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연중 제 3주일 주일 강론 모음

 

연중 제3주일






          14. 황익성 신부(나)/ 25


         15. 김몽은 신부(나)/ 26                  16. 조순창 신부(나)/ 27


         17. 함세웅 신부(나)/ 29                  18. 김정신 신부(나)/ 31


         19. 기쁜 소식을 믿으시오(나)/ 33         20. 이계향 신부(나)/ 34


         21. 신은근 신부(나)/ 35                  22. 김영진 신부(나)/ 36


         23. 강길웅 신부(나)/ 39                  24. 교구 주보(나)/ 40


         25. 김남조 시인(나)/ 42                  26. 김병희 신부(나)/ 43


         27. 김성배 신부(나)/ 43               




14           연중 제 3주일   마르 1,14-20 (나) 기쁜 소식을 믿으시오


                                                             황익성 신부




오늘 성서 말씀에는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을 간택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당신 제자를 간택하신 목적은 공생활의 새 시대를 시작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역사는 이제 더욱 영구적인 형태를 갖추는 것입니다. 전도사업이 점점 범위가 넓어진 것은 복음이 전세계를 위하여 전해지리라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런 전도사업을 위해서는 마땅히 일정한 일군의 무리가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를 간택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많은 부류의 사람들을 두고 하필이면 어부들을 간택하셨습니까?




어부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는 늘 사나운 바다와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어부들은 씩씩하고 독립성이 있으며 아무것도 꺼리지 않고 무서운 것이 없는 담력을 길러온 자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 중에서도 예수님은 어떠한 분들을 제자로 하셨습니까?




약속된 메시아를 늘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겐네사렛 호수가로 몰려왔습니다. 그때 밤새도록 고생했어도 고기를 잡지 못하고 그물을 씻고 있던 배 두 척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중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조금 떼어 놓으라고 청하신 다음 군중을 가르치셨습니다. 주께서 말씀을 마치신 다음 즉시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치고 고기를 잡으시오”라고 명하신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친 결과 기적적으로 많은 고기를 잡은 시몬은 기뻤지만 보통 일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하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와 시몬의 동료들이며 제베대오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을 당신 사업을 위해 간택하셨습니다. 과연 간택된 자들은 어떠한 사람들이었습니까?




첫째로 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깊은 데에 있는 고기떼를 본 것입니다.


둘째로 노력의 정신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노력하였으나 못 잡고 피곤하여 몸이 지쳐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다시 한 번 그물을 쳐서 너무나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셋째로 희망이 없는 것 같았으나 또 해보는 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고기잡을 때도 어두운 때였는데 밤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의아했지만 즉시 순명하였습니다. 이날 간택된 제자들은 이러한 성격의 소유자들이었으며 예수님을 여러 번 만나서 말씀도 들어보고 대화도 나누던 친구였습니다. 더구나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과 사촌간이었고 응징과 명예욕이 강한 자들이기도 하였습니다(루가 9,54; 마르 3,17; 10,35-45).




친애하는 신자 여러분!


우리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예수님의 말씀을 늘 들어오고 있고 듣고 있으며 또 앞으로도 들을 것입니다. 그리고 미사 때마다 그리스도의 현존을 느끼고 있습니다. 또한 평신도 사도직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목자없는 양과도 같이 시달리고 지쳐버린 군중을 보시고 그들이 가엾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군이 적으니 그 주인에게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줍시사고 청하시오”(마태 9,37-38)라고 하셨습니다. 세계적 문제는 고사하고 우리 나라 안에서만 볼 때 불과 신자 수는 4퍼센트도 안됩니다. 그 적은 신자 중에서도 살기가 바빠서 그릇된 사회풍조에 빠져서 하느님을 외면한 냉담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하느님께 간택된 자들이며 하느님의 일군으로 불림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평신도 사도직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과 마음 안에 원의가 클수록 신앙이 강할수록 우리는 그만큼 더 많은 고기를 잡을 것입니다. 초대 신자들이 예수님을 물고기로 상징한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주님은 사도에게 맡기셨던 사명과 똑같은 사명을 우리에게 주시면서 아직 주님을 모르며 지내는 사람들에게 우리를 파견하십니다. 겁내지 마시오. 이제부터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입니다.




“나의 힘 나의 방패 야훼님이여 내 마음 주님을 믿었삽기에 나는 도움을 받았나이다”(시편 27,7).


“내 바위 내 성채는 당신이시니 당신의 이름으로 날 이끌어 데려가 주소서”(시편 30,4).












15         연중 제 3주일   마르 1,14-20 (나) 기쁜 소식을 믿으시오


                                                김몽은  신부




오늘은 연중 제 3주일(B해)로서 주님이 갈릴래아에서 전도를 시작하신 것과 동시에 첫 번째로 4명의 사도를 부르신 사실을 전해 준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최초의 기쁜 소식은 <때가 되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회개하고 이 기쁜 소식을 믿으시오>라는 것이다. 즉 천지창조 이전부터 계획하신 하느님의 예정된 시기가 되어,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크신 사랑으로써 인류 구원을 위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심으로써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가 도래했음을 선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기쁜 소식을 ‘믿음’으로써 받아들여야 한다.


회개란 단순히 죄를 뉘우치는 것 이상의 것이다. 즉 우리의 잘못된 생활을 고치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신 길을 따라감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제까지 우리가 가졌던 인생관이나 세계관, 모든 가치관의 표준을 달리 해야 한다. 크리스천이란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러한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시한 바에 따라서 생활하는 사람들이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로는 오늘의 서간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살고, 슬픔이 있는 사람은 슬픔이 없는 사람처럼 지내고, 기쁜 일이 있는 사람은 기쁜 일이 없는 사람처럼 살고 물건을 산 사람은 그 물건이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며 세상과 거래를 하는 사람은 세상과 거래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보는 이 세상은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1고린 7,29-31).


사실 믿음의 생활이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보이지 않는 사물을 확증해 주는>(히브리 11,1) 삶을 뜻한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 세속 사람들과 같은 표준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진정한 믿음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나타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오늘의 복음에서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믿음은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와 동시에 진정으로 희생을 수반하는 것이어야 한다. 주님은 고기를 잡고 있는 4명의 사도들(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부르셨다.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부르심은 이제까지 그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부모, 형제, 가정, 직업 등)을 버린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어느 기간 동안만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일평생에 걸쳐 예수님을 따라 살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이 세상에 전함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생활이다.


