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연중 30주간 월요일
루카 13,10-17
찬미예수님!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병에 걸려서 열 여덟 해 동안 허리가 굽어 있었습니다. 아무리 얼굴에 화장을 하고, 좋은 옷을 입어도 그녀의 얼굴은 땅으로 향하였고, 그녀의 등은 하늘을 향했으니 누구 하나 그녀를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여인이 오늘 회당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보시고 가까이 부르시어,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시고, 그 여인에게 손을 얹으셨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측은한 마음이 드셨던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치유해 주십니다. 말씀 한 마디로 치유하시자 그녀는 당장 허리를 펴고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런데 회당장은 예수님의 행동을 못마땅해 합니다. 율법은 토요일을 거룩한 날로 삼고, 그 날에는 일을 하지 말라고 금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고치시려고 안수를 하셨는데 그것조차 율법에는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율법학자들도 안식일에 / 급박한 경우에 의사를 부르지 못하게 금한 것은 아니었으나, 만성병의 치료는 금하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에는 “세우는 일”도 금하고 있었는데,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율법학자들은 부러진 뼈의 치료도 “세우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회당장은 분개하였지만 예수님께 말씀드렸다가 반박을 당할까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직접 예수님을 비난하지 못하고 군중을 통하여 비난을 하려고/ 군중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 허리 굽은 여인이 자신의 딸이었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문제가 아니니 방관하고, 원칙만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안식일에 해야 될 일과 하지 말아야 될 일. 분명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하고,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오늘 회당장은 안식일을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회당장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주일의 의미를 살리며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회당장이 그렇게 원칙을 이야기 하고, 열여덟 해 동안이나 고통 받았던 여인의 고통은 외면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그들은 물질적인 손해가 문제가 될 때에는 안식일 규정을 범하고도 태연하였습니다. 안식일이라고 해서 소와 나귀를 굶기지는 않았습니다. 소와 나귀에게 풀을 뜯게 하고 물을 먹일 수 있다면 / 그보다 헤아릴 수 없이 중요한 하느님의 자녀의 치유는 말할 나위가 없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허락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위선자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꼬집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사람보다 짐승을 더 귀하게 여기면 안 됩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 보다 내가 가진 동물들을 더 귀하게 여기면 안 됩니다. 지금 회당장에게는 이 여인보다는 자신의 소와 나귀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그 무엇보다도 귀하게 창조되었습니다. 내가 소중한 존재인 것 처럼, 다른 이들도 소중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고통을 겪고 있는 한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연민을 이해하지 못하는 회당장과 그런 부류의 사람들. 회당장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서 내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바라본다면 환자들을 방문하고 어려운 이웃을 방문하는 것. 이것 또한 오늘 예수님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아픈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다가가서 기도해주고, 위로해 주는 사람들.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따스한 손길을 내미는 이들의 모습. 이들의 모습 또한 허리가 굽은 여인을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①주일날 해야 되는 일과 하지 말아야 되는 일에 대해서 묵상해 봅시다. ② 그리고 허리 굽은 여인의 마음이 되어 치유되었을 때의 기쁨을 생각해 보고, 내 아픔을 주님께 보여드리고 치유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 안에서 기쁨과 위안을 얻는 그런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연중 30주간 화요일
루카 13,18-21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해 주고 싶으셨겠지만 이해할 수 없는 군중들이었기에 하느님의 나라를 비유를 통해서 설명을 해 주십니다.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설명해 주십니다.
