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1주일
1. 최기산 신부(가)/ 2 2. 최봉원 신부(가)/ 4
3. 병의 승화(가)/ 6 4. 김창석 신부(가)/ 7
5. 허영업 신부(가)/ 9 6. 교구 주보(가)/10
7. 최인호 작가(가)/11
1 연중 제11주일 마태 9,36-10,8 (가) 이 시대의 사도
최기산 신부
대통령이 특사를 뽑아서 보낼 때는 잘난 사람을 뽑아서 보내기 마련이다. 적어도 대통령의 의중을 분명히 깨닫고 그의 뜻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큰 회사의 사장을 대신하여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도 그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배움도 부족하고 주변머리도 부족한 사람이거나 말솜씨도 거칠고 침을 아무 데서나 뱉는 사람이 특사나 대변인으로 채용되면 지나가던 개도 웃을 것이다. 더구나 그가 횡령을 하고 깡패처럼 칼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들 말할까! 한심하다고 말할 것이다. 안나오는 기침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12사도
예수님께서는 늘상 연민의 정으로 가득 차 계셨다. 고난받고 있는 사람들이 안쓰러워 바삐 움직이셨다. 이 동네 저 동네 다니시며 병든 자를 치료하셨고 마귀 들려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서 마귀를 쫓아버리셨다. 그분은 인간들이 참 자유를 느낄 수 있도록 즉 병고로부터의 해방, 고난으로부터의 해방, 악마로부터 해방되기를 늘 갈망하셨다. 예수님은 병 고치는 일을 혼자 하셨다. 혼자의 몸으로 여러 지방에 있는 사람들을 동시에 고치실 수 없으시기에 늘 마음 아파하시며 제자들을 뽑으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뽑으신 제자들은 특사로 보내기에는 너무나 인간적으로 부족했다. 그야말로 어중이떠중이들이 뽑혔다. 참으로 의외의 인물들이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어부들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어부들은 어군 탐지기나 무전기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아무나 어부가 될 수가 없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시대의 어부들은 대부분 문맹이고, 가난하고 예의 없고 거칠었다.
특히 갈릴래아 사람들은 이스라엘에서도 하층민이었고 천한 말을 즐겨했다. 어부가 아니더라도 마태오 같은 사람은 세리였다. 당시 세리는 세금을 거둬 로마에 바쳤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았다. 또 그들은 세금을 슬금슬금 횡령하여 자기네 배를 채웠다. 예나 지금이나 시체가 있는 곳에 까마귀가 모이고 돈이 있는 곳엔 유혹이 뒤따르고 부정이 난무하게 마련이다. 시몬은 어떠한가? 그는 혁명당원 출신이었다. 그는 로마인들을 박살내겠다며 칼을 품고 다니는 무리 중의 하나였다.
유대의 경우에도 혁명당원 출신이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뽑으신 제자들은 다 시원찮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용감하지도 못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했고 예수님께서 잡히셨을 때는 모두 줄행랑쳤다. 어쨌든 이런저런 상황으로 볼 때 예수님은 시시한 사람들을 제자로 뽑으셨다.
왜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제자로 뽑으셨을까? 여러 가지 가설을 내세울 수 있다. 우선 부족한 사람들을 뽑아야 전적으로 주님만을 의지할 것이기에 그들을 뽑으셨을 것이다.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은, 잘난 사람은 오만해져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기는커녕 자신의 영광을 탐하게 될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부족한 사람도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시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주님께서 만일 잘난 사람만을 뽑으셨다면 부족한 사람들은 자신의 부족을 늘상 한탄하며 살 것이다. 부족한 사람도 희망은 있다. 부족한 사람을 주님은 사랑하신다. 아흔 아홉 마리 양보다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더 염려하시는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절대 절망에 빠져서는 안 된다. 자신의 부족함을 비관해서도 안 된다.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든 어떤 상태에 있든 주님은 남들과 똑같은 사랑을 주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이 시대에 누구를 사도로 뽑으셨는가? 일차적으로 성직자들이다. 성직자는 예수님의 특사로서 대변인으로 뽑혔다. 아마도 부족한 인간을 뽑으시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인사정책이기에 변하지 않을 것이다. 만에 하나 ꡒ나는 잘난 사람이기에 당연히 뽑힐만하기에 뽑혔다ꡓ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예수님의 실수였다고 강변하는 것밖에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부족한 사람들을 뽑으시어 그들에게 병 고치는 능력과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을 주셨다. 그러므로 오늘도 부족한 사제들을 뽑으시어 병 고치는 능력과 마귀를 몰아내는 능력을 주셨다. 왜 오늘의 사제는 병을 고쳐주지 못하는가? 혹시나 인간적인 능력을 내세워서가 아닌가? 약한자 안에서 당신의 능력을 발휘하시는 예수님을 잊은 것은 아닌가!
