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0주일
1 연중 제10주일 마태 9,9-13 (가) 선한 사람보다 죄인을
최용진 신부
죄인임을 인정하면서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오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하는 말씀을 정당화하시기 위해 마태오를 부르셨습니다. 예수께서 죄인인 마태오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 오시오” 하자 예수를 따라 나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는 마태오 집에서 초대를 받아 세리와 죄인과 함께 음식을 먹게 되었는데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반문하기를 어째서 당신네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 거요 하고 말했습니다.
이때 예수께서 이 말을 옆에서 들으시고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의사는 건강한 사람에게 필요하지 않고 병자에게 필요합니다. 당신들은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내게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 대한 자선이다 하신 말씀의 뜻을 좀 배우라”고 하시면서 예수님 자신은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오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논박했습니다.
즉 이 말씀은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의 사명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다같이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에 대해서 묵상해 봅시다. 예수님은 먼저 죄인을 부르십니다. 예수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오를 보시고 “나를 따라오시오” 하고 부르셨던 것입니다. 먼저 말씀을 주시며 먼저 대화를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 인간은 말씀을 통하여 다른 인간과 위격적인 만남을 이룹니다.
말씀은 인간이 자기 속을 남에게 들어내는데 있어서 정상적인 통교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인간은 때로는 자기 지식만을 전달하기도 하고 때로는 내밀한 원의와 희망을 지식과 함께 전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가장 내밀한 비밀을 마음속에 포함시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사실 아무리 정확하고 훌륭한 말씀이라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완전히 그 말씀 속에 담아서 전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전부 다 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결국 자기 자신과 자기 지식의 일부분밖에는 남에게 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영적인 풍요로움을 함께 나누고 싶은 그 사람에게만 자기의 속을 드러내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상대편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고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에 따라 마태오는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여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조건 응하였습니다. “나를 따르시오” 그 말씀에 체면을 무릅쓰고 자기의 내밀한 속을 드러내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마태오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부르시고 계십니다. 부르심에 응할 때는 결코 우리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먼저 불러 주셔야 합니다. 구약에서는 먼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셨고, 또한 신약에서 모든 인류에게 구원을 약속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부르시고 계십니다. 마태오 역시 그 부르심은 구원을 약속한 것입니다. 그 부르심은 마치 메시아 시대의 기쁨의 상징이요 하느님과의 일치의 상징이며 죄에서의 해방을 가져다주기 위함입니다.
다음으로, 부르심에 응할 때는 자신을 온전히 포기해야 합니다. 마태오 역시 주님이 부르시자 모든 것을 버리고 즉시 주님을 따라 나섰던 것입니다. 아무런 조건도 부담도 없이, 오직 기쁜 마음으로 응했습니다. 자기의 삶을 포기하고 영원한 삶에로 전환한 것입니다. 즉 새로운 삶을 택했다는 뜻입니다. 사도 베드로 역시 주님께서 부르실 때 그물을 버리고 처자식도 버리고 주님을 따르지 않았습니까? 자신을 온전히 포기한 상태는 죄에서의 해방, 노예에서의 해방, 구속에서의 해방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죄없다고 자처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부르시지 않고 죄인인 마태오를 부르시고 세리와 죄인들과 대화도, 초대도, 받으시고 하셨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접촉하면 부정탄다고 그들과 식사는커녕 한마디 말조차도 하지 않으려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자들을 멀리 하시고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초대도 받으시곤 하셨습니다. 신자 여러분! 우리 중에 누가 죄없다고 말하겠습니까? 우리는 마태오와 같이 주님의 부르심에 다 응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주님 부르심에 우리 자신을 포기하고 주님을 잘 따랐는가. 의인으로 자처하지는 않는지 반성해 봅시다. 주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의인은 주님에게 필요치 않고 죄인은 주님을 필요로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의인으로 여깁니까? 우리는 주님을 필요로 하는 죄인들입니다. 죄인으로 인정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 가까이 계시며 우리를 항상 불러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항상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억압당하는 사람들에게 무한한 동정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은 참회하는 죄인에게는 한없는 자비와 용서를 베풀어주시는 죄인들의 친구이십니다.
