓴 문학작품 속에 나오는 한 마을의 이름입니다. 중국 호남성의 도원이라는 곳에서 한 어부가 길을 잃고 산골짜기의 시냇물을 따라 걷고 있었는데, 시냇물에 복숭아 꽃잎이 떠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부는 어디서 복숭아꽃이 피어서 이렇게 떠내려오는가 싶어 시냇물이 흘러오는 곳을 따라 어느 깊숙한 숲 속의 동굴 앞에까지 갔습니다. 그 동굴을 따라 들어가니까 그 안의 세계는 복숭아꽃이 만발해 있었고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평화로운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 곳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아무도 따라 갈 수 없는 훌륭한 사회를 이루고 살았습니다. 진나라때 난리를 피해 그 곳에 왔다는 소박한 주민들의 따뜻한 접대를 받고 며칠을 묵은 후 그 어부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말을 들은 그 어부의 고을 군수는 어부가 표시해 놓은 길을 따라 그 마을을 찾았으나 이미 그 마을은 찾아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무릉도원이란 물론 아주 이상적으로만 생각하는 꿈같은 이야기지만 우리는 누구나 이러한 세상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참된 선과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세상이 어둡고 인심이 각박해지는 사회가 될수록 이러한 평화로운 세상, 밝고 즐거운 세상의 이야기가 우리의 구미를 돋구어 줍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어둔 밤이 더 깊어지면 밝은 새벽이 가까워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서로 믿고 화목하며, 사랑으로 가득찬 사회, 즐겁고 의미있는 무릉도원의 사회를 건설하려고 구세주 예수님은 이미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무릉도원은 이제 우리가 생각만으로 그리워하는 꿈같은 세계나 어떤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현실에 주어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동방에서 박사들이 별을 보고 구세주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박사들은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하는 등산가처럼 그들의 투지와 용맹을 떨치고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명예나 권력을 위해서 찾아온 것도 아닙니다. 더욱이 그들은 보물을 찾고 싶어서 위험을 무릅쓰고 험한 곳을 탐색하는 탐험가가 되기 위해 찾아온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다만 이 세상에 평화를 주려 오신 구세주를 만나 뵙고, 그분께 인간으로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찾아온 것입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자기 나라의 부귀와 영화를 버리고 먼 여행길의 고생도 무릅쓰며 별을 보고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은 이름 없는 한 고을의 보잘 것 없는 아기로 오신 구세주를 유대인들보다 먼저 알아보았습니다.




베들레헴의 초라한 작은 집에서 어린 아기를 찾아보고는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엎드려 경배한 다음 그들이 가져온 보물상자를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세계 만방의 민족들을 대표하는 그들에게서 왕이요 사제이며 구원자로서의 예물을 받으심으로써 자기 자신을 세계 만방에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이 사실은 또한 유대의 베들레헴에 나신 예수님이 유대 민족만을 위한 구세주가 아니라 세상 만민들을 위한 구세주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공현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신 구세주의 탄생을 공적으로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바라는 하느님의 나라인 무릉도원은 우리 만민들에게 이미 주어진 것입니다. 복숭아 꽃잎을 따라 올라간 어부처럼 그들은 별을 따라 머나먼 여행 길의 고생 끝에  드디어 무릉도원에 도착한 것입니다. 무릉도원에 갔다 왔다는 말을 듣고 찾아간 고을 군수는 무릉도원을 찾지 못했지만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무릉도원의 주님을 찾은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중국에 사는 사람만이 무릉도원을 찾아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베들레헴에 나신 예수님이 만민의 구세주이듯이 무릉도원 역시 우리 만민의 마음의 고향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우리 사회의 어느 곳에든지 무릉도원을 찾을 수 있고, 누구든지 무릉도원의 주인공을 찾아뵈올 수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남은 과제는 별빛을 보고 찾아간 동방 박사들처럼 그분이 계신 곳을 비춰주는 별을 찾는 것입니다. 그 별은 이미 하늘 높이 솟아 지금도 우리를 향해 어두운 이 세상을 환히 비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눈을 들어 이 별빛을 찾아봅시다. 그리고 별이 비춰주는 무릉도원을 향해 박사들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멀고도 긴 인생길을 걸어갑시다.