최초의 부르심에 응한 4명의 사도들은 주님의 모습 안에서 하느님의 거룩하고 위대한 모습을 보았으며, 예수님의 음성에서 하느님의 사랑에 넘치는 음성을 들었기 때문에 아무런 주저도 없이 그들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따랐던 것이다. 우리들도 주님의 모습을 보고 복음 안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음으로써 세속적인 가치관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주님을 따라 살겠다는 각오가 있은 연후에야, 진정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 그런 사람들만이 <내가 당신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소>라는 주님의 축복어린 위탁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된다.












16          연중 제 3주일   마르 1,14-20 (나) 기쁜 소식을 믿으시오


                                                     조순창 신부




예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후 갈릴레아 지방을 두루 다니시며 전도 여행을 시작하실 무렵에,


“하늘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이 기쁜 소식을 믿어라.”


고 외치셨습니다. 구약의 이사야 예언서에서의 복음은, 페르샤의 왕이 바빌론 왕국을 정복하여 강제로 식민지 생활을 할 때에, 유다인들에게 해방을 선포한 것이 바로 그 기쁜 소식이었고, 드디어 희소식을 듣고 고향에 돌아왔으나, 폐허가 되고 만 고향에서의 생활고를 겪다 보니, 해방 선포가 복음 같지가 않아서, 참된 해방보다 완전한 희소식을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2000년 전에 유다 민족에게 선포한 예수님의 기쁜 소식은 바로 ‘약속의 때가 지나고 실현의 시기가 온 것을 알리는 말씀’이요, ‘불행하던 때는 지나가고 참행복의 새 시대가 왔다’는 것을 외치시는 가르치심이요, ‘어렴풋한 하느님의 숨겨진 모습이 보이는 인간으로서 더 환히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때가 왔다’는 일깨움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세계를 다스리신다’는 뜻입니다만, 구약시대엔 ‘하느님은 자연계와 인간 역사와 특히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스리신다’고 믿었고, 그는 그 시대에는 미완성이지만 끝내 세말에야 완성될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면, ‘하느님 나라가 임박했다’고 외치신 지 2000년이 흘러간 오늘, ‘과연 우리는 하느님께서 법과 궤도를 따라 자유롭고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는 가운데, 고통과 슬픔과 걱정이 없는 세계에서 사느냐?’ 하면, 그렇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또다시 우리들에게


“회개하고 믿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기쁜 소식을 선포하신 예수께서는 병을 고쳐 주시고, 마귀를 쫓아내며, 죄를 사해 주심으로써, 모든 악에서의 해방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는 기쁜 소식이 정부 외교의 성공, 국가 안보의 견고, 평화의 증진, 경제적 부강, 사회 복지의 완성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득남이나, 병의 쾌유나, 시험 합격이나, 취직이나, 승진이나, 성취 등이지만, 이는 모두 잠시 지나가는 기쁨이요, 하나의 일이 끝나면 또 다른 일과 걱정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고민을 헤어나지 못하는 비참한 인생으로 울다 웃다 어느덧 주름살만 늘어, 늙어 가야만 하는 것이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는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마르 16,15)고 하셨으니,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전지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면, ‘우리를 버리시지 않는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필요한 때만 부르고 찾는 게 아니라, 항상 숨쉬듯이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의 제 1독서에서는 ‘회개해야 하느님의 벌을 면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분부로 예언자 요나가 니느웨 도시를 온 종일 두루다니며, ‘그들의 죄악이 하늘에 사무쳐 40일 후엔 잿더미가 될 것을 경고’ 하였을 때에, 예언자의 말을 듣고, 왕을 비롯하여 온 국민이 베옷을 입고, 단식하며 참회하여, 드디어 하느님께서는 그 도시에서 진노를 거두시며,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시었습니다.”(요나 4,10)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어부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와 제베데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고 부르셨을 때에, 그들은 망설이지 않고, 그물과 아버지와 삯군을 버리고 떠나 예수님을 따라 나섰고, 평생을 스승과 복음을 위해서 몸을 바쳤다고 하였습니다(마르 1,16-20).


그 네 제자들이 유식하고, 돈이 많고, 재주가 좋아서 교회의 초석이 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원하실 때에 있는 모든 것을 헌신적으로 바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나는 어린이여서, 젊어서, 바빠서, 노인이어서, 병자라서, 불구자라서, 무식해서, 돈이 없어서, 능력이 없어서’라고 핑계하기 쉬우나, 하느님은 없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있는 것을 송두리째 바치는 헌신이 필요할 따름입니다.




금년에 여러분은 할 일이 많습니다. 지금 필요하니 바치라 할 때에 서슴없이 다 바치면, 기쁜 마음으로 몇 배 갚아 주시고, 그 기쁨은 영원할 것입니다. 하느님 뜻을 따라서 힘을 합치면, 위대한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각자가 받은 은총의 선물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가지고 서로 남을 위해서 봉사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주신 갖가지 은총을 잘 관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1베드 4,10)


라고 하면서, 그리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7         연중 제 3주일   마르 1,14-20 (나) 기쁜 소식을 믿으시오


                                                    함세웅 신부




어떠한 음이든지, 특히 교향곡에는 늘 반복되는 음율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주제곡이라고 부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슬프게 하는 곡조나 기쁘게 하는 곡조, 또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환상에 빠지게 하는 그러한 음율이 사실은 모두 이 주제곡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연주되고 있는 것입니다.




성서은 바로 이러한 음악입니다. 성서에도 주제곡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주제곡을 위하여 인간의 역사, 하느님과의 관계, 모든 사건, 가정, 개인 등의 감정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회개하고 나를 따르라”(마르코 1,14-20)라는 말씀은 이러한 의미에서 바로 전 구원사의 정점이며 구원 음악의 주제곡입니다. 사실 구약의 전 역사를 통해 살펴볼 때 ‘회개하라’는 이 주제가 얼마만큼이나 강조되었는지는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은 항상 인간을 부르십니다. 일치하여 하나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약합니다. 때로는 잘못을 저지르고 죄고 짓고 하는 어쩔 수 없는 죄인입니다.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 이것이 바로 회개의 첫 조건입니다. 이 잘못은 개인의 잘못 그것뿐이 아니고 한 가정, 또는 단체, 사회, 국가의 잘못 그것까지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잘못이 있다고, 죄인이라고 저버리시지 않고, 더욱 우리 인간을 부르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 그것이 회개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히브리어나 희랍어의 ‘회개’의 어원적인 뜻은 ‘길을 바꾼다’, ‘되돌아온다’라는 뜻입니다.