우리는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을 깊이 인식하여 죄인인 우리게도 불러 주시도록 진정한 참회를 발하면서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도록 노력함으로써 부르심에 귀를 기울입시다.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오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아멘.
2 연중 제10주일 마태 9,9-13 (가) 주님의 구원
한종훈 신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 (로마 10,13)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도와달라”고 하는 부르짖음으로 꽉 차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배가 고프면 즉시 울부짖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곧 달려와서 허기진 어린이를 도와줍니다. 이런 짓은 어린이에게 있어서는 목숨을 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한 가정을 비롯해서 사회든 국가든 어려운 일을 당하면 도움을 청하고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정은 어려움을 맞이할 때 대항하여 도와주는 공동체이다”라고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고 있습니다. 의학의 발전은 바로 병은 사람들의 부르짖음에 대한 도움을 줌에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의사의 마지막 임무는 죽음에 대한 증명이 아니겠습니까?
죽음이라는 문제는 가장 어려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으로써 그 사람의 세상에서의 역사는 마지막이 되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는 많은 철학자들이 죽음에 대해 무진 애를 쓰며 연구하였지만 확실한 대답은 못해 주고 있습니다. 현대의 대표적인 철학자 하이데거는 “죽음을 마주하여 용기를 가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에 관한 참다운 문제는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 다음에 오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일 죽음 그 자체로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죽음 다음에도 남아 있을 생명이 없는 것이라면 인생은 참으로 편리한 것입니다. 다른 동물보다도 편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이 싫고 귀찮으면 자살로 간단히 결말을 지으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방식은 로마제국 시대에 사상가들이 권장한 일이기도 합니다. “매일 즐겁게 사십시오.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할 수 있는 한 즐거움의 술잔을 드십시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도대체 죽음에서 구원될 수 있는 즐거움이 있을 수 있을까요? 이 문제는 인간에 있어 가장 큰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죽음에 관해 생각하려 하지 않습니다. 최대의 적인 죽음에 대해 사람은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성서의 말씀을 상기합시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로마 10,13). 어떻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일까요? 우리는 어차피 하느님 대전에 도달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구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기쁜 소식이 있었음을 상기하여 하느님을 찾도록 시도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시도해볼 뿐 아니라 연습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교만한 탓으로 믿음(신앙)에 의한 구원을 저버려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을 찾습니다. 기도를 바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도움을 얻지 못합니다. 되풀이해서 하느님께 도와 주십사 하고 외침으로써 영원한 세상을 점차로, 실제로 깊이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의 고독함에 관하여 잠깐 생각해 봅시다. 사람이 혼자 있으면 반드시 쓸쓸함을 느끼고 고독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것도 인간에 대한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계획 중 하나입니다. 사람이 외로움을 느낄 때 그의 마음은 지옥과도 같은 것입니다. 현대적인 표현으로 노이로제는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요즈음은 여러 가지 새로운 시설들이 어느 정도 사람의 외로움을 덜어주고는 있지만 문제는 나이를 먹어갈수록 일을 점점 더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사는가? 인생의 의미는 무엇으로 채워지는가? 현대인들은 인간존재에 대해서 더 많은 괴로움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영원한 삶에 관해 말씀하신 하느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때가 올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영원으로 향한 희망(망덕)으로 인해서 이 세상에서의 어떠한 무거운 짐도 어렵지 않게 지고 갈 수 있을 것입니다.