3.               주님 공현 대축일 / 마태 2,1-12 소중한 것을 바치자


                                                   (배문한 신부)






산넘고 물건너 낯설은 이역만리를 오로지 아기 예수님을 만나려는 일편단심으로 동방박사들은 온갖 괴로움을 기쁘게 이겨나갔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만나 본 그들은 “기뻐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마태 2,11). 그리고 그들의 가장 값진 보물을 예수님께 바쳤습니다.


 


똑같이 가난한 살림살이지만 어떤 분은 돈 10,000원을 바치고도 부족한 듯이 기뻐하는가 하면 어떤 분들은 10,000원을 내면서도 못이긴 듯이 아까운 마음으로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동방박사들이 그때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사람더러 이역만리를 동행하자고 했다면 거절당했을 것은 너무도 뻔한 일이 아닙니까? 설사 체면을 못 이겨 누가 따라나섰다 하더라도 그 여행은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더구나 선물을 바치라고 했다면 노발대발했을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예수님께 인색한 것은 첫째 그분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우리에게 인색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어린 아들의 과자를 빼앗아 먹는 아버지가 있습니까? 꼬마 녀석이 푼돈을 아껴 아버지가 좋아하는 담배를 사드렸다고 합시다. 그 아버지는 기쁜 나머지 몇 배로 갚아 줄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도 우리 것을 빼앗는 인색한 분이 아니십니다. 언젠가 우리가 바친 것의 몇 백 배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바치지 못하기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자기를 바치지 않고 성인성녀가 된 사람이 있습니까? 그들은 모두 많이 바쳤기에 너무도 많은 것을 공짜로 얻은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하느님께 인색한 이유는 사랑의 부족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그 무거운 십자가와 온갖 모욕과 쓰라림을 불평 없이 감수하셨습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 자녀를 사랑하는 어버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온갖 고생을 다 하면서도 자녀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제공합니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왕실을 버리고 자기 생명마저 버리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인색한 것은 하느님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돼지 앞에 진주는 짓밟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의 동방박사처럼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더 잘 알아 그분을 찾아 먼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합시다. 비록 우리의 가는 길이 태산 준령일지라도…그리고 동방박사들처럼 내가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물로 바칠 것을 잊지 맙시다. 그것이 나의 생명이라도 좋습니다. 그것이 나의 죄나 악습이라도 좋습니다. 그것이 나의 재산이나 지위라도 좋습니다. 하다못해 그것이 단돈 1,000원이라도 좋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바칩시다. 아까와하지 말고 바칩시다. 아까와하는 것은 신앙의 부족이요, 사랑의 부족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적게 바치는 사람은 적게 받고 많이 바치는 사람은 많이 받을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이요, 죽는 것이 사는 것이란 이 역설 속에서 진리를 깨닫고 동방박사들처럼 아기 예수를 경배하러 갑시다.




















8.         주의 공현 대축일 <마태 2,1-12>(공통)        주님과의 만남 


                                                             고형석 신부




우리의 일상사 가운데서 ‘만남’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인생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첫인상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첫 만남을 특별히 기억하기도 합니다.




오늘은 바로 예수님께서 자신의 모습을 동방박사에게 처음 드러내신 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의 빛으로 오신 주님을 뵙고 기뻐하며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빛을 찾아 그 먼길을 와서 예수님을 경배했지만 악한 마음을 먹은 헤로데는 예수님을 뵙지 못합니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바라본다는 것은 희망의 징표이자 사랑의 시작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아의 탄생을 손꼽아 기다리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반면에 자신의 왕권에 위협을 느낀 헤로데는 위선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그는 동방박사들에게 “가서 그 아기를 잘 찾아보시오. 나도 가서 경배할 터이니 찾거든 알려주시오”(마태 2,8)라고 부탁합니다.