19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겨자씨는 아주 작습니다. 그래서 율법학자들도 작은 것을 대표하는 것으로 겨자씨를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씨는 3-4미터의 나무로 자랍니다. 즉 처음에는 보잘 것 없이 작은 것이지만 그 안에 가지고 있는 힘으로 차차 크게 자라나 새들도 쉬려고 그 나무를 찾아올 정도로 커집니다. 하느님의 나라의 시초는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것이지만, 후에는 그렇게 커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비유는 복음의 놀라운 힘을 보여 줍니다. 그렇게 작은 것이라도 그 얼마나 큰 것이 되는가를.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은 100명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개념은 바로 성장이라는 개념입니다.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듯 하느님의 나라도 그렇게 지금은 작아 보이지만 그 나라는 확장되고 발전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그렇게 계획하셨고, 그렇게 엄청난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보잘 것 없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것이 보잘 것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 입니다. 지금 보기에는 보잘 것 없어 보일 수 있지만 그 안에 감추어진 잠재력은 나보다 수십 배 더 커나 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줘야 합니다.
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보잘 것 없는 신앙인지만 내가 노력하고 하느님께서 끌어 주신다면 나는 커다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작은 것 하나 하나를 실천해 나갈 때 어느 순간 커다란 그 무엇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21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소아시아에서 빵을 만드는 일은 여자가 맡은 일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가족을 위해 만들어야 할 빵은 서 말입니다. 누룩은 한 줌 정도의 적은 양으로도 많은 양의 밀가루 반죽을 부풀립니다. 미세하고 알아보기 힘든 시작이 마지막의 엄청나게 큰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교는 밀가루에 섞여져 있는 누룩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은근히 숨겨진, 그러나 활발한 전파력을 가진 하느님의 힘인 것입니다. 이 힘은 점차로 퍼져 가, 모든 것을 변화 시킵니다.
밀가루가 발효하여 향기를 발하게 되듯이 복음에 따라서 변화된 전 세계가 창조주 하느님께 봉헌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업은 마치 누룩이 그러하듯이 말없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나도 그렇게 누룩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그 공동체를 성화 시키고, 하느님 백성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가 안티오키아 공동체를 그리스도인 공동체로 만들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내 가정, 내가 속한 단체, 직장 등을 하느님 보시기 좋은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나는 누룩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선교 활동과 함께 밝아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시작하셨고 또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은 그 나라가 도래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유 기적과 마귀를 쫓아내신 기적들은 하느님 나라의 여명을 알리는 수많은 표징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하느님의 나라가 여기에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식으로 오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의 지혜를 받은 사람들만이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를 알게 되는 유일한 길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의 눈에 의해서 볼 수 없는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실재합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바로 우리 모두를 통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작은 누룩이 되어 밀가루를 부풀리는 역할을 할 때 하느님의 나라는 커져 나갈 것입니다. 우리가 작은 겨자씨가 되어 땅에서 썩을 때 하느님의 나라는 커져나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겨자씨와 누룩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1. 누룩이 된다는 것은 주변에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누룩이 밀가루 안에 들어가 변화를 시키는 것처럼 나 또한 주님의 누룩으로서 동료들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가 있습니다. 종교적, 도덕적, 사회적 활동들에 있어서 나의 행동이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어떻게 영향을 미쳐야 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2. 그리고 비록 내가 지금은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느님께서 내 안에 담아주신 엄청난 힘이 있다는 것을 굳게 믿으며,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말씀 안에서 기쁨과 위안을 얻는 그런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연중 30주간 수요일: 모든 성인 대축일
마태오 5,1-12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모든 성인 대축일’은 8세기에 켈트 지방에서 지내기 시작하였습니다. 11월 첫날, 위령성월 첫날인 오늘,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을 넘어 새로운 삶을 바라보며 살아가도록 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 줍니다. 또한 지상에 있는 우리와 천상에 있는 모든 성인이 연대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려고 합니다.
성인들이 달릴 길을 다 달려 이제 승리의 월계관을 쓰고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복을 누리고 있는 것 처럼, 지상에서 순례를 하고 있는 우리도 그 기쁨을 미리 맛볼 수 있도록 참된 행복에 대해서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바치는 칭송과 찬양 그리고 오늘 지내고 있는 이 축일 자체마저
성인들께는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드님의 진실한 약속에 따라 하늘의 아버지에 의해 영광에로 올림 받은 이들에게
우리가 바치는 지상적 영예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들의 영광을 널리 전한다고 해서 그들에게 보탬 되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성인들은 우리가 바치는 영예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공경심으로 그들에게 바칠 것이란 조금도 없습니다.
