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대축일
1. 강길웅 신부(가)/2 2. 허영업 신부(가)/4
3. 남재희 신부(가)/5 4. 류봉구 신부(가)/7
5. 김정진 신부(가)/8 6. 세상을 사랑(가)/10
7. 교구 주보(가)/12 8. 최인호 작가(가)/13
1 삼위일체 대축일 (가해) 성부 성자 성령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출애 34,4b~6.8~9 (나는 주 하느님이다. 자비와 은총의 신이다)
제2독서 Ⅱ고린 13,11~13 (성령께서 이루어 주시는 친교)
복 음 요한 3,16~18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 3,16).
오늘 복음에 나오는 앞의 말씀은 ‘복음서의 진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서의 요약이 그 한 문장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하느님의 사랑이요 축복인지 인간은 생각만 해도 감격이 철철 넘치게 됩니다. 사람은 과연 하느님의 보통 작품이 아닙니다. 그분의 영이 다 담긴 그분 자신이요 그분의 분신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들을 보내실 때 하느님은 당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히 감춰 계신 분이었습니다. 또한 지존하신 분이 구차스럽게 당신 자신을 소개하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세상을 존경하셨고 인간 각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셨습니다. 당신의 외아들과 맞바꿀 수 있도록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성서는 그분 자신의 모습과 애정을 환하게 밝혀 줍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느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첫 장면에 보면 ‘하느님의 기운이 물 위에 휘돌고 있었다.'(1,2)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기운’은 성령을 말합니다. 이것을 다시 풀어서 말씀드리면 아버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기운’이신 성령을 통하여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을 보내시기까지 오랜 세월 동안은 성령께서 이 우주와 세상 안에 역사해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그 이전에도 사랑이 있었고 도덕이 있었으며 효가 있었고 충이 있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모습은 희미했고 분명하진 못했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하늘이나 땅을 신으로 모시기도 하고 호랑이나 곰, 또는 바람이나 비 등을 신으로 모셨던 것을 보면 분명하진 않지만 하느님을 찾아 나서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태어났을 때에야 비로소 하느님의 윤곽이 제대로 잡히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어느 날 그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무엇을 원 하시는지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모습과 말씀은 감춰져 있었습니다. 후에 예언자들이 등장해서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목소리를 전달할 때도 하느님은 살아 계신 분으로 백성들은 이해하였지만 과연 어떤 사랑과 꿈을 가지고 계신지는 몰랐습니다.
하느님께서 결정적으로 당신 모습을 확실하고 분명하게 보여 주신 것은 당신의 외아들인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 주실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 일은 너무나 중요하고 하느님 자신의 일이었기 때문에 성부와 성령께서 예수와 함께 일치된 모습을 보여 주셨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더 이상 당신의 비밀을 감추지 않으셨고 다 보여 주셨고 다 내놓으셨습니다. 성자는 늦게 등장하셨으나 성부와 성령과 함께 계셨고 세상 창조 때에도 성자는 함께 참여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을 온전하게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렇다고 하느님이 막연하신 분은 아닙니다. 어린이들은 어른들의 세계를 모릅니다. 어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바라고 있고 무슨 꿈을 가지고 있는지 자녀들은 모릅니다. 부모가 아무리 설명해 줘도 꼬마들은 한마디도 못 알아들을 때가 있습니다. 커 봐야 알 수 있습니다. 커서도 어느 땐 모르고 늙어 봐야 뭘 어렴풋이 알 수 있듯이 우리도 나중에 그분 나라에 들어가 봐야 압니다. 그분을 눈으로 뵈올 때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지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각각 독립된 위격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셋은 하나요 하나는 또 셋입니다. 말장난 같지만 하느님은 한 분이시면서 동시에 셋이라는 공동체의 하느님이십니다. 이것은 그분의 본체이시기에 우리가 알아들을 수는 없습니다. 그냥 믿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하느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하느님은 아름다우신 분입니다. 질서와 조화와 일치가 하나로 어우러진 위대한 신비입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을 만나고 닮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신앙입니다.
성삼은 한마디로 사랑이면서 무한하며 영원합니다. 그 이름 안에 우리 존재가 있고 그 말씀 안에 우리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 안에 우리 목적이 있습니다. 성삼은 인간의 찬미가 필요치 않으나 인간의 흠숭은 그분께 영광이 됩니다. 그리고 인간의 참 행복은 그분을 찾고 부르는 신앙 안에 있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2. 삼위일체 대축일 <요한 3,16-18> (가)
심판과 처벌의 하느님이 아니라 사랑의 하느님
허영업 신부
예전에는 세례성사 전에, 항상 예비자들이 까다로운 교리문답 시험을 거쳐야 했다. 시골 공소를 방문하신 주임신부가, 한 예비자 할머니에게 교리에 관해 질문을 했다.