회개는 또한 속으로부터 진정 우러나오는 내적인 것이며, 또 행동과 실천을 요구하는 외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그 한 예로, 마음으로부터의 진정한 뉘우침이 있었기에 많은 고행자나 순례자들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오랜 시간 동안 힘들어도 참고 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회개란 무엇보다도 먼저 올바른 가치관의 정립에 있습니다. 본능과 이를 억제하는 나의 의지, 선과 악, 하느님과 인간, 진실과 가식, 얕은 잔꾀와 성실, 영원과 잠시, 이러한 모든 것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란 이러한 인식만의 정립은 아니며, 그것은 행동을 요구합니다. 제일 어려운 내적 행동, 즉 이것이냐, 저것이냐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결정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또한 타협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내가 평화를 주려고 온 것이 아니고 다만 날카로운 칼을 주려고 왔다”고 하신 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양자간의 택일에서 또는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서 타협 없이 하나를 베어 버려 의지의 인간인 나, 하느님께로 향한 나, 진실의 나, 성실함의 나를 키우는 작업이 곧 회개입니다. 따라서 회개란 생각하는 것이며 반성하는 것입니다.




음악을 들으면서 음악에 도취되지 않고 분심하는 사람에게 주제곡이란 더구나 무의미할 것입니다. 루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의 두 가지 기도에서 우리는 진정 반성하며 겸손되이 “주여,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구해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 솔직한 인간, 가식 없는 인간, 그는 역시 모든 사람에게 성실할 것이며 진실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교 신자의 사랑입니다.


“회개하고 나를 따르라!” 아직도 주제곡은 반복되고 있습니다. “나를 따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갈 곳이 어느 장소나 또는 상태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어느 곳에 계시든지 어떤 상태에 있든지간에 따라야 한다는 ‘당위’만을 일러 줄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어느 분인지 가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구분을 합니다. 33년간을 사셨다는 예수님의 생애 중, 30년은 숨겨진 사생활이었고, 3년은 공생활, 또 마구간에서 탄생하신 예수님과 왕으로까지 대접받은 예수님, 고통과 죽음의 예수님과 기적과 부활의 예수님, 그렇다면 내가 믿는 그 예수는 과연 어떠한 예수입니까?




이 모든 구분을 총괄해서 미국의 유명한 쉰(Fulton Sheen) 주교는 ‘십자가 없는 예수’와 ‘예수 없는 십자가’로 양분하였습니다. 한 예로 서방 세계의 물질문명 사회, 안일과 향락만을 찾는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신앙인들은 ‘십자가 없는 예수’를 믿는 무리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세계, 똑같이 인간의 발전과 복지를 도모한다는 공산 세계, 소련이나 중공 등의 국가에서는 무작정의 제한, 수고, 노동만을 요구합니다. 이들에게는 희망이 너무나도 희미합니다. 이러한 상태의 상황을 그는 ‘예수 없는 십자가’에 비유하였습니다.


우리가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그 예수, 그분의 십자가가 없다면, 그는 정녕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무의미합니다.




우리를 구원했고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는 그 십자가, 그분의 십자가만 있고, 희망의 예수가 없다면 우리는 이 역경, 고통 속에서 그만 짓눌려 질식할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는 십자가상의 예수이며, 또한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예수의 십자가 길입니다. 이것은 곧 “너희는 죽지 않으면 결코 살지 못하리라”하신 예수님의 역설적 진리를 더욱 강조할 뿐입니다.




나를 죽이는 작업을, 우리는 내적 갱신, 통회로써 이룩하고 참되게 사는 작업을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실천해야 합니다.


“뭐, 저런 것도 천주교 신자야?” 하는 책망과 핀잔을 제 3자로부터 듣기에 우리는 이웃을, 하느님, 예수님의 교회로 인도하기는커녕 오히려 장애물이나 되지 않았었는지 반성하면서, 신앙인답게 성실하고 진실하게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새로운 다짐과 함께 “회개하고 나를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되새겨 보는 것입니다.












18          연중 제 3주일   마르 1,14-20 (나) 기쁜 소식을 믿으시오


                                                      김정진 신부




신자 여러분! 지난 주일의 복음의 말씀과 오늘 복음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이 첫 번 제자들을 부르시는데 있어 상당히 차이가 있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동일한 장소에서 일어난 동일한 사건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차이가 있으므로 우리는 사도들의 성소(聖召)는 단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지난 주일의 복음(요한 1,35-42)의 내용은 하나의 준비적 초대로서, 제자들은 이 일이 있은 후 자기네들의 일상생활의 직업으로 돌아갔다가 오늘 복음(마르 1,26-20; 마태 4,18-22)이 똑똑히 말하듯이 제자들은 오늘 결정적으로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고향이나 가사일은 깨끗이 떠나서 예수님만을 따르며 한평생을 스승 예수님을 위해서 산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이 전도를 시작하시면서 발한 제일성(聲)이 <여러분은 회개하고 이 기쁜 소식을 믿으시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기쁜 소식 즉 하느님과 하늘나라에 관한 희소식을 받아들임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으며 영원한 행복의 본 고향인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우리가 회개하고 참회하는 생활을 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제 1독서를 보십시오. 죄악과 타락 중에 있던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 예언자의 충고에 따라 회개함으로써 하느님의 엄벌을 모면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만일 회개하지 않았더라면 니느웨 도시는 잿더미로 변하였을 것입니다.




지금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눈앞에 전개되어 있으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니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하늘나라로 들어오라는 초대를 받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고 회개하여야만 그 나라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집니다. 우리 구원과 멸망의 갈림길에서 망설이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어서 서둘러 회개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회개란 무슨 뜻입니까. 회개는 죄악을 털어 버리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의 원천이십니다. 헌데 하느님의 사랑에 정반대가 되고 하느님의 사랑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 바로 죄악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사랑하시지만 죄악만은 그렇게 하실 수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을 박멸하시기 위해서 그 많고 많은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고 구원을 얻으려면 반드시 죄악을 멀리하고 뉘우치고 회개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먼저 회개하라고 외치십니다. 또 예수님은 <잘 들어 두시오. 당신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입니다>(루가 13,5)라고 불신하는 백성들을 경고하셨습니다.