우리가 누구를 만날 때에 자신이 위선과 허위로 가득차 있다면 타인의 진면목을 볼 수 없습니다. 자신이 진솔하게 마음을 열 때 상대방에 대한 사랑의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상대방의 마음속에 이미 자리잡고 계신 주님의 현존을 깨닫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생명의 시작과 더불어 우리 마음속에 먼저 와 계신 주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실직당한 아버지를 걱정하며 자신이 다니던 학원을 포기한 어린이의 마음에서, 노숙자를 위해 따뜻한 밥을 건네는 이들의 손길에서, 자신의 신장을 남편에게 떼어주기 위해 수술실로 들어가는 아내의 눈길에서 우리는 주님을 만납니다.




사랑하는 이에게 주님은 모습을 드러내시고, 빛이신 주님은 당신을 만난 이들을 통해 오늘도 어둠을 밝히고 계십니다. 정채봉 님이 지으신 책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라」에 ‘만남’이란 글이 있습니다. 가장 잘못된 만남은 생선과 같은 만남이다.  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오니까.


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은 꽃송이 같은 만남이다. 피어있을 때는 환호하다가 시들면 버리니까. 가장 비천한 만남은 건전지와 같은 만남이다. 힘이 있을 때는 간수하고 힘이 다 닳았을 때는 던 져버리니까. 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은 지우개 같은 만남이다.




금방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워져버리니까.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손수건과 같은 만남이다. 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주니까. 당신은 지금 어떤 만남을 가지고 있습니까? 지금 여기서 나는 주님과 어떤 만남을 가지고 있습니까?


















9.                 주님의 공현 대축일 <마태 2,1-12> (공통)


           사람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김성배 신부




눈은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다. 마음의 상태는 눈빛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마음이 순결하면 눈빛도 순결하고 마음이 불결하면 눈빛도 불결하다. 마음이 가난하면 눈빛도 가난하고, 마음이 탐욕스러우면 눈빛도 탐욕스럽다. 마음이 겸손하면 눈빛도 겸손하고, 마음이 오만하면 눈빛도 오만하다. 마음이 온유하면 눈빛도 온유하고, 마음이 냉혹하면 눈빛도 냉혹하다.


 


그러기에 사람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선한 눈으로 세상을 보고, 파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악한 눈으로 세상을 본다. 선한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선한 세상이 눈에 들어오고, 악한 눈으로 세상을 보면 악한 세상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자신을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게된다. 솔직한 사람은 남도 솔직하다고 생각하고, 솔직하지 않은 사람은 남도 솔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겸손한 사람은 남도 겸손하다고 생각하고, 교만한 사람은 남도 교만하다고 생각한다. 사심이 없는 사람은 남도 사심이 없다고 생각하고, 탐욕스러운 사람은 남도 탐욕스럽다고 생각한다. 순결한 사람은 남도 순결하다고 생각하고, 불결한 사람은 남도 불결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사람은 자기 마음에 비추어서 남을 판단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끼리 서로를 잘 알아본다.




겸손한 사람이 겸손하기 때문에 참으로 위대한 사람을 알아보고,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마음을 지녔기에 참으로 부유한 사람을 알아본다. 순결한 사람이 순결하기 때문에 참으로 고결한 사람을 알아 보고, 거룩한 사람이 거룩하기 때문에 피조물에 대한 일체의 집착에서 벗어나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을 알아본다.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을 한없이 초월하시는 분이시다. 지극히 높으시고 무한히 부유하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한없이 낮추시고 비우시어 사람이 되셨다.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철저하고 완전하게 당신을 낮추고 비우기를 원하셨기에, 탄생의 장소도 마구간을 선택하셨다. 하느님에서 사람이 되시기 위하여 선택하신 가정도 가난한 가정이었고, 하느님에서 선택하신 신분도「목수의 아들」이라는 비천한 신분이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육체를 취하시기 위하여 선택하신 어머니는 지극히1 순결한 동정녀인 성모님이셨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지극히 높은 영광을 지극히 비천하게 낮춘, 겸손 속에 담으셨고, 당신의 무한한 부유함을 완전한 가난 속에 담으셨으며, 당신의 완전한 거룩함을 완전한 순결 속에 담으셨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당신을 알아보고 맞아들이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생명과 사랑과 영광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가난하고 비천하고 순결한 모습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어 알리시는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들은, 마음이 겸손하고 가난하고 순결한 사람들뿐이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알아보고 경배를 드렸던 목동들이 그랬고 동방 박사들이 그랬다.