「하느님은 몇 분이십니까?」「한 분이십니다?」
사제는 삼위일체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나갔다.「좋습니다. 한분이신 하느님은 몇개의 위격입니까?」 한참 생각한 할머니는 거침없이,「두 개의 위격입니다.」어이없어 하는 주임신부에게 할머니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제가 아주 어린 소녀 시절 성당에 갔었는데, 그때 벽에 걸려 있는 성화를 봤거든요. 거기에 하느님의 그림이 있었는데 수염 달린 할아버지(성부)와 아주 젊은 청년의 예수님(성자)과 비둘기(성령)이 있어요. 그런데 그 할아버지(성부)는 벌써 죽었을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벌써 이 만름 나이를 먹어서 죽을 때가 되었는데 살아있을 리가 없죠」. 신학교 때 교수님으로부터 들은 우스갯소리이다.
삼위일체는 교회의 신비로운 가르침
삼위일체의 교리는 온전히 인간의 머리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교회의 신비로운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은 이론보다는 삶의 체험에 근거해서 접근해야 한다. 특히 사랑의 관점에서 체험적으로 다가갈 때 미약하지만 삼위일체의 신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때로는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십자성호를 그으며 기도한다. 그런데 얼마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랑과 일치를 깨닫고있는 지 생각해 볼 일이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내적인 사랑, 생명이, 우리 눈에 보일 수 있게 나타난 사건이 바로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인간이 되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강생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 지 드러났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셨다」 (요한 3,16)
사도 요한이 말씀하신 대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1요한 4,16). 그 하느님 사랑의 특징은 그분이 먼저 인간을 사랑하신 것이다. 더구나 하느님의 사랑을 외면하고 배신하여 생명을 잃어버린 죄 많은 인간을 위해 대신 죄 값을 치르도록 하셨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신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를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하느님의 구원,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런데 하느님의 구원은 누구에게 이루어지는가?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외아들을 믿는 사람을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 즉 구원을 얻게 하셨다고 가르친다.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약속,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뜻이다.
그 믿음의 내용은 하느님의 사랑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하느님은 심판과 처벌의 하느님이 아니라 사랑의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그 증거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인 나를 위해 피를 흘리시고 목숨을 바치셨다. 하느님의 구원은 사랑 받을 만한 사람이거나, 나의 선행이나 노력으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즉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의 대가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성자 그리스도는 성부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온전히 자신을 순명함으로써 구원의 역사를 가능케 했다. 즉 그리스도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하느님의 뜻을 따름으로써 하느님 사랑의 결실, 구원을 이루신 것이다.
삼위일체의 실천적 삶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위해,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우리 자신을 희생하고 봉사하며 사랑해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과 일치, 봉사와 헌신의 삶을 우리 가정과 사회에서 실현하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가족들이 미움과 분열, 이기심에서 벗어나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하겠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결코 교리적이거나 이론적인 가르침이 아니다. 열심히 사랑하려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드러나고, 확인되는 하느님 사랑의 실체이다.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는 하느님 안에 머무르게 된다. 이웃을 위해 봉사할 때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게 한다. 이웃을 위해 나 자신을 아낌없이 봉헌할 때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
3 삼위일체 대축일 요한 3.16-18 (가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남재희 신부
지난 주일 우리는 성령 강림 대축일을 지내면서 성령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심으로써 새 나라 새 백성이 시작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이 나라의 목적은 무엇이며, 이 백성이 나아가고 있는 목표는 무엇입니까? 바로 오늘 우리가 축하하는 이 축일, 성령 강림 후 첫 번째로 맞이하는 이 주일이 우리에게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바로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거룩하시고 권능을 가지신 하느님은 한 분이시지만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가 계시고, 세 위가 한 분 하느님이시다는 말이 바로 삼위일체란 뜻입니다. 하느님이야 세 위가 한 분이시던, 세 위가 여러 하느님이시던 우리와 무슨 상관일까? 하고 의아해 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라는 말은 바로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라는 말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성부께서는 완전하고 생활한 당신의 모상이시며 말씀이신 성자를 바라보고 흡족해 하시고, 영원한 말씀이신 성자는 당신 아버지(성부)의 뜻에 완전히 일치해 계시며, 성부께 찬미를 드립니다. 이렇게 성부와 성자가 사랑하는 그 사랑이 바로 성령이시며 이 사랑은 하느님의 생명이십니다. 서로 사랑하는 두 분과 두 분이 나누는 이 사랑, 이 세분은 하느님의 생명 안에서 오묘한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 이 사랑을 영원히 누리는 것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지내는 삼위일체 대축일의 뜻이며 새 나라가 지향하는 목표입니다. 또한 새 백성이 나아가고 있는 목표는 바로 성삼의 사랑의 일치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사실 삼위일체의 신비를 우리의 지력으로 깨닫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삼위일체의 신비를 설명하려고 노력해 왔지만 완전한 설명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삼위일체를 설명하려 시도해 보았습니다. 알고, 느끼고, 뜻하는 것, 곧 知․情․意 3가지가 하나의 인격을 이루듯이 하느님 안에서도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의 신적 실재를 이룬다고 설명해 보았습니다. 그렇다고 하느님의 신비가 바로 이해되는 것은 아닙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해 주지 않았다면 인간의 머리로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해 볼 수 없는 신비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께서 계시해 주심으로써 성부의 능력으로 창조되고 성자의 피로서 구원되며, 성령의 은총으로 성화됨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느님의 모습은 바로 자비로운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자신의 목숨을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상에 달려 죽기까지 내 놓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보았고 또 그 사랑 안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오늘 둘째 독서가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사랑을 베푸시는 성부와 은총을 내리시는 성자와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게 하시는 성령의 활동으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분명하게 또한 생생하게 지금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직 성부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의 생명, 다시 말해 하느님의 사랑이 충만하게 꽃피지 않았기에 그 사랑의 일치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그분의 크신 사랑의 조각들이며 또한 그림자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비록 어렴풋하게 나마 우리의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크신 사랑의 일치를 그리워하고 찬미하면서 살아가지만, 하느님과의 사랑의 일치를 믿고 있기에 우리의 사랑이 풍요해지는 것입니다.
