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사순 제 4주일주일 강론 모음

 

사순 제 4주일


        25. 함세웅 신부(다)/45           26. 최재용 신부(다)/46


        27. 조순창 신부(다)/48           28. 김정진 신부(다)/49


        29. 강길웅 신부(다)/51           30. 강영구 신부(다)/53


        31. 유영봉 신부(다)/57           32. 서경윤 신부(다)/59


        33. 조정래 신부(다)/61           34. 홍금표 신부(다)/63


        35. 신은근 신부(다)/65           36. 사랑의 아버지/66


        37. 누구든지 그리스도를/68




25.           사순 제4주일   루가 15,11-32 (다)  탕자의 용기


함세웅 신부




사순 제 4주일은 전례상 ‘기쁜 주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를 묵상하는 사순절의 반이 지났기에, 목적지에 가까이 왔다는 기쁨에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등산객이 산 중턱을 넘어서 걸어온 길을 되돌아 볼 때 느끼는 환희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꼭대기를 바라보며 정복할 수 있다는 부푼 희망에 힘찬 발걸음을 계속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너무나 까마득했던 그 목적지가 이제 눈앞에 다다랐으니 그 동안의 ‘나의 노력’이, ‘나의 수고’가 보람이 있구나 하며 스스로 감격해지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희생의 길, 기도의 길, 재계의 길, 십자가의 길이 그렇게 힘들고 고된 길만은 아니었구나 하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기쁨으로 또 다른 새 출발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가장 짧은 단편 소설 ‘탕자의 비유’를 들려줍니다. 그 탕자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니라, 바로 현대 교회에 사는 미지근한 신앙인인 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돈과 재물만 있다면 문제없이 잘 살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아버지와 가정을 떠나 마음대로 지냈지반, 결국에 가서는 알거지가 된 다음에야 후회하는 탕아. 이제는 먹을 것도 없어서 남의 집에서 종살이, 돼지 먹이로 굶주림을 달래야 하는 신세, 참으로 처량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탕아는 겸손한 자세를 배웠고, 용기있는 결단을 하였습니다. 오만한 자존심, 유치한 자만심을 버렸습니다. “아버지께로 가야지!”하는 결심과 함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줄 알았습니다. 이제는 아들이라 불리기에 부당하니 그저 종으로서만도 착실히 지내겠다고 결단을 내렸습니다.




우리는 사도 베드로의 고려 내용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주님, 저는 죄인이니,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종으로만 삼아 달라고 간청하는 이 탕아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아버지는 탕아를 껴안고 ‘잃었던 아들’의 재회를 기뻐하였습니다. 떠나 달라고 간청한 사도 베드르의 기도 대신 예수님은 더욱더 가까이 오시며 베드로를 감싸 주셨습니다. “아버지, 저는 부당합니다. 종으로만 써 주십시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하는 기도는 거절이 아닙니다. 너무나 황송하여 자기의 처지를 이와는 다르게 표현할 수 없는 참된 고백입니다.


인간이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완전한 기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습니다. 교회를 가정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신앙을, 착함을, 나 자신을 재물로 여기고 있습니다. 너무나 자신만만해서 신앙 하나면 되겠지 하는 단순한 생각에서, 착하기만 하면 되겠지 하는 순진함에서, 더구나 ‘나야, 뭐, 누가 뭐래! ‘ 하는 철부지의 영웅심에서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고는 하느님을 떠나, 교회를 떠나, 자유스러운 생활을 하는 현대의 탕아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고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신앙도 잃고, 착함도 잃고, 자신도 잃었습니다. 이제는 절망뿐일 수도 있습니다. 기도해 본 지도 오래이고 성당에 가 본 지도 오래입니다. 더구나 고백의 성사를 받은 때는 기억조차 나질 않습니다. ‘기도도 해야 할 텐데, 성당에도 가야지. 성사도 봐야지!’하면서도 손이, 발이, 입이 떨어지지가 않음은 웬일일까요 ?




복음의 탕아는 겸손했습니다. 용기가 있었습니다. 고백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껴안고는 기뻐서 제일 커다란 잔치를 해 주었습니다. 현대의 탕아인 나, 나는 교만합니다. 용기가 아니라 비겁하기만 한 위선자입니다. 고백은 하지 않고 묵비권과 거부권만 행사합니다. 그래서 잔치상은 준비되었지만 바라다보기만 하는 처지입니다.




탕아의 길, 그것은 되돌아오기만 하면 착한 아들이 되는 길입니다. 그 되돌아오는 길에는 어떠한 장애물도 탕아를 저지할 수 없습니다. 그 탕아는 착한 아들이 되는 길만을 따라서 걷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이 탕아인 나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나는 아버지와 가정을 떠나서 오랫동안 헤맨 현대의 탕아입니다. “되돌아서야지!”하는 결심으로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며 아름다운 기도를 바쳐야겠습니다.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으니 저를 품꾼으로라도 써 주십시오”












26.        사순 제4주일   루가 15,1-32 (다)  “우리는 하느님의 노예인가?”


최재용 신부




이 이야기는 세계에서 제일 훌륭한 사랑의 장편이란 평을 가졌습니다. 이 이야기는 아들의 회개보다 아버지의 깊고 넓은 사랑을 더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먼 거리에서 돌아오는 그의 아들을 본 것은 그가 늘 아들을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두 말없이 용서해 주었습니다. 용서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남북전쟁 후 어떤 사람이 링컨 대통령에게 “남부의 반역자들을 어떻게 처단하겠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링컨은 “그들이 배반한 일이 없었던 것처럼 우대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의 본질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참아주고 모든 것을 덮어주고 친절합니다. 그러나 이 사랑스런 아버지와는 반대로 그 탕자의 형은 법의 의무만을 따지는 율법주의자로서 그 동생의 귀의를 싫어합니다. 형은 자기의 의로움을 자랑하며 죄인의 구원보다는 멸망을 바라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표상하고 있습니다.




그의 태도를 볼 때 그동안 아버지께 순종하며 지낸 것은 마지못한 의무적 행사일 따름이었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봉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동생을 “내 동생”이라 하지 않고 “당신의 아들”이라 함으로 보아 그에게는 동정의 빛이 전혀 없습니다.




그는 구렁텅이에 빠진 자를 끌어내기는커녕 더 처넣을 무정하고 오만한 심보의 소유자였습니다. 이와 비교해 볼 때 하느님의 사랑이 무한히 자비로운 것임을 알 수 있고, 하느님의 사랑이 사람의 사랑보다 넓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을 대할 때 우리는 놀라고 존경하며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형의 종교는 율법주의자로서 법을 의무로서만 지켰을 뿐, 그 정신은 버렸습니다. 율법주의의 잘못은 너무나 소극적인 즉 “하지말라”만을 엄격히 따르는 데 있습니다. 형의 마음에는 의무의 실행은 있어도 사랑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과 형제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윤리는 냉정한 면에서 볼 때 옳다고 하겠으나 경건과 사랑에 뿌리를 박지 못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정확하지만 또한 무자비했습니다. 그는 아버지 하느님께 대해 자신을 노예시하였습니다. 그는 외지에서 고생하는 동생을 생각하거나 아버지의 슬픔을 동정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노예화된 신앙이 아닌지, 바로 형과 같은 종교를 갖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공격하는 데 있어 벌이 있으니까, 상이 있으니까, 현세에 이득이 있으니까 하는 것이 아닙니까? 만일 우리가 이런 정신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형과 같은 냉혹한 신자요, 요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비록 내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해서 물 속에 뛰어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부모를 공경함음 물론 정성을 다하여 불편없이 지내시도록 재정적 뒷받침을 해드려야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진정한 효성입니다. 부모에 대한 고마움, 공경심, 그리고 진정한 형제애 이것이 바로 부모님께 대하여 취할 태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원죄와 본죄로 당신 곁을 떠났던 우리들을 노예로 삼지 않으시고, 당신의 사랑스런 외아들 그리스도를 팔아서 우리들을 다시 사셨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귀한 자식들입니다. 어떻게 이분 앞에서 사랑이 없는 노예로 자처하겠습니까? 망극할 일입니다.