3 연중 제10주일 마태 9,9-13 (가)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오지 않고 오직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박인선 신부
우리는 오늘의 복음에서 간단하지만 많은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마태오의 간택입니다. 세관에 앉아있던 세리 마태오는 예수님의 “나를 따라오시오” 라는 한마디 말씀으로 즉시 예수를 따라 나섰습니다. 다음 하나는 바리세이파 사람들과의 논쟁입니다. 예수를 따라나선 마태오는 예수를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예수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데, 그 자리에는 제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태연히 같이 식사를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목격한 바리세이인들은 예수의 제자에게 항의했습니다. “어째서 당신네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저렇게 같이 먹고 마시고 있는 거요? 당신네 스승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지 않소?” 아마도 예수께서 그 말씀을 들으셨나 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이 답답한 사람들! 의사에게 성한 사람이 찾아오는 것을 보았소? 의사는 병자에게 필요한 것이요, 당신네들이 그렇게도 구약성서를 들먹이는데 호세아서의 말씀은 모른단 말이요? 기록되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내게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 대한 자선이다 하였소.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오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왔기 때문에 의인인체 하는 사람들보다는 이렇게 죄인들과 같이 먹고 마시겠소”
이상이 여러 교형자매들이 들으신 오늘 복음의 내용입니다만, 오늘은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에 대해 같이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예수께서 활동하시던 당시에는 몇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우선 율법학자들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바리세이파를 들 수 있겠는데, 그들은 율법을 충실히 지키는 사람들이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구원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신념으로 가끔씩은 엉뚱한 고집을 부린다는 것을 성서에서 알 수 있겠습니다. 사두가이파도 있었는데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다음에는 유대아와 갈릴레아 사이에 다소 비정통의 신앙을 가진 사마리아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으로 간주되어 유대아인들은 그들과 접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음으로는 동족들에게 사기꾼이요 배신자라고 백안시되면서 로마인들을 위해 일하는 세리들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창녀 등 죄인의 무리가 나타납니다. 소외 바리세이인들이나 율법학자들은 세리나 창녀, 혹은 사마리아인들과 접촉하면 부정해진다고 하여 그들과 같이 식사를 하기는커녕 그들과는 한마디의 말조차 하지 않으려 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바리세이인들과도 식사를 하실 뿐 아니라 태연히 세리의 집에도 초대받아 가셨습니다. 어떤 때는 먼저 청해서 손님이 되기도 했습니다. 야곱의 우물에서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청하시고, 그녀와 이야기 하셨으며 그들에게 손님이 되기도 했습니다. 창녀가 예수의 발을 눈물로 씻고 향액을 뿌릴 때에 그 여자에게 “당신의 죄를 사한다”고도 하셨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러한 일은 아직 아무도 하지 않았던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태연히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행동의 정당성을 주장하시기까지 하셨으니 그 일에는 분명히 어떤 커다란 뜻이 있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그 뜻은 바로 “모든 사람에게 열려진 하느님의 나라” 그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만의 구원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는 모든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크신 선물이라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8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외국인인 가파르나움의 백부장에게 “많은 사람들이 동쪽과 서쪽에서 와서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치에 참석할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심으로써, 이제는 이스라엘이라는 좁은 경계가 없어지고 하느님 나라에 참여할 사람들은 온 세상에서 모여든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죄인들과 같이 식사를 하셨다는 것에서도 마찬가지의 말을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께서 죄인들과 그저 사이 좋게 지내시면서 죄인으로 버려 두려고 하신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들은 불행 중에 있었고, 모든 사람들에게서 무시와 천대, 손가락질을 받았는데, 이제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를 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과 식사하셨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가 그들에게 임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메시아 시대의 기쁨의 상징이요 하느님과의 일치의 상징이라는 의미에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신 것은 하느님 사랑의 지배와 죄에서의 해방을 가져다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루가복음 19장에서와 같이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임했습니다. 이 삶도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습니다” 하고 죄인인 자캐오에게 자신 있게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오늘의 복음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해 주시는가를 보았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헌장 8장에서 교회는 그 품에 “죄인”들을 품고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어쩌면 여기에 모인 우리 모두가 다 죄인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인이면 죄인일수록 그만큼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계시면서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죄인이었던 마태오가 “나를 따라오시오” 하는 주님의 한마디 말씀으로 선뜻 주님을 따라 나섰듯이, 죄인이던 자캐오가 주님을 그 집에 모시고 구원을 얻었듯이, 우리 모두도 죄인이라는 깊은 자각과 아울러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려고 노력하며, 그럼으로써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깊은 묵상과 실천이 따르도록 노력합시다. 그러면 우리 모두도 창녀였던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인 “당신의 죄는 용서받았소.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했으니 평안히 가시오” 하시던 말씀을 우리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의사는 건강한 사람에게 필요하지 않고 병자에게 필요합니다.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오지 않고, 오직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아멘.
4 연중 제10주일 마태 9,9-13 (가) 간음하지 말라!
주님의 말씀 중에 마태 5, 27-37절을 현세태와 비교해 보면서 묵상해 보자. 이 내용은 산상설교에 나온다. 준비기도를 드린 다음 성서 본문을 천천히 한두번 읽는다.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는 사람은 벌써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했다”.