4 삼위일체 대축일 요한 3.16-18 (가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류봉구 신부
다른 축일들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을 말해 주고 있고 오늘의 삼위일체 축일은 우리가 하느님께 그 지극히 거룩하신 신비를 찬미해 올리는 축일입니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알아들을 수도 없고 식별할 수도 없는 진리로서 인간적인 언어로 표현을 불완전하게 시도해 보는 것뿐입니다.
오늘은 하느님 자신의 순전한 존재와 내적 생명의 거룩하심을 찬미하는 축일이므로 사람으로서의 의무 즉 찬미를 드리는 날입니다. 찬미를 드리는 우리 마음의 태도는 겸손하여야 합니다. 물론 하느님께로 완전히 집중시켜 옛 조상들이 주님을 경외하던 것보다 못지 않게 경외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의 우리는 주님께 찬미드리기를 무척 어렵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침착하지 못하며 여러 가지에 복잡하게 사로잡혀 있는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그런지 깊은 문제를 풀 때 혹은 깊은 교리를 생각할 때 억지를 쓰려고 하거나 불만을 품거나 환멸을 느끼는 것 같은데 이런 기분으로는 찬미를 위해서 절대로 요구되는 정신적인 평온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에 주님께 올바로 찬미를 드리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더구나 자연계에 있어서 옛날 선조들이 못 알아듣던 것을 지금 우리가 좀 안다고 해서 선조들보다 겸손한 생각을 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천둥 번개 벼락 일식 월식 혜성 등등을 지금 우리는 과학을 통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아직도 못 알아들은 것들이 자연계 안에 얼마든지 있고 또 그 자연계 안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생각 못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주를 창조하실 때 사람을 조성하시면서 사람으로 하여금 전파 망원경을 발견 향상시켜 우주탐색기를 신속히 처리하게끔 하셨지만 사람은 하느님 생각을 안 합니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사람은 하느님을 경외하며 겸손하여야 합니다.
과학이 무지개를 설명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하늘을 우러러 볼 때 하느님을 찬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러러 당신 손가락이 만드신 저 하늘하며, 굳건히 이룩하신 달과 별들을 보나이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아니 잊으시나이까, 그 종락 무엇이기에 따뜻이 돌보시나이까, 천사들보다는 못하게 만드셨어도,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나이다.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삼라 만상을 그의 발아래 두시었도다”(시편 8.4-7)하는 시편도 있지 않습니까.
“천사들보다는 못하게 만드셨어도”하느님의 모상대로 우리는 조성되었고 또 하느님께로부터 어버이 사랑을 담뿍 받았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찬미는 어느 권력자에게 바치는 것같은 찬미가 아니고 진심으로 바치는 찬미이며 기쁘게 받으시는 찬미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만드신 조물들로부터 마땅히 영광을 누리셔야 하며 먼저 우리들에게서 찬미를 받으셔야 하고 또 우리들은 하느님 아니 다른 데서 만족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성 아우구스띠누스는 말하기를 “주께서 당신 모상대로 너를 만드셨으니 주님 홀로 너를 만족시키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께 다 같이 존경과 찬미를 바쳐야 하겠습니다.
성부께서는 우리를 조성하신 다음 우리가 고통 중에도 인내하며 당신께 신뢰하는 것을 아시고 우리를 보호해 주시며, 성자께서는 우리의 희로애락을 잘 알고 계시는 맏형이시며,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시며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하며 다른 자녀들과 더불어 잘 지내는 좋은 세상을 만들도록 인도하여 주시고 계십니다.