왜 우리는 숨져 가는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성약을 구하러 첩첩산중을 헤매며, 자기 손가락을 잘라 그 생피를 아버지 입에 넣어드릴 수 있는 사랑이 없단 말입니까? 우리는 하느님을 또한 형제들을 어떤 이득 때문에 사랑함도 아니요, 일부분의 정성으로 사랑함도 아닌 오직 몸 전체를 다버리면서까지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갚아집니다.(십자가의 요한)












27.  사순 제4주일   루가 15,1-32 (다)  “죽었던 아들 살아 왔으니, 잔치할 수밖에 없다”


조순창 신부




지난 2월 16일 ‘재의 수요일’에 시작된 사순절 기간이 어느 새 그 반이나 지나서, 부활 대축일을 맞기 위한 판공 고백성사와 성주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동안의 힘겨운 회개와 속죄의 고행을 잠시나마 쉬면서, 길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시는 착한 목자로서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의 사랑의 손길을 맞잡으며, 부활의 내일을 바라보는 환희의 주일입니다.



이에 따라서 제 1독서인 여호수아서 5장에서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약속하신 대로 에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구출해 내시어, 약속의 땅 에리고 평야에서 첫 과월절 축제를 지내며, 그 땅의 첫 소출을 맛보는 기쁨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2독서인 고린토 후서 5장에서는, ‘누구든지 회개하여, 하느님과 화해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께로부터 무죄 선언을 받아 구원 얻는다’는 희망찬 말씀을 하여 주십니다.



이와 같이 회개와 화해와 믿음으로 무죄를 선언받아, 구원을 얻는 일이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어, 약속된 땅에서 첫 수확으로 과월절을 지내는 축제는 바로 오늘 복음의 ‘탕자의 비유’와 상치하는바, 환희에 찬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탕자의 비유는, 작은 아들이 아버지께 제 몫으로 돌아올 재산을 받아 챙겨 가지고, 먼 고장으로 떠나 방탕한 끝에, 무진 고생을 하다가, 알거지가 되었을 때, 회개하여 아버지께 돌아와서 구원을 얻는다는 줄거리입니다. 이는 죄악으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의 역사, 즉 구세사의 요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복음은 참으로 우리에겐 기쁜 소식이며, 우리는 그 구원을 위한 희망과 환희의 역사 안에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 제 몫으로 돌아올 재산을 주십시오.”



그는 떼써서 나눠 받은 제 몫의 재산을 모두 챙겨 가지고 집을 떠나, 먼 고장으로 갔습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낙원에서 쫓겨나, 하느님 품을 떠난 것과 같습니다. 저만 알고 욕심이 많아서, 기존의 규범을 탈피하려는 몸부림입니다.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죽음이요, 불행의 시작입니다.



호사다마라고 할지, 풍부할 때 방탕의 유혹이 도사리고 있는 때입니다. 사회의 기본 질서가 깨어질 때, 착취와 인권 유린과 부정 이권이 판을 쳐서, 정도가 빛을 잃어, 불안한 세태가 되게 마련입니다. 동물적인 본능으로 더 처참한 인간 부재의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멸망으로 가는 인간 사회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이 오셔야 했고, 종교는 인간 구원의 보루로서 정화와 회개와 화해와 협동의 선도적 구실을 하여야겠습니다.



“나는 여기서 굶어 죽게 되었구나! 어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자.” 마침내 그는 그곳을 떠나 자기 아버지의 집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전화위복이라 할지, 죽음을 의식하는 절망의 처지는 구원의 빛을 찾을 때입니다. 그때에야 빛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때에야 빛을 발견할 것입니다. 아버지 집으로 가는 길은 회개의 생활이고, 생활 양식에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이제 무엇을 망설일 때가 아닙니다. 나와 가정과 사회와 교회에 해를 끼치고 불평하게 하는 데서 과감히 벗어나야 할 때입니다.



게으름과 무질서와 부정적 태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집입니다. 아버지께로 돌아온 우리를 사랑으로 맞이하시며, 우리를 위해서 말씀과 은혜와 성찬의 잔치를 베풀어주십니다. 우리는 불행을 맛보고 회개하여, 아버지의 자비를 믿고,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 된 교우입니다. 형제끼리 서로 화해하십시오. 가족을 사랑하십시오,.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십시오.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 집에 모인 희망찬 새로운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믿음, 사랑, 희망의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서로 아낍시다. 그리고, 서로 예의를 지키고, 물건을 아낍시다. 아버지의 집을 완공합시다.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루가 15,32)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합시다.












28.             사순 제4주일   루가 15,1-32 (다)  “화해와 용서”


김정진 신부




신자여러분! 오늘은 벌써 사순절 넷째 주일입니다. 사순절 중반에 접어들어선 우리는 방탕한 아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들려주신 가장 감격적이고도 극적인 면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등지고 멀러 떠나갔다가 죄스러운 세상 풍파에서 시달리다가 제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오는 죄인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지극히 자비로우시고 인자하심이 역력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제 2독서에서 성 바오로가 말씀하시듯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하늘나라의 상속자들입니다.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 하늘나라의 시민이 될 자격을 얻었고 하늘나라로 향해서 길을 제시하는 지도를 받았습니다.




만일 그처럼 우리를 생각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참으로 냉정한 사람들입니다. 성 금요일에 갈바리아 언덕에서 일어났던 장면을 바라볼 수 있으면서도 자신의 작은 십자가는 땅에 던져 버리는 크리스챤들의 신앙은 분명히 약한 것입니다.


또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이 영원으로부터 계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하지 않고 화해하려고 힘쓰지 않으며 세상 물질에만 매달려 있는 사람들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구약의 도덕률을 너무 소심하게 준수했습니다. 그러나 참된 크리스챤에게는 그 이상의 것이 요구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절제한 자만심으로 인해서 그들은 스스로 멸망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원망하고 배척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죄의 용서와 화해를 설교하시고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잃었던 아들의 비유 말씀을 해 주심으로써 그들의 비판에 대답하셨습니다. 작은  아들은 단조로운 집안 사림에 지쳐서 잔소리를 퍼붓고 자기 책임을 회피하였으며 형을 시기하고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집을 등지고 멀리 떠나가 버렸습니다. 고향과 집을 등지고는 이따금 남의 집 대문을 두드리고 동냥을 청하거나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금전과 건강을 낭비했습니다.




