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6주일
1. 김몽은 신부(가)/ 2 2. 이기우 부제(가)/ 4
3. 최창덕 신부(가)/ 6 4. 염수완 신부(가)/ 8
5. 최기산 신부(가)/11 6. 서경윤 신부(가)/13
7. 김현준 신부(가)/14 8. 강길웅 신부(가)/16
9. 마지막 날에 드러나는 (가)/18 10. 교구 주보(가)/20
11. 최인호 작가(가)/21
1 연중 제16주일 마태 13,24-43 (가) 추수 때까지 둘 다 자라게 버려두라
김몽은 신부
“죄 지은 자의 죄를 미워하되 그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가라지의 비유를 이 말과 연관지어 생각할 때 더 잘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죄란 그 사람의 인격과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죄와 죽음의 세력이 극복되어 구원이 베풀어지고 있는 은총의 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하느님께서는 항상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끔 왜 세상에 악이 있는가? 어찌하여 죄가 있고 고통이 있으며 우리에게 죽음이 있는가를 반문하기도 한다. 이러한 나쁜 상황을 인간에게 허락하시는 하느님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는 적이 없지 않다. 이러한 의문에 대해 예수님은 가라지의 비유로 잘 설명해 주시고 있다.
우리는 악의 신비를 이해해야 한다. 이 세상의 시련과 단련을 통하여 우리 육신은 새 사람으로 부활할 수 있고, 우리의 자유와 봉사가 더욱 영광스러워질 수 있다. 그러기에 성 아우구스티노는 원조 아담과 에와가 지은 원죄를 두고 “오 복된 죄여!”라고 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명은 악과 훌륭히 투쟁하여 굳건히 살아나가 이기는데 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가라지를 뽑아 버리고 싶어한다. 그러나 가라지를 버려둠은 곡식을 잘못 뽑을까봐 참는 것이다. 또한 교회 내의 이단도 가라지 같이 분별하기 어려우며, 이 이단이 도리어 교회의 진리를 밝히는데 원인이 되기도 한다. 또 자기가 잠시나마 가라지일 수 있으므로, 우리는 자기 죄과에 너무 무자비하거나 남을 단죄하는데 조급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시급히 회개하는 것만이 절대로 요청되는 것이다.
이 가라지의 비유는 예수의 가장 실제적 비유 중의 하나이다. 이제 그 의미를 좀더 살펴보면
첫째, 좋은 씨를 망치려는 악한 세력이 세상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깨어 지켜야 한다.
둘째, 이 세상에는 선인같은 악인, 악인같은 선인이 있다. 따라서 사람의 선악을 구별하는 데는 신중해야 한다.
셋째, 우리의 판단은 추수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심판은 순간의 선악보다 전 생애를 보는 것이다. 죄인이 성인이 되는 수도 있기 때문에 끝까지 기다려야 한다.
넷째, 결국은 주님의 심판이 오고야만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죽은 후와 종말의 날에 선악은 구별되어진다. 즉 하느님의 심판은 반드시 온다는 것이 세상에는 악이 이기고 선이 지는 것 같으나, 하느님의 심판은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르다.
다섯째, 심판할 권리는 하느님만 갖고 계시며, 그분만이 생의 전체를 보실 수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 비유의 경고를 요약하면 남의 심판하지 말라는 것과, 하느님의 심판이 꼭 온다는 것을 말하고 이다.
여기서 우리는 “권세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루가 1,52)의 노래와 같이 우리가 남이나 우리 자신에 대해 선한 이로 인정하거나 자부하더라도 하느님의 눈에는 심판을 면치 못하는 자일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자기 죄를 겸손되이 뉘우치고 그 마음을 하느님께 드리는 자에게는 항상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하심이 있고 어려움 중에서도 돌보아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하겠다.
우리는 대개 남을 평가할 때 그 외모에 의해서 행한다. 즉 외적 조건이 그럴사하면 그 사람을 우러러 보고, 초라하고 남루한 모습을 하고 있으면 그 사람을 멸시한다. 그 뿐만 아니라, 전혀 자기 탓이 아닌 환경적 조건에 대해서도 편견을 갖고, 차별대우하기가 일쑤이다. 단순히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로, 흑인이 백인세계에서 멸시당하는 일이라든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서 천시당하는 일들이 모두 그러한 것들이다.
밭에 좋은 씨를 뿌렸는데도 가라지가 나타났다. 그러나 하느님은 끝까지 기다리신다. 성급한 판단을 금하게 하시고, 인간의 기준으로 평가할 것을 중지토록 하신다. 하느님은 인간의 내면을 보시고 평가하시는 분이시기에, 외모나 환경은 하느님의 눈에는 전혀 관심도 되지 못한다. 좋은 밀이 언제 가라지가 될지도 모르며, 가라지일지라도 언제 주님의 은총으로 좋은 밀이 될지는 아무도 판단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항상 신중한 태도로서 하느님의 뜻만을 구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인간적인 생각이나, 판단은 항상 미숙하고 불완전하며, 그르칠 위험이 많다. 그러나 하느님의 생각이나 판단은 항상 정확하시고 큰 의미를 지니신다.
2 연중 제16주일 마태 13,24-43 (가) 천당이야기
이기우 부제
교우 여러분, 무더운 날씨에 안녕하셨습니까?
방금 우리는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늘 나라를 예전에는 천당이라고들 불렀습니다. 여러분은 천당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 보셨겠지요? 오늘은 천당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과거에는 죽어서 천당가기 위해서 성당에 다닌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요즘에도 낯선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이 이야기는 신앙생활의 이유와 목적을 담고 있습니다. 왜 믿는냐? 천당 가기 위해서지요. 문제는 천당이 죽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 더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천당은 우리가 주의 기도에서 기도하듯이 “하늘에서 뿐만 아니라 땅에서도”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우리가 천당에서 살기를 하느님께서 원하십니다.
