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 4주일
1. 홍성만 신부(가)/2 2. 강길웅 신부(가)/3
3. 변희선 신부(가)/5 4. 함세웅 신부(가)/7
5. 김현준 신부(가)/8 6. 권지효 신부(가)/10
7. 김정진 신부(가)/12 8. 하느님 사랑의 눈/14
9. 스스로 소경된 사람/16 10. 하느님의 시선으로/18
11. 최인호 작가/19
1. 사순 제4주일 요한 9,1-41 (가) “고요함은 신앙의 눈을 보존한다”
홍성만 신부
예수님께서는 소경에게 눈을 밝혀주시는 기적을 행하시기에 앞서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 라고 선언하셨고 치유 받은 소경은 시력을 주시는 분이 누구신지를 깨달을 수 있어 “주님 믿습니다” 하고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렸습니다.
한편 “우리들의 눈이 다 멀었단 말이요” 하고 대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써 대답하십니다. “당신들이 차라리 눈 먼 사람이라면 오히려 죄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지금 눈이 잘 보인다고 하니 당신들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요약입니다.
지금 소경은 태양 빛을 받아 주위의 모든 사물을 다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다른 새로운 빛이 그에게 비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았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선 육체적으로 소경을 도와주셨으나 궁극적으로 그를 영혼의 고뇌에서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소경을 치료해 주는 복음은 구원의 빛을 향하여 한발짝씩 나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면 2000년 전에 있었던 소경을 낫게하는 이 기적이 지금 나한테는 무엇을 뜻하는지 각자 자기에게로 눈을 돌려봅시다. 지난 겨울 방학 어느 추운 날이었습니다. 이때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성모병원 옆 구름다리에는 어느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떨면서 지나가는 행객에게 동정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보통 동전 두세개 덜렁 놓고 가는 것이 상례였는데, 그 날은 두세개 놓고 그냥 지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 전부터인지 남매같이 보이는 두 국민학교 꼬마가, 내가 구름다리 한쪽 끝에서 그 앞에 오는 그때까지, 아기 안고 있는 어머니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두 꼬마는 주머니 속에서 100원짜리 동전 하나씩을 정성스레 놓고 서로 손잡고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나도 이어 주춤거리며 100원짜리 하나를 놓고 힘없이 내려가면서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2000여년전 제자들이 예수께 “누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합니까?” 학도 물었을 때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입니다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도 못들어 갈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걸인이 얼마나 불쌍한가를 또 도와줄 의무가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이 꼬마들이 돈을 많이 보태주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도 더욱 아닙니다. 다만 이 동정을 요구하는 사람을 보는 꼬마들의 마음(눈)과 나의 마음(눈)과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무엇인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꼬마의 눈에는 진정 불쌍하고 자기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런 사람들이 많으니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되먹지 않은 이론 때문에 또 자주 보는 습관 타성 때문에 꼬마가 느끼는 것과 같은 연민과 아픔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지금 나는 되먹지 못한 이론이나 타성에 눈이 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신문 1975년 4월 16일자에는 미국에 입양된 월남 전재 고아를 태운 대형 수송기가 사이공 공항을 이륙한 후 사고로 추락하여 127명의 고아를 죽인 대 참사를 알리고 있습니다. 한 귀여운 아기는 보모의 젖가슴을 꼭 쥔채 죽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추락 현장에는 월남 민간인이 있었으나 구조에는 거의 협력을 하지 않고 담요 몇 장이 눈에 띄자 훔쳐간 사람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눈에는 어린 시체를 옮겨가면서 거의 눈물이 없었다고 합니다. 저는 여기서 월남인들이 우리 인간을 대표한다는 생각지도 않으며 그렇게 될 수도 없음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하여 우리 인간 마음의 눈이 점점 흐려져 간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냉혹한 현실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마음을 가리우는 갖가지 공해가 있으니 즉 소음, 전쟁, 나태, 흥분된 생활과 경쟁, 명예, 권력, 범람하는 광고 등등입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의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어 비타협주의자에게 환영되며 인간 마음의 눈을 멀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2000년전 예수님께서 행하신 소경을 치유하신 기적을 통하여 다음의 사실을 알고 실천해야겠습니다.
우리는 고요함으로 지켜지는 작은 섬을 창조하지 않는 한 우리 마음의 눈은 빛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뵈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눈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고유의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의 눈을 치료하는 조용한 시간 기도시간을 하루에 적어도 15분은 가져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하느님께서는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도 당신 자신을 들려 주실 수도 있고 그리스도는 잠겨진 분으로 들어오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가장 평범하지만 확실한 방법은 진정으로 하느님과 대화하는 기도의 시간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소경은 “주님! 나는 믿습니다” 하고 직접적인 대화를 함으로 신앙의 눈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아멘.
2. 사순 제4주일 요한 9,1-41 (가) 영적인 눈을 뜨자
강길웅 신부
제1독서 Ⅰ사무 16,1b.6-7.10-13a (다윗이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다)
제2독서 에페 5,8-14 (죽음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리라)
복 음 요한 9,1-41 (소경은 가서 얼굴을 씻고 눈이 밝아져서 돌아 왔다)
하느님의 눈은 사람의 눈과 같지 않습니다. 달라도 엄청나게 다릅니다. 마치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에서 어른들의 눈과 아이들의 눈이 서로 다른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하느님의 눈빛을 조심스럽게 바라봐야 합니다.
