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사순 제 4주일 강론 모음


이것이 죄인으로 판결 받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사랑했다






오늘 전례의 입당송이 이 사순 제 4 주일을 마치 환희와 기쁨의 주일처럼 표현해주고 있지만, 실제로 독서들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 내용을 보면 행복에 의한 동요보다는 오히려 어렵고 힘든 결실을 촉구하는 엄숙함을 담고 있다. 사실, 이 주일의 중심 테마는 하느님의 심판에 관한 것이다. 크고 작은 인간사, 그리고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모든 인간사는 하느님의 심판에 달려 있으며, 그분은 그 모든 일을 인간들이 당신의 계획과 현존의 발자취를 이해하는 능력 여하에 따라 저울질 하시고 평가하신다. 그런데 하느님의 계획과 현존의 발자취를 이해


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신앙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을 이루는 하느님 말씀의 빛을 받음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세상에 빛이 왔다(요한 3, 19참조). 그 빛을 피해 숨는 것은 이미 심판을 받는 것, 즉 죽음의 판결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느님의 특사들을 조롱하였다


이러한 이야기의 형태는 비록 복음(3,14-21)에서 더 직접적으로 전개된다 할지라도 이미 제1 독서에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제1독서에서 역대기의 저자는 바빌론 유형과 추방으로써 극적으로 끝난 이스라엘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비판적 교훈서를 만들면서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 “그들의 선조들의 하느님 야훼께서는 당신의 백성과 당신께서 계실 그곳을 구원하실 뜻으로 특사들을 다시금 보내어 경고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느님의 특사들을 조롱하였다. 그의 말이면 무조건 비웃었다. 보내신 예언자들을 놀림감으로 삼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야훼로 하여금 돌이킬 수 없는 분노를 터뜨리시게 하고 말았다… 하느님의 성전을 불살랐고 예루살렘성을 허물었으며 궁궐들을 불살라버리고 거기에 있던 값진 것을 모조리 부수어버렸다”(2역대 36,15-16.19). 그러므로 성서 저자는 이스라엘과 관련된 역사적인 모든 사건을 통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이유를 유다 백성들이 예언자들의 권고를 듣지 않았을 뿐더러 그들의 하느님 야훼의 비탄에 찬 간절한 호소에도 냉담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렇지만 당신 계약에 충실하신 야훼께서는 고레스의 해방칙령(기원전538)을 통해 마지막 한 가닥의 희망을 보여주신다. 그 칙령으로 바빌론 유배가 끝난다 :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 가운데 있는 당신의 모든 백성과 함께하시기를 빈다.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돌아가라”(2역대 36,23).






한없이 자비스러우신 하느님


오늘 전례가 ‘환희’ 의 의미를 표현하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이 마지막 행위, 즉 고레스의 행방칙령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이로써 ‘환희의 주일’이라고 불리는 것이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 이‘환희의 주일’이라는 명칭은 오늘의 전례를 열어주는 ‘입당송’에서 비롯된 것이다:“예루살렘아, 즐거워하라. 그를 사랑하는 자 모두들 모여라. 슬픔에 잠겼던 너희, 즐거움에 넘치며, 뛰놀며 그 위로의 젖을 흠뻑 마셔라.” 제2독서인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사도 바울로의 편지에도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통보다는 해방의 행복한 결과에 더 주안점을 두면서 은근히 ‘기쁨’에로 초대한다 : “한없이 자비스러우신 하느님께서는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잘못을 저지르고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렇듯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셔서 하늘에서도 한자리에 앉게 하여주셨읍니다 ” (4-6절). 이와 같이 여기서 부활의 환희를 미리 보여주는 것은 사순절을 통해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표를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드렸던 것처럼…


이미 강조한 바와 같이 오늘의 요한복음은 무엇보다도 모든 인간들의 삶에 대한 심판의 주제를 엄숙하게 전개하고 있다. 그 심판은 예수께서 십자가상에 ‘높이 들리심’으로써 더 명백하게 드러난다. 모든 인간의 삶은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시는 하느님의 이 최상의 사랑에 의해 의로운 것과 의롭지 못한 것으로 뚜렷이 구분된다. 하느님 사랑의 선물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 삶의 척도로 삼는 사람은 공허한 존재에서 해방되어 이미 구원의 영역에서 사는 것이며 반대로 그 사랑에 선물에 마음에 문을 닫아버리는 사람은 그것을 자기 행동에 규범으로 삼을 능력이 없으므로 자신 안에만 머물러 있게 됨으로써 굳어진 마음과 영적 궁핍에 대해 이미 단죄를 받게 된다. 어째서 주위의 모든 것이 눈이 부실 정도로 밝게 빛나고 있을 때 어둠 속에 머물러 있고자 하는가?


