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부활 제 6주일 주일 강론 모음

 

부활 제6주일





         1. 강길웅 신부(가)/2                  2. 김몽은 신부(가)/4


         3. 김정진 신부(가)/5                  4. 이경상 신부(가)/7


         5. 정지웅 신부(가)/8                  6. 최인호 작가(가)/9


         7. 성령을 기다리며(가)/11            




1                 부활 제6주일 (가해)   성령의 은혜와 조건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사도 8,5~8.14~17 (사도들이 손을 얹자 사마리아 사람들도 성령을 받게 되었다) 


제2독서 Ⅰ베드 3,15~18 (그리스도께서는 몸으로는 죽으셨지만 영적으로는 다시 사셨습니다)


복 음 요한 14,15~21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너희에게 보내 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자 예루살렘이 온통 술렁거리게 됩니다. 자신들이 죽였던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니 이건 참으로 놀랍고도 해괴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식하게 보였던 제자들의 설교로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고 따르는 것을 보고는 유다의 지도자들이 당황하게 되었으며 끝내는 권력과 결탁하여 교회를 박해하게 됩니다.




그들은 먼저 스테파노를 돌로 쳐죽였으며 이에 놀란 신자들이 남으로 북으로, 동으로 서로 피신하게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피난 간 신자들이 흩어진 그곳에서 새로운 전도를 하여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는 것입니다. 오늘 1독서에 나오는 이야기도 마찬가집니다.




필립보가 피신한 곳은 사마리아였습니다. 그는 거기서 감동적인 설교와 그리고 성령의 은사를 통해서 얻은 능력과 기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회개시켜 세례를 주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가 사마리아에 달려가서 그들에게 안수 기도를 함으로써 성령을 받게 해 줍니다. 이것은 일종의 세례식 다음에 견진식을 거행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처럼 기쁜 소식은 박해의 바람을 이용하여 더 멀리 그리고 더 넓게 전파됩니다. 제자들은 본래 무식하고 겁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목에 칼이 들어가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바로 그것이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성령의 은혜와 열매의 결과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최후만찬에서의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 내용입니다. 주님께서 이제 당신의 제자들을 세상에 남겨 두고 떠나려 하니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이제 스승이 떠나면 제자들은 오합지졸이 될 것이고 교회는 풍비박산이 날 것입니다. 당신의 업적도 말씀도 이제 끝장이 날 판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을 약속해 주십니다. 성령은 그 자체로 하느님이시지만 또 하느님의 능력이시기 때문에 약한 제자들을 강하게 해 주실 것이고 또 어리석은 그들을 지혜롭게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무식한 제자들이 어떻게 전도하며 교회를 성장시킬 것인지를 직접 도와 주실 것입니다.




사실 성령과 함께라면 안되는 것이 없고 또 못할 일도 없습니다. 믿는 이들은 그래서 성령의 은혜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을 기대해야 하며 소망해야 합니다. 믿는 이들 안에 성령이 살아 계시지 않는다면 그는 실로 휘발유 없는 자동차요 알맹이 없는 깡통과도 같습니다. 아무짝에도 못쓰는 바보가 됩니다.




제가 전에 있던 본당에는 시장에서 목판을 놓고 나물을 파는 좀은 어줍잖은 자매님이 한 분 계셨는데 배움도 적으셨고 믿음도 약했습니다. 주일 미사에는 간신히 나왔지만 늘 바빴고 그래서 봉사나 활동은 엄두도 못 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령 안수를 받고 나서는 완전히 새 인생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한번은 성당에 기도하러 들어갔더니 마침 그 나물 파는 아주머님이 어떤 할머니를 옆에 앉혀 놓고는 “이제 갈 곳이 어디 있겠느냐. 믿어서 은혜 받고 구원받아야 한다.”는 식으로 전도를 하고 기도를 해 주는데 어찌나 감동적이고 아름답게 보였던지 저까지 넋을 잃고 그 분위기에 빨려들어 간 적이 있었습니다. 분명히 성령의 역사하심이었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제자들처럼 오죽잖은 사람들도 위대한 인생으로 빛나게 됩니다. 아무리 무식하고 천한 사람도 하느님의 능력과 지혜가 충만하게 됩니다. 그것은 실로 하느님의 선물이면서 동시에 그분의 위대한 사랑이십니다. 그러나 아무나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그릇이 깨끗해야 은혜의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서에 보면,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회개가 필요하며(사도 2,38) 또한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요한 20,23). 더러운 오물을 잔뜩 부둥켜안고 있는 상태에서는 하느님께서 아무리 소나기 같은 은혜를 내려 주신다 해도 담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요한 14,15~21참조)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성령을 얻는 방법입니다.




