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연중 제 15주일 주일강론 모음

 

연중 제15주일






        1. 강길웅 신부(가)/ 2                 2. 김창석 신부(가)/ 4


        3. 김몽은 신부(가)/ 5                 4. 안충석 신부(가)/ 6


        5. 김현준 신부(가)/10                 6. 최기산 신부(가)/12


        7. 함세웅 신부(가)/14                 8. 허영업 신부(가)/16


        9. 최인호 작가(가)/17                 10. 교구 주보(가)/19


      


1          연중 제15주일   마태 13,1-23 (가) 우리는 하느님의 포도밭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이사 55,10~11 (비는 땅에서 싹이 돋아 자라게 한다)


제2독서 로마 8,18~23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복 음 마태 13,1~23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우리 속담에 ‘말이 씨가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연하게 한 말들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경우를 말합니다.


제 친구 중에 누가 상처를 하면 ‘그 사람 장가 두 번 가서 좋겠다.’ 라고 뚱딴지같은 농담을 잘 하더니 정말 자기 부인도 마흔 살에 죽어서 그 친구도 장가를 두 번 가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한마디의 말이 사람을 쓰러뜨리기도 하고 또는 죽어가는 사람을 벌떡 일으키기도 합니다. 하찮은 사람의 말에도 이처럼 큰 위력이 있다면 하느님의 말씀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분이 한번 하신 말씀은 헛되게 무너지지 않으며 기필코 이루어지고야 마는 것이 하느님의 힘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는 바로 그 내용이 나옵니다.




바빌론에서 50년 이상 포로 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유대인들은 폐허된 도시와 무너진 성전 앞에서 깊은 좌절감을 느낍니다. 도저히 다시 회복할 수 없고 다시 일으킬 수 없는 암담하고도 참담한 현실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예언자 이사야가 나타나서 하느님 위로의 말씀을 들려줍니다. 그때 하느님의 약속은 새 예루살렘을 일으켜 주시는 것이고 번영과 행복과 자유가 있는 새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니 실망하지 말고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힘을 내라는 것입니다.




비가 오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지는 않습니다. 빗방울이 다시 하늘로 올라가지는 않습니다. 꼭 땅을 적시고 만물에 생기를 줍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꼭 그렇습니다. 말씀은 특히 메마른 인생, 실패한 인생, 시련 속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은혜의 비를 적셔 주십니다. 성서에 사람이 빵으로만 살지 아니하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귀절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실로 빵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하나의 씨와 같아서 밭이 나쁘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는 바로 이에 대한 씨뿌리는 비유가 나오고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의 씨가 아무리 위대하고 훌륭하다 해도 그 씨를 받아서 싹을 틔우는 땅이 나쁘면 헛수고가 됩니다. 마치 농부가 땅을 쟁기로 갈고 거름을 주듯이 우리도 그렇게 우리 마음을 깊이 파서 깨뜨리고 양분을 주어야만이 큰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언젠가 모 본당에서 피정 지도를 한 일이 있는데 그때 회장님이 딴 일만 하고 강론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왜 안 듣느냐고 했더니 자기는 안 들어도 다 안다는 것이었습니다. 본당 신부님께 여쭈어 봤더니 ‘저 분은 본래 입만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돌밭인 사람은 앞에서 설교를 해도 말씀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한번은 주일 미사 강론을 할 때 책을 덮으라고 해 놓고 오늘 제 1독서에서 무슨 말씀이 있었느냐고 질문을 했더니 아는 사람이 꼭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를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를 못하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아무리 씨를 뿌려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며 성장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가시덤불만 무성해 있으니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잡초를 제거해야 합니다.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먼저 겸손해야 합니다. 듣고 또 들어 도 하느님의 말씀은 생명이 있어서 들을 때마다 은혜가 다르고 축복 이 다릅니다. 들을수록 그 의미가 깊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다 안다고 교만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음식을 먹을수록 맛을 알고 고기를 씹을수록 맛을 깊이 느끼는 것과도 같습니다.




둘째는 마음을 쟁기로 깊이 갈아엎어야 합니다. 그리고 덩어리를 깨뜨려야 합니다. 마음이 딱딱하면 말씀을 받아내지 못하고 튕겨 냅니다. 마음에 온통 쓰레기로 꽉 차 있으니 보물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깊은 성찰을 통한 진실한 회개밖에 없습니다. 누구든지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면 기도가 될 수가 없으며 하느님의 말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됩니다.




셋째는 하느님의 말씀을 진실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너무도 필요 없고 속된 말의 홍수 속에서 자신을 가둬 놓고 있습니다. 쓸데없고 허무한 것엔 너무도 집착해 있으며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엔 등한히 합니다. 세상에 아무리 좋은 책이 많고 좋은 말이 많아도 하느님의 말씀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힘이 솟아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고 보람찬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포도밭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도록 합시다.


















2             연중 제15주일   마태 13,1-23 (가) 고통의 고마움


                                              김창석 신부




미국의 나환자들을 위해 헌신했던 폴 브랜트가 몇 년 전 은퇴했을 때, 나환자들에게 주고 싶은 마지막 선물이 무엇인가 물었다. 그때 그는 “그것은 아픔입니다.”라고 대답했는데, 그 말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나환자들은 초기 증세나 중기에서도 아픔을 모른다. 상처를 받아도 감각이 없어서 아프지 않기 때문에 치료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상처는 더욱 덧나고, 결국은 신체의 일부를 절단해야 할 지경에 이르기 일쑤인 것이다.




‘아픔’은 고통 자체이지만 치료를 부르는 신호다. 나환자들에게 ‘고통’을 주고 싶다는 폴 브랜트의 말은 나환자들에 대한 지고한 사랑의 표시일 것이다. 며칠 전에 넘어져 척추가 마비된 환자를 위문하러 병원에 갔었다. 그런데 가족과 환자는 마비된 척추에 아픔을 느낄 수 있어 매우 다행이라고 좋아하고 있었다. 아픔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곧 환자가 마비에서 풀려난다는 징조이기 때문이란다. 여기에서의 ‘아픔’은 치료효과 자체다. 치통이라는 아픔이 없으면 이빨이 커다란 이상이 있어도 모를 것이고, 내과의 여러 증세도 아픔의 호소가 없으면 누가 그 위급함을 알아내 주겠는가.