신자 여러분! 어떻게 하는 것이 진실한 회개이겠습니까. 오늘 제 1독서에서 나오는 니느웨 사람들이 잘 가르쳐 줍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고 단식을 선포하고서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다 굵은 베옷을 입고 단식하여 못된 행실에서 돌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역시 말로서가 아니라 실지 행동으로서 회개해야 합니다. 자기 과오를 솔직히 뉘우치고 참회하여 하느님과 화해하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대로 기도하고 단식하고 극기하며 고통을 달갑게 참아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성 바울로 사도는 말씀하기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을 당하면 그분과 함께 영광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귀찮은 사람들, 우리 둘레에 있는 사람들이 일으키는 크고 작은 짜증, 때로는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일으키는 골치 아픈 일들, 우리 의지의 나약함, 우리의 실수, 이런 모든 것을 조용히 참아 견디며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또한 매일 우리 자신을 억제하고 극기하는 일 한 가지를 하고 무엇인가 좋은 일을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도록 노력합시다. 우리 이웃을 동정하고 비난하거나 비평하지 말고 장부나 아버지는 불필요한 지출을 억제하고 아내나 어머니는 허영심을 버리고 사치스러운 것을 피함으로써 참된 극기의 생활을 하는 것이 됩니다. 이런 행위는 예사로운 것으로 보이나 하느님이 보실 적에는 그것은 값지고 귀한 것이며 또 그것은 진실한 회개의 증좌이며 구원을 얻게 되는 지름길이기도 합니다. 아멘.












19          연중 제 3주일   마르 1,14-20 (나) 기쁜 소식을 믿으시오




예수님의 “나를 따라 오시오”라는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은 다 끝까지 그분을 따랐다. 베드로는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마태 19,27)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그러면 주님은 그 때는 부르시고 지금은 안 부르시는 것일까? 아니다. 그분은 처음과 마침이 없이 우리 모두를 부르고 계신다. 우리를 인간으로 이 세상에 부르셨고 학생은 학교로, 직업인은 직장으로, 주부는 가정으로, 또 어떤 이는 수도자, 성직자 되게 부르시는 것이다.




좀더 좁게 보면 그때그때 부딪히는 일이나 처하게 되는 환경, 갖가지 사건이나 이웃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어떻게 보면 그분의 하시는 일이 인간을 여기저기 자꾸만 부르는 그 일 하나에 매달리고 계시다는 느낌까지 받는다. 어쨌든 그분은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 계획을 추진하시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 영광에 참여토록 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부르심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이에 대한 해답은 지극히 명료하다. 즉시, 모든 것을 버리고, 끝까지 항구하게 그분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부르심에 응답한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에 순응하지 않고서는 구원의 길로 나아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20           연중 제 3주일   마르 1,14-20 (나) 기쁜 소식을 믿으시오


                                                        이계향 신부




오늘 주일 성서 말씀은 두 가지 사실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먼저 나환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자기 병을 고쳐주시기를 간청함으로 이에 응하시어 완치시켜 돌려보내시는 장면과, 다음은 백부장 한 사람이 예수님께 자기 부하의 병의 완치를 간청하는 장면과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두터운 믿음에 탄복하시어 이를 낫게 하셨다는 말씀이 줄거리입니다.




먼저 나환자의 경우를 묵상하기로 하십시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치료하기 위해서 즉 고백소에 나아갈 때는 진정한 겸손과 신뢰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저 나환자는 자기 병의 괴로움이나 불행이라든지 생명의 단축까지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진정으로 낫기를 원하여 겸손과 신뢰심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에 감동하신 예수님께서는 동정과 사랑을 베푸시어 당신 손으로 친히 만져주시고 고쳐주셨습니다. 구세주의 사랑과 동정과 능력에 굳게 신뢰하기로 하십시다.




옛날에는 나병은 불치병으로 알고 있었으며 가끔 나병을 죄의 모상으로 비유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의 영혼을 치료하지 않고 방치한다면 영혼은 부패 타락하여 흉측하게 될 것입니다. 죄인은 신성한 인간 사회에 섞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죽은 지체밖에는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죄악의 이 무서운 결과를 무서워하여야 하겠습니다. 끝으로 예수님께서 나환자를 돌려보내시면서 제관에게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나환자는 제관의 성명으로만 발표되기 마련이었습니다. 죄도 사제의 사죄성명으로 씻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고백의 성사를 세워주신 것을 감사하며 잘 준비하여 고백의 성사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다음은 백부장의 경우를 묵상하십시다. 우리는 백부장과 같이 박애심과 신앙심과 겸손으로 생활해야 하겠습니다. 특히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더욱 강조하는 바로서 슬프게도 우리 주위에는 성당 안에서만 교우, 신공할 때만 교우, 말로만의 교우가 많이 있습니다. 백부장은 자기 부하의 병치료를 위해서 사방으로 뛰어다녔습니다. 이 행동이 예수님을 감동시킨 것이라 하겠습니다. 높은 지휘에 있는 자로서 주인으로서 자기 부하의 불행을 그만큼 생각하기란 참으로 드문 일입니다. 우리는 저 백부장의 박애심을 본받아 형제의 불행을 동정하며 그들을 부조하기로 힘씁시다.




예수께서 다시금 감동하신 것은 백부장의 신앙심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군인들은 보통으로 방탕생활을 하였다고 합니다만 이 사람은 고급장교로서 신앙과 신심이 독실하여 자기 재산을 하느님 공경을 위하여 사용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 신앙을 가르치기 위하여 회당을 짓게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신심을 저 외교인에게 비하면서 반성해야 하겠습니다.


끝으로 예수님을 감동시킨 것은 백부장의 겸손이었습니다.




그는 감히 주님 앞에 나오기를 어려워하며 자기 집에 모실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예수님을 흠숭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도 백부장과 같이 예수님을 감동시켜 드릴 만한 일거리를 찾아서 행동합시다. 이렇게 함으로써 백부장과 같이 산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21          연중 제 3주일   마르 1,14-20 (나) 기쁜 소식을 믿으시오


                                                   신은근 신부




하느님의 모습을 보는 눈과 그분의 목소리를 구별하는 귀를 가지자.