하느님께서는 교만하고 탐욕스럽고 불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당신의 모습을 감추시고, 겸손하고 가난하고 순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신다.




오늘 복음에서 동방 박사들이 별의 인도로 예수님을 찾아뵙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며 경배한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하늘에 나타난 신비스러운 별은, 하느님께서 세상에 탄생하셨음을 알리는 징표였다. 동방 박사들은 고결한 영혼의 소유자들이었기에 은총의 도움으로 그 별이 하느님이신 구세주의 탄생을 알리는 징표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느님께서 세상에 탄생하셨다는 사실을 알게된 동방 박사들은, 하느님을 뵙겠다는 열망만으로 마음이 가득 찬다. 그래서 고국과 고향과 가족과 자기들이 소유한 모든 것을 미련 없이 버려 두고, 하느님께서 계신 곳을 향해 멀고 험난한 길을 떠난다.




길고 피로한 여행 끝에 이들이 만난 것은, 초라한 시골 베들레헴의 가난하고 비천한 예수님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참으로 겸손하고 순결하고 가난한 마음의 소유자들이었기에, 그 가난하고 비천한 모습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어 알리시는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었다. 동방 박사들은 하느님을 뵙는 기쁨과 감격에 떨며, 무한한 경의를 가지고 예수님께 합당한 예물을 드리며 경배한다.


 


왕을 상징하는 황금과 하느님을 상징하는 유향과, 구속을 위한 고통을 상징하는 몰약이 그 것이다. 하느님을 뵙는다는 것은 사람에게 지고의 기쁨이 된다. 동방 박사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기에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다. 인생의 여정은 하느님을 만나러 가는 여행이다. 하느님과 만나는 지고의 기쁨에 이르기 위해서는 일체를 버리고 떠날 줄 알아야 한다.




피조물에 대한 일체의 무질서한 집착을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만난다. 그리고 하느님께 순종하는 사랑이라는 황금과, 기도의 향과 희생이라는 몰약을 예물로 준비하는 사람만이, 하느님께 도달하기 위해 일체를 버리고 떠날 수 있다.
















12.        주의 공현 대축일    새해를 축복으로 걸어가자     


                                                            강길웅 신부






새해 첫 주일입니다. 올해도 여러분 모두 주님의 사랑 안에서 복 많이 받으시고 가정에는 건강과 평화가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복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안 믿는 이들이야 잘먹고 잘사는 것이 복이요, 몸 건강하고 오래 사는 것이 복이지만, 믿는 이들에겐 복이라는 개념이 그렇게 편협된 것이 아닙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그 안에 감추어 계신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 복이요, 외롭고 눈물나도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이 복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복의 개념을 잘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한마디로 은총 자체이셨고 복 자체이셨습니다. 모든 행복이 그분에게서 옵니다. 그렇다면 인간 예수가 받은 복이 무엇이냐. 그것은 겨우 마구 간에서 태어나고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서 성장해서는 위험스럽고도 외로운 전도생활을 하다가 마침내는 십자가형에 처형된 고달픈 생애를 말합니다.




은총이 가득한 여인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를테면 예수 아기를 낳으심으로써 은총과 축복을 낳아 주신 어머니였지만 그러나 그 어머니 역시 눈물과 쓰라림으로 얼룩졌던 한 많고 외로운 생애를 살 아야 했습니다. 그래 그런지 예수님의 산상 설교에 보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고 우는 사람이 행복하며 억울하게 박해받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복이라는 개념을 신앙 안에서 올바르게 이해하여 올 한 해가 비록 힘들고 어렵다 해도 하느님 은총의 복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느님의 복은 세상 모든 것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특히 탄생하신 예수님을 가슴 안에 모시고 있다면 바라보는 세상이 온통 축복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세상 자체가 그분의 축복임을 알게 됩니다.




