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연중 제 21주일 주일강론 모음

 

연중 제 21 주일






        1. 김정진 신부(가)/ 2                2. 함세웅 신부(가)/ 3


        3. 우요셉 신부(가)/ 5                4. 최기산 신부(가)/ 7


        5. 강길웅 신부(가)/ 9                6. 허영업 신부(가)/ 11


        7. 교구 주보(가)/ 12                 8. 최인호 작가(가)/ 13




1.      연중 제21주일  마태 16,13-20 (가) 성 베드로의 신앙고백


                                                        김정진 신부




예수님은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관하여 또는 하느님 나라의 내림에 관하여 구약의 예언자들과는 다른 의미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인류 가운데 나타났다는 사실이야말로 하느님 나라가 도래한 것이나 마찬가지라 하였습니다. 하느님 나라 즉 구원의 시기, 예언자들이 옛적부터 예고하고 구약의 전체가 준비한 위대한 구원의 시기가 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님 자신에 대하여 어떠한 생각과 어떠한 태도로 나오는지가 중요한 것이었으며 하느님 나라와 인류의 구원에 있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성경 말씀은 스승 예수님과 제자들 간의 아름다운 사제상을 들려주시려 성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에 대하여 상당히 흡족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흐뭇한 모습을 묘사하여 들려주십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 함께 여행을 하고 계십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고 합니까> 하고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무심코 가벼운 마음으로 대답합니다. <사람들 중에는 세례자 요한이라고도 하고 엘리아라고도 하고 예언자 중의 한 분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돌연 걸움을 멈추고 나서, 그들을 정면으로 똑바로 바라보시면서 <그러면 당신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여태까지의 가벼운 담화의 분위기는 일변하여졌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우리는 질문을 받고 있다. 지금이이야말로 신앙고백을 해야 되느냐, 안 해야 되느냐 라는 결정적인 때가 왔나 보다> 하고 느끼면서 모두가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 때입니다. 성 베드로는 용감하게 대답을 합니다.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이 대답이야말로 성베드로의 일생을 좌우한 것입니다.



신자 여러분! 씩씩하고도 솔직담백한 성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인류 구원사의 한 페이지를 찬란하게 장식합니다. 이 신앙고백은 예수님께서 만민이 그처럼 기다리던 구세주이시란 점을 만천하에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성 베드로는 예수님이 온전히 특별한 자격으로 생활하신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지니고 계시는 분이심을 믿고 증언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신성선언이란 것에 그 깊은 뜻이 있는 것이며 구세주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시란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는데 성 베드로의 위대한 인품과 두터운 신앙심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 베드로의 이같은 훌륭한 신앙고백에 관하여 만족한 빛으로 이에 보답하시기 위하여 <당신은 행복합니다. 당신은 베드로(반석)이니 나는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입니다> 라고 최고의 칭찬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토대를 반석 위에 놓으시려고 하셨습니다. 여기 반석이란 <베드로라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며 교회의 가견적(可見的), 외부적 토대가 베드로라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교회가 반석 위에 세워진 볼 수 있는 조직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반석은 하느님 백성 전체나 선택된 어떤 집단이 아니라 한 사람 곧 베드로입니다. 물론 그의 후계자인 교황님도 포함됩니다. 사도들이나 주교님들은 교회의 기둥이지만 베드로라는 제 1의 토대에 종속되는 것입니다. 성 베드로에게 교회가 세워졌고 교회의 열쇠가 주어졌습니다. 베드로가 열면 아무도 그 문을 닫지 못합니다. 또 베드로가 그 문을 닫으면 아무도 열지 못합니다. 베드로가 땅에서 매어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하늘에서도 매인 채로 있고 또 땅에서 풀어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하늘에서도 풀린 채도 있게 됩니다.