오늘 우리는 성소자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를 느낀다. 때로는 왜 일류대학에 갈만한 실력을 갖춘 자들만 신학생으로 뽑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주님의 생각은 다르시다. 주님의 뜻은 더 깊고 더 심오하시다. 약한 자 안에서 주님의 영광은 드러나는 것이다. 복음의 메시지
광의로 보면 세례 받은 우리 모두는 이 시대에 예수님의 대변인으로 뽑힌 사람들이다. 이 시대의 사제들은 물론 우리 모두는 영적으로, 내적으로 육적으로 고난받는 사람들을 치유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우리에게 맡기셨다. 주님께서는 누구든 사랑하신다는 소식을 전하여 영적치유를 해주고, 미움과 절망 속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과 기쁨, 평화를 전하여 내적인 병을 치유하며 병자를 위해 함께 기도하면서 병원에 보내어 고쳐주는 치유를 우리가 함께해야 한다. 오늘의 사탄은 뱀에 붙어있지 않고 인간이 좋아하는 돈에 붙어있다. 사람들은 돈에 모든 가치를 두고 있다. 돈에서 해방시키는 것, 그리고 주님께 모든 가치의 우선을 두도록 하는 것이 마귀로부터의 해방이 아닐까!
2 연중 제11주일 마태 9,36-10,8 (가) 부르심을 따라
최봉원 신부
크리스챤은 모두 파견 받은 자임
오늘 복음은 예수님 사업의 일꾼으로 뽑힌 열 두 제자들의 파견에 대한 내용을 들려줍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놓으시고 그들에게 여러 가지 권능을 주신 후, 가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성부께서 성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성자는 제자들을 보내시며(요한 20,21) 만방에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만약 오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당신 제자들을 다시 뽑으신다면 우리들 중에 누가 뽑히겠습니까? 요즈음 여성 해방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고, 사회 각 분야에 침투된 그들의 활동이 지대하기에 혹시 여자들을 부르실지, 아니면 상호 유익성을 생각하시어 혼성으로 부르실지 모르겠습니다. 어찌 되었건 우리들 중에 평범한 사람들이 제자가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파견 받은 열 두 제자들은 사실 그 시대의 평범한 사람들로서 성격과 재능도 각각 달랐습니다. 고기잡이 어부들이 있었는가 하면 세리도 있었으며, 보수파 유대인이 있었는가 하면 열렬한 혁명 당원도 있었습니다. 또 야심 많기로 유명한 사람, 물욕(物慾)이 많은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서민도 있었습니다. 물론, 이들 중엔 형제가 함께 불리운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다양성은 누구나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으며 또 각자의 고유한 방법으로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참여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말로써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행동으로써 병을 고쳐 주며 악령들을 쫓아 내 주었습니다. 오로지 그들은 예수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고서 타고 난 재능과 소질을 충분히 발휘하여 사명 수행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믿고 세례를 받았으며, 병자가 치유되고 죽은 자가 살아났으며, 마귀들이 도망을 치기도 했습니다.
