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대림 제 1주일 강론 모음

 

대림 제1주일




23. 홍금표 신부(다)/ 43          24. 김정진 신부(다)/ 45


25. 조순창 신부(다)/ 47          26. 서경윤 신부(다)/ 49


27. 강영구 신부(다)/ 51          28. 교구주보(다)/ 54


29. 장영희(마리아)(다)/ 55      30. 신은근 신부(다)/ 56


31. 강길웅 신부(다)/ 58          32. 하늘을 깨고(다)/ 60


33. 만사형통(다)/ 62              34. 유영봉 신부(다)/ 64


35. 도올과 논어/ 66




23.           대림 제1주일 <루가 21,25-28/34-36> (다) 기다림과 준비


                                                       홍금표 신부






국정의 총체적 위기 상황 속에서 제 2의 IMF를 우려하는 소리가 높은 가운데 한동안 국민을 불안하게 하고 괴롭혔던 문제중의 하나가 바로 의약분업 문제다. 의약분업 자체는 뒤로하고라도, 의약분업 때문에 일어났던 일련의 사태는, 수많은 국민들에게 실망과 분노, 그리고 정책 당국의 무지함과 이익 집단의 오만함을 보여주었다.


 


무엇 때문에 의약분업이라는 의료개혁이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의사들에게도, 국민들에게도 호응을 얻지 못하고 시행과정에서 의사들의 파업과 이로 인한 환자들의 고통, 의료행위의 질적 향상 없이 국민들에게 더 많은 부담만을 강요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는가?




그것은 아마도 의약분업이 물고 온 파장을 보지 못한 정부의 무지함과, 무조건 밀어붙이면 된다는 정책 당국의 안일함, 그리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서는 국민과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린 의사들의 이기심 때문이겠지만, 무엇보다도 이러한 혼란의 근본적인 원인은 국민과 정부 그리고 의료계와 의약계 그 어느 쪽도 의약분업의 정착을 위해 진지한 고민과 그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한 실질적 준비가 소홀했음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아무리 좋은 개혁이라 하더라도 적절한 준비 없이 시작하는 개혁이 얼마나 많은 고통과 혼란을 가져올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 사건이다.


 


여기에 비해, 어느 잡지에 소개되었던 소프라노 가수 신영옥씨의 이야기는 소박하지만 준비의 소중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신영옥씨는 유학시절 평소 목에서 피가 날 정도로 열심히 연습하여, 그 결과 콩쿨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기도 하였지만, 오폐라에서 주연배우로 활동하기


를 원하는 그녀의 소망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여기에 실망하지 않고,「언젠가는 내게도 기회가 올 것이다. 그때를 위해 열심히 준비하자」라고 다짐하면서, 언젠가 올 그 날을 위해, 오페라 주연배우의 노래와 연기를 열심히 연습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공연 중 주연배우가 병으로 갑작스럽게 그 역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신영옥씨는 꿈에 그리던 그 여주인공의 역을 맡게 되었고, 평소에 준비를 하였기에, 그 역을 아주 훌륭하게 소화함으로써 그 기회를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로 성장하게 되는 기회로 만들 수 있었다한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성공」이란 단어는 그냥 우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준비된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평범한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쥐었다.


 


오늘 우리는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면서, 루가 복음을 통해 신앙 안에서 가지는 준비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듣게 된다. 루가 복음서의 저자는 그 당시 사람들이 잘 이해하고 있는 문학 양식과 소재를 이용하여, 세상 종말에 일어날 사건과 종말의 의미, 그리고 그때를 위해 우리가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하는 점을, 짧지만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즉, 세상 끝 날에는 우주적 이변과 함께 사람의 아들이 내림 하게 될 것인데, 이때가 바로 종말의 때이다. 그러나 그 종말은 끝이라는 의미 뿐 아니라, 구원의 때라는 의미도 가진다.


세상 종말이 구원이라는 또 다른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준비가 필요한데, 그 준비가 바로「먹고 마시는 일과, 세상 걱정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과, 그리고 깨어 기도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종말을 위해 해야할 준비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재림이 구원도 될 수 있고, 심판도 될 수 있는데, 그 열쇠는 바로 「종말을 어떻게 준비하느냐」하는 점에 달려 있기에, 종말을 위해 준비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대림절을 이야기 할 때 보통 「기다림」과 「준비」라는 두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그러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대림절의 의미를 보다더 잘 살리기 위해서는 차라리 「준비」라는 한 단어로 묘사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우리는 2000년전 메시아의 탄생을 고대하고, 메시아 시대의 도래를 대망했던 이스라엘 백성이,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맞아들이지 못한 것은「기다림」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준비」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고, 그 유대인들의 모습은 2000년전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림절을 살아야 할 오늘의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대림절을 시작하는 오늘부터 우리는 준비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내 자신 안에, 우리의 가정 안에, 그리고 우리의 공동체 안에 그분이 탄생할 구유를 말이다.


우리가 그분의 구유률 준비 할 수 있을 때, 성탄은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닌 오늘의 현실이 될 것이요, 이러한 삶이 어쩌면 우리가 살아야 할 대림절의 삶이 아니겠는가 !


오늘 내가 준비해야할 구유는 무엇일까 묵상해보자 !















24.       대림 제1주일루가 21,25-36 (다) 하늘나라의 구원과 대비


                                                       김정진 신부




신자 여러분! 오늘은 교회 달력으로 보아 새해가 시작되는 C해 대림 제 1주일입니다. 대림시기라 하면 예수님의 내림을 고대하며 마음의 준비를 게을리 해서는 안되는 때입니다.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이요,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함을 들어주시는 때>(2고린 6:2)는 바로 대림 시기입니다. 구원을 우리가 바라기에 지상생활의 고달픈 나그네길을 큰 희망과 기대 속에 걷고 있습니다. 이 대림시절에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사회에 구원이 오기를 깨어 기다리며 특별히 기도하는 시기입니다.




자모이신 성교회에서는 예수 성탄일까지 대림 4주일을 통하여 구약의 의인들과 예언자들이 4천년 동안 구세주를 기다리며, 갈망하던 정신을 따르며, 구세주의 내림에 대한 마음의 준비와 대비에 열성을 다하라고 가르칩니다. <하늘이여 이슬같이 의인을 내리우고 구름은 비같이 메시아를 내려보내소서>(이사야 45:8)하는 절규는 바로 대림절의 정신이고 항상 깨어 기도하고 참회하고 보속하고 실천하여 선행을 진력하는 행위는 대림절의 실천 사항이라 하겠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구약의 성조들과 의인들은 4천년간이나 메시아 구세주를 학수고대하였습니다. 그 까닭은 우리의 원조 아담과 에와가 범죄한 탓으로 인간의 구원의 길이 막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루 아침에 천국의 문이 굳게 닫혀 버리니 어떠한 힘과 노력으로도 이것을 열 수가 없었습니다. 아벨의 의로운 피도, 모세의 열성도, 아브라함의 굳은 신앙도, 예언자들의 충성도 이를 실현시키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당시의 성도들은 구세주 오시기를 얼마나 갈망하며 기다렸겠습니까.




오늘에 사는 우리의 사정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구원이 어느 때보다도 더 가까이 와 있음에도(로마 13:11) 불구하고 구원은 우리 사회와는 거리가 먼 것만 같습니다. 구원이 우리와 가정과 우리 사회에 절실히 요구되는데도 불구하고 구원의 천사는 우리에게 미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사회는 부정과 불의로 싸인 갖가지 사회악으로 혼돈 중에 헤매이고 있습니다.




이 혼탁한 사회는 인간의 생명을 천시하고 낙태, 살인 등 어마어마한 중죄를 저지르고 있지 않습니까. 사기, 협박, 비방, 절도, 강도, 납치소동 등 사회 악은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부부간의 가정불화, 가족들의 불목, 부모 자식간의 가정불화, 부모 자신간의 오해와 몰이해, 빈부의 격차, 부유층의 지나친 사치와 허영, 약자의 착취와 학대, 무능력자의 천대, 불우한 자의 푸대접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사회는 어지럽기만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죄악이 만연한 환경 속에 살면서도 결코 실망과 좌절감을 느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희망이시며 피난처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조용히 들려 옵니다. <구원이 여러분에게 가까이 와 있습니다. 밤이 거의 새어 낮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으십시오. 진탕 먹고 마셔서 주정을 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처신하십시오. 여러분은 새 사람이 되어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로마 13:11~14).




예수님이 2천 년 전에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적에나 매일 미사때마다 제대 위에 내려오실 적에는 어디까지나 우리의 구원과 자비와 용서로 충만된 사랑의 내림임에 비하여 오늘 복음의 세말에 있어서의 내림은 엄위와 공의와 심판으로 두려움의 내림이라 하겠습니다. 여태까지 자비와 용서만을 베풀던 예수님의 자애스러운 모습은 이제는 엿볼 수가 없습니다.




그 때에는 천체가 흔들리는 가운데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시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목격할 것입니다. 지상에는 으르렁대는 바다와 성난 물결에 놀라 모든 민족이 불안에 떨며 악인들은 공포에 질려 기절하겠지만 의인들은 몸을 일으키고 머리를 들어 구원받을 때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에 환호성을 올릴 것입니다.




우리는 최후의 심판날에 있어 불안과 공포에 떨어 기절하게 되는 악인들의 멸망 속에 끼지 말고, 구원을 얻어 영광을 누리며 승리하고 개선하는 의인들의 대열에 함께 할 수 있는 신앙의 정신으로 생활을 해야 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의 종말이 언제 오더라도 우리는 항상 깨어 있을 뿐 아니라 기도하는 생활, 통회 보속하는 생활, 사랑과 봉사의 생활을 해야 되겠습니다.




세말의 날짜는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은 우리 인간의 구원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 날이 올 것이라 인간이 확실히 알고 있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도움이 아니라 장애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계속 안일하게만 살려고 할 것이고 무서운 징조들이 그 모습을 드러낼 때에야 비로소 인생의 길을 바꾸려 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언제나 계속 마음의 준비를 요하는 불확실한 기대 속에서 살 것이며 언제나 깨어 기도하는 정신으로 살아야 되겠다는 마음으로 대비를 해야 되겠습니다. 아멘.