5 삼위일체 대축일 요한 3.16-18 (가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김정진 신부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나이다. 성령을 믿나이다’ 하고 우리는 매일같이 사도신경을 외웁니다. 이것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노상 행하여진 그리스도 신자들의 신앙고백입니다. 여기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비가 표면화되어 있고 성삼위에 대한 인간의 전면적 위탁이 드러나 있습니다. 하지만 삼위일체의 현의는 현의 중에 현의이며 가톨릭 신앙의 기초이며 가톨릭 생활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삼위일체의 교리는 너무 심오하여서 우리의 조그마한 두뇌로써는 모두 인식하기가 곤란하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란 관념을 터득하기가 난삽하지만 하느님이 계시해 주시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셨으므로 우리는 삼위일체의 교리를 믿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이 계시해 주시고 예수님이 명시해 주신 말씀을 성서에서 보기로 합시다.
예수님이 요르단강에서 세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적에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가장 기뻐하는 자로다” 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성부의 말씀이었는데 그와 동시에 성령이 비둘기 모상으로 내려 오셨습니다.(마태 3.16)
다음 삼위일체를 가장 힘있게 증명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들은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라”(마태 28.19)하신 최후의 부탁의 말씀입니다.
이상의 하느님의 계시와 예수님의 말씀으로도 하느님은 한 분이시지만 위격으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성부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셨고 성자는 성부로부터 세상에 파견되신 성부의 외아들로서 인간이 되시어 우리를 구원하셨으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되사 교회 안에 항상 머무르시며 우리를 성화시키시고 우리를 사랑으로 일치시키시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신자 여러분, 다음은 천주 성삼과 우리와의 관계를 더듬어 보십시다. 우리 신자들은 모두 성삼의 이름으로 성세를 받았고 성삼의 이름으로 죄의 사함을 받기도 하고 그 외 모든 성사를 성삼의 이름으로 받으며 많은 축복과 은총을 받고 있으며 또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며 성호를 그으며 기도를 시작합니다. 인간의 구원사업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함께 이룩하셨으니 우리는 얼마나 큰 존경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삼의 이름을 불러야 하겠습니까.
‘성부와’ 할 적에는 성부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의 길로 부르심에 대한 감사를 드리고, ‘성자와’할 적에는 우리를 위하여 세상에 오시어 많은 교훈을 남기시고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를 구속하심을 감사 드리고, ‘성령의 이름으로’ 할 적에는 성령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려 주심으로써 우리를 성화시켜 주심을 감사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십자성호를 그을 적에는 언제나 경문을 똑똑히 그리고 정성되이 외우면서 비교적 크게 또한 천천히 잘 긋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저 습관적으로나 기계적으로 그리고 건성으로 정신없이 그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십자성호는 삼위일체의 현의에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이니 우리는 마음과 행실로 그어야 하겠으며 우리의 마음과 입술에서 떠날 새가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십자성호의 위력을 생각해 봅시다. 사도들은 성삼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었고 영생의 길을 가르치며 기적을 행하였고 수난 중에도 성삼의 이름으로 큰 위로와 용기를 얻었습니다. 성 베네딕또는 십자성호로써 죽음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가톨릭 성인전 상 393쪽)
교형 자매 여러분, 천주성삼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의 신적, 내적 생활과 신적 생명에 참여시키기 위하여 인간의 지위를 높이시어 비천하고 낮은 인간을 자녀로 혹은 친구로 부르시어 함께 계시기를 원하십니다. 즉 천주 성삼은 허리를 구부리시어 인간에게 가까이 오사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가정에 들게 하시어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사랑은 어디까지나 상호적인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에 대한 응답을 기다립니다. 인간은 천주성삼의 커다란 사랑에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겸허한 마음과 굳은 신앙과 열렬한 사랑으로 성삼을 흠숭하고 찬미하고 감사함으로써 성삼께서 우리 안에 항상 살으시며 우리 모두 당신의 영광스러운 성전이 되도록 굳게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아멘.
6 삼위일체 대축일 요한 3.16-18 (가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신데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이시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나 성부, 성자, 성령은 그 역할이 각각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전기는 하나이지만 움직이는 성질과 빛을 내는 성질, 열을 내는 성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느 해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방학동안 공소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과수원을 지나가는데 새빨간 사과가 탐스럽게도 주렁주렁 달렸는데, 정말 너무나 아름다워서 표현력이 부족해 무어라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순간 아주 멋있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저 사과는 삼위일체가 아닌가!” 이 생각은 아주 값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과는 하나인데 껍질, 과육, 기리고 씨앗이 분명히 다르고 각기 그 역할도 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은 하나이면서 아버지, 가장 그리고 남편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가장으로써의 할 일이 있고, 아버지로써의 할 일이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느님은 한 분이시나 성부, 성자, 성령은 각기 다른 일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외아들로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강생의 신비를 우리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듯이, 이 삼위 일체의 신비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조그마한 그릇 속에 커다란 호숫물을 모두 쓸어 담고자 노력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한하신 하느님, 시간과 공간 밖에서 시간과 공간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에 대해, 유한하며 동시에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살아야 하는 인간의 능력은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 그 신비를 조금이나마 풀어 볼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수학적인 계산으로써도 아니고, 놀 리가 정연한 이론으로써도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이것만이 삼위 일체의 신비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임을 우리는 너무나 자주 잊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만나러 온 니고데모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참된 사랑인가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셨다. 여러분 중에 외아들이 있다고 합시다. 피를 나눈 아들, 그것도 단지 하나뿐인 아들을 오직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때문에, 과연 아낌없이 내 놓을 수 있겠는가?