오늘은 주의 공현 대축일입니다. 전에는 ‘삼왕내조’축일이다 해서, 동방에서 세 왕이 찾아와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께 경배드렸다는 사실을 기념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있어서는 다릅니다. 박사들이 인사드렸다는 사실보다는 주님께서 이방인인 그들을 불러 당신 자신을 손수 드러내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묘한 것은, 메시아를 기다린 것은 유대인인데 그 메시아가 찾아 와서 실제로 만난 백성은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은 오히려 메시아를 배척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의 판단 과 지혜를 초월합니다. 사실, 인간은 자기 재주로 하느님의 은총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자주 숨겨진 상태에서 우리에게 오시기 때문에 우리가 몰라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상식과 인간의 지혜를 초월하며 그리고 세속 의 조건과 그 장애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 신 자들은 조그마한 인간적인 조건과 장애에도 믿음이 자주 넘어지는 경우를 봅니다. 조금만 시련이 와도 하느님을 멀리하며 무슨 핑계(?)만 생기면 신앙을 가차없이 내던집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끝까지 붙들고 매달려야 합니다.




어떤 자매가 남편의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비자교리에 나왔습니다. 특히 시어머니가 열렬한 개신교 신자였기 때문에 부딪치는 갈등과 쏟아지는 박해가 너무도 컸습니다. 그래도 이 자매는 기를 쓰며 나오는데 마침 시아버지가 암에 걸려 고생할 때 아주 헌신적으로 간호해 드립니다. 바로 이걸 보고 시어머니가 천주교로 개종을 했으며 남편도 입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박사들은 새 왕을 만나야겠다는 신념으로 멀고도 먼 위험 한 길을 걸어 왔습니다. 유대인들은 무시했던 보잘것없는 한 아기를 만나기 위해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야말로 그들이 평생 갈구했던 왕이요 주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어떤 의미에서 주님을 만나기 위해 걸어가는 나그네 길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누구는 쉽게 일찍 주님을 만나 한 평생 축복의 길을 은혜롭게 걸어가지만 또 누구는 평생 걸어도 그분의 흔적조차 만나지 못하고 고달픈 길을 외롭게 걸어갑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인간의 지혜를 고집하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합니다.




새해를 맞는다고 누구나 다 새해를 맞이하는 것은 아닙니다. 헌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새해가 백번 돌아온다 해도, 그 사람에게는 여전히 새 해가 뜨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날이 자신을 반성하며 믿음을 순수하게 닦고 그리고 항상 노력한다면 그는 또 나날 이 새해를 맞이하는 것이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진정한 별이요 또 우리가 평생 걸어가야 할 길이 십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 안에 환하게 떠 있는 그분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은혜로써 새해를 걸어가도록 합시다.














13.           주님 공현 대축일 <마태 2,1-12> (공통)    세 박사의 조배




주님 공현절은 성탄절 후 12일째인 1월 6일에 시작됩니다. 따라서 공현 대축일은 1월 2일과 8일 사이의 주일에 지내게 됩니다. 공현절은 아기 예수님이 전인류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또한 오늘 복음이 전하는 것처럼 점성가들로 불리는 이방인들이 동방에서 예루살렘으로 와서 아기 예수께 경배하고 예물을 바친 것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1. 동방 점성가의 예방 이야기


동방 점성가들은 새로 탄생한 유다인 왕께 경배드리려고 별을 따라 예루살렘에 옵니다. 이처럼 아기 예수께 경배하려는 이방인과 달리 유다인들은 자기네 왕을 맞아들일 생각이 없었습니다. 헤로데는 대제관들과 율사들을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탄생할 장소를 문의하는데, 그들은 성서의 예언을 근거로(미가 5,1) 베들레헴을 꼽았습니다.


동방 점성가들은 별의 인도로 아기 예수님을 발견하고 아기 예수께 “엎드려 절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립니다”. 이 세 예물은 근동의 값비싼 물건으로서 왕께 드리는 예물입니다. 여기서 점성가는 원문에 의하면 ‘마고스’입니다. 마고스는 점장이란 말인데 문맥으로 보아 별을 보고 점을 친 까닭에 점성가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동방에서 찾아온 점성가들의 신분이나 숫자나 이름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기 500년경에 이르러 서구 그리스도인들은 점성가들을 임금으로 추대하였고 오늘 복음의 세 가지 예물에 근거해서 임금 숫자를 셋으로 한정합니다. 그리고 세 임금의 이름을 지어 발타사르, 멜키오르, 가스파르라 했습니다. 이는 후대 그리스도인들의 해석일 뿐, 점성가들의 신원에 대해서는 자세히 밝힐 수 없습니다.