머지 않아서 돈이 떨어지고 자기 주위에 있던 여자들도 사라지고 음악도 끝났습니다. 어느 고요하고 추운 방 마지막 희미한 희망의 빛이 그의 머리에 떠오르고 속태우며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습니다. 복음에 나오는 작은아들은 자기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며 일어나 고향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 놓기 시작했습니다. 겸손하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와 화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잘못을 뉘우치고 집으로 돌아온 작은아들의 귀가는 큰아들의 시기와 분노로 인해서 난관에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의 자비는 모든 것을 포용하고 용서했습니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크고 관대하기 때문에 아들의 잘못을 모두 용서하고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큰아들은 분개하였습니다. 큰아들은 자신의 충성심을 자랑했지만 그에게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집으로 돌아온 동생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 비유에서 잘못을 용서해 주는 아버지는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제 마음으로 살아간 아들은 그리스도께서 교제하시는 죄인들입니다. 아버지께서 충성스럽지만 돌아온 동생을 용서해 주지 않는 형은 그리스도와 죄인들과의 교제를 분개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입니다. 오늘 이 복음은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와 화해할 수 있다는 희망의 희소식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낭비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남용하고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며 타락의 심연에로 내려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대죄를 범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이 갈기갈기 찢겨진 것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자비와 용서의 두 팔을 넓게 벌리고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지상에서 우리의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우리는 화해의 성사 곧 고백의 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용서를 받고 자비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훌륭한 고백의 성사는 새로운 행복과 생명의 시작입니다. 피를 흘리고 아프고 쑤시고 지치고 상처받은 인간의 마음은 이해와 용서를 필요로 합니다. 고백의 성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더욱더 새롭게 인식하고 이 성사를 자주 받음으로써 특별히 이 사순절 동안 우리 영혼에 풍성한 은총이 내리도록 열심히 노력하기로 결심합시다.  아멘.












29.           사순 제4주일   루가 15,1-32 (다) 아버지께로 돌아가자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여호 5,9a.10-12 (하느님의 백성은 약속된 땅에 들어가서 과월절을 지낸다)


제2독서 Ⅱ고린 5,17-21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워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해 주셨습니다)


복 음 루가 15,1-3.11-32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다)




고향을 찾는 자녀들의 마음은 언제나 항상 따뜻하고 편안합니다. 요즘 명절 때에 고향을 방문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차를 손수 운전할 경우 평시의 근 세배 이상의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도 그 길고 지루하고 따분한 여행길이지만 신바람이 납니다. 지루한 줄을 모릅니다.




고향이 좋은 것은 그곳에 부모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누울 자리가 있으며 수고하지 않아도 그곳엔 먹을 음식이 있습니다. 살기가 외로웠던 자들은 거기서 힘과 위안을 얻으며 살기가 또 좋았던 자들은 거기서 편안한 휴식을 즐길 수가 있습니다. 고향은 그래서 언제나 따뜻한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를 탈출하여 시나이 반도에서 헤맬 때 그들은 살기가 참으로 팍팍했습니다. 약속의 땅이라는 곳이 걸어서 나흘이면 도달할 수 있는데도 거길 못 들어가고 40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외롭게 한다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불평도 많이 했고 싸움도 많이 했으며 하느님께 죄도 많이 지었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들이 약속의 땅에 도착했을 때는 실로 감회가 깊었습니다. 이젠 누울 자리가 있고 편하게 쉴 자리가 있었습니다. 땅도 절도 없이 남의 나라 땅에서 빌어먹고 헤맸던 생각을 하면 그야말로 천국이요 낙원이었습니다. 오늘 1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감격의 첫 과월절을 지내는 모습이었습니다.




과월절은 이스라엘이 에집트를 탈출한 사건을 기념하는 축제로서 그들에겐 가장 큰 명절입니다. 과월이란 다시 말해 ‘빠스카’를 말합니다. 죽음이 그들을 건너간 사건, 즉 양의 피를 문에 바름으로써 아들을 잃는 대 참극을 건너갑니다. 여기서 우리도 건너가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아버지께로 건너가면 바로 지옥 같은 생활을 우리가 건너가는 것이 됩니다. 오늘 복음이 그 내용을 여실하게 보여 줍니다.




복음에 등장되는 작은 아들은 나름대로 포부가 있고 꿈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분명히 아버지의 돈으로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술과 창녀와 노름으로써 다 탕진해 버립니다. 그 숱한 재산을 일시에 날려 버리고 알거지가 됩니다. 이제 끝장이었습니다. 완전한 파산이었습니다. 그래도 희망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비록 아버지의 돈을 다 탕진했지만 그러나 그 아버지께만은 희망을 걸 수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내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아무리 잘못했다 해도 부모는 자녀를 내쫓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잘못했다고 두 손 빌며 들어오는 아들을 난 모른다 하고 외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작은 아들은 아버지를 찾아갑니다. 염치불구하고 돌아갑니다. 머슴으로라도 좋으니 아버지 집에 살게 해달라고 빌기 위해 돌아갑니다.




그런데 묘한 일입니다. 작은 아들이 생각할 때 “넌 내 아들이 아니다. “하시며 내쫓으실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그 못난 아들이 돌아온 것을 아버지께서 그렇게 기뻐하십니다. 그처럼 기뻐하시는 모습을 이전에 뵌 일이 없습니다. 말썽꾸러기 아들이 돌아왔다고 큰 잔치까지 베푸십니다. 그러나 이것이 정상입니다. 왜냐하면 아들이 그 죄의 생활을 청산하고 아버지께로 온전하게 건너갔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은 빠스카의 시기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건너가신 사건만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은총의 생활로 직접 건너가는 시기입니다. 그런데 건너가기 위해서는 자기를 꽁꽁 묶고 있는 어떤 것을 끊어 버려야 합니다. 매섭게 잘라 버려야 합니다. 하다못해 손가락이라도 자를 만한 용기와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죽음의 강을 건너갈 수 있습니다.




언젠가 서울에서 승용차를 탔는데 마침 산부인과 의사의 차를 빌어 타게 되었습니다. 전 그때 그가 산부인과 의사라 해서 마음에 좀 긴장이 되었습니다. 저 사람이 분명히 낙태 수술을 밥먹듯 할 사람인데 어떻게 그 무거운 대화를 차마 꺼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세상 돌아가는 얘기만 하면서 그 문제는 덮어 버리려고 하자 뜻밖에도 그 쪽에서 먼저 얘기를 꺼내더니만 속시원한 고백을 털어 놨습니다.




자기는 산부인과를 선택할 때부터 그런 수술은 안 하기로 작정을 했답니다. 가끔 동료들이 빌딩을 짓는 것을 보고 수술이 과연 돈이 크구나 라는 생각은 가졌지만 그러나 조금도 부러워한 적이 없으며 또한 자신의 행위를 후회해 본 적도 없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자랑스럽고 시원했으며 하늘 아래 세상 떳떳하니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잘못된 행위를 끊고 올바른 삶의 길로 돌아서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자주 돈에 묶이고 일에 끌려 다니며 술에 젖거나 노름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상한 쾌락에 자신의 인생을 가두기도 합니다. 사순절은 그 모든 것을 끊어 버리고 새 생활로 돌아서는 시기입니다. 돌아설 때 우리는 부활의 참 생명을 참되게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갑시다. 그 길은 행복한 길입니다.












30.        사순 제4주일   루가 15,1-31 (다)  돼지우리 속에서 얻은 깨달음


강영구 신부




오늘은 사순 제4 주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너무나도 유명한 잃었던 아들의 비유 혹은 탕자의 비유를 듣게 되었습니다. 사순절이 깊어 가는 이 시점에 이런 비유 말씀을 듣게 되는 것은 참으로 큰 축복이요 은총이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오늘 이 비유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은 어떤 분이며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밝히고 계십니다.