외아들은 가장 소중한 존재이기에, 어느 누구도 이러한 제의앞에선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외아들을 보내주시어’라고 할만큼 깊으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반분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까지 우리에게 주셨으니, 그 밖의 그 무엇을 주시지 않을 수 있겠는가?’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언제나 머리 속에서 주판알을 퉁기며 계산적인 생활 속에 익숙해진 우리들이기에 우리는 하느님마저도 우리가 생각하는 개념 속에 집어넣고자 하는 잘못을 쉽게 저지르고는 합니다. 그리하여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을 우리가 만들고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만 아는 이기주의가 우리를 사로잡을 때 ‘너’와 ‘내’가 ‘우리’가 될 수 없습니다. 각자는 분리된 개체, 전혀 딴 사람으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 속에 일치를 이룰 때, ‘너의 것’과 ‘나의 것’, ‘너’와 ‘나’의 구분은 사실상 사라지고 맙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면서 자기의 모든 것을 줄 수 없다면, 그것은 완전한 사랑이 못될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완전한 일치’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고, ‘진정한 우리’가 형성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과는 껍질과 과육 그리고 씨앗이 하나로 합쳐 사과 덩어리가 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사랑 덩어리’!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은 ‘일체’ 즉 하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바로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의 사랑 덩어리를 만들어 내셨듯이, 우리도 이같은 삼위 일체적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일 것입니다.
어느 주보에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 우리 교우들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합니다. 혓바닥 신자, 손바닥 신자, 그리고 발바닥 신자! 바닥 신자라는 칭호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분류 방법에 있어 어느 정도 수긍이 가기도 했습니다. 혓바닥 신자란 행동보다 말이 앞서는 신자, 손바닥 신자는 혼자서 열심히 기도는 하지만 자신만을 위한 신앙생활에 몰두해 있는 분을 가리켜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발바닥 신자란 성당을 위해 궂은 일은 도맡아 하지만 기도엔 별로 관심이 없는 교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우들 중엔 이 세 부류 중에 한 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져서는 안 된다는 논거였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삼위 일체적 사랑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참된 신앙인은 삼박자 일체가 아닌가! 삼박자 일체! 혀와 손 그리고 발이 하나를 이룰 때, 가장 이상적인 크리스천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삼위 일체 대축일을 맞아, 사도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작별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 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다음과 같은 인사 말씀으로 강론을 마칠까 합니다. ‘하느님의 손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과 성령의 혀가 여러분 안에서 일치를 이루시기를 기원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7 삼위일체 대축일(생명의 날)<요한 3,16-18>(가)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의 숨결이며 선물
주교회의 가정사목위원회
오늘날 인간은 자신을 신화(神化)하여 생명마저도 계획, 조정하는 권한을 지닌 절대자의 위치에 오르려 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신비,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한 모든 수수께끼의 해답이 오로지 하느님께 있다는 우리의 확신과 신앙은 이제 또 다른 위기를 맞게 된 것입니다.
생명공학-인류의 미래?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인해 인류가 걱정하는 식량 문제가 해결될 조짐이 보이고, 불치의 병이라고 하던 많은 질병들이 극복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생명공학의 업적은 아직 사람의 형체도 갖추지 못한 인간 배아 단계에서도 일부 유전적인 질병의 치료도 가능하게 하였고, 고가(高價)의 치료의약품들을 값싸게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제는 인간의 유전자를 가진 동물복제가 가능해지면서, 인간에게 이식 가능한 장기를 가진 동물을 복제하여 그 복제된 동물로부터 장기를 공급받아 생명을 연장할 수 있으리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인간복제 — 그러나 이러한 놀라움이 큰 두려움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놀라움을 주는 생명공학의 연구가 인간 자신을 대상으로 삼으면서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인간 배아를 복제 하여 치료용 복제인간을 만들고, 복제인간을 이용하여 이식용 장기를 양산할 뿐만 아니라 인간 배아의 근원세포를 가지고 의약품을 만든다고 하니 이러한 발상 자체가 인간의 건강과 생명을 위해 인간을 희생시키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오류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현대의 인간이 온갖 재능과 창의력을 쏟아 이룩해놓은 결과가 결국 인간을 파멸로 몰고가는 수단이나 도구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시면서 그 파멸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상의 모든 이변과 파국은 시시하게 여겨질 정도의 파멸이 될 것임을 경고하셨습니다(인간의 구원자 15항).
인간 생명의 시작 —인간 생명의 시작에 대해 거룩한 교회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난자가 수정된 순간부터, 아버지의 것도 어머니의 것도 아닌, 새로운 사람의 생명이 시작된다. 그것은 그 자신의 성장을 가지는 한 새로운 사람의 생명인 것이다”(인공유산 반대선언문).