부활절을 생각해 보자. 단식과 회개의 시기인 사순절이 없는 부활절은 무의미한 것이다. 예수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은 ‘아픔’은 피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고 감수함으로써 부활이라는, 혹은 영원한 삶의 뜻을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요즈음 사람들은 고통을 싫어한다. 그처럼 종교도 십자가의 괴로움을 피하고 복을 비는 쪽으로 변질되어 가는 듯하다. 참다운 기독교인은 고통을 당할 때 오히려 그 고통을 내리신 하느님께 감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고통을 통해서 하느님의 높은 뜻이 나타나고, 또한 고통이야말로 하느님의 축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풀톤 쉰은 “고통은 하느님의 확성기”라고 말했다.


그것은 아픔의 고마움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각고의 노력 없이 얻어진 영광의 무의미함이라든가 ‘한탕’으로 추구한 부의 쓸모 없음을 생각해 보면, 고통의 가치에 새삼스러운 인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서양에는 ‘교회와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천국과의 거리는 가깝다’는 격언이 있다.




부활절의 축제 분위기에 앞서 미리 많은 기독교인들이 먹고 싶은 것을 참고, 굶주림을 자처하고, 마음을 밝게 간직하려는 것도 ‘부활’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것이다.


고통이 없이 행복이 있을 수 없고, 십자가의 죽음 없이 부활이 있을 수 없다.


‘아픔’이야말로 눈물의 씨앗이 아니라 ‘웃음의 씨앗’이며, 절망이 아니라 희망 자체이며, 밝은 내일을 향한 오늘의 시험임을 알아두어야 한다. 아픔을 모르는 육신, 괴로움을 겪어보지 못한 정신은 또한 인생의 어떤 면역성도 지닐 수 없을 것이다.


3         연중 제15주일   마태 13,1-23 (가) 내게 가까운 자가 누구냐?


                                                           김몽은 신부




예수님은 사람들이 아는 사실에서 비유를 들어 진리를 깨닫게 하신다. 비유는 진리를 구체화시키고, 알지 못하는 것을 설명하므로써, 지금까지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한다. 비유는 하늘의 뜻을 가진 땅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알아들으시오」라는 예수님의 말씀같이 비유는 당자에게 책임을 지우며 진리를 원하는 이에게 진리를 나타내 보이고, 원치 않는 이에게는 가리워지고 만다.




오늘 복음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여러 가지 밭은 여러 청중을 가리킨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고, 그 방법에 따라 결과(열매)도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말씀의 결과는 듣는 자에게 달렸다. 같은 씨(말씀)가 같은 시간에 똑같은 방법으로 똑같이 뿌려지지만, 듣는 자의 반응에 따라 그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첫째 부류의 사람은 마음의 문을 닫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가 뿌리를 내리기에는, 마치 길가에 떨어진 씨앗처럼 불가능한 일이다. 자신의 편견과 아집, 옛것을 고수하려는 고루한 마음, 새것을 덮어놓고 경멸하고 위험시하는 근시안적인 자기폐쇄, 그리고 부도덕한 생활, 교만과 자아도취, 특히 진리에 대한 무관심 등이 그를 소경으로 만든다.




둘째 부류의 사람은 얄팍한 인생관을 가진 자로서, 깊이 생각하는 일도 없이 경망스럽게 새것이면 무엇이든 일단 덮어놓고 좋아는 하지만, 즉시 싫증을 내고 끝을 맺지 못한 채 도중에서 그만둔다. 그들은 시작하는 것은 많아도 오래가지 못하고, 쉬 더웠다 쉬 식어버리는 자들이다.




셋째 부류는, 마치 두 주인, 아니 셋 넷의 주인을 섬기는 자들로서, 그들의 생활은 여러 가지 잡다한 일들에 분주하여, 참다운 가치관을 터득치 못한 자들이다. 현대인들의 생활은 여기에 속한 것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들은 세속 일에 바빠, 기도하는 시간도, 성경을 읽을 틈도, 교회에 나갈 여유도 없을 뿐 아니라, 주님을 영접은커녕, 오히려 그들의 생활영역에서 밀어낸다.




넷째 부류는 옥토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마음을 열어 놓고 언제나 배우려 든다. 또 귀를 기울이고 언제나 듣는다. 하느님의 말씀, 친구의 충고를 듣는 사람은 도덕적 실패가 있을 수 없다. 그는 심사숙고하여 세상의 참된 이치를 깨닫고, 그가 듣고 아는 바를 실천에 옮긴다. 그런 사람은 좁은 땅에 떨어진 씨앗처럼 열매를 맺는다.


이러한 청중들 가운데 우리는 어떠한 부류에 속하고 있는가를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미 말씀의 씨앗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들을 귀 있는 자로서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처럼 풍성한 열매를 맺는 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는 지극히 겸손한 자이고, 인간의 한계를 아는 자이다. 인간의 한계를 안다는 것은 곧 창조주이신 주님을 알고 위대하신 하느님 앞에 인간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아, 오직 하느님께만 의존할 것을 알아, 그분의 진리에 맛들임을 뜻한다. 이렇게 하느님을 알고 그의 뜻을 구하는 자야말로 참으로 지혜로운 자라고 구약성서에서는 말하고 있다.


또 한가지 나타나는 것은 청중의 무분별성에도 불구하고 추수가 확실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 비유의 결론이다. 어떤 씨는 길가에, 어떤 씨는 박토에, 어떤 씨는 가시덤불에 떨어지나 옥토에 떨어진 씨도 있어 풍성한 수확을 거둔다. 아무도 씨의 추수가 어떠할지는 추수 때까지는 확실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떨어져 있는 양태를 보고 수확을 추정할 수 있으며, 어떠한 결과이든 간에 확실한 것은 추수할 때가 오리라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모르고 전하지만, 우리의 책임은 씨를 심고 가꾸는 것 뿐이요, 결실은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다. “나(바오로)는 씨를 심었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1고린 3,6) 그러므로 인내와 소망으로 씨를 심고, 추수를 기다려야 한다. 곧 하느님의 자녀들, 하느님의 말씀 안에 머무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있으리라는 가르침이다. 바오로 사도가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 따름입니다.”(로마 8,25)라고 말한 것처럼.