25.     대림 제1주일 루가 21,25-36 (다) 그 날을 기다리는 이 시기에 깨어 기도하자


                                                          조순창 신부




오늘부터 대림 시기가 시작됩니다. 대림이란 말은 ‘오심을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2000년전에 구세주로 오신 예수의 성탄을 기념하는 성탄 대축일을 준비하며 기다린다는 의미와, 이 세상 종말에 예수님이 재림하시는데, 그 재림의 날이 우리에게 축복의 날이 되도록 고대하며, 정성을 다하여 준비하는 때라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오늘 대림 주일부터 예수 성탄 대축일까지 4주간에 걸쳐서, 구약의 긴긴 세월 동안에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이 예언자를 통해 약속하여 주신 메시아 구세주를 기다리며 갈망하던 그 정신으로, 성탄 축일과 구세주 예수 재림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잘 하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구세주 예수님의 첫번째 오심은 하느님을 거역한 인류가 교만과 탐욕과 이기심으로 죄를 지어, 마귀의 지배 아래 눈이 어두워 칠흑처럼 캄캄한 암흑의 세계에 희망의 빛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회개로 사죄받을 길을 터 주시고, 하느님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명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대한 극진한 사랑과 봉사와 속죄의 십자가로 구원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회개하여 영세함으로써 하느님 자녀답게 열심히 살면서, 하느님 안에 희망을 가지고 살지만,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는 아직도 그 길은 멀고 먼 길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완성은 내 생애의 끝날에 이루어지며, 인류 구원의 완성은 이 세상 종말의 날, 예수님 재림하시는 날 완성될 것입니다.




그 날이 오기 전에 종교적 혼란으로 내가 바로 재림 그리스도라는 인물이 나타날 것이며, 가정 윤리가 무너짐으로써 부모․형제․친척․친구들까지 잡아넘겨 죽게 할 것이며, 법질서가 문란하여 전쟁과 반란의 유언비어가 나돌고, 실제로 민족과 국가간의 처절하고도 무서운 전쟁이 일어날 것이며, 우주의 질서도 파괴도어 무서운 지진이 일어나고, 해와 달과 별에 징조가 나타나는 날 모든 민족들은 공포에 떨 것입니다. 그 때 인자는 권능과 영광 중에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 날은 언제인지 알 수는 없지만, 확실히 다가오고 있는 날이며, 그 날은 죄인에게는 멸망의 날이요, 의인에게는 구원의 날이며, 불신자에게는 불행의 날이요, 신자에게는 축복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 날은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오늘의 제 1독서에서 예언한 대로 ‘의인에게는 살 길이 열려 모두 마음놓고 살게 될 하느님 선정(善政)의 날’입니다.


그러나, 그 날이 구원과 축복의 날이 되기 위하여서, 오늘의 제 2독서 데살로니카 전서의 말씀대로, “우리가 여러분을 사랑하듯이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고, 또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 예수 재림하시는 날, 우리 아버지 하느님 앞에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으로 나설 수 있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루가 복음에서는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일과, 쓸데없는 세상 걱정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하며, 몸을 일으켜 머리를 들어 깨어 기도하라.” 하였습니다.




은총의 때인 대림절 오늘부터 회개하여 흠을 고치고, 컴컴하고 어두운 마음과 가정에 밝은 빛이 가득하도록 화해하며, 하느님과 이웃에게 은혜로 빚진 것을 갚아 보답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과 봉사와 자선으로 선공(善功)을 쌓아서, 온 가족이 모두 교우되고, 영세만 해서도 부족하니까, 모두 열심히 성당 다니며,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증거하는 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깨어 기도하여야 합니다. 인력으로 모든 게 다 되는 것이 아니니까, 신자로서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여, 사랑의 마음으로 기도할 때에, 구원의 문은 더욱 활짝 열릴 것입니다. 이렇게 죄로 때묻은 마음과 손을 씻고 깨끗한 손으로 사랑을 주어 선공하면서, 그 깨끗한 손 모아 기도할 때에 성탄과 재림은 축복의 날이 될 것입니다.












 


26.          대림 제1주일루가 21,25-36 (다) 오시는 예수께 바칠 선물


                                                  서경윤 신부




잠시 책을 놓고 창가에 가서 힘껏 창문을 열어 제꼈습니다. 그리고 오늘따라 유난히 파아란 하늘을 올려 바라보며 크게 심호흡을 하려는데 문득 예수님 승천하시던 날 두 천사가 갈릴래아 사람들에게 한 말이 생각났습니다 .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 저 예수는, 그분이 하늘로 가시는 것을 너희가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행전 1:11)


바쁜 일상생활에 묻혀 언제 세월이 가는지도 모르게 벌서 전례주년의 B해를 보내고 C해 첫날인 대림 제 1주일을 맞이했습니다.




해마다 이 때가 되면 신경 쓸 일은 자꾸 많아지는데 일손은 잡히지 않고 어물쩡하다 보면 이내 성탄절을 맞게 됩니다. 그래서 올해는 보다 보람있는 대림시기를 보내고 싶습니다.


이 시기에 우리는 한편으로는 구세주가 보잘것없는 한 어린 아기로 이 세상에 태어난, 미구에 맞이할 성탄절을 준비하면서 또 한편 오늘 복음성서에서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는” 예수를 보게 될 날을 기다립니다.




성탄 준비에 가장 부지런한 사람들은 상인들인 듯 합니다. 백화점에는 이미 한달전부터 산타 할아버지와 함께 오색 전등불이 반짝이고 각종 성탄 카드와 특별선물 세트가 시민의 마음을 유혹합니다.


우리 그리스도 신자의 축제인 성탄절을 그들에게 빼앗긴 것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는 지혜롭고 부지런한 상인들을 탓하기보다 우리들의 나태하고 습관에 젖은 자신들을 반성해야겠습니다. 적당한 시간에 판공성사나 보는 것으로 나의 성탄준비를 끝내버린 습관이 부끄럽습니다.




그렇잖아도 할 일이 많은데, 성탄성가 연습 때문에 성가시다고 짜증스러워하면서 불평했던 적도 여러번이었습니다. 불우한 이웃을 찾아보는 일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었고 성탄을 준비하며 특별한 기도나 봉사를 해본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공장이나 백화점은 고객의 취향에 맞게 해마다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고 판매 전략을 수립하여 성탄절에 한몫 보려고 하는데, 이 은총의 시기에 ‘나도 한몫’보려는 마음을 내 것으로 챙겨야겠습니다. 그래서 세상일에 쓰는 마음의 10분의 1이라도 성탄을 기억함으로서 하다못해 마음의 십일조를 오시는 그리스도께 바치고 싶습니다.




성탄의 은총은 해방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다시 오시는 날 우리를 영원히 해방시켜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너무 많은 제약가운데 파묻혀 있습니다.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싶지만 돈이 없습니다.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싶지만 건강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내 앞에 닥친 일만 생각해도 너무 바쁩니다. 손이 열 개라도 쉴 손이 없을 것입니다. 하루가 48시간이라도 잠잘 시간이 늘어날 것같지는 않습니다.




수첩은 해야할 일과 만나야 할 사람으로 꽉 차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조마조마한 마음과 피곤한 육체로 지쳐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내 이기적인 육체적인 욕망과 유혹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탄생의 은총은 우리를 이 모든 속박으로부터 영원히 해방시켜줄 것입니다.


그 분이 오신 것은 이 땅의 죄와 죄의 결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곧 우리의 희망입니다.




이번 대림시기에 성탄절을 잘 준비하는 나 자신을 자주 생각합시다.


구원을 기다리는 희망으로, 성탄을 준비하며 기다리는 마음은 바로 일생을 준비하며 ‘영광에 싸여’ 다시 오실 분을 기다리는 마음이기에, 대림시기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는 일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자주 하늘을 바라봅시다! 창문을 열 때마다.




신발을 신고 외출할 때에도 일에서 잠깐 해방되고 싶을 때도, 고독이 온 몸을 엄습할 때도, 눈물이 날 때도, 맘의 여유가 생겼을 때도,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도, 강한 유혹을 느낄 때에도… 머얼리 하늘을 바라 볼 때마다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실 그분을 그려봅시다.


이것이 곧 오늘 복음 성서의 말씀대로 ‘늘 깨어 기도하는’ 자세일 것입니다.














27.            대림 제1주일 <루가 21,25-28.34-36>(다)      촛불같은 삶


                                                           강영구 신부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지나간 한 주간 동안 우리 주님의 은총과 축복 속에서 안녕히 지내셨습니까? 오늘은 대림 제1주일입니다. 우리 교회의 달력, 즉 전례력(典禮曆)으로는 오늘이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어제까지 (나)해를 지냈습니다. 오늘부터는 (다)해를 시작하게 됩니다.


 


대림절(待臨節)은 성탄 대축일 전 4주간을 말합니다. 대림이란 오심을 기다린다 흑은 오시는 분을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대림절은 두 가지 기다림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첫째로는 전례적으로 앞으로 한 달 후면 다가 올 성탄 대축일을 기다리는 것이고, 둘째로는 이 세상에 구세주요 심판자로 재림(再臨)하실 예수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림에는 마땅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기다릴 수는 없는 노룻입니다. 더구나 이 세상의 심판자요 구세주로 다시 오실 예수를 기다리는 데는 더욱더 많은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준비는 외적인 준비가 아니라 내적인 준비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내적인 준비란 어떤 것이어야 합니까?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이 제대 앞에는 4개의 대림초가 있습니다. 오늘은 그 중의 하나에 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성탄 대축일이 다가 올 수록 촛불을 밝히는 숫자가 하나씩 늘어나게 되고 대림 4주일에는 4개의 촛불을 모두 밝히게 됩니다. 이 촛불의 의미는 주님이 오시면 이 세상의 어둠을 밝히게 될 것이고, 그래서 어둠 속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밝은 빛 속에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동시에 이 촛불들은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어둠을 밝히는 촛불처럼 우리도 환하게 어둠을 밝히는 생활을 하면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둠을 환하게 밝히는 촛불과 같은 삶, 그것이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둠을 밝히는 촛불과 같은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앞으로 닥쳐올 이 모든 일을 피하여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그렇습니다. 늘 깨어 기도하는 사람이 어둠을 밝히는 촛불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우리 인간을 이어 주는 고리와 같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고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머무는 사람입니단.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 속에 머무는 사람이기에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닮게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는 사람이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늘 깨어 기도하는 사람은 이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촛불과 같은 사람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이 겪는 불행의 뿌리는 기도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아니 현대인들은 이미 오래 전에 기도를 잊어버렸고 기도가 무엇인지조차도 모릅니다. 물질적인 풍요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쾌락과 향락을 누리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대신에 돈과 권력을 얻기 위해서 밤낮 없이 뛰고 있습니다. 돈과 권력과 명예가 물질적인 풍요와 안락한 생활을 제공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기도할 필요성도 못 느낄 뿐 아니라 기도가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기도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오만하게도 쥐꼬리만한 인간의 능력을 과신하고 권력과 돈 따위의 위력을 믿습니다. 기도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한마디로 하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는 짓들이 성 폭력과 인신 매매, 유괴 살인, 사치와 향락, 퇴폐와 방탕, 사기 절도와 폭력 등입니다. 기도가 무엇인지 모르는 세상, 기도할 줄 모르는 인간들이 모여서 사는 세상은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어두운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이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처럼 물질적인 풍요와 향락만을 추구하면서 함께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일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일과 쓸데없는 세상 걱정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 날이 갑자기 닥쳐올지도 모른다. ”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가 언제일지도 모르는데 흥청대고 먹고 마시는 일에 정신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늘 깨어 기도함으로써 한 자루의 촛불처럼 어둠을 밝히고 있어야 합니다. 늘 깨어 기도하는 자세야말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의 자세입니다.