그렇다면 인간 배아에 대한 조작과 실험, 그에 따르는 희생은 다름 아닌 인간 생명에 대한 살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 배아 복제가 아무리 좋은 목적을 가진다 하더라도 인간 생명의 존엄성은 어떠한 경우에도 보호되어야 한다는 대원칙에 따라 인간 배아의 복제를 반대합니다.
인간의 생명은 어떠한 경우라도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 생명에 대하여 존중과 사랑을 보이라고 우리 모두에게 요구하시는 생명의 하느님과 일치하여 함께 생명의 길로 나아갑시다.
8 삼위일체 대축일<요한 3,16-18>(가) 에밀레 종
최인호 베드로/작가
경상북도 경주시 국립박물관 앞마당에는 동종(銅鐘) 하나가 놓여있습니다. 우리 나라에 현존하는 최고, 최대의 종으로 통일신라 성덕왕(聖德王 ?-737)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그의 아들 경덕왕이 만들기 시작하여 손자 혜공왕이 완성한 국보 제29호입니다. 이 종의 공식이름은 ‘성덕대왕 신종’이지만 흔히 ‘에밀레종’이라고 불립니다. 이종이 그렇게 불리게 된 데는 유명한 전설이 있습니다.
그 무렵 도둑들이 들끓고 흉년이 드는 난세가 되자 경덕왕은 선왕의 명복을 비는 종을 만들면 악귀들이 물러가고 태평성대가 오리라는 염원으로 구리 20만 여 근으로 종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작업은 그의 아들인 혜공왕 때까지 이어졌는데 종을 만드는 재료가 부족하여 스님들은 집집마다 시주를 받으러 다녔습니다. 한 스님이 다 쓰러져가는 집을 방문했을 때 아기어머니가 “저희 집에는 아무것도 시주할 것이 없습니다. 이 아이라도 괜찮으시다면 받아주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드디어 종이 완성되어 타종해보았으나 이상하게도 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스님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산 아기를 넣어 종을 만들어야 소리가 난다”는 것이었습니다.
꿈을 깬 스님은 그 여인을 찾아갔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과의 약속이니 기꺼이 아이를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 아이는 곧 뜨거운 쇳물에 넣어졌고, 마침내 종이 완성되었습니다. 타종을 하자 이제껏 들 어보지 못했던 웅장한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에게는 그 종소리가 마치 아기가 어머니를 애타게 부르는 소리 ‘에밀레- 에밀레-’로 들렸습니다. 이로부터 그 종 은 ‘에밀레종’으로 널리 불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생전에 예수님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마태21,33-46)를 통해서 자신을 비유하셨습니다.
“하느님이 포도원을 만드셨다(이 세상을 만드셨음에 비유). 철이 되면 종(예언자)을 보내어 말을 전하게 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종들을 때리고 돌로 쳐죽였다. 하는 수 없이 하느님은 ‘내 아들이야 알아보겠지’ 하고 자신의 외아들을 보내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저자야말로 상속자다. 저자를 죽이면 이 포도원은 우리 것이 될 것이다’ 하고 끌어내어 죽여버렸다(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의 예언).”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처럼 하느님은 자신이 만든 포도원인 이 세상에 여러 사람을 보내어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포도원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마치 소리가 나지 않던 종처럼 포도원 사람들에게는 그 말씀의 종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셨으므로 마침내 외아들인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버린 것입니다. 이 엄청난 비극이 이 세상에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가져올 것을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기를 넣어 죽임으로써 그 종이 ‘에밀레-에밀레-’하고 울며 이 세상의 어둠을 물리치듯이 외아들 주님을 끓는 물에 넣어 완성한 그리스도왕국의 신종(神鐘)이야말로 우리들 마음속에 영원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 아버지-’ 하고 울려 퍼질 것입니다.
28 삼위일체 대축일
신은근 신부
삼위일체는 한 분 하느님 안에 계신 세 위격을 뜻한다. 세 위격은 성부 성자 성령이시다. 단순한 교리건만 늘 꼬리표가 붙는다. 삼위일체란 신비에 속한다. 하느님에 대해 인간은 완전히 알 수 없다. 대충 이런 말들이다. 정말 인간은 하느님을 완전하게 알 수 없는 것일까. 신비에 속한다면 왜 공적축일로 정해놓고 의미를 되새기려는 것일까.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완전하게 아는 자식이 얼마나 되겠는가.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알게 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다 자식을 낳고 살면서 비로소 부모의 심정을 깨치게 된다. 하느님을 알게 되는 과정도 비슷하다. 처음부터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살아가면서 깨닫게 된다. 죄와 잘못에도 불구하고 은총과 축복으로 끌어주시는 하느님을 느끼면서 비로소 조금씩 깨닫게 된다.