베드로 즉 반석은 교회의 일치를 보증합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교회의 일치를 염원하시어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소서>(요한 17,22). 예수님은 세기를 통하여 어떤 일이 발생하리라는 것을 미리 보셔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동방과 서방으로 분열되고 또 서방교회에서 수 없이 많은 종파가 파생될 것을 미리 보셔야 했습니다. 교회 일치의 길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하나로 만드는 반석에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반석이 없다면 교회 일치는 무의미한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 신자들은 반석의 후계자인 교황님께 충성을 바치며 그의 지도에 따라 신앙생활에 충실하고 분열 말고 일치된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며 하느님 나라에 도달할 때까지 우리는 항구해야 하겠습니다. 아멘.












2.       연중 제21주일  마태 16,13-20 (가) 그는 당신에게 누구입니까


                                                               함세웅 신부




오늘의 복음 말씀(마태오 16,13-20)에서 우리는 세 가지 내용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장면은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당신의 신분, 즉 당신이 누구냐? 라는 질문을 하였을 때 제자들을 대표로 대답하신 사도 베드로의 신앙,


그리고 두 번째 장면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암시하는 예언의 말씀,


세 번째 끝에 가서 결론으로 그리스도교의 근본 사상이며 핵심적 진리인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만, 즉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생명과 부활의 길에 이를 수 있다는 이 역설적 진리의 장엄한 선포입니다.



어떻든 오늘의 복음을 신학적인 면과 현실 응용적인 양면에서 고찰할 수 있습니다. 신학적인 견지에서 오늘의 복음 말씀은 12사도의 연대성, 베드로의 수위권, 즉 신앙 고백에 있어서 모범 솔선자로 나타난 그 모습을 의미 있게 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신학적으로 무슨 큰 문제가 되겠는냐고 반문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털끝만한 차이가 천리의 격차를 낸다’는 격언과 같이 이 구절 말씀을 경시함으로써 사실은 교계 제도에 문제가 생기며, 이것은 교회의 구조론에 있어서 양보 내지 타협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스승으로서 12사도에게 모두 일반적인 질문을 하셨지만 대표로 베드로 사도가 대답했다는 사실과 그 내용이 바로 신앙 고백인 “당신은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그리스도입니다” 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고백의 주인공 베드로의 후계자는 교황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베드로의 수위권, 또는 로마 교황의 수위권이라는 신학적 용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막연하게 대표자라는 데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고 따라서 이 수위권은 통치자로서가 아니라 신앙의 모범자, 사표로서 그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공의회 후에 교회 일치 운동으로 이 수위권을 경시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있지만 진리라는 것은 항상 자체 방어를 하게 되어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양보나 묵인이 있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명백한 해석, 확실한 이해에서만이 진리는 살기 때문입니다.



이 수위권의 진의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한 많은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및 신도들은 이를 거부하기 위해서


① 베드로의 수위권은 인정할 수 있지만 그것은 베드로의 개인적 특전일 뿐이지 그 후계자에게 계승되는 것은 아니다


② 이 성경 말씀은 조작된 것이다


③ 베드로가 으뜸 대표가 아니라는 이유로 ‘마태오 16장 23절’ 또는 ‘마르코 8장 33절’의 “사탄아, 물러가라”는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꾸중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신학적 대답과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는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마태오 28,20)고 말씀하셨으며 당신이 가르쳐 주신 진리를 온 천하에 전하라(마르코 16,15)고 명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 및 사도들의 계승 사실을 확실히 입증해 줍니다. 여기서 유독 베드로의 수위권만을 제거, 거부하는 것은 성경을 대하는 태도가 선입견적이며 올바르지 못합니다.




그리고 다음에 만일 프로테스탄트의 주장대로 만일 이것이 후대 교회가 교황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서 조작한 것이라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꾸짖으신 내용들을 성경에 그대로 나열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역논증으로 우리는 성경 전체의 정통성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12사도 중 대표였고, 그 대표인 이유는 그의 신앙 고백에서 더욱 굳어지며, 사표로서 그 후계자인 로마 주교가 이를 계승하고 있다는 것, 이것이 수위권의 내용이며, 오늘 복음의 정통적 해석인 것입니다.