 


기도야말로 향락 추구와 배금주의로 잃어버렸던 인간성을 회복하는 길이며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는 길입니다. 하늘과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 인간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만이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만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의 자세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삶 가운데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것이 곧 사랑의 실천일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오늘 우리가 들은 제2독서, 데살로니카 전서 3장12-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사랑을 키워 주시고 풍성하게 해주셔서 우리가 여러분을 사랑하듯이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고 또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마음이 굳건해져서, 우리 주 예수께서 당신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다시 오시는 날 우리 아버지 하느님 앞에 흠 없는 사람으로 나설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


  지금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주님은 어떤 분입니까?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사랑으로 이 세상을 완성하시려고 재림하실 분입니다. 그분은 평소에 사랑을 가르치셨고 몸소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의 말씀처럼 그분은 사랑 자체이십니다(1요한 3,16). 그러므로 사랑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예수께서 당신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다시 오시는 날 하느님 앞에 흠 없는 사람으로 나설 수 있기 위해서는 사랑으로 우리 자신을 가꾸어야 합니다. 이기심과 탐욕, 시기 질투하며 증오하는 마음 그리고 분쟁을 일삼는 마음으로 사랑이신 주님을 맞이할 수야 있겠습니까?


 


요즘은 사랑이라는 말이 홍수처럼 범람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참사랑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사랑은 입과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과 행동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제대 앞에 타오르는 대림초와 같이 자신을 태워 희생할 수 있는 사람만이 참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풍요를 최고의 가치로, 향락을 행복으로 착각하고 있는 이 시대에 참된 사랑을 찾아보기란 어려운 것입니다. 자신보다 이웃의 배고픔을 먼저 생각하고 나눔을 실천하려 하면 물질적인 풍요를 누릴 수 없고, 자신의 안일과 안락보다 이웃과 형제들의 평안을 먼저 생각하고 회생하는 생활을 하고자 하면 한순간도 자기 한 몸 편할 날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 밝은 빛을 내는 한 자루의 초와 같이 이 세상을 환하게 비추게 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게 됩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이야말로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아버지 하느님 앞에 거룩하고 홈 없는 사람으로 나설 수 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대림절은 희망과 기쁨의 시기입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재림하실 주님을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구원받을 때가 가까이 온 것입니다. 그러기에 대림절은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에 합당한 준비를 하는 시기입니다.


  보시다시피 대림절 동안 사제가 입는 제의는 자색입니다. 자색은 회개와 속죄를 뜻합니다. 지난날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고 재림하실 주님을 맞이하기에 합당하지 못했던 점들을 반성하면서 새롭게 태어나는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기도와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의 생활이, 물질적인 풍요와 향락을 누리면서도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빛과 회망을 심어 주는 것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한 자루의 촛불처럼 기도와 사랑으로 우리 자신을 태워 어둠을 밝히면서 이 대림절을 거룩하게 지내도록 합시다.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일과 쓸데없는 세상 걱정에 마음을 빼앗기지 알도록 조심하여라. 그 날이 갑자기 닥쳐올지도 모른다. “






28.            대림 제1주일 (루가 21,25-28.34-36)(다) 늘 깨어 간구하시오




1. 복음 이야기


  루가 복음서 17장 20-37절과 21장 5-36절은 종말론에 대한 내용입니다. 오늘 루가복음 21,25-28,34 -36은 마르코 복음 13장을 옮기면서 루가가 나름대로 편집한 것입니다. 그 내용은 인자 내림(25-28절)과 늘 깨어 대비하라는 권고의 말씀(34-36절)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2. 인자 내림(루가 21,25-28절)


  루가는 마르코 13장을 집필자료로 사용하면서 나름대로 편집작업을 하여 21장5절-36절에다 자신의 종말관을 수록했습니다. 특히 25-28절은 마르코 13장24절-27절을 토대로 편집한 것입니다. 루가는 우주적 종말에 대해서 해와 달과 별들에 표징들이 나타날 것이고 땅에서는 바다의 파도소리와 풍랑으로 말미암아 민족들이 불안해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세계에 덮쳐올 일들을 내다보고 두려워서 기절할 것이라고 말합니다(루가 21,25-26). 이어서 인자가 구름에 싸여 내림하는 종말이 닥치게 된다고 얘기합니다. 루가는 인자 내림 끝에다 위로의 말씀을 덧붙였습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여러분의 머리를 드시오. 여러분의 속량이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3. 깨어 있어라(루가 21,34-36절)


  마르코는 주인을 기다리는 문지기의 비유(마르 13,34-36)로 종말설교를 끝맺습니다. 루가는 이 비유를 옮기면서 “주인을 기다리는 문지기의 비유”를 삭제하고 “깨어 있어라”는 권고만을 기록했습니다. 루가는 취기와 폭음과 생계 걱정으로 마음이 짓눌린 채 종말이 갑자기 닥치는 일이 없도록 경계하라고 권고합니다. 그 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마치 덫처럼 덮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 늘 기도하는 생활을 해야만 종말 심판을 면하고 인자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4. 우리의 이해


  마르코 13장과 루가 21장에 나타난 종말관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종말 시기에 관한 것입니다. 루가는 종말이 도래할 시기를 마르코보다 길게 잡았습니다. 마르코는 예루살렘 멸망을 목격한 당대에 종말이 도래할 것으로 보았습니다(마르 13,30). 그러나 루가는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나서 이방인들의 시대가 차야(루가 21,20-24ab) 비로소 인자가 내림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루가 21,25-28).


  ‘이방인의 시대’는 교회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른바 교회의 시대를 뜻합니다. 루가는 종말이 도래하기 전에 한동안 교회의 역사가 계속될 것으로 보았습니다(루가 24,47;사도1,8;3,21).교회의 역사가 끝나는 순간에 비로소 종말이 닥친다는 것입니다. 루가는 “포도원 소작인들의 우화”(20,9-19)에서도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도지로 주고 ‘오랫동안’ 떠나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종말이 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지나야 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사도들은 성령 강림 때 다윗의 왕국이 재건되리라는 임박한 종말 사상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종말은 땅 끝에까지 복음이 선포된 다음에야 오며, 그 시기는 하느님만이 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루가는 비록 종말이 임박해 있지는 않지만 곧 도래할 것이기 때문에 갑자기 닥칠 종말에 대비하라고 교우들에게 강력히 권고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종말의 시기와 장소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종말의 시기와 장소에 관심을 가질 게 아니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다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익히고 지키는 삶이야말로 갑자기 닥칠 종말에 대비하는 가장 확실한 길인 것입니다.


  “그 때와 시각은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정하셨으니 여러분이 알 바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내릴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에서 뿐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사도 1,7-8).




서울대교구 홍보실 








        


29.       대림 제1주일 (루가 21,25-28.34-36)(다)     기다림의 종류




저는 워낙 성격이 급해서 기다리기를 싫어합니다.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약속시간에 늦으면 초조해 하고, 퇴근하고 집에 오면 문이 열릴 때까지 계속 초인종을 눌러대고, 음식점에서도 음식이 조금이라도 늦게 나올라치면 ‘아줌마 빨리 안 나와요?’ 하고 재촉하며 수저까지 미리 들고 앉아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기다린다는 것은 너무나 초조하고 지루하고,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나만 뒤떨어지고 있다는 억울함 내지는 박탈감까지 줍니다.


그래서 기다리지 못하는 것이 버릇이 되어 이제는 기도할 때도 ‘하느님, 빨리 좀 어떻게 해 주세요’ 하고 독촉하고 조르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가끔 나도 모르게 제가 솔선수범해서 하는 기다림이 있습니다. ‘어디 두고보자’ 식의 기다림(재미있는 것은 영어에도 just wait and see라는 똑같은 표현이 있습니다), 즉 누군가 제게 함부로 하거나 상처를 준 사람이 있으면 ‘그것 보라지, 내게 못할 짓 하더니 내 그럴 줄 알았지’ 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을 수 있는 날은 은근히 기다립니다.


 


오늘은 약속이 있어 학교 근처 커피숍에 갔습니다. 약속시간이 10분쯤 지나도 상대방이 안 나타나자 슬슬 초조해지기 시작하는데, 문득 저쪽 창가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젊은 여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코트를 옆에 얌전히 벗어놓고 두 손을 모으고 가만히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여인은 7, 8개월쯤 되었을까, 임신 중이었습니다.


한 두달 후면 태어날 아기를 기다릴까, 함께 아기용품을 사러갈 친정 엄마를 기다릴까? 퇴근하고 만나기로 한 남편을 기다릴까… 기다림에도 종류가 있다면, 그것은 시간을 낭비한다는 초조한 기다림도, 나만 뒤지고 있다는 억울한 기다림도, 두고보자는식의 원한 맺힌 기다림도 아닌, 그 모습 그대로에 평화와 기대감이 가득 담긴 행복한 기다림으로 보였습니다.


 


약속한 사람이 오자마자 서둘러 일을 보고 곧바로 또 다른 약속장소로 가기 위해 나오면서 저는 문득 생각했습니다. 무조건 빨리빨리 바쁘게만 돌아가는 이 세상에 휩쓸리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나… 결국 모든 것은 하느님 주관인데 마치 내 마음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듯 서두르고 욕심부리며 행복한 기다림까지 상실해 가고 있는 나…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사랑하는 마음, 용서하는 마음, 이해하는 마음도 결국은 기다리는 마음인데, 그런 마음을 느낄 여유조차 없는 나…


 


그런 저를 일깨우듯 이제 곧 주님이 오십니다. 초조한 기다림, 원한 맺힌 기다림이 너무나 많은 이 세상에 행복한 기다림을 가르쳐 주기 위해 주님이 사람이 되어 오십니다.