              2. 우리의 이해  : 


동방 점성가들은 유다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방인들로서 하느님의 약속에서 제외된 사람들입니다. 에페소서 2장12절에 의하면 이방인은 그리스도와 무관하고 이스라엘 시민권에서 제외되어 약속의 계약과는 상관도 없으며 세상에서 희망도 하느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이방인들이 메시아 탄생에 대한 징조를 알아보고 그분을 찾아 경배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메시아 탄생의 예언을 가지고 있는 유다인들도, 성서학자들도 그리고 시대의 징조를 식별하고 예언을 해석하는 대학자들도 메시아의 출현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직 나라 안에서 죄인 취급을 받는 목동들과 나라 밖의 이방인 점성가들만이 메시아 출현의 징조를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이는 오늘 제2독서 에페 3장6절이 전하듯이 이방인들도 하느님이 약속하신 것을 받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동방 점성가들의 예방 이야기는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을 거역한 이스라엘 민족만이 하느님의 백성일 수 없고 오직 그분을 영접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참 백성이 됨을 선언하는 사건입니다. 즉 바야흐로 구원의 보편성이 시작되었다는 장엄한 선언인 것입니다.                                              사무처 홍보실
















14.              공현대축일    아기 예수에게 엎드려 경배한 동방 박사들




        1. 복음 이야기(마태 2,1-12)




   오늘 복음에 의하면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은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1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보잘것없는 고을입니다. 다만 역사적으로 유다 민족사에서 높이 추앙을 받는 이스라엘 2대 임금 다윗의 고향으로 널리 알려져 있을 뿐입니다.


 


ꡒ너, 유다의 땅 베들레헴아, 결코 너는 유다의 요지 가운데서 가장 작은 고장이 아니다ꡓ(2,6a)는 미가 예언서 5,1a의 인용입니다 : ꡒ그러나 에브라다 지방 베들레헴아, 너는 비록 유다 부족들 가운데서 보잘 것 없으나 나 대신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너에게서 난다.ꡓ 여기서 ꡐ보잘것없다ꡑ는 말은 ꡐ가장 작다ꡑ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복음 6a절의 뜻인즉, 베들레헴은 과거에는 가장 작았으나 이제는 더 이상 작은 고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민을 다스릴 메시아가 그곳에서 탄생하셨기 때문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을 때  처음으로 찾아와 경배한 이들은 동방에서 온 이방인 점성가들입니다. ꡐ점성가ꡑ는 원문에 의하면 ꡐ마고스ꡑ입니다. ꡐ마고스ꡑ는 점장이인데 문맥으로 보아서 별을 보고 점을 친 까닭에 ꡐ점성가ꡑ라 하겠습니다. 이 점성가들의 신분이나 숫자나 이름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들은 유다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방인들로서 하느님의 약속에서 제외된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라 하겠습니다.


   에페 2,12에 의하면 이방인은 그리스도와 무관하고 이스라엘 시민권에서 제외되어 약속의 계약과는 상관도 없으며 세상에서 희망도 하느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이방인들인 동방 점성가들이 메시아 탄생에 대한 징조를 알아보고 그분을 찾아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는 사실입니다.




        2. 우리의 이해




   공현 대축일은 아기 예수님이 전 인류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동시에 점성가들로 불리는 이방인들이 동방에서 베들레헴에 와서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고 예물을 드린 것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공현절은 성탄절 후 12일째인 1월6일에 시작되는데 공현 대축일 주일은 1월2일과 8일 사이의 주일에 지내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사람들의 사고방식, 기대, 예상, 판단기준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 가십니다. 오늘 복음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기 예수님을 낮은 곳의 대명사인 베들레헴에서 탄생하게 하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은 정치가도, 학자도, 종교인도 아니고 이방인 동방 점성가들이었습니다.