그분들을 기억하며 존경심을 바치는 것은 우리 편의 유익이지 그분들의 유익이 아닙니다.
내 느낌을 솔직히 말한다면 내가 그들을 기억할 때 마음속에 열렬한 욕망으로 불타 오름을 느낍니다.
성인들은 우리의 든든한 후견인입니다. 그분들의 뒤를 따라가는 우리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들이십니다. 지금 하느님 곁에서 영복을 누리고 계신 성인들은 나의 신앙생활의 목표가 되고, 내게 필요한 은총을 성인들께 전구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인들께 사랑을 드리지 않을 수 없으며, 성인들을 공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성인들께 도움을 청하면 성인들께서는 그것을 하느님께 말씀드려 줄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전구”라고 합니다.
전구는 성인을 통해 우리가 바라는 바를 간접적으로 하느님께 전달하는 기도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성모님이나 성인들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전구는 희망적인 전구와 속죄적인 전구가 있습니다.
희망적인 전구란 성인들께 우리가 바라는 바를 하느님께 전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말하고, 속죄적인 전구는 연옥의 영혼이나 이 세상의 다른 사람들을 위해 대신 기도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전구는 초기 교회시대로부터 전승되어 내려온 것으로 초대 교회에서는 신자들이 서로를 위하여 기도와 단식을 하였고 2, 3세기에는 배교자(背敎者)가 다시 교회로 돌아오도록 순교자를 통하여 전구하였습니다. 이 전구를 통하여 우리와 성인들이 연결되고 우리와 예수님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성인들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 될 수 있는 자리가 바로 성체성사 안에서 입니다. 성체성사는 성인들과 통공을 이루는 탁원한 자리입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성인들을 “주님의 넘치는 사랑으로 거룩하게” 하신 바로 그 자리이며, “현세의 나그네 식탁에서 천상 고향의 잔치에 가게”하여 달라고 겸손하게 하느님께 청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성인들은 성체를 받아 모시며 열정이 타 올라 하느님께 나아가려고 노력했습니다.
예수님의 성체를 모신 성인들은 가난한 사람들, 미천한 사람들, 겸손한 사람들, 옳은 일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이었지만 오로지 하느님만을 향하신 분들이었기에 결국 참된 행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참된 행복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계시며, 나 또한 그렇게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그러므로 모든 성인들의 축제를 지내며 참된 행복에로 나아갈 수 있도록, 참된 행복자가 될 수 있도록 자극을 받고 노력하는 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인들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영광에 함께 참여하도록 전구해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예수님을 본받아 모욕을 기쁨으로 받으시고, 십자가를 기꺼이 지셨는데, 세상의 영광보다는 가시관과 멸시를 받으셨는데 내가 세상의 기쁨과 영광과 영예를 탐해서야 되겠습니까?
모든 성인 대축일을 지내는 오늘, 성인들이 어떻게 사셨는지를 기억해 보면서 내가 성인들과 같은 영광을 바란다면 성인들을 닮아야 된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성인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자네 그렇게 살아서 하느님 나라에 가겠나?
연중 30주간 목요일 : 위령의 날
세상을 떠난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안식을 얻게 하소서.