예수는 비유 이야기 속의 아버지를 통해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작은아들과 큰아들의 모습을 통해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밝히고 계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는 오늘 비유 말씀으로 하느님은 아버지라고 가르치십니다. 하느님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참으로 단순하고 실재적입니다. 예수는 당신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교리나 사상 혹은 이념 따위를 가르치려 하시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단순하고 실제적인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에 대하여 이러저러한 분이라고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가르치는 하느님은 아버지와 같은 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가 가르치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먼저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이 땅에 우리의 생명을 낳아 주신 분이 아버지이듯이, 하느님은 우리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생명의 근원이실 뿐 아니라 필요한 모든 것을 베풀어주시는 분입니다. 마치 이 땅의 아버지가 우리를 낳아주시고 길러 주시고, 또 교육을 시켜 주심으로써 우리가 바로 설 수 있도록 해주신 것처럼,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그런 분이십니다. 비유 말씀에 나오는 아버지는 작은아들에게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자신에게 돌아올 유산을 요구하였을 때 아버지는 그것들을 모두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적인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았고, 지금 누리고 있는 젊음과 건강을 받았습니다. 시간을 받았고 재물을 받았습니다. 재능과 재주를 받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 땅에서 나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고, 우리는 잠시 이 땅에 머무는 동안 그것들을 누릴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어느 날 이 땅을 떠나갈 때 이 사실을 절감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토록 애지중지하면서 잘 먹이려 하고 잘 입히려 하고 예쁘게 가꾸려고 하는 이 몸뚱이마저도 버려야 할 날이 올 것이고, 그 때는 그 모든 것이 나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었음을 절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 우리는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가는 사람들을 봅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난 작은아들은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작은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을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하였고, 먼 도시로 떠나가서 친구와 창녀와 더불어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그 모든 것들을 탕진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그의 불행의 근원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기다리시는 분, 자비와 용서, 사랑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심정은 부모 되시는 여러분의 심정과 다를 바 없습니다. 여러분이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 잘되기를 바라고, 멀리 떠나간 자식을 걱정하듯이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버릇없고 돼먹지 않은 자식이라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오면 부모인 여러분은 그 자식을 용서하고 받아 주실 것입니다. 예수는 오늘 비유 말씀에서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그런 분이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부모인 여러분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조건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낳은 자식이니까 조건 없이 사랑하듯이, 하느님도 그런 분입니다. 우리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돌아가기만 하면 이유 없이 받아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죄가 많은 사람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깨닫고 그분께로 돌아가느냐 돌아가지 않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작은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갔을 때, 아버지는 그렇게 더러운 그를 껴안고 입맞추고 목욕을 시켜 주고 신발을 신겨 주고 그의 손에 가락지를 끼워 주고 그리고 소를 잡아서 잔치까지 베풀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작은아들은 아들로서의 지위를 다시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작은아들이 아들로서의 지위를 회복하여서 아버지 집에 살게되는 것은 그가 잘했기 때문이거나 잘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아버지 앞에 자랑할 만한 것도 또 내어놓을 만한 것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가 아버지 앞에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를 배신한 것과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것과 아버지의 가슴에 큰 상처를 안겨준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아버지의 집에서 아들로서의 새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과 용서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의 처지입니다. 하느님 앞에 별로 자랑할 만한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나날의 삶은 죄의 연속이요 상처투성이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우리의 죄 많음과 상처투성이의 삶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과 용서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언제나 하느님은 우리를 받아주시고 용서하시고, 또 당신 자녀로서의 지위를 회복시켜 주셔서 새 삶을 누리게 해주십니다. 우리가 죄인이지만 절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한편, 예수께서는 오늘 이 비유 말씀을 통해서 인간이 무엇인지도 설파하고 계십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을 떠나는 인간은 비참 그 자체이며, 멸망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가 가르치는 대로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하느님을 떠나면 아무 것도 아닐 수밖에 없습니다 말하자면 존재의 근거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작은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산만 있으면 아버지가 없어도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또 유산이 언제까지나 자기 수중에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우리가 누리는 것들 곧 하느님으로부터 유산으로 받은 것들 중에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젊음도 건강도 재산과 돈도 끝내는 우리의 목숨마저도 어느 날엔가 사라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작은아들이 불행한 처지에 떨어지게 된 것은 잠시 지나가고 말 것들에 희망을 걸었고, 그것들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착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의 품을 떠나도 또 아버지의 집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그것 역시 착각이었습니다.




그의 수중에 돈이 있고 재산이 있었을 때 그는 신나고 재미있게 살았습니다. 그의 주변에는 친구들도 많았고 여자들도 많았습니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그에게 필요 없었고, 아버지의 사랑 따위는 거추장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아닌 친구들과의 즐거움과 창녀와 더불어 누리는 방탕한 삶으로도 얼마든지 행복하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지니고 있었던 모든 것들은 찰나의 향락은 줄 수 있었지만, 참 기쁨도 행복도 주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은 사라지고 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작은아들은 뒤늦게나마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가 모든 것을 잃고 돼지우리에서 돼지와 함께 자고 돼지가 먹는 썩은 음식 찌꺼기를 먹으면서 배고픔을 달래고 있을 때, 그의 눈이 열리게 됩니다.




작은아들은 빈털터리 벌거숭이가 되었을 때,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믿었던 재산과 돈, 젊음과 건강이 얼마나 허망하게 사라지는 것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사람이란 또 얼마나 믿을 수 없는 존재인지도 깨달았습니다. 그의 수중에 돈 있고 재산도 있을 때는 파리 떼처럼 몰려들었었지만 수중에서 돈이 떨어지자 모두가 떠나가고 배고픔을 달래 줄 친구 하나 없었던 것입니다. 세상 인심은 그토록 야박한 것입니다.




그는 비로소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아버지의 집이 어떤 곳인지, 그리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는 자기가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아버지의 품과 아버지의 집이라는 사실을깨닫게 됩니다.


  큰 깨달음을 얻은 그는 아버지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됩니다. 그는 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 아들의 이 말은 살려 달라는 부르짖음이기도 하지만, 깨달음을 얻은 사람의 절규이기도 합니다. 그는 사랑 크신 아버지의 자비와 용서로 새 삶을 얻게 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지금 우리가 지내는 사순절은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회개의 계절입니다. 우리의 죄 많음과 나약함에 실망하지 맙시다. 자비하신 하느님, 사랑과 용서로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느님께로 돌아갑시다. 그러면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새 삶을 주실 것입니다. “어서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 잡아라. 먹고 즐기자.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 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












31.   사순 제4주일   루가 15,1-3. 11-32 (다)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느님


유영봉 신부




묵상 : 내가 믿고 있는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이신가? 혹시 예수님이 계시해주신 하느님과는 너무나 다른 하느님을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하느님은 죄인과 잃어버린 자들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다. 회개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서글픈 현실


어머니들이 앉아서 열심히 맞장구를 치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요즘은 영감 할멈 늙어서 먹고 살 것 딱 챙겨놓아야지, 괜히 자식들한테 다 주었다가는 큰일나! 암 그렇고 말고!’ 이구동성으로 같은 생각이다. 핵가족화 되면서 자식들이 부모님을 모시기를 꺼리다보니, 이제 부모들도 할 수 없이 스스로 자신들의 노후를 걱정하게 된 것이다.




예부터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할 때에는 항상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을 예로 들었다. 그런데 부모 자식간의 사랑마저도 장사꾼적인 거래가 된 것 같은 요즘의 세태를 보면, 어쩐지 세상이 삭막해진 것 같아 서글퍼진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방탕한 생활로 가산을 탕진하고는 뉘우치며 돌아오는 작은 아들을 무사히 살아왔다하여 무조건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아버지보다는 큰아들의 태도가 더 마음에 들지도 모른다,




비유의 배경


루가복음은 ‘잃었던 아들’의 비유와 함께, 아흔아흡마리를 들판에 둔 채 잃은 한마리 양을 찾아 헤매는 목자의 모습을 전하는 ‘잃었던 양 한마리'(루가 15, 1-7)비유와, 잃어버린 은전 한닢을 찾기 위해 집안을 온통 쓸며 샅샅이 뒤지는 아낙네의 모습을 전하는, ’잃었던 은전'(루가 15, 8-10)의 비유를 들려준다.