창세기 19장에 보면 저주받은 도시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향락과 쾌락 속에서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던 소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들 역시도 노아시대의 홍수를 통해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시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동물적 본능의 절정에 이르렀던 그들은 소돔의 멸망에서 의인 롯과 그의 가족들을 구출하려왔던 천사들까지도 남색의 대상으로 내놓을 것을 요구할 만큼 타락해 있었습니다. 협박과 폭력까지 동원하여 뜻을 이루려 했던 그들의 소행을 읽어보면 당시 소돔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마침내 유황비가 쏟아져 이 향락의 도시는 불속에 가라앉고 맙니다. 롯과 그의 가족들은 천사의 인도를 받아 죽음의 도시에서 탈출합니다. 하느님은 이 의로운 사람 롯을 당신의 계획 안으로 부르신 겁니다. 그러나 새로운 땅으로 이주하여 가는 동안은 뒤를 돌아보거나 들판에 머물지 못할 것을 명령합니다. 쓸데없는 호기심이나 미련을 갖지 말라는 뜻으로 알아들어도 되겠지요, 불행하게도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고 맙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소금기둥이 되어 하느님의 이 부르심에서 탈락해 버립니다.




비슷한 말씀을 신약성서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말씀이나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는 말씀은 모두가 이 부르심에 대한 어떤 커다란 조건을 제시합니다.




오늘 복음에는 이 부르심에 응하는 네 사람의 어부에 대한 태도를 들을 수 있습니다. 갈릴레아 호숫가를 거닐고 있던 예수님은 고기잡이에 열중하고 있던 어부 네 사람을 만납니다. 미루어 보건데 그분은 가난에 찌들었지만 강직했을 그들을 만나시고 일상적 대화에서 출발하여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기쁜 소식을 설파하셨을 겁니다. 이윽고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라고 말합니다. 네 사람의 어부 곧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은 즉시 그물을 버리고 그분을 따릅니다. 자기들의 생의 수단이었던 그물을 선뜻 던져버리고 더욱이나 아버지와 동료들까지도 남겨둔채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그들의 태도는 확실히 후대의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이라고 해서 어찌 미련이나 갈등도 없었겠습니까. 인간적 관계와 연결도 있었을 겁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목도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 까닭에 이천년이 지난 오늘 날까지도 그들의 태도는 믿는이들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날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따르려는 사람들에겐 장애물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분의 모습을 찾아보려해도 눈 앞을 가로막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더욱이나 그분의 소리를 들으려해도 부르심에 답하려해도 장애물은 점점더 커지고 조직적으로 싸이고 있습니다. 아닌 말로 유황비라도 내려 이 모든 것들을 태워버렸으면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러한 장애물을 세우는데 제일 먼저 호응하는 것이 나 자신이 아닌가 하는 반성도 일어납니다. 나 자신 편해지고 싶고 나 자신이 이익을 얻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모습 앞에 눈을 감고 그리스도의 목소리에 귀를 틀어막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부르심의 소리는 속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핑계를 대고 구실을 찾고 미련을 가지고 본능과 결탁된 유혹에 더 귀기울이는게 아닐런지요. 그리스도는 항상 우리 앞에서 두드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언덕을 오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미련이 남아 세상일이 걱정되어 머뭇거리고 뒤돌아보고 부채질이나 훨훨하면서 마지못해 따라간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신자 여러분!


우리는 영원한 죽음의 멸망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상급의 언덕에 이르기까지는 아직도 좁고 험한 길을 걸어야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당신의 은총으로 우리를 돕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고집과 교만으로 죄악의 길을 따라간다면 그 옛날 롯의 아내처럼 우리도 소금기둥이 되는 하느님의 엄한 심판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분의 은총이 있을 때 그분의 길을 따르리라 다짐합시다.












22             연중 제3주일   마르1,14-20 (나) 버리고 떠나가기


                                                            김영진 신부




80년대 말 뉴욕에서 교포사목을 하고 있을 무렵, 브루클린의 한 서민 아파트에서 날마다 구걸을 하며 살던 할머니 한분이 별세하였다는 기사가 신문에 났다. 80세가 넘었던 이 할머니는 날마다 지하도 밑 사람들 왕래가 많은 곳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구걸을 하다가, 추위에 얼어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던 시 직원들에 의하면, 할머니의 침대 밑에서 1백57만불이나 되는 돈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 많은 돈을 두고, 할머니는 먹지도 못하고, 기름도 아끼다가 배고픔과 추위로 인해 숨을 거둔 것이다,




요즘처럼 과소비가 국민경제를 흔드는 모습을 보면 본받을 점도 있겠으나, 벌어들일 줄은 알면서 쓸 줄을 몰라 참혹한 종말을 자초한 것은 인간만이 저지를 수 있는 어리석음일 것이다. 겨울잠을 자는 다람쥐도 먹을 만큼만 구덩이에 모아들이는데, 유독 인간만은 한없는 욕망을 채우고 채우다 쓰러져 버리곤 한다. 인간이 마지막 가는 길에 얻어 입는 수의에는, 동전한 푼이라도 넣을 수 있는 주머니가 없고, 그 많던 재산도 재물도 명예도, 권세도 놓아야 하고, 손바닥만한 널빤지에 누여 떠나가야만 하는 것인데, 나누지 못하고 버리지 못하는, 그래서 결국 인간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한없는 욕망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부끄러운 고백이나, 나의 경우도 신부가 되어 해를 거듭할수록 버리지 못하고 늘어나는 것이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교만과 아집이요, 또 하나는 책과 옷이다. 신학생 때의 순수함과 겸손함은 사제의 경륜을 쌓으며 퇴색해 왔고, 옷이 없어 친구의 옷을 빌려 입고 외출했던 과거와 현재는 거짓말처럼 달라져 있다. 한번은 손님이 오셨는데, 어쩌다 내 방안을 들여다보며 “신부님은 옷이 많으시네요”라고 한마디 한 것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잊혀지지 않는다. 그 후 주섬주섬 옷가지들을 정리하면서 1년에 한번도 입지 않은 옷을 움켜쥐고 살았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하고 못나 보였는지 모른다.


 


살면 살수록 늘어나는 것들을 우르르 버릴 때, 그때 비로소 신부 흉내를 조금 낼 자격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버릴 줄 안다는 것은 그만큼 성숙했다는 지혜의 표시요, 은혜이며 선물이다.


떨어진 양말 한짝도 남 주기 아까워 들었다 놨다 하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버려야 영원한 삶을 쟁취할 수 있다는 말은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버릴 줄 알아야 한다는 이 허무맹랑한 소리가, 절망에서 희망을, 죽음에서 생명을, 슬픔에서 기쁨을 던져주는 은혜와 선물인 것이다.               