오늘 1독서에서 사무엘은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을 찾아 머리에 기름을 부으려 했을 때, 그는 사람의 외모만 보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을 이내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자꾸 엉뚱한 사람의 머리 위에 기름을 부으려 했습니다. 몇 번의 실수 끝에 다윗을 보고서야 그가 비로소 점지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의 눈은 늘 불완전하여 자주 실수를 범합니다. 하느님의 예언자였던 사무엘이 그러했다면 범인인 우리의 어리석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세상이 우리 눈을 속이지만 또 우리가 우리 자신의 눈을 속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자신의 편견과 아집에 묶여 있기 때문에 판단하는 각도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소경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눈이 닫혀져서 시력을 잃은 사람만을 소경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돈에 눈먼 사람은 돈만 보이며 술에 눈먼 사람은 술만 보입니다. 도박에 미친 사람은 화투짝만 보이며 여자에 눈먼 사람은 또 여자만 보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더 소중하고 올바른 것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눈뜬장님이 됩니다.
전에 저의 선배로서 초등학교 교감을 하신 분이 있었는데 그의 부인은 정숙한 여인이었으며 인물도 좋았던 분이었습니다. 그들은 20년 가까운 부부생활에서 별 문제가 없었는데 어느 날 일이 생겼습니다. 남자에게 새로운 여자가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새 여자는 정말 교양도 없고 인물도 천한 여자였습니다. 그래도 교감은 그 여자에 빠져 부인과 자녀들을 버렸습니다.
이때 주의의 모든 사람들이 “저 사람은 눈이 멀었다.”하며 아까워했습니다. 남자는 정말 실력있는 교감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교직에서 쫓겨났고 그리고 그는 그 여자와 어디론가 줄행랑을 쳤는데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마음이 닫히면 보이지가 않으며 보여도 헛된 것만 바라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세상을 올바로 보고 있다고 하니 그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태중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소경은 태어나면서부터 천대받던 거지였습니다. 버려진 인간이었고 구걸이나 했던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에게 침으로 흙을 개어 눈에 바르니 눈이 열려서 세상을 똑바로 보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아주 대단한 사건이었습니다. 일종의 죽은 인생이 살아난 것입니다. 절망의 어둠 속에서 빛을 만난 것이며 밑바닥에 버려진 존재가 위로 건짐을 받아 구원된 것입니다. 그래서 소경을 처음부터 알던 사람들은 다 놀라고 감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그 능력의 위대함에 머리를 굽혔습니다. 가슴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평생 불구자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엄청난 사건은 보질 못하고 오직 그 사건이 안식일에 이루어진 사실에만 초점을 맞추어 트집을 잡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율법을 무시하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인인 것처럼 판단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부터 그랬듯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시비 걸고 방해합니다.
이상합니다. 눈먼 사람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알고 믿음을 고백하는데 눈뜬 사람들은 예수님을 몰라보며 죄인 취급합니다. 그럼 누가 진짜 소경입니까. 이때 예수님이 또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람과 못 보는 사람을 가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9,39).
그러면 여러분은 ‘보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못 보는 사람입니까. 제가 언젠가 단식을 열흘간 한 일이 있는데 그때 뱃속을 꽤 여러 날 비우고 보니 과연 무엇이 맛있는 음식인지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도대체 세상에 맛없는 음식이 없었습니다. 찌개 속에 빠진(?) 멸치 한 마리가, 배부를 때 먹던 갈비나 생선회보다도 훨씬 맛있었습니다. 오죽잖은 깍두기 하나에서 단물이 철철 넘쳤습니다. 이를테면 음식에 눈을 뜬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세상에 눈뜨고 신앙에 눈을 떠야 합니다. 이 사순 시기에 진정으로 은혜의 새 모습을 바라봐야 합니다. 눈만 뜰 수 있다면 가난이나 질병이 결코 불행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눈을 뜹시다. 지금 잘 보인다고 착각하지 말고 예수님께 매달리고 매달립시다. 사순 시기는 눈을 뜸으로써 죄를 벗는 시기입니다.
3. 사순 제4주일 요한 9,1-41 (가) 소경은 가서 얼굴을 씻고 눈이 밝라져서 돌아왔다
변희선 신부
필자는 예수회라는 남자 수도회 소속의 신부인데, 아직도 약 6개월간의 수련을 더 받아야 정회원이 될 수 있다. 이 수련을 제3수련이라고 부르는데, 예수회는 제3수련을 책임지는 수련장을 특별히 영성과 인격에 있어서 탁월한 분을 임명한다.
현재 미국 예수회에서 유명한 제3수련장인 래리 길릭 신부님은 소경이다. 원래는 예수회의 평수사로 있다가 교황님의 윤허로 사제가 되셨고, 지금은 영적 지도자로서 많은 활동을 하고 계신다.
길릭 신부님께 피정 지도를 받은 많은 신부님들이 한결같이 말씀하시는 이야기의 내용에는 몇 가지의 공통점이 있다. 우선 길릭 신부님은 수련자의 이야기를 아주 세심하고 정성스레 들으신다. 단지 수련자의 목소리를 듣기보다는 그 목소리를 통한 마음과 영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신다
둘째로, 수련자가 한 말들을 아주 잘 기억하신다. 심지어는 수련자마저 잊어버린 말까지도 기억하신다는 것이다. 이 점은 피정자가 자기 자신이 한 말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보다 지도자가 더 관심을 기울였을 때에 비로소 가능하다
셋째로, 피정자에 대하여 선입견을 갖지도 않을 뿐더러 속단을 내리지도 않으며, 가능하면 피정자 자신이 하느님의 뜻과 자신의 내면에 대하여 스스로가 깨닫도록 배려하고 기다리신다.
그러면 길릭 신부님이 처음부터 이토록 탁월한 영적 지도자였을까?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신부님께서 소경임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영적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많은 시간과 여러 가지의 노력과 깨우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로, 남의 목소리만을 통하여 마음과 영혼의 소리를 들으려면, 우선 오랜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하다. 보통 사람들은 상대방의 이야기가 조금만 길어지면 참지 못하고 중단시키려한다. 대개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상대방의 겉모습과 표정에 따라서 나름대로의 선입견 범위 안에서 말을 듣고 해석한다.