  주님, 어서 오세요. 저희 모두 행복하게 기다리겠습니다.


장영희 마리아 / 서강대학교 영문과 교수














30.         대림 제1주일 <루가 21,25-28. 34-35> (다)      대림 첫주일


                                                          신은근 신부




어느새 대림절이 되었다. 성탄 준비가 시작된 것이다. 역사 안에 오셨던 예수님,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시어 세상의 모든 것을 체험하셨던 예수님, 그분의 탄생을 이 시대의 눈길로 조명해 보는 것이 성탄절의 의미다. 새 천년이 시작된 올해 많은 생명이 태어났다. 많은 젊은이가 결혼했고, 많은 사람이 주님 곁으로 갔다. 우리 역시 숫한 사건을 겪었고 잊지 못할 만남을 가졌다.




올해는 이렇게 조용한 해가 되고, 조용하게 마감될 줄 알았다. 그러나 들리는 소식은 불안한 내일을 느끼게 한다. 어쩜 복음의 말씀도 같은 내용이다. “그 날이 오면 해와 달과 별에 징조가 나타나고 사납게 날뛰는 물결에 놀라 사람들은 불안에 떨 것”이라고 했다. 세상은 변화하며 변화의 물결은 강할 것이란 말씀이 아닌가. 대림절 첫주일, 이 말씀을 들려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니 너희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거든 몸을 일으켜 머리를 들어라. 그리고 늘 깨어 기도하여라. 이 말씀이 답이 아닐는지.


 


몸을 일으켜 머리를 들라고 했다. 지상 것에만 매달려 살지 말고 천상 것에도 눈 돌리라는 말씀이다. 세상 걱정 때문에 하늘의 힘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면, 이제 생각하라는 말씀이다. 이를 위해 깨어 기도하라고 하신다. 대림절을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다.


실제로 하늘의 힘은 성사생활과 기도를 통해 느껴진다. 매일 반복되는 기도가 매일 취하는 영혼의 양식이며, 그로 인해 영적생활이 가능한 것이다. 올 대림절엔 이런 기도생활이 하루도 빠지는 날이 없도록 해보자. 그것이 깨어 기도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첫 번째 행동이다.


 


다음으로는 자선과 희생의 생활을 해야 한다. 예수님은 종말의 증표로서, 해와 달이 움직이는 천체의 변화를 이야기하셨다. 해와 달은 자연계를 지탱하는 힘이다. 그것에 변화가 온다는 것은 이 세상의 근본적인 가치관이 흔들린다는 이야기다. 해와 달에 해당될 만큼 중요한 것들도 공격받는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런 혼란 속에서 어떻게 하느님 안에 남을 수 있겠는가, 스스로 하느님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으면 안된다. 그 첫 길은 자선과 희생이다. 예수님과 사도들도 자선과 희생을 통해 하느님께로 나아갔다.




우리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살아야 한다. 그래야 희망이 있다. 나는 누구를 기다리며 살고 있는지 대림 첫 주일,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자, 대림이란 말은 을 사람을 기다린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와야 할 사람이 나에겐 있는 것이다. 그가 반가운 사람이라면 기다림은 즐겁다. 그러나 반갑지 않다면 기다림은 지겹다. 어떻게 해야 반가운 대림이 될 수 있는가. 준비된 기다림이면 된다. 그 옛날 성모님의 아들로 오셨던 분이 내 마음 안에 다시 탄생하여 주시기를 준비하며 기다린다면 금년 대림절은 진정 반가운 대림이 될 것이다.



기다림의 두 번째 대상은, 종말에 오실 예수님이다. 그래서 대림절엔 개인적인 준비로서 마지막을 묵상하게 한다. 이전에는 대림절 동안은 가능하면 화려함을 피하고, 절제와 나눔을 통해 생활 속의 그늘진 곳을 주님의 빛으로 채우기를 권했다. 이 가르침은 지금도 유효하다. 아무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맡기고 사는 사람만이 불안에서 자유로워진다. 종말은 위협이 아니고 맡기라는 암시다. 그리고 절제와 나눔은 맡기는 행위의 연습일 뿐이다.















31.      대림 제1주일 (다해)    몸을 일으켜 머리를 들어라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예레 33,14~16 (내가 다윗의 정통 왕손을 일으켜 주리라)


제2독서 Ⅰ데살 3,12~4,2 (여러 분의 마음을 굳건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복 음 루가 21,25~28.34~36 (너희가 구원받을 때가 가까이 왔다)




교회로서는 새해 새날이 시작되는 대림 제1주일입니다. 교회는 이제 4주간 동안 이 세상에 오실 주님을 기다리면서 그분을 모실 준비를 합니다. 옛날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메시아, 그들 백성의 힘의 원천이었던 희망의 메시아를 우리도 함께 기다리게 됩니다.




오늘 1독서에서 예레미야는 유다 왕국이 패망하여 참담한 유배 생활에 빠져 있을 때 그들을 구해 줄 메시아가 온다는 소식을 전해 주면서 백성들에게 큰 희망을 북돋워 주고 있습니다. 다윗의 정통 왕손 중에서 메시아는 분명히 온다는 것입니다. 그가 와서는 비참하게 무너지고 폐허된 나라를 다시 건설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메시아 사상은 유다 민족을 받쳐 주는 기둥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절망에 빠졌을 때 새 희망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죽음에 다다랐을 때 비로소 삶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용기와 힘을 가져야 합니다. 특히 지난 1년 동안 고생하고 눈물 흘렸던 분들, 뭔가 노력해도 자꾸만 넘어지고 실패를 하셨던 분들, 그들에게는 이제 희망이 있습니다. 분명히 구원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즐거운 일입니다. 소망스런 일입니다. 소풍날을 기다리는 어린이들의 눈망울, 혼인 예식을 기다리는 신랑 신부의 얼굴들을 보면 세상의 아름다움과 기쁨이 거기에 다 있는 듯합니다. 좋은 분을 기다리고 좋은 일을 기대한다는 것은 참으로 신이 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기다린다고 해서 누구나 다 만남의 기쁨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준비가 안된 사람은 만남을 두려워합니다. 오히려 무서워서 도망칩니다. 그리고 오실 그분을 잘못 착각하는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예쁘고 착한 사람, 힘있고 돈 있는 사람만을 기다릴 수 도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세속적으로만 기다린다면 그는 실패합니다.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메시아를 기다려 왔지만 그러나 정작 메시아가 왔을 때는 그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다윗의 왕손 중에서 잘나고 똑똑한 인물이 왕관을 쓰고 씩씩하게 와야 하는데 웬일로 기대했던 예수가 현실적인 힘은 하나도 못쓰고 어리석게 보이자 그들은 자존심이 상해 예수를 죽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지도 않고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이처럼 잘못 기다리면 스스로 재앙을 만나게 됩니다. 따라서 오실 분이 어떤 분인지, 그리고 그분이 내 인생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이 백번 오신다 해도 우리는 그분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단정한 마음과 깨끗한 생활로 그분을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림이 성실치 못할 때 그는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여러 해 전의 일입니다. 어떤 형제가 중동에 가서 열심히 일해 돈을 벌었습니다. 서울에는 아내와 자녀들이 있었는데 이제 내 집을 장만해서 남부럽지 않게 살아 보겠다고 열심히 벌어서 부인에게 송금을 했습니다. 그리고 3년 만에 그 남편이 귀국할 때는 꿈과 희망이 컸었습니다. 그 동안 너무도 외롭고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서울에 와 보니 그 돈이 없었습니다. 아내가 춤바람이 나가지고 뭇 남자들과 함께 다 탕진해 버렸습니다. 남편은 오직 함께 만날 날만을 기다리며 열심히 일했는데 아내는 기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저 먹고 마시고 흥청거리면서 남편을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만날 날이 가까워지자 여자는 도망쳤습니다. 이처럼 한 쪽은 기다렸는데 다른 한 편이 기다리지 않았을 때 상대는 배신감을 크게 느끼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대림절을 만들어 주님을 공적으로 기다린다고 하지만 우리가 진심으로 기다리지 않을 때 우리는 오실 주님에게 큰 상처를 안겨드리게 됩니다. 아니, 다시 한번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다 진지하고 경건한 자세로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존경과 애정을 가지고 그분을 맞이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마지막 날에 오실 주님을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실 대림절은 아기 예수로 오시는 주님과 마지막 날에 왕으로 오실 주님을 동시에 기다리며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준비의 자세는 첫번 오심과 마지막 오심에 있어서 차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항상 회개와 믿음이 요청되기 때문입니다.




ꡒ몸을 일으켜 머리를 들어라”(루가 21,28).




우리는 이제 넘어진 삶에서 몸을 일으켜야 합니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죄다 뉘우치고 고백하여 머리를 들어야 합니다. 얼마나 많고 큰 죄를 지었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뉘우치며 고백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주님이 이미 출발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해서 걸어오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서둘러 그분을 향해 걸어갑시다.












32.           대림 제1주일 <마르 13,33-37> 하늘을 쪼개고 내려 오십시오!








헤어날 수 없는 어려움 속에 처해 있는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도움 받기를


절실히 원한다. 고통이 심할수록 도움을 줄 수 있는 능력이 큰 사람에게 호소하게 된다.


그러다가 인간의 도움에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여길 때, 인간보다 더 큰 힘을 가진 분을 찾게 마련이다.




  이스라엘이 바빌론으로 귀양을 감으로써 민족․국가․종교․문화․제도 등, 한마디로 그들의 정체성 및 존립의 위기를 맞았을 때, 그들은 극심한 무력감에 시달렸다. “우리의 정의라는 것조차도 더러운 옷 같고 우리는 모두 나뭇잎처럼 시들었다”(이사 64, 5)고 여길 수 밖에없었다.




  이렇게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며 기댈 곳이라고는 하느님뿐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도움을 청하기 전에 잘못에 대하여 반성하였다. 귀양을 가게 된 것은, 처음부터 하느님께 반역하고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고, 그분을 따르려고 마음을 가다듬지 않았기 때문(이사 64, 4.6.)이라고 고백한다.