4      연중 제15주일   출판주일  마태 13,1-23 (가) 씨뿌리는 자의 비유


                                                      안충석 신부




오늘 복음성경에서는 주의 말씀을 씨앗에다 비유하시면서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우리 마음을 여러 종류의 밭으로 나타내셨습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인 씨앗을 받아 열매를 맺고 그 씨앗을 다시 다른 인간들에게도 열매 맺도록 퍼뜨리고 계신 것입니까? 아니면 열매 못 맺는 무화과나무처럼 저주받을 존재인가를 살펴보십시다.




이런 실화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약 40여년 전에 미국의 출판업계를 휩쓸었던 가장 인기 높게 팔린 책 가운데 ‘에드워드 빽’이란 사람의 자서전이 있었습니다. 이때 이 에드워드 빽은 미국 필라델피아의 커리스만 출판사 사장입니다. 그의 출판사는 서너 개의 가장 부수 높은 잡지와 신문들을 통해서 가계 각층의 미국 국민들에게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각 방면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기까지는 그 출판사 사장 에드워드 빽이란 사람의 일생이 바로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일찍이 12살 때 고국 화란으로부터 이민을 떠날 때, 앙상하게 뼈만 남은 조부께서 손을 꼭 잡고 울면서 남겨주신 좌우명이 있었습니다. “너는 이제부터 어디 가든지 네가 그곳에 있음으로써 그 곳이 무슨 모양으로든지 더 나아지도록 너의 모든 힘을 다하여라.”하시며 이 말씀을 언제 어디서나 명심하여 실행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나이 어린 빽은 손에 단돈 1달러를 들고 미국에 도착하였으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지금 이 보스톤 도시 길 한 모퉁이에서 신문팔이를 하고 있다. 그러면 이 거리는 내가 이곳에 없었을 때보다 무슨 방법으로든지 더 나아져야지.” 그는 근방에 떨어진 휴지와 꽁초를 줍고 길가를 쓸고 신문도 구색 맞추어 놓는 등 아주 밝고 명랑하게 친절한 봉사를 했던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눈에 들고 어떤 인연으로 커리스만 신문사에 잡역부로 취직되어서 조부께서 일러주신 교훈대로 살았습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그가 무슨 일이든지 하기만 하면 그가 없었던 때보다 훨씬 눈에 띄게 모든 일이 잘 되어 그는 드디어 그 회사의 사장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미국의 전국민에게 미칠 수 있는 온갖 대중 전달수단을 다 이용하여 자기의 일생 동안 그 교훈을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타인을 위하여서 헌신과 봉사와 사랑을 할 때 자기 자신이 가장 빛나고 힘있는 인간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명령으로 남을 지배하던 나폴레옹 시대는 이미 지나간지 오래고 현대는 남에게 가장 봉사할 수 있는 인간이야말로 현대 영웅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는 모두가 하나같이 태양에서 오는 7가지 색의 빛을 받으며 검은 물체 아니면 자기 나름대로 태양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자기 존재와 미를 드러내고 또한 이 세상은 좀더 밝게 됩니다 .그러나 유독 인간만은 만물의 영장인지라 무생물이나, 식물, 동물에게는 없는 사랑을 갖고 천주님의 사랑을 반사하면서 사는 존재로 마련된 것입니다.


검은색 물체는 햇빛을 반사 안하듯이 우리의 속이 검고 극단적이기 때문에 주위는 천주님의 사랑을 반사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우리는 주의 엄청난 저 십자가 사랑을 무조건 먼저 받고 이 세상 사는 보람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것을 남에게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야말로 사랑의 가장 큰 실천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은 엄청난 사랑의 실천 방법이란 도시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주께서 항상 우리 일상생활 주변의 일을 비유로써 당신 사랑과 진리를 전달하셨듯이 우리도 같은 방법 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편에서 제 아무리 엄청난 십자가의 사랑과 진리를 전달하려고 해도 이미 상대방이 갖고 있는 어떤 것을 통하지 않고서는 배타적이며 독선적인 입장이 될 뿐입니다.


예컨대 오늘 아침 신문에 난 어떤 사건을 읽어 본 사람끼리는 벌써 그 사건에 대해서 서로 통할 수 있는 어떤 면을 가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와 상대방이 서로 통할 수 있는 어떤 공통적인 것이 있어야지만 비로소 십자가의 사랑과 진리를 전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공통된 것을 우리는 대중 전달수단이라 하며 신문, 라디오, 통신, 텔레비전, 잡지들인 것입니다. 어떤 대중 전달수단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남에게 전달하지 않는다는 극단적 이기주의며 아니면 동면하거나 죽은 사람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같이 행복하며 잘 살기 위해 정신없이 일하며 마치 물질적 유산만이 전부인 양 온통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 쏟고 빼앗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행복하게 살아가는데는 우리 눈에 안 보이는 정신적인 유산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빵으로만 살지 않는다”고 주께서도 분명히 지적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우리들의 신앙도 굶으면 죽을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의 영적 생활은 영양실조에 걸려 있습니다.


전에 예루살렘 성전 문전에 쪼그리고 앉아 “한푼 적선 합쇼”하면서 그 더러운 손을 내밀던 앉은 뱅이 팔을 성 베드로와 요한 사도는 잡아 일으켰습니다.