이것들은 신약성서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유들이라 할 수있다. 그런데 이 비유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나누고 있구나!”(루가 15,2)하며, 예수님을 비난한 후에 말씀하신 것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이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고


당당히 말씀하셨다.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회개하는 아들이 아니라, 그 아들을 큰사랑으로 용서하시는 사랑 지극한 아버지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시려고 이 비유를 들려주셨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사랑이신 하느님’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흔히 하느님은 전능하시고 전선(全善)하시고 영원하신 분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것보다 더 나은, 하느님께 대한설명은 없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시다. 우리는 계시의 완성이신 예수님의 언행을 통해, 이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창녀와 함께 대표적인 죄인 취급을 받던 세리 마태오를 제자로 삼으셨고(마태 9,9-13), 세관장 자캐오의 식사 초대에까지 기꺼이 응하셨다(루가 19,1-10).




그리고 간음하다 들킨 여인에게 “나도 네 죄를 묻지 안겠다 ….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하시며 용서해 주셨고(요한 8,1-11), “잘못한 형제를 일곱번 뿐만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라”(마태 18,22)고 하셨다. 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을 우리 죄인들을 위한 속죄의 제물로 내놓으셨다.


전 복음서를 통해서 계시되는 하느님은 ‘잃어버린 자들과 죄인들을 특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일찍이 신학자 한스 킹은 “예수님은 인류역사상 ‘죄인을 사랑하는 하느님’을 가르치신 유일무이한 분”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모든 종교는 ‘죄인을 벌하는 신(神)’을 가르친다. 오직 예수님만이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가르치셨다.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과 당시 지도자들이, 서로 다른 하느님을 믿는 신관(神觀)의 차이로 빚어진 것이다. 예수님의 온 생애는 사랑이신 하느님을 가르치기 위한 생애였다고 할 수 있다.




참 회개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다


오늘 복음의 탕자(蕩子)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하며 아버지께로 발길을 돌려 회개하게 된 근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신뢰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이 믿음보다, 더 크고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신이 미워지는 죄의 무게를 떨치고 다시 일어서게 하는 것도, 온갖 시련을 사랑의 채찍으로 알고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것도, 나날이 늙어 죽음에로 향하고 있는 삶의 공허를 견딜 수 있는 것도, 작은 일상의 삶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도 모두 이 믿음에서 오는것이 아니겠는가? ‘


나는 참으로 하느님께서 무한한 사랑자체이심을 얼마나 느끼고 있는가? 하느님의 사랑을 믿을 때, 어떤 죄도, 어떤 시련도, 죽음까지도 우리를 절망시킬 수 없는 것이다. 구원의 역사는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더욱 풍부하게 내렸다”(로마 5,20)는 이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뉘우치기만 하면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다. 타당한 부활 판공으로 진정한 부활을 준비하자. 지금이 바로 회개의 때요. 구원의 때다.












32.         사순 제4주일   루가 15,1-32 (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겠습니다.


서경윤 신부




나는, 성서에서 큰아들과 작은 아들 얘기를 읽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성서에서의 장남은 항상 충실하고 작은 아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내가 장남이기 때문에 성서에서도 확인해주는 충실한 아들이 된 기분이며, 성서도 내편인 것 같아서 더욱 기분이 좋습니다



마태오 복음 21장에도 두 아들 얘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먼저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여라’하고 일렀다. 맏아들은 처음에는 싫다고 하였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가서도 같은 말을 하였다. 둘째 아들은 가겠다는 대답만 하고 가지는 않았다”


  그리고 오늘 성경에서도 큰아들은 아버지 집에서 충실히 일 하는데, 작은 아들은 자기의 몫으로 유산을 미리 받아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배가 고파서 허덕이다가 나중에는 체면 불구하고, 아버지 집에 돌아오는 불쌍한 아들의 얘기를 전해줍니다. 다만 마지막에 큰아들이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동생을 받아들이지 않은 속 좁은 형의 마음이 거슬립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은 둘 다 똑같은 자식이며, 그들의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말은 안했지만 아버지는 한시도 작은 아들에 대한 생각과 걱정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어디서 무얼 하는지, 몸은 성한지, 객지에서 얼마나 고생하는지, 살아있다면 이렇게 소식이 없을 순 없을 텐데, 오랫동안 소식이 없는걸 보니 혹시 죽지는 않았는지, 죽었으면 죽었다는 소식이라도 있을 텐데, 그렇다면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다시 궁금하고 아무런 연락도 없는 작은 아들을 괘씸하게 생각하다가도 걱정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다리가 천리라더니, 동생 얘기만 나오면 나쁘게 동생을 욕하고, 그런 녀석은 고생을 해야 한다면서, 한번도 걱정을 같이 나누거나 찾아보려고도 하지 않은 큰아들이 원망스럽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 찾아 나서 볼까도 생각했지만, 엄두가 나지 않고, 다만 혼자 아들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며, 평소 아무에게도 말도 못하고, 다만 빨리 돌아와 주기만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버지의 심정은, 형도 이웃 사람들도 아무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지난날 그의 잘못만을 기억하며 그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생각하는 것조차 마음이 내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이 잔치에 참석하게 된 것도 마음은 별로 내키지 않지만, 아버지의 얼굴을 봐서 모였을 것입니다. 아무튼 동네 사람들이 모여 잔치하는 마당에서, 돌아온 작은 아들이 한마디 인사할 기회를 갖는다면 무슨 말을 할까? 돌아온 탕자의 인사말을 들어봅시다. “평소에 존경하는 동네 어르신네 여러분, 그리고 어릴 때 같이 자라던 친구 여러분!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만나게 돼서 반갑습니다. 아울러 저를 환영해주시고, 이렇게 자리를 함께 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제가 고향을 등지고 떠날 때에는, 내가 반드시 성공해서 부자가 되고, 큰 인물이 되면 돌아오리라 결심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세상일은 내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우선 내가 아버지로부터 유산으로 받은 돈이 내게는 아주 큰돈이었지만, 세상에 나가보니 별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에는 돈 많은 사람도 많았습니다. 사업을 시작해 보려니 할 만한 일은 자금이 부족하고, 그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시시해서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일단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시작은 했지만, 이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보다 큰 일에 대한 미련 때문에 마음이 들떠있는 상태에서 노름을 하게되었습니다. 재미 볼 때도 있어서 이대로만 나가면 일년 이내에 큰 재물을 모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습니다. 이 사이에 또 술을 많이 마셨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옛날부터 제가 술을 좋아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다 보니 자연 여자들도 가까이 하게 되었습니다. 돈의 위력은 대단했습니다. 내가 돈이 좀 있어 보이니까, 주변에 친구들도 많고 나를 사장님, 사장님! 하면서 여자들도 많이 따랐습니다. 그때는 세월 가는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매일 먹고 마시고 즐기며 향락에 젖어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게 별거 아니였습니다. 곧 얄팍하던 밑천은 바닥나고 굶을 지경이 되자, 그 많던 친구들마저 다 떨어지고, 죽내사내 하던 계집들 마저 다 외면하고 돌아서 버렸습니다. 모두들 나를 슬슬 피하는 입장이 되자, 나는 세상과 사람에 대해서 비로소 눈뜨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외롭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부터 나는 아버지와 형제들 그리고 고향을 그리워하기 시작했습니다.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면서도,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하여 쥐엄나무 열매를 먹으면서도 고향을 그리워하고, 부모 형제들을 생각했지만, 이 처량한 신세로 고향에 갔을 때, 나를 비웃을 여러분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고향으로 돌아 올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실 용기가 있어 돌아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배가 고파서 돌아 왔습니다. 내가 객지에서 한가지 배운 것이 있다면, 세상에 배고픈 서러움보다 더 큰 서러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깊은 서러움이 나를 아버지 집으로 들아 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나를 다시 받아주셨고 오히려 환영해 주셨습니다.