자녀가 진정 부모를 존경하고 사랑한다면 그는 부모님이 원하시는 것을 찾아서 행하게 됩니다. 부모님이 공부를 원하시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일을 원하시면 일을 부지런히 합니다. 그러면 부모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자녀들에게 베풀어주십니다.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는 이제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강림하신 사건을 기념하게 됩니다. 우리도 똑같이 그분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보다 더 그분의 능력과 지혜로써 살아야 합니다. 따라서 자신을 깊이 성찰하여 깨끗하게 비우고 하느님 사랑하는 마음을 이웃에 전하도록 합시다. 성령의 은혜가 늘 충만할 것입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들처럼 버려두지 않겠다”(요한 14,18).












2       부활 제6주일 요한 14,15-21 (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에게


김몽은 신부




우리는 존경과 사랑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존경과 사랑이 함께 있지 않을 때 ‘존경’은 존경이 아니게 되고,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이 됩니다.



국어사전에는 ‘존경’이라는 단어를 “받들어 공경함, 멸시의 반대”라 되어 있고, ‘사랑’이라는 단어는 “사람이나 물건을 귀여워하는 마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받들어 공경하는 것’과 ‘귀여워하는 것’과는 별로 동질적인 면이 없는 것 같습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물론 사전에 기록된 말이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맞는 말입니다만, 표면적인 표현일 따름입니다. 만일 우리가 좀더 그 내면을 들여다본다면, 존경과 사랑이 함께 있지 않다면, 그것들이 허위가 된다는 것을 즉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위가 높은 고관 나리나, 돈이 많은 회장님이나 사장님 같은 유명인사가 가까이 올 때, 우리는 모두 일어서서 경례를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존경해서 그러는 지요?


더군다나 사랑해서 그러는 것도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왜 경례를 하는 것일까요?


단순히 높으신 분이기 때문에, 혹은 돈이 많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요?


그렇다 하더라도 그분들에 대한 사랑이 깃들여 있지 않으면 진정한 존경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 경례가 관습에 의해서 마지못해 하는 것이거나, 혹은 경례하지 않으면 그분으로부터 소외를 당하거나 멸시 내지는 보복을 당할까 두려워서 하는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아첨하는 마음에서, 그분들로부터 이득을 보려는 탐욕에서 하는 수도 있습니다.


이것들은 존경이 아니라, 하나의 가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높으신 분이나 돈 많은 재벌에게 특별한 호의를 베풀고 그분들의 목에 화환을 걸어줍니다만, 그것은 진정한 존경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거래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시장에서 물건을 팔고 돈을 받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관이 그 지위에서 내려와 평민이 되었거나, 재벌이 망하여 한낱 소시민으로 전락하였을 때에도 사람들이 그분들에 대해 경례하고, 화환을 걸어 줄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반대로 그전에 경례하고, 화환을 걸어 준 그것과 반비례해서 그분들에게 더 심하게 모욕적인 태도를 보일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세상 인심이라고들 말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고관이나 재벌이 아닌, 마을 사람들, 농민, 노동자, 심지어 하인에게 까지라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느끼며 사랑하는 눈으로 바라볼 때, 그분들에게도 존경이 갑니다. 그분들이 하는 일이나, 고관이나 재벌이 하는 일이 별로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을 사람들, 노동자, 농민, 하인들 모두가 그분들이 할 일이 따로 있기 때입니다.


만일 노동자가 일손을 멈춘다면, 농민이 농사를 안 짓는다면, 이 사회는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이런 일들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분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거나, 멸시하고 무시하기도 합니다. 그분들이 없으면 사회도 없습니다.




그분들이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도 남으로부터 존경받지 않더라도, 소외당하고 있더라도,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묵묵히 자신들이 할 일만 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의 사회는 그런 대로 유지돼 나간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어찌 그분들에 대한 존경심이 우러나지 않겠습니까?




사실 가슴속에 감사의 마음과 함께 진정한 사랑을 지녔을 때에는 고관이나 재벌, 농민이나 노동자, 지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인간적 차별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은 인간에 대한 존엄성 안에서 싹트고, 그 존엄성이 각 사람에 대한 존경으로 승화될 때우리 사회는 아름다운 사회가 될 것입니다.