그러니 깨달음에는 이론이 중요하지 않다. 부모의 사랑을 깨닫는데 무슨 이론이 절대적이겠는가. 그분들이 어떻게 사셨고 어떻게 대해주셨던가. 이것을 깨닫고 느끼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삼위일체 교리도 이론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삼위일체는 그저 하느님께서 사시는 모습(존재 양식)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분들의 이 모습이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가, 이것을 깨닫는 일이다.
삼위일체 교리 안에는 중요한 진리가 있다. 세 위이신 하느님 안에는 높고 낮음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 분은 높고 저 분은 낮다는 그런 삶이 아니라 서로 똑같은 일치의 모습으로 계신다는 것이다. 일치가 얼마나 심오하던지 하나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갈수록 세상은 물질화 되고 있다. 물질을 가운데 두고 일치한다. 사랑을 중시하고 신의 때문에 일치하던 세상은 지나가고 있다. 결과는 불신이다. 물질이 떠나면 마음도 떠나버린다. 삭막하고 단절된 관계가 된다. 그러니 위안을 찾는 쪽은 본능이다. 쾌락에서 위로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돌아갈 본래의 위치는 사랑의 관계다. 그리고 사랑의 관계는 일치에서 시작된다. 일치는 획일화가 아니라 조화의 관계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도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니셨지만 일치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이것이 삼위일체다. 우리의 가정에는 삼위일체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부모와 자녀사이에, 부부 사이에 일치의 모습이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아버지는 야훼의 역할을, 어머니는 예수님의 역할을, 자녀들은 성령의 역할로서 희망과 기쁨을 불어넣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이전에는 너무나 우리를 간섭하시고 잘하는가 못하는가를 살피시는 분으로만 오인되어 왔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분들은 일치의 모습으로 계신다. 그리고 그 일치 속으로 우리들을 초대하고 계신다. 그러니 먼저 우리는 가족 안에서 일치의 모습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삼위일체 축일의 메시지인 것이다.
29 삼위일체 대축일(청소년 주일)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서
최상범 신부
많은 경우 청소년 문제의 원인은 청소년 자신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어른들의 문제인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문제를 갖고 있고 균형잡히지 못한 삶의 태도를 가진 어른들과 함께 사는 청소년들은 사실상 어른들의 문제를 마치 거울처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청소년들이 왜 적응하지 못하는가? 왜 문제를 일으키는가?하는 질문을 하다보면 그것은 그 청소년을 돌보고 교육하고 키우는 어른들과 연결돼 있는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정과 학교, 교회와 사회가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수용하는 분위기라기 보다는 지시하고 요구하고 주문하는 분위기이기에 그들은 대화의 빈곤과 제대로 수용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묵상하는 오늘 청소년들을 기억한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하시는 아버지, 자발적으로 응답하는 아들, 그리고 서로 한 몸이 되도록 일치시켜주고 그 일치에로 모든 사람을 부르시는 영의 신비는 청소년과 맞물려 있는 가정과 학교, 교회와 사회에 중요한 원리를 제공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화를 통한 균형잡히고 건강한 문제해결은 가정의 복음화를 현실안에 가능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에서의 불일치를 극복하고 성가정을 이루려는 노력이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대학별로 또 동아리 활동이 가능한 중고등학교 별로 복음화에 대한 활동을 더욱 촉진시켜서 신앙에 갈증을 느끼는 학생들이 보다 쉽게 신앙에 다가 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일선에서 교편을 잡고 계시는 교육자들의 관심과 희생이 필수적입니다.
그런면에서 전구교구 중등교육자회의 재기가 요청됩니다. 얼마전 어떤 변호사 한 분이 특별한 어려움에 처한 청소년들이 있다면 법률적인 면에서 자문과 도움을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음악, 미술, 교육, 심리, 매스콤, 레크리에이션, 상담 등 각계 각층의 능력과 지식을 갖춘 신앙인들이 청소년들을 위한 기획과 협의에 물심양면으로 관심을 가질 때 교회내의 청소년 문화가 보다 더 복음적인 방향으로 촉진돼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랑과 일치안에 청소년에 대한 개인개인의 관심과 사랑과 경험을 합쳐서 보다 더 복음화되어 나가는 교구 공동체를 이루어야 되겠습니다.
30 삼위일체 대축일 : 성삼위께 찬미와 흠숭을!
4세기말 정립된 교리 : 하느님의 초월적 특성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부, 성자, 성령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 또한 하루에도 수 없이 여러 번 성호경과 영광송으로 성삼위께 찬미와 흠숭을 드린다. 그러나 한 분이면서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 삼위일체 신비’는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하느님의 내적 신비라고만 생각하기 쉽다.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아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정리해본다.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位格)으로 계시며, 이 위격들은 선후(先後)나 높고 낮음이 없이 같은 신성(神性)을 지닌다는 것이 4세기말 정립된 삼위일체 교리의 주요 내용이다. 초기 교회 신자들은, 신약성서에 명시된 이 신비를 주로 세례 때 고백함으로써 신앙생활의 바탕으로 삼아왔다.