다음은 이 복음 말씀이 오늘의 우리에게는 어떠한 의미가 있는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항상 현실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바로 지금 우리 각자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지시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합니까?” 그렇다면 “교우인 당신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예수님, 당신은 나의 구세주, 나의 주님이십니다.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이렇게 순수히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의 자세가 되어 있는지 우리는 모두 자신을 반성해야 겠습니다. 영세 때, 또는 첫영성체 때에 확신했던 예수님 또는 교리를 배울 때, 기도할 때, 신앙 생활을 통해서 확신했던 예수님이, 어떤 때에는 우리의 환경 때문에, 지위 때문에, 체면 대문에, 가정, 사회, 직장, 기타 여건 때문에 장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손해가 되는 수도 있습니다. 그보다 더,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베드로가 대표이기에 의미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나도 영세를 하였기에, 교우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그분의 뒤를-그것이 설령 죽음의 길이라도-따를 수 있는 신앙과 십자가에 대한 사랑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같이, 나는 뚜렷한 인생관, 종교관, 신관을 가지면서, 그 어떠한 것보다도 나의 완성, 나의 구원이 제일 중대한 과업임을 깨닫고, 지워진 내 십자가를 기쁜 마음으로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 그것은 피하지 않고 짊어짐으로써만이 승리를 가져오는 신앙인의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3.        연중 제21주일  마태 16,13-20 (가) 참된 믿음의 고백


                                                                 우요셉 신부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오 16,16). 여러분들께서 흔히 들으실 수 있는 구절입니다만, 우리주변에는 “신교를 믿거나 불교를 믿거나 믿는 것은 다 같지 않은가?”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항간에는 믿는다는 것은 좋은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부류들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필요가 있을까? 하여, 대부분의 경우에 그저 지나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나의 주장을 상대방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선입감 때문에 간단히 응수를 하고는 지나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것이 모두 좋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엄밀히 말하여 믿는 것이 모두 똑같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믿는 것이 다 똑같다고 하는 것은 마시는 것이 모두 똑같은 것이라고 하는 말에 비길 수 있습니다. 물론 마시는 행위 자체는 외적으로 보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을 마시는 것과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얼마나 차이가 많습니까? 극단적인 표현으로 독약을 마신다면 어떻겠습니까? 이와 같이 외적으로 볼 때 믿는 것도 다 똑같다고 할 수 있으나 내적으로 볼 땐 믿는다는 것이 다 같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여 하느님을 믿는 것과 부처님을 믿는 것 서낭당을 믿는 것을 같은 믿음으로 취급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제 오늘의 복음 내용을 생각하여 봅시다. 예수께서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시기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합디까?” 하고 질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물음에 제자들은, 백성들은 예수님을 구약시대의 예언자 중 가장 훌륭한 예언자 또는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등으로 알고 있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대답에 만족하시지 않았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들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이 말씀에 열 두 제자 중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답하자 예수께서는 만족해 하셨습니다. 과연 이 대답이야말로 참된 믿음에서 우러나온 고백이었습니다. 만일 베드로 사도가 당시 백성들과 같이 예언자 중의 한 분이라고 답했거나 정의를 외치는 한 사람의 선구자 정도로 답했다면 예수님은 실망하셨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하시러 오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알았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만족해 하셨고 베드로를 교회의 으뜸으로 삼으시어 당신의 권한을 위임시키신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지혜로는 알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시몬 바르요나, 당신에게 그것을 알려 주신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당신은 행복합니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마태오 16,17). 예수님을 이상적인 도덕과 올바른 가르침을 남기고 가신 스승으로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일이지만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것은 도덕박사나 철학박사도 마음대로 못합니다.



이와는 달리 글을 모르는 무식한 부녀들이 예수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은총으로 바위와 같은 튼튼한 믿음을 가졌었습니다. 물론 베드로도 한 때 주님을 배반한 적인 있었으나 충분한 회개를 했으며, 주님을 위해서 생명까지 바친 사람입니다.



오늘에도 예수님은 당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며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우리들에게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과연 참된 믿음은 행복의 보증입니다. 그러나 약한 인간인 우리는 일시적으로 예수를 배반하거나 잊어버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달아드는 자세를 보존한다면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믿는 것은 모두 좋으나 참된 믿음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 참된 믿음을 여러 형제 자매들에게 권하고 참된 믿음이 가져다 주는 행복과 구원을 바랍니다.