오늘의 요한복음을 처음부터 차례로 분석해 보자. 처음 두 구절은 물론 예수와 니고데모와의 대화의 일부분이지만 그 대화 중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이라 하겠다 :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14-15). 앞서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3,3-13) 하늘(성령)로부터 ‘새로남’은 오로지 십자가에 ‘높이 들리신’ 예수를 바라볼 수 있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이 ‘높이 들리심’은 물리적인 의미에서 이해되지만 무엇보다도 특히 요한이 ‘높이 올리다’라는 개념에 부여하는 신학적 영적인 의미에서도 이해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높이 드리시는 이유는 16절에서 표현되고 있듯이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을 가장 탁월하게 계시하는 ‘징표’를 이 세상에 제시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높이 판양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고양(高揚)된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부활과 승천의 영광 중에 성자께 허락하실 보다 더 높은 ‘고양’의 증표와도 같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특히 그 사랑을 살아감으로써 고양된다. 이런 까닭에 그리스도교 신자의 ‘새로 남’은 오직 사랑의 차원에서만 가능하다. 예수께서 당신 수난이 임박했을때 “내가 이 세상을 떠나 높이 들리게 될 때에는 모든 사람을 이끌어 나에게 오게 할 것이다”(요한12,32)라고 선언하신 것은 당신 사랑의 매혹적인 힘을 확인시켜 줄 뿐만 아니라, 그를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사람들 앞에서 ‘높이 글리신’ 하느님 사랑의 ‘징표’가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 우리 각자의 근본적인 선택이 있다. 즉 우리 각자의 운명은 예수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의 사랑을 믿거나 아니면 거절하는데 달려 있다”(D. Mollat, Dodici meditazioni sul Vangelo di Gio-vanni, Ed., Paideia, Brescia 1966, p.42).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주셨다


이하 계속되는 오늘 복음의 다른 구절들은 대부분의 학자들의 의견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아니라, 요한복음사가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십자가에 높이 들리신다’는 사실을 두고 깊이 묵상한 바를 자신과 자기의 독자들을 위해서 주석한 것이라 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 ‘높이 들리심’은 단지 우리가 감정으로만 기억하고 찬미해야 할 사랑의 행위일 뿐인지, 아니면 매순간 우리의 생활을 자극하는 ‘심판’의 행위로서 우리 모두가 회피할 수 없는 하나의 현실인지 ? 이에 관해 복음사가는 다음과 같은 극적인 말들로써 모든 시대의 인간들이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그 지고의 계시 앞에서 취해야 할 태도에 관해 말해주고 있다 :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그를 믿는 사람은 죄인으로 판결받지 않으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죄인으로 판결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16-18절). 복음사가의 이러한 말들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말들이 아닌가 ! 더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모순된 말들이 아닌가 ! 오로지 구원을 위해서만 베풀어진 하느님의 그 무한한 사랑이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결국 결정적인 심판과 처벌이 된다니 ! “믿지 안는 사람은 이미 죄인으로 판결을 받았다.” 이 모순된 말들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겠는가 ? 이에 대한 설명은 하느님께서 십자가상에 높이 들리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선물의 위대성과 찬란함에서 찾을 수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성자를 주신다는 것은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이 세상에, 즉 우리를 위해 성자를 죽음에 붙이셨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여하튼, 하느님께서는 선과 악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애매모호한 실재인 우리 각자를 구원하시기 위해 어떤 것으로도 대치할 수 없는 독생성자를 희생 제물로 주시다. 즉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에 놓인 하느님의 저울이ㅣ 우리쪽으로 기울어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성자의 죽음과 우리의 생명이라는 것 앞에서 우리 인간을 택하셨다. 바로 이 점이 복음사가를 경탄케 하고 당황하게 만드는 것이다. 요한복음사가는 자기의 첫째 편지에서도 하느님을 ‘사랑’으로 정의하는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 해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셔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읍니다” (1요한 4,9-10).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사람들에 대한 심판은 바로 이 사랑의 위해함에서 기인된다.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거부하고 빛을 거절하는 것뿐 아니라,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생명까지도 거부함을 의미한다. 여기서 분명한 사실은 그 심판을 선포하는 것은 바로 인간자신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빛을 외면할 때에는 자기 자신이 장님의 상태가 된 것에 대해 그 빛을 탓할 수는 없다. 복음사가는 이러한 개념에 의거하여 자기의 생각을 보다 더 명백히 제시한다 :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이것이 벌써 죄인으로 판결 받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과연 악한 일을 일삼는 자는 누구나 자기 죄상이 드러날까봐 빛을 미워하고 멀리한다. 그러나 지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그가 한일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한 일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19-21절).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마음 깊숙이에 자리잡고 있는 어두움, 즉 빛이 우리의 이중성, 계산성, 비열함 등을 노출시키기 때문에 갖는 그 빛에 대한 증오심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행실이 드러날까봐 겁이 나서 빛을 멀리 하는 것, 즉 ‘심판’을 피하기 위해 빛을 멀리하는 것 그 자체가 오히려 더무서운 ‘심판’의 대상이 된다. 왜냐하면 빛을 멀리한다는 것은 어둠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을 만큼 그 어둠속에 파묻혀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 예수께서는 마태오복음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해주신다 : “그러니 만일 네 마음의 빛이 빛이 아니라 어둠이라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마태 6, 23)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드러난다. 즉 인간이 항상 단죄를 받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십자가상에 ‘높이 들리신’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사랑(1요한 4,16참조)을 믿지 않을 뿐더러 더 나아가 예리한 칼날처럼 그의 마음을 파고드는 하느님의 빛이 그를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해 그를 단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집과 오만불손한 자만으로부터 그를 구원하려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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