또 하느님의 정의는 결국 악을 멸하고 선을 이룰 것이라는 점을 사람들은 깨달았으며, 병을 고치고 악령을 쫓아내는 권능은 새 시대, 곧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표(보증)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과 현존으로써 우리 안에 나타났다는 것이지만, 그 완성을 기다려야 하며, 곧 실현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느님 나라의 특징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에서 명한 “사람을 죽이지 말라. 도둑질을 하지 말며, 간음(姦淫)하지 말라”는 등 불의(不義)를 금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사랑”의 실천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선 가져야 할 마음의 태도는 여덟 가지 참된 행복의 정신(마태 5,3-10)이며,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서 중심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 없이는
세상을 변형시켜 하느님께 바칠 수 없으며 하느님 나라의 완성도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성직자나 수도자가 아닌 평신도의 길을 걷도록 하느님으로부터 불리움을 받은 여러분들은 어떠한 사명을 띠고 있습니까? “평신도들은 본래 현세적 일에 종사하여 하느님을 뜻대로 모든 것을 관리함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즉 복음의 정신대로 자신들의 임무를 성실히 이행함으로써 세상의 성화를 위해 마치 누룩과도 같이 내부에서 작용하여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빛으로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 보이도록 불리운 자들입니다.”(교회헌장 31)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업을 완수하시기 위해 많은 일꾼을 필요로 하신다는 것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듯이 하느님의 일을 돕는 것은 수도자나 성직자만이 하는 일이 아니라 세례 받은 모든 이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불리운 크리스챤은 믿지 않는 이들에게 가서 그리스도를 전하여 하느님 나라에 대한 복음을 선포해야 할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열 두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직제자로 뽑히지는 않았으나, 오늘과 같은 시기에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 모두는 주님의 제자로 뽑혀 각자 삶의 터전으로 파견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가정에서, 학생은 학교에서, 회사원은 회사에서, 직공은 공장에서 자기 생활에 충실함으로써 각자 누룩이 되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해야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믿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고, 들어야만 믿을 수 있으며, 복음 전파자가 있어야 들을 수 있습니다.
복음을 믿음은 곧 구원과 생명을 얻는 것이고, 거절함은 심판과 죽음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믿고 믿지 않고는 듣는 이들의 자유이지만 복음 전파는 파견 받은 크리스챤의 중대한 사명임을 깨달아 하느님 나라의 복음 전파에 게을리 하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아멘.
3 연중 제11주일 마태 9,36-10,8 (가) 병(病)의 승화(昇化)
어느 나라에서 있었던 일이다. 사형수에게 사형집행을 하는데, 집행장에서 우선 눈을 가리우고 손을 뒷짐지게 하였다. 그리고는 그를 기둥에 붙들어 맺다.
다음에는 목구멍을 뾰족한 연필로 찔렀다. 피는 한 방울도 흘러나오지 않았지만 집행자는 말로만 “어이구, 피가 흘러내리네!” 하고는 즉시 그 피를 담을 그릇을 목에 매달았다. 10분 후에 와서 “어이구, 그릇에 다 찾네!” 하며 그릇을 다시 떼었다가 그대로 걸어 주었다. 사형수는 그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몰랐고, 피가 한 그릇 나온 것으로만 알았다. 사형 당하는 입장에서는 10분이 한 시간 이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10분 후에 다시 와서 같은 말과 같은 일을 되풀이했다. 그리고 세 번째 또 와서 두 번째와 같이 되풀이했다. 그러자 그 사형수는 쓰러졌다. 사실은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죽은 것이다. 위의 이야기는 정신이 육체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는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그밖에도 담을 뛰어 넘었다든지, 장정 넷이서 간신히 들 수 있는 무거운 물건을 혼자 들었다든지 꼼짝 못하던 환자가 백리길을 걸었다든지 하는 예도 위의 이야기와 비슷하다 할 수 있다.