이 반성이 탁월한 것은, 잘못의 결과로 마음이 굳어지고,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게 됐다(이사 63,17)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데 있다. 여기에서 눈여겨볼 것은 자신의 양심에 어긋나게 행동했음을 뉘우치는 데 그치지 않고, 하느님께 바른 예의를 지키지 않았다고 호소한다는 사실이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파기하였기 때문에 벌어진 하느님과의 간격은 하느님의 외면(이사 64,6)과 방치(이사 63, 17)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 외면과 방치는 하느님의 무자비를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은 약속한 것을 꼭 이행하시는 분임을 보여준다. 인간이 하느님께 반역하였는데도 약속을 어겼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를 없는 척하고 지나치면, 믿을 수 없는 하느님일 것이다.




  인간의 도움으로는 도무지 해결할 길이 없음을 안 이스라엘은 그들과의 약속 자체를 하느님께서 처음 제시하실 때, 하느님의 정체성에 호소한다. 이스라엘과 약속을 제시하는 것 자체가 하느님다우심에 기인한 것이라고 믿고 그 사실을 하느님께 여쭙는다.


  이스라엘이 약속을 저버렸기 때문에 그 결과를 보여주지 않을 수 없다할지라도, 그래서 어떤 인간의 힘으로도 극복할 수 없을 만큼 하느님과의 관계가  멀어질 수밖에 없다 할지라도, 하느님이 하느님다우심을 포기하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




  “그 하느님다우심”은 곧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이사 63. 16), “우리의 아버지”(이사 63,16 ; 64, 7)이시며 “사람을 창조하셨다”(이사 64, 7)는 데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약속 또는 계약을 맺으실 생각을 하셨다. 그리고 약속을 어겼을 때 그 굄과가 참담할지라도 그것을 보여주시고, 그 참담한 절과 속에서 다시 솟아오를 수 있게 하신다. 이것이 하느님의 자비이고 하느님다우심이다.




  이스라엘의 귀양은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는 극복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느님의 개입을 간절히 원하였다. 그 기대와 원의가 하늘을 쪼개고 내려오시라는 기도를 드리게 하였다,


  시작도 끝도 없어 보이고, 앞도 뒤도, 위도 아래도 구별되지 않는 하늘을, 옷을 찢듯이(2열왕 5,8 ; 예레 41,5) 쪼깨시는 날은 세상이 뒤바꿔는 날이다. 결정적인 새로운 현실이 드러나는 날이다. 그 분이 세상에 내려오시면 그때까지 권력을 휘두르던 사람, 권력을 자랑삼던 사람, 지성을 뽐내던 사람은 물론,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느냐”는 사람들이 쌓아놓은 가치, 문화, 제도 등도 재평가 받게 된다. 하느님의 판단이 우선하는 날이다. 그러기에 이 날은 심판의 날이라고 한다.




  하느님이 세상에 내려오시면 모든 것이 달라질 수밖에 없음을 모세의 변화(출애 3,1-6)에서 확실하게 볼 수 있다. 자신의 힘을 믿던 그가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하게 되었다. 하느님이 내려오셨기 때문이다.(출애 3,8) 이 하느님은 시나이 산에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셨다. 그러기 위해 내려오셨다. (출애 20, 20)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좋다고만 여기신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애정 때문에 이곳에 내려오시고 함에 계시려고 하신다. 그러나 인간은 그분이 세상에 내려오시면 그때까지 전부라고 믿었던 것을 바꾸고 포기할 수밖에 없으므로, 내려오시지 말고 하늘에서 편안히(?) 계시기를 바란다. 그리고 인간 세상에서 하느님의 흔적을 몰아내려고 한다,


물론 그 속에는 세상에 대한 주인 행세를 하려는 목적이 있으므로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는 노력이나 고민은 있을 수 없다. 오직 무엇이든 마음대로 하고, 추후에 하느님의 뜻이라고 미


화하는 것이 상식으로 바뀐다. 하느님 행세를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대림 첫주 나해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얻은 언변이나 지식의 카리스마에 몰두하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을 경고하신다. 예수님께 대한 증거를 게을리 하지 않으면 그 분이 오셔야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이 완성되기 때문에 그분의 오심을 기다려야 한다. 인간은 날 때부터 악한 마몸(창세 8,21)을 지니고 있어 은총, 또는 결과만 ‘따먹고’ 그것을 베푸시는 분은 외면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분은 이를 일깨워주신다.




  예수님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는 것은 그릇된 신앙을 통회하고 반박하는 고백이다. 참된 변화를 희망하는 기도다. 이 기도에 맞게 늘 깨어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33.           대림 제1주일 <루가 21,25~28.34,~36> (다)


                                             만사형통교를 세우기로 하자




  옛날에 용한 눈먼 점쟁이가 있었다. 그는 잔심부름하는 어린 아이를 조수로 두고 있었다. 하루는 건너 마을 부자가 이른 아침에 조용히 찾아오자 대뜸, 그 점쟁이가 마치 보기나 한듯이, “건너 마을 최부자시군요. 요즘 가환이 가지가지라 첩이 속썩이지. 마누라는 외면하지, 자식은 말 안 듣지, 머슴은 일 안 하지, 입맛은 없지, 기운은 떨어지지, 노름에 잃지, 머리는 지끈지끈하지, 조상 사당 차례를 못해서 송구스럽지, 웬 지출은 그리 늘어가는지 돈이 물 새듯 하지‥‥ 무엇하나 온전한 것이 없구려. 워낙 챙피해서 그 무거운 몸으로 새벽같이 오셨구려!” “맞아, 맞아, 제발 좀 살려주오!?”




  “만사형통법은 있는데, 부자어른이 내 말을 허술히 여기고 안들을 것 같소이다, 그려!” “아니오, 꼭 들을 테니까 제발 적선하고 가르쳐주시오. 복채는 많이 내리다” “음, 그렇다면 한 달간 시험을 해보고 효과가 있으면 석달을 하고, 그 때 효험이 있다고 확신한다면 복채를 듬뿍 주십시오. 지금은 그냥 가시고—“




   ”내 약은 한 줄 문장이오. ‘새벽닭이 울 때 일어나서 놋그릇을 들고, 오리나 들어가는 산골짝 폭포수에 가서 물 한모금 들고 목욕재계하고, 그 물을 이 그릇에 담아 집으로 가져와서, 장독대에 절 100번을 하는 하늘 치성을 드리시오” 그렇게 한달을 하면 어느 정도 효험이 있을 것이오“”




“아, 그것이야 뭐” 그러면서 부자는 갔다. 그리고 한달을 그대로 하였다. 과연 효과가 만점이었다. 새벽같이 일어나려니까 늦잠을 잘 수 없었고, 저녁에도 일찍 자야 했다. 자연히 주색


잡기를 멀리하였다. 산으로 들어가자니까 운동을 하고, 목욕을 하니까 심신이 쇄락하고, 정화수 치성을 장독대에서 드리자니 허리운동이 많이 되어 겸손해지고, 조상 사당은 새벽 시간이 남아돌아서 재미삼아 가서 뵙고 청소하니, 자식으로서 떳떳하여 기쁘고, 자식들이나 머슴은 가장이 새벽같이 활동하는 것을 알고는 늦잠을 잘 수가 없어 부지런하여졌다.




  이 부자가 치성을 드리고도 시간이 남아서 머슴 대신 마당을 쓸고, 부엌에 며느리나 아내가 힘들지 아니하게 물을 길어다 놓고, 물을 데워놓고, 자식대신 쇠죽 끓이고, 그리고도 시간과 기운이 나서 고살 청소를 하니까 가족이며 골목 사람이 그 누가 싫다 하리오? 그의 선행이 -사실은 당연히 할 일이지만- 알려지자 문제가 다 해소되었다. 본인이 건강해져 기쁘고, 자식과 머슴이 일 잘하고, 마누라가 바가지를 긁지 아니하고, 첩이 미안해서 재산을 떼어 주니까 말없이 나가고‥‥ 한달후이 부자는 그 점쟁이에게 복채를 두둑이 가지고 왔다. 약 한 첩도 한 제도 들지  아니하고 건강과 화평과 교육과 조상 숭배가 다 완성되었으니 감지덕지라는 감사의 뜻이었다.




“부자 어른, 늦잠이 많으면 가난합니다. 늦잠은 주색잡기로 늦게 잠자리에 들기 때문입니다.그 주색잡기는 만사 불행입니다. 제 말을 들어 주셔서 고마울 뿐, 그 돈은 안 받겠습니다. 그래도 저를 정 주시겠다면 그것으로 이 마을과 저 마을을 잇는 다리를 놓아주십시오. 그 다리에 「만사형통은 일찍 일어나는 것이다」라고 새기시지요, 하하하”—-한양대 최래옥 교수의 글이다.




  대림절이다. 예수 성탄 대축일전 4주간이며, 대림 제1주일은 전례력에서 새해가 시작되는 날이다. 대림시기는 구세주이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실 것을 기다리며, 회개와 속죄로 구세주를 맞기 위해 준비하는 시기로서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는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 가운데 탄생하셨음을 기념하는 성탄 대축일을 준비하는 시기이고,


둘째는 종말에 있을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시기이다. 예수님께서는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쌓여“(따태 24,30)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시기의 전례는 이러한 두가지 의미를 강조하면서, 이 시기를 희망의 시기로 이끌어간다. 대림절에 할 일은 무엇인가? 성탄준비이다. 물적인 성탄 준비는 우리보다도, 오히려 일반 세속인들이 더 요란스럽다. 벌써 크리스마스 트리가 깜빡거리고 있고, 가게에는 성탄카드가 아름답게 진열되어 있다. 거리에는 성탄노래가 들려오고 성탄선물을 사라는 광고가 여기저기 붙어 있다.




  성탄 분위기 조성은 우리 신자들보다도 오히려 장사꾼들부터 시작된다. 주객이 뒤바꿔 느낌이다. 우리에게는 아직 대림절 문화가 없어 아쉽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 복음내용처럼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 최부자처럼 정신차려야 한다. 깨어있으면 유비무환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용한 점쟁이가 필요할 것이다. 예수님을 용하다. 용한 점쟁이(?)로 모시고 그분의 말씀을 깊이 새겨듣고 실천해야 한다. 위의 최부자처럼 실행가능하고 지속적인 것으로 말이다.




  우선 신앙 생활의 기본인 주일미사에 철저히 참여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한다. 또 판공 시기인 만큼, 교회에서 요구하는 성탄판공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만사형통교를


세우기로하자


34.      대림 제1주일  <루가 21, 25-38.34-36> (다)  몸을 일으켜 머리를 들어라!