만일에 그와 반대로 연옥이나 지옥에서 우리가 살고자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지옥에서는 사람이 못삽니다. 사람 살 곳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많은 사람들이 지옥인지도 모르고 지옥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서로 미워하고 의심하며 먹고 살 걱정에 찌든 나머지 걱정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가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태오 복음 6, 15-34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걱정하지 말고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여라. 그러면 다른 모든 것도 곁들어 받게 될 것이다. 하늘에 게신 아버지께서는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 너희들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교우 여러분,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살아갈 걱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 곧 천당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당을 찾기에는 너무나 바쁘고 또 너무나 걱정이 많습니다. 걱정은 또 다른 걱정을 낳고 나중엔 권태감과 공허감이 마음 가득히 채워지게 되는 것이 현대인의 생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천당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바쁘기만 해서는 일이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지혜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알아내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천당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씀하신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그저 비유로만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그리고는 “알아들을 귀가 있으면 알아들으라”고 하실 뿐입니다.
우리는 그토록 바쁘게 살아가는데도 걱정이 끊이질 않고 무력감에 시달리는데,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도 비유로만 알아들으라고 하시니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천당이 그토록 중요한 문제라면 뭔가 분명한 대책이 세워져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대책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미 세상에서 천당을 사셨던 예수님의 생활을 잘 살펴보면 하나의 생활리듬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고독과 공동체의 순환입니다. 고독과 공동체. 그분은 하느님 앞에 늘 혼자이셨고 또한 늘 다른 이들과 함께 하느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고독하다는 것은 대부분 바람직하지 않은 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자기 혼자만의 고요한 시간과 공간을 마련한다는 것은 분주하고 걱정 많은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일입니다. 고독함이 없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마저도 그저 열심한 마음으로 바쁘게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수도 있지만 먼저 내 마음 안에 하느님만을 위한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 정말로 중요합니다. 천당은 하느님이 손수 마련해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힘이 들 것입니다. 공연한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조용히 앉아 있으면 오히려 잊어버렸던 걱정들이 생각나기도 하고 분심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너무 신경쓰지 말고 하느님의 말씀을 고독의 중심에 두면 마음을 비울 수가 있습니다. 헛된 욕심에서 비롯된 쓸데없는 걱정들이 사라지고 정말 필요한 지혜가 샘솟게 됩니다. 이건 말로 되는게 아니고 실제로 해보기 전에는 알아들을 귀가 생기지 않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 매순간 하느님이 계실 수 있는 고요한 빈 자리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참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다른 이들 마음 안에서도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게 됩니다. 인간 관계가 향상됩니다. 어렵게만 느껴지던 애덕의 실천이 쉽게 이루어집니다. 힘들기만 하던 봉사가 자연스러운 일로 바뀝니다. 공동체를 통하여 사람들 사이에는 하느님이 계실 자리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천당이라는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해보셔야 알아들을 귀가 생기는 일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것이 천당 가는 대책입니다. 혼자 있을 때나 여럿이 있을 때나 먼저 하느님을 위한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야말로 으뜸가는 지혜입니다. 그때 우리는 천당에서도 하느님 말씀이라고 하는 밀과 세상 걱정이라고 하는 가라지가 처음에는 어쩌면 한동안 함께 섞여 있을 수 밖에 없음을 한 마디의 설명 없이도 알아들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성당 다닌다고 해서 한 순간에 갑자기 살아갈 걱정이 없어지는 것이 아님은 지급도 많은 분들이 체험하시는 일일 것입니다.
한편 가라지와도 같은 세상 걱정들은 하느님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는 즉시로 혹은 그 크기만큼 마치 추수때처럼 다 뽑아져 버리는 일도 자연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소중한 공간은 한 알의 겨자씨와도 같이 처음엔 아무리 작고 미미하더라도 우리 자신이 거부하지 않는 한,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커져서 마치 커다란 나무와도 같이 되어 마침내는 우리의 생활이 천당 생활이 되도록 이끌어 갈 것입니다 .
믿음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할 지도 모르는 우리를 성령께서 도와주십니다.” “자비로우신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보살피시려고” 천당을 마련하셨습니다. 구태여 지옥을 애써 마련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지옥이라고 하는 곳은 사람 살 데가 못됩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저는 교우 여러분들께 성체를 중심으로 해서 고독과 공동체의 생활리듬으로 생활하시기를 권고해 드리고 싶습니다. 매일 미사 참례가 어려우시다면 이같은 매일미사책에 나오는 매일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 말씀을 이웃에게 에누리 없이 실천함으로써 공동체를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성체와 교회의 해요, 성모성년인 이때에 성모님의 모범을 본받아 성체를 중심으로 한 고독과 공동체의 생활이 우리 안에 뿌리내리기를 기도합니다. 천당은 결코 멀리 있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찬미 예수님!
3 연중 제16주일 마태 13,24-43 (가) 천만의 말씀
최창덕 신부
하느님의 나라는 현재 나에게 주어진 삶의 순간,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이뤄진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가지 비유로써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 중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가지고 함께 잠시 묵상해 봅시다.
이 두 비유에서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바로 미미한 시작과 엄청난 결과의 대조입니다. 사실 겨자씨가 씨 중에서 가장 작은 씨는 아닐 것입니다. 다만 작은 씨라는 점에서 그 당시 통속적 표현으로 겨자씨를 예로 든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 씨가 자라면 그 나무는 말탄 사람만큼의 높이가 되며, 또한 새들이 그 씨를 좋아하니 겨자나무에는 많은 새들이 모여듭니다. 마찬가지로 누룩도 그 시작과 결과가 겨자씨처럼 엄청나다는 것을 빵을 만들어보신 분을 잘 아실 테지요.
이 두 비유를 볼 때 지난주에 우리가 생각해 본 점과 같은 배경하에서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셨으리라 추측됩니다. 즉 예수님의 활동이 당대 사람들에게는 대단치 못한 것으로 평가되었기에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에 회의를 품는 사람들에게 이 이중 비유를 통해 답변하시는 것입니다.
“뭐라고요? 싹 수가 노랗다구요? 천만의 말씀. 한 톨의 겨자씨, 한 줌의 누룩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대단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처럼 내가 선포하는 하느님의 나라가 무력하게 보일지라도 언젠가는 큰 위용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 위용은 상상을 초월하리만큼 대단한 것입니다”라고요. 사실 하느님의 나라 그 시작은 눈에 뜨이지도 않으며, 관심거리도 되지 않고 성공의 전망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는 즉 하느님의 통치가 세상에 나타나게 될 “최후의 날”에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통치로 발효되어 있는 것을 보고 놀랄 것입니다.