그러나 소경이면서도 수십 년간의 영적 수련을 통하여 기다림과 인내를 체득하신 길릭 신부님은 비록 수련자의 표정과 외모는 보지 못하지만,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히 마음과 영혼의 소리를 듣는다.
둘째로, 상대방의 이야기에 진정한 관심을 기울이려면,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와 관심이 필요하다. 세상의 온갖 못된 사람들을 겪으면서도, 인간의 참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으려면, 사람을 영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상대방이 조금만 잘못하거나 실수를 범해도 금방 단죄하거나 불신하기 쉽다. 결국 인간을 근본적으로 신뢰하기 위해서는 창조주 하느님을 믿는 영적인 눈을 필요로 한다.
셋째로, 수련자가 하느님의 뜻을 스스로 발견하도록 배려하기 위해서는, 그의 내면에서 움직이는 하느님의 은총과 역사하심을 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이 필요하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이웃을 자신의 편견과 이기적 입장에서만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다.
소경인 길릭 신부님은, 신앙(영혼)의 눈으로 피정자 안에 활동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려고 부단히 기도하고 노력하시는 분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소경은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고 살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뜨게 되었다(요한 9,6). 그런데 편견과 불신에 사로잡힌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이 소경을 집요하게 괴롭힘에도 불구하고 세 단계에 걸쳐서 자신의 눈이 열리는 것을 보여준다.
첫 단계에서, 소경은 예수님을 자기의 눈을 뜨게 도와준 좋은 분이라고 말한다(11절).
「육안(肉眼) 열림」 둘째 단계에서 소경은 예수님을 예언자라고 답변한다(17절).
「심안(心眼)의 열림」 셋째 단계에서, 소경은 예수님의 참 모습을 고백한다.
「영안(靈眼)의 열림」「주님, 믿습니다(38절)」. 많은 사람들이 육안(肉眼)에만 집착한 나머지, 마음의 눈과 영혼의 눈은 흐리거나 먼 상태이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듯이 우리 자신의 눈이 잘 보인다고(41절)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연 나는 마음과 영혼의 장님이 아닌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여러분은 먼저 마음과 영혼의 눈을 뜨십시오. 그리하려면 육체의 눈을 맹신하는 습관을 버리고 믿음의 나라로 들어가십시오」
4. 사순 제4주일 요한 9,1-41 (가) 맹인를 보게 하심/ 눈을 떠 보아라
함세웅 신부
고래잡이 배가 넓은 바다를 헤쳐가고 있습니다. 꼭대기 조타실에선 선장이 망원경을 들고 망망한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이윽고, 멀리 수평선에서 고래의 모습이 잡힙니다. 선장은 흥분하여 소리칩니다. “고래다! 고래가 나타났다!”선원들이 서둘러 장비를 챙깁니다.
배는 전속력으로 고래를 쫓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래잡이 배에도 눈이 밝은 사람은 있어야 합니다. 고래잡이뿐만이 아니라 어디에도 눈 밝은 사람은 꼭 있어야 합니다. 집안에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집안 식구 중 누가 남모르는 걱정거리를 갖고 있나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교회에도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교회가 자라나고 있는지, 겉모양은 교회이면서 속은 일반 사회 단체와 똑같아지는 것이나 아닌지, 잘 살펴보는 눈 밝은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나라에도 있어야합니다. 정치한다는 자들이 백성을 업신여겨 자기 배만 채우고 앉아 있는
것이나 아닌지, 백성들이 치는 세금은 제대로 백성들을 위해 사용되고 있는지, 몇몇 돈 많은 자들과 그들에게서 호사스런 대접을 받는 썩어빠진 권세자들이, 가장 애국자인 것처럼 거들먹거리지나 않는지, 이 나라 백성이면서도 어디 멀고 먼 나라에서 귀양 온 사람처럼 한숨만 지으며 살아가는 이는 없는지‥‥ 잘 살펴보는 눈 밝은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눈 밝은 사람이 있는, 그리고 그들이 제대로 대접받는 가정, 교회, 나라는 망하지 않습니다. 멀리, 그리고 밝게 보는 눈! 무엇보다도 시대를 알아보는 눈을 활짝 떠야 합니다.
서쪽 하늘에 구름이 일면 비가 온다는 것은 잘 알면서 바로 자기네 앞에 메시아의 날이 이르렀음을 몰랐기에 어리석은 유다의 백성들은 정치꾼들의 꾀임에 넘어가 “예수를 십자가에!” 하고 소리쳤던 것입니다. 눈이 멀면(盲目) 어디서나 비극을 불러 올 뿐입니다. 사랑도 눈먼 사랑은 사람을 잡습니다. 충성도 눈먼 충성은 나라를 망칩니다. 신앙도 눈먼 신앙은 교회를 무너뜨립니다.
“눈을 떠 밝게 보아라” (79.1.28)
5. 사순 제4주일 요한 9, 1-41 (가) 겉 보기와 속 보기
김현준 신부
사람은 타협하려고 하면 타협 가능한 자신과 타협하기도 하고, 속이려고 하면 속일 수 있는 타인을 속이기도 하고, 숨으려고 해도 숨을 수 없는 하느님 앞에서도 숨으려 한다.
사람의 이런 속성은 상대방이 나를 완전히 속까지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때문에 기인한다. 완전히 보지 못하기 때문에 속임과 억지도 가능하고, 속까지 보지 못하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식별하기가 어렵고, 숨어 있는 사실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눈이 어두워 앞을 보지 못하든, 사물이나 글에 어둡든 보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소경이라고 한다. 무엇을 보지 못하느냐에 따라 소경도 어떤 소경이냐로 나누어진다.
말 그대로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소경이 있다. 태어날 때부터의 태생 소경이든, 사고나 병으로 인해서든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소경이다.