먼저 위령의 날을 맞이하여 오늘 묘지를 찾아 미사에 참례하실 형제 자매님들께 주님의 큰 축복이 있길 빕니다. 오늘 묘지에 가서 미사를 봉헌하시면서 우리보다 먼저 가신 신앙인들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봤으면 좋겠습니다./ 과연 먼저 가신 신앙인들은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싶어 하실까?/ 그곳에 누워 계신 분들 중에는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분도 계실 것이고, / 연옥에서 고통을 받으면서 나의 기도를 바라는 분도 계실 것이고,
끝없는 고통 속에서 절규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내가 지금 죽으면 어떻게 될까? 나는 과연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나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한 형제가 죽어서 하느님 앞에 섰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자네는 할 말이 있는가?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하느님 제가 이렇게 일찍 당신 앞에 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제가 언젠가는 당신 앞에 나아올 줄 알고 있었지만 그 때가 먼 훗날의 일로만 생각을 했습니다. 묘지를 찾고, 죽은 이들을 위해서 연도를 바쳤지만 / 저의 일로는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또 말씀하셨습니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내 것을 나누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미래에 대한 계획이 세워지니 욕심이 앞섰고/ 불편한 사람들과 화해를 하고 싶었지만 교만이 앞섰습니다./ 당신 나라에 올 때 가지고 올 수 없는 것들에 너무도 집착을 했고 /제 건강을 챙기는 데만 연연했습니다.
헌금이나 교무금, 성전건립기금을 내는 것을 아까워했고, / 성당에서는 누가 대우해 주는 것만을 바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또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내가 너에게 1년이라는 시간을 더 준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러자 그는 대답했습니다. / 나누면서 살겠습니다. 봉사하면서 살겠습니다. 성당 짓는데 제 재산의 절반을 봉헌하겠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해 주마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하느님께 감사드렸습니다.
……
그런데 이 사람이 깨어보니 꿈이었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이 사람은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그는 아침 일찍 대학 병원에 건강검진을 신청했습니다. / 그리고 비싼 보약들을 사서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너무 많이 먹어서 탈이 나서 죽었다는 그런 ~ 애틋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 그런데 그 어리석은 사람이 바로 나 라는 것을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 그리고 지금 우리 곁에 누워 계신 분들이 말씀하시는 것이 그것일 수 있습니다.
자네 그렇게 살아서 하느님 나라에 가겠나?
하느님 나라에서 영복을 누릴 의로운 영혼은 어떤 사람이고 어리석은 영혼은 어떤 사람입니까?
1. 의로운 영혼은 살아가면서 주어지는 시련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극복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사람들입니다. / 어리석은 영혼들은 그런 의로운 사람들을 비웃는 사람들입니다./ 성당 다니면 복을 받아야지 왜 시련을 받느냐면서 조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도가니 속에서 금을 시험하듯이/ 의로운 영혼들을 시험하시는 것을 모릅니다. / 그러기에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2. 의로운 영혼은 주님만을 의지하고/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분별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믿고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 하지만 어리석은 영혼은 세상의 재물을 믿고 / 천년만년 살 것처럼 그렇게 교만하게 살다가/ 준비도 없이 죽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가 세상에 살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 자신에게 편한 것만이 옳다고 여기고,/ 자신의 기분이 나쁘면 옳지 않은 것으로 단정한 사람들입니다.
3. 의로운 영혼은 “모진 고생을 하면서도 세상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변하지 않는 하느님께 마음을 두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은 세상이 주는 위로에 마음을 두는 사람입니다. / 그래서 자신에게 약이 되는 쓴 소리를 할 경우에는 그 사람이 누구더라도 등을 돌리고야 마는 사람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그렇게 사랑을 주시는데 내가 거부해서야 되겠습니까? 은총과 자비가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그저 “예”하고 응답하고 그분께 마음을 돌리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께로 향합시다. 세상의 것만을 추구하지 말고 영원한 것을 추구합시다.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함께 노력합시다.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 줍시다. 그리하여 나 또한 의인들의 영혼처럼 하늘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영광에 참여합시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29-30)
수종병자를 치유하시는 예수님
연중 30주간 금요일
루카 14,1-6
예수님께서 오늘/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잔치를 벌이는 관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평일에는 식사를 두 번 하였지만 안식일에는 세 번 하였습니다. 회당에서 예배가 끝난 후에 먹는 점심 식사가 가장 잘 차려진 식사였습니다.