나는 지금 진한 골육의 정을 느끼며, 이 고마운 마음을 눈물로 밖에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나의 지난날을 깊이 반성하고 뉘우칩니다. 앞으로는 결코 아버지 품을 떠나지 않고 여러분을 사랑하며, 또한 사랑 받으며 고향에서 열심히 살겠습니다.


  지난날의 모든 것을 여러분께 용서 청합니다. 그리고 나도 지금까지 내가 미워하던 친구들과 여자들을 용서할 뿐 아니라, 결코 원망하지도 않겠습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 모두에게 용서들 청하며 아울러 용서해 주심에 감사 드립니다”.




이 동생의 연설을 내키지 않은 마음으로 끝까지 들었을 형의 착잡한 심정을 그려보며, 여태  내 나름대로 하느님 아버지률 섬기며 살았다고 자부하며, 다른 사람이 잘못 산다고 못 마땅해 하던 나 자신이 부끄럽고, 장자 된 것이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끝까지 아버지의 뜻을 따르며 살뿐 아니라, 용서하시는 자비로운 아버지를 원망하거나, 등을 돌리는 일이 없어야 할텐데‥‥












33.     사순 제4주일   루가 15,1-32 (다) 고독과 궁핍 속에 빠진 탕아의 희망


조정래 신부




사순 제4주일입니다. ‘시작은 반’이고 벌써 또 반이 지나갔으니, 사순절도 거의 다 지나간 셈입니다. 비록 부드러웠지만, 내 마음을 강하게 흔들었고, 많은 다짐과 각오를 했던 ‘재의 예식’ 때의 기억들이 많이 흐려지고,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죽음을 묵상한다는 것은, 죽음이 좋아서 그 죽음 자체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주어진 현재의 삶을 보다 충실하게 살고자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아버지를 떠난 작은 아들의 자유


마찬가지로, 사순절에 보속과 극기, 희생과 기도로 시간을 보내고자 한다면, 그것은 그 옛날 당하셨던 예수의 육체적 고통을 생각하며, 침울과 암담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고, 진실된 보속기간 후에 있을 건강하고 밝은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기에, 우리가 보내고 있는 사순절의 시간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들려오는 독서와 복음 말씀은 자칫 침울해지기 쉬운 사순절의 분위기를 본래 목적에 맞게 희망의 모습으로 바꾸어줍니다.




흔히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일었던 아들’에 대한 복음 말씀은, 성서에 나오는 여러 가지 비유 중에서도 특히 우리의 마음을 더없이 뿌듯하게 하는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의미는, 다른 비유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풍부하고 그리스도교 안에서의 삶과 영성이 깃들어져 있습니다. 용서와 화해!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신의 재산의 몫을 미리 요구하며, 아버지의 마음에 큰 상처를 입히고 집을 떠나버립니다.


너무나도 이기적인 작은 아들의 모습은 사실,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우리 역시 복음의 작은 아들처럼 하느님과 부모와 이웃 형제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우리는 우선적으로 우리의 몫을 챙기기에 급급합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작은 아들에게, 아버지라는 존재는 이제 더 이상 별 의미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자유로운 삶을 위해서 아버지는 거추장스럽고 불필요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작은 아들은 자기 재산의 몫을 챙겨서, 아버지의 보호를 떠나 먼 땅으로 떠납니다.


이제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자신이 마음대로 자신을 결정하고, 자기 마음껏 행동할 수 있는 속박 없는 세상으로 떠났습니다. 이제 환경의 구속과 윤리적인 속박에서 탈출하여, 오로지 자신의 자유에 자기의 몸을 내맡깁니다.




땀흘려 얻지 않은 재산은 쉽게 나가고, 인간의 욕심을 채우는 데는, 세상의 모든 재물이 부족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마침내 작은 아들은 자신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재산을 다 써 버립니다.


돈과 함께 있던, 돈 때문에 있었던 주위의 모든 것은 이제 하나 둘 자신을 떠나버립니다. 이제 그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즐거움이 아니고, 외롭고 쓸쓸함이며, 쾌락과 웃음은 가고 죽음보다 더 깊은 고독과 배고픔만이 자신의 미래가 되었습니다.




용서를 받아들일 믿음과 겸손


이제 만나게 되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작은 아들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몰골을 들여다 보게 됩니다. 자신 스스로도 용납되지 않고, 타인에게도 용서받기 힘든 처지, 그야말로 바닥에 서 있는 비참한 자신의 모습입니다. 이제 그에게 주어진 가능성은 오직 한 가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뿐입니다. “나는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 그러나 사정해 보리라. 무릎을 꿇고 눈물 흘리며, 진정 나의 잘못을 빌고 용서를 청하리라‥‥.”




작은 아들은 자신의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아버지의 집을 찾습니다. 이처럼 참된 회개는, 자신의 죄를 깨달음에, 나아가서 하느님의 크신 사랑, 즉 용서해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돌이킬 수 없는 부정으로 보고, 절망하고, 낙담할 때 회개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용서와 화해는 주고받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이 뿐 아니라, 용서를 받아들이는 이의 태도가 진정 겸손하고 순수할 때, 참된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방황을 끝내고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환영을 합니다. 자신이 싫다고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들, 때로는 원망스럽고 실망했던 아들, 그러나 하루도 잊어본 적이 없던 바로 그 아들이, 그저 살아 돌아왔다는 것만으로 아버지에게는 더 없는 기쁨이고, 행복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작은 아들이 해야 하는 것은, 아버지의 사랑과 호의를 잘 받아들이고, 감사드리며 열심히 사는 것 뿐 입니다.




이때, 큰 아들이 나타나 아버지께 억울함과 분노와 섭섭함이 뒤섞인 말투로 불공평한 아버지의 처사를 원망합니다. 그러나 이는 작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후한 처사를 원망한다기 보다는, 자기에겐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상대적 인 사랑에 대한 불만입니다.


  또한 큰 아들은 지금까지 진정 자기 자신과 자신의 환경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행복을 바라는 아버지


우리는 이처럼 자주 큰 아들의 태도를 취합니다. 아버지의 큰 사랑과 넓은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고, 질투와 소외의 감정에 자신을 낭비시킬 때가 많습니다.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뿐 아니라,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모두의 아버지입니다. 아버지가 바라는 것은 나뿐 아니라 너, 그리고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또한 나의 옳음이 너의 그릇됨을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되지 못합니다. 내가 판단한 죄인과 하느님께서 판단하시는 의인은 의외로 같은 사람일 수가 충분히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지금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버지께 돌아간다고 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처음 창조하셨을 때의 나 자신으로, 세례성사 때 그리스도의 빛의 도우심으로 새로이 태어날 때의 나 자신으로, 흔배성사 때 서로에게 반지를 끼워주며 약속하던 그때의 나 자신으로, 신품성사 때 땅에 엎드려 주님께 봉헌하던 순수함의 모습으로 우리는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정말 우리가 자신을 만나고, 아버지께 돌아가려고 할 때, 이미 우리의 과거는 하느님 앞에서 무력해지고 말 것입니다.


용기를 가집시다. 오로지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믿고 다시 아버지께 돌아갑시다.


“죽었던 아들이 살아왔다. 잃었던 아들을 찾았다!”












34.           사순 제4주일   루가 15,1-32 (다)  인자하신 아버지


홍금표 신부




지난주 「한겨레 21」이란 잡지에 흥미로운 주제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진리가 오류를 관용해야 하는가?」하는 문제였다.