신자 여러분 중의 어떤 분은 이런 의문이 마음 속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도대체 하느님의 나라란 무엇이며, 또 현실적으로 구체적 삶을 살고 있는 나와는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간단히 요약해서 한 가지 연만 우선 제시할까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하느님의 뜻을 행하라는 것은 같은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함은 필연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행할 때 이루어질 하느님의 나라는 인격적인 것이며 그것은 국가나 민족을 우선으로 하거나 가장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지금 있는 현재의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순간 순간을 두 가지로 살수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살수도 있고 나의 뜻대로 살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바치는 주의 기도문 가운데서도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뤄짐과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드리지 않습니까? 순간 순간마다 나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향할 때 그분의 나라는 내 안에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나라는 가장 작고, 비천한 것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가장 작은 씨에서 발아하여 크게 성장하는 겨자나무처럼 작은 것에서 시작하여 신비롭게 성장하니까요.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우리 마음 속에 있습니다.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극복, 남에게 친절하고, 기도와 성체성사, 사소한 행위 하나 하나에서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우리 마음 속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자랄 수 있게 해줍니다.
요사이 맑은 밤하늘을 쳐다보노라면 하늘의 별들이 너무나도 영롱하게 빛나고 있음을 느낍니다. 마치 아름다운 대화를 나누고 있기라도 하듯이 말입니다. 별 하나 하나가 제각기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별이 다른 별에게 또 그 별이 또 다른 별에게 빛을 되내어 비쳐주기에 별들은 초여름 밤하늘을 곱게 수놓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주변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들은 어떠합니까? 자기 한 개인의 안일한 삶, 개인의 이익, 영달, 행복만을 위해서 너무나 각박해져 이는 것이 아닐까요? 신문지상의 사회면을 들추기가 두려워지기 조차 할 때가 있습니다. 자신을 더욱 두껍게 싸고 두꺼운 벽을 축조하여 높은 성을 쌓아 올리고만 있습니다. 그래서 공격과 방어를 자유자재로 하는 지혜로운 자가 이기고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냥 자신 안에서 그 껍데기 안에서 고치처럼 아주 작은 세계에서 스스로의 만족을 꾀하는데 급급해져 감을 진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정말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세태가 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고요한 가운데 밤하늘을 쳐다보노라면 조화로 가득한 별들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속삭여 주는 듯 합니다. 별들을 창조하신 하느님, 그 하느님은 사람들 사이에도 같은 조화를 원하시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죽기까지 그것도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시고, 부활하여 우리 가운데 살아계시지 않습니까?
조화를 가져다주는 힘은 바로 사랑임을 예수님의 생애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가 가끔 생활에서 체험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사랑이 하느님 나라의 대헌장이자 헌법입니다. 내 안에서 이 사랑이 싹트고 그 싹이 자라, 큰 나무가 되어 하느님과 이웃에게 기쁨과 위안을 안겨주는 것,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며 그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 백성의 자격이 있으며, 마지막 날 우리에게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건너가는 승리의 기쁨을 안겨줄 것입니다.
교령 자매 여러분!
집을 한 채 태우는 데 성냥 한 개피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각자 사랑의 성냥 한 개피가 되어 우리 주위를, 사회를 사랑의 불러 태워 이 땅에 그분의 뜻이 조금이라도 더 이뤄지도록 노력합시다.
4 연중 제16주일 마태 13,24-43 (가) 오늘 이 순간부터 좋은 씨로 살자
염수완 신부
주인이 밭을 다듬고 좋은 씨를 뿌렸는데 밤중에 원수가 와서 가라지 씨를 뿌리고 갔다 합니다. 처음 싹이 나고 잎이 날 때 누가 알겠습니까? 그러나 그 어린순이 점점 자라면서 구별이 돼 갑니다. 좋은 씨와 가라지도 뿌리를 뻗고 얽히어서 서로 생존경쟁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자기 전체를 내걸고 싸우지 않으면 결국 진다는 것보다는 죽음을 가져오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경지에서 지게 된다면 씨의 결실인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경우엔 아무 쓸모가 없고 생명을 주는 양식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밖에 버리거나 불태워 버리거나 할 것입니다.
그러면 가라지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 의미란 바로 우리를 암암리에 해치는 독소입니다. 그러한 독소를 제거하지 않을 경우엔 중독이 되어 인간의 생명을 조금씩 끊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러한 독소란 유혹을 통해서, 마술이나 덫을 통해서 우리의 오관을 어지럽혀 무질서하게 만들고 마음을 산란하게 할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탄로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어두움 가운데 향하기를 좋아하며 드러나지 않는 방법으로 그리고 겉으로는 착한 얼굴을 가장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무엇을 하거나 이것이 옳은 일이냐 그른 일이냐를 진정한 자세에서 잘 분별하여 행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분명히 “그것은 나쁜 일인데···· 인간이란 본래 약한 의지를 가지고 있으니깐 이런 일 정도는 괜찮겠지. 하느님도 별 것 아닌 것으로 눈감아 주실꺼야”라는 식으로 자기 합리화 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런 것은 그렇다고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만 해야지 그 이상의 말은 악에서 나온다고 마태 5,37에서 명백히 밝히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악과 대결해야만 합니다. 요한 16,33에서 말씀하시듯이 「당신들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시오. 내가 세상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완전 승리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선조로부터 내려오는 악의 세력 즉 죽음을 완전히 뒤엎어 놓으셨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악의 세계가 이끄는 곳은 죽음이요 멸망이며 이러한 죽음을 통해서 죽음을 극복하신 것은 생명을 통해서 되었습니다. 생명을 얻기 위한 바로 그 길은 자기를 끊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6,24)