글을 불 줄 몰라서 ‘눈뜬장님’이라 불리는 소경이 있다. 글을 모르기에 책을 봐도 검은 것은 글씨요, 흰 것은 종이라는 것밖에 모르는, 모든 것이 검게 보이는 ‘까막눈’을 가진 사람을 ‘눈뜬장님’ 혹은 ‘까막눈이’라고 한다.
사랑의 소경이 있다, 따뜻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하였기에 타인에게 사랑을 줄 줄 모르는, 마음이 이기적이어서 타인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다.
우린 사랑․신앙의 소경
신앙의 소경이 있다. 눈을 떴기에 사물도 분간하고, 글도 알지만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다, 자기의 좁은 눈으로 자기의 선입견 속에서 모든 것을 보기에, 자기 눈과 속보다 더 큰 하느님과 관계를 맺지 못한다. 하느님과 관계 맺지 못하기에 하느님은 없다고 하면서 언제나 자기 중심적이다.
사순 제4주일,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태생 소경을 완전히 고쳐주시며 그와 대화를 나누시는 예수님을 본다. 이 태생소경 치유 사건을’통해 예수님은 어둠에서 빛을 보게 하는 ‘생명의 빛’으로 드러나시며 어떤 사람이 진짜 소경인지도 드러난다,
태생 소경, 그는 오늘 복음에서 ‘소경’으로 아홉 번이나 거명되며 예수님, 이웃 사람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다섯 번 만남을 가자면서 숨어있는 사실을 드러내는, 누가 진짜 소경인지를 드러내는 사람이다.
그는 눈을 뜨기 전에는 죄인으로 드러난다. “죄를 뒤집어쓰고 태어난 주제에 우리를 훈계하러 드느냐”(요한 9,34)며 조롱과 멸시를 받는 죄인으로 드러나고 있다.
눈을 뜨면서는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낸다. 유대인들은 누구나 소경 됨을 죄에 대한 벌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흔한 잘못된 선입견이 뒤집어진다. 태생 소경의 경우, 그것은 “자기의 죄 탓도 부모 의 죄 탓도 아닌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요한 9, 3) 도구로 나타나고 있다.
눈을 뜬 후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낸다. ‘파견된 자’란 뜻을 지닌 “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씻으라”는 분부대로 눈을 씻음으로 눈을 뜬 그는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자’라는 것을 드러내어 증거한다.” 그분이 만일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도저히 하실 수가 없을 것이다”라고 증거한다.
태생 소경은 육체의 눈을 뜨면서 신앙의 눈도 점점 밝아진다, 눈을 뜨게 해준 예수께 관해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처음에는 단순히 “예수라는 분이 나를 낫게 했습니다”라며 객관적으로 고백한다,
그러나 질문을 거듭 받을수록 자기와의 관계 안에서 예수님을 느끼며 고백한다.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마침내 자기 믿음의 주인으로 생명의 주인으로 신앙 고백한다. “주님, 믿습니다.”(요한 9, 38)
“당신의 길이 최고야”
그렇다. 태생 소경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고 그의 여정이 우리 신앙의 역사이다. 우리도 세례를 통하여 ‘생명의 빛’을 받았고 예수님을 겉보기로 만나지 않고 속마음을 헤아리며 만나는 신앙인이 되었다.
겉보며 사는 사람들의 특징은 질문은 많이 하나 인정하지 않는다. 큰소리로 서로 올바로 본다고 다투기까지 하지만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실천도하지 않는다. 반면 상대방의 속마음을 헤아리며 속을 보이며 사는 사람들은 질문보다 “당신이 최고야”하며 먼저 인정을 해준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낮선 얼굴이 아닌 친밀한 반려자의 얼굴로 곁에 있어준다,
오늘, 사순절을 통하여 부활로 이끌어주시는 예수님께 “당신의 길이 최고야”하며 속마음을 드리자. 그리고 희생과 보속의 사순절,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속마음을 열어 보이자,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지만 하느님은 속마음을 들여다보시기 때문이다. (1사무 16,7)
6. 사순 제4주일 요한 9,1-41 (가) “진짜 소경”
권지효 신부
이 자리에 오인 여러분 중에는 소경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정말 소경이 아니라고 자부할 수 있습니까? 소경이란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인가를 보지 못하면 그는 소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무엇을 보지 못하느냐에 의해서 어떤 소경인지 알 수 있습니다.
먼저 햇빛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 있습니다. 눈에 병이 났거나 상처가 나서 앞을 못 보는 사람입니다. 글을 모르는 사람은 책을 봐도 흰 것과 검은 것 밖에는 모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을 까막눈이라고 합니다. 음악을 모르는 사람은 베토벤 교향곡과 하이든 교향곡을 들어도 그 곡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 마음의 소경도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천대만 받아 온 고아는 사랑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부모의 따뜻한 사랑과 정을 받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사랑을 모르는 소경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신앙의 소경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신앙의 눈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하느님은 없다고 까불어 대면서 돈만 벌어 재미있게 살면 그만이라고 말하는 가련한 소경들입니다.