199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반포된 ‘가톨릭 교회교리서’는 이를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의 핵심적인 신비'(261항)라고 강조하면서, 오직 하느님만이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로 당신을 계시해 주심으로써, 이 신비를 깨닫게 해줄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가톨릭 신앙은 ‘한 분이신 하느님을 삼위일체로, 삼위일체를 한 분의 하느님으로 흠숭하되 각 위격을 혼동하지 않으며, 그 실체를 분리하지 않는다'(266항)고 이 교리를 요약한다.
현대 신학자들은, 삼위일체신비를 하느님의 초월적 특성이기도 한 동시에, 하느님께서 역사 안에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드러내는 신비라고 말하고 있다. 당신 사랑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인간에게 자신을 송두리째 열어 보이고 기꺼이 내어주는 하느님 사랑의 신비라는 것이다.
즉 인간과 세상을 창조하고, 지극히 사랑해주는 하느님 아버지로서의 성부, 인간과 세상의 구원을 위한 희생 제물로 자신을 온전히 봉헌한 예수 그리스도인 성자, 교회와 세상을 은총으로 이끌어가는 협조자로서 우리와 친교를 나누는 성령의 세 위격이, 구세사 안에 드러난 것이라고 설명한다.
해방신학자 세군도는, 성부는 우리 앞에 계시는 하느님으로, 성자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으로,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으로 이해한다. 그는 사랑으로 일치, 하나의 사회를 이루는 성삼위의 신비를 우리도 엮시 매일의 삶 속에서 생활화해야 한다고 강조하고있다.
교회는 삼위일체 대축일을 성신강림 대축일 후 첫 주일에 기념한다, 이는 성령강림으로 시작된 교회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삼위일체 신비를 우리 신앙생활의 기본 원리로 삼도록 권고하는 뜻을 담고 있다. 또한 하느님께서 삼위로서 인간과 관계를 맺고 계시듯이 우리도 삼위의 사랑을 이웃과 함에 나누도록 초대하고 있다
31 삼위일체 대축일 : 삼위일체의 신비
▲ 성서 안에 감추어진 삼위일체 신비 = 구세주로 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사실 ‘삼위일체 신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밝혀주신 하느님의 존재 모습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마태 28,19)”고 제자를에게 가르쳤다. 또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께서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요한14,16-17)며 삼위일체의 위격에 대해 강조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성삼위의 신비를 추상적인 언어가 아닌 구체적인 계시의 말씀으로 풀이해 주었다.
▲ 교부들의 비유 = 삼위일체 신비에 대한 많은 이단들이 발생하자, 교부들은 여러 비유를 이용해 삼위일체를 설명했다. 그 대표적인 비유가 ‘태양’ , ’새 잎 클로버’ , ‘정삼각형’이다.
“태양은 불꽃과 빛 그리고 열로 구성돼 있다. 이 셋은 서로 각자 존재하고 고유한 역할을 하지만 하나의 태양을 이루고 있다. 하느님도 성부․성자․성령으로 구분되는 세 위격을 가지고 계시나, 한 분
이시다. “
“세 변의 꼭지점이 하나의 삼각형을 이루듯 삼위일체이신 하느님도 성부․성자․성령께서 서로 고유하게 계시면서, 완전한 일치를 통해 한 하느님으로 존재하신다.”
▲ 이콘에 나타난 삼위일체 하느님 = 신약성서에서는 삼위일체를 표현할 때, 성부를 ‘아버지’로, 성자를 ’아들’로, 성령을 ‘비둘기’로 묘사하고 있지만, 구약성서에서는 그처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신․구약의 삼위일체 하느님을 표현하는 이콘 그림도 사뭇 다르다.
루블료프가 그린 구약의 삼위일체 이콘을 보면, 성 삼위가 같은 천주성을 지니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 똑같이 푸른 빛 옷을 입고 계신 모습이 그려져 있다. 또 배경 전체를 노란색으로 칠해 성삼위가 따뜻한 사랑의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표현했다.
그리고 인간처럼 영혼과 육신을 가진 존재가 아닌, 순수한 영적인 존재임을 드러내기 위해 삼위일체를 천사의 모습으로 그렸다.
신학자들은, 이런 교부들의 비유는 전통적으로 존중돼야 하겠으나, 삼위일체 신비를 표현하기에는 부적당한 비유라고 지적한다. 오히려 신학자들은 성서 안에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본성을 찾을 것을 권고하고 있다.
성서는 복되신 성삼위를 이해하는 데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목표가 있음을 일깨워 주고 있다. 성삼위께서 우리를 아시듯이 우리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해서 아는 것이다.
▲ 가톨릭 기도문 안에 드러난 삼위일체 신비 = 삼위일체 신앙을 가장 간결하면서도 제대로 고백하는 것이 바로 ‘성호경’이다. 십자가를 그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부르는 기도인 성호경은, 천주 성삼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또 교회는 초세기부터 ‘사도신경’을 통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께 대한 믿음을 선언해 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