창세기에 따르면,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하느님과 유사하게 만들어졌다. 때문에 우리 인간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이 가능성은 대개 발휘되지 못하고 인간에게만 부여된 이런 특권을 무위로 끝내는 수가 흔하다. 참으로 아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대개 기(氣)가 병들었을 때, 병자가 되는 만큼 병중에 있을 때나 의사나 약에만 의존하지 말고 병을 극복하도록 노력함도 좋을 것이다. 이것을 투병이라 하지 않는가? 그렇다고 의사도 약도 병원도 필요 없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아담이 낙원에 있을 때 병도 없었고 죽지도 않았던 상태를 한 번 쯤은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다. 우리가 병들게 되는 원인을 생각하면 결국 무리와 불합리가 많다는 것을 시인하게 된다. 무리라면 과로를 들 수 있겠다.
불합리라면 분수에 넘치는 일을 욕심내서 했을 경우를 들 수 있겠다. 병원에서의 치료는 의사의 인술이나 약의 효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병원에 오가고 또 입원해서 심신을 쉬게 하는 때문이기도 하다. 의술이나 약은 쉬며 조절하는 데에서 치료시키는, 자연을 돕는 역할을 하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도 “중용”이란 말을 꺼낼 수 있겠다. 중용을 견지하지 못한 데에서 심신의 균형을 잃고 병이 생긴다면 이제 처방은 뻔하다. 중용을 견지하는 일은 보통 의지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이 중용을 곧잘 견지하게 된다. 신자라고 병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어려움과 병고에 대처하는 마음가짐이 신앙이 없는 사람보다는 어딘가 다르다. 고통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병 앞에서 뿐 아니라 죽음 앞에서도 그렇게 태연할 수 없다. 우리 선조 순교자들의 예만 보아도 알 일이다.
예수님이 생존시 병을 낫게 해 주시는 전제 조건이 항상 믿음이었다. 그것은 의지행위이고 마음에 달린 문제란 뜻이다. 예수님 자신이 병으로 앓고 고생하신 일이 있었던가? 치유와 건강을 위해서는 육보다는 영에 치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장수 비결 중에 하나가 영육이 균형을 잡는 것이지만 마음을 편히 갖는 것이란 말을 많이 들었다.
(1981, 10, 1 월보「가톨릭 중앙의료원」제18호)
4 연중 제11주일 마태 9,36-10,8 (가) 사랑의 치유(治癒)
김창석 신부
<성서>에 보면 예수가 나환자들을 낫게 해준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요즈음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예수처럼 병자들을 고쳐 준다고 하면서 실제로 병자들을 낫게 해주는 경우가 있는데, 나병을 고쳐주었다는 말은 아직 들은 적이 없다. 그래서 나도 나환자의 치유를 육체적인 치유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실존적인 치유로 해석하고 싶다.
실존적인 치유라는 의미는 나환자가 실제로 나병은 낫지 않았어도 자기가 나환자라는 것을 잊고 생각하지 않으면 완쾌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담배 연기가 자욱하고 사람들로 가득찬 파리 시내의 한 다방을 둘러보고 “아무도 없군!”하고 뇌까렸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는데, 그만큼 인간의 생각은 실존과 직결되는 것이다. 하늘이 푸르니까 푸르게 보는 것이 객관적인 사실이지만, 내가 푸르게 보니까 푸르다고 하는 주관주의적 입장에도 일리가 있는 것 같다. 같은 이치로 나환자가 스스로 나환자라는 것을 잊고, 그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나환자가 아니라고 볼 수 있다는 말에도 일리가 있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실존적인 치유인 것이다. 그런데 나환자들이 스스로 나환자임을 잊도록 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나환자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계기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18년 전 내가 의정부 성당의 주임 신부로 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한 나환자가 나를 찾아왔다. 자기 친구가 죽게 되었는데 가서 병자 성사를 해달라는 사연이었다. 