                                                       유영봉 신부




묵상 : 전례적으로 새해 첫날이다. 대림시기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시기이다. 주님은 역사 안에서 계속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오신다. 아무 준비 없이 기다리는 것은 참된 기다림이 아니다. 그러나 그저 바쁘게 바등거리며 정신 없이 동분서주하는 것이 참으로 깨어 있음은 아닐 것이다, ‘주님 안에, 주님과 함께 함’ 이것이 참으로 깨어 있는 방법이다. 내 안에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마련하자.






  1. 세상종말은 파멸의 날인가




   세기말이 되면 항상 ‘세상의 종말이 가까이 왔다’는 외침과 그런 것을 떠들어대는 여러 사상이 판을 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1999년은 단순히 새 세기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천년대로 넘어가는 대전환의 시점인 것이다. 그러므로 21세기를 앞둔 몇 년은 이른바 ‘밀레니엄(Millennium)증후군’이 최고조에 달하는 시기다. 그래서 요즘 세상은 더욱 뒤숭숭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모든 민족이 불안에 떨 것이며,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올 무서운 일을 내다보며 공포에 떨다가 기절하고 말 것이다. 모든 천체가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고 하신다. 이런 말을 들으면 죄 많은 우리들은 오금이 저리고 그저 무서운 생각부터 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가 참 신앙인이라면 세말이라는 말만 들으면 무조건 자지러지기부터 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세말의 진정한 의미는 ‘비극적인 파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있기 때문이다.




  세말의 대재난은 완성을 위한 진통이요, 정화의 과정일 뿐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몸을 일으켜 머리를 들어라. 너희가 구원받을 때가 가까이 온 것이다”고 하시는 것이다.




  2. 주님의 세가지 오심




  우리는 대림절을 맞이하면서, 2천년 전에 오신 예수님이 해마다 또 오시는가? 하는 생각을 하기 쉽다. 그러면서 해마다 그냥 기념하는 것이려니 생각한다. 이에 대해 성 베르나르도께서는 “첫번째 오심은 말구유 위에 나약한 육신으로 오심이고, 두번째 오심은 마지막 날 재림시에 영광과 위엄으로 오심이며, 첫번과 마지막 사이의 세번째 오심은 영(靈)과 권능으로


오심이다”고 하셨다. (대림 제1주간 성무일도 제2독서 참조) 그러므로 주님은 지금도 재림중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세월 속에 우정이 깊어지면 친구를 더욱 새롭게 알게 되듯이, 우리도 신앙의 여정에서 새롭게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나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은총에 눈뜨는 만큼 새롭게 주님을 만날 수 있다. 그러기 에 해마다  맞는 대림시기는 꼭 같을 수 없을 뿐더러, 성탄도 단순한 2000년 전의 첫 성탄의 기념일 수만은 없는 것이다.




3. 재림은 이미 시작되었다




  주님의 재림은 이미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재림의 순간은 오고 있기에, 우리가사는 이 역사의 시간은 종말을 향해 가는 과정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개인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우리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그 시간’은 참으로 예상치 못한 때, 바로 오늘 닥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이 우리의 삶 속에 항상 함께 하고 있듯이, 재림은 이미 우리의 삶 속에 깊숙이 와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여기에 시간 속에서 영원을 희망하며 사는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의 삶의 차원이 있는 것이 아닌가? ‘깨어 있어라’는 말씀의 당위성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4. 바쁜 삶이 깨어있는 삶 아니다




  대선을 눈 앞에 둔 요즘,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으로 정신 없이 뛰는 이들이 많다. 돈 가뭄이 극심한 요즘, 기업하는 사람들도 밤잠을 설치기는 마찬가지다. 실업률이 사상 최대치를 갱신하며 끝간데 모르게 치솟는 요즘, 취업을 희망하는 졸업생들은 신발이 달도록 쏘다니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깨어 있어라’는 말씀을 들으면 이렇게 눈을 부릅뜨고 바쁘게 뛰는 사람들을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바쁘게 바등거리는 삶이 바로 깨어 있는 삶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기도의 시간을 갖고, 그분과 함께 계획하고, 그분과 함께 매일을 가꾸어가는 삶이 참으로 깨어 있는 삶이라 할 수 있다. 조용히 주님 안에서 한해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하자. 그리하여 언제나 ‘그 분 앞에 설 수 있도록’ 준비하자.


         


















35.            도올 선생 논어강좌


                 공자의 인간관과 그리스도교의 인간관


                                                2001. 4. 27. K.B.S


                                                    김수환 추기경




             1. 도올 “논어 이야기”에 출연한 이유.




오늘 제가 도올선생의 논어강좌에 나오게 된데 대해서, 많은 분들이 호기심과 찬반으로 갈라져 있는 느낌입니다.


찬성하시는 분, 걱정하시는 분, 반대하시는 분, 다양한 반응을 보여주십니다. 저 멀리 미국에 계시는 연세가 80이 되는 노인께서는, 당신은 유교를 종교로 정립시키는 데 헌신하고 계신 분이심을 소개하시면서, 도올이 쓴 <도올 논어I>에 공자님의 출생과 관계되는 이야기를 우리말로 아주 야하게 표현하여, 공자님을 모독했다고 혼을 내주라는 주문까지 하신 분도 있었습니다. 도올이 그분께 사죄 할 마음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단순한 마음으로 나왔습니다. 이런 다양한 관심과 찬반이 있으리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습니다.




도올선생의 老子의 도덕경, 孔子의 論語 강좌는 청취율이 상당히 높다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아주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요즘 TV 방송을 보면,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노래나 춤 등, 오락 프로가 대부분의 시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인상입니다. 그러니 저희같이 나이를 많이 먹은 노인들은 따라갈 수가 없어서도, 자연히 보게 안됩니다.




그와 동시에, 이런 오락 프로들이 젊은이들을 위해서도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가? 생각할 때, 저로서는 솔직히 걱정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필요한, 그들도 마음속 깊이에서 찾고 있는 삶의 지침이 되고 보탬이 되는 가치관은 주지 않고, 그들  마음과 영혼을 텅 빈 마음과 영혼으로 만들고, 그 결과 우리의 미래를 가치관 상실의 혼란에 빠뜨릴 염려가 없지 않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운데 도올의 老子와 孔子 강좌는, 내용이나 해석을 놓고 논쟁을 야기시키는  문제도 없지 않지만, 그러나 일단 우리가 잊고 살던 우리 동양사상의 대표적인 고전을 말함으로써, 고전에 대한 관심도 일으키고, 고전을 읽게 하고, 그 고전이 주는 깊은 사상, 윤리, 도덕의 가치관에 대하여 생각하게 한다는 것이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21세기를 맞이하여, 이른바 정보화와 세계화 속에서 정녕 인간을 인간다웁게 하고, 사회와 세계를 보다 인간인 사회와 세계로 변화시키고 발전시켜야 할 가치관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그런 가치관을 주는 古典 공부는 참으로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오늘 도올선생의 초청에 의해서 여기 나오게 된 동기를 말하라고 하신다면, 바로 그런 가치관, 인생관을 여러분과 함께 생각하고, 나누고 싶어서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2. 공자의 인간관과 仁의 정신




도올은 그의 <도올 논어Ⅰ> 176쪽에서, “공자는 한 번도 유교를 말한 적이 없다. 그는 인간을 말했고, 삶을 말했을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아주 뜻깊은 말입니다. 孔子님이 인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무엇이라고 정의를 내리시지는 않았다 하여도, 그분의 가르침은 모든 인간을 위해서이고, 인간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만일 인간을 빼면, 孔子의 가르침은 공허합니다. 孔子께서는 인간의 忠怒와 孝弟를  말씀하시고,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상의 덕으로 仁을 말씀하셨는데, 이 모든 가르침도 오직 인간들을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보면, 孔子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 중에서 인간을 가장 소중히 여긴 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 경제 모든 것이, 이 인간을 위한 것이라 보셨다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사실 인간을 소홀히 한, 정치나 경제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孔子께서는 “나는 노인들을 편안히 해주고, 친우들에게는 신뢰를 주고, 나이 어린 사람들을 사랑으로 품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公冶長>25)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도 孔子는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고 위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孔子께서 보시는 인간의 바람직한 인간상은 君子가 되는데 있다고 보셨습니다. 그래서 <논어>의 첫 구절도 君子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하고(“人不知而不溫이면 不亦君子乎아)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화를 내지 않는다면, 역시 君子가 아니겠는가?), <논어>의 마지막 구절 역시, 君子에 대한 말씀으로 끝맺습니다. (“不知命이면 無以爲君子也라”(“천명을 모르면, 군자가 될 수 없다”)




또한 통계적으로 볼 때, <논어>에는 “君子”라는 말이 “仁”이란 단어(109회)와 함께 가장 많이 나온다고 합니다(107회). 이런 의미에서 흔히 孔子의 가르침 내지 유교를 君子之學 또는 聖人之學(聖學)이라고 한다합니다. 공자께서는 君子가 되려면, 仁에 머물러야 한다고 역설하셨습니다. 仁이 무엇이냐고 묻는 제자 번지에게, 공자께서는 ”愛人“(“사람을 사랑함<顔淵>22)이라고 답하셨습니다. 孔子에게 있어서 仁은 최상의 덕이요, 최고의 경지입니다. 仁에 달할 때, 비로소 인간은 참 사람이 된다고 보신 것입니다. 仁은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志士와 仁人은 살기 위해 仁을 해치는 일이 없고, 몸을 죽이면서 仁을 이룩하는 일은 있다.”(<偉靈公>8) 하셨습니다. 그런데 仁이란 것이 다른 것이 아니고, 바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孔子는 人間 사랑을 최고의 德인 仁으로 볼만큼 人間을 소중히 보았습니다. 中庸에서는 “仁者 仁也”.  仁인란, 사람다움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공자께서는 인간이 君子가 되고, 仁者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天命에 순응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君子가 두려워 할 바가 3가지 있는데, 그 첫 번째가 천명을 두려워함이다”(“君子有三畏 畏天命 畏大人 聖人之言”<季氏>8), “天命을 모르면, 君子가 될 수가 없다”(“不知命 無以爲君子也”<堯曰>2) 고 단언하셨습니다.




天에 대한 敬虔과 天命에 대한 順應은 공자님의 삶과 사상 전체의 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공자님께서는 天이 의지를 갖고, 인간의 生死禍福을 주재하는 인격적인 절대자라고 인식하였다고 봅니다. 사랑하는 제자 顔淵이 죽었을 때, “天이 나를 버리셨구나! 天이 나를 버리셨구나!”(“天喪矛, 天喪矛”<先進>8)하며 슬피 통곡하면서도, 生死를 天命에 맡기고 순응하셨습니다.