그러면 왜 세상 안에 악과 선이 그래도 있습니까? 또 착한 사람들이 왜 고통을 받고 있습니까?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선 피와 땀으로 노력한 대가로 지불받게 됩니다. 아무런 노력도 들이지 않고 거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인간의 자유를 거둬들이는 결과가 됩니다. 또한 선택할 권리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또 한가지는 착한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이 과연 가치있다는 것을 악한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께로 귀화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선 미래의 추수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추수때 영원한 불속에 내던져질 것이냐 아니면 간선된 자로 남을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러한 견지는 분도 12세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죽음의 결정적 순간에만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전에 지내온 과정이 대상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오늘 이 순간이 중요한 것이란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매순간 매순간이 한 인간의 역사의 좌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것이냐 안 받아들일 것이냐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러한 문제는 단순히 ‘그 말씀 지당하군’하면서도 나와는 아무 관련없는 것으로 해서는 안되다는 점입니다. 하느님이 하신 말씀은 내 행동의 좌표가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만일 내 행동에 반영되지 않을 경우엔 요한 8,27에서도 볼 수 있듯이 “당신들은 나를 죽이려고 합니다. 당신들은 내 말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하신 말씀으로 예수님을 배척하게 되는 결과를 빚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이 문제가 되는 것은 2,000년전 그리스도께서 오늘 이 순간에도 우리 가운데에서 “나를 따르라(마태 9,9 마르 1,17 요한 1,43 요한 10,27등)”는 단호한 말씀을 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물리치고 승리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구원을 받는다는 확신과 희망을 가지고 바로 이 순간 가라지가 무성한 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 나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특히 허위와 교만, 착취라는 굴레로서의 경제적인 살인, 악법이 성행하는 이 시기에 처한 많은 사람들이 공포와 삶의 좌절을 안고 있다는 점을 귀로 눈으로 직접 간접으로 보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사시는 교형자매 여러분! 삶의 희망을 이들에게 안겨주시지 않겠습니까? 사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고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맞아들여야 하기 때문입니다.(루가 18,17) 그 손가락질하는 사람, 자기 안에서 비추어 볼 때 바로 내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악과 타협을 잘 할 뿐 아니라 남이 잘하는 모습을 보고 배가 아파서 파괴하려는 가라지와 같은 마음, 남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곳에서 나올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라지와 같은 허위와 교만, 질투, 사기, 이간질의 씨앗이 내 마음속에 자라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좋은 씨앗이 자라도록 하나씩 하나씩 자기 잘못을 고쳐나가면서 힘써야 하겠습니다. 또한 바로 내 이웃을 통해 이웃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발견하도록 노력할 뿐 아니라 서로 도와가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해도 힘이 모자라게 될 경우엔 성령에 매일매일 의탁하십시오. 성령께서 잘 되도록 이끄신다고 하셨습니다.(로마 8,26)
5 연중 제16주일 농민주일 마태 13,24-43 (가) 밀과 가라지
최기산 신부
옛날 시골에는 천수답이 많았던 관계로 동네 사람끼리 물싸움을 많이 했다. 개울에서 내려오는 물은 적은데 위에서 몽땅 쓰고 나면 아래에서는 모도 심지 못할 형편이어서 서로가 옥신각신하다가 급기야 치고 받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되면 서로 원수가 된다. 언젠가는, 물싸움을 하다가 상대방의 논둑을 뚫고 물을 몽땅 흘려보내는 보복을 하여 경찰이 오는 소동도 있었다. 이런 것이 우리나라의 원수갚는 형태였다면 약 2000년전의 이스라엘과 이집트 지방에서는 원수진 사람의 밭에 가 지를 몰래 뿌려놓는 정말 고약한 일들이 벌어졌다.
후텁지근한 열대성 기후에다 우기인지라 비가 알맞게 내리면 밀과 가라지는 매일이 다르게 자라난다. 밀과 가라지는 너무나 비슷하여 농부들조차도 구별이 어려웠으니 보통 사람들이 구별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결국 농부들은 밀이나 가라지에게 똑같이 거름주고 김을 매주어야 했다. 판별의 날은 그들을 팼을 때다.
우리나라에서는 논에서 자라는 ꡐ피ꡑ라는 식물이 있는데 이 또한 벼와 너무나 흡사하여 구별하기 힘들다. 결국 다 자란 다음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나면 명확히 드러난다. 사람인들 다르겠는가! 도둑과 보통사람이 어디가 구별되는가? 오히려 도둑이 더 상판이 그럴싸하게 펑퍼짐하고 복스러울 수도 있다.
종의 성급함 가라지를 팼을 때 비로소 종은 알아보고 주인에게 식식거리며 달려가서 아뢰었다. ꡒ주인님, 주인님, 큰일입니다. 어인 일로 밭에 가라지가 그리도 많습니까! 어서 뽑아야겠습니다. 명령만 내리십시오. 한시가 급합니다.ꡓ 일꾼은 화가 나서 어서 빨리 가라지를 뽑아야겠다는 생각만 하였다. 그에겐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주인의 사려 깊음 일꾼은 하나만 생각하고 둘은 생각지 못했으나 주인은 둘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만사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가라지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밀에 중심을 두고 있었다. 가라지는 밀에 엉겨 붙어있기에 가라지를 잘못 뽑다간 밀이 뽑힐 가능성이 많았다. 그걸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가라지가 나쁜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밀이 하나라도 다치면 안된다고 믿고 있었다. 이것은 종으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종은 얼마간의 밀이 훼손되더라도 가라지를 박살내면 후련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복음의 메시지 세상은 밀과 가라지가 공존하는 것처럼 선과 악이 공존한다. 선인과 악인이 공존한다. 그뿐이 아니다. 교회 안에도 선인과 악인은 공존한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너무 성급하게 판단한다. 일꾼이 주인에게 조르듯이 그렇게 조르는 것이다. ꡒ주님, 어찌하여 저 못된 놈들을 그냥 두십니까? 어서 악인들이 끝장나게 하십시오ꡓ라고 투덜거리기도 한다. 마치 가라지가 양분을 다 섭취하여 정작 밀은 비실비실 말라가고 있다는 듯이, 악인들이 이 세상에서도 호의호식하는 바람에 의인은 고난 속에서 살수 밖에 없다는 푸념을 늘어놓기까지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ꡒ그대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악인을 제거하려다가는 선인들이 다친다. 선인들도 악인들과 무관할 수는 없다. 그들의 친척도 되고 친구도 되고 이웃도 된다. 그러니 마지막 날까지 기다리자. 그때는 분명히 판가름날 것이다.ꡓ 그때는 따로따로 거둘 수 있기 때문에 뿌리를 다칠 필요도 없어진다. 뿌리가 다친들 어떠하랴! 알곡만 거두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서두르는 병이 있다. ꡐ빨리, 빨리!ꡑ 한국말 중에 외국인이 제일 잘 아는 말일 것이다. 동남아, 유럽의 음식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수도 없이 이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ꡐ인내. 기다림.ꡑ이 단어들은 우리 민족에게 화두처럼 중요하게 여겨진다.