3      부활 제6주일 요한 14,15-21 (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에게


김정진 신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은 일정한 규정을 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광범위하고 다양성(多樣性)을 띠고 있고 융통성 있게 다룰 수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사랑의 진실을 계명에 대한 충실한 봉사로 규정짓고 계시는 점에 유의해야 되겠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사랑한다면 내 계명을 다 지킬 것입니다.>


또한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요한 14;15,21)라고 예수님은 준법행위가 바로 당신께 대한 사랑의 실천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사랑은 말이나 혀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에 있고 행동으로 표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천 없는 사랑은 진실한 사랑이 아니란 것입니다. 기도서를 펴고 「애덕송」을 외움으로써만 사랑의 덕을 닦는 것이 못 되며 <당신들도 서로 발을 씻겨 주어야 합니다.>(요한 13;14)하신 말씀을 따라 행동으로써 하느님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 요한은 서간에서 말씀하시기를, 형제를 사랑하는 이는 하느님의 아들이고 사랑하지 않는 자는 악마의 자식이라고 하였습니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이것을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즉 우리는 성당에 들어가서 기도를 바치거나 성당을 훌륭하게 건축할 수 있습니다. 대로는 악마의 자식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아들과 악마의 자식의 구별은 형제를 사랑하는 행동 여하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 여러분!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마태 7;21)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이란 사랑의 행동을 말합니다. 세말의 공심판 날에 있어 예수님은 이점에 관하여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곧 내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하며 신자들을 칭찬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후 신비적인 방법으로 당신을 모든 사람, 특히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이들, 멸시와 억압을 받고 있는 이들, 그리고 가난하고 불우한 이들과 똑같은 이로 취급을 받고 계십니다. 그런 고로 우리는 마음으로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에게 관대하며 괴로운 때에 온유하고 겸손하며 불행한 사람들을 보고 입으로만 동정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실제로 도와 주며 마음의 깨끗함과 평화를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형제 여러분 ! 「사랑의 박사」라고 불리우는 성 아우구스띠노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고 하는 두 사랑을 두 날개로 비유하여, 인간은 그 날개로써 하늘나라로 훨훨 올라간다고 하였습니다. 이 같은 귀중한 사랑을 어떻게 몸에 지니고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사랑을 사려면 얼마나 많은 대금을 지불해야 하겠습니까. 만일 빵을 사려고 하면 동화(銅貨)를 줍니다. 토지를 구입하려고 하면 금화를 줍니다. 한데 사랑을 사려고 하면 자기 자신을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랑의 값은 당신 자신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위하여 우리의 온갖 것을 바친다면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안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은 헝가리 왕의 공주로서 독일의 트린기아 영주의 가정에 출가하였는데 애덕의 성녀로 뭇사람의 칭찬을 받은 유명한 분입니다. 성녀는 언제나 아침 일찍 일어나 따끈따끈한 빵을 바구니에 담아 가지고 길거리의 불우한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곤 하였습니다. 주인은 악인이 아니었지만, 그 정도까지 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 하면서 중지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하느님과 아이들에 대한 사랑의 열에 못 이겨 아침마다 몰래 집을 나오곤 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침 도중에서 주인에게 들키게 되었습니다.




주인은 성녀에게 그 바구니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성녀는 미소를 띠며 「제단을 장식할 장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윽고 보니 그 안에는 빨간 장미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러한 성녀의 이야기는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한 빵은 제단을 장식할 장미와 똑같이 하느님 대전에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것이나 제단을 장미로 꾸미는 것이나 모두 예수님께 대한 봉사이며 사랑의 실천입니다. 예수님은 감실 안에 계시는 것과 같이 가난하고 불우한 이들 안에 현존하십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은 바고 예수님을 행동으로 사랑해 드리게 됨을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아멘.












4          부활 제6주일 <요한 14,15-21>(가)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이경상 신부




오늘 복음은 지난 주 복음과 마찬가지로 ‘고별강론’의 일부다. 지난 주 고별강론(14,1-14)이 “떠나간다”는 이별의 말을 강조했다면 오늘 복음은 “돌아온다”는 위로의 말을 강조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른 협조자”(그리스어로 ‘파라클레토스’인데 위로자 또는 변호자라는 뜻) 파견과 자신의 귀환을 약속하면서 그들을 위로한다. 그러면 오늘 복음 말씀(요한 14,15-21)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15절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무엇보다도 그분의 뜻을 따르고 그분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16절 여기서 성령을 “다른 협조자”라고 한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첫번째 협조자셨기 때문이다.