“축제일에 백성들은 먹고 마시든지 아니면 앉아서 공부를 해야 한다.”는 규정에 따라서 축제를 함께 지내기 위해서 손님들이 초대되었고, 그들은 극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고아들과 이방인들에게도 친절을 베풀어야 했으며, 그들의 허기를 채워 주어야 했습니다.
회당의 종교 의식에는 유명한 율법교사들을 초청하여 강연을 듣고 점심 식사에 초대하는 것이 관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초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참으로 멋지신 분이십니다.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교만에 대해서 단호한 태도를 취하시고, 그들을 비난하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초대하면 기꺼이 응해 주셨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님을 모셔다 놓고 자신들의 입장을 강조하고, 꼬투리 잡으려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씀이 참 와 닿습니다.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처럼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고 전해주지 않습니다. 그렇게 바리사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분 앞에 수종을 앓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수종병은 부종이라고도 하는데 보통 몸이 붓습니다. 가장 흔한 것은 우리 몸이 피곤할 때 붓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환자는 바리사이들을 두려워하여 치유를 청할 용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는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었습니다. 그는 집 주인의 초대를 받고 들어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 상황을 상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율법교사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병이라는 것이 부도덕한 생활에 대한 벌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그런 사람이 그들 앞에 나타났으니…,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과 그 병자에게로 쏠렸을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병이 들어 사경을 헤매는 사람이 있을 때에는 안식을 규정을 거스르게 된다 할지라도 그 병자를 도와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급박한 경우가 아닌 경우, 즉시 죽음에까지 이르는 병이 아닐 경우에는 안식일이 지날 대까지 그 병자를 돌볼 수 없었습니다. 수종병에 걸린 이 사람의 경우는 그다지 생명이 위험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청중들로 하여금 율법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할 수 있도록 질문을 던지십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그런데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은 아무말 하지 않고 잠자코 있습니다.
생명의 귀중함을 알고, 병자의 고통을 생각해 본다면 당연히 고쳐 주어야 한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종병자의 손을 잡고 병을 고쳐서 돌려 보내십니다.
도움을 청하는 이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 예수님은 정말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무든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결정타를 맞게 됩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백성에 대한 사랑이 없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목자이지만, 그래서 백성들을 잘 이끌어야 하지만 수종병자의 모습을 바라보고 그의 고통을 생각하기 보다는 부도덕한 생활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팔레스티나의 우물은 둘레를 높게 둘러싸지 않고 단지 돌로 덮어 두었기 때문에 우물에 빠지는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일상생활에 흔히 있는 실례를 들어 설명을 하십니다. 그들은 어린이나 짐승이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이라도 망설이지 않고 구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수종병자도 당연히 고쳐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아무 대꾸도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예수님께서 읽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목숨보다는 짐승을 더 귀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깨달았을까요?
그래서 “아! 지금부터는 백성의 지도자로서 백성들을 사랑으로 대해주어야 하겠다!”고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쿰란에서 발견된 다마스코 문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안식일에 동물이 물구덩이나 웅덩이에 빠졌을 때에는 끌어내어서는 안 된다.” 율법교사들 사이에 알려진 두 가지 견해 중 더 엄격한 입장에 따르면, 그 동물에게는 안식일에 죽지 않도록 먹을 것만 줄 수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좀더 너그러운 입장에 따르면, 그 동물을 직접 끌어낼 수는 없지만 천을 물린다거나 바닥을 메워 줌으로써 스스로 나오게 할 수는 있었습니다. 웃겨도 한참 웃깁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제한이 없듯이, 그 법은 사랑에 제한을 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당신의 신적 사랑의 나라입니다. 안식일은 인간을 위한 것입니다.
안식일 휴식은 가족과 집안 식구들과 심지어는 그 집의 가축들까지도 고려하는 인도주의적이고 사회적인 기초에 근거해 있습니다. 주인이 쉬어야 종들도 쉬고, 종들이 쉬어야 가축들도 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근본 의미를 간과하고 이제 남은 것은 형식밖에 없으니 정말 답답한 노릇입니다.