하느님 나라가 오기까지 우리는 참고 기다려야 한다. 농부가 가을 추수를 기다리듯이 그렇게 기다려야 한다.
추수 때가 오면 옥, 석은 가려진다. 밀과 가라지는 가려진다. 선인과 악인은 가려진다. 그 추수의 때를 우리는 심판의 때라고 한다. 올해는 유난히 많은 종말론자들이 사기충천해 있다. 왜냐하면 추수 때가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추수의 시기는 주인께서 정하실 것이다. 종들이 왈가왈부 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종말이 왔다느니, 가라지가 끝장날 때가 왔다느니 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인간은 약하디 약한 존재인가보다.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는 종말이라는 수순을 거친 다음에 우리에게 주어진다. 종말의 때가 되면, 추수때 알곡은 거두어서 비도 맞지 않고 새도 쥐도 파먹지 않는 창고에 보관되는 것처럼 의인들은 하느님 나라에 가지만, 가라지 같이 악을 저지르며 한평생을 살다가 악한 모습으로 죽어간 사람은 불구덩이에 던져질 것이라는 말씀은 소름돋게 한다.
가라지는 위선자의 상징이다. 가라지는 기생충처럼 밀에 붙어서 살아간다. 이 세상도 위선자가 넘쳐난다. 가라지 같은 인생이 밀과 같은 인생으로 바뀔 수는 없는가! 오늘날 종의 변화가 가능하게 되어가고 있다. 감히 인간의 힘으로 종의 변화가 가능하다면 하물며 하느님께서는 가라지에서 밀로의 변화를 얼마든지 가능케 하실 것이다. 나는 가라지는 아닌지? 순수한 가라지는 많지 않겠지만 가라지에 사로잡힌 상태는 아닌지?
6 연중 제16주일 마태 13,24-43 (가) 먼저 천국에 다다른 사람들
서경윤 신부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마태 13,30)
서울역에 내리자마자 맛있는 국수집이 있다기에 친구를 따라 갔습니다.
지금의 대우빌딩 근처라고 여겨지는 곳이었습니다. 한참 국수를 먹고 있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어디 갔다가 큰 소리로 떠들면서 들어왔습니다. 종업원 아주머니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던 것 같습니다. 주인 아주머니는 「그만하니 다행」이라고 했습니다. 같이 간 친구가 호기심에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대강 다음과 같은 내용을 얘기했습니다.
이웃에 사는 아이가 놀다가 넘어져 얼굴을 어디에 부디쳤는데 피를 많이 흘렸으며, 그 집에 함께 사는 박양과 함께 병원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그 집은 여러 사람이 세들어 사는데, 아이 아버지는 서울역에서 승객의 짐을 날라다 주는 일을 하며, 어머니는 남의 집에 일을 나가므로 낮에는 아이가 혼자 집에 남아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한 집에 세들어 사는 여러 아가씨들이 돌아가며 아이를 돌보아 준다고 했습니다. 특별히 박양은 아이가 어릴 때부터 돌보아왔기에, 거의 박양이 키우다시피 했답니다. 그 뿐 아니라 아이 어머니가 저녁까지 일을 하고 밤에 돌아오므로 그 집 살림을 다 맡아 주다시피 한답니다. 낮 동안에는 별로 손님이 없기 때문에, 아이가 어질러놓은 방도 치워주고, 널어놓은 빨래도 걷어 손질해주고, 심지어 김칫꺼리를 사다 놓으면 다듬어서 김치도 담궈준다고 했습니다.
박양이 없었다면 아이 어머니는 아이 때문에 일하러 나갈 생각을 감히 할 수도 없었을 것이라 했습니다. 비록 창녀생활을 하고는 살지만, 다른 집 아가씨들과는 달리 모두가 가족처럼 살기 때문에, 보기 좋다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밖에 없는 아이가 다쳐서 피를 흘리게 되니까, 온 집안이 발칵 뒤집히고, 특히 박양이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므로, 국수집 주인 아주머니가 병원에까지 따라가서 치료한 후, 이제 박양과 아이는 집으로 가고, 자기는 가게로 돌아오는 길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박양은 친척도 부모도 없는 것 같아 명절에도 아무데도 안가고, 집을 지킨다고 했습니다. 또 저렇게 맘씨곱고 착하고 인물도 그만하면 예쁜 애가, 어쩌다가 이런 곳에 와서 저런 생활을 하게 되었는지 안타깝고 아깝다고도 했습니다. 내가 이 얘기를 들을 때는, 그저 그런 사람도 있겠거니 하고 넘어 갔습니다.
그 후 수년이 지나서 나는 공동체 묵상회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하루는 「밀과 가라지」작업을 하게되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는, 밀과 가라지를 식별하라는 작업이었습니다. 나는 평소에「창녀가 사회악」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라지를 식별하면서 얼른 창녀를 떠올렸습니다. 그 순간, 전에 국수집에서 들은 얘기가 생각나서 한참 고민을 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가라지를 가려내는데 있어서 어떤 사건이나 어떤 집단을 말할 수는 있겠지만, 어떤 사람은, 개인은 우리가 가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편견이나 선입관을 가지고 보는 우리 눈에 아무리 가라지 같이 보이는 사람도, 결코 그렇게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그전에 예수님이 나더러 이 세상 가라지를 싹 다 뽑아 불에 태우라고 했더라면, 나는 여지없이 창녀들을 모조리 처치해 버리는 실수를 저질렀을 것입니다. 「밀과 가라지를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게」하신 주님의 결정은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주일 미사는 빠지지 않지만, 좋은 집에다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며 비싼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며 먹고, 안락한 생활을 하면서도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고 무관심하며,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보다는, 비록 창녀생활을 하더라도 어려운 처지에 서로 도우고, 사랑을 나누며, 화목하고, 평화롭게 사는 그들이 예수님 말씀따라 「먼저 천국에 다가가 있는 사람들」임에 들림없습니다.
『주님, 나는 누구를 향해서도 가라지로 단정할 권리가 없습니다』
7 연중 제16주일 마태 13,24-43 (가) “이미”와 “아직” 사이의 시간
김현준 신부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다. 눈을 감고 오늘 복음 말씀을 생각했을 때, 제일 먼저 이 속담이 떠올랐다, 어쩌면 예수님이 살던 곳, 팔레스티나 지방에도 원수진 사람끼리 서로 폐농을 시키려고 남의 밀밭에 가라지를 뿌리는 예가 적지 않게 있었던가 보다.