이렇게 소경은 각양각색입니다마는 소경이 되는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그 이유란 보지 못 하게 하는 장애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햇빛을 보지 못하는 소경은 눈꺼풀이 붙었거나 각막이 흐려졌거나 또는 시신경이 마비되어 그것들이 햇빛을 가로막기 때문에 햇빛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을 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교만과 고집입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자기를 부자라고 생각하면 남의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자기자신만이 이 세상에서 최고요, 돈과 명예만 있으면 아무 것도 부족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구태어 하느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보지 못하면서도 잘 보고 있다고 하는 장님을 고쳐 줄 수 없는 법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의 부족함과 잘못을 깨닫지 못한다면 하느님의 은총과 구원을 뿌리칩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죄악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가 장님이면서도 장님인 줄 모르는 사람이 바로 진짜 소경입니다. 그러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태생 소경 중에서 누가 진짜 소경입니까? 오늘 복음의 진짜 소경은 예수님이 고쳐 주신 태생 소경이 아니라 바리사이파 사람들입니다. 태생소경은 자기의 부족함과 죄를 깨닫고, 예수님께 믿음을 고백했지만,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끝까지 자기 죄를 부정하고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진짜 소경은 자기 일에만 관심을 두고 자기 재미만 찾기 때문에 하느님의 사심없는 사랑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며, 자기의 좁은 소견과 선입관으로 모든 것을 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진리를 진리로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소경이란 자기 교만과 고집으로 눈이 멀어 하느님의 진리와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볼 수 없는 사람은 삶의 목적도 의미도 모르고 이 세상과 자기의 참된 모습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진짜 장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자기가 장님이라는 사실을 겸손되이 하느님께 고백할 때 비로소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은총의 빛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구원해 주시기를 간구할 때 하느님은 자비의 팔을 내밀어 주십니다. 이때 우리는 진짜 장님에서 하느님의 찬란한 빛을 볼 수 있는 시력을 가질 수가 있을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이제 우리는 오늘 복음의 태생 소경처럼 “주님 믿습니다!” 하고 소리 높여 외칩시다. 우리의 교만을 버리고 겸손되이 예수님 앞에 무릅을 꿇고 “주여, 나의 이 두 눈을 뜨게 해주소서!”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진짜 소경은 자기 시력이 좋다고 으스대기 때문에 신앙의 빛을 받아 들이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가 지금 잘 보고 있다고 고집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의 두 눈을 뜨게 해 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의 태생 소경처럼 우리도 우리의 교만과 고집 그리고 자기 만족을 버리고 겸손되이 하느님께 우리의 잘못과 부족함을 고백합시다. 그리고 신앙의 빛을 더해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에게 신앙의 눈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진짜 눈을 뜬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차라리 눈 먼 사람이라면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눈이 잘 보인다고 하니 너희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7. 사순 제4주일 요한 9,1-41 (가) “맹인에게 시력을 주신 예수”
김정진 신부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에게 시력을 주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나면서부터 맹인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신 것이 아니라 그에게 시력을 주신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이 그 맹인에게 시력을 주심으로 자비를 베푸신 것도 중요하지만 맹인을 보게끔 함으로 당신이 누구인지를, 즉 당신은 <세상의 빛>이시란 점을 깨닫게 해주신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맹인을 고쳐 주실 적에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내가 세상의 빛입니다>(요한 9,5)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실상 세상의 빛입니다. 세상의 빛으로서 예수님은 영신상으로 눈면 우리의 소경됨을 고쳐 주십니다.
하느님을 깨닫지 못하고 세속의 영화나 재물에만 눈이 어두운 것, 영원한 구원이나 생명보다도 현세 사물에 더 열중하는 것은 모두 영혼의 눈먼 상태가 아니겠습니까? 이 어둡고 캄캄하고 답답한 암흑세계를 환하게 비추어 줄 수 있는 세상의 빛은 도처에서 절실히 요구됩니다.
신자 여러분! 맹인은 얼마나 불쌍한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맹인은 자기가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맹인은 자기 주위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도 모릅니다. 저 아름다운 꽃이나 나무나 강산을 보지 못하며 또한 모릅니다. 생존경쟁의 대열에서도 뒤떨어집니다. 헬렌켈러나 이 용복 같은 사람은 백에 하나 천에 하나 날까 합니다. 여하튼 맹인은 비참하고 가련하고 불쌍한 인간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눈먼 영혼들은 얼마나 한심스러운 일입니까.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아름다우심을 깨닫지 못하고 죄악의 추함과 그에 따라 오는 벌을 알지 못하고 현세의 쾌락이나 행복보다 후세의 영원한 생명과 기쁨이 얼마나 더 큰 것인가를 판단하지 못하는 이들의 소경됨은 비극 중에서도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생각하건데 세상 사람들은 하느님의 계획에 대해서 눈이 멀었기 때문에 그릇된 판단을 내리기가 일쑤입니다.
즉 어린아기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수백 리 길을 단숨에 달려오는가 하면 수없이 많은 태아들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낙태시켜 버리기도 합니다. 그외 간통, 살인, 강도 행위 등 끔찍스러운 사건이 끝없이 매일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종교를 반대하는 행위, 종교와 윤리를 반대하는 일들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고 개인의 자유를 부당하게 침해하는 사례가 허다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이렇게 복잡하고 혼란합니다.
신자 여러분! 이 난세에서 무난히 처세하기 위해서는 오늘 서간에서 성 바오로 사도가 에페소인들에게 부탁한 것과 같이 <여러분은 전에는 어두움의 세계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주님을 믿고 빛의 세계에서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에페 5,8)라는 말씀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과 행위를 본받아야 합니다. 40일간이나 엄재하신 예수님은 사순절 동안 우리의 극기와 재계와 참회를 요구하십니다.
심한 엄재는 보통 사람에게는 어렵습니다. 너무 지나치게 해 보려는 사람들은 종종 실패합니다. 우리는 간단한 자체로부터 시작합시다. 가령 어떤 날은 식사 때마다 소금을 치지 않고 다음 날에는 담배를 덜 피우고 약주를 더 마시고 커피에 설탕을 넣지 않는다거나 음식의 찬을 줄인다거나 시원한 음료나 과일을 사양한다거나 혹은 한 잔의 물이라도 참는다든지 하는 등 얼마든지 좋은 마음으로 속죄하며 공로를 세울 수 있습니다. 또한 남의 무례함과 귀찮음을 참고 자신의 병약과 실망 등을 참는 것도 좋은 고행입니다. 이같은 착하고 선한 일을 하는데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의지 박약으로 자꾸 연기합니다.<지옥은 좋은 지향들로 준비된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보통으로 마귀는 사람을 유혹할 적에 죄스러운 생활의 계속을 제안하지 않고 오히려 좋은 습관을 시작하고자 할 때 그것을 연기하도록 교묘히 비위를 맞춤으로써 자기의 목적을 달성합니다. 사탄이 어린 마귀에게 영혼을 함정에 빠뜨리는 방법을 교습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함정에 빠져든 영혼이 많지 않았습니다. 사탄이 어린 마귀를 불러 ‘어떤 이론을 사용했니?’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면목이 없이 된 어린 마귀는 ‘최선을 다했어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은 없다고 말했지만 효과가 없었나 봐요’ 하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되든 안되든 또 다른 마귀 하나를 보내보았습니다. 그 마귀는 ‘나는 지옥이 없다고 말하겠어요.