4.     연중 제21주일  마태 16,13-20 (가) “그리스도”        


                                                         최기산 신부




본당신부로 있었을 때였으니까 벌서 오래 전의 일이다. 부임한 지 두주일 쯤 지난 어느 날로 기억된다. 사무실 앞엘 나갔더니 몇몇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성당에 다니는 아이들인 것 같아서 어린 남자아이를 하나 불러 세우고 물었다. ꡒ내가 누구니?ꡓ 그 아이는 똥그란 눈을 빤히 뜨고는 나를 유심히 보다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ꡒ대머리ꡓ라고 말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대답이었다.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사무실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애의 말이 맞는 말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내가 기대했던 대답은 그것이 아니었다. 나는 적어도 ꡒ우리 신부님ꡓ이라는 말을 기대했었다. 아마 나처럼 자신을 올바로 알아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예를 들면 무명가수들이 그렇다. 그들중 일부는 유명세를 떨치고 다니는 가수보다 더 실력이 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누구도 자신의 진가를 받쳐주지 않아서 그저 3류 가수로 밤무대를 전전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기대




예수님은 12사도와 함께 복음 선포와 병자치유, 그리고 기적을 계속하시며 다니셨다. 이젠 중간 평가를 할 때가 온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ꡒ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ꡓ 제자들은 세간에서 들려오는 소리 그대로를 아뢰었다. ꡒ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나 예언자들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ꡓ 예수님은 이 대답에 만족치 않으셨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ꡒ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ꡓ 물으셨다. 조마조마한 순간이었다.




예수님으로서는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는데도 어느 누구하나 올바로 이해해주지 못한다면 막막할 수밖에 없으셨을 것이다. 시몬이 나섰다. 평소에 성격이 급하고 엉뚱한 데가 있어서 무슨 말을 할까 모두가 긴장하였다. 그러나 명답이 나왔다. 홈런을 날린 것 같았다. ꡒ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ꡓ 예수님은 흡족해 하시며 베드로에게 ꡒ너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신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ꡓ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 베드로가 고백한 ꡒ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ꡓ는 우리 신앙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마르코복음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ꡒ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ꡓ 복음서의 내용이란 바로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는 사람이다. 박해도 이길 수 있는 힘도 여기서 나오고,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한 생을 홀로 살 수 있는 원동력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데에 있다. 역사를 통해 이 고백은 교회 안에서 계속되었고 지금도 진정으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신자라야 참 신자이다.




그렇다면 ꡐ그리스도ꡑ란 무슨 뜻인가? 히브리어 ꡐ메시아ꡑ의 그리스어 번역으로서 성유로 축성된 분, 임금, 대제관이란 뜻이 있다. 우리말로는 구세주이다. 임금에 의해서 나라가 통치되고 그의 말 한마디에 의해서 생사가 결정되는 것처럼, 예수님은 이 세상의 왕중의 왕으로서 온 민족들의 최고의 왕이시다. 우리가 예수님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을 때 그분을 위해 목숨도 바칠 수 있는 신하로서 살게 되는 것이다. 우린 신자라는 명칭만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요한 복음에는 마르타가 이렇게 고백하는 내용이 나온다. ꡒ주님,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믿습니다ꡓ(요한 11, 27)




우리도 베드로나 마르타처럼 고백할 수 있는 신자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 믿음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선물로 주신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성령을 통해 굳센 믿음을 선물로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구해야 한다.(고린전 12, 8 참조)




복음의 메시지




그대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위로자? 하소연 하면 받아주는 분? 2000년 전에 존재했던 분? 베드로처럼 고백할 수는 없는 것인가? 우린 고백해야 한다. 예수님은 ꡐ살아 계신ꡑ 분이시다. 우리는 무덤의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부활, 승천하신, 우리 곁에 살아 계신 예수님을 믿는다. 예수님은 늘상 우리의 일상에서 만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는 분이다. 그분을 만질 수는 없으나 만지는 것보다 더 가까이 계시고 우리 삶의 온 영역을 다 살피시고 걱정해 주신다.