한 농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씨만 잘 뿌리면, 반 농사”라는 말대로 제때에 정성들여 밀씨를 뿌렸습니다. 마음보가 나쁜 이웃 사람은, 이 근면한 농부의 살림살이가 번창해감을 시기하였습니다. 왜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지요. 그래서 그 밤에 몰래 가라지를 뿌렸습니다. “가라지가 밀을 덮어 밀밭은 망쳐지고, 그는 손해를 볼 것이다”는 못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지요.
밀밭의 가라지 비유
밀씨가 자라서 이삭이 됐을 때, 그 가라지도 드러났습니다. 농부는 즉시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챘습니다. 당장 가라지를 뽑아내고 싶지만, 추수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심합니다. 혹시나 가라지를 뽑다가 밀이삭 하나라도 다치게 될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좋은 계획이 있으니 추수 때에는 어차피 뽑을 것인데, 그때에 밀은 곳간에 거두어들이고, 가라지는 땔감으로 쓸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이렇게 예수님은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생활의 이야기를 통해,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려준다. 오늘 복음 말씀, 밀밭의 가라지 비유는 예수님의 설명대로 밀밭은 이 세상이고, 씨를 뿌리는 농부는 예수님이시다. 밀씨는 하느님의 착한 자녀이고, 가라지는 악인을 가르킨다.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이고 추수 때는 이 세상 끝나는 때, 즉 심판 때이다. 그렇다. 농부의 씨 뿌림으로 하느님이 다스리는 하늘나라는 이 세상에서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추수 때까지는 기다려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이미’와 ’아직’ 사이의 시공(時空)에 있으며, 이 세상에는 선인과 악인이 섞여 있고 일견 악인이 더 득세하는 듯 하다. 교회 안에도 그러하다. 가끔 이 점이 매우 의문이고 속상할 노릇이지만 현실은 틀림없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런 모습이 끝없이 계속 된다는 것은 아니다. 한번은 ‘가리어 냄’을 당할 것이다. 그 가리어낼 때 가라지가 밀이 되는 이변이 없는 이상 가라지는 곳간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이 밀밭의 가라지 비유에서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알려주는 맥점 (脈點)은 ‘추수 때’이다.
하느님은 밀 옆에 가라지가 뿌려지고 자라는 것을 허용하신다. 그것은 변화와 성장의 가능성을 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드시 추수 때가 있으며 추수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이며, 그 추수 때에는 반드시 가리어 낸다는 것이다. 이때 가라지가 밀이 되는 이변이 없는 이상 가라지는 뽑혀서 불에 태워질 것이다,
추수 때, 그때는 가라지에게는 경고의 때요, 밀에게는 희망의 때이다. 추수 때, 그 때는 시인 신동엽이 “껍떼기는 가라”고 노래부르는 때이다. 신동엽은 이세상의 무수한 회색분자들, 그리고 사이비들을 제거하고 알맹이를 지키고, 가꾸려는 열망을 이렇게 노래하곤 했다.
껍테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깹데기는 가라/(중략)/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향기로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은든 쇠붙이는 가라. 추수때, 그때는 천지 창조 때부터 ‘감추인, 하느님만이 아시는 ’하느님의 시간표’이다.
하느님의 시간표 인정을
최남순 수녀는 ‘하느님의 시간표’대로 오늘을 사는 삶의 지혜를 이렇게 제시한다. “어떻게 써야 할지/가르쳐 주십시오.” 또한 “순간의 지금은 /영원과 무한을/ 이어주는 선(線)/ 모든 시간 속에/ 주인이신 당신은/ 항상/ 나를 기다리고 계심을/ 잊지 않게 하십시오”
누가 이 세상에서 ‘이미’ 시작된, 그러나 ’아직’ 아니기에, 추수 때가 있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맛볼 수 있는가? 세상 안에만 악과 선이 섞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도 나쁜 습관과 좋은 습관이 있음을 알고, 악습은 고쳐나가고 좋은 습관은 키워 덕(德)을 이루는 사람이다.
생명을 가진 모든 씨가 뿌리내리고 싹트는 스스로의 힘을 지니고 있음을 알고, 흙의 섭리를 믿는 사람이다. ‘이미’와 ’아직’ 사이의 시간이 내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간표’임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말씀 속에 변화와 성장의 본질이 있음을 믿는, 그래서 깊이 있게 말씀을 듣는 사람이다.
“아침저녁 마음속 구름 닦고 맑은 하늘 보는” 사람이다. 가라지 뿌리는 훼방을 놓치 않고, 남 잘되는 것 배아파하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맛보는가?
8 연중 제16주일 마태 13,24-43 (가) 가라지 존재의 의미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지혜 12,13.16~19 (죄를 지어도 주님은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
제2독서 로마 8,26~27 (성령께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복 음 마태 13,24~43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악은 도대체 어디서 옵니까?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데 왜 세상에 악이 득실거리며 판을 치고 있고,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다 만드셨다고 하는데 그러면 악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한마디로 모릅니다. 악이라는 존재의 근원은 미스테리입니다. 그런데 존재의 근원은 알 수도 없는 것이 하느님의 반대 세력으로 등장해서 인간을 망치고 세상을 망칩니다. 그래서 신학에서는 악의 존재를 신비로 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서 악의 존재를 말씀하셨습니다. 악은 영원히 제거되어야 할 하느님의 반대 세력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하느님 나라의 튼튼한 성장과 인간 선의 순수한 발전을 위해서 악이 도구로 이용될 때도 있습니다. ‘필요악’이기도 합니다.
가라지는 밀밭에 자라는 억센 잡초를 말합니다. 이것이 처음에는 밀과 너무도 흡사하기 때문에 경험 많은 농부들도 구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크게 자라고 나면 밀과는 엄연히 달라서 어린이라도 구별할 수 있지만, 그때는 가라지가 밀의 뿌리를 덮고 있어서 뽑고 싶어도 뽑지를 못합니다. 가라지 때문에 밀이 뽑힐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악이라는 것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것이 처음에는 선과 너무도 흡사해서 경험 많은 사람들도 잘 속습니다. 심하게는 성직자나 수도자들까지도 쉽게 속아 죄에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악은 항상 선으로 위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떤 일을 성급히 단순하게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혼자 사는 어떤 마담이 있었는데 억척스레 일해서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점잖은 신사가 나타났습니다. 예의 바르고 여자를 존경할 줄 아는 신사요 인격자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경험 많은 마담도 믿었고 주위에서도 인정을 해서 모든 것을 의탁했습니다. 그러나 마담은 결국 자신의 전 재산을 날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기꾼이었던 것입니다.