나는 그를 따라 의정부에서 약 6킬로미터 떨어진 어느 다리 밑으로 갔다. 그곳에는 만신창이인 한 나환자가 죽어가고 있었다. 참혹해서 차마 보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축성된 올리브 기름을 이마에 발라 주어야 하겠는데, 도저히 손을 갖다 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젓가락이나 붓으로 발라 줄까 하다가 그 환자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봐 ‘에라, 모르겠다’하면서 손가락으로 이마에 성유(聖油)를 발라 주었다. 그때부터 나는 불쌍한 나환자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나환자들은 물질적으로 아무리 도와 주어도 잘 살기 어렵다. 나환자들이 진짜로 필요한 것은 물질적인 도움이 아니라 정신적인 도움, 즉 인간 대우를 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때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빈손으로라도 나환자 마을을 가끔 찾아가서 그들과 같이 기도하고 식사하고, 또 그들의 방에서 잔다. 그래서 그들은 나와 함께 지내고 대화하는 동안 자신들이 나환자라는 것을 잊고 생각하지 않게 된다. 솔직히 말해서 나환자들과 같이 식사하고 그들의 방에서 잔다는 것이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지금은 좀 익숙해졌지만 전에는 매우 어려웠다. 악수는 고사하고 그들이 만졌던 문고리를 하이타이로 일일이 씻고, 그들이 가까이 올까 봐 몸을 움츠리곤 하였다. 손가락 없는 뭉툭한 손이 잠긴 막걸리 잔을 받아 마시고, 손가락이 없으니까 잘 닦지 못해 고춧가루나 음식 찌꺼기가 말라붙은 유리컵에 물을 받아 마시면, 뱃속에서 온통 나병 균이 꿈틀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하여 기를 쓰고 그들이 주는 음식을 받아먹고 마셨다.
잠자리에 들면 닭똥 냄새 같은 이상하고 역겨운 냄새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도 우리와 같은 영혼을 가진 인간이고, 오히려 영혼은 우리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꾹 참았다. 익숙해지니까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 나환자촌에 갈 때마다 내가 신부라는 것이 매우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이가 옮아 왔다고, 또는 썩는 냄새가 난다고 내 아내가 소위 바가지를 긁는다면 어떻게 할 뻔했나 생각하면 아내가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신부니까 소외된 나환자들과 전적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에 나는 큰 보람을 느낀다. 그래서 나환자들도 그들이 나환자라는 것을 잊고 나와 어울릴 수 있는 것이다.
몇 해 전 중림동 성당의 남녀 회장들이 나와 함께 나환자촌에 가서 같이 1박 2일 동안 기도회를 가진 적이 있다. 우리들은 나환자들과 같이 식사하고, 같이 손잡고 기도하고, 그들의 집에서 잤으며, 여 회장들은 나환자들의 아기를 돌보아 주었다.
기도회 후 어느 나환자는, 그들이 우리에게서 수억 원의 돈을 받았다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즐거울 수가 있겠느냐고 감격해 하면서, 인간 대접을 받은 것이 너무나 기쁘다고 털어놓았다. 그 기도회 때 어느 나환자가 “문둥이 예수님!”하고 기도하였는데,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그 절실한 뜻과 심정을 알아들을 만했을 것이다.
5 연중 제11주일 마태 9,36-10,8 (가) 삶의 현장에서 주님을 증거하자
허영업 신부
나환자들의 성자인 다미안 신부가 나환자 수용소 물로카이섬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곳은 지옥과 같은 곳이었다. 매일같이 욕설과 싸움이 그칠 즐 몰랐고, 비관에 빠져 자살하는 사람도 많았다. 다미안 신부가 그들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말도 붙일 수가 없었다.
나환자들을 위해 봉사하려는 다미안 신부에게「하느넘 사랑 좋아하시네! 하느님이 있다면 우리가 나병에 걸리게 내버려두고, 썩은 채로 죽어가게 하겠어? 만약 하느님이 있다해도 그런 하느님은 못믿겠어. 하느님이 사랑이다! 뭐다 하는 것은 건강한 당신같은 사람이나 하는 잠꼬대 같은 소리야‥‥」하며 빈정거렸다.
그럴 때마다 다미안 신부는「오 주여! 나로 하여금 문등병 환자가 되게 하소서! 그래서 이들이 마음을 열고, 하느님 사랑을 깨우치게 하소서!」하며 간절히 기도드렸다. 결국 다미안 신부는 자신의 기도대로 나병에 걸려 손바닥이 썩어들어갔다.