17절 첫번째 협조자이신 예수님이 진리이신 것처럼(14,6) 다른 협조자인 성령도 진리 자체이시다. 성령은 진리를 증언하고 제자들을 진리로 인도하신다. 세상은 진리의 영과 분리되어 있어 그 영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제자들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 성령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18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시는 것은 당신 제자들과 함께 계실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19절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그분을 보지 못하겠지만 마음의 눈을 가진 제자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20절 “그 날”은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예수님의 부활과 그 이 후의 시간을 가리킨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 제자들이 아버지와 함께하는 생명의 공동체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21절 이 생명의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은 사랑과 순종이다. 그리스도의 계명은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 계명을 사랑하고 순종하고 실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사랑을 생활로써 증명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뜻을 따르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길이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은 진실로 하느님을 완전히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1요한 2,5). 요한1서 5장3절에서는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럼 예수님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마르코복음 12장30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세도 마찬가지다. 온 마음과 정신, 온 힘으로 예수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렇게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 그분을 사랑하면 어떤 결과가 올까? 하느님께 사랑을 받게 될 것이다.












5      부활 제6주일 요한 14,15-21 (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에게


정지웅 신부




세상을 살아가자면 벅차고 고달픈 의무와 약속에 쫓기게 됩니다. 인간사의 좋다는 모든 일에는 큰 의무와 약속이행이 숨가쁘게 따르기 마련입니다. 사랑과 기쁨이 벅찬 결혼의 즐거운 약속도 어느새 부모로서의 의무 또는 부부로서의 약속이행에 성실하도록 우리에게 요청해 오고 있고, 높은 지위나 명예에도 해당되는 의무수행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의무수행과 약속이행에서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신약의 성령강림에 해당하는 구약의 오순절은 하느님과 인간사이에 계약을 맺은 날입니다. 유대 백성들이 에집트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홍해를 건너서(빠스카) 50일 후에 시나이산 기슭에 당도하였습니다. 이 때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돌에 새겨진 열 가지 계명을 주시며,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이 계명을 지키라”하셨고 유대백성은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하고 약속하였습니다. 이것이 첫 성령강림이었습니다. 이 약속을 지키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었고 자신들이 행복하여질 수 있는 조건이었습니다만 인간적인 욕망 때문에 그 계명을 어기며 배신행위를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구약시대처럼 십계명이 새겨진 돌 판이 아니라 친히 한 구체적인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시어 그 십계명을 당신 실생활로 똑똑히 우리 눈앞에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사실 성령강림은 예수님 생애와 사업의 완성이며 하느님의 사랑스런 신약의 성령강림은 바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숙된 우리와 하느님 사이에 새로운 사랑의 계약을 우리 각자 마음에다 새겨 주시는 실로 즐겁고 기쁘기만 한 인간사의 결혼 계약과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대에는 어머니의 젖을 먹었고, 부모에게서 말을 배우며 모든 일에 일일이 지도를 받아 성숙되어 왔습니다. 즉 많은 규제 하에 자라왔습니다만 장성하여 성인이 되었을 때는 스스로 약속을 하며 약속을 이행할 책임과 의무를 가지며 올바른 생활관을 개척해 나가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도 우리는 지금 의무적인 힘에 의존하며 규제에 매일 때가 아니라 철저히 자율적으로 신앙생활을 해나갈 때입니다. 그래서 맹목적으로 교회의 명령에만 따르고 자발적인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며, 책임을 모두 교회에만 떠맡기는 그런 유치원생의 생활태도를 버리고 한 성숙된 신앙인답게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며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생활태도로 하느님과 우리와의 약속을 성실히 이행할 의무와 책임감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성세와 견진 성사로서 성령의 일곱 가지 은혜를 받았습니다. 즉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계약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사도들처럼 주님께 대한 사랑에 불타며 항상 주님의 생활을 하였는지, 아니면 자신의 인간적인 원욕을 따라 생활함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배반하였던 유대백성들과 같이 살아왔는지 반성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과의 약속을 갱신하여 성실하게 그 약속을 이행할 은총을 간청하는 오늘 성숙된 성인으로서 약속이행의 책임을 깊이 느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주님의 뜻을 충실히 실행하고자 하는 노력이 계속될 대, 성령의 은총이 우리 영혼 깊숙이 활동하십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때때로 나쁜 것을 알면서도 성령의 타이르심을 듣지 않을 때 주께서는 마음의 상처를 받으십니다. 그래서 성령의 뜻대로 아니하고 내 개인의 뜻대로만 하여 나갈 때 주님의 권고는 침묵을 지키십니다.