오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혹시 내가 가진 것들 중에서 사람의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내적인 것보다는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보여 지는 것에만 신경을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는 어떤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까? 내적인 것입니까? 아니면 보여 지는 외적인 것입니까?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예수님처럼 생각하는지,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처럼 생각하는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말씀 안에서 기쁨과 위안을 얻는 그런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끝자리에 앉아라
연중 30주간 토요일
루카 14,1.7-11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가는 말이 거칠어야 오는 말이 곱다고 합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반말을 해야 내 권위가 세워지는 것도 아니고, 말을 할 때 담배를 피우거나,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말해야만이 권위가 서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필요할 때도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겸손한 사람을 겸손하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은 만만하니까 내가 함부로 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주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좀더 겸손해 졌으면 좋겠고, 겸손한 사람들을 인정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그런데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보신 것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에 정통해 있었고, 그들의 집에서 열리는 잔치 자리에서는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지식에 관한 대화가 곁들여졌습니다.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는 것은 당연할 것이고 자신의 지식을 내세우고 싶은 마음도 컸을 것입니다.
고대사회에서는 나이가 아니라 위엄이나 직위에 따라 손님을 앉히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손님들은 각자 자신이 내세우는 서열에 따라 자리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윗자리에 앉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아니 그 만큼 교만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손님들이 저마다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을 보시고 식탁 자리에 관한 규칙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8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9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아마도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높은 사람 앞에서 내려가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는 ‘이리 올라오십시오.’하는 말을 듣는 편이 낫다는 것입니다(잠언25,6-7 참조).
그와 유사하게 율법학자들에게도 신중함에 관한 규칙이 있었습니다. “네 자리보다 두세 자리 아래 앉아서 누군가가 네게 ‘이리 올라오십시오!’ 하고 말할 때까지 기다려라. 이것이 ‘내려가라, 저 아래로 내려가라!’ 하는 말을 듣는 것보다 낫다.”
율법학자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서, 낭패를 당하게 되는 경우를 막기 위한 규칙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 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식탁 자리에 관한 규칙”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한 가지 진리를 표현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는 사람은 낮아져야 합니다. 자신을 낮추고, 의로운 체하는 그릇된 모든 주장을 피해야 합니다.
자신을 낮춤은 하느님 나라에 받아들여지는 첫 번째 조건입니다. 성전에서의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를 떠 올렸으면 좋겠습니다. 누가 더 의로운 사람으로 하느님께 인정되었습니까? 교만한 바리사이입니까? 죄인이지만 자신의 죄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세리였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인정할 줄 아는 이를 너그럽게 보아 주시고 높여 주십니다.
11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겸손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간에도 누가 높은지 서로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높여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가끔 냉담하시는 분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본당 신부님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서라고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 남편을 좀 어떻게 해 주세요. 전에는 참 열심히 다니시고 봉사도 하셨는데 지금은 신부님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성당에 안다니고 있습니다. 전화 한번만 해 주시면 나올텐데…신부님! 부탁드립니다.”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그에게 전화를 해야 합니다. “형제님! 얼굴 뵙기가 왜 그리 힘듭니까? 성당에 나오세요…”하지만 그가 그렇게 성당에 나왔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를 나오게 해서 바꿔놔야 하겠지요. 정말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낮추는 사람으로…
또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내가 사회에서 활동도 열심히 하고, 재력도 있고, 명예도 있는데, 내가 성당에 나오면 그 지위에 맞는 대접을 해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물론 웃음밖에 안 나오는 말입니다. 성당에서 존경받기 위해서는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것이지요. 열심히 봉사하는 것이지요. 그래야만이 존경받을 수 있고, 그래야만이 다른 이들이 수고한다고 격려해 주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결코 아니라는 것.
내가 지금 대단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사실은 그것이 별것 아니라는 것.
그것만 기억한다면 좀더 겸손해지지 않을까요?
말씀 안에서 기쁨과 위안을 얻는 그런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