우선 주 예수님의 가르침은 어디에 있을까? 그분은 육체의 순결은 물론이고, 그 이전에 마음의 순결을 강조하셨다. 행위로써 죄를 범하기 이전에, 악한 생각을 한다면 벌써 죄를 범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이 부분을 읽을 때 깨꿋한 마음, 순결한 마음씨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은 행복선언에서 “마음이 깨꿋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될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주님과 함께 우리의 현실을 보자.
이 시대는 여러가지 매체을 통하여 인간의 육체를 속속들이 밝혀내고 즐길 수 있는 데까지 즐기는 그런 시대가 되어버렸다.
순결이란 용어가 사라진 시대인지도 모르겠다. 육체는 상품 선전의 도구가 되어버렸고, 사랑의 수단이 아니라 쾌락의 노예가 되어버린 시대다. 식당에 가보면 점잖은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릴 그런 그림들이 사방에 걸려 있어, 기분이 좋지 않을 때가 있다. 보통 사람들은 당연하게 생각해버릴지 몰라도, 이런 현상을 보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히느님이 퍼부으신 유황불로 멸망된 소돔과 고모라 도시처험, “너무나 엄청난 죄를 짓고들 있다”(창세 18, 20)라는 말을 듣지 않을까 걱정된다.
순결이란 말이 사라진 시대
최근에 미국 대롱령이 여성 편력이 심하다고 하여 자주 매스컴에 오르내리더니 비밀들이 탄로나 세상을 시끄럽게 하다가, 대통령의 도덕성이 문제가 되어 탄핵으로까지 가지 않을까 하는 심각한 지경에까지 이른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이런 퇴폐풍조와는 대조적인 정반대의 현상도 있어 흐뭇하게 생각하며,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박수를 보내고 싶다. 몇몇 학교와 교회에서 젊은이들이 순결서약을 한다는 보도가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건전한 사고로 또는 신앙에 입각하여 자발적으로 한 것인지, 아니면 현실을 보고 통탄하는 의식있는 선생님들의 교육과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인지는 몰라도, 현세태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어 흐뭇한 마음 금할길 없다,
정결은 욕망 제어하는 덕챙
우리는 주님의 정신으로 들어가 보자! 성서의 말씀을 읽고 그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축복을 받을것이다. “간음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는 사람은 벌써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했다.” 우리는 말장난을 피해야 한다. 죄를 범한 자는 누구나 주님 앞에 나아가 솔직히 죄를 인정하고, “주님, 저는 죄를 범했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할 것이다.
사람을 “금수와 같다”거나 “짐승만도 못하다”라는 극한적인 표현을 쓰면서 비하시키는 경우가 있다. 아마도 인간이 타락하면 그 어느 생물 못지 않게 잔악해지고 짐승과 다름없이 되어버린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라, 이성이 없는 짐승들보다 더 잔악 해지지 않을까?
정결과 순결은 절덕(節德)에 속한다. 이 덕행은 쾌락을 느끼는 경향을 완화하고, 쾌락을 신앙으로 조명된 이성의 제약 아래 두는 초자연적 습성이다. 본성적으로나 습득적으로 절덕을 얻을 수 있으나, 신앙의 조명을 받아 얻어질 때 초자연적이된다. 절덕은 신앙 생활에 대단히 중요하다. 절식, 절주, 정결, 순결, 동정, 자제 등이 여기에 속한다.
순결한 것은 무엇이나(필릴 4, 8) 성령이 맺어주는 열매다.(갈7? 5,22-23)
성 암브로시오는 정결을 결혼에서의 정결, 과부들의 정결, 동정녀들의 정결로 구분하였다.
정결이란 신앙으로 조명된 을바른 이성 판단대로, 생활의 필요성에 따라 성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제어하는 덕행이다. 이를 위해서는 각자의 신분에 따라 수행의 자세가 요구된다.
교회는 주님의 정신에 따라 정결과 순결을 강조한다. 마음이 깨꿋하고 순수하면 순수할 수록 주님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일생을 하느님께 봉헌한 사람들의 수행 모습을 우리 모두가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