원숭이를 닮은 우리들




원숭이 잡는 법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작은 항아리 속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음식이나 장난감을 넣어두고 있으면, 원숭이가 그것을 꺼내려고 손을 안으로 들이밀어 물건을 움켜쥔다고 한다.


원숭이가 물건을 움켜쥐었을 때 사냥꾼이 달려가 원숭이를 잡는다고 하는데, 원숭이는 사냥꾼을 피해 달아나려 하면서도, 항아리 속의 물건을 움켜쥐고 놓치 않아 손을 빼내지 못하고 잡힌다고 한다. 항아리 속의 물건을 움켜쥐고 버리지 못하여 죽음을 맞게되는 원숭이를 바보 같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 원숭이와 같은 행동을 하는 이들이 어찌 나 하나 뿐이겠는가. 버릴 줄 안다는 것은 새로운 것에 대한 확신이요, 지혜며, 용기다.


또한 버릴 줄 안다는 것은 더 높은 곳으로의 도전이요, 희망이며 삶의 열매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요구하고, 예수님은 갈릴래아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말씀하신다. 어디에서부터 회개해야 되는가? 무엇을 회개해야 되는가? 우리의 회개는 버리지 못하고 떠나지 못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돈과 권력과 교만을, 이기심과 증오심을 버리고 떠날 줄 알아야 한다.


불신과 절망을, 슬픔과 좌절을, 위선과 독선을 버리고 떠날 줄 알아야 한다. 니느웨 사람들이 모든 것에서 떠나 베옷을 입고, 잿더미에 올라앉아 단식을 하며 하느님께 돌아섰듯이, 사람 낚는 어부 되도록 나를 따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아버지를 버리고 재산과 직업을 포기하고, 스승 예수님을 따라 나서듯이, 우리의 회개도 우리를 얽매고 있는 모든 것에서 버리고 떠날 때 가능한 것이다.            




버릴 줄 안다는 것은




어떤 유행가에서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 했던가. 나그네가 짐이 너무 많으면, 이 많은 것에 얽매여 떠나는 것이 어찌 두렵지 않겠으며, 떠난다 해도 그 한발한발이 얼마나 힘겹고 고통스런 길이겠는가! 하느님을 향하여, 진리와 사랑과 봉사의 삶을 향하여 훌쩍 떠날 수 있는 용기와 은혜를 구하자.




만인에게 존경받는 20세기의 성자 슈바이처는, 30세에 음악가로서 또한 철학과 신학 박사로서, 명예와 부귀가 보장된 젊은 엘리트였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끊임없이 밀려오던 인생에 대한 고민은, 그가 아프리카로 떠나야겠다는 결심에서부터 열매를 맺는다.


그는 이웃집 우편물이 잘못 배달돼 자기 집으로 온 것을 되돌려주기 위하여 이웃집으로 발길을 향하던 중, 우편을 속의 아프리카 관련 기사를 읽고, 다시 의학 공부를 하여 의학박사가 된 후, 아프리카로 떠났다. 그는 자기에게 보장된 모든 명예와 부귀영화를 버릴 줄 알았기에, 위험한 아프리카로 떠날 수 있었다, 우리도 버리고 떠날 수 있어야 한다. 교만과 아집, 위선과 독선에서 그리고 내가 가진 옷, 책, 재물, 명예에서‥‥












23        연중 제 3 주일   마르1,14-20 (나)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요나 3,1~5.10 (니느웨 사람들이 못된 행실을 버리고 돌아섰다)


제2독서 Ⅰ고린 7,29~31 (우리가 보는 이 세상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복 음 마르 1,14~20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긴 묵상과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드디어 제자들을 선발하십니다. 이제 대단원의 공생활이 본 궤도에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에 첫 강론을 들려주시는데 그 내용이 바로 오늘 복음의 주제입니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회개’




이것은 주님의 첫 설교의 주제이면서 동시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기도 합니다. ‘회개하고 믿어라.’ 그분 나라를 차지하는 데 있어서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세상 천지를 둘러보고 세상의 모든 현인들과 학자들을 모아 연구해 봐도 우리가 하느님께 갈 수 있는 오직 하나의 길은 ‘회개와 믿음’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회개를 항상 새로운 차원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1독서에 보면 요나가 이방인의 도시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외치자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단식을 하며 못된 행실에 서 돌아서게 됩니다. 이에 하느님께서 본래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시고 구원해 주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참 묘합니다.




같은 시대에 하느님의 백성이었던 유다는 예언자들이 아무리 회개를 외쳐도 듣지를 않았습니다. 막말로 아주 개판이었습니다. 그러나 믿지도 않는 이방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진실로 받아들여 구원의 은혜를 받습니다.




‘탕자의 비유'(루가 15,11~32)를 보면 그 역설적인 내용이 두드러지게 드러납니다. 도대체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거스른 일이 없이 머슴처럼 일만 죽으라고 했던 큰아들은 아버지가 들어오라고 해 도 아버지 집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사정을 해도 안 들어갑니다.




그런데 집안의 돈을 몽땅 가지고 가서 술과 노름과 여자로 다 탕진한 작은 아들은 대환영을 받으면서 아버지의 집에 들어갑니다. 묘합니다. 자기는 아들이라 불릴 자격도 없다고 하는데도 그는 착한 큰 아 들보다 더 풍성한 대접을 받는 듯이 보입니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오래된 본당에 가면 흔히 있는 일이지만 6.25 후에 구호물자로 재미를 보며 성당에서 열심하게 봉사했던 이들이 그후 구호물자가 끊기자 많은 이들이 성당에 발길을 끊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나 이제 나 성당에서 별 대접을 못 받던 자들이 꾸준하게 성당을 지키며 신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전자는 “나오라”해도 날 잡아 먹으라는 듯 이 안 나오며 후자는 “나오지 말라”고 해도 악착같이 나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모두가 다 깊이 떨어질 수 있고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하느님의 반대 세력으로 세상을 바보처럼 살 때도 있습니다. 그런 때는 누가 뭐라고 해도 귀에 들리지 않으며 아무리 좋은 것을 앞에 놔 줘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생이 그런 식으로 끝까지 일관한다면 그것 은 불행입니다. 비극입니다. 인생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닌데 그것을 뒤집어서 거꾸로 산다면 참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큰 성공을 했다 해도 자신을 진실하게 바라볼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더구나 죄인 아닌 인생이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자기 죄를 모르고 제 고집대로 걸어간다면 그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인생이 무엇에 묶여진 줄을 모르고 또 어디로 끌려가고 있는지를 모른다면 그가 아무리 열심히 믿었다 해도 그가 걸어가야 할 길이 얼마나 멀고 아득한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나를 따라오라시는 예수님 의 말씀에 그물을 버리고 따라갔고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를 떠나 서 주님을 따라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결단의 용기면서 동시에 묶여진 삶을 단절하는 위대한 은총의 변화였습니다. 회개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아무리 좋아도 그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면 그냥 내버리고 툭툭 털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아무 리 인정에 얽매였다 해도 그것이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 라면 단호하게 끊고 빈손으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은 우리가 다시 회개하는 때요 잘못된 것을 내던져 버리고 주님께로 돌아가는 시기입니다. 이제 안 돌아가면 영원히 못 돌아갈 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새해를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믿음으로써 가볍게 출발하도록 합시다. 잘못된 것 툭툭 털어 버리고 그리고 묶여 진 것은 확실하게 끊어 버려서 멀리 내던져 버리도록 합시다. 그러면 올 일년이 은총으로 환하게 열려질 것입니다.