그러면 그들을 꼭 잡을 수 있을 거예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도 역시 실패하였습니다 마침내 사탄은 자기의 제일 보좌요, 노련한 전문가인 브림스토운이라 부르는 자를 보냈더니 수천의 타락한 영혼들이 불타는 함정 속으로 떨어져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했느냐?’, ‘하느님은 없다. 지옥이 없다고 말했니?’ 하고 사탄이 물으니까 ‘아니요, 서두를 필요 없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라고 브림스토운은 이를 드러내고 깔깔 웃으며 대답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깊이 반성해야 하겠습니다. 아멘.
8. 사순절 제 4주일 요한 9,1-41 (가) “하느님 과 사랑의 눈”
오늘은 사순절 네번째 주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는 눈과 사람이 보는 눈이 다릅니다. 같은 사람가운데서도 하느님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눈은 중요합니다. 사물을 보니까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눈을 통하여 사람됨됨이가 들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는 눈속임이 많습니다. 모든 상품의 부가가치는 모양과 색깔에서 부터 대부분이 옵니다. 때깔고운 야채나 과실은, 실상은 몸에 해로운 농약 투성이고, 고운 포장과 아름다운 색깔로 물들여진 식품은, 화학약품 투성이의 해로운 음식입니다. TV 광고는 눈을 현혹시킴으로써 구매충동을 일으키고, 훼손은 바로 눈의 약점을 이용한 상술일 뿐입니다.
세상은 점점 본질 즉 알맹이보다는 외모 즉 포장을 중요시하게 되었습니다. 본질을 귀히 여기고 포장이나 치장을 중요시하지 않는 사람은, 됨됨이가 제대로 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눈을 통하여 사람 됨됨이가 드러난다는 말이 맞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깊은 묵상주제가 될 만 합니다. 예언자 사무엘은 王을 선택하여야 하는데, 아는 것이라고는 베들레헴의 이새 가문에 야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왕의 후보자가 있다는 사실 뿐 이었습니다. 이 집에 가서 이새의 아들 중 엘리압을 보니, 바로 왕으로 적합해 보였습니다. 잘 생기고, 튼튼하고, 똑똑하고, 재치 있고, 멋진 수염과 넓은 어깨, 당당한 태도, 근엄한 모습을 보고 왕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야훼 하느님께서는 동의하지 않으셨습니다. 집안에 있던 일곱 아들을 차례로 보았지만, 야훼 마음에 드는 왕은 없었습니다. 결국 들판에서 양치기하던 막내아들 다윗을 만나고서야 왕으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는 눈은 사무엘의 눈과 달랐던 것입니다. 형들을 제쳐놓고 막내둥이가, 튼튼하거나 장엄한 아들이 아니라 어린아이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던 것입니다.
복음을 보면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또 다시 읽게 됩니다. 맹인은 흔히 죄의 벌을 받은 죄인으로 생각되어 보잘것없는 인생으로 천시를 당했었습니다. 앞을 볼 수 없으니 다른 사람들처럼 치유의 기적을 베푸시는 예수께 가까이 갈 수도 없고, 항상 뒤 처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하여 주시고, 하느님의 놀라운 일이 드러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이 맹인은 예수가 누구이신지를 꿰뚫어 보았습니다.
그러기에 너무나도 담백하게 이렇게 자신의 믿음을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분은 하느님이 보내신 분”이라고. 그리고는 예수를 “주님”이라고 서슴없이 부르게 되었습니다. 학식있고, 율법의 전문가이며 똑똑하다는 이들은 눈을 멀정히 뜨고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데, 길거리에서 구걸하던 거지 맹인은 주님을 알아본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처럼 사람을 보시지 않으시며, 하느님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잘나거나 똑똑한 사람들이 아닌 법입니다. 우리가 지닌 가치판단의 기준은 하느님의 눈에는 가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시작부터 세상 마칠 때까지 불변한 진리입니다.
한가지 예를 듭시다. 예수님의 탄생을 보면 인간의 상식과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부터가 상식을 초월한 일입니다. 인간 가운데서 가장 보잘것없는 인간으로 말구유에서, 여행 중 주막에서 태어나십니다. 이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하러 간 천사가 제일 먼저 찾아간 이들이 누구였습니까? 로마 총독, 유데아 왕, 대제사장, 귀족, 대학자들이었습니까? 천사들은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이었던, 밤새 양떼를 돌보던 양치기 머슴들에게 갔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이 자리에 탄생하신다면 2000년 전의 천사들은 이 기쁜 소식을 누구에게 제일 먼저 알릴까요? 대통령, 국무총리, 장관, 국회의원, 재벌회장, 대법관, 장군들일까요? 아니면 교황님, 주교님들일까요? 아마도 지금도 추운 길거리에서 포장마차 하는 아저씨나, 달동네 가난한 이들, 아니면 야근 마치고 집에 돌아온 공장노동자가 아닐까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 전해진 이들은 양치기며 어부들이고, 맹인이며 , 절둑발이 이고, 나환자들이고, 폐병환자들이며, 가난한 농부이고, 노동자들이며, 달동네 도시빈민들입니다. 하느님은 잘난 엘리압보다 막내 다윗을 택하셨으며, 잘난 눈뜬 바리사이과 사람보다 눈먼 거지를 택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눈은 우리 눈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이렇게 가난하고 소외 받고 눌리운 사람들을 동정하거나,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하거나, 관심을 갖거나, 그들과 상종하거나, 그들과 함께 하려고 하면 무엇이라고 낙인을 찍히는지 아십니까? 예수께서는 이것을 너무나 잘 아셨습니다. 그 길이 잡히고, 고문당하고, 모욕을 당하고, 터무니 없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가는 수난의 가시밭 길이며 , 종국에는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것까지 알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쓴잔을 아버지의 뜻에 따라 마시고, 이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이것으로 하느님과 인간이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겠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구속사업의 신비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머리로 알아듣기 힘든 하느님의 구원 역사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눈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사람의 눈으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사람을 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가장 값지고 귀중한 이들은 누구입니까? 세상에서 보는 것과는 정반대로 보잘것없고, 보이지도 않고, 보여도 눈길 주기 조차 거부한 그러한 이들이 아닙니까?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천대받는 사람들, 세상에서 위험하다고 단죄한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번 한 주일 묵상 주제는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을 나도 선택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여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눈으로 이 세상의 사람들을 보게 하여 주소서 ” 아멘.