“내게 가진 금은 보화는 없다. 그러나 내게 있는 것을 주리라. 나자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라.”고 말하면서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니 기적으로 그는 서서 걸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우 한 사람 한 사람이 이와 같이 이웃 사랑에 불타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잡고 일으키는 광경 안에서 우리는 참다운 교우상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에게 인간다운 생활을 다시 하게끔 기회를 주는 것이야말로 교우다운 인간상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영적 재보의 원천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주의 말씀인 복음 성경인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천국으로 도달할 수 있는 이정표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복음 성경이 여러분의 각 가정에 비치되지 않았다면 고통의 바다 위에 지도없이, 나침반 없이 떠가는 한 조각의 배처럼 우리의 목적지인 구원 항구에 도달할 길이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성경 속에서 우리 삶의 넓이와 폭과 깊이를 얼마든지 넓힐 수 있는 우리 생활의 원리를 찾아야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눈멀고 귀먹고 벙어리되어 자기만의 옹졸한 세계에서 자아 만족하며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의 신앙은 보고 듣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전에 어떤 영국 교황 대사는 영국 국민들에게 소리 높여 외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사랑과 신앙의 진지를 전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눈과 손과 발, 입 이외의 다른 입과 손과 발과 눈을 갖게 계시지 않습니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방안에서 듣는 것을 지붕 위에서 외치고 등불을 모말 밑에 두지 말고 등경 위에 두어 온 집안을 비추라고 주께서 지적하셨습니다.




입과 눈을 연장시키고 시간과 공간을 단축시킬 온갖 대중전달 수단을 이용할 줄 모른다는 것은 대체 어떤 존재란 말입니까? 그것은 편지를 젆기 위해 한양천리를 걸아가는 시대적 착오가 아닙니까?


“주여! 나는 눈을 가졌어도 보지 못하고 입을 가졌어도 말을 못하며 귀를 가졌어도 듣지를 못하나이다.”하고 주께 부르짖은 다윗 성왕의 한탄의 기구가 우리에게 절실합니다.


전에 성 베드로와 성 요한이 법정에 잡혀가서 더 이상 예수의 이름으로써 말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협박당했으나 그들의 대답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들의 진심에서 우러나는 외침은 “우리가 보고들은 바는 능히 말하지 않을 수 없노라!”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전교하고 대중 전달수단을 사용할 이유는 우리가 주께 받은 엄청난 저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선한 것이나 좋은 것이나 사랑은 자기 자신을 발산합니다.




천주님의 말씀이야말로 우리에게 있어서는 우리 생활 활동의 원천이며 우리 생활 개혁의 원동력인 것입니다. 무심히 접어들은 책 한 권으로 자기의 전 생활을 180도로 바꿔 올바른 길로 들어서게 된 사실을 우리는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처음에는 군인으로서 싸움터에서 부상당해 어느 병상에 누웠습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답답한 흰벽 뿐인 병실에서 우연히 얻어 보게된 교회 출판물 한 권을 읽어보고 그의 생활은 갑자기 혁신되었습니다. 제대해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예수회란 새로운 수도회를 세워서 오늘날 수많은 학자를 내고 구라파나 미국에 수많은 일류 대학을 세워 교육사업을 하는 등 실로 교회의 진리를 가르치는 데 그 누구보다도 크게 이바지한 것입니다.




비근한 예로 전세계 어느 나라 교회사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사실을 우리나라 교회에서 찬연한 혜성처럼 빛나는 역사적 사실을 들어보겠습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다른 나라에서는 선교사가 먼저 들어가서 전교되는 법인데 유독 우리나라만은 중국 사신들을 통해서 얻은 단 몇 권의 책만을 통해 깊은 잠의 어두움 속에 깃든 이 강산에 신앙의 빛이 들어왔다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급기야는 그 진리로 인해 이 강산은 붉은 피로 물들였고, 그 피는 신앙의 씨앗처럼 꽃피고 열매 맺어 80만 영혼 속에 향그럽게 피어났습니다. 이와 같은 자랑스런 후예들이 교회 출판물에 무관심한대서야 실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아우구스띠노처럼 “천주여! 당신을 사랑하기 위하여 당신을 알게 해 주십시오.”하고 열렬히 두 손 모아 기도하며 당신을 사랑하고 알기 위해 교회 출판물에 관심을 가질 것을 가슴 속 깊이 명심하십시다.




우리는 단지 입술로만 하루에도 수없이 주의 기도를 바칠 때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며”하고 말하여도 만일 이 소망을 이룰 수 있는 대중 전달 수단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확장시킬 수 없다면 대체 우리의 간절한 소망의 기도는 과연 얼마나 이루어지겠습니까?


“주여! 나는 눈을 가졌으되 보지 못하고 귀를 가졌으되 듣지를 못하며 입을 가졌어도 말을 못하나이다. 주여, 내 눈과 귀와 입을 열어 당신을 찬미하게 하소서” 애타게 간구하면서 열심히 일하십시다. 아멘


5          연중 제15주일  마태 13,1-23 (가) 나는 어떤 땅인가 ?


                                                       김현준 신부 




술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사는 우리 본당의 ㅎ자매님은 예수님과 남편의 닮은 점을 이렇게 비유했다. ① 주(主酒)님을 모시고 산다. ② 공치사를 매우 싫어한다. ③ 나더러 늘 깨어 기다리라 한다. ④ 주일만 되면 나를 서로 잡아끈다. ⑤ 나를 따르려면 종이 되라 한다. 때론 벗이라고 하지만. 참 재미있고도 의미있는 생활 속의 비유 이야기이지 않는가,


 


신약성서 공관 복음(마태오 마르코, 루가)에는 약 40개의 ‘비유’ 이야기가 들어 있다, 그 중 마태오 복음 13장은 전체가 하느님 나라에 관한 비유 이야기이며, 씨 뿌리는 사람, 겨자씨, 밀밭의 가라지, 누룩, 보물, 진주, 그물의 비유 등 7개의 비유 이야기가 들어 있다.