악이라는 것은 너무도 교묘해서 얼른 알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마귀라는 것이 실상은 천사가 타락한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그럴듯하며 믿음직스럽고 진실된 선으로 자신을 감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섣불리 경솔하게 판단해서는 안되며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악의 정체는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악으로 판명되었다 해서 서둘러 급하게 제거하려 해서도 안됩니다. 밥사발 위에 파리가 앉았다 해서 밥사발을 파리채로 때려서는 안됩니다. 다리에 종기가 났다 해서 다리를 칼로 잘라서도 안됩니다. 괴로워도 참아야 하며 억울해도 기다려야 합니다. 악을 잘못 제거하려다가는 오히려 선이 크게 상처를 받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하느님의 깊으신 뜻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큰 죄를 짓는다 해도 하느님께선 회개할 기회를 주시며 악이 아무리 극성을 부려도 선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오늘의 가라지가 내일엔 밀로 변할 수 없지만 오늘의 가라지 같은 인생은 내일엔 밀과 같은 인생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도 그랬고 성인 아우구스띠노도 역시 그랬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기다림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무작정 끝없이 기다리시지는 않습니다.
하느님께선 악의 회개를 기다리시면서 동시에 악을 심판하실 마지막 날을 기다리십니다. 세상엔 파렴치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온갖 악의 세력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 그들의 세력을 당신의 권능으로 일시에 제거치 않는 것은 그들의 참다운 회개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심판은 오직 하느님의 것입니다. 악을 우리가 악으로 갚으려 해서도 안되며 지금 당장 선이 보상을 못 받는다 해도 서운해 해서는 안됩니다. 마지막은 꼭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갚아 주실 날은 꼭 있습니다.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신앙인에게 가장 큰 도전이요 위협입니다. 그러나 악의 도전이 없다면 인간의 성장과 세상의 발전은 굉장히 둔화됐을 것입니다.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이 풍성하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박해시대에 많은 순교 성인들이 나오며 어려운 시기에 영웅이 나오는 것도 그 이치입니다. 이처럼 악은 나쁘지만 악의 존재는 인간의 선을 위해서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사랑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분명히 악에서 선을 일으키십니다.
9 연중 제16주일 농민주일 마태 13,24-43 (가) 마지막 날에 드러나는 가라지
신심단체장을 맡고있는 A자매는 B자매에게 영 못마땅하다. 왜냐하면 B자매는 단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말썽과 분열만 일으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A자매는 열심히 기도했다.「주님, 우리 공동체를 위해서도 B자매를 이사가게 하시거나 스스로 우리 단체에서 나가도륵 섭리하여 주옵소서」. 정말 기도의 효력(?)인지 얼마 안 있어 B자매는 멀리 이사를 가게 되었다. A자매는 이제는 우리 단체가 정말문제가 없겠구나 하면서 흡족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전혀 생각지 못하던 C자매가 더 큰 골치 덩이가 되었다. 그러자 A자매는 다시 주님께 기도를 드렸다.「주님, B자매가 가면서 새끼를 치고 갔습니다. 우리 공동체를 위해서 C자매도 없애주십시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A야, 그러지 말고 네가 나가거라, 그러면 아무 문제가 없을테니 ‥‥」 물론 우스갯소리이다.
인간은 누구나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이를 쉽게 판단하고 단죄를 한다. 사실은 자신 안에 더 큰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자신의 약점은 관대하고 이웃의 약점에는 용서가 없을 때가 많다.
세가지 비유의 가르침
오늘 복음은 하늘나라를 가라지, 겨자씨, 누룩 등 세 가지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은 밀밭에 가라지가 많이 생겨도 당장 뽑지 말고 추수 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리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의 배경은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고려해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꼭 로마의 탄압에 시달리며 메시아를 기다리던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순수한 공동체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죄인들을 제거해야만 흠 없는 공동체를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죄인들과 어울리고 그들을 위해 봉사함으로써, 많은 유다인들의 비난과 공격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미 시작하였고, 마지막 심판 때는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판단은 완전치 못하고 오로지 추수하시는 분인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하신 것이었다. 따라서 인간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신뢰하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도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설명한 것이다. 아주 작은 씨앗인 겨자씨가 자라 커다란 나무가 되고, 작은 누룩이 밀가루를 부풀려 큰 빵을 만드는 것에 하느님의 나라를 비유하셨다.
하느님의 다스림은 이미 시작되었고 그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큰 결과를 낸다는 확신의 말씀이었다.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하잘 것 없고 작게 보여도, 엄청난 성공과 열매가 결국 이루어진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그래서 하늘나라는 신비이다. 이루시고 완성하시는 분은 인간이 아니고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판단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뿐
인간이 극복하기 어려운 심성 중에 하나는,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마음이다.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생각과 판단은 가장 바르다고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을 마음대로 판단하고 단죄하기까지 한다. 가정이나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다른 이의 단점을 자기 마음대로 고치려고 한다. 마치 가라지를 뽑아 깨끗한 밭을 만들려는 유혹이다. 그러나 세상의 어느 곳에도 선과 악은 공존하고 있다. 사회에도 가정에도 내 마음속에도 항상 공존하고 있다. 거부할 수 없는 진리이다.
바꾸어 생각하면 다른 사람의 판단에는 내 자신도 쓸모 없는 가라지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기적이고 편협한 눈으로 볼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 안에서 모든 것을 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또한 온전히 밀과 가라지를 구분하시는 분은 바로 주님뿐이라는 겸손한 마음을 지녀야 한다. 우리의 판단과 결정이 얼마나 잘못되고 실수를 했는지는 우리 자신이 살아오면서 잘 경험하고 있다.