일생을 통한 심한 역경 속에서도, “나를 알아주는 분은 저 天뿐이구나”! (”知我者는 其天乎인저“<憲問>35)라고 하면서, 天에 대한 굳은 신뢰를 고백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공자께서는 天命에 순명함으로써, 天과의 일치를 이루는 天人合一의 상태가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장 최고 상태, 인간의 成己 상태라고 보셨습니다. 공자께서는 자신의 인격적, 영성적 성숙과 과정에 대해 언급하시기를, 50세에 知天命하고, 60세에 耳順하고, 70세에 從心所欲 不踰矩했다:(<爲政>4)고 하셨습니다.


즉 “마음이 원하는 대로했으나, 법도를 넘어서지 않았다.”




여기서 法度(短)는 天命이요, 眞理(義)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와 天의 뜻(天命)이 합일된 상태, (從心所欲 不踰矩의 상태는)  곧 天人合一의 경지라 하겠습니다. 여기서 人間의 참된 自我가 무엇인지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修德을 통해 天과 合一의 경지까지 高揚될 수 있다는 것이, 공자님의 신념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뿐더러 자기완성, 성(成)己의 仁은 개인에 완성에만 국한하지 않고, 동포인 이웃과 온 인류 공동체에도 미쳐서, 四海內昆兄弟 人類一家를 이루는 것이 공자님의 궁극적인 理想目標였다고 생각합니다.




                  3. 철학과 법학에서의 인간관




그러면 도대체 人間은 무엇인가? 무엇이기에 공자 같은  분이 인간의 이상적 상태를 天人合一의 天人으로 보고, 전 인류의 일치의 축으로까지 생각하셨는가? 인간은 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욕망을 따라 살면 안되고, 德을 닦고 군자가 되어야 하는가? 인간이 무엇이냐, 인생의 의미는 무엇이냐?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질문은 아마도 인류의 시작부터 제기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근원적인 문제일 것입니다.




서양철학은 옛 그리스 철학부터 오늘의 實存哲學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무엇이냐? 人生의 의미는 무엇이냐? 가 중심과제=話頭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 물음에 Aristoteles는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다” 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이것이 오랫동안 유일하게 받아들였던 定義와 같이 인식되었으나, 지금은 “이성적 동물이다”라는 말만으로는, 인간의 本質, 그의 심리, 정신적, 영적 본질을 다 말하는 것이 되지 못한다고 보고있다 합니다.




근대에 와서 Pascal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한편 인간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에 있어서는, 우주보다도 더 위대하다, 그러나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쉽게 부러질 수 있는 갈대와 같이 약하다는 양면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무엇이냐에 대한 완전한 답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현대에도 인간학(인류학), 심리학, 사회학, 의학 등 여러 학문이 직접 간접, 인간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 전체는 물론이요, 인간 육체만 보아도 그 연구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것이 현실입니다. 예를 들면, 의학도들은 인간 육체를 해부하고 연구함으로써 의사가 됩니다. 또 박사가 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수십만, 수백만의 의학도들이 人間肉體 해부를 했습니다. 지금은 해부의 매스가 닿지 않은 곳이 없다 할 만큼 구석구석 다 뒤졌습니다. 이제는 해부해 볼 것이, 더 이상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수십만, 수백만, 수천만의 의학도가 해부를 하고, 또 해도 인간 육체 연구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뿐더러 물질의 최소 단위인 原子의 연구도 마찬가지라 합니다.


인간 육체는 바로 이런 원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참으로 무엇인지, 언젠가면 완전히 알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오히려 우리 자신이 인간이면서도, 인간 그 자체는 인간의 지혜만으로는 그 본질을 완전히 터득할 수 없는 어떤 神秘, 성스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인간은 존엄한 존재임을 學的으로는 물론이요, 법적으로도 인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거의 모든 나라가 그 헌법에 인간 존엄과 평등을 명시하고 있고, UN은 1948년에 모든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엄숙히 선언했습니다.




우리나라 헌법 10조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또 제11조에서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性別,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차별을 받지 않는다.”라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이 인간의 존엄성은, 인간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존엄하다는 것입니다. 잘난 사람만이 아니고, 아무리 못생겼어도, 천치 바보라도, 인간인 한 존엄합니다. 뿐더러 죽음을 앞둔 임종자 또는 식물인간이라도 존엄합니다. 인간에게는 죽음도, 그 뒤에 오는 썩음도 앗아갈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존엄성이 있다는 것을 확언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모든 인간은 존엄하고, 평등하다는 것인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인간의 이 존엄성과 이에 따르는 불가침의 기본 인권을, 헌법학자 김철수 교수가 그의 저서 <한국 헌법>36쪽에서 말한 대로, 법 이전의 天賦的인 것입니다. 천부적인 존엄성을 법이 천명하였을 뿐입니다. 평등도 마찬가지입니다.


법이 모든 인간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한 것은, 법 이전에 인간은 천부적으로 존엄하고, 그러므로 평등하다는 것을 밝힌 것뿐입니다. “천부적인 것”이란, 곧 하늘이 주신 것, 하느님이 주신 것입니다.



이 존엄성과 평등은, 사실상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으로 하느님을 믿고, 인정할 때에만 설명이 가능합니다. 하느님을 배제하면 우리는 끝내 인간을 알 수 없게 됩니다. 인간이 무엇인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명의 기원이나 인간의 생성을 진화론적으로만 배웠습니다.




그래서 생명의 기원도 “偶然”에 두고 있습니다. 언젠가 KBS 방송을 들으니, 생명에 기원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랜 옛날 수 억년 전에 ‘우연히 참으로 우연히’ 무엇과 만나서, 생명이 있게 되었다”고, 우리나라 공영방송인 KBS가 과학 강좌에서 이렇게 말하고, 또 학교에서도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科學이란 가장 논리적이어야 합니다. 생명의 기원을 “우연”에 두는 이 말이, 논리적으로 맞는 말입니까?


‘여기 컵이 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여기 있느냐? 제가 ‘우연히’라고 답하면 말이 됩니까? 말이 안되지요. 컵 하나도 ‘우연히’ 여기 있다라고 말할 수 없다면, 어떻게 아직도 신비의 veil에 가려진 생명을 우연히 생겼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우연히’를 가장 과학적인 설명으로 받아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현대 과학의 모순입니다.




과학은 어느 학문보다 자연의 원리를 탐구하고, 또 실험으로써 실증을 얻어야하는 학문이 아닙니까? 그런데 생명이나 인간 기원에 대해서만은 과학적인 실증 없이 …… 偶然을 생명과 모든 존재의 기원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20세기의 가장 큰 과학자 Einslcin은 그렇진 않았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존재를 분명히 믿었습니다. 현존하는 인물로서 1984년도 물리학 부분 Nobel상을 탄 Carl Rubbia는 Neue Zuricher Zeitung과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태양계를 나열한다던가, 분자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사실은,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증명은 될 수 없겠지만, 과학자로서 나는, 이 우주와 물리적 의미의 한 현상 안에서 발견하는 질서와 그 아름다움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연과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 안에 이미 모든 것보다 더 높은 차원의 질서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이런 모든 현상이, 단순한 우연의 결과라든가, 낮은 확률에 의해 발생한 현상이라는 생각을 절대로 받아 드릴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이 우주 전체를 관할하며, 이 우주 위에 존재하는 더 높은 知性의 존재가 있다고 확신합니다.”(Carl Rubbia는 현재 CERN =Council European de Recherches nuc1eaires 헥연구 구라파 자문회의소 소장)




오늘의 미국의 과학자들 중 60% 이상이, 역시 하느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도 하느님을 믿는 과학자가 있습니다만, 그러나 지배적 學風으로는 神을 무시해야 과학적인 줄 알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저는 진화론 자체를 반대하지 않습니다. 창조주 하느님의 창조의 손길을 전제로 한 진화는 인정합니다. 아무튼 인간의 존재와 생명의 원천은 하느님이십니다.




여기에 비하여, 공자께서는 이미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하느님은 계시고, 그 하느님의 뜻 天命을 알 때에, 비로소 이상적인 인간인 君子가 될 수 있다고 보셨습니다.


공자에게는 하느님을 떠난 인간은 있을 수 없고, 하느님을 부정한 인생관도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교의 인간관과 공자의 그것은, 충분히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4. 그리스도교의 인간관과 하느님의 사랑




특히 존엄성과 관계하여 성서말씀을 요약하면 :


① ‘하느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다음, 창조의 원점에서 인간을 당신의 모습으로 창조하셨다’. 또한 만물을 다스리게 하신다.


② ‘하느님은 이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신다.’


③ ‘나아가 그 사랑에서 하느님은 인간을 당신과 함께 영원히 살리시기를 원하신다.’


④ ‘이를 위하여, 하느님은 죄에 빠져 죽게된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구하시고자, 모든 것을 다하고 계신다.’


⑤ ‘모든 인간이 당신의 아버지다운 사랑 속에,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되기를 원하시고, 이를 위해 당신의 외아들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기까지 하셨다.’ 이것이 성서말씀의 중요한 내용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즉 하느님이 인간을 당신 모습으로 창조하시고, 절대적이오 조건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또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과 당신과 같이 영원히 살도록 뜻하시기 때문에, 인간은 존엄합니다.


이 같은 내용을, 우리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뿐 아니라, 우리들 하나하나에게 구체적이요, 현실적인 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즉, 하느님이 나를, 현재 있는 그대로의 나를, 즉 내가 아무리 부족하고 못났다 하더라도, 그런 나를, 여기 지금(Hic et nunc) 사랑하신다는 것을 인식할 때, 인간 존엄성과 평등을 비로소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하느님의 영구적이오, 구체적인 사랑, 현재적인 사랑을 빼면, 인간이 존엄할 이유도, 평등할 이유도 없습니다.




—- 무엇이 존엄합니까? 어떤 분은 인간 존엄성의 근거를 지성에 둘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지성의 능력을 잃은 천치바보는 존엄하지 않다는 말이 됩니다. 더구나 병으로 식물인간이 되었다면, 더욱이 존엄하지 못한 것이 됩니다. 그러면 이미 만인평등은 말할 수 없게 됩니다.