이때 영혼은 더 거룩히 살아보겠다는 전진의 의욕을 잊어버리고 습관적인 행위 ‘감각이 없는 기계’와 같은 생활을 하게 됨으로 참된 사랑이 깃든 올바른 구령의 길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약속을 충실히 실천하며 성령의 권고를 따라 사는 생활은 내가 내 안에 살지 않고 주님께서 내 안에 사시는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세속이 줄 수 없는 마음의 평화 그리스도의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임하소서, 성령이여, 우리 마음에 충만하시어 우리 안에 사랑의 불을 놓아주소서”.












6             부활 제6주일 <요한 14,15-21>(가)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최인호 베드로/작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는 독일이 낳은 20세기 최고의 시인입니다. 미숙아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는 부친을 좇아 군인이 되려고도 했습니다. 병약하고 시인적 기질이 풍부하였던 청년시절 조각가 로댕(Rodin)의 비서로 일하는 동안 예술의 진수(眞髓)를 접하게 됨으로써 대시인으로 급성장하게 됩니다. 어느 가을날 자신을 찾아온 이집트 여자친구를 위해 장미꽃을 꺾다가 가시에 찔려 패혈증으로 생애를 마친 릴케는 깊은 종교적인 내적 묵상을 시(詩) 속에 접합시켜 서구시의 정점으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가을날’이란 시는 그런 경향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하였습니다/ 해시계 위에다 당신의 그림자를 얹어놓으십시오/ 들판에다 많은 바람을 풀어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실에게 결실을 명하십시오/ 열매 위에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키고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송이 속에 스며들게 하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계속 고독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잠자지 않고,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쓰고/ 그리하여 낙엽이 뒹구는 가로수 길을/ 불안스레 이리저리 헤매일 것입니다”


고독한 가을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마지막 과일의 단맛을 완성시켜달라는 릴케의 시적 감수성은 첫마디에서부터 번득이고 있습니다.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때가 되었다는 이 시의 첫 구절은 바로 성서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빌려온 것입니다. 주님처 럼 ‘때를 기다린 사람’이 있었을까요.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어머니가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알리자 주님은 “그것이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아직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라고 말씀하신 것을 시작으로 주님께서 행하시는 훌륭한 일들을 널리 알리려는 제자들의 말에 “너희에게는 아무때나 상관없지만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요한 7,6), “그러나 이제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제각기 자기 갈 곳으로 흩어져 갈 때가 올 것이다. 아니 그때는 이미 왔다”(요한 16,32) 등 주님의 인생은 릴케의 시처럼 때를 기다린 일생이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을 마치고 붙잡히기 직전 하늘을 우러러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이때 주님은 이제 때가 왔음을 선포하십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이것을 통해 주님이 기다리신 때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것임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주님이 돌아가시기 직전 “이제 다 이루었다”(요한 19,30) 하고 숨을 거두신 것은 바로 그런 ‘때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때를 기다려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라는 완성과 함께 그리스도가 되심으로써 이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이제 때를 기다릴 차례는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라고 노래한 릴케의 시처럼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를 기다리는 우리에게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때는 이미 가까이 다가와 있습니다.












7            부활 제6주일<요한 14, 15-21>  (가) 성령을 기다리며




한국전쟁이 끝난지도 거의 50년이 되어간다. 공포와 불안, 배고픔과 슬픔, 고통과 이별 등은 전쟁이 가져다 준 가혹한 선물이다. 전쟁을 경험한 우리로선 코소보 사태가 남의 일 같지 않다. 전쟁으로 많은 형제․자매가 죽고 이별한다. 이 아픔은 수십년간 계속된다. 전쟁은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 피로 물든 산하엔 지뢰와 불발탄이 50년이 지나도록 썩지도 않고 버티고 있으면서 후손들의 목숨을 오늘도 노리고 있다.