9. 사순 제4주일 <요한 9,1-41> (가) 스스로 소경이 된 사람들
젊은 시절엔 희미한 불빛 아래서도 깨알같은 글씨를 잘 읽을 수 있다, 그러나 40대 중반에 이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경을 써야 작은 글씨를 읽을 수 있다. 50줄에 들어서면 점점 더 안경알의 두께가 찐빵처럼 두꺼워져야 한다. 이상한 것은 먼데 있는 것은 잘 보이는데, 가까이에 있는 것이 잘 안보인다는 것이다.
나이가 먹으면 자기자신만 보지말고, 먼데 있는 이웃을 살펴보고 그들을 걱정하고 살라시는 하느님의 섭리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눈을 내리 뜨고 자신만을 볼 것이 아니라, 멀리 저 하늘의 하느님을 바라보고 살라시는 하느님의 뜻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볼만하다. 어쩠거나 눈이 흐릿하면 여간 불편한것이 아니다. 하물며 소경이 된 사람들의 고통이야 어떠할까? 나면서부터 소경이 된 사람은 그 나름대로 적응이 됐을지 모른다. 그러나 중간에 소경이 된 사람의 답답함은 필설로 다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이슬람교도들이 준 교훈
요즘은 의슬이 발달하여 웬만한 병은 퇴치될 수 있다. 눈이 안 보이는 사람은 각막이식수술이나 안구수술을 받아 시력을 찾기도 한다. 의사들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시력을 찾기 위한 피나는 노력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 당연하고 그들 모두가 다 시력을 하루 빨리 얻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그런데 뜻밖의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가슴이 왠지 찡하고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는 그런 이상한 경험이었다.
분명치는 않지만 약 15년 전쯤의 일이다, 성지순례단을 따라서 예루살렘을 간 적이 있다. 때마침 거기엔 나의 은사이신 안 신부님께서 ‘예수님 무덤성당’에 계셨다. 반갑게 그분을 만나뵙고, 신부님의 안내로 여기저기를 방문하였다.
서쪽 문을 지나 이슬람교도들이 장사를 하는 시장을 통과하기 전 나는 신부님께 질문하였다. “신부님, 여긴 이상하게 소경들이 많네요?” 내가 질문하는 동안에도 60대쫌으로 보이는 잘생긴 소경 하나가 안내인의 손을 잡고 지나가고 있었다.
신부님은 내게 “그 사람들은 열심한 이슬람교도들인데, 그들의 성지인 ‘메카’에 다녀와서 스스로 눈을 멀게 한 사람들이야, ‘메카’를 보았으니까 이젠 세상에서 다른 것을 볼 것이 없다는 거지. 다른 것들을 봄으로써 눈이 더러워지기 전에 눈을 멀게 한거야. 대단하잖아!”
나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참으로 이상한 현기증 같은 것을 느꼈다.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이다. 나는 그 날 종일토록 그 이야기를 되새기곤 했다. 심지어 “나는 한국에 돌아가서 내 눈을 찔러 소경이 될 수 있는가?”라는 생각에 김이 빠져서 나 자신의 부족한 믿음을 슬퍼하였다.
아직도 나는 내 눈을 멀게 할 수 없으니 계속 나의 부족한 믿음을 슬퍼할 뿐이다.
복음의 메시지
예수님은 소경이었던 사람에게 눈을 뜨게 해주신다. 그 날이 안식일이라서 안식일에는 의료행위를 하면 안 된다는 율법을 생각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 생트집을 잡기 시작한다.
소경은 육신적으로 눈을 떴으나 영적으로도 눈을 떠야 한다.
영적으로 눈을 뜬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굳은 믿음을 갖는 것이다.
그에게 예수께서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하고 물으셨다. 그는 “선생님, 믿겟습니다. 어느 분이십니까?”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지금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하고 말씀하셨다. “주님, 믿습니다”하며 그는 예수 앞에 꿇어 엎드렸다. 그는 영적으로도 눈을 떴다.
영적으로 눈을 뜬다는 것은 바로 “주님, 믿습니다”를 고백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영적인 소경들인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눈을 뜨라고 말씀하셨다.
오늘도 예수님은 성당에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내게 말씀하신다. “영적인 눈을 뜨라.”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영적인 눈이 점점 더 흐릿해져 가는 신앙인들이 많아지는 느낌이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스스로 자신의 눈을 쩔러 소경이 되지는 못할지라도, 우린 무언가 해야 한다.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보기를 좋아하는 것을 좀 자제하는 것은 어떨까? 아마 그것은 텔레비전이 될 수도 있고 잡지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루 중 오랜 시간을 헬레비전에만 정신 솓으면 영적 양식이 되는 기도도, 성서 읽기도 사랑의 실천 기회도 다 사라지게 될 것이다, 영적인 눈은 점점 흐릿해지는 것이다,
사순절이다. 영적인 눈을 뜨기 위해서 작은 것이기는 하지만, 텔레비전 보는 시간을 줄이고, 맹인들의 고통을 자주 생각해보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도와줄 생각도 해야 할 것이다.