‘비유(Parable)’란 말은 비교(比較), 병립(竝立), 수수께끼의 뜻을 지닌 희랍말 ’빠라볼레’에서 유래되었다. 그래서 비유 이야기 속에는 항상 두가지 사실이 병립되고 있다, 즉 사람의 일상생활이나 자연의 어떤 사실과 종교적 신비나 교훈이 병립되고 있다,




보통의 경우 종교적 사실은 상징적으로만 표현되고, 자연적 사실만 비유 속에서 뚜렷이 이야기된다. 비유 이야기 속에서 상징적으로 표현된 교훈이나 신비를 알아듣는 것은 청취자의 몫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으시오”라고 말씀하신다. 이렇듯 비유는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를 구체화시키고, 알지 못하는 것을 설명함으로써 보지 못한 것을 보게한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오늘 연중 제15주일, 오늘의 복음 말씀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이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습니다.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바닥에, 또 어떤 것은 돌밭과 가시덤불에,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이 비유를 병립시켜보면 씨뿌리는 사람은 예수님이고,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밭(길바닥,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은 사람의 마음이다. 이 비유 이야기는 나의 신앙 생활에 어떤 반성과 교훈을 주고 있을까? 그렇다. 길바닥에 씨가 떨어졌다는 것은, 나의 편견이나 고집으로 마음이 폐쇄되어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 올 틈이 없게 되는 경우이다, 피정이나 신자 교육은 ‘그것쯤’이 되어, 말씀을 들을 기회  마저도 빼앗긴 메마른 상태인데, 그것도 모르는 경우이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무미건조해서 사막을 걷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돌밭에 씨가 떨어졌다는 것은 한번 열성을 내다가 곧 식어버리는 경우이다. 나를 알아주고 대우해주고 챙겨주는 신부님이나 수녀님이 계시면 열심이고, 그렇지 않으면 시들해지는 경우이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취미나 장식품으로 치부되는 경우이다.


가시덤불에 씨가 떨어졌다는 것은 너무 잡다한 것에 분주하여 하느님을 늘 뒷전에 두는 경우이다. 재미있다는 것, 유익하다는 것의 유혹에 빠져들기도 하며, 또 재미로 미신이나 점보는 곳에 흥미를 갖거나 따라가는 경우이다, 반면 어쩌다 한 선행에는 공치사가 따른다.


 


오늘 비유 말씀의 핵심인 ‘씨’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생황 속에서 ’씨’를 깊이 묵상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렇다.  씨앗은 아주 조그맣다. 하늘나라의 말씀이 당초에는 작은 것에서 시작되는 것을 뜻한다. 씨는 작고 주름지고 못생겼다. 잘 모르는 사람은 쓸모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느님 말씀을 듣는 사람이 그 안에 무엇이 담겨있는지 모를 때에는 그 말씀은 쓸모 없게 여겨질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실한 씨안 이었기에, 죽은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추수 때 보면, 모든 씨앗이 다 열매 맺는 것이 아니라 좋은 씨앗, 알차고 실한 씨앗만이 열매를 맺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처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려면 우리도 그리스도 같은 씨앗이 되어야 한다. 죽은 씨앗, 쭉정이라면 부활을 못할 것이다,




씨앗이 열매 맺으려면




씨앗이 열매를 맺으려면 반드시 땅에 묻혀 죽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씨앗이다. 요즘은 우리의 속  마음과 생각은 산과 바다로 달려가고, 휴가와 놀이 계획으로 분주해있는데, 예수님은 씨 뿌리고, 애써 일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그렇다. 예수님은 이 비유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마음 밭을 갈아엎고 있다.




좋은 밭은 놀리거나 묵히는 밭이 아니라 갈아엎어 결실을 준비하는 밭이다, 우리 본당의 ㅎ자매님은 예수님 닮은 남편을 위해 늦게까지 깨어 기다리기도 하고, 시중드는 종 뿐만 아니라 간호사가 되기도 하며, 그 방면의 도사(?)가 되어 좋은 기정을 이루려고 노력한다. 산과 바다의 이 여름에도, 아침 저녁기도 주일미사, 성서를 읽는 신앙생활의 리듬을 잃지 않는 좋은 땅의 넉넉함을 간직하면 어떨까?




















6        연중 제15주일  마태 13, 1-23 (가) 씨 타령할 수 없다


최기산 신부




들녘에 서면 올해의 벼농사가 풍작임을 느끼게 된다. 어디를 보나 푸르름이 가득하다. 저마다 멋진 열매를 맺으려고 위로 옆으로 뻗어나고 있다. 우리나라가 기계로 농사를 짓게 된 것은 불과 20여년 전부터다. 그전에는 손으로 모를 심었다. 참으로 힘이 많이 들었다. 모내기철에 비가 오고 나면 아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모두 논에 나가서 모를 심어야 했다. 그래서 못방학이라는 것까지 있었다. 하루종일 업드려서 모를 심고 나면 그야말로 허리가 끊어질 정도였다. 어휴! 소리가 절로 나왔다. 과학문명의 발달은 인간을 살 맛나게도 만든다는 이야기가 예삿얘기가 아니라는 것은 농기계의 발달이 증명한다. 기계 한대로 수십명이 엎드려서 하루종일 일할 분량의 일을 거뜬히 해치우기 때문이다.




2000년전에 씨뿌리는 기계가 발명되었다면 오늘의 복음도 바뀌었을 것이다. 오늘 복음에는 씨뿌리는 비유가 나오는데 이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밀 농사법을 알아야 할 것이다. 빵이 주식이었던 당시 사람들에게 씨뿌리는 이야기는 지극히 평범한 것이다.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우리처럼 우선 땅을 고르고 씨를 고랑에 뿌리는 것이 아니라 씨를 뿌리고 땅을 갈아 덮는 식이었다. 어찌 보면 너무나 낭비가 심한 방법인 듯 싶다.




왜냐하면 씨가 땅속깊이 파묻히기도 하고 바람에 날라 가버리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설에 의하면 게으른 사람은 뿌릴 씨를 메고 다니거나 안고 다니면서 뿌린 것이 아니고, 희한한 방법으로 뿌렸단다. 나귀등에 씨앗자루를 얹고 나서, 자루에 작은 구멍을 하나 낸 다음, 나귀를 이리저리 몰고 다니는 것이었다. 나귀 궁둥이만 때리고 있으면 자연히 씨앗은 이리저리 떨어졌다. 분명히 어떤 씨는 길바닥에, 어떤 씨는 돌 위에, 어떤 씨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씨가 좋은 땅에 떨어졌을 것이다.