메시아 탄생의 예언을 가지고 있는 유다인들도, 경건한 종교인들도, 성서학자들도 그리고 시대의 징조를 식별하고 예언을 풀이하는 대학자들도 이 메시아의 출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오직 나라 안에서는 죄인 취급을 받는 목자들과 나라 밖에서는 이방인 점성가들만이 메시아 출현의 징조를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이는 에페 3,6이 전하듯이 이방인들도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바야흐로 구원의 보편성이 시작되었다는 장엄한 선언인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 안에도 비록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이 소박하게 살아가지만 예수님을 바로 알아보고 진실되게 살아가는 드러나지 않는 참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2001년 새해 첫 주일입니다. 2001년에는 모든 교우들이 예수님을 바로 알고 믿으며 예수님의 복음을 생활 속에서 바로 실천하는 참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서울대교구 사무처 홍보실








15.        주님 공현 대축일 <마태 2,1-12>   하느님은 약속을 지켰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아일랜드 출신의 프랑스 작가 S. 베켓의 희곡입니다.




1953년 파리의 소극장에서 초연된 이 연극은 이른바 ‘반연극’(反演劇)의 기념비적 작품입니다. 1969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이 작품은 해질 무렵에 어딘지도 모르는 시골길에서 두 떠돌이가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리는 동안 부질없는 대사와 동작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내는 장면이 무대 위에서 벌어집니다. 마침내 심부름하는 양치기 소년이 “고도는 내일 온다”고 알려주는데도 이들은 계속 기다리는 것으로 1막이 끝납니다. 다음날인 2막도 거의 같은 내용이 반복됩니다. 관객들은 그들이 기다리는 고도가 도대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가운데 결국 연극은 끝나게 됩니다.




작가는 ‘고도’를 밑도 끝도 없이 기다리고 있는 인물을 통해 현대인의 존재론적 불안을 독특한 수법으로 파헤칩니다. 많은 비평가들은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고도’(Godot)가 결국 ‘신’(God)에서 빌려온 이름이며, 따라서 그들이 기다리는 고도는 절대자 즉 하느님의 상징이라고 지적합니다.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우리의 인생은 마치 베켓의 부조리한 연극무대에서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고도’를 기다리는 우스꽝스러운 떠돌이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불확실한 인간에게 있어 ‘예수’는 오기로 약속된 단 한 사람의 인물입니다. 일찍이 하느님에게서 창조된 그 수많은 인간들 중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예언된 사람은 오직 ‘예수’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의 선조인 아브라함에게 “네 후손은 원수의 성문을 부수고 그 성을 점령할 것이다. 세상 만민이 네 후손의 덕을 입을 것이다”(창세 22,18)라고 약속하신 이래 하느님은 기회있을 때마다 예언자를 보내시어 그리스도가 오심을 예고하십니다.




구약은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기까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계약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태어나심으로써 구약은 그 종지부를 찍게 되는 것입니다.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민족은 유다인뿐이 아닙니다. “고대 로마인들은 동방에서 세상의 지배자이자 주인인 그분이 나올 것이라는 예언을 믿고 있다”고 타치투스는 기록했으며 중국에서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왔습니다. “주왕조 차오왕 24년 네 번째 달 제8일에 빛이 남서쪽에서 나타나 왕궁을 비추었다. 그 찬란한 광채에 놀란 왕이 물었다.




현인들은, 이 이상한 조짐은 서방에서 위대한 성인이 나타났음을 알리며 그 성인의 종교가 중국에 전래되리라고 말하였다.” 그리스인 데스킬루스는 그리스도 탄생 6세기 전에 「프로메테우스」라는 작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신이 나타나서 그대가 지은 죄의 고통을 대신 받을 때까지 더이상 저주가 끝나기를 기대하지 마라.”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동방박사들은 그분의 별을 보았습니다. 마치 중국의 왕이 찬란한 광채를 발견하고 놀란 것처럼. 그분의 별을 통해 유다인의 왕이 태어났음을 알고 그 먼길을 찾아와 경배한 동방박사를 통해 하느님은 예수께서 유다인뿐 아니라 전인류에게 예언된 단 한 사람의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가르치신 것입니다. 아기 예수를 보고 대단히 기뻐한 동방박사처럼 기뻐하고, 엎드려 경배한 동방박사처럼 경배하십시오. 아기 예수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약속하신 그 메시아, 바로 그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알렐루야.   최인호 베드로/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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