예수님을 어떻게 고백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살이가 바뀐다. 근자에 종교간의 대화라는 명목으로 우리의 것을 소중히 할 줄 모르는 분위기가 생겨나는 듯 하다. 예수님은 신인이시다. 그리스도이시다. 이 세상엔 위대한 위인들이 있었고 그들은 종교를 창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그들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서구인들은 동양의 종교를 신비하게 생각하고 접근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 속에는 유불선이 함께 공존한다. 우리는 우리의 것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자칫 혼합종교처럼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것을 소중히 여기고 분명히 알고 있을 때에야 종교간의 대화나 토착화도 빛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새겨야 한다.












5.     연중 제21주일  마태 16,13-20 (가) “예수는 누구십니까?”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이사 22,19~23 (내가 다윗의 집 열쇠를 그의 어깨에 메어 주리라) 


제2독서 로마 11,33~36 (모든 것은 주님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 


복 음 마태 16,13~20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희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제가 신학생이었을 때 어느 날 밤에 꿈을 꾸는데 갑자기 그 얼마 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께서 나타나셔서는 매우 근심스런 표정을 하고 계셨습니다. 꿈속이었지만 저는 순간적으로 아, 외할머니께서 연옥에서 고통을 받고 계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불쑥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께 “연미사를 봉헌해 드릴까요?”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고개를 흔드시며 아니라고 하시더니 “사도신경을 한 번만 바쳐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아주 의외였습니다.




사도신경!


저는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서 사도신경을 한 번이 아니라 열 번이고 바쳐 드렸지만 왜 꿈속에서 할머니께서 그 기도를 요청하셨는지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단순하면서도 깊은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때가 되자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을 시험해 보고 싶으셨습니다. 3년 동안 가르친 보람이 있는지 궁금하셨으며 또한 수난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바라볼 때에 이제 그들을 새로운 각도에서 준비시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을 데리시고 잡신들을 섬기고 있는 이방인 지역인 북쪽 지방으로 가셔서 제자들에게 점차적인 시도를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그분은 한바퀴 돌려서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요한이라고도 하고 엘리야라고도 하며 또한 예레미야나 예언자들 중의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 제자들은 예수님을 제법 좋게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모자랍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주 맞대 놓고 물으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예수님의 느닷없는 질문에 제자들은 멈칫했을 것이고 당황했을 것입니다. 열심히 따라다니긴 했지만 예수님이 누구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베드로만이 나서서 기특한 대답을 합니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는 다 시원찮은데 그 대목에서만은 아주 백점을 받았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요 구세주(메시아) 이시다.”라는 믿음 위에 우리 신앙과 교회가 서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오셨으며 그리고 그것을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라틴어에 ‘유디치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선서’라는 뜻입니다. 왜 이 말을 하는고 하니, 신부가 될 사람은 서품 며칠 전에 자기 교구장이신 주교님 앞에 나가서 오른손을 들고 선서를 합니다. 그런데 그 유디치움의 내용은 다름 아닌 사도신경을 주교님 앞에서 낭독하는 것입니다. 즉 사제로서 사도신경의 믿음에서 일탈하지 않고 끝까지 그 진리 위에 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렇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바로 이 ‘사도신경’이라는 믿음의 고백 위에서 존재합니다. 신앙인이 서 있는 밑자리도 사도신경이며 신부나 주교, 또는 교황이 서 있는 자리도 사도신경입니다. 천주교는 한마디로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개신교에서는 오늘의 성서 귀절을 굉장히 미워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결점이 많았지만 믿음 하나 때문에 교회의 반석이 된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의미에서 반석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절대로 자기 공적에 의해 구원받지 않습니다. 가끔 사람들은 성당에 안 나가도 죄는 짓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성당에 안 나오는 사람들이 더 양심이 바르고 더 착하게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죄를 자주 짓는다 해도 구원은 믿지 않는 선인보다는 믿는 죄인편에 있는 것입니다. 만일에 착한 것만 가지고 구원받는다면 예수님이 굳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는 누구입니까?