또 무엇이 평등합니까? 인간은 얼마나 서로 다릅니까? —-




교도소에서 살인강도, 흉악범으로 사형을 언도 받은 사람이 하느님을 믿고 완전히 새사람이 되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들의 회개의 가장 큰 이유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흉악범인 나를 지금도 사랑하신다.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구하신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어떤 처지에 놓여있든,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하느님은 그를 어떤 처지에 있든지 버리지 않으신다. 하느님 앞에서는 누구도, 흉악범일지라도, 쓸모 없는 인간은 없다. 그 때문에 존엄하고, 또한 평등하다.” 이렇게 해석해야 타당합니다. 거기다 성서에 의하면, 하느님이 인간에게 원하시는 것은, 인간이 당신과 같이 영원히 사는 존재, 당신의 영광을 함께 누리며, 당신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孔子님께로 돌아가면, 孔子님은 天人合一에서 보았듯이, ‘하늘이 당신을 알고, 당신을 또한 언제나 지켜주고 계시는 분이시다.’라는 의식 속에 사셨다고 봅니다.


이미 위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만, 인생을 통한 심한 역경 속에서도“나를 알아주는 분이 저 天 뿐이구나! (知我者는 其天乎이라)(憲問35) 하셨고, 또 桓魋(환퇴)라는 사람이 그를 죽이려 할 때, ”天이 나에게 덕을 풍부히 주셨는데, 桓魋 제가 나를 어찌하겠는가?“ 즉 “하느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 그러니 누가 나를 해칠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 물질주의적, 무신론적 가치관에 사는 현대인과 아주 대조적입니다.




                 5.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내적 성숙




그러나 어떤 분은, 하느님이 인간을 그렇게 사랑한다면, 왜 인생에 고통이 있느냐? 때때로 아무 죄 없는 사람이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는 경우가 있는데, 하느님이 계신다면, 사랑하신다면 왜 그런 일이 있도록 허락하느냐? 라는 반론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이 반론에 대해서, 제가 그런 불행을 겪는 이에게 직접 속시원한 답을 금방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저는 가끔 불치의 병에 걸려 죽음밖에 기다릴 것이 없는 이들을 방문합니다. 어떤 때는 저 역시, 왜 하필 이 사람이 죽어야 하는가? 하는 그러한 생각을 가질 때도 있습니다. 사실 어떤 이들은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無神論者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통이 왜 있는지, 또 왜 하필이면 죄 없는 사람이 고통과 시련을 겪어야 하고 죽어야 하는지 등에 대한 문제를 풀지 못한다 하여, 하느님은 없다고 부인해 버리면, 그야말로 그 고통과 고통 속의 인생은 무의미하게 되어 비립니다. 인생 자체가 아무것도 아닙니다.(하느님은 없고 고통만 남으니)


 


어려움이 있을 때, 병들었을 때, 하느님께 ‘도와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하고 기도하데 됩니다. 또 대학입학시험 때에도 어머니들은 아들딸이 입학이 되도록 해달라고 기도 드립니다. 이런 기도는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만일 하느님은 우리가 청하는 모든 기도를 들어주셔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또 암과 같은 불치병을 비롯하여 모든 惡과 불행을 사전에 막고, 교통사고로 다치거나 죽는 사람도 없도록 해야 하는 것이 하느님의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우리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기계와 같이 – 자동판매기와 비슷한 기계와 같이 – 만드는 것입니다.




또 많은 악과 불행이 인간이 짓는 죄에서 비롯되는데 – 그런 악과 불행을 막으려면, 인간이 죄를 지을 수 없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의 자유를 박탈해야 합니다. 그럼 인간은 자유로이 진리와 선을 택할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자유가 없는 인간은 이미 인간이 아닙니다.




그러나, 비록 고통에 대해 설명이 안 되더라도, 하느님이 있으면, 왜 그런 고통을 허락하셨느냐고 넋두리라도 할 수 있고, 불평, 불만, 항의라도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많은 경우에 – 직접 체험도 하고 목격하듯이, 사람들은 고통을 통해서 하느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고, 인생을 보다 깊이 살게 됩니다. (박완서씨의 경우)




인간에게 있어서 모든 선은, 모든 좋은 일, 성공은 고통과 수고를 통해서 이룩됩니다. 고통 없는 인생, 아주 좋은 것 같이 보이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인생은 깊이가 있을 수 있습니까? 고통을 모르면서 자란 사람들은 – 경우에 따라서는 다를 수 있으나 – 남의 사정, 남의 고통을 이해할 줄 모릅니다.


이에 비해 많은 고통을 겪고, 山戰水戰 다 겪은 사람은, 특히 신앙 속에서 겪은 사람은 참으로 인생을 깊이 살 줄 알고, 사람을 참으로 사랑할 줄 압니다.




많은 이들이“고통은 하느님의 은혜이다”라는 것을 체험으로 깨닫습니다.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 하느님의 사랑을 더 깊이 체험합니다.




孟子께서도, “天이 중대한 임무를 어떤 사람에게 주시려 할 때는, 반듯이 먼저 그 사람의 정신을 괴롭히고, 그 육체를 괴롭히고, 실패가 따르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한 고통과 좌절을 통해 인내를 키우고, 분발시켜서 지금까지 못하던 일도 할 수 있게 하려는 天의 크신 뜻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환과 고통 속에서 생명이 나오고, 평안과 쾌락 속에서 죽음이 나옴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生於憂患 而死於安樂也”<孟子><告子>下15)


이렇게 볼 때, 공자와 안연을 위시해 동양의 성현들이 가난과 환난 중에서도 安貧樂道할 수 있었던 것은, 天의 이러한 크신 뜻을 깨닫고, 天과의 일치를 체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6. 인생의 궁극 목표와 天人合一




이제 우리는 여러 가지 측면으로 인생의 문제를 보아왔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이 하느님의 생각과 사랑에 근거하고 있다고 볼 때, 우리는 인간이 무엇인지, 인생의 목적이 어디 있는지,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이 문제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물질은 생명을 위해, 생명은 영을 위해, 영은 하느님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의 창조의 힘에 의한 200억 년의 가까운 우주의 생성과 진화 발전은, 생명을 낳기 위해서, 그 뒤에 이어지는 수 억년에 이르는 생명체의 진화 발전은, 의식을 가진 인간을 낳기 위해서, 그리고 이 인간은 하느님과 하나되기 위해서 입니다.


따라서 물질적이고 생물학적이면서도 정신적, 영적 존재인 인간은, 단지 생물학적인 목적을 위해서나, 죽고 썩음으로 물질로 환원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으로 향해 가기 위해서, 영원하고 무한하시며, 眞善美 자체이신 하느님, 참 생명이요 빛이신 하느님과 같이 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공자적인 표현으로는 “天人合一”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미래는 참으로 위대하고 원대합니다. 그 때문에, 모든 인간의 존엄성은 더욱 빛납니다. 인간에게 이런 영원에로의 본성이 있다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심리를 들여다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마음 속 깊이에서부터 영원과 無限, 眞善美와 완전한 사랑과 불멸의 생명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생물적 존재이기에 음식도 필요합니다. 공기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정신적, 영적 존재이기에 진리, 정의, 사랑 등, 정신적 빵도 먹어야 합니다. 그것은 또 무한하고 영원해야 합니다.


 


무한하고 영원한 것, 이는 곧 하느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은 음식으로만 살지 않고, 하느님 말씀으로 산다” 라고 하셨고, 성 아우구스티노(354-430)는 “주여, 당신은 우리를 당신께 향하여 만드셨으니, 당신께 가서 쉬기까지는 영원히 평안치 못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7. 끝까지 지켜야 할 가치와 殺身成仁




그럼 끝까지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 하느님이 절대적이요, 조건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는 인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은 “마음을 다하고, 정신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큰 계명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누구도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고 성서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이웃을, 특히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 약한 이웃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수난 전 날 밤 아비지 하느님께, “저 모든 이가 하나되게 하소서”라고 간절히 비셨듯이, 온 인류가 하느님 안에 그 사랑으로 하나되게 해야합니다.




유교적으로 표현하면, 생명을 살리는 天心을 천부적으로 품부받은 인간 本心을 늘 간직하고 생명을 살리는 仁(生生之道)을 행함이라 하겠습니다




몇 달 전에 일본 유학 중이던 이수현이라는 젊은이가, 일본 동경의(신오꾸보) 역에서 철로에 떨어진 일본인 취객을 구하려다, 자기 목숨까지 잃게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얼마 후 홍제동 뒷골목 화재 진압에 나갔던 소방관들 중 6명이, 역시 사람을 구하려 불타는 집 속에 뛰어들었다가 벽이 무너져 희생되었습니다. 둘 다 언론 매체들은 “殺身成仁”으로 크게 보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 중 김기석이라는 소방관은, 그 전 달에 대학 후배에게 E-Mail로 이런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사람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내 한 목숨 선선하게 내 던질 수 있다는 것. 나는 이것도 성직으로 여긴다네”


소방관의 직무를 단순히 불끄는 것만이 아니고, 화재 속에 생사의 위험에 놓인 사람을 구하는 성직, 곧 거룩한 사명으로 깊이 인식하고 사셨습니다. 이런 분이야말로 현대적인 순교자요, 공자께서 그토록 강조하신 仁者가 아니겠습니까?



인생의 길은 바로 이 “殺身成仁” 실천에 있습니다. 곧 성서에서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 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 사랑’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끝까지 지켜야 할 가치입니다. 이 가치를 삶으로써, 지금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죽음의 문화로부터 생명을 구하는 생명의 문화를 창조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도 어느 날, 사람을 모든 것에 앞서 존중하고, 어린이, 장애자, 노약자, 부녀자, 동물을 사랑할 줄 아는 선진사회, 인간다운 인간사회, 지상낙원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특히, 장애인을 위하고, 거리에서는 보행자를 앞세울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21세기 환태평양 시대를 맞아 세계화를 지향하는 오늘, 한국의 정치인, 경제인, 언론인, 종교인, 교육자, 지성인들이, 이런 인간 사랑을 곧 孔子님의 仁의 정신을, 그리스도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깨닫는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습니까?


그리고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이런 인간관을 기초로 한 생활 가치관을 교육을 통해 심어줄 수 있다면, 얼마나 바람직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면 우리 국민 모두가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고, 하느님의 마음인 모든 생명을 사랑하고 살리는 生生之心을 늘 마음에 간직하고, 生生之道인 仁, 곧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우리나라가 생명의 땅(仁方)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사랑을 살 때, 우리는 참으로 세계인이 되고, 한국은 세계에서 빛나는 “동방의 빛”이 되며, 통일도 그 힘으로 이룩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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