그 때 그는「나도 너희와 같은 나병환자다. 비록 육체는 썩어가지만 마음에는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가 있다. 나를 따라 하느님을 믿어라」고 외쳤다. 다미안 신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복음을 선포하고 증거했다. 드디어 지옥같은 물로카이 수용소는 믿음과 평화의 공동체가 되어갔다.
희생과 사랑, 그리고 봉사
다미안 신부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흘륭한 삶을 살다 나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온 세계는 다미안 신부의 희생과 사랑, 그리고 봉사정신을 오늘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여 파견하신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당신의 능력을 나누어주신다. 제자들의 파견은 예수님의 일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뽑으신 제자들의 명단을 보면, 결코 인간적인 능력이나 재능이 많온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인간적인 약점도 많고 무능하고 둔한 사람도 있었다. 세속적인 기준, 즉 좋은 학벌, 명석한 두뇌, 훌륭한 가문 등으로 제자를 뽑으신 것이 아니었다.
12사도의 선별 기준
예수님이 제자들을 뽑으신 기준은, 예수님께 대한 헌신적인 사랑이었다고 생각된다,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순수하게 그 말씀을 받아들이냐가중요한 기준이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축복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이었다. 마치 빵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제지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그것은 자칫 자신을 내세우는 꼴이 되기 쉽다. 자신이 철저히 도구됨을 인정할 때, 가장 흘륭한 제자가 될 수 있다.
부활 후 제자들의 복음선포는 예수님의 선포와 같은 것이다.「하늘 나라가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는 예수님의 선포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한 제자들도 내용상 같은 의미이다.
그런데 이 선포는 심판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선포를 받아들이냐의 여부에 따라 구원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음 선포는 종말론적이나 또한 뉘우침과 회개의 기회이기도 하다. 특별히 제자들의 기적 행위는 복음선포의 징표와 중거로 사용되었다.
세례받은 우리가 해야 할 일
세례를 받은 우리도 모두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다.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분명하다. 삶의 현장에서 주님의 일을 해야하고 주님을 증거해야 한다. 물론 우리의 힘으로써가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으로 할 수 있다.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나누어주셨던 당신의 능력을 우리에게도 똑같이 주신다. 우리가 겸손되이 청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6 연중 제11주일 마태 9,36-10,8 (가) 부름 받은 우리가 먼저
교구 주보
선택받은 민족의 사명(출애 19,2-6ㄱ)
하느님께서는 선택받은 민족으로서 그에 맞갖은 사명을 이스라엘에게 주신다. 그 사명이란 이스라엘이 인류 속에서 사제의 직책을 맡는 일이요 거룩한 백성이 되는 일이다. 사제의 직책을 맡은 이스라엘은 야훼만을 섬기며 뭇 민족에게 야훼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증언하는 데에 전적으로 종사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이 여러 민족들 가운데서 한복판의 징표로 빛을 발할 때(이사 2,1-4 참조) 여느 민족들은 이 하느님의 백성으로부터 배우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택받은 이스라엘의 역할이고 본연의 임무임을 출애굽기는 상기시켜주고 있다.
하느님과 화해한 인간(로마 5,6-11)
모든 인간이 죄에 물들어 살았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많은 우리 인간을 위하여 죽으심으로써”(로마 5,8)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키셨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약한 인간 속에 자리잡은 악과 죄를 정복할 수 있는 참사랑을 인간에게 보여주셨다. 당신 아들을 통해 보여주신 하느님의 사랑 덕분에 우리들은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과 화해했다면 물론 사람들끼리도 화해할 수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올바른 관계를 얻었으니, 그리스도인은 죄에서 벗어난 기쁨으로 살아갈 것과 사랑하면서 살도록 불림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가르치고자 한다.