그분은 우리 생애에 계속해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매일의 생활 안에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말과 행동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과거가 있고 결점이 있으며 본성이 약하다는 것은 신앙인에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누구시다라는 것을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교회의 반석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분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믿으면 삶이 개선되고 선을 행하며 진리의 길을 걸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멘.”












6.            연중 제21주일  마태 16,13-20 (가)


                                                            허영업 신부




  거리에서 일을 하는 청소부가 있었다. 그 사람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마치 자기 집 마당을 치우듯 항상 열심히 일을 했다. 성실하게 궂은 일을 하는 그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늘 미소를 머금은 채, 땀을 흘리며 일하는 그의 거리는 항상 깨끗했다.




  어느 날 지나가던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참 행복해 보이십니다. 이런 어렵고 궂은일에 만족하십니까?」 그 청소부는 대답했다.「전에는 내 일에 대해서 뿐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늘 불만이었지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또 믿고 난 후에는 달라졌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삶은 그대로 이지만 저의 생각과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제가 하는 청소 일이 더러운 지구의 한구석을 깨끗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그렇게 생각하니 제 일에 큰 보람을 느낍니다.」


                                     


       예수님의 질문과 베드로의 고백 




   예수님의 설교와 기적 등을 경험하고도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해 바르게 파악하지 못했다. 마침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합니까?‥‥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마태 16,13-15)




  오늘 복음은 「예수가 누구인가?」를 묻고 있다. 예수님의 질문은 제자들의 생각을 아는 것보다 자신의 신비에 다다르게 하기 위해서이다. 제자들의 대답에서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를 예언자로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언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가장 큰 명예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를 이스라엘이 고백하던 메시아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베드로는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예수야말로 「살아 계신 참 하느님」이라는 놀라운 고백이다. 그런데 이 베드로의 고백 뒤에는 인간의 지혜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관하신다. 다만 인간은 하느님의 계시를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에 이어 그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고,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신다.




  베드로는 이제부터 교회의 반석이 된다. 이 공동체는 예수님이 세운 구원의 새로운 공동체가 된다.


마태오 복음에서만 나오는, 교회라는 단어는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 즉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들의 공동체이다. 그리스도와 교회는 뗄 수 없는 연관성을 지니게된다.


또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주신 하느님 나라의 열쇠란, 사도들의 거룩한 교도권을 의미한다. 즉 지상에서 예수님의 구원사업을 계속할 교회를, 가르치고 책임지는 권한을 의미한다. 




    당신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하신 「당신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은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하신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에 바로 우리 신앙인의 가장 핵심적인 삶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과연 나는 예수를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우리는 세례성사를 받을 때, 또한 매주일 미사 때 신앙고백에서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외아들, 영원으로부터 성부에게서 나신 분을 믿나이다‥‥」 라고 믿음의 내용을 상기한다. 우리가 고백한 이 사실은 입으로 고백한 것에 그치는 단순하고 안이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신앙고백은 우리에게 결단의 삶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삶에 있어서 과거의 기준은 모두 버리고 그리스도가 최고의 가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이 고백은 우리 삶에서 철저히 반영되어야 한다. 즉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수용하고,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은 아직 완전한 구원의 상태가 아니다. 또한 많은 죄의 유혹이 우리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주님이요, 하느님이시다」는 고백은, 내 삶의 구원이 그리스도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는 뜻은, 내 삶에 세속적인 의미로 도움과 행복을 주는 대상의 의미 이상이다. 즉, 우리 삶의 모든 것을 걸고, 희생과 고통을 감수하고라도 주님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이다. 과연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떤 존재로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있는가?