저자인 이상수씨는 종교적 진리의 관점에서 「내가 알고있는 명명백백한 진리 때문에 행해져 온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보면서, 종교적 신념 뿐 만 아니라, 사회 과학적 진리와, 자연과학적 진리마저도 명백히 오류라고 여겨지는 논리에 대해서조차도, 일단은 관용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명백한 오류로 여기는 1+1=3임을 고집하는 사람에 대해서조차도, 서로 같은 판단기준을 공유하고 있다면, 그와 대화해야 하고, 만일 판단기준이 다르다면, 먼저 판단기준에 대해 토론해야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주장하기를 진리가 오류를 관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인류의 사유와 문화를 더욱더 풍요롭게 할 수 있고, 새로운 사유의 길을 찾아낼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늘 복음은, 잃은 아들을 되찾고 기뻐하는 아버지의 비유이다.


아마도 복음서 중에서도 강도 만난 사람의 비유와 더불어,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반향을 일으키는 이야기이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간단하다.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상속받아, 그 재산을 다 탕진하고 난 후, 회개하고 아버지께 돌아오고, 인자하신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받아들이고, 잔치를 베푸는데, 큰아들이 못 마땅해 한다는 이야기이다.




간단한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기에 나오는 큰아들과 작은 아들이 누구인가 하는 점과, 오늘 복음의 중심이 누구인가를 안다면, 오늘 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먼저 오늘 복음의 중심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 : 한때는 이 비유를 탕자의 비유, 잃었던 아들의 비유라고 하여 작은아들에게 초점을 맞추기도 했으나, 어디까지나 이 비유의 중심은 방탕한 아들이나, 그의 회개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비유의 중심은 다름 아닌 아버지이다. 돌아오는 작은 아들을 반기는 아버지의 모습과, 불평하는 큰아들을 설득하는 인자하신 아버지의 모습이, 바로 오늘 복음의 중심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나오는 큰아들과 작은 아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인데, 이 문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신 계기와 그 뜻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제이다.




오늘 복음 전반부에도 나오지만 예수님이 이 비유를 이야기하신 목적은, 자주 죄인들과 어울리고 식사하시는 모습을 보고, 「저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가지 나누고 있구나」하며 못마땅해하는 바리사이와 율사들의 의문에 대한 답을 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의 큰아들은, 스스로 의로운 체하는 바리사이와 율사들을 의미할 것이고, 복음의 작은 아들은 세리와 죄인들의 무리로 보면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때문에 오늘 복음을 통해 밝히고자 하는 의미는:  첫째로 하느님은 죄인을 멀리하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회개하는 죄인들을 반기시는 분이라는 점이다.


비유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리다가 먼저 달려가 포옹하는 아버지! 아들의 죄 고백을 채 끝내기도 전에, 큰 잔치를 베푸는 자비의 아버지이시다. 「돌아온 죄인을 당신의 사랑으로 덮어 주시는 것, 과거의 모든 일을 잊으시고 죄로 생긴 빚을 헤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죄인을 전보다 더 잘 대해 주시는 분」임을 이 비유는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바로 하느님은 죄인을 멀리하지 않으시고 회개를 기뻐하시는 분이 라면, 이제 우리는「죄에 대한 극단적인 민감성」은 자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내 안에 있는 작은 아들의 모습」의 인정과, 「하느님을 향한 방향 전환」이것의 실천이, 하느님의 큰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교훈은, 큰아들인 바리사이와 율사들도 하느님의 이 기쁨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리사이와 율사들이 하느님의 이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죄와 회개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가치관과 죄를 포용 할 수 없는 옹졸함 때문일 것이다.


율법의 자구적 해석과 철저한 준수만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었고, 그것을 진리로 믿고 있었기에, 이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 세리나 창녀와 소위 그들의 관점에서 본 죄인들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의 반대편에 선 것은, 그들의 윤리적 선악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하느님관과 죄와 회개에 대한 생각의 차이였으리라. 이점을 보면서 바리사이들이 율법에 대한 열정과 더불어, 진리도 오류를 관용해야 하는 좀더 넓은 관용의 정신,「자기가 동의하지 않는 생각을 용인하고, 견디는 똘레랑스」의 정신이 없음에 대한 아쉬움과, 옹졸한 큰아들의 모습이 오늘도 계속되는 현실 앞에 씁쓸함을 지울 수 없었다.




성급하게나마 결론을 내러본다. 우리도 인자하신 아버지를 본받아, 죄와 잘못에 대해 좀 더 넓은 관용의 정신을 가져 보자는 것이다. 왜냐 하면, 우리가 가지는 이 관용의 자리가, 하느님의 자비와 이웃의 만남을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새로 태어남」의 신비를 맛볼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35.         사순 제4주일  루가 15,1-3, 11-32 (다)  아버지이신 하느님


신은근 신부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는 언제 읽어도 감동적이다. 어리석을 정도로 착하고 어진 아버지의 모습 때문이다. 작은 아들은 재산을 억지로 물려받고 객지로 떠난다. 얼마나 기다렸던 가출인가. 돈을 쥔 그는 보이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아까운 돈을 물처럼 써버렸다. 어쩌면 아버지는 작은 아들이 재산을 달라 했을 때 몽땅 날리고 알거지가 될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렇게 해야만 정신 차리고 돌아올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돈이 떨어진 아들은 힘이 없었다. 돈 힘으로 살아왔으니 그럴 수밖에. 그는 인심도 잃어버린 듯 배가 고파도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돼지가 먹는 음식으로 배를 채웠다고 하니 자존심도 팽개쳤다는 표현이다. 인간이 비참함을 체험할 때 은총은 시작된다고 했다. 작은 아들은 처참한 상황에서 비로소 아버지를 떠올리고 집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한다. 돌아온 아들을 맞는 아버지의 모습은 어떠한가. 우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세 가지로 연상할 수 있다.




첫째는 꾸중하는 모습이다. 그래 이 녀석아 네가 그렇게 될 줄 알았다. 뭐 하러 왔느냐. 그 많은 재산을 어떡했느냐. 분노하는 아버지의 모습 앞에서 작은 아들은 무어라 답변할 수 있겠는가. 두 번째는 끝까지 침묵하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잘 왔다는 소리도, 재산을 어떡했냐고 묻지도 않는 차디찬 모습이다. 어쩌면 그것은 꾸중하는 아버지보다 더 아프게 작은 아들을 괴롭혔을 것이다. 세 번째는 복음에 나오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어떤 조건도 제시하지 않고 받아주는 바다 같은 아버지의 모습이다.




아버지는 하느님의 모습이다. 잘못을 저지르는 인간을 사랑으로 받아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이다. 인간은 언제나 잘못할 수 있다. 건강할 땐 건강의 고마움을 모르고 축복이 있을 땐 축복의 고마움을 잊어버린다. 언제까지나 건강과 축복이 떠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심한 경우 하느님의 도우심도 소용없다는 교만에 빠진다. 자신의 힘으로 충분히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앙도 은총도 하느님도 자기와는 무관하다는 착각에 젖어든다. 이런 모습의 출발이 복음에 나오는 작은 아들의 모습이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께로 돌아간다. 무력감과 비참함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별 이유 없이 건강이 나빠지고 계획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음을 경험한다. 때로는 철저하게 준비한 일이 어이없는 사건에 휘말려 실패로 끝나는 것을 목격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자신을 너무 믿은 결과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그분의 뜻은 외면하고 자기 뜻대로 행동했기에 나타난 결과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작은 아들은 평범한 사람의 모습이다. 그러기에 욕심 때문에 실패하고 자포자기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회개한 뒤에는 은혜에 보답하는 충직한 아들이 되었을 것이다. 아들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아버지 또한 회개를 기뻐했다. 누구에게나 작은 아들의 경험은 있다. 실패와 자포자기의 경험은 있다. 축복이 은총이라면 실패 또한 은총이다. 어떤 아버지든 아들이 잘 살기를 원하지 시련 속에서 좌절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실패의 체험이 은총이었음을 작은 아들의 비유에서 묵상해야 한다.