부름받은 우리가 먼저(마태 9,36-10,8)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신 후 파견하시면서 “이방인의 길로 가거나 사마리아인 고을로 들어가지 말고 이스라엘 백성 중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10,5ㄴ-6)고 명하신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중 길 잃은 양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면 많은 사람이 하느님께로 몰려오리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마태 8,11; 루가 13,29).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을 받들어 각지로 다니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고쳐주는 일을 해야 한다(10,2. 7-8). 예수님의 궁극적 사명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이며 예수님의 모든 활동 지향은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에 초대하는 일이었다. 이 초대에는 그 누구도 배제되지 않았다. 죄인도 병자도 소외자도 결코 배제된 사람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서는 사람들의 온갖 아픔이 말끔히 사라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교회를 하느님 백성이 모인 공동체라고 말한다. 이 공동체에서는 “약하다고 여겨지는 것일수록 오히려 더 요긴하고, 천하다고 생각되는 지체일수록 더 품위있게 여겨야”(1고린 12,22-23 참조) 할 것이다. “지치고 고통받는 이들을 측은히 여기시고 동정하신”(마태 9,36 참조) 예수님의 모습을 교회 내에서 먼저 살아야 여느 사람들도 이 구원의 징표를 보고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7 연중 제11주일 마태 9,36-10,8 (가) 베드로의 뉘우침과 유다의 후회
최인호 작가
예수께서 산으로 올라가 밤을 새우시며 하느님께 기도하시고, 직접 뽑아 사도로 삼은 제자는 모두 열두 명입니다(루가 6,12-13). 예수께서는 이 열두 제자에게 악령을 제어하는 권세와 병을 고치는 능력을 주시어 병자를 고쳐주게 하셨습니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베드로부터 시작되어 유다로 끝납니다. 제자 이름의 나열을 통해 으뜸제자는 누가 뭐래도 주님께서 “이 바위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신 베드로임을 알게 되고 꼴찌제자는 주님께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을 뻔했다”(마르 14,21)고 말씀하신 “예수를 팔아 넘긴 가리옷 사람 유다”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으뜸제자인 베드로나 꼴찌제자인 유다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정열적이고 힘센 어부출신인데 유다는 세리였던 마태오를 제치고 회계를 맡아보던 머리 좋고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뭐니뭐니해도 두 사람의 공통점은 주님을 배신했던 점일 것입니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배신자이고 유다는 주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 넘긴 배반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두 사람의 운명을 극과 극으로 갈라놓았을까요? 그것은 주님을 배반한 직후에 보인 행동에서 비롯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모른다고 한 후 주님과 눈을 마주친 다음 “밖으로 나가 슬피 울며”(루가 22,62)
자신의 행동을 뉘우쳤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내가 죄없는 사람을 배반하였으니 나는 죄인입니다”(마태 27,4)라며 죄의식을 느끼고 후회는 하였지만 결코 회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죄를 뉘우침으로써 용서받을 수 있었지만 유다는 자신의 죄를 후회는 하였으나 회개하지 못했으므로 끝내 용서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죄를 뉘우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주님을 등지지 않고 항상 주님 곁에 머물며 주님을 마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주님을 배반함과 동시에 주님을 등지고 떠나 멀어져갔던 것입니다. 이를 요한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유다는 곧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요한 13,30).
베드로와 유다는 똑같이 밖으로 나갔으나 한사람은 슬피 울었고, 한 사람은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유다의 결정적인 차이는 이처럼 주님을 ‘마주봄’과 주님을 ‘등지고 떠남’에 있습니다.
죄인인 우리들이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베드로처럼 주님을 향해 몸을 돌려 그를 마주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죄인인 우리들이 유다처럼 주님을 등지고 캄캄한 밤 어둠 속에 머물러있을 때 우리 죄는 죄책감인 ‘피의 밭’ 속에 그대로 묻혀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뉘우침은 우리가 선 그 자리에서 주님께로 ‘뒤로 돌앗!’ 하고 마주보는 자세를 취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며, 회개야말로 배신자 베드로를 으뜸제자로 만든 원동력인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