7.     연중 제21주일  마태 16,13-20 (가) 너는 베드로, 하늘나라의 열쇠를


교구 주보




오늘 마태오 복음(16, 13-20)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정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서 물으신다. 이때 제자들이 예수님의 정체에 관한 세 가지 여론을 말씀드린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고도 하며, 또 다른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들 중 한 분이라고 말들을 한다고 말씀드린다. 예수께서 또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신다. 이때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 베드로의 고백이 있자 예수께서는 그런 고백을 하게 된 것은 하느님께서 계시(啓示)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베드로에게 세 가지를 약속하신다.


곧 시몬 베드로를 초석으로 삼아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교회 창립 약속(18절), 하늘나라 열쇠를 주시겠다는 약속(19ㄱ절), 매고 푸는 권능을 주시겠다는 약속(19ㄴ절)이다. 지상에서 베드로(=교회)가 내리는 결정은 ‘하늘에서도’, 곧 하느님께서도 그대로 들어주신다는 엄청난 권능이다. 오늘 복음이 “예수님의 정체”에 관한 물음을 담고 있지만 여기서는 교회의 문제에 대해서만 살피도록 하겠다.


교회는 베드로의 인격을 초석으로 삼아 세워졌다. 그렇다고 베드로가 교회의 주인이라는 말은 아니다. 교회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고(에페 5,2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1고린 12,12; 에페 4,12). 따라서 교회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불러야 한다. 교회를 그리스어로 ‘에클레시아’(Ekklesia)라고 하는데 에클레시아는 하느님이 불러모으신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뜻한다.  이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불러모으신 백성이요 모임이기도 한 까닭에 “그리스도의 교회”라고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에는 본질과 형식이 있다. 교회의 본질은 시공(時空)에 따라서 변할 수 없는 것으로서 이것 없이는 교회가 교회되지 못한다.


 


이에 반해서 교회의 형식이란 그리스도 교회의 본질적인 요소를 증언하고 표현하는 것으로서 시공에 따라서 변할 수 있는 상대적이고 잠정적인 요소이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 교회의 본질적인 요소라 한다면 이런 본질적 요소를 어떤 방법으로 어떤 언어로 증언하는냐, 그리고 교회의 조직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형식적 요소라 하겠다. 교회의 형식이 본질에 의해 바뀔 수는 있어도 교회의 형식이 본질을 바꿀 수는 없다. 


 


따라서 교회는 먼저 교우들이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인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더욱 잘 익히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하며 살도록 가르쳐야 한다. 이러한 본질적인 요소에 기초하지 않는 교회는 사회의 한 단체로 전락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8.        연중 제21주일  마태 16,13-20 (가)


최인호 베드로/작가




인도 봄베이에서 태어난 예수회 신부 앤소니 드 멜로(1931-1987)는 평생토록 피정 지도, 영성지도자 양성으로 헌신하며 인도의 로나불라에 있는 ‘사다나 사목연구소’의 소장을 지냈습니다. 그는 영성과 지혜에 관한 많은 책을 저술했는데, 「종교박람회」(분도출판사)라는 책 속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복음서 속의 대화


예수: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시몬 베드로: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정녕 복되구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시다.


오늘날의 대화


예수: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리스도인: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훌륭하고 옳은 대답이다. 그러나 너는 불행하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그것을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배웠기 때문이다.


드멜로 신부가 쓴 이 짤막한 단상은 깊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불쑥 질문부터 던지십니다. 베드로는 당황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그 대답을 가르쳐줄 친구도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도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베드로에게 정답을 가르쳐주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베드로처럼 망설일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질문의 정답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수능시험을 치르는 수험생처럼 그 정답을 외우고 있기 때문에 서슴없이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론 우리의 대답은 베드로의 고백처럼 반석과 같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대답은 같아도 그 내용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베드로에게 그 답을 가르쳐준 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지만 우리에게는 사람들이 그 답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험에 나올 문제들을 미리 예상하고 그 정답을 암기하는 그리스도학원의 수강생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그룹의 면접시험에 나올 질문들을 예상하고 모범답을 미리 준비해놓은 신입 신앙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드멜로 신부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대신해서 미리 대답을 다 해주는 바람에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께서는  그것을 가르쳐주실 겨를이 없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 신앙의 위기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보다 미리 답을 주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귀울이는 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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