24       연중 제3주일   마르 1,14-20 (나)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노라!


오늘 마르코 복음 1장 14-20절에는 두 가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요한 세례자가 체포되자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한 집약문과(14-15절), 열두 제자 가운데서 시몬과 안드레아 형제, 야고보와 요한 형제 등 네 어부를 발탁한 소명 사화(16-20절)입니다.




1. 갈릴래아 전도 시작(1,14-15)


요한 세례자는 주로 유다 지방 요르단 강변에서 활약했는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예수께서는 주로 갈릴래아 지방 겐네사렛 호수 주변에서 활약하셨습니다. 마르코 복음에 따르면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하신 말씀은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1,15)였습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라도 회개하고 복음을 믿기만 하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이는 하느님 통치의 보편성을 보여주는 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회개는 하느님과 이웃을 등진 인간이 하느님과 이웃에게로 돌아서는 방향전환을 뜻하며, 믿음은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는 기쁜 소식(복음)을 받아들이는 결단입니다.




2. 제자 발탁 이야기(1,16-20)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뽑으셨는데 먼저 시몬과 안드레아 형제, 야고보와 요한 형제, 이렇게 네 어부를 먼저 발탁하셨습니다. 이 이야기의 서술양식을 보면 상황묘사(16․19절), 소명(17․20ㄱ절), 추종(18․20ㄴ절)으로 짜여 있습니다. 그리고 내용면으로 보면 부름을 받은 이들의 심리적 갈등은 거론하지 않고 소명(부르심)과 추종(따름)의 골자만을 서술함으로써 이상적인 제자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네 어부처럼 모든 것을 떨쳐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제자들은 스승을 따라다니면서 그분의 말씀과 행동 그리고 인품을 익히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전하는 전도 활동에 참여하게 됩니다. 




3. 우리의 이해


15절에는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다스림, 하느님의 통치, 곧 하느님 자신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사랑이신 하느님(1요한 4,8.16)의 보살피심이요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섭리를 말합니다. 예수께서 선포하시고 알려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실존론적인 결단이 회개요 믿음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는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결단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촉구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뽑으셨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예수님을 믿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일깨워 줍니다.     


                                                                   서울대교구  홍보실








25             연중 제3주일   마르 1,14-20 (나) 사람 낚는 어부


김남조 시인




갈릴래아 호수는 푸르고 햇빛이 내리 비추어  아름다웠습니다. 거기에 그물을 던지던 어부 형제들을 보시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겠느냐. 그러면 나를 따라 오라”고 문득 말씀하신 분이 계십니다. 그들은 그 자리에 그물을 둔 채 즉시 그분을 따라 나섰습니다.


이 이야기는 동화처럼 단순하면서 ‘부르심과 응답’의 완벽한 전형(典型)을 이룹니다. 성서(마르 1, 18-19)에서 읽는 위의 구절은 여러 거룩한 사건의 기록들 중에서도 가히 최고라고 할 만합니다. 이 날의 어부인 시몬 베드로는 주님의 교회를 세울 반석으로 택함을 입었으며 끝에 이르러선 주님께의 열정과 겸손으로 스스로 청하여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람을 낚는 행적의 맨 처음은 주님이 베드로를 얻으신 일이니, 주님이 곧 사람을 낚는 어부이십니다. 어디에 있는 누구이든 주님이 원하시어 그 이마에 선택의 인(印)을 찍으시면 그는 예외 없이 “사로잡힌 자”가 되며 심지어는 피비린내 자욱한 순교시대에도 오직 예수님의 양떼일 따름이었습니다. 예술가들 중에서도 신앙과 예술 혼이 일치하여 단테, 파스칼, 헨델, 루오 등 불멸의 거인들이 세계사 속의 별자리를 이루었으며 뛰어난 학자들, 비범한 사제와 수도자들, 그리고 여러 선행자들이 모두 영혼 속에 주님 사랑의 맹렬한 불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도 성세성사를 통해 일차적으론 부르심과 응답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어망은 느슨한 것이어서 어느새 그물 밖에서 부유하며 주의 손길을 저버립니다. 선택엔 그 다음 단계가 또 있으므로 아무쪼록 결정적인 부르심을 듣기 위한 갈망과 목마름에 시달립니다. 심지어 중세의 수도자들 중에는 절벽에 뚫린 동굴에 한 사람씩만 기거하면서 그야말로 육체의 기름으로 영혼의 불심지를 밝히는 고행으로 신앙의 치열한 정진을 추구했습니다만 이러한 방법이 반드시 가장 좋은 기도의 길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람들 속에서 살고 있기에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서로를 낚아 함께 주님께로 가야 하고 이러한 우리를 주님이 어망 안에 거두어 주시므로 더 여럿의 사람, 되도록 모든 사람이 주님 안에서 구원받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배가 고플 때/ 당신은 인도주의 단체를 만들어/ 내 배고픔에 대해 토론해 주었소(중략)/ 내가 몸에 걸칠 옷 하나 없을 때/ 당신은 마음 속으로/ 내 외모에 대해 도덕적인 논쟁을 벌였소(중략).  