길바닥에 떨어진 씨는 새가 와서 날름 집어먹을 수 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생존경쟁을 하는 새들에게 반반하게 닳아빠진 길 위에 있는 씨는 순식간에 포착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 밭에 하느님의 말씀의 씨가 뿌려졌으나 뿌리가 내리기 전에 사탄이 낚아채 가서 냉담해 버리는 것을 말한다. 세례까지 받았지만 얼마 뒤 ꡒ성당에 다니면 밥이 나오냐, 술이 나오냐?ꡓ면서 완전히 악한생활로 빠져버려 하느님과는 이별하는 사람을 말한다. 돌밭에 떨어진 씨는 싹은 나왔으나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경우인데 환난이나 어려움이 닥치면 하느님을 배반하는 사람을 말한다. ꡒ하느님을 믿어봤자 무슨 소용인가? 다른 신을 찾아보세ꡓ라고 노래하면서 세상천지를 다 누비고 다니는 사람을 말한다.




세례를 받은 다음 토끼가 경주하듯 그렇게 내달리는 사람이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성당을 드나들고 묵주는 손에서 떼어놓지 않는다. 그렇게 열열히 믿던 사람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시들어 버리는 경우가 있다. 솜같은 사람이라고나 할까? 나일론은 얼마나 질긴가? 비바람이 몰아쳐서 젖고 또 젖어도 풀어지지 않는다. 땅에 묻어도 그냥 그대로 질긴 것이 특징이다. 사람들은 흔히 ꡒ나는 나일론 신자입니다ꡓ라고 말한다. 나일론이 얼마나 질긴 줄이나 알고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는 주변의 가시덤불에 덮여 도저히 열매맺지 못하는 것과 같이 세례를 받긴 받았으나, 산도 가야지, 바다도 가야지, 운동도 해야지, 파티도 가야지, 술도 마셔야지, 도대체 죽을래야 죽을 시간이 없다는 사람을 일컫는다. 그런 사람에게 성당에 갈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기도할 시간은 물론이요 성서보는 시간도 있을 수 없다. 그에게는 ꡒ혹시나 죽기 전에는 시간이 날 것 같으니까 그때나 성당에 열심히 다녀보자ꡓ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런 사람의 마음 속에, 가슴속에 하느님의 말씀이 자라거나 풍성한 열매가 맺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마른나무에 꽃이 피기를 기대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오늘 복음의 핵심은 첫째, 뿌려지는 씨앗은 좋은 씨고 어디든 풍성하게 뿌려진다는 것이다. 하느님 말씀의 씨앗은 어디든 풍성하게 뿌려지지만 그 결과는 각자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말씀의 씨앗을 얼마나 잘 키우고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게 했는지에 따라 심판 때에 희비가 가려진다.




둘째, 하느님께서 풍성히 뿌려주시는 말씀의 씨앗은 받아들이는 자의 마음의 밭이 길바닥 같거나 돌밭 같거나 가시덤불 같아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런 것에 연연하기보다는 좋은 밭에서 백배, 육십배, 삼십배의 결실을 거둔다는 확신이 들어있는 비유내용이다. 예수께서는 우리더러 ꡒ그대들의 마음 밭이 길바닥 같거나, 돌이 가득하거나 가시덤불이 있다면 어서 갈아엎고 뽑아내고 매만져서 옥토로 만들라ꡓ고 독촉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알고 있다. 씨앗이 아무리 좋아도 풍성한 열매를 맺으려면 그냥 되지 않는 것을! 악천후와 벌레들과 싸워야 한다.




매해 우리는ꡐ올해는 대풍입니다ꡑ라고 호들갑을 떨다가 끝판에 몰아치는 태풍에 ꡐ중풍ꡑ이 되어버리는 경우를 경험한다. 결국은 풍성한 결실은 인간만의 노력으로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함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말씀의 씨앗이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온갖 사탄의 유혹을 견디고 승리해야 한다. 기도와 희생, 봉사의 거름으로 보양되어야 풍성하게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이다. ꡒ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ꡓ(요한 15, 5)
















7           연중 제15주일   마태 13,1-23 (가) 말씀에 귀 기울이면


                                                             함세웅 신부




오늘의 복음 말씀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특히 하느님의 말씀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하는 점과 또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정녕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하여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까지 어떻게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왔는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바로 복음성서 말씀의 독특한 점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즉 그것은 다른 일반서적과 달라 지식이나 소식을 전달하는 것뿐만 아니라 좀더 깊고 높은 것을 깨우쳐 주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어떤 책 목록이나 백과사전을 통하여 지식을 터득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마치 하늘에서 내리는 비나 땅에 심어진 씨앗과 같습니다. 그 말씀은 무엇인가를 변화시킵니다. 그것은 바로 살아 있는, 즉 생명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바로 다른 모든 생물체와 같아, 자기의 생명을 지탱하고 키워 나갈 조건과 보장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양 섭취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바로 씨앗이 심어진 밭입니다. 이 밭에는 거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이 밭을 소홀히 가꾸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바쁜 사람들입니다. 바쁘고 분주하다는 것, 이것은 현대인 모두가 지닌 어려운 문제이며 공통점이기도 합니다. 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쁩니다. 자녀들은 부모들을 성가시게 함으로 또 분주합니다.


과외 수업으로 학생과 교사들도 또한 바쁩니다. 특별 근무 또는 출장 등으로 모든 공무원과 회사원들도 분주합니다. 국가 고시, 진급 시험 등 경쟁에 이기기 위해서 또 모두가 바쁩니다. 바로 이러한 주위 환경 때문에 모두 피곤하여 명상이나 기도를 멀리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조용히 혼자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로서, 명상에로 초대받았습니다. 그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신비의 심연을 깨달아야 합니다. 삶의 의미와 세상과 우주의 기원 그리고 하느님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자기만의 시간을 갖고서 이 모든 것을 정리해야 합니다.