영적인 눈을 뜨기 위해서는 나만의 의지로서는 불가능하다.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한다.
10. 사순 제4주일 요한 9,1-41 (가) 하느님의 시선으로
오늘의 전례 말씀에서는 내가 바라는 이익, 나의 선입관들을 버리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이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며 만나야 함을 가르칩니다.
제1독서의 사무엘과 다윗의 만남은, 하느님의 시선은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사무엘은 다윗의 형 엘리압의 용모와 신장을 보고 마음속으로 ‘바로 여기 야훼께서 기름부어 성별하실 자가 있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의 생각입니다. 잘생긴 사람에게 호감이 가고,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무조건 호의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은 이러한 우리의 모습보다도 더 깊은 혜안이 있음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외형적인 용모나 감정적인 선입관을 뛰어넘어 누구나 똑같은 당신의 자녀로 받아들이시며 그들의 마음을 바라보고 판단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한 사람들의 대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하느님께 마음을 열어 새로운 삶을 맞이하게 된 소경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예수님께 대한 미움의 감정에 휩싸여 그 소경마저 함께 미워하고 배척합니다. 그것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유다인들의 마음 한구석에 이미 예수께서는 ‘우리와 다른 이’라는 선입관과 미움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반대로 복음에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열려가는 소경의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체험과 감사에서 시작됩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유다인들의 엇갈리는 반발속에서도 그는 자신에게 베풀어진 기적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예언자로, 예언자에서 주님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자신의 이러한 체험을 통하여 그는 하느님께 감사할 줄 알고 하느님께 대하여 열린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성서에 나오는 소경의 기적만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하느님의 은혜에 대해서 얼마만큼 민감하게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시인은 한 송이 꽃이 곱게 피는 것을 보고도 기적이라고 하듯이, 일상에서 늘 있을 수 있는 크고 작은 체험들에 대하여 얼마만큼 마음을 열고 생활하는가에 따라서 하느님의 시선에 얼마나 더 가깝게 세상을 바라보는지 그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느덧 사순시기의 반을 넘었습니다.
그 동안의 삶은 어떠했는지 반성하면서 참으로 주님을 알아본 소경처럼 우리의 신앙도 더욱 깊어지도록 이 사순시기를 잘 지내야 하겠습니다.
11. 사순 제4주일 요한 9,1-41 (가) 실락원
최인호 베드로/작가
존 밀턴(1608-1674)은 셰익스피어와 더불어 영국이 자랑하는 대시인입니다. 대학시절에는 성직자가 되기 위해 라틴어를 열심히 공부하였으나 졸업한 뒤에는 대륙으로 건너가 이탈리아에서 갈릴레오를 만나 우정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그후 청교도혁명으로 공화제가 수립되자 고국으로 돌아와 크롬웰의 비서로 들어가 붓을 통해 군주체제에 강력히 대항하는 투사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노력도 보람없이 왕정이 복구되자 체포되어 사형을 당할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과로로 인해 실명당하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기적적으로 처형을 면한 밀턴은 이때부터 전생애를 통해 구상했던 「실락원」을 집필하기 시작했습니다.
구약성서를 소재로 아담과 이브의 타락과 낙원추방을 묘사하여 인간의 원죄를 주제로 하고 있는 이 대서사시는 눈이 먼 밀턴이 입으로 구술하고 그의 딸이 받아쓰는 고통 속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실락원 처음에 밀턴은 다음과 같이 자신이 쓰려고 하는 서사시의 주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내 시의 대주제(大主題)의 높이는/ 영혼의 섭리를 밝히고자 함이요/ 또한 사람에게 신의 도리를 옳게 전하고자 함이다/ 먼저 말하라/ 무릇 하늘도 그대의 눈을 가려 숨길 수가 없도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패배해 사형수가 되었고 눈까지 먼 참혹한 지경에 이르렀지만 그렇다고 하늘이 자신의 눈을 가려 영원한 신의 섭리를 숨길 수가 없음을 깨달은 밀턴은 신의 도리를 올바르게 전하기 위해서 붓대신 입으로 불후의 명작을 토해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밀턴은 육체의 눈이 먼 순간 마음의 눈이 떠진 것입니다.
주님은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거지에게 진흙을 개어 눈에 바른 후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게 함으로써 눈을 뜨게 해주십니다. 유다인들은 이 기적을 믿으려 하지 않고 생트집을 잡아 거지를 회당 밖으로 쫓아냅니다. 심지어 그 거지를 낳은 부모조차도 두려워서 자신의 자식을 모른 체합니다. 주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본 사람은 아이로니컬하게도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던 그 거지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 꿇어 엎드려서 “주님, 믿습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그는 주님을 믿음으로써 눈을 떴을 뿐만 아니라 심안(心眼)까지 얻은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자신들을 ‘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유다인들은 실제로 눈앞에 있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소경이며,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던 거지 소경은 오히려 눈밝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눈이 잘 보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것은 한순간의 현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는 이 세상은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1고린 7,31). 다행히 우리는 이미 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얼굴을 씻고 영적인 마음의 눈을 뜬 ‘파견된 자’들입니다. 밀턴이 비참한 패배와 육체의 눈이 먼 고통 속에서 비로소 마음의 눈을 뜬 것처럼 주님을 향한 우리들의 영적인 눈도 이 세상을 향한 육체의 눈이 어두워지면 어두워질수록 더욱 밝아질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향한 영적인 눈이 밝아졌을 때에 우리는 죄를 지음으로써 쫓겨난 실락원에 “오늘 정녕 주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루가 23,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