협조자


6․25 때 유엔군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변변한 비행기나 탱크가 한대도 없었던 우리로선 속수무책이었다. 유엔군이 도왔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민주를 노래할 수도 없을 것이고, 하느님을 마음대로 찾을 수도 없을 것이다. 다만 ‘공산당 만세’를 외치고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종교인들에겐 박해가 가해졌을 것이기에, 존재자체도 의심스럽다. 벌써 저승길을 갔을지 누가 알랴!


유엔군은 협조자로 우리에게 달려왔고, 많은 이들이 목숨을 바쳤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확신도 없는 제자들에게 협조자이신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내가 아버지 하느님께 구하면,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다른 협조자’를 보내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요한 14, 76) “다른 협조자를 보내주겠다”고 말씀하셨으니 그렇다면 협조자가 이미 있었다는 것인데 그분은 누구신가?




첫번째 협조자는 예수님 자신이셨다, 예수님은 인간이 하느님의 뜻대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마침내 십자가의 제물이 되시기 전, 이제 시간이 다 된 것을 아시고 다른 협조자를 보내실 약속을 하셨다.




협조자이신 성령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예수님의 계명을 의심 없이 따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주 믿음을 요구하셨다. 믿음만 있으면 산보고 “번쩍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마르 11,23)고 말씀하셨다. 이때나 그때나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순교자적인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다. 때론 믿음으로 살겠노라고 어금니를 깨물며 결심하지만 작심삼일이기 일쑤다. 그래서 자신의 나약함을 한탄하며 좌절하기 일쑤다. 담배 피우는 사람이 끊기 위해서 계속 결심하고 또 피우기를 반복하듯이, 그렇게 반복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유혹이 끊이질 않는다.




주님을 따라 나서려하면 저항세력이 길을 막고 나타나서 묻는다. 어디를 가려는가? “주님께로 가려한다”라고 말하면 “이 사람아! 주님은 무슨 주님‥‥여기에 더 좋은 데가 있네”하며 소매를 잡아끈다. 웬만한 믿음이 아니면 한번의 꼬임에 그냥 나가떨어진다. 사탄의 유혹은 끈질기다. 찰거머리처럼 착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거기에 빠져서 정신 없이, 세속적으로만 놀다가, 어둠의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면 또 죄 중에서 허덕였음을 깨닫고 가슴을 치게 된다. 멍든 가슴엔 좌절과 허무가 밀려든다.


 


이러한 인간의 나약함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협조자’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분은 유혹에서 이길 힘을 주실 것이고 믿음을 튼튼하게 키워주실 것이라고 언약하셨다, 또 주님의 계명을 잘 지킬 수 있도록 힘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복음의 메시지


믿음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대는 협조자이신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한 사람이다. 성령은 협조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나는 협조자이신 성령님을 너희에게 보낼 수 있다. 성령님을 간청하라.”


 


우리는 자주 파라클리토 성령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위로자이신 성령이라는 뜻이다. 희랍말의 본래의 의미는 옹호자, 도움을 주는 자는 뜻이다. 그러므로 위로가 필요한 사람은 모두 성령께서 마음에 오시기를 청해야 한다. 성령께서 오시면 달진다. 그분은 은사와 열매로 가득 채워주신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성령을 받고 새 사람이 되었다. 우리도 달질 수 있다. 믿음으로 가득한 사람, 확신으로 힘이 넘치는 사람,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이 될 수 있다.




“할 수만 있다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안 되는 일이 없다.”(마르 9, 23)


이 말씀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말씀이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협조하려 오신 분이기에, 협조를 요청하는 사람들이 어서 불러주기를 기다리신다. 마치 119대원들처럼 그렇게 기다리신다. 과연 우리는 지금까지 성령님께 얼마나 기도하고, 얼마나 부탁을 드렸던가! 어떤 신자들은 성령님! 이고 말만해도 알레르기 현상이 날 정도고까지 말한다.




너무나 익숙지 않다는 얘기다. 우린 오랜 세월 성령님께 너무 무심하지 않았나 반성도 해본다. 성령은 우리를 성화시킨다. 열심히 살아 보고자하는 사람들은 성령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야 할 것이다.


1998년 성목요일에 사제들에게 보내신 교황님의 서한에는 성령의 일곱가지 은혜를 청하라고 하였다, 또 모든 신자들에게는 명오를 열어주시고, 사랑을 주셔서 질병, 고통을 즐겨 참는 은혜를 달라고 청하라고 하셨다. 새겨들을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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