가족이나 형제가 못마땅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점이 있더라도 단죄하지 않고, 참고 기다리면서 이해하고 용서하려는 마음을 지녀야 할 것이다. 이웃 안에 가라지를 뽑고 싶은 유혹이 들 때, 우리 자신을 먼저 반성하는 마음을 가지는 습관을 지니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10 연중 제16주일 마태 13,24-43 (가) 하느님의 다스림에 희망을 걸고
교구 주보
오늘 마태오 복음(13,24-43)에는 예수님의 3가지 비유(가라지, 겨자씨, 누룩)가 나온다. 먼저 이 비유들을 차례로 살펴본 후 비유가 지닌 의미를 고찰해보기로 하자.
1. 가라지의 비유(13,24-30)
마태오가 소속된 시리아 교회에는 그리스도인들과 사이비 그리스도인들이 공존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성급한 이들은 사이비 그리스도인들을 가려내어 교회에서 내쫓아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선인들과 악인들에 대한 판단과 상벌은 하느님의 종말 심판에 맡겨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또한 주인의 참을성 있는 모습이 강조되어 있다. 이는 곧 하느님 ‘아빠’의 자비와 관용이다. 따라서 교회는 공동체 내의 악한 이들을 참아주어야 하고, 교회의 지도자들은 서둘러 악인들을 단죄함으로써 교회를 경직시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
2. 겨자씨의 비유(13,31-32)
겨자는 일년초로서 근동 지방에서 빨리 자라고 쉽게 번식하는 흔한 식물이다. 이 식물의 키는 보통 1.5m, 갈릴래아 호수변에서는 3m까지 된다. 그 열매는 새까맣고 좁쌀보다 더 작은데, 예수께서는 아마도 이 겨자씨를 생각하셨을 것이다(마태 17,20; 루가 17,6). 이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성장(成長) 비유’이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의 작용이 하찮지만 마침내 종말에는 엄청난 위력을 드러나리라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이처럼 은밀히 시작하여 큰 결과를 낸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로써 비록 하느님께서 지금 예수님을 통해서 하시는 일이 작아보일지라도 앞으로 더욱 엄청난 위력을 펼치시리라는 확신을 피력하신 것이다.
3. 누룩의 비유(13,33)
누룩의 비유도 ‘성장 비유’이다. 이 비유의 초점은 누룩의 숨겨진 활동과 두 배, 세 배로 불어난 밀가루 반죽의 비교에 있다. 누룩은 밀가루 속에 숨어있지만 엄청난 분량의 밀가루를 계속해서 부풀린다는 것이 골자이다. 하느님 나라가 비록 지금은 밀가루 속의 누룩처럼 숨어있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엄청난 위력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지금은 아니 계신 것 같지만 차차 그 모습을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4. 비유들이 지닌 의미(13,34-43)
우리들은 교회 안에서 성(聖)과 속(俗)을 지나치게 구별한다. 하지만 가라지를 가려 뽑아내는 일이 추수꾼의 몫인 것처럼 성과 속을 구별하고 의인과 죄인을 가르는 기준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현상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러기에 신앙에 회의를 느끼고 교회를 떠나는 이들도 있다. 또 복음의 씨를 뿌린 다음에도 제대로 자라나는지 그 과정을 여유있게 지켜보지 못하고 조바심한다. 하느님의 다스림은 겨자씨처럼, 밀가루 속의 누룩처럼 매우 작고 은밀한 곳에 숨겨져 있지만 장차 큰 위력을 드러낼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다스림에 희망을 걸고 복음을 실천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11 연중 제16주일 마태 13,1-23 (가) 하느님께 앙갚음을 한 사나이
최인호 작가
1849년 1월12일에 미국 켄터키주에서 태어난 존 그린 한닝은 어렸을 때부터 불과 같은 성격을 지녀 싸움을 좋아하며 반드시 앙갚음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16세 되던 해 아버지와 싸우고는 그 앙갚음으로 아버지의 담배창고에 불을 지르고 가출했습니다. 그는 리오그란데 강변으로 도망쳐 카우보이 생활을 오래하여 거친 서부의 사나이가 되었습니다. 9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그는 메리라는 여인에게 매혹되었다가 남편은 반드시 진실한 가톨릭 교우라야 한다는 말을 듣고 앙갚음을 하기 위해 36세에 트라피스트 봉쇄수도원에 입회합니다. 수도원 생활도 불과 같은 그의 성격을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메리 요아킴 수사로 이름을 바꾼 그는 자기를 괴롭히는 수사를 향해 건초갈퀴를 휘둘러 앙갚음을 하려 하기도 하고 설거지를 하다가 깬 접시값을 보상하라는 수도원장에게 덤벼들기도 합니다. 40세일 때, 어느 날 수염을 깎고 있는 그에게 수도원장이 “자네는 거만해. 언제쯤 겸손을 배울 것인가”라고 주의주자 면도칼을 휘두르며 “왼쪽귀에서 오른쪽 귀까지 베어버리겠다”고 난동을 부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곧 수도원장을 찾아가 무릎 꿇고 “죄송합니다. 그리고 부끄럽습니다. 저의 기질, 저의 오만, 격렬한 피가 저를 망치고 말았습니다” 하고 용서를 빕니다.
그는 거칠고 교만한 성격을 주신 하느님이야말로 앙갚음과 복수를 해야 할 최고의 대상임을 깨닫고 “이제야말로 하느님께 앙갚음을 하겠다”고 결심하고는 “내 주 예수여, 저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차례입니다. 이제는 당신이 저를 십자가에 매달아주십시오” 하고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카우보이 존 그린 한닝은 1908년 4월30일 이 세상에서 가장 겸손하고 가장 온순한 성인이 되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밭에 좋은 씨를 뿌린 것에 비길 수 있다. 사람들이 잠을 자고 있는 동안에 원수가 와서 밀밭에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마태 13,24-25).
우리들의 마음은 하느님이 주신 밭입니다. 이 밭에 하느님께서는 겸손과 절제와 온유와 인내의 좋은 씨앗을 뿌리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원수인 악마는 우리들 마음의 밭에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과 교만, 방탕과 이기주의의 나쁜 씨앗을 뿌렸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하느님이 만드신 에덴 동산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라는 마음속의 잡초를 뽑아내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불과 같은 성격의 존 그린 한닝이 온순하고 겸손한 메리 요아킴 성인으로 변한 것은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속에 자라는 잡초를 뽑아낸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이야말로 반드시 앙갚음을 해야 할 최고의 상대입니다. 하느님, 나도 존 그린 한닝처럼 반드시 당신에게 앙갚음을 해 보일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