내가 집이 없을 때/ 당신은 사랑으로 가득한 신의 집에 머물라고/ 내게 충고를 했소/ 난 당신이 날 당신의 집에서 하룻밤 재워 주길 원했소.


내가 외로웠을 때/ 당신은 날 위해 기도하려고/ 내 곁을 떠났소/ 왜 내 곁에 있어 주지 않았소?/ 당신은 매우 경건하고/ 신과도 가까운 사이인 것 같소/ 하지만 난 아직도 배가 고프고/ 외롭고 춥고/ 아직도 고통받고 있소(생략)  -뉴욕 맨하탄의 흑인 거지(작자미상)-


주님, 저희도 서로를 진정히 먹여주고 덥혀 주게 됨으로써 모두 함께 주님의 낚으심을 다시금 입게 하소서.  


26            연중 제3주일   마르 1,14-20 (나) 따라 나서기, 곧


                                          김병희 신부




이야기 하나 – 어린이 미사 때 빵학년인 한 꼬맹이가 두 손을 모으고 좀처럼 신부에게 눈을 떼지 않는다. 이유는 미사 시간에 조용히 하면 은총표를 준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 꼬맹이는 저번 주에도, 이번 주에도 두 손을 모으고 정성스럽게 미사를 드렸다. 그리고 은총표를 가득 받았고, 은총시장 때 선물을 한아름 받아서 집 에 돌아갔다.




이야기 둘 – 장례미사 때이다. ꡒ신부님 살고 싶어요.ꡓ라고 목이 메인 목소리로 간신히 첫마디를 꺼냈던 한 여자 대학생이 결국은 떠났다. 그 친구는 떠나기 전에 오래 전부터 가슴속에 담아 두면서 용서하지 못했던 한 사람을 어렵게 용서했다. 그리고 하느님께 지난날의 자신의 모든 죄도 용서 청하면서 눈을 감았다.




이야기 셋 – 새벽미사 때이다. 날씨가 너무 추워 이불 속에서 시계만 보고 미사시간이 되기를 기다리다가 깜 박 잠이 들었다. 따르릉 – 전화벨 소리가 고요한 방안을 가른다. 그날 새벽미사는 늦게 시작되었다. 성당 안에 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손을 호호 불어 가면서 머리에 까치집을 지은 게으른 젊은 신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사는 평소보다 늦게 끝났다.




떠나기가 왜 이렇게도 힘이 드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주님은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ꡒ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ꡓ 이 부르심에 제자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따라나섰습니다. 그리고 좀 더 가시다가 두 명의 제자를 더 부르십니다.




그들도 곧 배를 버리고 따라나섰습니다. 미련 없이 떠나는 삶 이 그리워지는 시기입니다. 자꾸 뭔가를 채우고 싶고, 더 갖고 싶어지고, 아깝다는 생각에 쉬이 엉덩이를 뗄 수 없어집니다. 더 엉덩이가 무거워지기 전에 탈탈 털고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때론 냉정함과 단호함으로 나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도 필요하리라 생각됩니다. 이것저것 따지고 들면서 쓸데없는 말싸움으로 시간만 축내지 말고 미련 없이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나바위 피정의 집에는 이런 글귀가 걸려 있습니다.




ꡒ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가 가라하네.ꡓ












27    연중 제3주일   마르 1,14-20 (나) 사람은 사는 동안 끊임없이 변한다


                                                              김성배 신부




사람은 일생을 사는 동안 끊임없이 변한다. 태어나서 자라고 늙고 마침내 죽음으로 일생을 마칠 때까지 사람은 변화를 계속한다.


사람은 세상에서 시간으로 계산되는 일생을 산다. 시간은 변화를 계측하는 단위이다. 세상에서는 늘 시간이 흐르고 흐르는 시간과 함께 모든 것이 변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지 않는 영원에서는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세상에서는 시간이 흐르지만 영원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고 모든 시간이 동시에 끝없이 계속된다.


일정하게 계량할 수 있는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그 시간 만큼의 변화가 일어 난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사람이 세상에서 시간으로 계산되는 일생을 산다는 것온 사람이 일생이라는 기간 동안 변한디는 것을 뜻한다. 세상에서 사는 사람의 일생은 스스로 자기자신을 변화시켜 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죽음으로 인생을 마칠 때 사람은 일생 동안 스스로 이룩한 변화를 가지고 영원 속으로 들어 간다. 이때 일생 동안 자기를 어떻게 변화시켰느냐에 따라 사람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된다.


사람의 변화는 이미 가지고 있던 善(선)을 잃든지, 아직 가지고 있지않은 선을 얻음으로써 일어 난다. 사람이 선을 행할 때 새로운 선은 얻게 되고, 惡(악)을 행할 때 가지고 있던 선을 잃게 된다. 그러기에 사림이 선을 행하는 것은 더 선한 존재로 자기를 향상시키는 것이고 악을 행하는 것은 더 악한 존재로 자기를 추락시키는 것이다.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은 마음에서 나온다. 선한 마음에서는 선한행동이 나오고, 악한 마음에서는 악한 행동이 나온다. 사람의 마음을 선하게 하는 것은 사랑이다. 사람의 마음은 사랑으로 채워질수록 선해지고, 사랑이 결핍될수록 악해진다. 사람의 마음은 본래 사랑을 담기 위해 만들어진 그릇이다.


하느님께서는 위대한 사랑의 계획을 가지고 사람을 창조하셨다. 사람이 자기를 비움으로써 하느님께 더 완전히 자기를 바칠수록,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생명과 사랑으로 더 부유하게 사람을 채우신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사람은 더 거룩해지고 더 완전한 사랑이 된다. 사람이 하느님과 결합해 있는 동안은 사랑을 지닐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하느님을 떠나 자기 자신과 피조물을 더 사랑하게 되면 타락하게 된다. 이렇게 타락함으로써 하느님을 잃게 된 사람의 마음에는 사랑도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사랑을 상실한 사람의 마음은 교만과 탐욕으로 채워져서 거칠고 냉혹하게 된다. 이렇게 에덴동산에서 타락한 사람은 시간과 영원에서 사랑이신 하느님과 결합한다는 지극히 복된 운명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이 잃어버린 이 축복받은 운명을 되찾아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라는 두 마디로 요약하고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영원한 사랑의 나라이다. 이 나라는 이제까지 갈 수 없는 나라였지만 이제는 갈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교만과 탐욕을 버리고 회개하는 사람들이 이 나라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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