올 여름엔 더욱 근심 걱정이 많습니다. 물가도 오르고 세금의 부담은 더욱 커지고 빛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자포자기의 실망만이 맴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이겨낼 수 있는 힘, 그것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자신에 충실하고 성실한 것입니다. 명상이라는 것은 자신의 존재, 삶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계시의 하느님이 바로 나를 창조하셨고 그분이 바로 ‘아버지’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모상대로 우리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외아들 예수를 보내시어 우리와 함께 계시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통의 생애에서도 기쁨을 가르쳐 주셨고 죽으셨지만 부활로써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일러주셨습니다. 따라서 삶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을 묵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나는 매우 귀중한 존재입니다. 나를 하느님 이 필요로 하십니다.


 


극도로 문명이 발달했다는 현대에 살면서 우리 모두 바쁘게 뛰며, 분주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핑계삼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것을 잊으려고 합니다. 때로는 술을 마시면서, 때로는 잡담으로, 때로는 형식적 의례적인 방문으로, 때로는 식도락의 취미로, 때로는 운동경기의 관람으로 자신이 처한 심각성을 잊으려고 합니다.


 


바로 이러한 부류의 사람을 지칭하여 예수께서는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의 씨앗은 세상에 대한 근심 걱정, 재물의 유혹으로 질식됩니다.


신앙인은 가시덤불을 헤쳐 나가야 합니다. 헤쳐 나가려는 노력, 그 노력의 비례에 따라 결실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기 위해 조용한 시간, 자신만의 시간을 갖도록 해야겠습니다.


재물, 명예, 지위로 해결되지 않는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얻기 위해 영


원과 무한이라는 것을 껴안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성서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조용히 마음의 기도를 올리며, 유익한 교회 서적 또는 종교적 대화, 친분 있는 성직자와 수도자 또는 교우들과의 대화를 통해 하느님을 가까이 하도록 노력해


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들을 수 있기만 하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밭을 쟁기로 갈아서 영신의 수확을 얻는 것입니다. 성서의 하느님은 바로 우리 모두를 보살피시며 염려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의 삶은 원기와 생기를 되찾게 됩니다. 그래서 새로운 삶을 되찾아 힘차게 앞으로 계속 행진합니다. 삶은 의미가 있기 때문에……




















8        연중 제15주일   마태 13,1-23 (가) 말씀의 씨를 뿌리는 사람


                                                               허영업 신부




위대한 사상가이며 신학자, 그리고 음악가이며 의사인 슈바이처 (7875-1765)가 아프리카로 떠났을 때는 이미 마흔이 다 되었을 때였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편안하고 여유 있게 여생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이 굳이 사서 고생을 한다며 만류했다. 당시 아프리카는 거의 유럽의 식민지로 미개인들이 사는 곳이라 생각하던 때였다. 슈바이처 박사는「내가 의사가 된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병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입니다. 지금 아프리카에는 의사가 없어서 사람들이 병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나는 작은 힘이지만 그들의 목숨을 건지는 데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라고 연설했다




  슈바이처가 처음 도착한 곳은, 몹시 더운 지방으로 온갖 독벌레와 세균이 들끓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사람들은 의사도 약도 없이 버려져 있었다. 슈바이처는 자신의 재산을 다 털어서 병원을 지어 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항상 웃는 얼굴로 흑인들을 위한 진료에 평생을 바쳤다.




  1952년 슈바이처 박사는 노벨상을 탔을 때도 상금 전액을 모두 나병환자를 위해 썼다. 그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라도 생명체이기에 소중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생명을 아끼고 지키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함께 해야한다고 가르쳤다. 어떻게 보면 작은 그의 활동과 생각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 속에 큰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다.




하느님 나라의 비유




  예수님은 군중을 가르치실 때 유대 랍비들처럼 비유를 들어 곧 잘 가르치셨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사실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 주제였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보면 하느님의 나라를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를 통해 설명하신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에 대한 전도는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실패와 좌절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의 선포와 전도는 끝내 풍성한 결과를 낼 것이라는 확신과 희망을 갖고 있다. 이 비유는 예수님 당시 뿐 아니라, 초대 교회의 상황에 자신의 처지에 더 잘 맞는 비유였을 것이다.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 희망과 위로가 되는 말씀이었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열심히 말씀을 선포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미비한 것이었다. 그러나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에서처럼 시작은 작고 미비하지만, 하느님의 다스림은 큰 결과를 맺게 될 것이니 절망하지 말라는 훈계와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네 부류의 사람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여러 가지 형태의 밭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청중을 의미한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방법에 따라 결과도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말씀은 같은 것이지만 듣는 자의 마음자세에 따라 그 결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결과에 대한 책임은 개개인의 탓에 달려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당연히 네 번째 부류의 사람들처럼 좋은 땅이 되라고 훈계하고 있다. 즉 열린 마음으로   겸손되이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생활 속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 신앙 인은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이다. 또한 동시에 말씀의 열매를 맺어야되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의무이자 특권이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은 바로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행위이다. 왜냐하면 믿음의 삶은 현실 안에서 이루어지고,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봉사와 희생의 삶을 충실히 사는 것도 훌륭하게 씨앗을 뿌리는 행위이다. 우리는 매일같이 말씀의 씨앗을 뿌리고 그리고 거두어야 한다.




  하루를 지내면서 내 생활 속에서, 내 가정과 사회 속에서 어떤 씨앗을 뿌리며 지냈는지 반성해 보아야할 것이다.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분명히 그리스도 말씀의 씨앗은 풍성한 열매를 거두리라는 피망과 믿음을 버려서는 안될 것이다.


  지난 한 주간 나는 어떤 씨앗을 뿌리며 생활했는가?