36.  사순 제4주일   루가 15,1-3. 11-32 (다)  무한히 자비롭고 사랑이 충만하신 아버지




오늘 복음말씀은 보통 「돌아온 탕아의 비유」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보다는「용서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무한히 자비롭고 사랑이 충만하신 아버지」께 그 초점이 맞춰져 있는 예수님의 비유 말씀입니다. 아버지를 부친(父親)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친할 친, 어버이 친(親)」자는, 「누군가가 나무(木) 위에 서서(立) 무언가를 바라본다(見)」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말씀에서「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가 달려가, 그 아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모습」과 너무 흡사한 내용입니다.




자신이 아직 생존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산을 미리 요구하여, 그 몫을 챙겨가지고 나간 불효막심한 아들이지만, 노심초사하시며 그가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셨던 아버지, 불순종과 온갖 죄악으로 만신창이 된 상태이지만 그래도 회심하여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작은 아들을 한마디 책망이나 책임추궁 하심 없이 온전한 자비와 사랑으로 끌어안으시며 잃었던 아들의 품위를 더 좋게 복구시켜 주시는 아버지는, 이렇듯 자식에게 좋고 친하신 분이신 것입니다.




이런 아버지께서 바로 우리의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은 우리들에게 위로와 희망이 됩니다. 작은 아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인간의 추하고 부정적인 면들을 보게됩니다.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고 무례하고 방종-방탕한 모습, 제 힘으로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함을 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에게서 참으로「의로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늦게나마 자신의 한계-부족함을 깨닫고는, 잘못을 반성하고, 진리에 겸손되이 순종하는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문득, 요즈음 극심한 경제난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웃들 생각이 납니다. 물론 그분들이 집나갔던 작은 아들처럼 무언가 잘못을 했기 때문에 그런 고통을 당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다만 「쥐엄나무 열매로도 배를 채우기 힘든」그래서 죽을 것만 같은 암담한 현실이지만, 그래도 오늘 복음의 작은 아들처럼 「하느님은 생명과 자비의 아버지이심」을 굳게 믿으며 그분께로 돌아가, 그분 안에서 더욱 힘을 내어이 위기를 잘 극복하실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리고「그래도 남들보다는 조금은 여유가 있다」고 생각되는 분들은, 오늘 복음의 큰 아들 안에서 귀한 교훈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큰아들은 외적으로 볼 때, 성실히 일하면서 아버지 집에 머물렀던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왠지 그에게서 많은 아쉬움이 느껴집니다.




외면적으로는 열심히 일하며 묵묵히 아버지께 순종한 사람 같지만, 사실 그 안에는 온갖 불만과 불평이 가득차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회심하여 돌아온 동생에게 아버지께서 호의를 베푸시려고 하자, 드디어 그 쌓였던 분노를 폭발시킴니다.




「종처럼 일한 나한테는 염소새끼 한 마리 주지 않더니, 저 몹쓸 동생에게는!‥‥ 하며 그는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합니다. 아버지의 후한 처사에 불평/반항을 하며 아버지와 동생모두를 거부합니다.


어쩌면 그는, 동생의 몫이 이미 떼어진 상태의 아버지 재산은 모두 자신의 것인지라, 자신의 것이 조금이라도 동생에게 나누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그러한 욕심에 그토록 어리석은 행동을 했었는지도 모름니다.




한번의 실수로 큰 죄를 지었으나 회개히여 겸손해진 작은아들에 비해, 비록 큰 죄를 짓지는 않았지만 자기의 틀을 깨지 못하고 옹고집으로 불평-분노하고 인색하게 구는 큰아들이 분명 더 못난 사람일 것입니다.




수원교구의 한 본당신자들이 자신의 월급에서 매월 1만원씩을 성금하여 이웃의 실직자 가정들을 돕고있다는 기사를 지난주 가톨릭신문에서 보았습니다.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는 말처럼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사랑과 마음의 나눔은, 본의 아니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 땅의 작은 아들들」에게 결코 작지 않은 힘과 희망의 싹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어쭙지않은 글을 이「복음생각」란에 올리면서 받는 원고료를 오늘부터는 그 실직자 가정을 위한 성금으로 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 마음 속에 남아 있는 「큰아들의 모습」을 정화시키는 한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37.  사순 제4주일   2고린 5,17-18 (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새해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느끼게 되고 또 새로움에 대한 어떤 기대를 가지게 된다. 개인 생활에서의 새로움 뿐만 아니라, 자기가 몸담고 있는 세상이 새롭게 변하길 바라게 된다. 이처럼 새로움에의 희망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인간을 버티게 만들고 삶의 생기를 찾게 만든다.




요즘 우리 사회 전체에 팽배해 있는 새로움에의 기대는 대단하다. 새로운 정권이 국민 투표에 의해 창출되면서, 사람들은 그동안 여러 요인에 의해 억제되었던 새로움에의 바람을 한껏 기대하고 있기에, 새로움을 향한 변화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만큼 새로움의 실상을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성서에서는 인간과 땅은 의복처럼 낡아지게 마련이지만(집회 14,7), 하느님 안에서는 언제나 새로운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스라엘인들은 종말이 되면 하느님이 개입하시는 표징으로 우주가 새롭게 변화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에 있어서 새로움에의 갈망은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는 징표로 여겨져서 계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새 일을 시작하시고‥‥ 사막에 큰길을 내시며, 광야에 한 길을 트시면서”(이사 40,3-5)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분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인간이 갈망하는 궁극적인 새로움의 주체는 바로 하느님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순간 인간들이 만든 제도나 어떤 행사를 통해 새로움을 얻을 수 있다는 착각 속에서 정열을 낭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날에는 어느 시대보다 우리 민족들에게 새로움에의 기대와 갈망이 큰 현실에서 크리스천들은 삶 안에서 참된 새로움에의 방향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주님께서 가파르나움 회당에서 하신 첫번째 설교가 청중들에게 준 충격은 그분의 말씀이 과거 다른 지도자들의 말과 달리 새로운 가르침이라는 것이었다. (마르 1,27)




사랑의 계명은 이미 구약에서부터 강조되어 왔으나, 이것이 하나의 형식적인 규범을 지키는 것이 됨으로써, 사랑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매력도 관심도 주지 못하는 낡은 것으로 퇴락했을 때, 주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 진실한 사랑의 길을 제시하셨고, 사랑에 식상한 사람들에게까지 신선한 충격과 감동을 줄수 있었다. (루가 l0,25-37)




교회 역사 안에서 그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삶의 형태를 시작한 사람들로서는 성인들과 수도회 창설자들을 들 수 있다.


우리는 성인들이나 수도회 창설자라고 할 때 얼른 떠오르는 것이 거룩하고 열심한 사람이라는 것이지만, 실제로 이들은 그 시대에 교회가 필요로 하는 새로움을 창조한 사람들이었다.




이처럼 교회 안에서 항상 복음적인 가치를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모습으로 재생되게 마련이고, 이것이 주위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작품’이라고 인정을 받게 된다.(에폐 2,10)




오늘 우리 사회에서 크리스천들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부각되고 있는 지 생각해 볼 일이다. 어느 시대보다 더 새로움을 갈망하고 있는 우리 이웃들이 우리의 새로운 삶의 모습을 보고 새로움의 원천이신 하느님께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 현대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복음선포가 될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 것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모두 다 하느님께로 부터 왔습니다,”(2고린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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