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는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예언자는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예수님께서는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메시지는 환영하였지만 메시지를 전하는 예수님은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지만 정말로 어두웠습니다. 기뻐해야 하고, 자랑스러워해야 하는데 동네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상대방을 깎아 내린다고 해서 내가 올라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상대방을 높여주면 내가 더 올라가지 않겠습니까? 동네 사람들의 모습 안에서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1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치유의 손길을 베푸시고, 율법학자들이나 백성의 지도자들에게는 배척을 받으셨던 예수님. 예수님을 받아들이던 사람들이 있었고, 그래서 구원 받은 사람들이 있었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반대하던 사람들. 그래서 구원에서 멀어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늘 고향으로 가시는데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고향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어머니를 보기 위해서 고향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제자들과 함께 고향을 방문하셨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일까요? 그래서 구원에로 초대받을까요? 아니면 받아들이지 못해서 그렇게 어둠 속으로 들어갈까요?




2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안식일 집회는 기도와 성서 낭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율법서(모세오경)는 언제나 낭독되었으나 예언서의 구절을 선택하는 일은 낭독자의 소관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누구나 낭독할 권리가 있었고, 해설을 덧붙이거나 다른 훈계의 말을 할 권리도 있었습니다. 이 권리를 행사하기 원한다는 표시로 예수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이것이 성서 낭독을 포함한 그 의식이 시작되는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례 규정을 완벽하게 지키셨습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경건하고 공손하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해설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놀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① 어디서 저런 지혜를 얻었을까? ② 어디서 저런 기적을 행할 수 있는 힘을 얻었을까?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마술이 다른 나라에서는 다 성공하는데 우리 나라에서 만큼은 성공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예술”로서 받아들이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저 사람이 어떻게 사기치나 보자!”라고 기술을 파악하려고 한답니다.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가르치심과 능력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기뻐하고 실천하면 될 것이거늘, 그들은 어디에서 오는지를 알려고 합니다.




3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 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동네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와 닿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은 놀랐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 속 깊이까지 감명을 받고 회개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스스로 위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상처받은 체면을 만회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깎아 내리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인성이 걸림돌이었습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예수님의 말씀은 도전이었고 문제 거리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메시지는 환영하였지만 그 메시지를 가져온 구세주는 배척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다름없었고, 또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구세주라는 주장을 뒷받침할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고 하는 사람들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결코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올바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도 내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형제자매들을 비하하거나 무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내 죄를 감추기 위해 남을 깎아 내리거나 모함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자신이 잘못을 하면 먼저 아내에게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러면 아내는 기가 죽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이었습니다. 그날도 그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먼저 아내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런데 그날 아내의 반응이 이상했습니다. 식탁위에 녹음기를 올려놓더니 시작 버튼을 누르고 나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녹음기에서는 자신이 잘못한 것이 담겨있는 자신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달려가 아내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노라고…, 하지만 아내는 그에게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떠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


내 허물을 감추기 위해서 남에게 화를 내거나 모함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합니다.




좌우지간 예수님의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을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믿지 않았기에 별로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약속된 구세주이시라는 표징을 원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예수님의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그들이 규정하는 바대로 입증해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당신이 정하신 것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동의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에게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고향 사람들.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자신들이 알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것. 별것 아니라는 것을 인정했으면 좋겠습니다. 상대방에 대해서 다 알고 있다고 생각되지만 사실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선입견을 가지고 상대방을 대하지 말고, 첫인상을 가지고 상대방을 대하지 말고 그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그를 대할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고향 사람들은 예언자의 어린 시절을 지켜보았고, 친척과 집안 사람들도 지켜보았으나, 그들 눈에 보여지는 것과 그들이 보고자 하는 것만 바라보기에 진면목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다릅니다. 어머니는 보여 지지 않는 것도 보고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촌 형제들도 예수님의 진면목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것을 보고 “공적으로 드러내서 활동하시기를 권고”했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모님과 요셉 성인 외에는 그 누구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다른 이들은 그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었고, 그렇게 판단하려고 했습니다.




5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설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바울로와 바르나바도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당신들에게 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들은 그것을 거부하고 그 영원한 생명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있으니 우리는 당신들을 떠나서 이방인들에게로 갑니다.”(사도13,46).


 그리고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상대방을 깎아 내리려 하지 말고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 병을 고쳐주셨다고 전해주고 있는데, 그래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몇 명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기적이 따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억지로 기적을 일으키지는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시고, 침해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청하는 모든 이들의 청을 예수님께서는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나 또한 그것을 명심하고 예수님께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매달려야 하겠습니다.




6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적어도 자신들이 눈으로 본 것이나, 귀로 들은 것을 믿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을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만났을 때 나는 어떻습니까? 그분께 마음을 활짝 열던지, 걸림돌에 걸려서 닫던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나자렛 사람들은 걸림돌에 걸려서 마음의 문을 닫아 버렸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걸려 넘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걸림돌 때문에 넘어진 것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정작 내 마음은 예수님께로 향하고 있는가를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닫힌 마음은 오늘도 나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3.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나자렛 사람들(예수님의 동네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2. 내가 나자렛 사람들이었다면 예수님을 받아들였을까요? 예수님을 믿었을까요? 그리고 지금 나는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자렛 사람들처럼 그렇게 불신을 가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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