9            연중 제15주일  마태 13,1-23 (가) 씨 뿌리는 사람


최인호 작가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 중 가장 유명한 ‘만종’의 작가 밀레(Millet, 1814-1875)는 프랑스의 노르망디 지방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파리로 진출한 밀레는 도회적인 그림으로 출세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나이 34세이던 1848년 어느 날, 한 청년이 가게에 걸려있는 그의 그림을 보고 “밀레는 벌거벗은 여자만 그리는군” 하는 말을 듣고 밀레는 깊은 수치감에 빠지게 됩니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그릴 것은 도시 여인의 나체가 아니라 농민들의 가난한 생활임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파리 교외 바르비종으로 이사하고, 빈곤과 싸우며 농사를 지으면서 대지와 맺어져있는 농민들의 모습과 자연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밀레가 바르비종으로 이사해서 그린 첫 작품이 바로 ‘씨 뿌리는 사람’입니다. 해질 무렵, 모자를 쓴 건장한 농부가 들새들이 날아다니는 하늘을 배경으로 한 웅큼 씨앗을 대지를 향해 파종하는 힘찬 모습을 통해 밀레는 비로소 자신이 그려야 할 소재가 무엇인가를 깨달아 ‘이삭줍기’ ‘양치는 소년’ ‘만종’ 등 많은 걸작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습니다.


밀레는 농민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여 감명을 준 위대한 화가입니다. 특히 하루의 일을 끝내고, 노을진 지평선 너머에서 들려오는




성당의 종소리를 들으며 기도를 드리는 농민 부부의 모습을 그린 ‘만종’은 가난한 농촌 속에 종교적 생명을 불어넣음으로써 그는 화가에서 인생의 창조자로 승화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밀레가 이렇게 변했던 것은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도시에서의 화려한 성공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그리느냐 하는 것이 예술의 본질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밀레는 ‘씨 뿌리는 사람’을 통해 농부들이 밭에 씨를 뿌리듯 화가 역시 예술의 밭에 씨를 뿌리는 농부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주님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 자신이 씨를 뿌리는 사람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같은 말씀의 씨앗을 뿌렸는데도 어떤 것은 새들이 쪼아먹고, 어떤 것은 말라버리고, 어떤 것은 가시덤불에 떨어져버린다는 비유를 통해서 주님은 가시덤불과 같은 이 세상의 온갖 걱정과 유혹, 새와 같은 악마, 뿌리내리지 못한 얕은 신앙을 극복하고, 그 말씀의 씨앗을 잘 듣고 깨달아 큰 열매를 맺으라고 가르치십니다.


어디 주님뿐이겠습니까. 밀레도 자신이 미(美)의 씨앗을 뿌리는 구도자임을 깨달아 마침내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가 위대한 화가가 될 수 있었듯이 우리도 모두 각자 나름대로 씨 뿌리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가 좋은 씨앗을 뿌린다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라지의 씨앗을 뿌린다면 가라지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우리가 인생의 텃밭에 뿌리는 씨앗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밀레가 그린 ‘씨 뿌리는 사람’처럼 우리도 모두 봄에 뿌린 그대로 가을에 거두는 인생의 농부들인 것입니다. 






















10         연중 제15주일  마태 13,1-23 (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교구주보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하느님의 뜻을 밝히는 데 심혈을 기울이셨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란 하느님의 영역에 속하는 말이기 때문에 인간의 제한된 언어로 이해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비유’로써 설명하셨다. 농업, 목축업, 어업, 상업 등 일상생활에서 따온 이야기로 비유했기 때문에 이야기가 매우 자연스럽다.


  예수께서는 파종이 실패한 경우를 세 가지로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에 씨앗이 떨어진 것으로 이야기하신 다음 파종이 성공한 경우를 말씀하신다. 어떤 씨앗 한 알이 뜻밖에 “좋은 땅”에 떨어져 잘 자라서 이듬해 성공한 경우를 짤막하게 말씀하신다. 어떤 것은 30개 어떤 것은 60개 어떤 것은 100개의 열매를 맺는다고.


 


예수께서 서기 27년경 갈릴래아에서 활약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그분 주위에 모여들었다. ‘오병이어’의 사건이 그 절정이라 하겠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예수께서는 반대자들로부터 모함을 받으셨고 제자들마저도 하나둘씩 떠나갔다(요한 6,60). 서기 30년 4월 초순 예수께서 과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을 때에는 단지 열두 제자와 갈릴래아 여자 몇 사람만이 동행했다.




예수님의 선교가 이렇게 실패하자 제자들은 실망과 좌절을 느끼면서 스승인 예수님께 하느님 나라 운동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청했을 것이다. 이때가 예수님의 공생활 중반 무렵인데 제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 것이다. “저 밭에서 씨 뿌리는 농부를 보시오. 밭에 길이 나 있고 온통 돌밭인데다 잡초마저 무성합니다. 이런 밭에 뿌려진 씨앗들은 제대로 자라기도 전에 없어져 버리지만, 이를 알면서도 저 농부는 큰 기대에 부풀어 씨앗을 뿌립니다. 그랬더니 뜻밖에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 큰 결실을 맺어 30배, 60배, 100배의 소출을 내게 되었습니다. 나 역시 지금은 실패를 거듭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큰 결실을 맺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계속해서 하느님 나라 운동을 펼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에는 하느님 나라 운동이 지금은 실패를 거듭하지만 언젠가는 큰 성공을 거두리라는 확신이 담겨있다고 하겠다.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계속해서 하느님께 희망을 걸어라.” 이것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담긴 의미이다.


 


인간은 누구나 모든 일에 성공하고 싶어하지만 실패를 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복음을 전하다 보면 성공보다는 실패를 맛보기 십상이다. 하느님 나라 건설에 전력을 다하셨던 예수님께서도 끊임없이 반대에 부딪치셨고 심지어 가장 가까운 이들의 배신마저도 겪으셔야 했다. 그러나 그분은 하느님께 대한 무한한 신뢰와 희망으로 좌절하지 않으셨기에 부활의 영광을 차지하실 수 있었다. 쉽게 좌절하는 우리에게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큰 위로가 된다.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하느님께 희망을 걸고 계속해서 씨앗을 뿌려라. 그러면 하느님께서 결실을 맺게 해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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